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나택이 튀어나올 듯 커진 눈으로 난간 아래를 주시했다. 뚜벅, 뚜벅. 묵직한 소리가 점점 또렷하게 들렸다. 메데우스가 뒤를 돌아보려 하자 나택이 단단한 손목을 낚아채 오른쪽 길로 빠르게 이끌었다.
“누가 옵니다. 이쪽으로!”
고민의 여지없이 두 사람 모두 기민하게 움직였다. 결국 메데우스는 나택의 제안대로 오른쪽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구원으로 향하는 길은 기이했다. 정신없이 앞으로 쭈욱 직진하다 모퉁이를 돌아 왼쪽으로 꺾고, 또 오른쪽으로 꺾고. 외길을 들어갈수록 공기는 음습해졌다. 조명의 조도는 더욱더 옅어졌다. 어느새 개방된 난간이 사라지고 두 사람은 또다시 벽으로 둘러싸인 길에 들어섰다.
어딘지 알 수 없는 복도는 화려한 성내가 아니라 폐궁에 생긴 던전 같았다.
“테레시.”
메데우스가 나택을 불러 세웠다. 두 사람의 앞에는 굳게 닫힌 아치형의 석문이 있었다. 나택이 우뚝 멈춰 섰다. 그러자 또다시 빛의 알림이 시작되었다. 이번엔 문설주 하단의 돌 받침이었다. 예상대로 아까와 비슷한 석판이 붙어 있었다. 나택은 망설임 없이 석판의 글자를 향해 재빨리 눈을 깜빡였다.
둥-.
파동이 일었다.
해석 포션의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시스템 안내 문구가 위의 줄로 밀려나더니 타닥, 타닥 키보드 소리를 흉내 낸 효과음이 들렸다. 커서가 깜빡이며 해석된 내용이 한 글자씩 허공에 새겨졌다.
[이기적인 인간에 대한 격정.
신의 분노가 물길을 타고 번졌다.
인간을 서쪽 땅에 몰아넣어라.
가엾은 동식물은 동쪽에 지은 방주에 옮겨 심어라.
갈대 벽에 귀를 기울이자 에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들의 공의가 너머에서 새었다.]
이건 또 뭔 소리야.
갈대 벽에 귀를 기울이자…. 에아의 목소리가 들렸다라……. 갈대 벽? 여기 갈대 벽이 있나?
나택이 휙휙 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지나온 모퉁이의 화롯불 하나가 조명의 전부인 길. 사방이 어둡긴 했지만, 돌과 갈대마저 구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이 길의 벽은 모두 오래된 돌로 되어 있었다. 벽을 더듬거리던 나택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한번 밀어 보았다. 문은 꿈쩍도 않았다. 옆에 있던 메데우스가 나택을 따라 벽을 손바닥으로 쓸며 말했다.
“꾸밈새가 없는 걸 보니 성의 본채로 쓰이는 곳은 아닌 것 같아. 벽이 축축한 걸 봐선 창고로 쓰이는 곳도 아니겠고.”
벽돌 사이를 문지른 메데우스의 손끝에는 젖은 흙과 이끼가 묻어 있었다. 화려한 수나파크의 성내가 아닌 건 확실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분명 성채에서 난 길을 따라왔다.
대체 여기가 어딜까.
나택이 조심스럽게 문에 귀를 붙였다. 그러자 희미한 폭포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순간, 메데우스가 낮에 공주에게 물었던 말이 떠올랐다.
‘델람의 관개시설은 우루크에서도 유명해. 이건 화단에만 나 있는 수로인가?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지?’
‘성 안채는 물론이고 도시 전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이 필요한 곳 어디서든 담수를 쓸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지요. 카나트의 관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동쪽의 관리자가 대대로 맡고 있습니다.’
혹시 여기가 관개시설과 연결된 공간인가?
생각해 보니 첫 번째 석판을 발견한 곳이 수로인 것도 그렇고, 지금 두 사람이 선 자리 너머에 물소리가 나는 것도 그렇고. 이 퀘스트의 단서는 계속 수로 주변을 뱅뱅 돌고 있었다.
설마 스메나피쉬팀의 행방이 수로하고 관련되어 있는 건가.
“…메데우스 님.”
나택이 손짓하자 메데우스가 다가왔다. 그러고는 나택을 따라 석문에 귀를 기울였다. 두 장정이 문에 뺨을 붙이며 서로를 마주 보는 풍경은 야릇했다.
한참을 듣던 메데우스가 입을 열었다.
“이 정도 낙하하는 소리가 날 정도면 단순한 수로는 아니야. 큰 지류가 있든지, 그것도 아니면 수로의 관제 시설이 있든지, 둘 중 하나겠어.”
한참 메데우스를 가만 보던 나택이 돌연 몸을 일으켰다.
이 문이 갈대 벽인 건가?
나택이 어깨를 붙여 문을 밀기 시작했다. 메데우스 역시 옆에 붙어 손바닥으로 문을 밀었지만, 돌덩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움직이질 않네요.”
메데우스가 팔짱을 끼고 한 걸음을 물러서 고민하더니 나택에게 손짓했다.
“이리 나와 봐.”
나택이 얼른 비켜서며 길을 터 주었다. 어둑한 조명 때문에 육안으로 확인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메데우스가 석문을 더듬거리며 위아래, 양옆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렇게 꿈쩍 않는 정도라면 잠겨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은데……. 잠금장치가 밖에 있는 구조야. 성내의 보안을 생각한다면 잠금장치가 안에 있는 게 맞을 텐데 특이하네. 이건 반대 방향에서 무셀루(muselu)(일종의 열쇠. 빗장처럼 생긴 잠금장치 속에 꿰인 핀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열쇠 역할을 함)로 여는 방법밖에 없겠어.”
