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목이 당기는 불편함에 나택의 입에서 숨소리가 힘겹게 새어 나왔다.
“아뇨. 시비, 라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 근데 이건 좀, 놓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메데우스의 손이 턱선을 타고 옆으로 미끄러졌다. 하얀 손바닥의 우악스러운 힘에 나택의 뺨이 짜부라졌다. 불편한 자세를 버티기 힘들었던 나택이 눈가를 일그러트리며 얕은 신음을 흘렸다.
“으. 메데, 우스 님.”
나택이 양손으로 메데우스의 손목을 잡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메데우스가 나택이 물러난 만큼 앞으로 걸음 했다. 당황한 나택은 점점 물러나고 메데우스는 그럴수록 바짝 붙어 왔다. 결국은 나택의 등이 벽에 닿고 말았다.
얘는 또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해 본 적이 있다고.”
메데우스가 나택의 뺨을 세게 쥐며 제 아랫입술 안쪽을 짓씹었다.
“네?”
앞뒤 문맥이 맞지 않는 대화의 흐름에 나택이 눈을 깜빡거렸다.
뭔 소리지.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아야!”
하얀 손이 이번엔 나택의 뺨을 꼬집듯 움키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나택이 메데우스의 손등을 간절하게 움켜쥐었다.
“아픕니다, 메데우스 님. 으악!”
나택의 간곡한 손바닥 하나가 메데우스의 아래팔을 쓸었다. 그 감촉에 메데우스의 팔이 잘게 떨렸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너를 보면 자꾸 이상한 게 떠올라.”
이상한 거? 설마 괴상한 방법의 체벌을 말하는 건가.
지금 잡힌 뺨도 너무 아파 뜯겨 나갈 것만 같았다. 나택이 울상을 지으며 되물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순 없습니까.”
“너를 보면…….”
메데우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말을 하려다 말고, 하려다 말고. 그 망설임이 길어질수록 나택의 뺨에 가중되는 압박은 더욱 짙어졌다.
“메데우스 님……. 진짜 아픕니다.”
나택이 다시 한번 애걸했다. 그 말을 듣는 메데우스의 입에서 야트막하게 상소리가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일그러진 나택의 시야에 그늘이 졌다. 메데우스가 상체를 숙이며 나택을 덮었다. 그 순간 나택은 생각했다.
이놈이 또 시비를 걸려고 이러는구나.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를 괴롭히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앞에서는 잘해 주는 척하며 뒤에서 험담을 퍼트리는 부류도 있고, 대놓고 면전에서 무안을 주는 부류도 있다.
메데우스가 제게 하는 행동들 역시 그런 종류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아량을 베푸는 척하며 사람을 방심하게 해 놓고는 불시에 트집을 잡는 방법. 그게 아니고서는 메데우스의 태도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가뜩이나 골치 아픈데, 자꾸 이런 일로 에너지 낭비를 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수나파크를 무사히 빠져나갈 때까지만이라도 말이다.
나택이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열었다.
“델람에 있을 때만큼은 좀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메데우스가 그대로 굳었다.
“……뭐?”
“제가 부족한 거 저도 잘 압니다. 메데우스 님께서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는 것도 알고요. 그런 거에 비해서는……. 많이 봐주고 계신다는 것도 압니다. 거슬리지 않게 하고 싶은데, 델람은 저도 처음이다 보니 우루크에서보다 실수가 더 잦은 것 같습니다. 조금만… 델람에 있을 때만이라도 조금만 더 아량을 베풀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나택에게 드리운 그림자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내가 지금… 널 괴롭히고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나택이 그제야 꾹 감은 눈을 스르륵 떴다.
“아닙니까……?”
“……하.”
메데우스가 실소를 흘렸다.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붙었다.
“내가 널…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그래서 괴롭히고 있다고.”
또 무슨 소릴 하려고 제 말을 되씹어 보나, 나택의 가슴에 불안이 피었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메데우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무언가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한 눈빛을 했다. 커다란 손이 나택을 던지듯 밀어내더니 제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 그러도록 하지.”
메데우스가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답했다. 장신의 어깨가 테이블 쪽으로 획 방향을 틀었다. 의자에 앉은 메데우스는 그러고 한참을 침묵한 채 가만히 있었다.
굳어진 지금의 분위기는 나택에게 너무 갑작스러웠다. 델람에 온 뒤로는 유독 메데우스의 기분을 예측할 수 없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눈치를 볼 새도 없이 이리 튀고 저리 튀니 도통 적응할 수가 없었다.
길게 흐르던 침묵이 메데우스의 한숨 소리에 끊어졌다. 메데우스가 얕게 고개를 내저으며 손끝으로 상 위를 톡톡 두드렸다.
“네 말대로 해 줄 테니 일단 앉아.”
나택은 얼른 불을 붙인 유등을 들고 테이블로 다가갔다. 메데우스는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 이유를 되물어 볼까 하다 나택은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만찬장 앞까지는 제가 동행해도 될까요?”
“그러지 않는 게 좋겠어.”
화제가 바뀌자 메데우스 역시 차분한 어조로 받아쳤다.
“그나저나 테레시, 아까 캄비세스의 목걸이 봤어?”
“예. 푸른색 보석이 박힌 걸 말씀하시는 거죠?”
커다란 알에 선명하고 짙은 푸른색은 현대에서도 보기 힘든 영롱한 색감이었다. 그쪽으로는 문외한인 나택마저도 가치를 알아볼 정도였다.
