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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에서 탈출시켜 줄 히든영웅을 찾습니다-61화 (61/178)

61화

오로지 달과 별빛만을 비추는 유프라테스강의 야경은 그림 같았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진귀한 풍경이지만 나택의 눈에 그런 것 따윈 들어오지 않았다.

“으허으…….”

나택이 내는 괴상한 소리에 메데우스가 고삐를 당겼다. 쿤가가 속도를 늦췄다.

“왜 그래.”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니었지만 나택은 괜찮은 척했다. 기세 좋게 각오하고 따라온 것까진 괜찮았는데. 밤새 달리는 쿤가 위에서 나택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메데우스의 품에 기대고 있었지만 혹여나 떨어질까 싶어 달리는 내도록 긴장을 했고, 행여 뒤늦게라도 구티족이 쫓아올세라 온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웠다.

무엇보다도 새벽이슬을 맞으며 끝없는 평원을 달렸더니 춥고 목이 말랐다. 방금 전의 괴상한 소리는 마른 목구멍에 타액을 넘겨 보려다 난 바람 소리였다.

“으…….”

때마침 새벽바람이 나택의 피부를 쓸고 갔다. 오소소 닭살이 돋아난 팔을 끌어안으며 나택은 저도 모르게 메데우스에게 더욱 몸을 붙였다. 이상하게 메데우스의 품은 늘 나택보다 따뜻했다.

열이 많은 체질인가. 이럴 땐 쓸모가 있어서 좋긴 한데…….

나택이 꿈지럭댈수록 쿤가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이마에 닿는 시선을 느낀 나택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저를 보고 있는 메데우스와 시선이 얽혔다.

“……좀… 떨어질까요?”

“아니.”

메데우스가 나택을 다시 제 가슴에 붙였다. 나택도 사양 않고 그대로 메데우스의 온기를 난로로 삼았다.

그렇게 얼마를 더 걸었을까. 쿤가가 완전히 멈춰 섰다.

“이쯤에서 쉬었다 가.”

메데우스가 훌쩍 쿤가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아이를 안듯 나택의 다리와 허리를 감싸더니 바닥에 내려 주었다. 기진맥진한 나택은 군말 없이 메데우스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몇 번 해 봤다고 이제 이런 정도로는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았다.

쿤가가 멈춘 자리는 넓은 강가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유프라테스강을 이정표 삼아 달려오다 보니 벌써 해가 뜰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오래 달렸는데도 변함없는 평원과 끊김 없는 강줄기 풍경은 우루크 근방에 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감도 오질 않았다.

나택이 저린 엉덩이를 주먹으로 툭툭 때리며 쿤가 옆으로 다가갔다.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 물에 손을 넣고 손바닥 우물 가득 물을 담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깨끗했다. 그대로 마시려던 나택의 눈에 쿤가가 들어왔다. 혀를 날름거리면서 제 바로 옆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게 되었다.

이거…… 수질은 괜찮은 건가. 식수로 쓸 수 있는 물이겠지?

나택은 우루크에서 지낼 때 식수로 쓸 물은 반드시 끓여서 식힌 것만을 마셨다. 손바닥에 고인 물을 입 근처에 가져다 댔다 떨어트리기를 반복하던 나택은 결국 포기하고 손바닥을 얼굴에 갖다 붙였다.

에라이, 세수나 하자.

시원한 물이 흙먼지가 붙은 피부를 씻어 내 주었다.

“어푸푸.”

눈꼽도 떼고, 마시지는 못하지만 입도 헹궈 보고. 그러다 보니 조금은 피곤이 가시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아……. 죽겠다. 자고 싶다.

델람의 물난리 때부터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나택이 무릎에 팔꿈치를 걸치며 아래팔을 축 늘어트렸다. 메데우스가 나택과 쿤가의 사이로 다가왔다.

“조금만 참아. 곧 도착이니까.”

“여기가 어딥니까.”

“키쉬.”

