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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에서 탈출시켜 줄 히든영웅을 찾습니다-50화 (50/178)

50화

“캄비세스와 루할자게시가 내통했다는 증거를 찾아야해.”

“증거라니요.”

“놈들이 주고받은 서신이 있을 거야. 그중에서 루할자게시의 인장이 찍힌 걸 찾아야 해.”

인장, 그 말을 듣는 순간 메데우스가 물건을 사라며 건네주던 원통의 청동이 떠올랐다. 인장이 찍힌 수많은 점토판도 함께.

설마 서신이라는 게 점토판 편지를 찾겠다는 건가. 그걸 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나택의 마음에 불안함이 타올랐다.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메일이나 전화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CCTV로 동선을 추적할 수도 없는 문명에서 연락을 나눈 증거라 함은 당연히 점토판 서신밖에 없었다. 하지만 멸망이 임박한 이 타이밍에, 타국의 넓은 성내에서, 그걸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나택이 이마를 짚었다. 갑자기 눈앞이 핑 돌았다.

어둠 때문에 나택의 초조함을 알아채지 못한 메데우스는 곧바로 걸음을 재촉했다. 화들짝 놀란 나택이 얼른 메데우스에게 팔을 뻗었다.

안 돼. 못 가. 이번만큼은 절대 양보 못 한다. 우린 지금 도망가야 해.

“메데우스 님. 지금 가야 합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대체……. 으억!”

다급하게 다가가던 나택이 울퉁불퉁한 바닥의 돌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졌다.

“테레시!”

메데우스가 빠르게 다가와 몸을 숙였다.

“으으…….”

“얼굴 들어 봐.”

나택이 코를 감싸 쥐며 눈물을 찔끔 흘렸다.

“하 씨……. 아파…….”

“손 치워 봐.”

메데우스가 나택의 손을 떼어 냈다. 바닥에 들이박은 볼의 피부는 까졌고, 나택의 콧구멍 양쪽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메데우스는 얼른 제 옷소매와 손바닥으로 흐르는 피를 훔쳤다. 나택은 갑작스럽게 가해진 충격에 어질한 눈을 질끈 감았다. 메데우스의 손이 닿는 감촉마저 고통으로 느껴져 앓는 소리만 나왔다.

“아으…….”

메데우스가 나택의 콧대를 슬쩍 쥐어 보며 상태를 확인했다.

“아, 아야.”

“뼈는 괜찮은 것 같네. 넌 대체…….”

메데우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너처럼 손 많이 가는 시종은 처음 봐.”

얼굴을 들이받은 통에 나택은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메데우스를 데리고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나택은 눈도 제대로 뜨지 않은 채 무릎을 꿇고 메데우스의 팔을 붙잡았다.

“서신이 문제입니까.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실하지도 않잖아요. 대신관님의 악행은 다른 방법으로 증명할 수 있을 겁니다. 얼른 여기부터 빠져나가요.”

메데우스가 차분하게 나택의 손목을 쥐었다.

“그렇게 불안하면 먼저 가 있어. 곧 뒤따라갈 테니.”

“안 됩니다. 같이 가셔야 합니다.”

“네게 책임을 묻지 않을게. 혼을 내지도 않을 테니까 먼저 가. 나 혼자 움직이는 쪽이 편하기도 하고. 일단 일어나.”

메데우스가 손으로 나택의 팔 아래를 쥐어 일으켰다. 나택은 메데우스에게 매달려 입술을 꾹 물었다.

야. 너 언제부터 대홍수 퀘스트가 시작되는 지는 알아? 얼마나 빠르게 물이 차오르는지 아냐고. 전쟁터에서 칼 휘두르듯이 그렇게 움직인다고 피할 수 있는 재앙이 아니야.

