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델람을 배경으로 재생되던 영상들이 나택의 뇌리를 빠르게 스쳐 갔다.
‘섭리를 거스른 인간에게 신들이 대로하였으니, 그들의 땅을 물로 심판하겠노라 하였다.’
‘물의 신 에아는 대홍수로 목숨을 잃게 될 델람의 백성을 가엾게 여기었다.’
‘교만하지 않고 믿음이 깊은 델람의 후계자. 에아는 그에게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비밀스럽게 전달했다.’
스메나피쉬팀은 에아에게 대홍수를 예지 받은 것이다.
“근데 왜 하필 샤바투 초하루 전에 완성을 해야 한다고 하신 거지?”
왜긴……. 그날이 수나파크가 잠기는 날이니까 그렇지.
디데이까지 날을 셈해 보려던 나택은 자신이 오늘 날짜를 모른다는 걸 그제야 눈치챘다. 나택이 다급하게 옆에 있는 광부에게 물었다.
“혹시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됩니까? 샤바투 초하루가 오려면 얼마나 남았죠?”
“어디 보자……. 오늘이 테베투(10월을 뜻함)의 스물, 스물하나…….”
손가락을 접던 광부가 짝 소리가 나도록 박수를 치더니 손가락 세 개를 흔들었다.
“아이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어? 샤바투 초하루까지 세 날밖에 안 남았네.”
“예?”
나택의 낯빛이 삽시간에 굳었다.
3일. 정확하게 두 밤을 자고 난 뒤에 수나파크는 물에 잠긴다.
나택은 멍하니 선 채로 절망에 빠졌다. 꿈인지 생시인지 때맞춰 저 멀리에서 메데우스가 돌아오는 게 보였다. 나택은 마음속으로 제 인도자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울었다.
“3일…….”
3일 안에 가능한 미션이냐, 이게…….
느리게 걷던 메데우스가 나택의 표정을 보더니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직 스메나피쉬팀도 찾지 못했고, 방주가 어디 있는지도 정확하게 모르며, 캄비세스가 권력을 잡지 못하게 막는 일은 시작도 못 했는데. 이 모든 걸 2박 3일 안에 끝내야 한다니.
“테레시.”
메데우스야…. 우리 아직 아무것도 못 했는데……. 어떡하냐…….
“무슨 일이야. 표정이 왜 그래.”
“메데우스 님…….”
막막한 현실의 충격에 얼이 빠진 나택이 느릿느릿 일어섰다. 팔자로 쳐진 나택의 눈썹을 확인한 순간 메데우스의 눈꼬리가 하늘로 솟았다. 그 눈발을 직격으로 맞은 건 나택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어, 어이쿠. 자, 장군님.”
앉아 있던 광부들이 뒤늦게 메데우스를 발견하고는 허둥지둥 일어섰다. 일꾼들이 표하는 경외감은 메데우스를 거쳐 뒤에서 천천히 다가오던 인사에게 멈추었다. 언제 합류한 건지 쿤가를 탄 캄비세스가 있었다.
“장군. 무슨 일이기에 그리 다급하게 가십니까.”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택이 메데우스에게 거짓으로 해명했다.
“오래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셔서, 걱정이 돼서 그랬습니다, 메데우스 님.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예. 그럼요.”
메데우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허. 장군을 향한 시종의 충심이 보통이 아닙니다.”
캄비세스는 그늘 안까지 들어오고서 쿤가를 세웠다. 쿤가에서 내리는 그에게 길을 터 주기 위해 광부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런데 그때 캄비세스와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일꾼 한 명이 휘청거렸다. 튀어나온 돌부리에 발이 걸려 중심을 잃은 것이다. 어떻게든 균형을 잡으려 휘젓던 팔이 쿤가의 코끝을 쳤다. 놀란 쿤가가 히힝 울며 앞발을 쳐들었다.
“아악!”
“캄비세스 님!”
그 바람에 말에서 내리던 캄비세스가 옆으로 쓰러졌다. 캄비세스의 가슴팍과 옷깃이 흐트러지더니, 벌어진 옷감 사이로 번쩍거리는 목걸이가 드러났다. 짙고 선명한 푸른색, 커다란 청금석이 박혀 있는 목걸이였다.
순간, 메데우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캄비세스 님, 괜찮으십니까?!”
담가르갈과 시종이 다급하게 뛰어갔다. 부축을 받으며 일어선 캄비세스의 낯빛이 순식간에 살기로 뒤덮였다. 인자한 가면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분노가 채웠다.
“천한 광부 주제에. 네놈이 감히 나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캄비세스가 순식간에 쿤가 안장에 걸쳐 두었던 채찍을 쥐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바짝 엎드린 광부를 향해 온 힘을 실어 채찍을 휘둘렀다.
짝-!
“죄송합니다! 캄비세스 님! 정말 죄송합니다! 으윽.”
광부가 몸을 웅크리며 두 손을 싹싹 비볐다. 그러자 다른 일꾼들도 줄줄이 땅에 이마를 붙였다. 캄비세스는 화를 제어하지 못하고 바닥에 있는 자들을 향해 힘껏 매질했다.
“버러지 같은 놈들. 나의 땅에서 나의 자원들로 먹고사는 주제에, 감히 이런 짓을 저질러?!”
살갗을 찢는 따가운 소리가 채굴장을 울렸다. 이 자리에서 캄비세스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메데우스뿐이었다. 그러나 메데우스는 짝다리를 짚고 서서 팔짱을 끼고 가만히 서 있었다. 메데우스의 시선은 캄비세스의 가슴팍에 고정되어 있었다.
