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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에서 탈출시켜 줄 히든영웅을 찾습니다-28화 (28/178)

28화

메데우스가 당황스럽다는 듯 나택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이내 곧 의중을 알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루할자게시 때문에 그러는 거면 걱정할 필요 없어. 부지휘관에게 이야기해 둘 테니 당분간은 그쪽의 일을 거들도록 해.”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저는……. 메데우스 님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간절한 나택의 눈빛은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당황한 메데우스가 의아하다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델람까지는 배를 타고 가야 해.”

“예, 알겠습니다!”

나택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배를 타든 걸어서 가든 교통수단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택의 시원시원한 답을 들은 메데우스는 더욱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테레시. 범선(돛을 단 배)을 타 본 적은 있어?”

나택의 경험을 묻는 거라면 당연하게도 없었다. 요트나 낚싯배조차도 타 본 적 없는 나택이 범선을 타 봤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솔직하게 답했다간 메데우스가 저를 놓고 갈 것 같은 불안감이 들끓었다. 나택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있습니다.”

수눈키에 작은 규모의 해상 전투도 있긴 했으니, 완전히 거짓말인 건 아니었다.

“범선을 타 본 적이 있다고?”

“네.”

“몇 번이나?”

……뭐지. 내가 타 봤다는데. 왜 저런 반응이지.

“한… 번……. 타 봤습니다.”

이 이상의 거짓말은 왠지 해선 안 될 것 같아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데 메데우스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도 따라가겠다고.”

배를 타는 게 뭐 그리 큰 문제여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한들 물러설 수 없었다. 나택의 머릿속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메데우스를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 차 있었다.

“예. 저는…… 메데우스 님의 시종이잖아요. 부지휘관님이나 다른 분이 아니라 메데우스 님을 보필하는 게 저의 일입니다. 곁에 있게 해 주세요. 함께 가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세요.”

“네가 맡은 시종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범선을 다시 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나와 함께 가고 싶다, 네 말이 이게 맞아?”

요점은 잘 정리했는데 뒤에 붙는 말이 좀 이상했다. 범선을 다시 타는 한이 있더라도? 범선을 타는 데 무슨 각오가 필요하기에……?

하지만 나택에게는 의문을 곱씹을 여유가 없었다. 행여나 메데우스가 거절할까 싶어 나택이 얼른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메데우스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짧게 실소를 흘렸다.

“…마음대로 해.”

메데우스는 의외로 순순하게 허락했다. 그게 오히려 나택의 마음을 찝찝하게 만들었다.

* * *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중요한 건 결과였다. 나택은 메데우스와 델람까지 함께 갈 수 있게 되었다. 출항까진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해가 지기 전에 필요한 물품들을 모두 챙겨야 했고, 그 뒤 저녁에는 메데우스의 시중도 들어야 했다.

바다를 건널 채비를 하기 위해 나택은 평소보다 더욱 바쁘게 시장을 누볐다. 그러고는 골목 한구석에 서서 갈대로 짠 바구니를 열었다.

“피막, 망토 두 개씩……. 수통은 이미 사 둔 게 있고. 과일이랑 등유, 샌들….”

손가락을 접어 가며 산 물건들을 체크했다. 다행히 빼먹은 물품은 없는 듯했다.

어느덧 해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상인들은 하나둘씩 가판대를 정리했다. 점술사의 골목에 선 나택은 좌우를 살폈다. 따라오는 이도, 방해할 만한 이도 없었다.

알록달록 치장된 골목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예약되지 않은 접선이었지만 점술사를 만나려면 지금밖에 시간이 없었다. 요란한 입구가 보이자 점술사의 탄식이 들렸다.

“오늘 장사도 거-하게 말아먹었네! 말아 먹었어! 누가 와야 등쳐 먹든, 뭘 하든 돈 빼먹을 구석이 있지. 하이고오……. 아악!”

테이블에 턱을 괴고 있던 점술사가 꽥 소리를 질렀다. 나택이 검지를 제 입술에 붙였다.

“쉿. 조용히 해요. 왜 이렇게 소리를 질러요.”

“그렇게 쥐새끼처럼 오는데 안 놀랄 수가 있어?!”

나택이 입술에 댔던 검지를 조금 더 격하게 흔들었다.

“목소리 좀 낮추고. 할 얘기 있으니까 안으로 들어가 봐요.”

영문을 모르는 점술사가 나택을 따라 주변을 살폈다. 그러더니 입구의 등을 끄고는 문까지 꼭꼭 걸어 잠갔다. 점술사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택과 마주 앉았다.

“뭐야. 뭔데 그래.”

나택이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캐릭터 카드를 꺼냈다.

“이거.”

플라스틱 카드가 스윽, 소리를 내며 점술사 쪽으로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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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의 아눈나키’

이름 : 이난나 테레시/ 직업 : 노예

수호신 :아누(Anu)

입장 S/N : N820 - A529 - 3286 - 317M

퇴장 PW : 수호신과 진엔딩 맞이하기

히든 스킬 : ? (지금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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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드디어 찾았네!”

점술사가 카드를 집었다.

“어디서 찾았어?”

“어딘가에서.”

나택이 한마디로 모든 과정을 압축했다.

