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장식을 왜 다 떼 오나 했더니.
키쉬 역시 우루크와 마찬가지로 현금으로 은을 사용했다. 메데우스는 비상금으로 쓰기 위해 쿤가를 털어 온 거였다. 메데우스는 옷감뿐 아니라 신발과 바람을 막을 망토까지, 두 사람 몫의 의복을 구매했다.
“식사를 하러 갈까.”
“저…… 그 전에 좀 씻으면 안 되겠습니까. 목욕을 좀 하고 싶은데…….”
현대인의 습성이 이런 데서 발현됐다. 델람의 물벼락을 맞은 날부터 오늘까지. 깨끗한 물에 제대로 몸을 담근 적이 없었다. 더는 이 찝찝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메데우스는 의외로 흔쾌히 나택의 제의를 수락했다. 더 이상 두 사람을 쫓아오는 이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메데우스 역시 목욕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고대인들이 목욕을 좋아하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나택과 메데우스는 은장식 몇 개를 지불하고 드디어 목욕탕에 입성할 수 있었다. 대낮이라 그런지 목욕탕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두 사람은 탕의 가장 안쪽에서 옷을 벗었다.
신나게 벗어 재끼던 나택이 어느 순간 멈칫했다. 다사다난한 문명 속에서 굴려지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자신의 몸이 남들과는 다르다는 걸. 벗어 내던 옷감이 허리춤에서 얼음처럼 굳었다.
메데우스는 어느새 옷을 다 벗어 던지고 물속에 들어가 있었다. 메데우스가 가장자리에 팔을 얹으며 말했다.
“벗겨 줘야 하는 거야? 필요하다면 도와주고.”
“돼, 됐습니다.”
방금의 대화가 오히려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같은 탕 저 끝에 앉아 있던 남자 둘이 나택 쪽에 관심을 보였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끄는 게 오히려 이상할 것 같았다. 나택은 뒤돌아 얼른 제 옷을 벗어 던졌다. 그러고는 누가 잡으러 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빠르게 물속으로 들어갔다.
쫄쫄쫄 목욕탕 가장자리의 옴폭 파인 틈에서 새로운 물이 쉼 없이 흘러왔다. 오랜만에 하는 목욕에 신이 난 나택이 제 팔과 목을 문질렀다.
와, 이제 좀 살 것 같네.
그렇게 한참을 문지르고 있는데 저 끝에 앉아 있던 남자들이 다가왔다. 그들의 가슴에는 풍성하고 곱슬한 털이 나 있었다. 머리카락도, 턱수염도 수북했다. 아마 보이지 않을 부위에도 털을 잔뜩 달고 있을 터였다.
남자들을 힐끔한 나택이 얼른 물속의 제 하반신을 내려다보았다.
……부럽네.
괜히 의기소침해져 몸을 문지르는 속도가 줄어들었다. 그때, 가까이 다가온 한 남자가 물었다.
“어디에서 오셨소?”
나택이 그대로 굳었다. 뭐지. 우릴 알아보는 건가.
“그건 왜 물으십니까.”
“아니, 키도 그렇고. 달고 있는 물건을 보면 다 큰 성인 같은데. 피부가 어린애처럼 고와서. 어디에서 온 사람이길래 그렇게 피부가 곱나 하고.”
제모가 보편화된 현대에서도 털 한 올 없는 나택을 신기하게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더욱 나택이 신기하게 보일 터였다. 게다가 저렇게 풍성한 털을 키우는 남자들이라면 더더욱.
나택이 어물거리며 제 출신지를 얘기했다.
“동쪽에서 왔습니다.”
“동쪽 어디? 거기 사람들은 다 그렇게 피부가 매끈하오?”
옆에 있던 다른 남자가 불쑥 손을 뻗었다.
“여자 형제는 없소? 팔 한 번만 들어 보쇼. 이렇게 매끈한 피부는 처음 보네.”
