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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에서 탈출시켜 줄 히든영웅을 찾습니다-54화 (54/178)

54화

방주는 마치 거대한 강당 같았다. 구석에 세운 어설픈 가림판 안에는 가축 몇 마리가 있었는데, 이것들은 신전에 바쳐진 공물이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다. 도시 중앙에 살던 수나파크의 재력가들은 모두 홍수에 쓸려 사라졌고, 방주에 탑승한 건 외곽이나 산간 중턱에 살던 노예와 자유민 일부, 그리고 신관이 대부분이었다. 캄비세스와 캄비세스를 주축으로 활동하던 세력들은 모두 물에 잠겨 버렸다.

나택과 메데우스는 스메나피쉬팀의 호의로 가장 조용한 곳에 분리된 선실에 자리할 수 있었다. 다들 채비를 할 새도 없이 모여든 터라 방주 안에는 몸을 녹일 불도, 이불도 없었다.

두 사람에게 선실을 안내한 샤나비가 곱게 접은 천 한필을 나택에게 건넸다. 화려한 문양과 질감을 보니 분명 어느 신관이 챙겨 온 공물임에 틀림없었다. 두 사람에게 건네진 최선의 배려였다.

“감사합니다.”

나택은 거절하지 않고 그 호의를 받아들였다. 보랏빛으로 물든 메데우스의 입술이 마음에 걸렸다.

“두꺼운 이불을 구할 수 있는지 좀 더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됐어. 이것으로 충분해.”

메데우스가 건조하게 답했다. 메데우스는 샤나비가 있는데도 개의치 않고 젖은 옷을 훌렁훌렁 벗기 시작했다. 샤나비가 화들짝 놀라 도망치듯 방 밖을 빠져나갔다.

쿵, 문이 닫히더니 틈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급히 오느라 제대로 갖추어 둔 것이 없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한숨 주무시고 나면 산양 젖이라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필요하면 내가 찾아 갈 테니 허락 없이 오지 마.”

“알겠습니다. 그럼 푹 쉬세요, 장군.”

샤나비가 총총걸음으로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천을 들고 가만 서 있던 나택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샤나비는 이미 멀리 가 버린 후였다.

“배고파?”

“아니요…. 괜찮습니다…….”

꼬르륵-.

“다시 부를까?”

“아닙니다.”

어차피 산양 젖 한 잔을 먹는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허기가 아니었다. 이런 일로 공주를 귀찮게 하느니 그냥 참는 게 나았다.

어느새 메데우스는 젖은 옷을 벗고 나신으로 서 있었다. 삐걱거리는 선실 내부에는 허름한 갈대 이부자리 외에 어떤 가재도 없었다. 창문도 없는 공간에 빗물 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렸다. 나택은 받은 천을 펼쳐 메데우스의 등에 둘러 주었다. 꽤 넓은 천이었는데, 메데우스의 어깨를 감싸고 나니 남는 공간이 없었다. 손끝에 닿은 메데우스의 피부는 얼음장이었다.

얘 이러다 갑자기 급사하는 건 아니겠지.

잠시 고민하던 나택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가서 덮을 게 더 있는지 찾아보고 오겠습니다.”

하지만 두어 걸음도 채 가지 못하고 몸이 돌아갔다.

“그 꼴로 어딜 돌아다니려고.”

어둠 속에서 회색 홍채가 나택의 전신을 훑었다. 그제야 나택도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축축한 옷은 몸에 달라붙어 움직일 때마다 질척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 방주에서 마른 옷감은 매우 귀한 물품이었다. 구하기도 어려웠고, 있다 해도 노예 한 명을 위해 쓸 수 있을 리 없다.

“상황이 상황이니, 다들 제 행색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진 않을 겁니다.”

“남들 시선을 말하는 게 아니야.”

메데우스가 나택의 가슴께로 손을 뻗었다. 하얀 검지 끝에 젖은 천이 걸렸다. 나택의 몸은 물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잘게 떨리고 있었다. 메데우스가 나택의 옷감을 끌어 내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택이 흘러내리는 어깨를 붙잡았다.

“무……. 뭐 하시는 겁니까.”

“또 앓아누우려고 그래?”

“제가 언제…….”

아, 삼나무 숲.

“노예 수발드는 건 한 번으로 족해.”

몸살에 걸린 나택을 이고 지고 처소까지 데려와 돌보던 게 메데우스가 맞긴 했다. 이곳에 와서 앓아누운 건 그때 딱 한 번뿐이었는데, 메데우스는 계속 그 일을 끄집어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옷을 벗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는 갈아입을 옷도 없고……. 방주 안에 바람이 많이 부는 것도 아니니, 괜찮습니다. 그때처럼 앓아눕진 않을 겁니다.”

“잔말 말고 벗어.”

당황한 나택이 눈알을 굴렸다.

나보고 다 벗은 채로 있으라는 건가. 마찬가지로 천 하나만 걸치고 있는 메데우스와? 설마 고대인들은 동성끼리 벗고 한 공간에 있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너는 목욕도 항상 혼자서 해 왔잖아.

