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쿠르릉-!
번갯불이 신호라도 되듯, 호위들이 돌진했다. 메데우스 역시 재빨리 검을 뽑아 둘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돌 책장 사이에서 격한 검투가 벌어졌다. 무기가 없는 나택은 뒤로 물러서서 점토판을 담은 옷감을 더욱 단단하게 묶었다. 위험을 자초하면서 얻은 서신인데. 반드시 챙겨 가야 조금이라도 억울함을 덜 수 있었다. 게다가 이건 메데우스의 안위를 지킬 수 있는 방어책이었다.
나택은 묶은 봇짐을 끌어안고 뒤로 몇 걸음을 더 후진했다. 그런데 바닥에서 질척한 소리가 들렸다. 창문에서는 툭, 툭,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기이한 소음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철썩-!
해변에서나 들을 수 있는 물결소리가 들렸다.
……이게 웬 파도 소리야.
나택이 잽싸게 창가를 보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창틀 너머로 물이 넘실대고 있었다. 일렁이는 너울이 유리창을 때릴 때마다 물이 안으로 들이쳤다. 그 풍경을 보는데 델람을 정복하던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 해일처럼 갑자기 들이닥치던 홍수, 빠른 속도로 불어나던 강물들.
그때의 풍경을 기억해 내는 동시에 번개인지 시스템인지 구분할 수 없는 빛이 번쩍거리며 나택의 눈앞에 드리워졌다.
황혼이 저물기 시작합니다.
나택의 머릿속에 시스템이 띄웠던 퀘스트의 이름이 스쳐 갔다.
황혼의 말로.
지금부터 보게 되는 말로는 누구의 멸망일까. 나택은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홍수고 나발이고 다 모른 체하고 이대로 기절해 버리고 싶었다.
델람의 도서관은 현대의 서재에 비해 책장 간의 사이가 꽤 널찍했다. 그 탓에 메데우스는 책장과 책장의 사이에 서서 덤벼드는 두 놈을 한 번에 상대해야 했다. 나택은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제일 가까이에 있는 창가로 뛰어갔다. 흙탕물은 1층의 창문턱까지 차 있었다.
망했다. 개망했다.
메데우스가 있는 쪽을 보는 순간, 덩치 하나가 푹 쓰러지는 게 보였다. 동시에 출입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캄비세스 님!”
끼이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성 외곽부터 물이 차오르고 있습니다!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여기는 위험하니 높은 곳으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경비병의 말을 듣자마자 캄비세스의 시선이 창가에 선 나택에게 꽂혔다. 물은 어느새 창틀에서 한 뼘 위까지 차올라 있었다. 캄비세스가 창밖, 나택, 나택의 품 속 점토판, 메데우스를 차례로 훑었다. 독살스런 캄비세스의 손끝이 나택을 가리켰다.
“저 노예를 먼저 처리해라.”
소식을 알리러 왔던 경비가 그 명령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바로 검을 뽑았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나택을 향해 뛰어왔다. 나택이 도망치려던 그때, 호선을 그린 검 끝이 나택에게 휘둘러졌다.
으억.
나택은 빠르게 몸을 옆으로 돌리며 공격을 피했다. 경비의 검 끝이 회벽에 꽂혔다. 놈은 빨리 나택을 해치워야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저돌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돌겠네.
품에 짐까지 든 상태에서 무기 하나 없이 적을 상대하는 건 무리다. 절대 놈과 가까이 붙어서는 안 됐다.
경비가 벽에 꽂힌 검을 뽑아내기 직전, 나택은 창 옆에 달린 커튼을 잡아 뜯어 놈에게 씌우고 책장 쪽으로 도망쳤다. 두두두, 황소처럼 놈이 씩씩대며 뒤따라왔다.
나택은 돌 선반에 몸을 가리며 책장에 꽃힌 점토판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 나택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오직 방어뿐이었다. 필사적으로 달아나던 나택의 시야에 캄비세스가 들어왔다. 캄비세스는 나택을 보며 저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캄비세스는 비열하게 허점을 파고드는 놈이야. 놈이 너를 빌미로,’
‘저를 빌미로, 그다음에 뭐라고 하시려던 거였습니까…?’
‘……너를 빌미로, 내게 어떤 거래를 종용할 수도 있었어.’
갑자기 메데우스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헛소리를 한다고 속으로 비웃었는데, 이제 와서 돌이켜 보니 그건 헛소리가 아니라 일종의 예언이었다. 제게 벌어질 미래를 내다본 게 틀림없다.
