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대문명에서 탈출시켜 줄 히든영웅을 찾습니다-46화 (46/178)

46화

갈대 벽 뒤에 선 나택은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나택은 마치 백허그를 하듯 메데우스의 몸을 바짝 끌어안은 상태였다. 두 사람의 신경은 온통 벽 밖의 동태에 집중되어 있었다.

“…갔나 봅니다.”

“그런 것 같네.”

날카롭던 메데우스의 눈꼬리가 그제야 풀어졌다. 하지만 붙어 있는 몸을 쉽게 떨어트릴 순 없었다.

두 사람이 들어온 갈대 벽 뒤는 축축한 벽돌로 둘러싸인 공간이었다. 한 평도 되지 않는 직사각형의 공간은 매우 비좁았는데, 흡사 장롱 안에 갇힌 느낌이었다. 캐비닛 두 개를 붙여 놓은 박스 속에 구겨져 있는 기분이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천장 없이 길게 뻗은 위가 시원하게 뚫려 있다는 점이었다. 훤히 보이는 하늘, 반짝이는 별빛 사이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소음을 막아 줄 벽이 없으니 관개 시설의 소리가 그대로 전달되는 듯했다.

습한 공기에 섞여 메데우스의 향이 한층 더 짙게 느껴졌다. 나택이 몸을 천천히 뒤로 물렸다. 그제야 끈적하게 붙어 있던 살이 떨어졌다.

나택이 어둑한 하늘을 올려보았다.

여기까지 오는 건 좋았는데. 대체…… 이 좁은 곳에서 뭘 하라는 거지. 다시 나갈 수는 있는 건가. 아니면 어디 비밀 통로라도 있나?

나택이 손바닥으로 벽을 더듬거리는데, 피부에 올록볼록한 촉감이 느껴졌다.

이게 뭐지. 글자인가? 아니……. 그림 같기도 한데.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나택이 보고 있는 벽 전체가 빠르게 번쩍였다. 마치 천둥이 치는 밤하늘 같았다. 눈이 아릴 정도의 밝기에 나택이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문명에서 볼 수 있는 조명은 불을 피울 때 나오는 주황 불빛뿐이었다. 섬광처럼 터지는 백색 빛은 의심할 여지없이 시스템이 주는 신호였다. 나택은 놀란 제 눈알을 달래며 빼꼼 실눈을 떴다. 빛이 사라진 벽은 시커먼 어둠 그 자체였다. 나택이 다시 손을 뻗어 벽을 짚었다. 잠시 후, 어둠에 적응된 시야로 조금씩 글자와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또 석판이네.

나택이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또다시 벽 전체가 눈 부신 빛으로 뒤덮였다. 나택이 재빨리 눈을 감았다.

어흐…… 눈부셔. 왜 이렇게 밝아.

나택이 인상을 찌푸렸다. 촉감으로 판단해 보건대 이 벽돌들은 분명 석판이 맞았다. 석판이 맞긴 한데…….

또 한 번 눈앞이 밝아졌다. 천천히 고개를 든 나택은 소리 없이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밝았던 이유는 단순히 빛의 세기가 강해서가 아니었다. 벽돌 하나하나가 전부 작은 석판이었다. 석판 하나에서 둥근 빛 하나가 떠오르고, 이것들이 한가득 모여 포도송이를 그리며 동시다발적으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나택과 붙어 있던 메데우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건 델람의 문자가 아니야.”

메데우스는 나택의 반대편 벽을 보고 있었다. 그쪽 역시 석판으로 이루어져 있는 듯했다.

“델람의 문자가 아니라고요?”

나택이 메데우스와 같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고대 문자를 읽을 줄 모르는 나택은 당연히 이 문자들이 델람어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델람어도 섞여 있긴 하지만……. 다양한 언어가 혼재되어 있어. 이 문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적혀 있는 거지.”

메데우스가 한 석판 위에 손을 얹었다.

