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메데우스가 나택의 턱을 세게 깨물었다. 잘근 물다가 뜯어먹을 듯 씹고 당기는 힘에 나택의 혼란이 가중됐다.
이건 고대 문명에서 체벌하는 방법인가? 아니면 기어이 나를 죽일 작정인 건가.
목을 조이는 힘 때문에 숨쉬기도 힘든데, 몸을 짓누르는 메데우스의 상체는 철근 같았다.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나택의 눈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흘렀다. 격하게 물어 대는 턱은 금방에라도 뜯겨 나갈 것만 같았다.
견디다 못한 나택이 메데우스의 어깨를 짚었다.
“메데…우스 님……!”
전력을 다해 메데우스의 어깨를 마구 밀어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감정을 삼키는 메데우스의 치아가 나택의 아랫입술에 닿기 직전이었다.
“윽…….”
메데우스의 시야에 고통스럽게 눈물을 흘리는 나택이 들어왔다. 그제야 메데우스가 천천히 손을 놓아주며 몸을 일으켰다.
“콜록콜록! 허으……. 하아…….”
나택은 옆으로 돌아 기침을 하며 손등으로 제 눈을 마구 닦았다. 이제껏 메데우스가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손을 댄 적은 없었다. 그 탓에 나택은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메데우스가 이 문명의 전역에 어떻게 알려져 있는지, 얼마나 잔인한 놈으로 정평이 나 있는지를 말이다.
잠시나마 좋은 놈이라고 생각하고 방심했던 게 큰 오산이었다. 나택이 아래팔로 남은 눈가의 물기를 벅벅 문지르는데 그대로 손목이 잡혔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예.”
안 해, 인마. 두 번 했다간 진짜로 사람 죽이겠네.
“다음엔 이렇게 넘어가지 않을 거야.”
“알겠습니다.”
다음엔 나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이 새끼야.
메데우스는 나택의 팔을 끌어 내리더니 근처에 있던 깨끗한 천을 가져와 건넸다. 수건으로 쓰는 직물이었다. 병 주고 약 주고가 따로 없었다. 나택은 분한 속을 삼키며 순순히 천을 받아들었다. 눈물을 닦고 코도 풀었다.
그래도 죽이지 않고 풀어 주는 것을 보니, 이 방법이 고대 문명의 체벌 중 하나가 맞는 것 같았다. 이제는 시스템도 미웠다. 하필 그때 퀘스트를 주지만 않았어도 이런 수모는 겪지 않았을 텐데.
아닌가. 내가 꽝을 고른 탓인가……?
“왜 내 말을 듣지 않았어. 거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나택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메데우스가 곧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잠시 치워 두었던 현실이 후루룩 끌려왔다.
팽, 코를 풀며 나택이 답했다.
“꼭 확인해 봐야 할 게 있어서 그랬습니다. 일을 크게 만들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이번엔 또 뭘 확인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말하며 메데우스는 새로운 천을 하나 더 들고 왔다. 당연히 제게 주는 줄 알고 나택이 손을 내밀었으나 메데우스는 나택의 손을 밀어내며 직접 눈가를 꾹꾹 눌러 주었다. 다 닦지 못한 이슬이 점점이 묻어 나왔다. 나택은 저도 모르게 도끼눈을 뜨려던 것을 이성으로 눌러 참았다.
이건 또 뭐 하자는 거지. 체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방법인가.
“뭘 확인하려고 했냐니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메데우스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나택은 코 푼 천을 손에 꼭 쥐고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
뭘 확인하려 했느냐 하면, 시스템이 안내하는 길에 무엇이 있는지를 확인하려 했다. 그러다 하필이면 꽝을 뽑았고, 꽝을 뽑은 덕에 제대로 된 길을 알게 되었다.
“말해 봐.”
나택이 메데우스를 힐끔 했다. 방금의 일도 있고 이제 아무리 조심한다고 하더라도 더는 혼자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그곳에는 꼭 가 봐야 했다.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요는 혼자 움직이지 않으면 된다는 거니까.
나택은 이 퀘스트의 진행에 메데우스를 기꺼이 끌어들이기로 결심했다.
“메데우스 님께서 성 내에 스메나피쉬팀 님이 계실 거라고 확신하셨지 않습니까.”
나택은 재빨리 꾀를 짜내 거짓말을 기워 냈다.
“아까 메데우스 님이 가시고 난 뒤에 시종들끼리 하는 얘기를 우연히 들었습니다. 성내 동쪽 길에서…… 스메나피쉬팀 님을 봤다고요. 그쪽을 찾아보면 스메나피쉬팀 님에 대해 뭐든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래서 갔던 겁니다.”
“네가 있던 곳은 동쪽이 아니라 서쪽이었잖아.”
그건 내가 꽝을 골라서 그런 거지만…….
“거기가 동쪽인 줄 알았습니다….”
“성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네가, 그 얘기만을 듣고 이렇게 무모한 행동을 했다고?”
메데우스 입장에선 납득하기 힘들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택은 그런 걸 따져 가며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현재 진행 중인 퀘스트는 ‘스메나피쉬팀의 행방’이다. 그러니 퀘스트가 안내하는 곳을 가면 놈을 찾을 수 있을 확률이 높았다. 흐름을 보건대, 놈을 찾는다면 자연스럽게 방주에 탑승할 수 있을 터였고, 그렇게 되면 아마 델람도 정복하고 메데우스도 무사히 탈출시킬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촉박할수록 나택은 직진할 수밖에 없었다.
