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쿤가의 고삐를 쥔 채로 메데우스가 나택에게 다가왔다. 없는 죄도 만들어 씌울 놈이 메데우스다. 나택의 손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근처에 있던 시종은 어느새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높은 그늘이 나택의 이마에 드리웠다.
“테레시. 내가 분명 네게 한 말이 있을 텐데.”
밑도 끝도 없이 대뜸 뱉는 말에 나택의 입술이 달싹였다.
네가 한 말이 한두 개여야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뭔 줄 어떻게 아냐.
“어…….”
나택이 수눈키에 독심술 스킬이 없는 것을 한탄할 때였다. 메데우스가 수그리며 코끝을 나택의 어깨로 내렸다. 킁킁, 짧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
아, 냄새!
뒤이어 얼음장 같은 시선이 나택의 뺨을 스쳤다.
와…. 이 지독한 놈. 해도 해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어제 목욕탕에 처박혀서 향유 세례까지 받은 데다 이제껏 한 거라고는 시중들고 광산 행렬을 따라온 것뿐인데. 메데우스는 지금 제게 다른 이의 냄새가 옮았다 묵음으로 타박하고 있었다.
이쯤 되니 나택의 마음속에 확신이 피었다. 이건 복수다. 범선에서 제 자리를 무단 점령한 일에 대한 복수가 틀림없었다.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거로 연장 시비를 걸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 밤 그때의 일을 다시 사죄해야 할 것 같았다. 뭣하면 석고대죄라도 하겠다 다짐하며 나택이 입을 열었다.
“조심하고 있습니다. 싫어하시는 향이 옮지 않도록 유의하고 있고요.”
“유의하는 태도가 그거야?”
나택은 혈압이 오르는 뒤통수를 애써 진정시켰다.
“더… 조심하겠습니다.”
그때, 담가르갈이 멀리서 외쳤다.
“장군, 이제 가시지요. 에아의 신전까지 들르려면 바삐 걸음 하셔야 합니다.”
메데우스가 그제야 서늘한 눈초리를 거두었다. 흰 손바닥에 쥐어 있던 고삐가 나택의 가슴에 턱 얹어졌다.
“채굴장을 둘러보고 곧바로 에아의 신전으로 갈 거야. 노예는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 곳이라 하니 저쪽에서 기다려.”
나택이 고삐를 받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잠들기 전에 메데우스가 언질 줬던 말이 떠올랐다.
‘주석 광산 근처에 에아의 신전이 있어. 델람의 주 신전이니, 스메나피쉬팀도 자주 걸음 했을 거야. 신관들 중에 스메나피쉬팀에 대한 소식을 아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나는 신전 쪽을 살펴볼게. 넌 그 틈에 델람의 시종이나 광부들을 떠봐. 운이 좋으면 뭐라도 얻을 수 있겠지.’
“델람은 우루크보다 해가 뜨거워. 더위 먹지 않게 알아서 잘 챙기고.”
메데우스가 멀찍한 그늘을 턱짓했다.
“예…. 알겠습니다.”
누구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시비나 털리면서 미움받는데, 네발 달린 쿤가는 그저 동행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늘을 챙겨 줄 정도로 극진한 보살핌을 받는다니. 이게 바로 노예의 현실인가 싶어 입맛이 씁쓸했다. 나택은 아랫입술을 혀로 핥으며 쓴맛을 삼켰다. 메데우스의 눈동자가 자신의 입술에 앉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나택은 메데우스가 떠나고 한참 동안 알맹이 없는 대화를 들어야만 했다. 노예인 줄 알았던 광산의 일손들은 절반이 자유민이었다. 노예 신분인 자들도 빚을 갚지 못해 한시적으로 신분이 강등된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때문인지 이들은 제때 식사 시간을 갖는 것도 허락되었다. 덕분에 나택은 점심을 먹으러 그늘로 모여든 광부들과 말을 섞을 수 있었다.
“그쪽이 우루크 장군님을 모시는 시종이오?”
“예.”
“주인의 명예는 시종의 명예이기도 하지. 자랑스러우시겠소.”
“예. 뭐…….”
메데우스가 자식도 아니고 제자도 아닌데 어떻게 내 명예가 되겠나 싶었지만, 속마음을 드러내진 않았다.
광부들은 김치통보다 큰 항아리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저마다 긴 갈대 빨대를 항아리에 꽂아 넣고는 안에 든 시카르를 사이좋게 나눠 마셨다. 잔 돌려 마시기보다 더한 풍경은 볼 때마다 적응되지 않았지만, 그게 이곳에서 시카르를 마시는 기본 문화였다.
시원하게 한 모금을 빨아 마신 다른 광부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메데우스 장군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래. 항간에 도는 소문이 진실이야? 정말로 그…….”
박력 있고… 성정이 거센 분이신가?
패기 있게 질문하던 놈의 말꼬리가 끝에서 흐물해졌다.
박력이 있고 성정이 거센 게 아니라 괴팍하고 잔악무도하다는 소문의 진실을 듣고 싶었던 거겠지.
그렇다고 대답하려던 나택의 고개가 순간 주춤했다.
박력?
‘앞으로 장미 향 옮겨 오지 마.’
‘풀 내도 옮겨 오지 말고.’
‘바다 비린내도 옮겨 오지 마.’
‘전부 기분 나쁘니까, 다른 향 옮겨 오지 마.’
……박력보다는 치졸에 가깝지.
