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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에서 탈출시켜 줄 히든영웅을 찾습니다-32화 (32/178)

32화

그 말에 메데우스가 문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익숙하지 않은 도시이니, 시종을 부를 일이 더 많을 테지. 멀리 있으면 놈을 부르기가 불편해.”

“시종의 처소도 멀지 않은 곳에 마련해 두었습니다. 게다가 종을 울리시면 언제든 저희 시종이 올 테니 그런 것은 심려하지 마시고-”

담가르갈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이었다. 메데우스가 팔을 뻗어 나택의 뒷덜미를 잡더니 성의 없이 방 안으로 던졌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그, 하지만…….”

닫히는 문 사이로 당혹에 젖은 담가르갈이 보였다. 서서히 담가르갈의 모습이 사라지고.

쿵-.

묵직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돌아선 메데우스의 표정은 더욱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택이 방 중앙에 뻘쭘하게 섰다.

성 내부까지 걸어오면서도 화려하다 느꼈지만, 처소 내부는 더욱더 화려했다. 벽난로에는 언제든 피울 수 있도록 장작이 가지런하게 쌓여 있었고, 천과 카펫 할 것 없이 직물에는 착시 현상을 일으킬 듯한 기하학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나택이 화려한 내부를 감상하는데 메데우스가 가운데 있는 의자를 끌어내서는 털썩 앉았다. 나택이 메데우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정말… 저를 여기 두시려는 건 아니시죠?”

화려한 건 둘째 치고, 방 안에 있는 침구와 가재들은 모두 한 사람을 위한 것뿐이었다.

나는 어디서 자라는 소리지. 설마 배에서 제 자리를 빼앗은 복수를 하려는 건 아닐 테고….

“우루크로 돌아갈 때까지 너도 함께 방을 쓸 거야.”

메데우스의 말에 나택이 벙 쪘다. 다시 한번 방을 둘러보았다. 처소가 넓긴 넓지만, 침대도 네 명은 족히 누울 수 있을 만한 크기이긴 하지만……. 그게 노예를 위한 자리는 아니었다.

나택이 메데우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특혜를 받는다는 건 그만큼 예외의 인물로 주목받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택은 이 세계에서 주목받고 싶지 않았다.

“…메데우스 님. 주제넘은 말인 건 알지만…. 제가 감히 귀족의 처소에 함께 머물게 된다면, 주변에서 보는 시선이 좋지 않을 겁니다. 혹시 저를 부르기 불편할까 봐 그러시는 거면 제가,”

“테레시. 일단 앉아.”

메데우스가 나택의 말을 잘랐다. 그러고는 하얀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나택이 조심스럽게 의자를 빼서는 메데우스의 옆에 앉았다.

마주 본 메데우스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욱 굳어 있었다. 나택의 가슴에 불안이 피었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기는 건가.

곧이어 메데우스와 눈이 맞았다. 순간 나택은 확신했다. 델람에서의 퀘스트가 이제부터 시작일 거란 걸 말이다. 그 서두를 메데우스가 읊어 줄 거란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델람에 있는 동안은 내게 붙어 있어.”

역시나였다. 어떤 이야기일지 어렴풋이 짐작은 갔지만, 나택은 재차 확인했다.

“무슨 일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메데우스가 테이블보에 달린 술을 툭툭 손끝으로 쳤다.

“넌 델람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지?”

대뜸 들어오는 질문에 나택이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곧 머릿속으로 델람의 스토리를 복기하기 시작했다.

델람 정복을 승리로 이끄는 핵심 퀘스트는 ‘델람의 대홍수’라는 이름인데, 노아의 방주 설화의 기원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대홍수 이전부터 델람은 내부 정세가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병환이 깊은 노령의 군주는 의식이 없었고, 선대 군주가 죽질 않으니 두 아들이 있음에도 정식으로 왕좌를 물려받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나택은 간단하고 명료하게 답을 했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후계자 문제로 내정이 복잡하다는 정도까지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귀족 출신이라고 주변 정세의 핵심은 알고 있네. 그 외에는?”

그 외의 정보는 안다고 해도 섣불리 말할 수 없었다. 그게 유저 입장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인지 아니면 고대인의 입장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택이 잔잔히 고개를 젓자 메데우스가 테이블보를 성의 없는 손길로 툭툭 때렸다.

“스메나피쉬팀은 사치를 질색해. 반년 전쯤 델람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성내가 이렇게 화려하진 않았어.”

“그게 문제가 됩니까.”

“문제가 되지.”

메데우스가 테이블 위의 화병을 손끝으로 톡 쳤다.

“델람은 병환이 깊은 군주 때문에 두 아들이 섭정하고 있어. 귀족의 지지를 받는 첫째 캄비세스는 무역과 경제를 맡고, 신관의 지지를 받는 둘째 스메나피쉬팀은 외교와 정무를 주도해서 보고 있지. 델람은 항해 전 반드시 신에게 무운을 비는 기도를 올려. 그래서 신관의 지위가 굉장히 높은 곳이야. 그런 놈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니, 스메나피쉬팀이 정식 후계자인 건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고.”