남자가 다짜고짜 나택의 팔을 잡으려 했다. 나택의 눈꼬리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나택이 남자의 팔을 쳐 내려는 순간이었다. 메데우스의 커다란 손이 남자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이상한 취미는 다른 데서 풀어.”
“이, 이상한 취미라니! 나는 그냥 신기해서 관심을 좀 보인 것뿐이오!”
“그런 걸 이상한 취미라고 해. 관심 꺼.”
메데우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위협했다. 넓은 어깨가 드리우는 그림자가 남자 둘을 삼켰다. 번뜩이는 홍채에 서린 살기를 본 남자 둘이 얼른 뒤로 물러섰다.
“사람 참. 궁금해서 물어본 걸 가지고 이렇게 화를 내다니. 되, 되었소. 안 보고 말지.”
남자 둘이 수면을 가르며 저만치로 멀어졌다. 몸을 씻는 시늉을 하던 둘은 이내 곧 얼마 지나지 않아 탕을 나가 버렸다.
그제야 나택이 몸에 긴장을 풀었다.
“남의 컴플렉스를 왜 자꾸 건드리는 거야.”
불청객이 떠난 자리에 욕설도 몇 마디 뱉어 주었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메데우스가 혀를 찼다.
“테레시.”
“예, 메데우스 님.”
“넌 다음부터 목욕탕 올 생각 하지 마.”
“예?”
나택이 획 몸을 돌렸다. 파동이 이는 표면에서 원이 퍼져 나갔다.
“아니, 저도 씻고는 살아야 할 거 아닙니까. 청결이 얼마나 중요한데요.”
“허락 안 할 거야.”
네가 뭔데, 라고 불쑥 말이 튀어나오려던 걸 나택은 간신히 참았다. 목욕탕에 들어올 돈도, 밥 먹을 때 쓸 돈도, 지금은 모조리 메데우스의 손에 있었다.
저…… 치사한 새끼.
메데우스의 한마디에 나택의 안에 싹텄던 전우애는 삽시간에 증발했다.
* * *
우여곡절 끝에 목욕재계를 마친 두 사람은 깨끗한 옷감과 신발을 신고 선술집으로 향했다. 선술집이 음식점뿐 아니라 여관의 역할도 함께한다는 점은 우쿠르나 키쉬나 다를 바가 없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우루크의 선술집이 좀 더 넓고, 깔끔했으며, 층고가 높다는 정도였다.
“어서 오세요-!”
“방이 필요한데.”
메데우스가 남은 은 장신구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지금 남은 게 하나밖에 없는데. 두 분이 함께 쓰시는 것도 괜찮으신가요?”
“상관없어.”
선술집 주인장이 화사하게 웃으며 천장을 가리켰다.
“둘째 층 제일 안쪽 방입니다!”
메데우스는 식사 역시 방으로 가져다 달라는 주문을 하며 바로 2층으로 향했다. 오래된 티가 역력한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자 어설프게 회벽 칠을 한 복도가 나왔다. 복도 끝에 보이는 창문은 나무로 만든 석쇠처럼 그물 모양으로 짜여 있었다. 그 사이로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들어선 방에는 마찬가지로 낡은 침대와 나무 테이블이 있었다. 나택은 침대 위로 당장에라도 엎드리고 싶은 것을 주먹을 꾹 쥐며 견뎠다.
메데우스가 의자를 꺼내 테이블 앞에 앉았다.
“일단 오늘 하루는 여기서 쉬고. 내일이나 모레쯤에 다른 곳으로 이동할 거야. 갖고 있는 은으로는 그 정도밖에 못 버틸 것 같으니.”
나택 역시 메데우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디로 갑니까.”
“가 보면 알아.”
“그냥 지금 얘기해 주시면 안 됩니까?”
“위험한 곳 아니니까 걱정 마.”
그럼 그냥 얘기해 주면 되지……. 뭔 비밀이 이렇게 많아.