“그래. 어디까지 엮여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캄비세스와 루할자게시가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아.”
뜬금없이 끌려 나온 루할자게시의 이름에 나택의 눈썹이 들썩였다.
“대신관님이…… 캄비세스 님과요?”
“캄비세스의 목에 걸려 있던 그건 청금석이야. 그것도 특상품의 청금석.”
수눈키 속 메소포타미아에서 청금석은 현대의 다이아몬드보다 더욱 값비싸고 귀한 보석이었다. 그것뿐 아니라…….
“상품의 청금석은 우루크에서만 생산돼.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가 없어. 게다가 그 정도의 특상품이라면 우루크 안에서도 한 손에 꼽을 정도의 수량밖에 없어. 엔시께서도 귀히 여겨 잘 사용하시지 않는 보석이야.”
“담가르갈이 들여온 물건이 아닐까요.”
“상등품 청금석은 채광이 어려워진 지 오래야. 그래서 지금은 수확량과 거래 모든 걸 엔시께서 관리하시지. 공식적으로 엔시의 승인을 받은 거래 외에는 수출도 금지되어 있어.”
“하지만…….”
그런 귀한 걸 캄비세스가 떡하니 목에 걸고 있다는 뜻이었다.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청금석 거래마저도…. 신전 쪽은 예외가 되는 겁니까? 주석처럼요.”
메데우스가 끄덕였다. 수눈키 속의 메소포타미아는 군주만큼이나 신을 중요시하는 제정일치의 사회다. 그 때문에 신전과 신관 역시 큰 역할을 맡았는데, 신관은 제사나 신을 모시는 일 외에도 공물과 주요 무역품의 관리를 함께 도맡았다.
이게 대신관 루할자게시가 주석을 수입할 수 있던 이유였다. 심지어 우루크 군보다도 더 많은 양의 주석을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즉, 루할자게시 역시 청금석을 관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정리되자 나택의 눈동자에 확신이 섰다.
“대신관님께서 청금석을 준 거군요.”
“주석의 일도 있고 하니, 놈의 짓이 맞겠지. 하나 그걸…… 아무 대가 없이 주진 않았을 텐데.”
메데우스의 어깨가 등받이의 쿠션에 묻혔다. 긴 다리가 한쪽으로 꼬아 넘어가더니 까딱까딱, 발끝을 흔들었다.
“특상품의 청금석은 루할자게시도 귀하게 여기는 물건이야. 주석 수입을 대가로 지불했다고 하기엔……. 너무 과해.”
“두 사람 사이에 다른 거래가 있었다고 보는 게 맞겠네요.”
메데우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귀한 보석을…… 은밀하게 내빼서 줄 정도의 가치가 있는 거래. 그게 대체 뭘까.”
메데우스의 고민은 스토리 진행의 핵심이나 다름없었다. 제 인도자의 이야기를 들은 나택은 더욱 심란해졌다. 스메나피쉬팀의 실종, 공주와의 혼사 거부, 주석 수입 문제, 거기에 캄비세스와 루할자게시의 거래까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나택에게는 이 모든 것보다 당장 이틀 뒤에 터질 수나파크의 대홍수가 더 중요했다. 침음 하던 나택이 메데우스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래, 돌려 말하는 한이 있더라도 언질은 해보자.
“저, 메데우스 님.”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
“메데우스 장군님. 만찬이 준비되었습니다. 캄비세스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종의 안내에 메데우스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접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게 빠르겠어.”
긴 다리가 성큼성큼 출입문을 향했다. 타이밍 한번 절묘했다. 문손잡이를 돌리려던 메데우스가 나택을 돌아보았다. 나택은 침울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다녀오세요.”
기껏 결심해서 기회를 잡았는데, 만찬장에 선수를 빼앗기다니.
“내가 올 때까지 문 잠그고 있어. 이야기 마치면 곧바로 돌아올 테니까.”
뭘 문까지 잠그래. 누가 들어온다고.
“……예.”
메데우스는 나택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문을 열었다. 복도에 선 델람의 시종은 뿌듯한 표정으로 생글거리고 있었다. 곧이어 복도의 불빛이 쿵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델람 정복의 과정은 마치 늪에 빠지는 것처럼 더 깊은 진창으로 쑤셔박히고 있었다.
나택은 우선 메데우스의 말대로 문부터 잠갔다. 고작 시종 하나 있는 방인데, 누가 못된 짓을 할까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이 방의 주인은 메데우스였다. 메데우스를 반기지 않는 일당이 몰래 독사나 전갈을 풀어 놓을지도 모른다.
필시 그것 때문에 방을 지키고 있으라는 얘기인 듯했다.
철두철미한 놈.
어찌 보면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메데우스가 올 때까지 어떻게 말할 것인지 정리할 시간이 주어진 셈이다.
나택은 조심스럽게 의자를 꺼내 테이블 앞에 앉았다. 공기가 적막하게 가라앉자 머릿속에 3일이란 시간이 가득 찼다.
“대홍수……. 어떻게 운을 띄우지.”
일꾼들에게서 들었다고 할까. 대홍수가 올 거라고 했다고.
하지만 일꾼들도 아는 예언을 캄비세스가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꿈을 꿨다고 할까?
“델람에 오자마자 꾼 기이하고 생생한 꿈……. 그래. 이게 제일 낫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