한마디로 막다른 길이란 뜻이었다. 나택이 이마를 긁적였다.
이상하다. 시스템이 안내해 준 방향이니 옳은 길일 텐데…. 설마 진짜 여기가 꽝인 건가? 석판의 내용이 이어지는 걸 보면 아닐 것 같은데…….
나택은 머릿속으로 시스템의 안내 문구를 곱씹었다.
“갈대 벽에 귀를 기울이고…. 에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생각에 빠진 나택은 메데우스의 말을 의식하지 못 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석조뿐인 습한 공간인데, 이곳에 갈대가 있을 리 없다. 의아하다는 듯 내려다보는 메데우스와 어둠 속에서 시선이 맞았다.
얘한테 물어보자.
“메데우스 님. 혹시 여기에서 갈대를 닮은 무언가가 있다면……. 그게 어디 있을 것 같습니까…?”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메데우스가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에 대해 주절주절 늘어놓을 수도 없고, 메데우스에게는 보이지 않을 시스템 문구에 대해 얘기할 수도 없고.
“그러니까…….”
나택의 말꼬리가 고민으로 늘어지는 순간, 복도 모퉁이의 너머에서 주황색 불빛이 일렁였다.
누군가 갈대 벽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미친…!
시스템과 맞먹는 반응 속도로 메데우스가 빠르게 반응했다.
“누가 오고 있어.”
막다른 길, 유일한 퇴로에서 다가오는 인기척. 메데우스가 검을 찬 허리에 손을 얹으며 경계했다. 이대로 놈들이 오면 칼부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나택이 다급하게 벽을 더듬었다. 석판의 내용이 다음 길을 안내해 주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에서 갈대 벽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갈대…. 갈대…. 갈대…. 에아의 목소리가 들리는 갈대 벽…….”
“테레시. 내 뒤로 붙어.”
“메데우스 님. 갈대 벽을 찾아야 합니다. 여기 어딘가에 갈대 벽이 있어요.”
나택이 숨기는커녕 급하게 이리저리 움직이자 메데우스의 눈꼬리에 날이 섰다.
“뭐 하는 거야.”
메데우스가 나택의 손목을 낚아채 당겼다. 나택이 절박한 시선으로 회색 홍채를 응시했다. 설명할 시간이 없다.
“메데우스 님. 갈대요! 갈대 벽을 찾아야 합니다! 얼른요!”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없어 더욱 애가 탔다. 발까지 동동 굴러 가며 나택이 다급하게 애원했다.
“대체…….”
메데우스가 짧게 혀를 차며 인상을 구겼다. 불빛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메데우스도 나택을 거들기 시작했다. 퇴로도, 숨을 곳도 없는 자리에서 들통나기를 기다리는 것보단 낫겠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긴장을 머금은 연한 눈동자는 여전히 영문 모르겠다는 기색을 띠고 있었지만, 메데우스는 그러면서도 탐색을 멈추진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얀 손이 그대로 움직임을 그쳤다.
“갈대 벽이라고 했지.”
나택이 획 고개를 돌렸다.
헉. 찾았어?
메데우스는 석문 가까이의 벽을 짚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문이 난 벽과 기역으로 붙어 있는 모서리였다. 나택이 재빨리 그 벽으로 다가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손으로 만지니 감촉이 달랐다. 꺾인 부분의 좌우 한 뼘 정도 넓이에서 오돌토돌한 질감이 느껴졌다. 엿먹이려고 만든 비밀 통로도 이런 자리에는 만들지 않을 것 같았다.
나택이 곧바로 좁은 면에 귀를 붙였다.
갈대 벽으로 다가오는 걸음 소리가 커집니다!
어느새 인기척은 모퉁이 코앞까지 와 있었다. 그러나 에아의 목소리라고 할 만한 건 들리지 않았다.
무슨 목소리가 들린다는 거야!
나택이 더욱 애절하게 귀를 붙였다.
인기척이 서서히 정체를 드러냅니다!
돌겠네, 진짜.
나택이 양손을 모아 귀에 대고 힘껏 벽을 누르기 시작했다. 고막을 꺼내 붙일 순 없으니 어떻게든 몸을 밀착시키려 애를 썼다.
꺾어진 복도 저 끝에서 횃불 꼬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메데우스가 허리춤의 검에 손을 얹으며 나택에게 등을 붙였다.
“테레시. 내 뒤로…….”
아, 왜 안 들리는 거야. 무슨 소리인……. 어억!
드르륵-.
순간 벽이라고 생각했던 모서리가 회전문처럼 움직였다. 있는 힘껏 기대 있던 나택의 몸이 그대로 옆으로 기울었다. 이 와중에도 소리를 내선 안 된다고 생각한 나택이 소리를 죽이며 팔을 뻗었다.
“테레……!”
나택에게 붙잡힌 메데우스는 시선을 온전히 돌리기도 전에 균형을 잃었다. 나택이 메데우스의 손목을 쥐고 제 품으로 확 잡아당겼다. 두 남자의 체중을 견디지 못한 갈대 벽이 빠르게 회전하는 맷돌처럼 한 바퀴를 돌았다.
쿵-!
“뭐야! 이게 무슨 소리지? 거기 누구요!”
복도에 모습을 드러낸 경비들이 갈대 벽 앞으로 뛰어왔다. 횃불이 화르륵 소리를 내며 빠르게 좌우를 살폈다.
“뭐지……. 아무도 없는데?”
“수로에서 나는 소리인가?”
“그런가 본데. 하이고- 이게 마지막 순찰이구만. 가서 시카르나 한잔 어때!”
“좋지.”
통로를 살피는 횃불이 서서히 멀어졌다. 두 사람이 사라진 고요함 속에는 물이 낙차 하는 소리만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