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에아의 예언대로 비는 칠일을 꼬박 채울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나택은 유흥거리 하나 없는 방주 안에서 메데우스와 지루하고 어색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다행인 것은 긴 시간을 때울 대화거리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택이 엿들은 내용과 메데우스가 알고 있는 델람의 일을 하나씩 끼워 맞추며 두 사람은 앞으로 찾아올 고난을 대비했다.
나택은 챙겨 온 점토판 서신을 선실 바닥에 깔아 두었다. 빛과 바람이 없어서인지 젖은 판은 며칠을 널어 놓아도 제대로 마르지 않았다. 나택은 서신을 하나씩 해석하며 정리했다.
“이건 무슨 내용입니까?”
물론 해석은 메데우스의 입을 빌어야만 가능했다.
“나를 델람으로 보내는 데 적극 협조하겠다는 얘기야. 그 대가로 주석의 거래량을 조절해 달라는 내용이고…….”
메데우스가 말끝을 흐렸다. 새하얀 손끝으로 짚은 판의 후미는 깨지고 짓눌려 글자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아마 이다음에 주고받은 서신에 상세한 내용이 적혀 있을 텐데. 이 중에 없는 걸 보니 홍수에 휩쓸린 모양이야.”
나택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우려했던 대로였다. 나택과 메데우스 두 사람 모두가 얻지 못한 정보만 소실되었다. 시스템이 주는 아이템을 잃어버리면 이렇게 결정적인 핵심을 놓치게 된다. 그게 어떤 결과로 올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서신을 한참 내려다보던 나택이 근심 어린 투로 말했다.
“제가 엿들은 내용대로라면, 분명 대신관님이 지금쯤 우루크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을 겁니다. 메데우스 님을 델람에 보내기 위한 밑 작업……이 대체 뭘까요. 혹시 짐작 가시는 건 없습니까.”
“……글쎄.”
메데우스가 팔짱을 낀 채 검지를 까딱거렸다. 그 모습을 보는데 흙탕물 속에서 흘러가던 점토판들이 떠올랐다. 그때 봇짐을 좀 더 단단히 묶었어야 했는데. 아니, 매듭이 풀린 걸 좀 더 빨리 알아챌걸. 아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점토판을 주워 와야 했는데.
다양한 후회가 뒤따랐다. 물론 그때의 나택은 긴박한 순간에 최선의 대처를 했다. 머리로는 알지만,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니 후회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설마……. 이러다 메데우스가 잘못되는 건 아니겠지.
나택의 눈동자에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
똑똑-.
막막한 분위기를 잘라 내려는 듯, 때마침 문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장군, 오라버니께서 장군을 찾으십니다.”
나택이 얼른 점토판 위에 마른 천을 덮었다. 두 사람은 곧바로 샤나비를 따라 방주의 갑판 위로 올라갔다.
어느새 먹구름은 깨끗하게 걷혀 있었다. 맑은 하늘이 눈부셔 나택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나택의 위에 안락한 그림자 양산이 드리워졌다. 올려다본 옆에 메데우스가 있었다.
나택이 배의 난간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시야가 뱅글뱅글 돌았다. 시스템이 시네마틱 영상처럼 주변을 빙 두르며 풍경을 보여 주고 있었다.
커다란 성은 흔적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델람의 자랑이었던 주석 광산은 간신히 터를 유지하고 있었고, 에아의 신전 역시 간신히 수장만을 면한 듯했다.
“수나파크는 이제 신화 속의 도시가 되겠군.”
메데우스가 건조하게 말했다. 동시에 시스템이 안내창을 띄웠다.
수나파크가 파괴되었습니다.
[델람의 대홍수]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 * *
찬란했던 황금의 도시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멸망을 관조하는 타국의 장군 앞에 스메나피쉬팀이 섰다.
“장군.”
메데우스가 긴 속눈썹을 부드럽게 내렸다 올렸다.
“장군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물론이거니와 여기 있는 모든 자들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오.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소.”
스메나피쉬팀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한 나라의 후계자가 갖추는 예의였다. 메데우스가 그와 마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의 도시를 세워. 그리고 다시는 우루크를 흔드는 일이 없도록 해. 그게 당신이 보여 줄 최대의 성의야.”
스메나피쉬팀이 끄덕이더니 손끝을 제 입술에 짙게 문질렀다. 그러고는 메데우스의 어깨에 그 흔적을 얹었다. 에아의 신도가 보내는 최고의 축복 의식이었다.
“나는 다시 델람을 일으킬 것이오. 새로운 델람은 앞으로 우루크와 니누르타 메데우스에게 신실한 우정을 보여 줄 것입니다. 델람의 신 에아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소. 장군에게 한 이 결맹은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지키리다.”
“……좋을 대로 해.”
성의 없는 허락이 떨어졌다. 이로써 델람은 우루크의 맹약국이 되었다. 이렇게 큰 수확을 거두고서도 메데우스의 낯빛은 밝지 않았다. 한 발 떨어진 자리에서 나택은 이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망망대해의 바다 위에 빛나는 글자가 떠올랐다.
‘델람’ 정복에 성공했습니다.
빛나는 문구 너머로 오색의 폭죽이 터졌다.
[메인]강과 바다의 노래 스토리가 완료되었습니다.
찬란한 조명 사이에서 메데우스의 눈동자가 보였다. 밝은 홍채에는 근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운 근심이었다. 나택이 마른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개고생을 하며 얻은 대가에 기뻐야 하는데, 두려움이 앞섰다. 루할자게시가 벌이고 있는 밑 작업은 무엇인지, 유실된 아이템 때문에 놓쳐 버린 정보를 다시 얻을 기회는 주어질지. 무엇보다 잃어버린 단서가 메데우스를 위협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메데우스가 잘못 되면 안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