그 말에 나택이 고개를 북쪽으로 돌렸다. 그제야 멀찌감치에 세워진 성곽이 보였다. 키쉬는 수눈키 속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최북단에 자리한 도시국가였다.

그렇게 달리더니, 벌써 여기까지 왔구나.

나택이 멍하니 일렁이는 성곽을 구경하는 때,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뭐 하십니까……?”

메데우스가 쿤가의 안장에 붙어 있는 금속과 원석 장식을 뜯어내고 있었다.

“이제부턴 걸어가야 해.”

“예? 왜요?”

멀쩡한 쿤가를 놔두고 왜 걸어가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장식을 다 뜯어낸 메데우스가 이번에는 안장가죽 위에 덧붙인 천을 뜯어냈다. 그러고는 천에 장식들을 감싸더니 품에 넣었다.

“이건 군마야. 그것도 어지간한 쿤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훌륭한 군마. 누가 봐도 외지인인 남자 둘이 군마를 타고 다니면 시선을 끌 수밖에 없어.”

“…….”

일리 있는 말이었다. 신분이 들통나고 싶지 않으면 아쉽지만, 놈을 보내 주는 게 맞는 듯했다. 메데우스에 의해 헐벗은 안장에는 이제 볼품없는 가죽만 남아 있었다. 메데우스는 안장과 고삐를 벗겨 내고는 쿤가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고생했어. 가고 싶은 데로 가.”

쿤가가 하찮은 울음소리를 내며 두 사람의 목적지와 반대 방향으로 내달렸다.

편했는데…….

전용차를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나택의 표정이 금세 서글퍼졌다. 어느새 캄캄하던 하늘 밑이 옅은 빛으로 밝아 오고 있었다.

메데우스가 나택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가서 편한 자리에서 쉬는 게 낫잖아?”

그 말에 나택이 냉큼 손을 잡았다. 굳은살이 박인 커다란 손이 나택을 꽉 쥐고 잡아당겼다.

“키쉬에 가면 쉴 수 있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조금만 더 버텨.”

나택은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메데우스를 응시했다.

* * *

메소포타미아인들은 한국인과 비슷한 점이 꽤 있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방금 메데우스가 말한 ‘조금만’이 그랬다. 이제 막 동이 틀 때 시작했던 ‘조금만’은 두어 시간가량이 지난 후에야 매듭을 지었다. 두어 시간은 절대 조금이 아니었다.

며칠 밤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피곤에 절은 채로 쿤가를 타고 달린 건 메데우스도 똑같을 텐데. 약간의 먼지를 뒤집어썼을 뿐, 여전히 뽀얗고 말간 메데우스를 보며 나택은 혀를 내둘렀다. 고대인과 현대인의 체력 차이는 정말 어마무시했다.

우루크와 달리 키쉬의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열린 성문으로는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들 틈에 끼어 나택과 메데우스도 자연스럽게 입성했다. 나택이 메데우스에게 바짝 붙어 작게 속삭이자, 메데우스의 귀가 자연스럽게 나택 쪽으로 기울어졌다.

“여기는 우루크만큼 수비를 빡빡하게 하지 않네요?”

“키쉬는 다양한 문화가 섞인 도시야. 우루크처럼 신분이나 출신으로 빡빡하게 검문하면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올걸. 게다가 우루크만큼 구티족의 침략이 잦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안전해.”

나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눈키 속 키쉬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만나는 지점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덕분에 다양한 사람들과 물자가 만나는 교류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다문화 도시라는 말에 걸맞게 성곽 안에는 다양한 인종과 제각각의 옷차림을 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안에서 두 사람은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었다. 나택은 메데우스가 피신처로 키쉬를 고른 게 이런 이유이기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델람에서 수입한 직물입니다! 촉감도 좋아요! 구경하고 가세요!”

성문을 들어서자마자 시장통이 펼쳐지는 건 우루크나 키쉬나 다르지 않았다. 옷감 가게 주인이 우렁찬 목소리로 호객했다. 메데우스가 그쪽으로 천천히 자리를 옮겼다.

