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예.”
메데우스가 말을 할 듯 말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 타이밍에 배가 크게 출렁였다. 무방비하게 있던 나택의 몸이 그 바람에 허공에 떴다 가라앉았다.
“욱…….”
나택이 다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가라앉은 줄 알았던 토기가 훅, 치고 올라왔다. 메데우스가 손을 뻗어 나택을 다시 보듬어 주려는 찰나였다. 또 한 번 배가 크게 들썩였다. 허공에 떠 있던 메데우스의 손이 그 바람에 나택의 이마를 찰싹 쳤다.
“아.”
나택이 입을 틀어막은 채 인상을 찌푸렸다. 메데우스의 표정에 순간 당혹감이 스쳤다. 절묘한 타이밍 때문에 나택은 이게 메데우스의 실수였는지 고의였는지를 알아채지 못했다. 나택이 웅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건방진 소리를 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때리지 말아 주세요……. 속이 진짜 안 좋아서…….”
“내가 언제 널 때렸다고 그래.”
“방금이요……. 우욱.”
출렁-.
또다시 배가 심하게 요동쳤다. 나택의 반응에 메데우스는 황당하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가 이내 곧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 더 말하려던 메데우스가 결국 소리 없는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는 얇은 모포를 끌어 올려 나택에게 덮어 주었다.
“……시끄러우니까 입 다물어.”
“그럼 조금만 이렇게 있다 일어나겠습니다…….”
나택은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려는 듯 주먹으로 연신 제 가슴께를 쓸어내렸다. 웅크린 몸과 얼굴은 모포 속에 숨겼다. 그 와중에 죄송합니다, 를 연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의자에 기대려던 메데우스가 나택의 이마를 때렸던 제 손바닥을 빤히 보았다.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언젠가 비슷한 방식으로 찰싹 소리가 나도록 맞아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았다.
‘저놈한테 맞은 적이 있나……?’
메데우스가 나택을 보더니 제 입술을 매만졌다.
바다는 여전히 일렁이고 있었다.
* * *
끼룩끼룩, 갈매기 우는 소리가 장막 밖에서 맴돌았다. 시스템은 가는 내내 갈매기 BGM을 깔아 놓을 작정인 듯했다. 나택이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갈매기 소리가 먹먹하게 들렸다. 시스템이 내는 소리라면 귀를 막는다고 해서 데시벨이 줄어들 리가 없는데.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눈이 떠졌다.
헉.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나택이 부스럭거리며 상체를 일으키는데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이제 살 만해?”
메데우스가 턱을 괴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잠들기 전과 똑같은 풍경이었다. 담가르갈이 베푼 배려에 수혜를 입은 건 나택이었다. 장막을 두른 아늑한 자리에 폭신한 염소 털 쿠션까지, 메데우스를 위해 마련된 모든 걸 나택이 점령했으니 말이다.
현대사회에서의 나택은 이렇게까지 염치없는 짓을 남발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실수만 연발하고 있었다. 박박 우겨서 쫓아온 항행 길에서마저 하극상을 저질렀으니. 이래서야 면목이 없다.
“죄송합니…….”
나택이 허둥지둥 모포를 치워 내려는데 메데우스가 손등을 나택에게 내저었다.
“……?”
빨리 꺼지라는 건가.
올려다본 메데우스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나택의 눌린 머리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장막 밖에서 담가르갈의 목소리가 들렸다.
“메데우스 님. 도착했습니다.”
“기다려. 곧 나갈 테니.”
머리.
메데우스가 입 모양으로 나택에게 말했다. 그제야 나택은 얼른 눌린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 * *
배는 해가 떨어지기 전 델람의 항구에 닿았다. 우루크와 델람의 거리를 생각하면 매우 빨리 도착한 편이었다. 이는 수눈키 속 해류의 설정 때문이었다. 이곳의 페르시아만은 북에서 남으로 해류가 흘렀다. 유속 역시 북상보다 남하하는 속도가 훨씬 빠른 탓이었다.
수눈키는 항해하는 과정을 로딩 이미지와 짧은 영상으로 대체했다. 때문에 나택은 실제로 항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까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이렇게 금방 도착할 줄 알았으면 눈에 막대기를 꽂아서라도 졸지 말고 버텼어야 하는 건데.
나택은 부랴부랴 짐을 챙겨 장막 밖으로 나갔다. 가림막이 사라지자 부둣가의 바다 내음이 훅 끼쳐 들었다. 메데우스를 따라 하선하는데 담가르갈이 웃으면서 말했다.
“자리는 불편하지 않으셨는지요.”
메데우스에게 묻는 말이었다. 그러나 제 발이 저린 나택이 몸을 움찔거렸다. 메데우스가 나택을 흘끔 보더니, 말을 이었다.
“아주 편안하던데. 덕분에 오면서 숙면했어.”
“정말 다행입니다. 누추한 곳에 모실 수밖에 없어서 어찌나 걱정을 했는지.”
진실을 숨긴 대화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나택은 후회 가득한 머리를 마음속으로 쥐어뜯었다.
갑판을 벗어나 나택의 발이 드디어 델람의 땅에 닿는 순간이었다. 시스템 안내창이 떴다.
