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휘몰아치는 물살에 눈을 뜰 수 없었다. 나택의 몸은 정처 없이 뱅글뱅글 물속을 돌았다. 그건 메데우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어딘가에 툭 부딪히며 튕기는 진동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택에게 직접적인 고통이 가해지지는 않았다. 메데우스의 팔을 통해 전달되는 울림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몇 번의 충돌이 일어났지만, 나택을 감싼 단단한 팔은 풀어지지 않았다. 이리저리 휩쓸리면서도 두 사람의 몸은 점점 위로 떠 올랐다.
“푸하!”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나택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세찬 물이 나택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테레시. 괜찮아?”
“하……. 예. 괜찮습니다.”
고개만 내밀던 나택의 몸이 점점 위로 들렸다. 쏟아지는 비와 젖은 앞머리에 가려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눈을 세게 끔뻑거리며 나택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살이 나택을 스쳐 가고 있었다.
방금까지 휘둘리던 것과 다르게 나택의 몸이 웬 벽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기둥을 잡고 있는 메데우스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건 물에 잠겨가는 성 동채의 외벽 장식이었다.
“물이 불어나는 속도가 너무 빨라. 우선 위로 올라가야 해.”
나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하늘이 번쩍이며 시스템이 안내창을 띄웠다.
수나파크 10% 침수
메데우스가 한 팔로 나택의 허벅지를 받치더니 그대로 몸을 들어 올렸다.
“올라가 어서!”
나택은 벽돌 틈과 돌출된 부분을 잡으며 열심히 올라갔다. 그러나 물에 젖은 벽돌 때문에 자꾸만 미끄러졌다. 게다가 여전히 쥐고 있는 점토판 봇짐 때문에 더 녹록지 않았다. 벽돌과 씨름을 하고 있는 사이, 두 사람의 양옆에서 물줄기가 터졌다. 유리창이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깨져 버린 것이다.
수나파크 14% 침수
세찬 유속에 나택과 메데우스의 몸이 빨려 들어가려 했다. 버티는 게 최선인 상황이다.
망할. 살다 살다 이런 재난을 당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나택이 욕지거리를 씹으며 혼신의 힘을 다해 벽을 기어올랐다. 나택이 올라가는 폭에 맞추어 메데우스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쿠르릉-!
수나파크 17% 침수
시스템 안내창이 방해였다. 눈 부신 빛을 피하려 나택이 미간을 찌푸렸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발을 맞추며 간신히 3층의 난간까지 다다랐다. 메데우스도 옆에 나란히 섰다. 두 사람이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는 이미 물에 잠긴 후였다. 그러고서도 물은 두 사람의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수나파크 22% 침수
물 폭탄을 투하해도 이렇게 물이 빠르게 불지는 않을 텐데. 빨라도 너무 빨랐다.
두 사람은 등반하듯 계속 벽을 타고 올라갔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한계가 보였다. 저 멀리 성벽 너머에서 사람들의 비명과 동물의 울음이 들렸다. 어느새 물은 나택의 가슴 높이까지 바짝 추격해 오고 있었다.
“건물이 잠기면 더 버틸 수가 없어.”
“물에 뜰 만한 걸 찾아야 합니다. 어떻게든 버텨야……. 메데우스 님!”
나택의 외침에 뒤를 돌아보려던 메데우스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나택은 봇짐을 든 팔을 난간에 끼운 채 다른 팔로 메데우스의 머리를 제 품 안에 가뒀다. 그러고는 메데우스의 커다란 몸을 건물에 바짝 붙인 뒤 그 위로 제 몸을 덮어 보호했다.
쾅-!
벽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통나무가 메데우스가 서 있던 자리를 들이받았다.
수나파크 29% 침수
“윽…….”
급류에 휩쓸려 가던 통나무 표면이 나택의 한쪽 팔을 쓸었다.
“테레시, 괜찮아?!”
“예. 괜찮습니다.”
거친 나무에 피부 껍질이 벗겨졌다. 구정물이 그 상처에 닿아 너무 따끔거렸다. 미간을 좁히며 나택이 메데우스를 살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수나파크 33% 침수
조명이 필요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나택의 시야는 시스템 안내창 덕에 빛이 가시지 않았으니까.
통나무에 들이받혀 부서진 벽돌은 떨어지는 족족 급류에 휩쓸렸다. 유턴하는 자동차처럼 통나무가 방해물을 피해 긴 몸을 회전했다. 물살에 끌려가는 통나무는 두 사람이 보고 있는 재앙 속에서 유일하게 물 위에 온전히 떠 있는 물체였다.
“테레시, 저걸 붙잡아!”
