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불시에 코와 입으로 물을 들이켠 나택이 콜록거리며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나택을 처넣고 나서야 메데우스의 낯빛은 느슨해졌다.
망할 놈. 어쩐지 요즘 싹수 좀 챙긴다 싶더니. 이렇게 예고도 없이 사람을 물 맥인다.
메데우스가 태연하게 향유병을 집더니 뚜껑을 열었다.
“잠깐 새에 이렇게 짙게 배다니.”
나택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물을 닦아 내던 때였다. 정수리에 차가운 게 쏟아지더니 이마와 관자놀이를 타고 액체가 흘러내렸다. 메데우스가 향유를 병째로 나택의 머리에 흘리고 있었다.
“전부터 묻고 싶었던 건데. 원래 냄새가 잘 배는 체질이야?”
하……. 이 새끼, 이걸 진짜 어떻게 해야 하지.
현대의 이나택이었다면 이쯤 해서 멱살 한번을 제대로 쥐었을 텐데. 이난나 테레시의 위치에서는 꿈도 꿔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나택이 눈을 질끈 감으며 최대한 목소리를 갈무리했다.
“……예. 냄새가 잘 밴다는 그런 얘길 자주 듣긴 합니다.”
“그래?”
속을 비운 향유병이 골대로 향하는 공처럼 저 멀리 날아갔다. 풍덩 소리와 함께 병이 물속으로 가라앉자 메데우스가 양팔을 욕조 가장자리에 펼쳐 얹으며 나택을 빤히 응시했다.
“사람도 그래?”
“어떤 사람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택은 끓는 속을 가라앉히며 손바닥 우물에 물을 담아 향유를 씻어 냈다.
“사람 체취도 잘 배냐고.”
또 무슨 시비를 걸려고 이런 질문을 하는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듣자마자 곧바로 튀어나오는 기억이 있었다.
학창 시절의 나택은 털이 자라지 않는 체질로 크게 고생을 했지만, 냄새가 잘 배는 특질로도 여러 번 불편함을 겪었다. 자주 붙어 다니던 옆자리 놈의 로션 냄새가 옮겨붙는다든가, 국숫집의 얼큰한 육수 냄새가 동행인들 중 제 머리카락에만 밴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덕분에 나택은 탈취제를 상비품처럼 가지고 다녔다.
나택이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며 얼굴에 흘러내린 향유를 닦아 냈다. 가늘게 접은 메데우스의 시선이 나택의 입술에 앉았다.
“하룻밤 몸이라도 섞었다간 온 동네에 네 정분 상대가 파다하게 퍼지겠는데.”
메데우스의 말에 뺨을 닦아 내던 나택의 팔이 그대로 굳었다.
이 새끼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황당한 눈동자가 그대로 회색 홍채에 닿았다. 그런데 마주 본 메데우스의 눈에 장난기라고는 한 톨도 섞여 있지 않았다.
“실제로는 어때?”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하신 겁니까.”
“대답부터 해.”
당황한 나택이 소리 없이 입을 뻐끔거렸다. 당황하다 못해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설마 경험이 없어?”
순간, 나택의 뺨이 확 달아올랐다. 나택은 이런 대화에 면역이 없었다. 비교적 개방적인 현대사회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이상하게 외설적인 대화에 거부감이 들었다. 또래들 사이에서 난잡한 대화가 오가면 자리를 피하거나 어물쩍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고는 하던 현대인이 나택이었다.
대체 어쩌다 대화가 이쪽으로 튄 거지.
“정말 없어?”
메데우스는 답을 듣기 전에는 이 대화를 끝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나택이 목을 가다듬으며 헛기침을 했다. 달아오른 열은 어느새 귀 끝부터 목까지 벌겋게 번져 있었다.
“저도 나이가 있고 다 큰 성인입니다. 당연히…….”
시선을 흘긋 올려다보는데 메데우스가 뚫어질 것처럼 나택을 쳐다보고 있었다.
“당연히…… 있지 않겠습니……. 억.”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가슴팍에 열기가 닿았다. 메데우스가 나택의 젖은 옷감을 틀어쥐고는 획 당겼다. 나택의 몸이 그대로 메데우스의 코앞까지 딸려 갔다.
“……있다?”
숨이 붙을 것처럼 메데우스의 얼굴이 가까이에 있었다. 나택이 황급히 목을 자라처럼 뒤로 빼고는 부자연스럽게 까닥거렸다. 습한 공기에 정적이 더해지자 목욕탕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스산해졌다. 메데우스는 그 상태로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얘는 또 뭐에 꽂혀서 이런 거로 시비를 거는 거야…….
나택은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타액을 삼켰다. 눈을 어슷하게 내리깔며 떠다니는 꽃잎을 보는데 메데우스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시비를 거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화제를 전환해야 했다.
나택은 이 목욕탕에 오게 된 최초의 원인부터 수면 밖으로 끄집어냈다.
“저… 그런데 목욕 시중은 처음부터 그걸 확인해 보기 위해서 허락하신 겁니까.”
명백히 화제를 돌리려는 의도가 보이는 질문이었으나, 메데우스는 나택의 노력까지 걷어차진 않았다. 멱살을 쥔 손이 서서히 풀렸다.
