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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에서 탈출시켜 줄 히든영웅을 찾습니다-34화 (34/178)

34화

“할 말이라니…. 어떤 것을 말입니까. 그간 나누지 못한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어느 것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목욕탕에서 전라의 남자와 수줍은 여인이 스킨십을 나누는 장면을 나택은 멀뚱멀뚱 보고만 있어야 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따로 없었다.

괜히 머쓱해진 나택이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건 공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나택과 공주 두 사람은 메데우스가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얘기해.”

공주가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메데우스의 의중을 헤아릴 때였다. 메데우스의 손이 공주의 뺨을 쓸며 내려오더니 얇고 가녀린 손목을 움켜쥐었다.

“어떤 게 더 중요한지 모르겠다면 내가 먼저 질문하지.”

“말씀하시지요.”

“스메나피쉬팀은 어디 있지?”

나택이 떨궜던 시선을 홱 올렸다.

“자, 작은 오라버니는 몸이 좋지 않아 요양을 가셨습니다.”

“어디로.”

“니무쉬산 너머의…… 조용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언제부터?”

“그건…….”

“다시 질문하지. 스메나피쉬팀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야.”

“…….”

“반년쯤 되었을 거야. 그렇지?”

공주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샤나비. 내가 그동안 네게 예를 갖추었던 이유는 하나야. 델람의 후계자인 스메나피쉬팀에게 모욕감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 놈은 나와 대화가 통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거든.”

“…….”

“스메나피쉬팀은 살해되었군. 맞지?”

“아닙니다!”

메데우스가 떠보는 말에 공주가 즉각 반응했다. 곧이어 가녀린 손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아직 죽지는 않았다는 뜻이네.”

확답을 받은 셈이었다.

“작은 오라버니는…… 정말 요양을 하러 가셨습니다. 몸이 좋지 않아서…….”

“그토록 건강하던 자가, 고작 몇 달 만에 얼굴도 비추지 못할 정도로 병이 들었다니. 극약을 먹지 않는 이상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게다가 아무리 비밀스럽게 요양을 떠났다 해도,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을 텐데. 그랬다면 소문이 돌았을 거야. 더불어 에무쉬는 내가 델람에 도착할 때까지 스메나피쉬팀에 대한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았지. 내게 이렇게까지 숨길 이야기는 아니라고 보는데.”

“…….”

“스메나피쉬팀은 어디 있지?”

“…….”

“이렇게까지 꼭꼭 숨겨 둔 걸 보면, 이 성안 어딘가에 있을 거야. 그렇지?”

나택이 속으로 무릎을 쳤다.

이걸 확인해 보려고 목욕 시중을 거절하지 않은 거구나.

메데우스는 스메나피쉬팀이 이 성에 갇혀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둘째 오라버니는…. 요양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넌 캄비세스보다 스메나피쉬팀을 더 따랐지. 그런 네가 이렇게까지 캄비세스와 합을 맞추는 건,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

메데우스는 다정한 어조로, 하지만 확신에 찬 내용으로 공주를 부드럽게 회유했다. 공주에게 이제껏 보였던 태도 중에 가장 부드러운 모습일 게 분명했다.

메데우스의 진중한 표정을 보면 작정하고 거는 수작은 아닌 것 같았다. 그걸 알면서도 공주의 마음을 살살 녹이는 저 광경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모로 대단한 놈이네…….

나택이 고개를 얕게 내저었다. 그러고는 수눈키를 플레이하며 보았던 델람의 시네마틱 영상을 하나씩 떠올렸다.

스토리가 시작할 때 즈음 델람에는 분명 덕망 있는 후계자가 내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부 균열로 인해 후계자가 살해를 당하고, 결국엔 사나운 장자가 델람의 패권을 쥐게 되면서부터 국운은 하락세를 걷기 시작한다. 거기에 폭정까지 겹치자 델람은 사정없이 흔들렸고, 나택은 그 틈을 공략해 군병을 끌고 와 델람에 쳐들어갔다.

기억 속의 내용대로라면 덕망 있는 후계자는 스메나피쉬팀이 확실했고, 폭정을 일삼게 될 장자는 캄비세스가 틀림없었다. 아무래도 나택은 스메나피쉬팀이 살해당하기 직전의 순간에 와 있는 듯했다.

델람의 정세는 나택이 아는 스토리대로 흘러가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공략 조건이 이전과 달랐다.

군병으로 정복할 수 없는 상황인 지금….

폭군 캄비세스 VS 성군 스메나피쉬팀

어느 쪽이 군주가 되는 게 메소포타미아의 통일에 가까워지는 길일까.

“네가 그렇게 어리석은 귀족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 캄비세스에게 군주의 자질이 없다는 건 샤나비 네가 더 잘 알겠지.”

메데우스의 반응을 보아하니 단연코 스메나피쉬팀 쪽 같았다. 붙들린 손목을 한참 내려다보던 공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큰 오라버니께서 제게 약조하신 게 있습니다. 당분간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조용히 지내면… 이전과 다름없이 지낸다면 둘째 오라버니를 곧 풀어 주실 거라고요. 장군과의 혼사도 어떻게든 이루어지도록 만들라 하셨습니다. 물론 장군을 향한 제 마음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고, 큰 오라버니가 잘못되었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만……. 여기서 제가 어찌해 볼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고대 문명에서는 신분으로도 지위의 고하가 정해졌지만, 성별로도 그 상하를 갈랐다. 이야기를 듣는 나택의 속은 더욱 착잡해졌다.