캄비세스, 저 망할 자식…….
나택은 확신했다. 캄비세스의 목표가 메데우스에게서 이나택에게로 옮겨 온 이유는 바로 제 품의 점토판 서신 때문일 거라고.
이걸 버리면 놈이 우리 둘을 놓아줄까.
챙그랑-!
나택과 부딪힌 마른 화병이 떨어졌다. 이리저리 도망치던 나택의 등은 어느새 막다른 벽에 붙어 있었다. 뒷걸음질로 피하던 나택은 결국은 수세에 몰렸다. 가쁜 숨을 내쉬는 경비가 나택의 앞에서 씩씩거렸다. 바짝 약이 오른 놈의 눈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저 눈을 보니 점토판 서신을 버린다 해도 놓아줄 리는 없을 것 같았다.
나택이 빠르게 두리번대며 빠져나갈 구석을 찾았다. 하지만 돌 책장으로 좌우가 막힌 자리에서 탈출구를 찾을 수는 없었다.
“죽여라!”
캄비세스가 외치는 동시에 경비가 검을 양손으로 쥐고는 직선으로 돌진했다.
망할!
손을 쓸 새도 없이 날붙이가 코앞까지 왔다. 나택은 본능적으로 등을 웅크리며 짐을 방패 대신 올려 제 가슴 쪽을 가렸다.
수장당해 죽을 줄 알았더니, 이렇게 가는구나.
곧 가해질 고통을 예상한 몸이 자꾸만 현실을 외면하려 했다. 질끈 감기려는 눈을 이를 악물며 버텼다. 검이 나택의 가슴 깃에 닿는 순간이었다.
푹-.
살점을 찢는 소리와 함께 경비가 그대로 굳었다. 나택을 겨누던 날이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번개가 번쩍이며 엉망이 된 도서관 안을 밝혔다. 찰나의 빛에 나택은 경비의 뒤에 서 있는 풍경을 그제야 알아챘다.
메데우스의 검이 육중한 몸을 꿰뚫고 있었다.
“메데우스…!”
안도감이 가슴을 휩쓸었다.
잠깐, 근데 분명 방금까지 저기서 싸우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나택이 재빨리 주변을 훑었다. 메데우스가 상대하던 호위가 선반 칸에 대가리를 박고 늘어져 있는 게 보였다. 메데우스가 검을 뽑아내자 눈앞의 경비 역시 낙엽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다친 데는.”
“없습니다!”
뒤이어 제 가슴을 휙 내려본 나택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서신도 멀쩡합니다!”
그 말에 메데우스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누가 너보고 이렇게까지 하래?”
화를 내는 듯한 어투에 나택이 눈을 치떴다.
야. 내가 그렇게 사정사정했는데도 고집부리던 게 누군데!
“이거 때문에 여기까지 오신 거잖습니까!”
“그렇다고 널!”
하아. 메데우스의 입에서 짧은 숨이 터졌다.
“됐어. 이리 와.”
메데우스가 나택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책장 사이를 빠져나오는데 걸을 때마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택의 시야에 창밖의 풍경이 걸렸다. 물은 어느새 창문의 반쯤까지 차올라 있었다. 나택의 정수리가 잠기는 높이였다.
아무리 메데우스라도, 저 정도 수심에서는 수월하게 움직이기 어려울 터였다. 나택의 머릿속에 영화 한 편이 스쳐 갔다. 배가 침몰해 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던 유명한 영화가. 호위들 몇이 물이 스며든 복도에서 뛰어오고 있었다. 당장 여길 벗어나야 했다.
“높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나택의 말에 메데우스가 검을 더 꾹 쥐었다. 유일한 출구에 캄비세스와 그의 호위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메데우스를 보던 캄비세스의 시선이 나택의 손목으로 향했다. 메데우스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나택의 손목을 단단하게 부여잡고 있었다. 캄비세스의 눈이 번뜩였다.
“공주로 회유할 것이 아니라 약점을 쥐고 합의를 보아야 했는데. 내가 너무 늦게 알아챈 것 같습니다.”
“캄비세스.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메데우스의 한마디에 캄비세스의 눈동자에 독기가 서렸다.
“이 나라를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는데……. 거의 다 되어 갔는데! 네놈들이 그걸 망치려 들고 있어! 그런데 이럴 때가 아니다?”
여봐라! 캄비세스의 호령에 복도에 있던 호위들이 우루루 도서관 안으로 몰려와 출입구를 막아섰다.