수나파크 38% 침수
물에 젖은 시야를 털어 내며 나택이 통나무에 손을 뻗었다. 생각이란 걸 할 틈이 없었다. 일단 움직이고 봐야 했다. 뒤이어 메데우스도 통나무 위에 팔을 걸쳤다. 두 사람을 태운 통나무가 유유히 물살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수나파크 43% 침수
어느새 두 사람이 서 있던 자리도 물에 모두 잠겨 있었다. 나택이 후, 입바람으로 눈앞을 불어 내며 젖은 눈꺼풀을 어깨에 문지르는 찰나였다.
“어?”
왼손에 들린 무게가 점점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다.
수나파크 48% 침수
안내판의 빛 사이에서 두둥실, 점토판이 하나씩 떠내려가는 게 보였다. 이 난리를 헤쳐 나가는 사이 묶어 둔 보따리의 매듭이 느슨해졌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안 돼!”
나택이 풀린 천을 다급하게 움켜쥐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곧 하얀 손가락에 손목을 잡혔다.
“너도 같이 휩쓸려 가고 싶어?”
“하지만, 저건,”
망할 새끼야. 네가 고집부리면서까지 챙기려고 한 증거들이잖아! 저것마저 잃어버리면 지금 이 개고생을 한 보람이 없다고!
메데우스가 가벼워진 보자기를 대충 오므리더니 뺏어 갔다.
“너한테 목숨 걸면서까지 지키라고 한 적 없어. 여기서 떠내려가면 정말 위험해.”
나택이 획 고개를 돌려 메데우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덜커덩거리는 통나무와 함께 흔들리며 세찬 물세례를 맞았다. 흙탕물이 벌어진 나택의 입 안에 그대로 들어왔다.
“어푸, 푸우우우.”
나택이 물을 뱉어 내며 입을 털었다.
수나파크 55% 침수.
“절대 놓치지 말고 꽉 잡아.”
메데우스가 나택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치며 통나무를 끌어안았다. 둘러본 사방에 마을의 흔적은 없었다. 저 멀리 보이는 성채는 지붕 꼭대기만을 남겨 두고 물에 잠겼다.
수나파크 61% 침수
나택과 메데우스의 주변으로 엎어진 채 등과 배를 내놓고 떠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고급스러운 옷감으로 만든 잠옷을 입고 있었다. 신의 노여움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잔인하고 지독했다. 그들 중 이 대도시가 허무하게 잠겨 버릴 거라고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수나파크 70% 침수
부유했던 세상은 삽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나택은 번쩍거리는 하늘과 눈앞의 시스템 창을 보며 통나무를 더욱 꾹 끌어안았다. 나택의 귓가에 범선에서 들었던 선원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의 도시, 황금의 나라. 비옥한 고원 할타미(신의 땅)에서 풍요를 알리네.’
‘땅은 강이 되고 강은 바다가 되어 나아가리라. 물의 신께서 이 땅에 자비를 내리시니.’
‘두려워 말고 배를 띄워 앞으로 나아가자. 에아의 축복이 이 길을 밝히리라.’
수나파크 87% 침수
선원들의 음률이 허밍처럼 희미하게 반복됐다. 후두두 사정없이 쏟아지는 빗소리를 뚫고 가사가 선명하게 귀에 꽂혔다. 마치 세이렌이 부르는 죽음의 노래 같았다. 쏟아지는 빗물 사이로 신의 전언이 뒤이어 어둠을 밝혔다.
‘인간을 서쪽 땅에 몰아넣어라.
가엾은 동식물은 동쪽에 지은 방주에 옮겨 심어라.
나는 샤바투 초하루에 폭우를 내릴 것이다. 칠일 밤낮으로 쏟아지는 비가 세상의 모든 인간을 멸할 것이다.’
사라지는 시스템 안내창 너머로 물을 먹은 시체 두 구가 두둥실 지나갔다. 나택은 눈을 깜빡거리며 끔찍한 잔상을 털어 냈다.
수나파크 93% 침수
물에 쫄딱 젖은 채로 흘러가며 나택과 메데우스는 통나무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수나파크가 완전히 잠기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수나파크 99% 침수
비가 내리기 시작한 후로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시스템은 재난이 끝났음을 알렸다.
수나파크 100% 침수
물의 도시, 황금의 나라가 소실되었습니다.
퀘스트가 끝났을 때, 흙탕물의 바다에서 살아 있는 사람은 나택과 메데우스 두 사람뿐이었다.
* * *
도시가 잠기고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칠일 밤낮으로 내렸다는 이야기답게 비는 멈추지 않았다. 도시를 삼킨 폭우는 잦아든 빗줄기로 변모해 끊임없이 재앙에 깊이를 더했지만, 다행히도 유속은 점점 잔잔해졌다.
