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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에서 탈출시켜 줄 히든영웅을 찾습니다-47화 (47/178)

47????

나택이 의문을 되짚어 볼 틈도 없이 메데우스가 매섭게 나택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아냐고 묻잖아. 설마 키쉬에서 지냈던 적 있어?”

“아뇨. 키쉬에는 가 본 적이…….”

“그럼, 너도 북쪽 출신인가?”

엄밀히 말하자면 나택은 동쪽 출신이었다. 우루크나 델람을 기점으로 삼는다면 아시아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발상지로부터 먼 동쪽에 있으니 말이다.

“북쪽 출신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거지? 지금까지 어머니 외에 이걸 아는 사람은 없었어.”

대홍수 설화는 현대에서 이미 널리 퍼져 있는 상식 같은 이야기였다. 어떻게 알고 있냐고 묻는 들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 줘야 할지 감도 오질 않았다. 나택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건…… 저도 어릴 때 이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그래서 압니다.”

“누구에게서?”

메데우스가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나택을 밀어붙인 적은 없었다. 딱 한 번, 첫 만남 때 얻었던 점토판의 사건을 제외하고는. 물러날 곳 없는 좁은 공간에서 나택은 계속 후진했다. 두어 걸음밖에 걷지 않았는데, 짧은 퇴로가 끝나 버렸다. 축축한 벽에 나택의 등이 바짝 붙었다.

“누구냐고 물어보시면…. 그게 참……. 말씀드리기 애매해서…….”

“말해. 누구야.”

나택의 몸이 더욱 쭈그러들었다. 그런데 기대선 뒷공간이 점점 넓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 모두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금씩 벽이 밀려나고 있었다. 삐거덕거리는 소리는 수로의 낙수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누구냐 하면…….”

나택의 체중이 더는 물러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벽에 실릴 때였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눈앞이 밝아졌다.

수상한 입구를 발견했습니다.

어?

드르륵-.

확인해 볼 새도 없이 벽 일부가 빠르게 밀려났다. 나택이 딛고 서 있던 바닥 판의 돌도 함께 딸려 갔다. 마치 앉으려던 의자를 획 낚아채 간 것처럼, 나택이 서 있던 공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당황한 나택의 얼굴과 놀란 메데우스의 뺨 사이로 시스템 안내문이 얄궂은 멘트를 띄웠다.

델람의 ‘지하 수로’에 진입합니다!

“으아악!”

“테레시!”

메데우스가 재빨리 손을 뻗었지만 소용없었다. 구멍 난 바닥으로 나택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택을 삼킨 벽은 곧바로 쿵 소리를 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나택을 부르는 메데우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아아아아악!

이게 뭐야, 대체!

몸이 미친 듯한 속도로 추락했다. 하지만 단순한 추락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나택은 워터 슬라이드 같은 수로를 타고 미끄러지고 있었다. 물이라도 삼킬까 싶어 입도 벌리지 못한 채, 나택은 내적 비명을 지르며 두 눈을 꾹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떨어졌을까.

첨벙-!

다행히 물속에 무사히 착지할 수 있었다. 그 타이밍에 눈치 없는 시스템이 알람을 띄웠다.

해석 포션의 효과가 사라집니다.

깊은 물속은 예상했던 것보다 맑고 깨끗했다. 해석 포션이고 나발이고 나택은 팔을 내저으며 헤엄쳐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푸, 어푸.”

얼굴을 쓸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곳 역시 멀찌감치서 빛나는 희미한 횃불 두어 개가 조명의 전부였다. 끝없이 길게 난 통로의 벽에서는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택이 떨어진 구멍 외에도 여기저기 나 있는 큰 배수구에서 굵은 물줄기가 시끄럽게 콸콸 쏟아졌다.

델람의 지하 수로….

시스템이 띄웠던 안내 문구를 곱씹으며 나택이 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수로에서 떨어지는 물의 소음에 묻혀 나택이 흘리는 젖은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택은 우선 푹 젖은 옷부터 대충 짜냈다. 혹시 몰라 인기척을 숨기려 몸은 벽에 붙였다. 그제야 통로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와. 이게 뭐야.

옛날 고성에 비밀 통로가 있다는 얘기는 여기저기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거대한 관개 수로와 연결되어 있는 통로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만약 나택이 에아 가문을 선택했거나, 게임의 첫 시작점을 델람으로 했다면 이 모든 스토리와 퀘스트를 한 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나택은 줄곧 이난나 가문의 라가쉬를 선택해 게임을 해 왔으니, 이 지하 수로가 초면일 수밖에 없었다.