“우루크의 일은 메데우스 님의 일이고, 그건 곧 제 일이잖아요. 메데우스 님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거짓말은 청산유수였다.
“미리 말씀드리지 않고 제 독단으로 부주의하게 움직인 건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단서가 있다면 빨리 움직이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확실해?”
“네. 분명 시종들이 그렇게 얘기했고,”
“아니. 네 생각. 네가 생각하기에 그 이야기가 확실하냐고.”
메데우스는 노예 테레시가 아니라, 한때 귀족이었던 테레시의 의견을 묻고 있었다. 나택이 눈을 빛내며 메데우스를 응시했다.
야. 완전. 완전 확실해. 이건 내가 아니라 시스템이 짚어 준 방향이니까.
“네. 확신합니다. 저도 그쪽에 가면 스메나피쉬팀 님에 대한 어떤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택의 말을 들은 메데우스가 얕게 한숨을 쉬었다.
“방금 그 소동을 피웠으니, 오늘은 몸을 사리는 게 좋겠어. 내일 밤에 가 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는데. 절대 혼자서 움직이지 마. 앞으론 어딜 가든 나와 동행해.”
나택은 굳센 표정으로 끄덕였다. 체벌을 당한 데에 대한 노여움은 잠시 미뤄 둔 채.
안 그래도 너 끌고 가려고 했다!
* * *
예고된 수나파크의 대홍수까지는 2박 3일이 남았다. 오늘 밤을 자고 일어나면 1박 2일이 된다. 2일째 자정이 되는 순간 물이 쏟아질 수도 있으니 정확하게는 하루가 남았다고 보는 게 속이 편했다.
심란한 마음에 나택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게임에서야 성 담벼락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캄캄한 지하 감옥에도 겁 없이 내려가고 한다지만, 내일부터 나택이 맞닥뜨려야 할 상황은 현실이었다. 직접 몸으로 그 위험에 뛰어든다 생각하니 덜컥 걱정이 됐다.
설마…… 갑자기 칼 든 경비가 튀어나와서 찔려 죽고… 그러진 않겠지……?
온갖 잡생각이 끊임없이 몰려왔다. 여차하면 메데우스만이라도 어떻게든 탈출시켜야 한다는 다짐을 하며 나택은 양손을 제 가슴 위에 얹었다. 그러곤 깊게 심호흡을 여러 번 반복했다.
그래도 뛰는 심장이 가라앉지 않아 이번엔 자세를 바꿔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런데 메데우스도 옆으로 누워 나택을 빤히 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뒤척거려.”
어두운 조명, 낯선 천장. 조용한 방에 나란히 누워 있으니 메데우스의 목소리가 조곤조곤하게 들렸다. 코앞의 걱정에 치여 메데우스를 향한 미운 마음은 잊힌 지 오래였다.
나택이 시선을 피하며 큼큼거렸다.
“생각을 좀 해 보고 있었습니다.”
“무슨 생각.”
“그냥 뭐…. 내일 언제쯤 어떻게 거기로 갈지, 가는 길에 생길 만한 위험은 뭐가 있는지, 그런 거요. 안 그러면 아까처럼 당황해서 잘못된 상황이 생길 수도 있……. 왜 그렇게 보십니까.”
메데우스는 어느새 상체를 일으켜 양모 쿠션에 기대앉아 있었다.
“누가 보면 스메나피쉬팀이 네 주인인 줄 알겠어. 왜 그렇게 적극적이야?”
사정을 알 리 없으니, 메데우스가 델람에서의 나택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서 나택은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시종의 관점으로 답을 꾸며 냈다.
“델람의 차기 엔시가 스메나피쉬팀이 되는 게 메데우스 님께 좋은 거잖아요.”
채찍을 휘두르던 캄비세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귀족이 아닌 자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행동. 그 기저에 박힌 저열한 가치관이 나택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져, 불쾌감을 일으켰었다.
게다가 일꾼들은 캄비세스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 반면 스메나피쉬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반응만 보아도 대충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어둠에 취한 나택의 입이 무의식중에 본심을 슬그머니 흘렸다.
“그리고 누가 더 성군이 될지는 낮에 봤던 일꾼들의 표정만 봐도 압니다. 비록 제 국가는 아니지만, 결국엔 다 똑같은 사람 아닙니까. 기왕이면 사람들을 좀 더 차별 없이 살펴 줄 만한 군주감이 올라가는 게…….”
헉.
주절주절 말을 하던 나택이 획 입을 틀어막았다. 신분제 사회에서, 그것도 노예가 귀족에게 ‘결국엔 다 똑같은 사람이다’ 따위의 말을 지껄이다니. 의식의 흐름이 불러온 대참사였다.
그런데 조심스럽게 올려다본 메데우스는 비웃거나 화내지 않고 그저 조용히 나택을 보고만 있었다.
메데우스가 입을 열었다.
“생긴 것도, 성별도, 태어난 곳도 뭐 하나 겹치는 게 없는데. 지금 네 이야기를 들으니까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그게 누굽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