“아이구- 어서 오셔요! 마음껏 구경하십쇼!”

“편하게 입을 옷감이 필요한데.”

“편하게 입을 옷감이라면 자고로 촉감이 중요하지요! 이건 어떠십니까!”

상인이 가판대 한쪽에 있는 옷감을 들어 내밀었다. 메데우스가 옷감 끝을 천천히 매만지더니 상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상인이 환하게 웃으며 옷감을 접었다.

“시원시원한 손님이시네! 하긴, 촉감이 좋긴 좋지요? 들여온 지 얼마 안 된 겁니다, 이게!”

“이쪽이 입을 것도 필요해.”

메데우스가 뒤에 서 있던 나택을 가리켰다.

“아이고. 잘생긴 총각이네!”

장삿속이 담긴 영혼 없는 칭찬이었는데, 그 말을 듣는 메데우스의 미간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그걸 눈치채지 못한 상인은 신이 나서 냉큼 가판대 아래에 깔려 있던 옷감을 집어 들었다.

“뒤에 계신 형님은 이런 짙은 색이 어울릴 것 같은데!”

상인이 내보인 건 비단처럼 보이는 고급스러운 파란색 옷감이었다. 나택은 메데우스를 따라 제 앞에 내밀어진 옷감 끝을 슬쩍 문질렀다. 머릿속으로는 상인의 말을 곱씹었다.

형님? 그래, 내가 메데우스보다 형이긴 하지.

나이가 어리면 무시를 받는 문명이었다. 신분도, 체격도 메데우스보다 못한 취급을 받던 나택은 처음으로 메데우스보다 나은 대접을 받은 셈이었다. 나택은 괜히 힘없이 서 있던 어깨에 힘을 주며 자세를 고쳐 섰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메데우스가 불퉁하게 한마디를 뱉었다.

“형님이라니.”

그러자 상인이 눈을 깜빡거렸다. 나택과 메데우스를 번갈아 보던 상인이 냉큼 말을 바꿨다.

“아이고! 이제 보니 이쪽이 형님인가 보네!”

“……아닌데.”

그 말에 어깨를 펴고 있던 나택이 작게 중얼거렸다. 눈치 빠른 상인이 얼른 나택의 입속말을 주워들었다.

“하하. 아이고. 그럼…… 친구신가?”

편견 없는 상인이었다. 설마 눈앞의 남자가 우루크의 장군일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한 채 상인은 그저 두 손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를 썼다.

“친구?”

“친구라뇨. 아닙니다.”

이번에는 두 사람 모두 반발했다. 그러자 상인이 목을 자라처럼 뒤로 빼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상인이 하이고! 탄식하며 손뼉을 쳤다. 그러더니 가까이 있던 메데우스의 귓가로 몸을 내밀었다.

“그거지? 그거. 그렇고 그런 사이지?”

“…….”

상인의 말을 들은 메데우스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상인의 말을 듣지 못한 나택은 영문을 모른 채 눈썹을 들썩였다.

“아휴, 그런 것도 모르고 내가. 그럼 이걸로 가져가셔야지!”

다급하게 가게 안쪽으로 들어간 상인이 새로운 옷감을 내밀었다. 옅은 베이지 색에 반절은 하늘색으로 물들인 천이었다.

“남쪽의 어느 나라에서는 새신랑 새신부가 입을 옷감에 잉어랑 뱀 자수를 넣는답디다. 여기, 이 두 개가 딱 잉어랑 뱀 자수가 새겨진 옷감이니 이걸로 가져가슈!”

……저 사람이 대체 뭔 소릴 하는 거야.

나택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상인을 쳐다봤다. 돈에 눈이 먼 상인은 그저 생글생글 웃고만 있었다. 메데우스는 이번엔 그 어떤 토도 달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품속의 천 뭉치를 꺼내 그 안에 있는 은을 내밀 뿐이었다. 쿤가의 안장에서 떼 온 은장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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