돌겠네, 진짜.
호위들의 낯에는 두려움이 희미하게 묻어 있었다. 하지만 나택의 불안에 비할 게 못 됐다. 나택은 이 도시의 멸망을 알지만, 저들은 그저 불길한 자연재해에 초조해할 뿐이다. 쩌적, 하며 복도 밖 유리창에 금이 가는 게 보였다. 어느새 적군이 포진한 복도에도 굵은 물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택이 메데우스의 손을 세게 맞잡았다.
“메데우스 님.”
메데우스가 꽉 잡힌 손과 나택의 뺨을 번갈아 보았다.
“창문 쪽으로 붙어요.”
출구가 막혔다면 창문을 깨고서라도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메데우스가 이해했다는 듯 나택의 손을 더욱 세게 쥐었다.
“노예는 죽이고 메데우스는 내 앞으로 끌고 와라!”
캄비세스의 호령이 끝나는 순간, 쨍그랑 소리와 함께 복도에서 파열음이 들렸다. 깨진 창문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돌격하려던 호위들이 급격한 물살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강둑이 터진 것처럼 빠르게 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적들은 파도에 쓸리듯 거기에 뒤섞여 도서관 안으로 굴러들어 왔다.
나택과 메데우스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도서관의 창문가로 달려갔다. 팔꿈치로 창문을 세게 내리찍자, 허술한 유리창에 금이 갔다. 틈으로 물이 새어 들어오자 메데우스가 나택을 얼른 끌어당겼다. 메데우스는 창문과 창문 사이의 벽에 붙어 나택을 세게 안았다.
“수영은 할 줄 알아?”
안타깝게도 인터넷으로 찾아본 생존 수영법이 나택이 아는 전부였다.
“……아뇨.”
쯧, 메데우스가 짧게 혀를 찼다.
“나한테서 절대 떨어지지 마.”
나택이 메데우스의 품 안에서 끄덕였다. 두 사람을 해하려던 호위들은 물살에 쓸려 제대로 걷지도 못한 채로 책장을 하나씩 부여잡고 버텼다. 그들 중에는 캄비세스도 있었다. 어디서 들이닥치는지도 모를 물줄기가 높이를 더하고 더해 나택의 허리를 넘어설 때쯤이었다.
쿵- 쿵- 쿵-!
매달린 장정들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돌 책장이 도미노처럼 쓰러지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무거운 돌 사이에 낀 사람들이 살려 달라 소리쳤다. 어둠 속 도서관은 금세 아비규환이 되었다. 나택이 마른침을 삼키는 순간, 바로 옆에서 세찬 파열음이 터졌다. 마감이 허술한 창문들이 일제히 파편이 되어 터지며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택과 메데우스는 간신히 벽에 붙어 서서 창밖을 빠져나갈 시기를 가늠했다. 그때, 차오르는 물의 심각성을 알아챈 캄비세스가 소리쳤다.
“장군! 나를 도와다오!”
캄비세스는 쓰러진 책장과 책장 사이에 팔다리가 끼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기울어진 몸 때문에 물의 높이는 그의 턱 끝을 넘어서고 있었다. 메데우스는 캄비세스를 감흥 없이 보며 나택을 더욱 품으로 당겼다.
“그대가 자초한 일이니, 스스로 해결하도록 해.”
자신을 도우라 외치던 목소리가 삽시간에 물에 잠겼다. 물속에 잠긴 머리카락이 미친 듯이 발버둥쳤지만 두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느새 물살이 나택의 어깨까지 찼을 때쯤, 캄비세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띠링- 경쾌한 소리와 함께 시스템 안내창이 떴다.
[황혼의 말로]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멸망을 맞이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캄비세스였다. 세차게 몰아치는 물살이 그 타이밍에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밖에서 안으로 쓸려 오던 것이 도서관 내부에서 창밖으로 급류가 되어 흘렀다. 버티던 두 사람의 몸이 점점 창문 쪽으로 빨려갔다.
“읏, 메데우스 님!”
메데우스가 나택의 손을 세게 잡았다.
“절대 놓지 마!”
“알겠습니……!”
꼬르륵.
말을 끝맺기도 전에 두 사람의 몸이 밖으로 쑥 빨려 나갔다. 도서관 안에는 쓰러진 책장의 끄트머리만 물 밖에서 찰랑거렸다. 급류에 휘말리는 나택의 앞에 밝은 빛이 이정표를 찍어 주었다.
[델람의 대홍수]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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