그런 주인의 입맛에 맞추어진 성내가 한순간에 휘황찬란한 장식으로 뒤덮이게 된 것이다. 고작 반년 만에.

“입구에서부터 모든 게 놈의 취향이 아니야.”

“취향이…… 바뀐 건 아닐까요.”

“취향이라는 건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게 아니야. 게다가 스메나피쉬팀이 사치를 싫어하는 데는 신념과 관련된 이유도 있어. 놈은 실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사람이 이렇게까지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나택이 방 안을 휘둘러보았다.

“……성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보는 게 맞겠네요.”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쟁취한 자들은 늘 기존의 흔적을 지우는 일부터 시작했다. 실제 역사를 생각해도, 드라마를 보아도 대부분이 그러했다. 메데우스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맞아. 지금 델람의 실세를 쥐고 있는 건 후계자로 내정된 둘째가 아니라 첫째 아들이라고 봐도 무방해.”

“하지만 이미 내정된 후계자를 바꾸는 과정이 순탄하진 않을 텐데요. 델람이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면 메데우스 님께서 모르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야. 무엇보다도, 담가르갈은 내게 이런 사실을 전혀 언질 주지 않았어. 후계자가 바뀌었다면 그를 공표해 알리는 게 가장 첫 번째 수순일 텐데, 델람에서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지.”

이건 마치 대통령이 바뀌고, 한 나라의 왕이 바뀐 것을 꽁꽁 숨긴 것과 다름이 없었다.

나택이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아는 진실과 메데우스가 들려주는 상황. 그것이 가리키는 건 하나였다.

“후계자를 교체하려는 움직임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겠네요.”

델람의 혼돈은 진행 중이었다. 나택이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이어 붙였다.

“혹시 주석의 수입량이 제한된 것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그럴 가능성이 커. 이런 데서는 눈치가 빠르네.”

“네, 뭐….”

나택은 자세한 해명 대신 말끝을 얼버무렸다. 수눈키의 메인 스토리는 서로 인과관계로 이어져 있었다. 메데우스가 이곳에 온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답을 유추해 내는 게 어렵진 않았다.

“델람이 귀찮게 굴었던 건 이전부터였지만, 주석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기 시작한 건 딱 반년 전쯤부터야. 내가 스메나피쉬팀을 마지막으로 본 것도 그즈음이고.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성의 꼴을 보아하니 아닐 확률이 높겠어.”

나택이 마른 입술을 핥으며 숨을 삼키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동시에 시종 마르씬의 목소리가 들렸다.

“메데우스 장군님. 저녁 만찬이 준비되었습니다.”

테이블 위로 나택과 메데우스의 시선이 부딪혔다.

“……저녁 만찬에 튀어나올 놈을 보면 확실해지겠지.”

밖으로 나가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시종이 앞장섰다. 메데우스는 그 뒤에 떨어져 걸었고, 나택은 제 주인에게 바짝 붙었다.

연회장으로 가는 길은 메데우스의 처소보다 더욱 사치스러웠다. 금속 꽃병과 장신구는 섬세하고 정교했으며, 벽을 장식한 유리에는 색색의 유약이 발라져 있어 광택이 났다. 고대가 아니라 중세 시대에 왔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택은 이 모든 고대의 풍경을 문화재를 감상하는 기분으로 눈에 담았다. 직진으로 걷던 복도가 오른쪽으로 꺾일 때였다. 한쪽 벽에 새겨진 양각의 벽화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왕관을 쓴 군주와 델람이 믿는 물의 신 에아가 새겨져 있었다.

그들의 옆에는 높은 신분으로 보이는 아리따운 여인이 서 있었다. 벽화 속의 저 여자가 공주라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몰아쳤다. 포악한 타국의 장군에게 콩깍지가 씐…….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으로 보였다.

나택이 한창 감상에 빠져 있을 때 시종이 걸음을 멈추었다.

“장군님, 이쪽으로 오시죠. 시종은 여기서 기다리면 됩니다.”

“놈도 데려갈 거야.”

메데우스가 나택을 돌아보더니 눈짓하며 입 모양으로 고요하게 명령했다.

따라와.

“…….”

델람의 시종은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곧바로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시종이 문지기에게 작게 신호를 보냈다. 묵직한 만찬장의 문이 활짝 열렸다.

“캄비세스 님. 메데우스 장군님을 모셔 왔습니다.”

진수성찬이 차려진 긴 테이블에는 예상대로 캄비세스가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작은 체구의 그림자가 있었다.

메데우스가 만찬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드르륵- 다급하게 의자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메데우스 님!”

필시 공주가 분명할 여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택은 제 눈을 의심했다. 정확히는 제가 본 여자를 의심했다.

저게 사람이야, 인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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