이 시대의 가치관과 습성에 대해 확신할 수 없으니, 메데우스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메데우스가 내리깐 시선으로 나택을 사납게 응시했다. 사납다 못해 단호함까지 보였다.

또 고생시키지 말고 그냥 벗어라, 이런 의미겠지.

고민하던 나택은 하는 수 없이 젖은 옷감을 천천히 풀어냈다. 주인의 명령을 거부할 수도 없거니와, 나택 역시 젖은 옷감이 찝찝하던 참이었다. 선실 안에 불빛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벗은 옷을 든 나택은 메데우스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벽을 가리켰다. 저기 앉아 있다가 대충 마르면 곧바로 다시 옷을 입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럼 저는 저쪽에 있겠습니다.”

“벽보고 반성이라도 하게?”

“반성이라뇨. 제가 뭐 잘못한 게 있습니까.”

“없어. 그러니까 이쪽으로 와.”

메데우스가 나택의 손목을 쥐고 이부자리로 이끌었다. 나무 판을 켜켜이 쌓아 놓은 자리 위에는 갈대 줄기를 엉성하게 짠 요가 깔려 있었다. 메데우스가 그 자리에 앉으며 나택을 잡아당겼다.

벽에 기대앉은 메데우스는 품 안에 나택을 넣고는 그대로 천을 앞으로 둘렀다. 나택은 그대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밀착된 몸에서 메데우스의 골격과 근육 짜임새까지 그대로 전해졌다.

메데우스가 그대로 뺨을 나택의 어깨에 붙이며 기댔다.

“어……. 그…….”

“여기서는 약초도 구할 수 없어. 일 크게 만들지 말고 몸부터 녹여.”

메데우스는 별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혼자 사색이 되어 거절하고 뛰쳐나가는 것도 우스웠다. 하지만 가만히 이 지시를 따르자니 그것도 이상해서 나택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삐걱댔다. 그러자 메데우스가 더욱 몸을 붙이며 나택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천이 흘러내리잖아. 가만히 있어.”

“아……. 어……. 예……. 그럼…….”

허리에 감겨 있는 차가운 팔이 점점 뜨끈해지는 게 느껴졌다. 규칙적으로 내쉬는 메데우스의 숨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 소리를 듣자 나택의 마음도 차분해졌다. 이 적막을 맞이하기 직전까지 했던 개고생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온갖 역경을 딛고 맞이한 평온이 이런 낡은 선실에서 남자와 한 이불 덮고 있는 상황이라니. 어이가 없어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흘끔 본 메데우스는 나택에게 기대 쥐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

에라 모르겠다. 일단 한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 보자.

나택은 결국 스쳐 가는 모든 생각을 털어 버리고, 메데우스에게 기댔다. 단단한 몸은 마치 널찍한 의자 등받이 같아서 불편함이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을 난로 삼아 그대로 천천히 몸을 녹였다.

그러고 얼마나 지났을까. 어두운 선실 안에서 새근거리는 숨이 울렸다. 나택이 곯아떨어진 소리였다. 자는 줄 알았던 메데우스는 사실 잠들지 않았다.

“……테레시.”

메데우스가 나직하게 나택을 불렀다.

커어어-.

대답 대신 가슴께에서 걸걸한 소리가 났다. 메데우스는 조심스럽게 팔을 들어 나택의 뺨을 제 한쪽 어깨에 얹었다. 들어 올려진 얼굴에 까진 상처가 있었다. 닦아 낸다고 닦아 냈는데, 코 밑에는 코피를 흘렸던 자국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 지경이 되면서까지 저를 따라오겠다 우기던 나택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택이 함께 와 주지 않았다면 서신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택을 더 이상 의심하진 않으나,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그 자리를 어떻게 찾은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 따위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메데우스가 반대쪽 손으로 나택의 손목을 잡았다. 스르륵, 두르고 있던 천이 흘러내렸다. 잡아당겨 본 나택의 아래팔에는 쓸린 상처대로 딱지가 앉아 있었다. 메데우스의 머리를 감싸다 다친 자리였다. 메데우스가 손끝으로 딱지가 앉은 부위 주변을 조심스럽게 만지는데, 나택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메데우스는 다시 나택의 손을 내려놓으며 천을 끌어 올렸다.

“내가…… 네 주인이 아니었어도 그렇게 감싸 줬을까.”

메데우스가 나택에게 물었다. 하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내 노예가 아니었어도…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해 줬을까.”

커어어어-.

“…….”

작게 벌어진 나택의 입꼬리에 피곤에 절은 타액이 한 방울 맺혔다. 메데우스가 엄지로 그 흔적을 훔쳤다. 미련이 남은 손가락이 나택의 입술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주인과 노예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좀 더 가까운 사이가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내가 네 주인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메데우스가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붉은 입술을 조심스럽게 나택의 이마에 얹었다. 메데우스는 방황하는 제 마음에 한참 동안 나택만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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