델람도 한번 해 볼걸,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짧은 후회 뒤로는 떨어지기 직전 보았던 메데우스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 자식은 무사하려나. 적어도 함께 내려오진 않은 것 같으니, 여전히 갈대 벽 뒤에 갇혀 있을 확률이 컸다. 수로에 빠진 상황도 상황이지만 메데우스가 옆에 없다는 자각이 들자마자 불안해졌다. 좁은 공간에 홀로 있을 메데우스가 걱정됐다. 나택이 지하 수로에 온 것이 우연인지 시스템의 계략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다시 메데우스와 합류해야만 했다.

나택이 출구를 찾아 빠르게 눈알을 굴렸다. 지하 통로의 한쪽 끝은 수로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고 새카맸다. 반대편에는 그나마 앞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의 불빛이 있었다. 나택이 가야 할 방향은 한 곳뿐이었다.

델람의 자랑이자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인정하는 관개 시설은 지하에 있음에도 조금의 악취도 나지 않았다. 식수나 농업수를 대기 위해 만든 수로라고 하더니. 나택을 빠트렸던 맑은 물에는 작은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었다.

수로 양쪽에 나 있는 좁은 길에는 쥐새끼는커녕 벌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나택은 수월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드디어 불빛이 새어 나오는 모퉁이에 도착했을 때였다. 낙수 소리가 멀어지고 통로 안에서 새어 나오는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택은 잽싸게 등을 벽에 붙였다. 숨소리마저 죽이는데 시스템이 안내 문구를 띄웠다.

수상한 자들의 대화 소리가 들린다. 귀 기울여 들어 볼까?

“…….”

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택이 한숨을 쉬었다. 모니터 너머로 즐기는 게임이라면 모를까, 나택은 이런 스릴을 몸으로 느끼는 일에 질색하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고대 문명을 탈출하기 위해 기꺼이 시스템의 명을 따라야 했다.

나택은 온 신경을 모퉁이 안쪽에 집중했다.

“정말 장군을 델람인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걱정 마라. 계획대로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으니. 만약 이대로 돌아간다 해도, 메데우스는 이제 우루크에 정착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루할자게시가 밑 작업을 하고 있어.”

목소리를 구분할 순 없었지만, 대화 내용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건 캄비세스였다.

이놈은 왜 여기 있는 거야. 밑 작업이라니……? 뭘 말하는 거지.

“놈은 곧 우루크에서 쫓겨날 거야. 가족이라 부를 사람도 없고, 가진 거라곤 권력과 돈뿐인 놈이, 우루크에서 쫓겨나면 어떻게 되겠어. 권력과 돈을 잃은 메데우스, 갈 곳마저 잃은 야만인. 우린 집을 잃은 개를 가엾게 여기는 척하며 주워 오면 되는 거야. 상황이 그쯤 되면 놈도 바보가 아닌 이상 델람으로 올 수밖에 없어.”

“만약 대신관 놈이 실패한다면, 그땐 어쩔 생각이십니까.”

“걱정 말거라. 만약 루할자게시가 실패한다 해도 내 따로 계획해 둔 최후의 수단이 있어. 메데우스는 반드시 델람으로 오게 되어 있다.”

“스메나피쉬팀은 어떻게 할까요. 혹시 누군가 스메나피쉬팀을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곤란해집니다. 그냥 지금 죽여 버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놈을 가둔 지하 감옥은 개미 새끼 하나 얼씬 못 하는 자리야. 그런 걱정은 하지 마라. 게다가 신관 놈들이 아직 나를 적대시하고 있어. 내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는 눈치야.”

“스메나피쉬팀이 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얘기 말씀이시죠.”

“그래. 아무런 명분 없이 서쪽 공역에 큰돈을 낭비한 것은 놈들도 의아해하는 부분이야. 그러니 그 무의미한 공역 탓에 신이 노하였고, 아우가 신병을 얻었다는 말에 반발을 못 하는 게지. 신에게 용서를 받기 위해선 오랜 시간 조용히 기도를 올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도 누구보다 놈들이 잘 알아. 웃기는 건 그러면서도 나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지. 스메나피쉬팀이 신병을 앓아 신에게 사죄를 올리러 갔다는 거짓말을 진실로 만들어야 해.”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실어초는 제대로 먹이고 있나?”

“매 끼니에 조금씩 타서 주고는 있습니다만, 요즘엔 음식을 통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지독한 놈. 빨리 먹고 뒈지면 될 것을! 눈치만 빨라서…….”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나택이 동그랗게 뜬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실어초. 이는 분명 메데우스의 약초학 수업에서 배운 적 있는 풀이었다. 진통제 혹은 마취제로도 쓰이나, 과용하게 되면 혀가 굳고 몸이 굳어 결국에는 의식만 살아 있는 식물인간으로 만드는 독초.

아무래도 캄비세스는 스메나피쉬팀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신관들에게 내보일 생각인 듯했다.

“기도까지 올렸으나 신의 용서를 받지 못하고 결국엔 산송장으로 나타난 자를, 신관들이 후계자로 밀어붙일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신관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스메나피쉬팀을 버리게 될 거야. 델람은 결국 나의 손에 들어올 것이다!”