“캄비세스가 완벽하게 권력을 잡으면, 스메나피쉬팀을 살려 둘 거라고 생각해?”

“…….”

메데우스가 공주에게 더욱 가까이 얼굴을 내밀었다. 순둥한 눈꼬리에는 어느새 파리한 날이 돋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묻겠어. 스메나피쉬팀은 어디 있지.”

공주는 작은 손가락을 몇 번 꼼질 거리더니 결국 진실을 실토했다.

“니무쉬산 쪽으로 가신다고 말씀하신 건 사실입니다. 하나, 니무쉬산으로 가려면 성내 동쪽에 있는 큰 오라버니의 거처를 지나야 합니다. 저는 그쪽 어딘가에 둘째 오라버니가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확실하진 않아요. 저도 둘째 오라버니가 걱정되어 몇 번이나 여쭈어봤지만, 아무것도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아직은 무사히 계신다는 것만 전해 주셨습니다….”

원하던 답을 얻자 메데우스가 공주의 손목을 놓았다.

“테레시!”

대뜸 불리는 이름에 나택이 후다닥 메데우스에게 다가갔다.

“샤나비를 밖으로 안내해.”

“장군…….”

“샤나비. 잘 들어. 오늘 일은 절대 입 밖에 내지 마. 내가 스메나피쉬팀에 대해 물은 것도, 그에 대해 답해 준 것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

“……예.”

나택은 조심스럽게 공주를 부축해 일으켰다. 풍파 속에 휘말릴 사람에 이 여린 사람도 포함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공주를 보내고 나자 목욕탕에는 또다시 두 남자만 남았다. 나택은 공주가 놓고 간 향로를 피우며 못다 한 시중을 이어 갔다.

“주석 때문에 온 건데, 일이 이렇게 꼬이네. 골치 아프게 됐어.”

“그냥 모르는 척 지나갈 수는 없는 겁니까.”

“캄비세스는 정복욕이 큰 놈이야. 게다가 오래전부터 폭력적인 성향을 숨김없이 드러내 왔지. 놈이 델람의 머리가 되면 우루크에 좋을 게 없어.”

그렇게 말하며 메데우스가 제 팔쪽을 눈짓했다. 향로 연기를 퍼트리며 부채질하던 나택의 손이 멈추었다.

“……?”

또 뭘 하라고 눈치를 주는 거지.

나택이 멀뚱거리며 굳어있자 메데우스가 향유가 발린 번들거리는 팔을 내밀었다. 설마 아까 공주가 하려던 마사지를 해 달라는 건가. 마사지는 할 줄 모르는데…. 어깨라도 주물러 줘야 하나.

평소 나택이 하는 메데우스의 목욕 시중은 대충 향유를 발라 주는 시늉에서 끝내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왠지 지금의 메데우스는 그 이상을 원할 것 같았다.

나택이 느리게 다가가 메데우스의 팔을 잡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주물러 줘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메데우스가 나직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이가 없네. 좋은 시간을 보내라고?”

“예?”

알아듣지 못한 나택이 되물었다. 그러나 메데우스는 대답 대신 돌연 나택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잡아당겼다.

“테레시.”

어중간하게 수그렸던 나택의 몸이 앞으로 끌려갔다. 메데우스가 코끝을 나택의 머리에 묻고는 숨을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나택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상한 냄새라도 나나? 어제 씻고 잤는데.

나택이 슬그머니 고개를 숙여 제 옷과 몸을 킁킁거렸다.

“그새 냄새가 뱄어.”

메데우스의 눈빛에는 탐탁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나택이 재차 냄새를 맡아 보았으나 특별할 건 없었다.

무슨 냄새가 뱄다는 거지. 바다 비린내는 진작에 날아갔을 테고……. 성내에서 풍기던 향로의 풀 냄새를 말하는 건가.

그 두 가지 말고는 짚이는 게 없었다.

“성에서 나던 향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처소에 돌아가면 향로부터 꺼 두겠습니다.”

“아니. 그 냄새 말고.”

“그럼 어떤….”

설마 땀 냄새인가. 나택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더 열심히 제 체취를 맡았다. 사람은 자신의 몸내에 둔한 법이니, 아무리 열심히 맡아 본들 소용은 없었다.

한참 말이 없던 메데우스가 한 마디를 뱉었다.

“장미 향.”

그제야 공주에게 풍겼던 장미 향이 떠올랐다. 장미 향을 싫어하나? 기분도 좋지 않아 보이고,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확실했다. 메데우스는 장미 향을 싫어하는 듯했다.

“불쾌하시면 바로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그러나 나택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손목에 강한 압력이 가해졌다. 그대로 팔이 딸려 가더니 나택의 상체가 메데우스 쪽으로 기우뚱 넘어갔다.

“헛소리하지 말고 들어와.”

풍덩-.

나택이 그대로 물속에 고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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