짝- 짝-!
날카로운 채찍 소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살을 찢는 파열음에 귀가 따가웠다.
사람이 실수를 좀 한 것 가지고 저렇게 매질을 하다니.
나택이 인상을 찌푸렸다.
좀 말려 봐라, 보고만 있지 말고.
나택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메데우스를 흘끔 했다. 그런데 메데우스도 나택을 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구겨진 나택의 미간을 주시하고 있었다. 메데우스가 입을 열었다.
“캄비세스. 그쯤 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멈추지 않을 것 같던 채찍 소리가 낮은 목소리에 뚝 끊겼다. 회까닥 돌아갔던 캄비세스의 눈빛이 곧바로 가식적인 예의를 차렸다.
“경우를 모르는 것들은 매질로라도 교육을 해야지요.”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은데. 계속하실 생각이라면 저는 먼저 돌아가 봐도 되겠습니까. 오늘따라 피곤하군요.”
“아아, 이런. 내 정신 좀 봐.”
메데우스의 말에 캄비세스가 채찍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쿤가를 건드렸던 광부를 냅다 발로 찼다.
“썩 꺼져!”
“감사합니다, 캄비세스 님. 감사합니다.”
일꾼들은 옷이 찢기고 피가 배어 나온 상태로 뒷걸음질을 치며 광산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장군께 좀 더 마음을 썼어야 했는데. 내 불찰입니다. 이해해 주세요. 하지만 눈앞의 잘못은 그때그때 바로잡아야지요. 아랫놈들을 가르치는 데는 이만한 방법이 없습니다. 즉효를 보이지요.”
메데우스가 표정의 변화 없이 쿤가에 올라탔다.
“그렇게 효과가 좋은 방법이라니. 조만간 저도 가르치는 법을 바꿔 봐야겠군요.”
나택이 움찔했다.
뭐 좋다고 저런 걸 배우겠다는 거야. 지금 잘못하면 채찍질하겠다고 나한테 선전 포고를 하는 건가.
캄비세스가 뒤이어 쿤가에 올라타며 껄껄 웃었다.
“왜 진작에 방법을 바꾸지 않았나, 싶으실 겁니다.”
메데우스와 캄비세스가 나란히 쿤가를 몰기 시작했다. 나택은 그 뒤를 따라가며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흔들었다.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처소의 입구까지 델람의 시종도 함께 걸음 했다. 정신없을 정도로 화려한 처소에 도착하자 델람의 시종이 곱게 접은 새 이불과 천을 나택에게 건네며 말했다.
“캄비세스 님께서 저녁 만찬은 메데우스 님과 단둘이 보내고 싶다 하십니다.”
“알겠다고 전해.”
델람의 시종이 허리를 깍듯이 숙였다.
“그럼 만찬이 준비되면 모시러 오겠습니다.”
시종이 문밖에 발을 딛자마자 메데우스는 매정하게 출입문을 닫았다. 나택은 받은 천을 테이블에 올려 두고는 전등불부터 켰다. 뒤이어 메데우스가 벗은 겉옷을 받아서 들어 정리했다.
채굴장에서 오는 내내 나택은 골똘히 생각하고 또 고민했다. 메데우스에게 이틀 뒤에 벌어질 대홍수를 전해야 하는데. 어떻게 운을 떼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택에게는 신뢰의 바탕이 될 지위가 없었다. 가령 알게 된 지 한 달밖에 안 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대뜸 사흘 뒤에 서울이 물에 잠겨 사라지니 서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른 도시로 대피시켜야 한다고 외친다면 어느 누가 그 말을 믿을까.
나택 역시 믿지 않을 것 같았다. 사이비 취급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쥐 떼나 개미 떼가 출몰하는 징조라도 있었다면 근거라고 주장하며 한 번 시도해 볼 수도 있겠으나, 현재 델람의 하늘은 아주 맑고 투명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을 함으로써 메데우스에게 마저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 발언으로 메데우스가 저와 거리를 두게 된다면…….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나택은 메데우스에게서 멀어질 수 없었다.
만약, 어떠한 불운이나 불상사로 대재앙이 올 거란 사실을 전달하지 못한다면, 최후의 수단으로 나택은 메데우스를 기절시켜 들쳐 업고서라도 수나파크를 빠져나가야 했다.
하지만 저 철옹성 같은 놈을 어떻게 기절시킨단 말인가. 결국엔 어느 쪽이든 메데우스를 설득시키는 것밖에는 답이 없었다. 믿어 달라 우겨서 될 일이 아니었다. 명확한 사실을 알고 있는데, 이걸 메데우스에게 곧바로 전달할 수가 없었다.
하 씨, 미치겠네……. 뭐라고 설명하지.
그런데 침묵을 깨고 먼저 화두를 연 것은 메데우스였다.
“아까부터 표정이 왜 그래.”
갈아입은 옷의 허리끈을 묶으며 메데우스가 다가왔다.
“제 표정이 어떻길……. 읏.”
메데우스가 나택의 턱을 쥐고는 휙 올렸다. 어찌나 세게 당기는지 발꿈치가 들릴 것 같았다. 목의 얇은 피부가 팽팽해지며 나택의 울대뼈가 도드라졌다. 긴장감에 타액을 삼키는 게 적나라하게 보였다.
“네가 이런 얼굴 하는 건 처음 봐. 일꾼들하고 시비라도 붙었어?”
그 말을 하면서 메데우스는 엄지로 나택의 아랫입술을 문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