“저도 좀 보고 싶습니다.”

나택이 게걸음으로 메데우스에게 다가갔다. 메데우스는 긴 팔을 위로 뻗어 벽을 짚으며 기꺼이 품을 내어 주었다. 어느새 나택의 자세는 메데우스에게 백허그를 당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택은 개의치 않고 메데우스가 가리켰던 석판에 코를 박았다.

어. 이건 알파벳 아니야?

알아볼 수 없는 쐐기 문자와 그림들 사이에 웬 알파벳처럼 생긴 문자가 섞여 있었다.

syndaf…….

“…….”

나택은 읽기를 그만두었다. 문자를 알아볼 수는 있으나 모르는 단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상하다. 고대 문명에 알파벳이 있었나? 아니면 알파벳을 닮은 상형문자인가.

흘긋 본 메데우스는 나택도 모르는 그 단어들을 아는 눈치였다.

기분 탓이겠지……?

의문을 잠시 접어 둔 채 나택은 다시 벽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눈을 깜빡이자 시스템이 반응을 보였다.

해석 포션의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홀로그램처럼 떠오른 글자들이 각자의 석판 위에서 둥실둥실 떠올랐다. 나택의 머리 위쪽부터 바닥까지 해석된 내용이 넘실댔다. 백색의 빛들 때문에 현기증이 날 정도로 눈앞이 밝았다. 나택이 눈을 가늘게 뜨며 허공의 글자들을 읽기 시작했다. 아니, 읽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전과 다르게 문제가 생겼다.

[이기적인  꺞?딲?? 대한 뗥홛뗭촌.

긡???뷖 분노가 횏??뗭곸???? 죐???]

“…….”

이게 뭐야.

해석된 문장은 중간중간이 깨져 있었다. 당황한 나택이 눈을 비볐다가 다시 확인해 보았으나, 글자는 여전히 그 상태 그대로였다.

왜 이러지.

나택이 유심히 석판과 글자를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석판 하나당 하나의 단어가 배치된 것 같은데, 알파벳이 새겨진 석판 위의 글자만 박살이 나 있었다. 이래서야 내용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나택은 원흉 중 하나인 돌덩이를 손바닥으로 슥슥 만져 보았다. 당연하게도 변화는 없었다. 나택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졌다. 주먹으로는 죄 없는 돌을 쿵쿵 쳐 댔다. 보고만 있던 메데우스가 느린 동작으로 나택의 손을 만류했다.

“왜 이렇게 한숨을 쉬어.”

“……뭐라고 쓰여 있는지 궁금해서요.”

“신도.”

순간 깨진 문자에서 팡, 하고 이펙트가 터졌다. 글자는 정확히 ‘신도’라는 단어로 변해 있었다. 나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글자를 아십니까?”

“몇 가지만.”

나택이 벽을 짚고 게걸음으로 메데우스의 품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다른 석판을 가리켰다.

“그럼 이건요?”

“……호언.”

그러자 그 위의 글자 역시 ‘호언’이란 단어로 살아났다. 나택이 주먹을 쥐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메데우스 이 자식은 내 수호신이야!

이건 일종의 퍼즐이었다. 수눈키의 메인 스토리를 진행하다 보면 이런 식의 퍼즐이 종종 등장하곤 했다. 차이점이라면 유저로 플레이할 때는 편지, 혹은 특정 아이템이 단서가 돼 주었으나, 지금은 그 역할을 메데우스가 하고 있다는 점 정도였다.

나택의 부탁으로 두 사람의 합창이 이어졌다. 나택은 해석된 쐐기 문자를 읽어 나갔고, 나택의 눈치를 받은 메데우스는 순순히 망가진 단어의 뜻을 일러 주었다.

델람 대홍수의 서사시. 오래된 이야기가 좁은 공간에 나직하게 해석되기 시작했다.

[이기적인 인간에 대한 격정.