“그래. 보는 눈을 피해 샤나비와 대화를 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으니까. 거기다 대고 좋은 시간 타령이라니.”
나택은 괜히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캄비세스가 군주가 돼선 안 되다고 확신하시는 거죠?”
이곳에 오기 전, 나택은 단순한 유저였기 때문에 모든 스토리를 메소포타미아 통일에만 집중했다. 그 때문에 타국의 군주가 누가 되는지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이 문명 속 모든 것들이 나택의 안위에 영향을 끼칠 터였다. 좀 더 세부적인 것까지 관심을 두어야 한다.
메데우스가 몸을 뒤로 기대며 말했다.
“스메나피쉬팀은 민생에 관심이 많아. 평화 지향적이고 상식적이지. 그에 반해 캄비세스는 스메나피쉬팀의 정반대에 있어. 비열하고, 폭력적인 데다 정복욕도 대단하지. 원하는 바를 쟁취하기 위해선 뭐든 할 놈이야. 캄비세스가 권력을 잡으면 주석 수입은 물론이거니와, 우루크의 국방에도 차질이 생겨. 구티족이 기승인 요즘 같은 시기라면 정말 위험해질 거야.”
메데우스가 말하는 위험은 곧 전쟁을 뜻했다. 실제로 겪는 전쟁과 게임 속 정벌을 비교할 순 없었다. 소요되는 시간은 물론이거니와 물리적 타격이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차이가 날 것이다.
제 인도자가 곤란해하는 상황, 우르크에게 불리한 전쟁. 이는 곧 진엔딩으로 가는 데 걸림돌이 되는 상황이란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택은 전시 상황을 몸으로 겪고 싶지 않았다.
나택이 뒤로 뺐던 몸을 앞으로 다시 내밀었다.
“그럼 스메나피쉬팀을 도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샤나비를 불렀잖아. 델람에 온 목적은 이게 아닌데. 생각보다 일이 복잡해지겠어. 그나저나, 뭐 해. 네 일을 하지 않고.”
메데우스가 젖은 팔을 나택에게 내밀었다. 나택이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며 청동 쟁반으로 팔을 뻗었다. 비누를 쥐고 메데우스의 아래팔을 받쳐 올리며 어색한 손놀림으로 하얀 피부를 문질렀다. 빈틈없이 짜인 근육의 볼륨이 비누 덩어리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남이 씻겨 주는 게 어색해서라도 몸서리가 날 법도 한데, 메데우스는 편안하게 시중을 받았다.
“내일은 아마 주석 채석장을 돌아보게 될 거야. 담가르갈에게 미리 말해 뒀으니까.”
“예.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녀와서는 스메나피쉬팀을 찾아볼 거야.”
비누칠하던 손이 그대로 멈추었다. 메데우스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두 사람 사이에 빛이 환하게 일렁였다.
[스메나피쉬팀의 행방]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왔다.
나택이 마른 목을 꿀꺽 삼켰다.
이나택의 인도자가 이끄는 방향, 델람 정복의 첫 단추가 서두를 열었다. 스메나피쉬팀을 찾는 게 델람을 정복하는 길이 분명했다.
“어떻게 찾으실 생각이십니까.”
“성내를…… 뒤져 보는 수밖에 없겠지. 수상해 보이는 곳은 모조리 둘러봐야 해. 그러니까 내일은 성내는 물론이고 지나가는 길의 작은 것 하나도 흘려보지 마. 단서가 될 만한 건 절대 놓쳐선 안 돼.”
나택이 고개를 끄덕이며 결의를 다질 때였다.
풍덩-.
주먹을 쥔 나택의 손바닥 아래에서 비누가 미끄러졌다. 매끈한 덩어리가 그대로 물속에 가라앉았다. 파동이 일며 꽃잎이 흔들리자 감춰져 있던 물속 사정이 얼핏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메데우스의 허리 위까지 잠기는 물의 높이. 비누를 줍기 위해서는 물속으로…. 저 물속으로 얼굴을 처박을 수밖에 없었다.
얼어붙은 나택에게 메데우스가 말했다.
“줍지 않고 뭐 해.”
“…….”
나택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꽃잎 아래로 잠수했다. 봐선 안 될 것을 피하느라 시야를 잃은 손이 더듬거렸다. 간신히 비누를 움켜쥐었을 때였다. 감긴 눈꺼풀 너머가 환해지는 게 느껴졌다. 번쩍 눈을 뜨자 물속 저 멀리에서 하얀빛이 깜빡이는 게 보였다. 메데우스가 던졌던 향유병 위에서 홀로그램이 물결치고 있었다.
정체 모를 빛이 물속에서 빛납니다.
아이템!
메인 퀘스트와의 연관성을 알리는 시그널이었다. 나택이 고개를 젖히며 재빨리 수면으로 올라갔다. 꽃잎 몇 장을 뺨에 붙인 채 나택이 비누를 다급하게 청동 쟁반으로 돌려놓았다.
“저, 향유병 좀 주워 오겠습니다.”
“향유병은 갑자기 왜.”
“아…. 그….”
정체 모를 빛이 물을 머금고 녹아내립니다.
시스템은 지독한 놈이었다. 제 마음대로 빨리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이런 식으로 힌트를 주었다가도 금방 내 도로 빼앗아 가려 했다. 다급해진 나택이 빠르게 말을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