어느새 해가 뜨고 있었다. 통나무 주변으로 급류에 휩쓸린 델람인들과 가축들이 떠다녔다. 소름이 돋을 만큼 섬뜩한 광경이었지만 그 잔인함은 나택의 마음속까지 침범하지 못했다. 나택의 입술은 어느새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젖은 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이상을 눈치챈 메데우스가 나택에게 더욱 가까이 붙었다.
“테레시.”
“……예.”
“내게 붙어.”
나택이 느릿느릿 메데우스 쪽으로 몸을 붙였다. 메데우스 역시 왼쪽으로 이동하며 한쪽 팔로 나택의 어깨를 감쌌다. 나택이 크게 숨을 몰아쉬며 메데우스에게 기댔다.
“지금 잠들면 안 돼.”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밤새 뛰어다니고 숨어 다니고 갇혔다가 휩쓸리면서 나택의 체력은 진작에 고갈된 상태였다. 그에 반해 메데우스는 온몸이 젖은 걸 제외하고는 여전히 멀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택은 이런 결정적인 순간마다 현대인과 고대인의 체력 차이를 느꼈다.
메데우스의 눈동자가 통나무 위에 걸친 나택의 아래팔을 훑었다. 메데우스의 머리통을 지키려다 쓸린 피부에는 피딱지와 흙탕물의 이물질이 붙어 있었다. 메데우스가 잇새로 입술을 짓씹었다. 하얀 손이 나택을 감싸며 가슴에 품었다. 달달 떨리는 나택의 몸은 얼음장 같았다.
“테레시. 체온이 더 떨어지면 정말 위험해.”
“예. 저도 아는데……. 죽을 것 같아요.”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
“지금 농담하게 생겼습니까…….”
나택이 짜증스럽게 답했다. 그러면서도 메데우스의 품 안으로 굴을 파듯 파고들었다. 맞닿은 부위가 비바람에 노출된 곳보다 훨씬 따뜻했다. 나택의 뺨이 메데우스의 턱에 닿았다. 나택이 고개를 비스듬히 메데우스에게로 틀었다. 멀쩡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생기가 돌던 메데우스의 입술도 보랏빛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게 무슨 시련이냐…….
저도 저지만, 쫄딱 젖은 메데우스도 안쓰러워 보였다. 나약해진 몸 상태 때문에 마음도 나른해졌다. 평소라면 생각에 그치고 말았을 이야기를 나택이 중얼거리며 입 밖으로 흘렸다.
“메데우스 님.”
“얘기해.”
“저는 정말 이런 데서 죽고 싶지 않거든요.”
이렇게 갑작스런 사고로, 아니, 수눈키 속 희생자 1로 세상을 하직하고 싶지 않았다.
“근데 제가 살려면 메데우스 님도 살아야 돼요.”
그래야 탈출할 수 있으니까.
“왜 얘기가 그렇게 돼.”
메데우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나택의 이마에 작은 그늘을 만들었다. 그 덕에 나택의 눈꺼풀로 흘러내리던 빗방울이 멎었다.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여간 그래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됩니다.”
“네 걱정이나 해.”
참방, 두 사람의 옆으로 엎어진 갑옷 무리가 지나갔다. 나택이 그 광경을 건조하게 보며 메데우스에게 밀착했다.
“농담 아니고…. 그냥 하는 소리도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라고요. 그리고…… 저는 절대 메데우스 님하고 떨어질 수 없고……. 떨어지지도 않을 거니까……. 저 버리고 어디 혼자 가시는 것도 안 돼요.”
그 말에 회색 홍채가 세차게 흔들렸다. 잠시간의 고요가 지나고, 메데우스가 나택의 축축한 정수리에 입술을 묻었다. 차가운 빗속에 닿은 유일한 체온은 서로밖에 없었다.
“……다시 우루크로 돌아가면. 그때 약속해 줄게.”
“한입 갖다 두말하시면 안 됩니다…….”
나택의 말꼬리가 자꾸만 늘어졌다. 이 지경이 되자 마음이 급해진 건 도리어 메데우스였다. 어디에 머무르든 물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사방에 보이는 것은 구정물과 죽음의 흔적뿐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메데우스가 한쪽 팔로 물살을 내저으려는 순간이었다. 저 멀리에서 해가 환하게 떠올랐다. 빛의 수평선 중앙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두 사람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택의 흐린 시야에 눈부신 안내 문구가 떠올랐다.
거대한 방주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수나파크의 땅, 스메나피쉬팀의 방주가 다가오고 있었다. 거대한 나무배를 보며 나택은 결심했다.
내가 장마철에 밖에 나가나 봐라.
“장군!”
반갑게 외치는 스메나피쉬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는 수영장에도 바닷가에도 안 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