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
델람의 공주는 티 없는 짙은 피부에 윤기가 흐르는 새카만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큰 눈망울에 작지만 오뚝한 버선코, 도톰한 입술에 조막만 한 얼굴까지. 현대에서 세기의 미녀라 언급되는 여배우들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미인이었다.
게다가 공주는 가녀린 손목과 한 품에 쏙 들어올 것 같은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나택의 취향이었다.
고대 문명에 들어와서 상상 속에서나 꿈꾸던 이상형을 만나게 될 줄이야.
호르몬에 지배받은 나택의 본능이 갈증을 유발했다. 나택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메데우스는 만찬상에 천천히 앉으며 그런 나택을 예리하게 보고 있었다. 나택의 눈먼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눈치챈 순간, 메데우스의 미간이 미세하게 조여들었다.
“메데우스 장군! 실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주와 마찬가지로 캄비세스가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데우스가 태연하게 답했다.
“놀라운 일이네요. 캄비세스가 이 자리에 있을 거라고는 예상 못 했습니다.”
물론 전혀 놀라지 않은 낯빛이었다.
“장군께서 놀라실 마음 충분히 압니다. 사정을 설명하자면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으니, 우선은 앉으시지요. 반가운 인사부터 치르도록 합시다.”
메데우스가 의자에 앉자 캄비세스와 공주도 다시 테이블에 착석했다.
식사를 하는 내내 델람의 시종들은 새로운 음식을 끊임없이 내어놓았다. 나택은 조용히 메데우스의 뒤를 지켰다. 캄비세스의 행동에 집중해야 하는데 자꾸만 가녀린 몸이 주의를 흩트렸다. 공주는 작은 입으로도 야무지게 잘 먹었다. 그런 것까지 나택의 스타일이었다.
메데우스, 이 부러운 놈……. 저런 미인이 구애를 하면 얼른 받아 줘야 할 거 아냐.
음식을 사이에 두고 오가는 대화는 형식적인 내용이 전부였다. 분위기 역시 이렇다 할 특이점은 없었다. 가벼운 인사치레를 끝내자 메데우스가 게슈틴 잔을 들고는 손목을 가볍게 돌렸다.
“그런데 어째서 스메나피쉬팀은 얼굴조차 내밀지 않습니까.”
“하하. 그러고 보니 제 아우의 소식을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지요.”
캄비세스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놈은 표정에 큰 변화가 없었지만, 공주는 아니었다. 검은 눈망울이 흔들리는 걸 나택은 놓치지 않았다.
“이거 참….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제 아우는 병세가 악화되어 요양을 떠났습니다.”
“이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건강해 보였습니다. 지병이 있다는 얘긴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장군께서 염려하실까 싶어 제 아우가 말씀을 드리지 않은 모양입니다. 게다가 엔시께서도 몸져누우신 상황에, 그 후사마저 병환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 여러모로 좋은 것이 없지요. 그래서 조용히 떠났습니다.”
“…….”
메데우스가 캄비세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공주를 응시했다.
“그렇습니까?”
메데우스의 질문에 공주가 구슬 같은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이 녀석이 장군을 만난다고 어찌나 마음을 졸이던지. 보아하니 아직도 긴장이 풀리지 않은 듯하군요.”
메데우스가 대꾸 없이 게슈틴 잔을 들었다. 그에 맞춰 캄비세스도 테이블 위로 잔을 들었다. 허공에서 두 잔이 건배했다. 메데우스가 한 모금을 마시는데 캄비세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완공된 새로운 목욕탕이 있습니다. 장군을 첫 손님으로 모시고 싶은데, 피로도 달랠 겸, 식사 후에 그곳에서 몸을 좀 푸시는 건 어떻습니까.”
메데우스가 끄덕이자 어째서인지 공주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캄비세스가 말을 이었다.
“저희 공주가 델람 전통 마사지에 아주 능합니다. 오늘 목욕 시중은 공주에게 맡기시지요.”
……뭐? 목욕 시중?
나택의 시선이 메데우스를 지나 공주에게로 향했다. 메데우스는 아무런 동요 없이 게슈틴 한 모금을 더 삼키고 있을 뿐이었다.
“사양 않겠습니다.”
귀찮다 어떻다 하더니……. 결국은 너도 남자인 거냐.
나택이 허망한 눈빛으로 메데우스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생각해 보면 나택은 이제껏 메데우스가 이성과 엮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잠시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메데우스 역시 저와 똑같은 걸 달고 있는 남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저렇게 예쁘고 아름다운 공주가 드는 목욕 시중이라니……. 그래, 거절하기 쉽지 않겠지. 복 터진 놈…….
나택은 부러운 마음을 삼키며 메데우스를 이해했다. 시종에게 안내받은 목욕탕은 성 내에 있었다. 이곳 역시 온갖 장식품과 꽃으로 장식이 되어 있어 눈 돌아갈 만큼 화려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곧 공주님이 오실 겁니다.”