신의 분노가 물길을 타고 번졌다.

신은 타락한 인간을 물로써 심판하겠노라 호언했다. 그와 동시에 회의에 모인 신들에게 단언했다.

인간을 서쪽 땅에 몰아넣어라.

가엾은 동식물은 동쪽에 지은 방주에 옮겨 심어라.

나는 샤바투 초하루에 폭우를 내릴 것이다. 칠일 밤낮으로 쏟아지는 비는 세상의 모든 인간을 멸할 것이다. 공의에 참석한 신들은 이 심판을 절대 인간에게 누설해서는 안 된다.

신들은 비밀을 엄수하겠다는 맹약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이들 중 다른 마음을 품은 자가 딱 하나 있었으니, 바로 물의 신 에아였다. 에아는 대홍수로 멸망하게 될 인간들을 가엾게 여겼다. 그러나 신들과 맹약을 나누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진실을 알릴 수 없었으니. 고민에 빠진 에아는 한가지 계교를 떠올렸다.

요는 직접 전달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지나가던 이가 내가 하는 혼잣말을 주워듣는 것은 누설이라 할 수 없다. 그리하여 에아는 그의 충실한 사자이자 신도인 인간 한 명에게 꿈속에서 전언했다.

나의 신도여. 내일 밤 자정, 신전의 갈대 벽에 귀를 기울이거라.

꿈에서 깬 신도는 에아의 전언을 충실히 이행했다.

초승달이 뜨던 다음 날 밤, 신도는 갈대 벽에 섰다. 갈대 벽에 귀를 기울이자 에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들의 공의가 너머에서 새었다.

아아.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신들은 이미 인간을 멸하기로 결정했다. 샤바투의 초하루에 대홍수를 내려 세상을 물로 벌하겠다 선언했으니! 집과 땅은 물에 잠기고 강은 바다가 될 것이며, 인간은 흔적도 없이 묻힐 것이다.

가엾은 나의 신도들을 어찌해야 살릴 수 있단 말인가!

역시 한 가지 방법밖에 없겠다. 서쪽 땅에 신들도 눈치채지 못할 비밀스러운 방주를 지어, 샤바투 초하루 전에 배에 오르는 길, 그것밖에는 해법이 없겠다.

이것을 나의 신도들에게 전해야 하는데! 아아,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신도들아, 너희에게 내려질 죄벌을 대비해야만 한다!

혼잣말로 하는 에아의 탄식. 신도는 곧바로 그 말을 이해했다. 그러고는 다음 날부터 성채를 가장한 방주를 짓기 시작했다.]

디테일 한 부분은 조금 차이가 있었지만, 이는 나택이 아는 내용과 매우 흡사했다.

“인간을 대홍수로 심판한다니…….”

나택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샤바투 초하루에 내리게 될 비, 그리고 광부들에게 들었던 서쪽의 정체 모를 공역. 스메나피쉬팀은 에아의 계시로 이 내용을 전달받은 게 분명했다.

나택이 작게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노아의 방주랑 똑같은 내용이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메데우스가 날 선 눈빛으로 나택을 쏘아보았다.

“네가 그 이야기를 어떻게 알아?”

“네?”

메데우스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노아의 방주. 그 얘기를 네가 어떻게 아냐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을, 메데우스는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나택이 시선을 모로 올리며 메데우스를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수눈키의 설정에 노아의 방주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 델람의 대홍수도 아니고, 정확하게 노아의 방주라는 말을 알아듣다니. 도리어 이쪽이 묻고 싶었다. 얼빠진 표정으로 나택이 답했다.

“메데우스 님이야말로……. 이 이야기를 어떻게 아십니까?”

“우리 가문에 전해지는 이야기야.”

“아누……. 가문이요?”

“정확하게는 내 어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지.”

고대 인간일 메데우스의 어머님께서…… 노아의 방주를 어떻게 아는 거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