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점술사가 입을 열었다.
“혹시 말이야. 유독 공략하기 힘든 도시라든가, 그런 거 있었어?”
점술사의 말에 나택이 기억을 헤집었다. 수눈키는 어떤 선택지를 고르냐에 따라 스토리가 조금씩 달라진다. 공략하는 도시의 순서 또한 스토리에 따라 바뀌었다.
그러나 6개의 도시국가 중에서 순서와 상관없이 나택이 매번 애를 먹던 도시가 있었는데, 하나는 북쪽에 있는 도시국가 움마였고, 또 하나는 메소포타미아 최남단에 자리한 도시국가 우르였다.
“……움마랑 우르요.”
“어허이. 나랑 비슷하네.”
점술사가 팔짱을 끼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내가 그 둘 중 한 군데를 가 볼게. 뭐라도 더 정보를 얻어야 실패 확률을 줄일 거 아냐.”
맞는 말이었다. 키보드나 두드리고 클릭질이나 하는 유저의 입장이었다면 행여나 정복에 실패했다 하더라도 다시 처음부터 플레이를 하면 되지만 지금은 아니다. 한 번 정복에 실패한 도시를 다시 공략할 기회가 주어질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나택이 말했다.
“혼자서 괜찮겠어요?”
“그쪽은 뭐 혼자가 아닌가? 뭐라도 해야 성공 확률이 올라가지.”
어쩐 일인지 오늘의 점술사는 지극히 상식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무래도 탈출의 성공 가능성이 가까워지자 드디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듯했다. 놈을 향한 미움과 원한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나택은 탈출에 성공하는 날까지 부정적인 감정을 잠시 미루어 두기로 했다.
나택이 말을 이었다.
“우르는 우루크랑 가까워서 동태를 살피는 게 어렵진 않아요. 게다가 구티족 때문에 안전하지도 않고……. 차라리 움마가 낫겠어요. 움마가 공략하기엔 까다롭지만, 이곳 도시국가 중에서 제일 조용하고 치안이 좋은 편이니까. 그쪽이 움마를 맡아 줘요.”
“좋아!”
어느새 점술사의 골목에도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나택이 의자를 끌며 일어났다.
“전 새벽 배로 델람에 갈 겁니다. 아마 한동안은 만나기 힘들겠네요.”
“핸드폰도 없는데, 연락은 어떻게 하지?”
“…….”
제 턱을 만지작거리던 나택의 시야에 점토판이 들어왔다.
“…이 가게, 그쪽 거 맞죠?”
“그럼! 정당하게 은을 주고 산 거라고!”
“그럼 서로에게 할 말 있을 때 점토에 내용을 써서 이 자리에 남겨 두는 거로 해요. 어차피 한글 알아보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을 거 아녜요.”
“오, 그래! 좋은 생각이야!”
점술사가 박수를 쳤다. 그러더니 글썽글썽한 눈으로 나택의 손을 꾹 잡았다.
“꼭…. 우리 꼭…. 꼭 돌아가자고.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돌아가자고!”
얼굴을 들이미는 점술사는 여전히 얄미워 보였다. 하지만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그르치기엔 나택뿐 아니라 점술사도 너무 절박했다. 이건 한시적 동맹이었다. 각오를 다지는 의미에서 나택 역시 남자의 손을 한번 힘껏 잡았다.
* * *
나택은 수학여행이나 소풍을 갈 때도 간신히 지각을 면하는 학생이었다. 이벤트에 기대감을 갖는 타입도 아니었고, 설레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매번 약속된 시간에 맞춰 아슬아슬하게 나가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 나택이라 할지라도 오늘은 예외였다. 알람 시계를 맞출 수도 없으니 혹여나 늦잠을 잘까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제때 일어나지 않았다며 메데우스가 저를 버리고 갈까 봐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메데우스와의 동행은 나택이 탈출을 하느냐, 마느냐가 달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잠 안 잤어? 상태가 왜 이래.”