“글쎄요. 보기와는 다른 면도 있으십니다.”
“오호? 어떤 면?”
나택의 눈알이 자연스럽게 허공을 구르며 지난날을 더듬었다.
“어떤 면이냐 하면….”
메데우스가 생긴 것과 다르게 괴팍하고 치졸한 면이 있는 놈이라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하나하나 짚어 보면 메데우스의 치졸함 이전에는 늘 나택의 실수가 선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장 범선에서의 일만을 두고 보아도 나택이 먼저 메데우스의 자리에 드러눕지 않았나.
어제오늘 당하는 시비는 그에 대한 복수이니 메데우스만 욕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택은 적당히 제 감상과 세간의 품평을 섞었다.
“인과관계를 확실히 따지시죠. 그것도 자세하게. 박력도 있지만……. 섬세한 면도 있으십니다.”
그러자 옆에서 조용히 시카르를 마시던 광부가 보리빵을 뜯어 입에 물며 말문을 열었다.
“어떤 면에서는 스메나피쉬팀 님과 비슷하구먼.”
뜻밖에 튀어나온 이름에 나택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어? 듣고 보니 그러네. 박력 있는데 섬세한 면도 있다라. 스메나피쉬팀 님께서 확실히 그런 면을 갖고 계시긴 하지.”
나택이 손에 들린 고삐를 꾹 쥐었다. 동시에 시스템 안내 문구가 떴다.
사라진 후계자, ‘스메나피쉬팀’에 대한 소문을 들어 보자.
나택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칠뻔한 손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이렇게 얻어걸린다고?
‘넌 그 틈에 델람의 시종이나 광부들을 떠봐. 운이 좋으면 뭐라도 얻을 수 있겠지.’
역시…… 나의 인도자.
순간 나택의 가슴속에서 메데우스에 대한 믿음이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이나택의 길잡이답게, 메데우스가 준 언질은 시스템의 진행과 같은 방향을 걷고 있었다.
나택은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광부들에게 말을 걸었다.
“스메나피쉬팀 님이라면 델람의 후계자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맞아.”
“그러고 보니 스메나피쉬팀 님을 뵙지 못한 지도 한참 되지 않았어?”
“그러게. 주에 한번은 에아의 신전에 기도를 드리러 가시면서 꼭 이곳을 들르시곤 했는데. 걸음 하지 않으신 지도 반년쯤 되었지, 아마?”
“그럼 서쪽의 공역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채석장에 들른 후에는 매번 서쪽 공사 터에 들렀다 가셨잖아.”
시카르를 마시던 광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택이 재빨리 되받아쳤다.
“공사는 무슨 공사입니까?”
“이 사람, 우루크 사람이 델람의 일에 관심이 많구먼!”
뜨끔한 나택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아……. 제 주인님과 델람의 공주님께서 장차 한… 가문의 일원이 될 수도 있는데. 시종이 된 도리로서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죠.”
“듣고 보니 그렇구먼. 맞는 말이야. 서쪽에서 말이야.”
“내가 얘기해 주지! 자네는 서쪽에서 공역을 한 적이 없잖아. 나는 이곳에 오기 전 서쪽에서 일했었다고!”
“에헤이, 사람 참……. 아, 맘대로 하시게!”
토라진 흉내를 내며 일꾼 하나가 기회를 양보했다.
“에헴. 한 아홉 달 전에 말이야. 스메나피쉬팀 님께서 에아의 신전에 다녀오시더니, 갑자기 급하게 사람을 모으시는 거야. 농부와 상인을 제외한 자들을 모으고는, 서쪽의 니무쉬 언덕에 성채를 하나 지으라 명령하셨어.”
“말이 성채지, 내가 볼 땐 딱 배처럼 생겼어. 투박하고 아주 큰 배.”
어? 잠깐. 배처럼 생긴 성채라면……. 방주 아닌가?
“아, 하여튼. 그 성채를 짓는 공사에 아주 열을 올리시더라고. 게다가 샤바투(11월을 뜻함) 초하룻날이 오기 전까지 꼭 완성을 해야 한다고 그렇게 강조를 하시더라고.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정작 완공을 코앞에 두고서는 갑자기 발길을 뚝 끊으셨어.”
“별궁으로 쓰기엔 너무 간소하게 생겼는데. 대체 그걸 어디에 쓰려고 하시는 걸까?”
“난들 알겠나. 나도 그렇고, 다른 일꾼들도 그 쓰임새를 도통 모르겠다고 하니.”
배처럼 생긴 성채만 한 건물. 거기다 샤바투의 초하룻날이라는 기한.
앞뒤 사정을 아는 나택에게는 그 이유가 훤히 보였다. 나택이 찔러보듯 불쑥 질문을 던졌다.
“혹시, 에아의 신전에서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닐까요?”
“무슨 이야기를 들었길래 그런 용도 모를 성채를 짓는단 말이야?”
“거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 귀족과 신관님들은 신의 계시라고 하면서 영문 모를 일을 자주 벌이니까. 혹시 아나? 이 모든 게 에아의 계시일지도.”
광부 한 명이 말을 마치는 순간이었다. 나택의 눈앞에 빛이 쏟아졌다. 광부들을 배경으로 삼으며 투명한 창에 밝은 글자가 떠올랐다.
‘에아의 계시’ 키워드를 획득했습니다!
나택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함께 온 병력이라곤 메데우스 한 명뿐이었지만, 스토리는 나택이 알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