메데우스는 대꾸 없이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너른 탕으로 향했다. 그가 허리끈을 푸르기 시작하자 시종이 높은 천장까지 닿아 있는 휘장을 빈틈없이 꼭꼭 치고는 목욕탕 밖으로 사라졌다. 그즈음 메데우스는 나신이 되어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메데우스는 분명 나택에게 떨어지지 말라 명령했었다. 하지만 오늘의 목욕 시중을 공주가 들어 주기로 했다면 나택은 이 자리에서 무얼 해야 하는가. 역시 눈치껏 자리를 피해 줘야 하는 걸까.
나택이 고민에 빠져 있는 때, 메데우스가 나택을 불렀다.
“테레시. 거기 서서 뭐 하는 거야.”
거기 서 있지 말고 눈치껏 빨리 꺼지라는 소리구나. 나택이 메데우스의 옷을 주섬주섬 챙겨 들고는 허리를 숙였다.
“그럼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볼일 끝나면 불러 주세요.”
나택의 말에 메데우스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뭐? 무슨 볼일.”
“그… 공주님께서…….”
널 씻겨 주신다잖아……. 내가 옆에 있어 봤자 눈치밖에 더 보겠냐.
나택의 말끝이 흐려지자 메데우스의 표정이 더욱 이지러졌다.
왜 또 저렇게 기분 나빠하지? 내가 무슨 말실수를 했나?
한 명의 고민과 한 사람의 짜증이 엇갈리며 정적을 만든 순간이었다.
“장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옥구슬 같은 목소리가 휘장 너머에서 울렸다. 메데우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들어와.”
나택은 어설프게 숙인 허리로 재빨리 뒷걸음질 쳤다.
“그럼 저는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자신의 퇴장에 정당성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한마디를 더 붙였다. 그러나 나택의 다리는 장막 밖을 나가지 못했다.
“가긴 어딜 가.”
“……?”
설마 나보고 둘이 목욕하는 장면을 관음이라도 하라는 건가?
그건 그것대로 난감했다. 얼어붙은 나택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는데 공주가 곁을 스쳐 갔다. 공주는 큰 쟁반에 향유와 향로를 담고 팔에는 꽃잎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목도한 만점짜리 이상형이자 절세 미녀는 나택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곧장 메데우스에게로 다가갔다. 남은 건 공주가 흘리고 간 장미 향뿐이었다.
“장군. 실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방금 만찬장에서 봤잖아.”
메데우스가 건조하게 대꾸하며 나택에게 입 모양으로 명령했다.
이쪽으로 와.
“…….”
나택이 엉거주춤 두 남녀가 있는 목욕탕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저놈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택을 등지고 앉은 공주는 천천히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향유 병을 꺼내기 시작했다.
“공식 석상에서의 만남은 저희가 약조한 만남이 아니지 않습니까.”
“난 만남을 약조한 적이 없는데.”
무성의한 메데우스의 답에도 공주는 미소를 띤 얼굴로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장군. 정말 매정하십니다. 다음에 다시 델람에 들러 주시겠다, 그리고 만찬도 함께해 주겠다 제게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그 뒤로 계속 장군을 기다렸습니다.”
“그런 건 약조가 아니라 인사치레라고 하지.”
“그래도 결국엔 이렇게 들러 주셨으니, 저는 몹시 기쁩니다.”
공주가 치마를 걷어 올리더니 메데우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목욕탕 가장자리에 앉은 공주가 다리를 무릎까지 물에 담그며 앉았다. 그러고는 손바닥에 향유를 덜어 냈다.
“델람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오는 요법이 있습니다. 무거운 팔다리를 가볍게 만들어 주는 마사지인데, 언젠가 장군께 해 드리고 싶어서 열심히 배워 두었습니다.”
공주가 가녀린 손을 조심스럽게 메데우스에게 뻗었다. 메데우스가 앉은 자리의 물 위에는 꽃잎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이파리 틈새 속에서 메데우스의 몸이 일렁이자 공주가 뺨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메데우스의 왼쪽 팔을 잡아 조심스럽게 들어 제 무릎 위에 올렸다. 향유를 바르며 아래팔을 쓰다듬는 손길을 메데우스는 거절하지 않았다.
“한데, 장군. 저 시종은 어째서 물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물려야 할 이유가 있나?”
“그런 건 아니지만…….”
“샤나비.”
메데우스가 부르는 이름에 공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맑은 눈망울이 메데우스를 응시했다.
“델람에 오셔서 처음으로 제 이름을 불러 주시는군요. 말씀하세요, 장군.”
메데우스가 공주의 무릎에 얹었던 손을 천천히 들었다. 하얗고 긴 손이 공주의 뺨에 닿자 공주의 뺨이 더욱 발그레해졌다. 메데우스와 공주의 시선이 짙게 맞붙었다.
“내게 할 말이 있다면 지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