나택을 보며 메데우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말에 나택이 얼른 자세를 고치며 눈을 부릅떴다. 배에 탈 때까지는 절대 저를 놓고 갈 핑계를 만들지 말아야 했다.
“아닙니다.”
“…….”
메데우스가 나택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새벽 시간의 항구는 시끌벅적했다. 배에 오르는 두 사람에게 담가르갈 에무쉬가 다가왔다.
“메데우스 님! 와 주셨군요!”
“사람을 협박할 때는 언제고.”
“협박이라니요. 그만큼 메데우스 님을 초청하고 싶었던 저와 델람의 진심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오시겠다는 답을 받았지만, 혹시나 마음을 바꾸실까 봐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런 것치곤 얼굴이 좋네.”
“그럼요. 이렇게 메데우스 님이 와 주셨으니까요. 이쪽으로 오시죠.”
담가르갈이 공손하게 손짓하며 앞장섰다. 상선하는 길에 나택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짐을 배에 싣는 상인과 선원들은 기운이 넘쳐 보였다. 시스템이 적절하게 안내창을 띄웠다.
우루크의 항구 도시 ‘닐’에 진입했습니다.
이곳은 우루크의 동남쪽에 위치한, 우루크의 운하 도시이자 항구 도시인 ‘닐’이었다. 나택은 기억을 더듬어 닐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수눈키 속 지형은 실제 메소포타미아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페르시아만 해안선은 실제보다 내륙 쪽으로 파고들어 있었다. 바다는 더 넓어지고 땅은 좁아진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두 지류가 만나는 지점 역시 실제보다 북쪽에 있었다. 그 덕분에 거대한 닐 운하가 니누르타 가문의 소유가 될 수 있었다.
수눈키 속 닐은 번성한 시기의 이라크 항구 도시 ‘바스라’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또한, 크기로는 현대의 이집트 수에즈 운하와 그 규모를 나란히 했다. 무역 범선도 통과할 수 있는 거대한 물길이었다. 덕분에 동쪽 도시국가 델람은 거대한 무역선을 끌고 우루크 앞마당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수눈키를 오랫동안 해 온 유저였지만, 나택은 이제껏 우루크의 해안선이나 닐 운하의 물길 따위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시네마틱 영상이 나올 때마다 감탄하며 과자나 까먹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선 안 됐다. 나택은 더 이상 관람자의 입장이 아니었다. 새벽 항구의 풍경을 눈에 담을수록 현실이 피부에 와닿았다. 마음이 점점 착잡해졌다. 그 탓인지 걸음도 자꾸만 버벅댔다.
나택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며 보고 있던 메데우스가 한마디를 했다.
“테레시. 자꾸 한눈팔면 두고 간다.”
그 말에 나택의 감상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나택이 들고 있던 짐을 추어올리며 빠르게 답했다.
“죄송합니다. 닐에는 처음 와 봐서요.”
“범선을 타 본 적 있다고 하지 않았어?”
“예……?”
“라가쉬에서도 페르시아만으로 나가려면 닐을 통과해야 했을 텐데. 범선은 타 봤지만, 닐 운하는 처음 본다?”
“…….”
아차 싶었다. 이래서 거짓말은 즉흥적이어서는 안됐다. 배를 타 본 적이 있다는 거짓말이 이렇게 들통날 줄이야.
하지만 메데우스는 별 대꾸 없이 범선의 중앙에 있는 한쪽 자리를 눈짓했다.
“짐은 저쪽에 둬.”
메데우스가 가리킨 갑판 중앙에는 용도 모를 애매한 자리가 있었다. 성인 남자 둘이 누우면 끝날 것 같은 좁은 공간을 장막으로 두른 자리였다. 나택이 짐을 들고 장막을 걷으며 들어갔다. 안에는 고급스러운 천과 양모로 꾸민 소파와 작은 테이블이 있었다.
나택이 짐을 내려놓는데 담가르갈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대한 불편하지 않으시도록 자리를 마련해 보았습니다만, 여전히 누추합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세요, 메데우스 님.”
“내 이해는 델람에 도착하고 난 뒤에 구하는 게 나을걸.”