수눈키에서 델람 정복을 할 당시, 나택은 빠른 물살 때문에 후미에 있는 병사 몇을 잃은 전적이 있다. 그건 나택의 공략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퀘스트 진행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돌아가는 판을 보아하니 하나뿐인 제 아군 메데우스가 후미에서 따라오던 그때의 병사 꼴이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택이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절대 안 됩니다! 죄송하지만 이번만큼은 절대 메데우스 님의 말씀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나택이 절박하게 메데우스의 가슴팍 천을 움켜쥐었다. 매달리는 나택을 보며 메데우스의 눈썹이 날카롭게 기울었다.

“테레시.”

“시간이 지체되면 정말 위험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가라는 거잖아. 왜 또 이상한 데서 고집을 부리는 거야?”

“당연히 메데우스 님이 걱정되니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순간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삼나무 숲에서도 느꼈지만, 델람 스토리를 본격적으로 진행하면서 나택은 깨달았다. 미래를 아는 게 사람을 얼마나 두렵게 하는지를 말이다.

나택은 다가올 재난을 플레이어로서 겪어 보았고, 시스템의 안내로 예측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는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뼈저리게 알았다. 메데우스는 나택이 고집을 부린다고 말하지만, 나택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메데우스가 막무가내로 느껴졌다.

너를 지켜야 하는 내 입장을 좀 눈치채 줘라.

“제가 혼자 간다고, 가서 안전한 곳에 있는다 해도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메데우스 님이 없는데요. 메데우스 님께서 곧바로 오지 않으시면 걱정이 돼서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지도 못할 것 같고요. 재수가 없으면 메데우스 님과 엇갈려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저 혼자 가다가 머저리처럼 길을 잃을 수도 있어요.”

나택이 속사포처럼 의견을 피력했다. 말이 이어질수록 메데우스의 눈빛은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니까 메데우스 님.”

나택이 저랑 같이 갑시다, 라고 진짜 본론을 말하려는 타이밍이었다.

“알았으니까, 코부터 닦아.”

메데우스가 황급히 새로 흐르는 피를 엄지로 닦아 내며 말했다. 나택이 얼른 손등과 아래팔로 제 코 아래를 문질렀다. 메데우스가 제 말에 동의했다는 생각에 쌍코피를 흘린 것도 억울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네가 그렇게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니, 그렇다면 함께 가는 수밖에 없겠네.”

나택이 그대로 굳었다.

……이게 아닌데. 메데우스가 저와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길 바란 거지, 제가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걸 원한 건 아니었다.

나택의 눈썹이 좌절을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꺾였다. 절망했다 기뻐했다, 또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손바닥 뒤집듯 변하는 나택의 심경을 메데우스는 어수선한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메데우스가 손을 뻗어 나택의 인중을 문질렀다. 입 안으로 흘러내리던 핏방울이 물감처럼 번졌다. 가족을 잃고 한평생을 외톨이처럼 살아온 메데우스에게는 이런 일이 낯설었다. 타인의 진심 어린 걱정을 받는 일도, 그 걱정이 이렇게 필사적인 애원으로 이어지던 경험도.

메데우스가 흙먼지가 묻은 나택의 머리카락을 털어 내며 말했다.

“네 속은 모르겠고 내 마음도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약속해 줄게. 너를 네르갈(수메르 신화 속 저승의 주인)에게 보내는 일은 없도록 할 테니, 먼저 가지 않을 거라면 걱정 말고 따라와.”

단단한 손이 나택의 손목을 쥐고 앞으로 이끌었다.

* * *

쿠르릉-!

천둥소리에 땅이 흔들렸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이 딱인 날씨였다. 어두컴컴한 하늘이 고함칠 때마다 창문 밖에서 거대한 등이 빛났다. 그러나 아직 비는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샤바투가 되기를 벼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미 한 번 가 보았던 길이고, 날씨 때문에 성내 분위기도 산란한 덕분에 둘은 어렵지 않게 다시 실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메데우스가 향한 곳은 동쪽의 1층이었다. 기둥에 몸을 숨긴 메데우스가 동태를 살피더니 손끝을 까딱였다. 신호를 받은 나택은 메데우스의 등에 찰싹 붙어 걸음을 이었다. 메데우스가 멈춘 곳은 커다란 문 앞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아시는 겁니까.”