“근처에 있었지? 내 말이 맞았지?”

나택이 고개를 끄덕이며 점술사의 손에서 다시 카드를 가져갔다. 그러고는 퇴장 PW란을 손끝으로 짚었다.

“이거.”

“수호신과… 진엔딩 맞이하기? 이게 뭐야.”

“그쪽이 보기엔 뭘 거 같아요?”

“흠……. 수호신하고 관련된…… 아이템을 몸에 지니고 진엔딩을 맞이하라는 건가? 아니면 수호신하고 관련 있는 사람하고 진엔딩을 맞이하라는 거야?”

“내 생각엔 후자 같아요.”

나택은 제가 캐릭터 카드를 얻을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삼나무 숲에서 겪었던 일과, 메데우스의 진짜 가문에 대한 이야기 등등. 점술사는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나택의 말을 경청했다.

“그쪽이 보기엔 어때요. 맞는 거 같죠? 메데우스 그놈이 퇴장 PW의 핵심인 게.”

“흐음…….”

점술사가 침음했다. 두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느냐, 마느냐가 달린 중요한 일이다. 그 때문인지 점술사는 답지 않게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진엔딩을 수호신과 맞이한다라……. 수호신이 상징적인 뭔가를 뜻하는 건 맞는 거 같아. 막말로 아누라는 신을 우리가 만날 수는 없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메데우스 그놈이랑 같이 진엔딩을 보라는 게 맞을 것 같은데…….”

두 사람의 고민이 테이블 위에서 엉켰다.

톡, 톡-.

나무판을 손끝으로 두드리던 나택이 물었다.

“어디 메모할 거 없어요? 종이 같은 거.”

“……수눈키에 종이가 어딨어.”

두 사람이 동시에 탄식했다.

빌어먹을 고대 문명…….

나택이 입바람으로 앞머리를 불며 말했다.

“그럼 뭐라도 좋으니까 필기할 것 좀 가져와 봐요.”

나택의 말에 점술사가 일어났다. 점집 안쪽에서 한참을 뒤적거리던 점술사가 웬 덩어리와 갈대 첨필(점토나 왁스판 위에 글자를 새길 수 있도록 만든 뾰족한 필기구)을 가져왔다.

“이것밖에 없어. 여기다 써.”

점술사가 테이블 위에 천을 깔고 그 위에 점토 덩어리를 올렸다. 말랑한 덩어리를 꾹꾹 눌러 제법 그럴싸하게 펼쳐 놓고는 나택에게 갈대 첨필을 내밀었다.

“뭐 해? 메모할 거 달라며?”

“…….”

나택이 느릿한 움직임으로 첨필을 받았다. 여전히 고대 문명에 적응하지 못한 나택과 다르게 점술사는 이곳 생활에 완벽하게 적응한듯해 보였다.

종이의 부재에 당황한 것도 잠시였다. 나택은 곱씹으며 외우고 있던 아누 신에 대한 문구를 적어 내려갔다. 점토 위에 새겨지는 글자는 당연하게도 한글 패치가 된 문자였다. 익숙한 글자를 보는 점술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쓰이는 내용을 읽을수록 점술사의 표정은 사뭇 진지해졌다.

“하늘의 신. 공정한 왕. 황금 뿔을 꺾은 용맹한 사자를 신뢰하라…. 그가 부리는 별 무리가 당신의 운명을 인도해 주리니……. 격전 속에서 승리를…… 이끌어 내리라?”

점술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택이 첨필을 내려놓았다.

“앞에 있는 내용은 아누 신에 관한 얘기였어요. 아누라는 신이 인도해 주는 대로 가면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 꼭 메데우스랑 붙어 다니면 진엔딩을 볼 수 있다는 말 같이 들리지 않아요?”

점술사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맞는 거 같아.”

나택이 다시 첨필을 들어 점토 위에 낙서를 하듯 느리게 움직였다.

인도자=수호신=아누

아누=아누 메데우스

메데우스=인도자

메데우스≠통일을 할 왕……?

점토판 위로 머리 두 개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점술사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나택이 쓰는 걸 자세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이거야. 왕이란 모름지기 자유민과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 법인데, 사실 그런 면에서 메데우스가 왕이 될 재목은 아니지. 성질 더러운 건 그렇다 쳐도, 보통 제 맘대로여야지. 우루크뿐 아니라 다른 도시 사람들한테까지도 소문이 좋지 않고. 한 나라의 대가리를 할 위인은 아니야. 하지만 장군으로서의 실력 하나만큼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지. 메데우스를 갖는 군주가 곧 메소포타미아의 왕이 된다고 보는 게 빠르겠어. 이놈이 이끄는 전투는 무조건 승리를 가져다줄 거야. 그 옆에 붙어 있으면 자연스럽게 6개 도시의 통일을 볼 수 있겠지.”

나택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끄덕였다. 이로써 메데우스가 두 현대인의 탈출을 도와줄 유일한 사람이라는 게 확실해졌다. 나택의 눈동자에 결의가 차올랐다.

“좋아요. 그럼 전 무슨 일이 있어도 메데우스 옆에 붙어 있을게요. 그쪽은요?”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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