“델람에 도착하면, 지금의 불편한 마음까지 싹 잊으실 수 있도록 더욱 성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저도 그렇고, 공주님께서도 그러실 거고요.”
공주라는 단어가 나오자 메데우스의 홍채에 냉기가 돌았다. 메데우스가 노골적으로 아니꼽게 대꾸하는 데도 담가르갈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 정도면 공주가 아니라 담가르갈이 메데우스를 사모하는 지경 같았다.
펄럭-!
힘찬 소리를 내며 돛이 펼쳐졌다. 배가 출항 준비를 마치고, 선원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출항!”
우렁찬 소리와 들리자 나택의 눈앞에 시스템 안내창이 떴다.
델람으로 떠나시겠습니까?
짐을 풀던 나택이 허리를 펴며 실소를 흘렸다.
참 빨리도 물어본다…….
이제 와서 이런 질문을 하는 시스템이 어이없고 황당했지만, 나택이 할 수 있는 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당연히 간다. 메데우스 놈이 가는데, 내가 안 갈 수가 없잖아. 예스, 고.
마음속으로 대답하자 순간 나택의 귓가에 끼룩끼룩, 갈매기 우는 소리가 들렸다. 항해의 시작을 알리는 bgm이었다. 시스템은 메인 퀘스트를 안내할 때보다 출항하는 뱃머리에 더욱 성심껏 bgm을 깔았다. 그 음률에 맞추듯 선원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물의 도시, 황금의 나라. 비옥한 고원 할타미(신의 땅)에서 풍요를 알리네.
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땅은 강이 되고 강은 바다가 되어 나아가리라.
물의 신께서 이 땅에 자비를 내리시니.
끼룩-!
나택의 옆으로 갈매기 한 마리가 스쳐 갔다. 환하게 동이 트는 지평선을 보며 나택이 침을 꿀꺽 삼켰다. 나택은 수눈키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다른 도시국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두려워 말고 배를 띄워 앞으로 나아가자.
에아의 축복이 이 길을 밝히리라.
철썩, 파도가 배의 옆구리를 때렸다. 배가 물을 가르는 소리를 듣는데, 심장이 뛰었다. 기대와 두려움이 뒤엉켰다. 지금의 선택이 또 한 번의 분기점이 될 거란 확신이 들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메데우스가 있으니까.
나택이 심란한 속을 털어 내려 고개를 내저을 때였다. 담가르갈과 이야기를 나누던 메데우스가 나택을 불렀다.
“테레시.”
“예!”
나택이 얼른 메데우스에게 뛰어갔다. 불쌍한 이난나 가문의 노예, 그의 눈앞에 시스템이 또 한 번 밝은 빛을 띄웠다.
[메인]노예의 서 스토리가 완료되었습니다.
[메인]강과 바다의 노래 스토리가 시작됩니다.
본격적인 항해를 알리는 멘트였다.
나택의 선택은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 *
끼룩끼룩-!
항구를 떠나온 지가 언젠데. 이놈의 갈매기는 주변이 조용해졌다 싶으면 주기적으로 한 번씩 울음을 터트렸다. 시스템이 보내는 효과음 같았다.
메데우스는 담가르갈이 마련해 준 아늑한 의자에 여유롭게 있었다. 나택은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짐가방에서 수통을 꺼냈다. 수통에 담긴 시카르는 잔에 옮기고, 아침 식사 겸 간식으로 준비한 마른 과일은 그릇에 담았다.
우루크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택이 하는 일은 평소와 똑같았다. 하지만 몸의 상태는 그렇지 않았다.
“욱….”
나택은 동작을 이어 가는 중간중간 등을 들썩였다. 나택이 메스꺼운 속을 누르며 간신히 메데우스의 옆에 쟁반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테레시.”
“예. 메데우…. 우욱!”
목젖을 치고 욕지기가 올라왔다. 나택은 앞뒤 잴 것 없이 장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택이 난간으로 뛰어가는데 선원 한 명이 크게 소리쳤다.
“우루크의 시종님, 애라도 배셨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