나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둠이 깔린 복도에는 쥐새끼 발소리 하나조차 나지 않았다.

“고서를 관리하는 도서관. 샤나비 말로는 사람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도서관인데, 캄비세스가 유독 자주 들락거렸다고 해. 이곳에 숨겨 두었을 확률이 커.”

제발 이 서재에 서신이 있기를 기도하며 나택은 코에 꽂은 천 조각을 더욱 깊이 밀어 넣었다. 메데우스가 옷감을 찢어 쑤셔 준 천이었다.

여기에 없으면 그때는 나랑 같이 도망쳐 줄 거지……?

나택이 작게 훌쩍거리며 코피를 들이마실 때였다.

쿠르릉-!

타이밍 좋게 또 한번 천둥이 쳤다. 그 소리에 맞춰 메데우스가 도서관의 문을 열었다. 메데우스는 들어가자마자 입구 근처에 있는 작은 등에 불을 붙였다. 어둠속에서는 서신의 내용을 알아볼 수 없는 탓이었다.

내부 깊숙이 들어갈수록 나택은 입을 벌린 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입구 바로 앞부터 끝이 보이지 않는 저 뒤까지 납골당처럼 생긴 책장들이 빼곡했다. 사물함 크기만 한 투박한 선반에는 한 칸에 한두 개씩의 점토판이 채워져 있었는데, 점토판뿐 아니라 책장들 역시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현대의 서재와 비슷하면서도 비슷하지 않은 생김새는 도서관이라기보다는 영안실이나 무덤에 가까워 보였다.

메데우스가 유등을 돌 선반에 얹어 놓으며 말했다.

“루할자게시의 문양은 알고 있지? 니누르타의 것과 비슷해.”

“……예.”

힘으로 이길 수도 없고, 아무리 애원하고 설득해도 씨알도 안 먹히니, 차라리 빨리 놈을 도와 서신을 찾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나택은 메데우스의 지시대로 긴 책장의 오른쪽부터 점토판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니누르타 가문의 인장은 손바닥만 한 크기였는데 철퇴를 든 새 머리의 신이 사냥을 하는 문양이었다. 그 주위로는 화려한 곡식알과 빗금무늬가 원을 그리며 둘러 있었다. 일반적인 쐐기 문자를 줄줄이 나열한 것과는 구성부터가 달랐으니, 손으로 만져 보면 구별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쪽에는 없어.”

“……이쪽도요.”

아무리 구별하기 쉬운 문양이라도 찾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손에 닿는 점토판은 모두 건드려 봤지만 루할자게시의 인장은 찾을 수 없었다.

“혹시 다른 문양을 찍어서 보내지는 않았을까요?”

나택이 묻자 메데우스가 황당하다는 듯 나택을 응시했다.

“그럼 루할자게시가 쓴 서신이라는 걸 어떻게 믿지? 그럴 리는 없어.”

잠시 생각해 보던 나택은 곧바로 끄덕였다. 전화도 없고, 사진도 없으며, 하다못해 종이도 없어 지장조차 찍을 수 없는 문명이니. 인증된 귀족 가문의 인장을 제외하면 발신인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이 책장에 놈의 서신이 없다는 것.

“……메데우스 님.”

나택이 메데우스를 부르는 동시에 창문 밖이 번쩍거렸다. 빛이 사라지자마자 하늘을 찢는 천둥이 쳤다. 메데우스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나택에게 눈짓했다.

“지하로 가 봐야겠어. 그쪽에 기록판을 보관하는 곳이 있다고 하니, 거기에 있을지도 몰라.”

메데우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또 한 번 번개가 쳤다. 시간이 흐를수록 번개가 치는 간격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메데우스가 빠르게 출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순간 나택이 달려들 듯 메데우스의 팔을 붙잡았다.

이게 미쳤나.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엔 정말로 안 된다고요.”

쿠르릉- 쾅-!

예사롭지 않은 소리가 터졌다. 그와 동시에 나택의 눈앞이 환하게 빛났다.

심상치 않은 구름이 몰려옵니다.

톡, 톡.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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