델람의 수도 ‘수나파크’에 진입했습니다.
“수나파크…….”
나택은 다리로는 메데우스를 쫓고, 눈으로는 주변을 둘러보며 델람을 정복하던 과정을 천천히 복기했다.
수나파크는 델람의 수도이자 메소포타미아 최대의 항구 도시였다. 델람은 무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답게 바닷가를 거점으로 삼았다. 수나파크는 현대의 지도로 따지면 이란과 접경해 있는 페르시아만에 있었다. 정확히는 페르시아만의 북동쪽 ‘물속’에 있었다.
나택은 짧게 입바람을 불어 앞머리를 밀었다. 수나파크의 ‘위치’는 델람을 정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자 단서였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메소포타미아판 ‘노아의 방주’ 사건이 터지기 때문이다.
신의 분노로 대홍수에 맞닥뜨리게 되는 도시, 수나파크. 얽힌 이야기도 맞이하게 될 종말도, ‘강과 바다의 노래’라는 메인 스토리의 제목다운 도시였다. 수눈키 유저 시절의 나택은 수나파크가 물에 잠길 타이밍에 맞춰 군병들을 퇴각시키는 전술을 써서 델람을 정복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군병도 없고…….”
이난나 가문은 이미 망한 지 오래다. 게다가 델람에 함께 온 나택의 아군은 메데우스 단 한 사람뿐이었다. 이제껏 군병 없이 델람을 정복한 적은 없었다. 대체 퀘스트가 어떻게 흘러가려는 건지. 제가 알고 있는 대로 흘러가는 게 맞긴 한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택의 고민이 끊이지 않는 그때 앞에서 누군가 담가르갈을 부르며 다급하게 뛰어왔다.
“하이고 에무쉬 님! 도착하셨습니까!”
“오, 마르씬!”
헐레벌떡 달려오던 놈이 메데우스 앞에서 허리를 꾸벅 숙였다.
“메데우스 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마르씬이라고 합니다.”
담가르갈이 뿌듯한 표정으로 소개를 이었다.
“성 내에서 가장 노련한 시종입니다. 메데우스 님께 이자를 붙여 주시기로 했나 봅니다.”
“지내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성심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호의는 단칼에 잘렸다.
“시종은 필요 없어. 이놈 하나면 돼.”
메데우스가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나택을 턱짓했다. 한 발 떨어져 항구 풍경을 살피던 나택이 그대로 동작을 멈추었다. 짙은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본 곳에서 메데우스가 나택을 빤히 보고 있었다. 담가르갈은 나택과 메데우스를 번갈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저 시종 한 명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배에서도 영……. 저희 쪽에서 일에 능숙한 시종 몇을 이미 준비시켜 두었는데…. 저희 쪽 시중을 받으시는 게 여러모로 편하실 듯합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우루크에서도 시종은 여럿을 두지 않았어. 번거롭기만 해.”
“그러시다면야…. 알겠습니다. 혹 마음이 바뀌신다면 언제든 꼭 말씀해 주세요. 그럼 처소부터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담가르갈이 앞장서고 메데우스가 그 뒤를 따라갔다. 나택도 얼른 보폭을 넓혀 메데우스의 뒤로 바짝 붙었다. 마르씬이라는 시종은 풀이 죽은 표정으로 나택의 옆에 섰다.
* * *
메데우스의 처소는 수나파크의 성 내부였다. 광물과 삼림자원으로 부를 축적한 무역도시답게 수나파크 성은 화려하고 웅장했다. 벽이며 천장, 바닥은 오색의 기하학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우루크의 대저택과 신전이 소박해 보일 정도였다.
델람이 군사력이 약한 것은 아무래도 밸런스를 맞추기 위함인 듯했다. 이들이 막강한 무력까지 갖추었다면 필시 델람이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메데우스를 탐내는 델람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이곳은 귀한 손님을 위해 특별히 관리되고 있는 곳입니다.”
담가르갈이 생색을 냈다. 그러나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2층에 오고 나서부터 향로에서 나는 풀 내음이 복도를 꽉 채우고 있었다. 담가르갈이 가장 짙은 향기 앞에서 멈추더니 방문을 열었다.
“2층은 메데우스 님만 쓰실 수 있도록 모두 비워 두었습니다. 불편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출입구 밖에 시종을 대기시켜 두겠습니다. 쉬고 계시면 식사가 준비되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메데우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성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메데우스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사람 불안하게…… 왜 저렇게 기분이 안 좋아 보이지. 혹시 풀 냄새를 싫어하나.
방으로 들어서는 메데우스를 보며 담가르갈이 나택을 돌아보았다.
“시종이 묵을 곳은 이쪽으로…….”
“아니. 놈에게는 따로 시킬 게 있어. 테레시.”
메데우스가 까딱거리며 들어오라 고갯짓을 했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용건을 다 보시면 시종이 묵을 곳은 안내해 드릴 테니-.”
“그럴 필요 없어. 여기 있는 동안 놈과 함께 지낼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돌아가.”
메데우스의 말에 담가르갈이 당황한 낯빛을 했다.
“함께 지내신다니…….”
메데우스의 말을 곱씹던 담가르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듣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천한 노예와…… 하, 한 방을 쓰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