아우에게 없는 병을 만들면서까지 권력을 쟁취하려는 자, 캄비세스는 악인 그 자체였다.

살벌한 집안이네.

스메나피쉬팀이고 캄비세스고, 나택은 마음 같아선 남의 집안싸움에는 발가락 하나조차 걸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집안싸움에 제 탈출과 우루크가 엮여 있다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메데우스를 쫓아낼 밑 작업을 벌이고 있다니. 캄비세스고 루할자게시고 미친놈들이 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야.

일단은 어서 돌아가서 메데우스에게 사실부터 알려야 했다. 나택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 몸을 돌리려는데 어깨에 차가운 냉기가 느껴졌다. 슬쩍 시선을 내리자 날카로운 금속이 보였다. 검 하나가 나택의 어깨를 지나 목 앞으로 날을 세우고 있었다.

“뭐 하는 놈이야.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

망했다…….

“스메나피쉬팀의 수하인가.”

“아닙니다. 저는,”

“캄비세스 님! 여기 수상한 자가 있습니다.”

아니……. 시스템.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다른 땐 누가 다가온다는 알림을 잘만 줬으면서.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는 빛 한 점도 띄워 주지 않다니.

안쪽에서 일렁이던 주황 불빛이 나택에게로 다가왔다. 목에 닿은 검이 날을 더욱 바짝 세우는 게 느껴졌다. 횃불을 들고 나타난 것은 캄비세스와 델람의 담가르갈 에무쉬였다.

“캄비세스 님. 이자가 대화를 엿듣고 있었습니다.”

화르륵, 횃불이 나택의 얼굴 가까이로 다가왔다.

“너는…… 메데우스 장군의 시종이구나. 분명 만찬장에서도 내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지.”

“…….”

“여기로 들어오는 입구는 한 곳밖에 없는데, 어떻게 들어온 거지?”

“…….”

나택은 자신이 타고 온 워터 슬라이드가 제대로 된 입구가 아니란 걸 확인받았다.

“이쪽보다 먼저 와 있던 건가. 이곳을 어떻게 알았지?”

뭐라고 둘러대지. 뭐라고 해야…….

“메데우스가 시킨 건가.”

“아닙니다!”

메데우스의 이름이 멱살 잡혀 끌려오는 순간, 나택이 버럭 소리쳤다. 이나택의 유일한 열쇠를 이런 식으로 끌어들여 다치게 해서는 안 됐다.

“메데우스 님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엿들으려 했다거나 그런 게 아니고…. 길을 잘못 들어서 그런 겁니다.”

“네놈은 분명 만찬장에서도 그랬었지. 길을 잘못 들었다고.”

나택은 창의적이지 못한 자신을 욕했다. 다른 핑계를 댈걸. 하지만 기막힌 핑계를 떠올렸다 한들 이 난관을 빠져나갈 순 없을 터다.

“의심스럽게 생각하실 거란 거 압니다. 하지만 정말……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그래. 길을 잘못 들은 걸로 치지. 하지만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나.”

“……저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

나택은 이제야 드라마 속 시종들이 용서를 구걸할 때마다 모르쇠로 잡아떼던 장면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조건 모르겠다며 호소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아무것도 듣지 못했는데, 이곳에 가만히 숨어 있었다는 말인가.”

“…….”

“분명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은 게야. 그렇지?”

되묻는 캄비세스의 어조에 기괴한 흥분이 묻어났다. 흡사 먹잇감을 찾은 포식자 같았다.

위험했다. 이번만큼은 정말로 위험했다.

“네가 어떤 이유로 이곳에 왔든지 간에, 나의 이야기를 들은 이상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어.”

“처리할까요.”

목에 닿은 칼날이 피부로 파고들었다. 나택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캄비세스가 검을 저지하듯 손을 들었다.

“정말 메데우스가 보낸 게 아닌지, 확인을 해 볼 필요가 있어. 일단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

아니, 이게 무슨 일이냐.

메데우스도 없는 곳에서, 탈출로도 모르는 감옥에 갇히게 생겼다. 지금의 현실이 믿기지 않아 나택은 얼빠진 표정으로 캄비세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번득 정신을 차리고는 마지막 자비를 구걸했다.

“정말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끌고 가!”

나택의 뒷덜미가 거칠게 잡혔다. 그 바람에 몸이 비틀거리며 날카로운 칼끝에 어깨가 긁혔다. 천을 찢는 소리와 함께 피가 배어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지는 상황에서 나택은 저항할 수단이 없었다. 퇴로도 모르고 검도 없다. 이런 지경에 왔는데도 시스템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망할 시스템. 이 위험에 나를 빠트렸으면 최소한의 탈출 루트 정도는 언질해 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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