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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에서 탈출시켜 줄 히든영웅을 찾습니다-56화 (56/178)

56화

거대한 물난리에도 델람의 무역선 몇 채는 무사했다. 역시나 최대 무역국의 상선다웠다. 나택과 메데우스는 그중 가장 건실한 한 채를 타고 우루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무사히 닐 항구에 도착해 쿤가를 타고 우루크 성채에 다다랐을 때는 해가 중천인 시간이었다.

“메데우스 님, 오셨습니까.”

성의 문지기가 메데우스를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메데우스는 가볍게 끄덕이는 것으로 두 문지기의 인사를 받았다. 나택은 행여나 누구에게 빼앗길세라 들고 있는 봇짐을 꼭 끌어안았다.

우루크를 떠난 지 겨우 며칠인데. 한 달은 못 와 본 것처럼 이 풍경이 반가웠다. 나택에게 우루크는 고대 문명에서 가장 익숙한 도시였다.

두 사람이 시장 쪽으로 들어서려는 찰나였다.

히히힝-!

쿤가 한 마리가 급하게 두 사람 앞에서 멈춰 섰다. 다부진 체격의 남자가 안장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메데우스의 앞에 섰다.

“메데우스 님.”

남자가 한쪽 무릎을 세우며 몸을 굽혔다.

“돌아오셨단 소식을 듣고 곧바로 달려왔습니다.”

메데우스는 자연스럽게 그 격식을 받았다. 남자는 메데우스의 직속 부하이자, 우루크군의 부지휘관이었다.

“아가디스. 내가 없는 동안 별일은 없었나.”

남자는 대답 대신 몸부터 일으켰다. 나택은 한발 물러서서 그를 관찰했다. 아가디스는 메데우스보다는 작고 나택보다는 큰 키를 가졌다. 어깨에 두른 망토가 그의 몸의 가려 주고 있었지만, 음영진 천의 주름으로 체격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는 팔다리의 두께가 남들의 두 배나 되었다. 근육과 지방이 조화롭게 짜인 몸은 아름답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쓸모를 위해 단련된 육체였다.

“메데우스 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엔시에 대한 일입니다.”

불쑥 나온 호칭에 메데우스의 이마가 구겨졌다.

“무슨 일인데.”

“메데우스 님께서 떠나시던 날에 엔시께서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현재도 의식이 없으십니다.”

이야기를 주워듣던 나택이 그대로 굳었다. 메데우스의 눈에는 심각한 기류가 맺혔다.

“무슨 소리야. 분명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정정하셨는데. 쓰러지셨다니.”

“의사들도 명확한 이유는 모르겠다고 합니다. 기혈이 허해져서라고 하는데…….”

아가디스가 말을 하다 말고 뒤를 질질 늘렸다. 잠시 기다리던 메데우스가 팔짱을 꼈다.

“하는데?”

“……저는,”

아가디스가 주먹을 꾹 쥐었다. 아래팔의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그의 손엔 감정이 실려 있었다.

“저는, 의사들의 말이…….”

“부, 부지휘관님! 어서 장군님을 모셔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지기 둘이 약속이라도 한듯 외치며 망설임을 잘라 냈다. 이제까지는 나택과 마찬가지로 조용히 있던 놈들이 돌연 발작하듯 난입했다. 아가디스가 마른 입술을 꾹 다물었다. 메데우스가 팔짱을 풀며 한 걸음 다가갔다.

“아가디스. 왜 이야기를 하다 말아. 의사들의 말이 뭔데.”

“……아닙니다. 의사들의 말보다는 역시 신의 돌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단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대신관님께서 줄곧 엔시의 곁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루할자게시가?”

“예. 하지만 상태가 호전되진 않으신 듯합니다.”

메데우스의 낯이 더욱 일그러졌다.

“내가 직접 찾아뵙도록 하지.”

성큼성큼 앞서는 메데우스에게 아가디스가 고삐를 내주었다. 쿤가에 올라타며 메데우스가 나택을 응시했다.

“테레시.”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저는 돌아가 저녁 준비를 해 두겠습니다.”

나택은 얼른 메데우스의 걱정을 받아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제껏 차분하고 단단하던 메데우스의 동공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델람에서 다져진 전우애 덕분에 알아챌 수 있는 미묘한 변화였다.

“처소에서 기다려.”

“예. 알겠습니다.”

이랴-!

철썩 내리치는 가죽 소리와 함께 메데우스가 순식간에 멀리로 사라졌다. 나택은 그 뒷모습을 한참 동안 보며 이 상황을 곱씹었다. 필요에 의해서일지언정, 니누르타 쿠샨나는 이 우루크 땅에서 유일하게 메데우스를 거두어 주었고 지지해 주는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하필이면 메데우스가 부재한 타이밍에 맞추어 쓰러진 것이다.

우연일까.

“하…….”

나택이 볼에 바람을 불어 넣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스토리라는 게 존재하는 수눈키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단순히 우연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만약 이대로 돌아간다 해도, 메데우스는 이제 우루크에 정착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루할자게시가 밑 작업을 하고 있어.’

캄비세스의 말이 떠올랐다. 나택이 엿들었던 위기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전조처럼 느껴졌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보려 해도 자꾸만 불안감이 싹텄다.

* * *

성곽 입구에서 메데우스의 처소로 가려면 반드시 우루크 시장을 통과해야 했다. 나택은 지나가는 김에 우선 점술사의 가게에 먼저 들르기로 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무슨 사달이 나기 전에 편지를 남겨야 했다. 이 세계에 오고 나서 휴대폰이 이토록 절실하긴 처음이었다.

나택은 길을 걷는 내내 태연하게 보이려 애를 썼다. 들고 있는 봇짐이 별것 아닌 것처럼, 특별해 보이지 않도록 하려고 필사적으로 마음을 억눌렀다.

점술사의 골목으로 가는 길, 과일 가게를 지나고, 약초 가게를 지나치는 순간이었다.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는 약초 루도초입니다! 향유도 있어요! 얼른 데려가세요!”

평소에는 흔한 시장의 소음으로 치부했던 말이 귀에 꽂혔다. 호객하는 약초 상인의 목소리가 늘 듣던 것과 달랐기 때문이다. 획 돌아본 가판대에는 턱수염이 수북한 남자가 있었다. 이 가게의 상인은 분명 중년 여성이었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나치려던 나택의 눈에 그제서야 기이한 풍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뭐…야.”

가판대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며, 돌아다니는 행인들까지. 한눈에 봐도 남자의 숫자가 월등히 많았다. 우루크의 시장에는 늘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보내고 있었다. 직업과 신분을 막론하고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을 볼 수 있던 유일한 장소가 시장이었다.

이상했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나택은 즉시 가판대를 지키고 있는 약초 상인에게 다가갔다.

“어서 오십쇼!”

“말씀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말씀하십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주인께서 가게를 지키고 계셨던 것 같은데. 어디 가셨습니까?”

이곳 한 군데뿐이 아니다. 다른 가게 역시 늘 지키고 있던 여주인들이 보이지 않았다. 나택이 부재하던 잠깐 사이에 모든 가게의 주인이 바뀐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나택의 질문을 받은 상인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가, 가긴 어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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