볼을 부풀린 나택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온몸이 노곤했다. 그냥 쉬고만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이 음식을 내왔다. 고기와 채소를 넣고 끓인 스튜와 틴누루(돔형의 화덕에서 구운 빵. 밀가루, 물, 소금, 효모로 만들며 납작한 형태), 시카르, 그리고 끓인 과일 주스였다. 과일 주스는 시카르를 먹지 못하는 나택을 위해 메데우스가 따로 주문한 음료였지만 나택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부족함 없이 시킨 음식들이었는데, 어느새 그릇들이 바닥을 보였다.
“그게 대체 다 어디로 들어가는 거야.”
나택이 먹는 것을 지켜보던 메데우스가 한마디를 했다. 차려진 음식의 대부분은 전부 나택의 배 속에 들어간 뒤였다.
“연비가 나쁜 몸이라서 그렇습니다.”
“연비? 그게 뭐야.”
“많이 먹는데 적게 일하는 놈이요.”
메데우스가 시카르를 한 모금 마시며 짧게 답했다.
“그런 걸 보통은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하지.”
나택이 차갑게 메데우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반쯤 감긴 눈꺼풀 때문에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자꾸 기울어지는 몸을 버티려 나택이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허락할 테니 먼저 누워도 돼.”
“정말입니까. 나중에 또 침대에서 잘 생각 하지 마라, 이런 얘기 하시는 건 아니고요?”
“아니니까 누워.”
“그럼……. 먼저 좀 눕겠습니다.”
나택이 비척비척 침대로 다가갔다. 풀썩 쓰러지는 몸에 푹신한 양털이 감겨 왔다.
살 거 같다. 이제 진짜 살 거 같다.
시카르를 마시는 귀족의 앞에 드러누워 있다든가, 침대의 이불이 언제 빤 것인지 모르겠다든가 하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 숨 쉬는 소리가 퍼졌다. 나택은 머리를 붙인 지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대로 기절하듯 곯아떨어졌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메데우스가 천천히 침대로 다가왔다. 무거운 하반신이 침대에 걸터앉자 매트가 흔들렸다.
“테레시, 자?”
나택은 소리 없이 숨만 내쉬었다. 끼익, 나무 판이 눌리는 마찰음이 났다. 그 소음에도 나택은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테레시.”
조심스럽게 한 번 더 이름을 불러 보던 메데우스가 나택의 위로 제 몸을 옮겼다. 반듯하게 누운 나택의 골반을 제 다리 사이에 가두고,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거리는 어깨 위쪽에 두 손을 짚었다. 나택의 위에서 고요한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한 손으로 검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림을 그린 것처럼 단정하게 정돈된 눈썹이 드러났다. 날렵하게 올라간 눈꼬리도, 그에 어울리는 오뚝한 코도. 자신과는 하나부터 열까지 분위기가 다른 생김새였지만 그래서 더욱 자꾸만 보고 싶어지는 얼굴이었다.
부드러운 잔머리가 또 흘러내리며 이마를 가리려 했다. 메데우스가 다시 앞머리를 쓸어 올리는데 나택이 입을 다시며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솜털 자국 하나 없는 인중과 턱, 매끈한 피부. 그 아래로 도드라진 울대뼈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메데우스에게도 있는 남자의 상징이었다. 시선을 더 밑으로 내리자 옷감이 미처 가리지 못한 가슴팍이 보였다. 벌어진 옷깃 사이의 속살 역시 티끌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나택을 찬찬히 살피던 메데우스의 심장 소리가 빨라졌다. 나택의 숨소리보다 큰 맥동 소리가 침대 위를 흔들었다. 주체할 수 없이 빨라지는 속도에 메데우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잘근잘근 씹는 건 입술인데, 어째서인지 반응은 아래에서 왔다.
메데우스가 더욱 세게 제 입술을 씹었다.
“……테레시.”
얕은 한숨이 나택의 뺨 위에서 흩어졌다. 메데우스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으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나택의 옆에 나란히 누운 메데우스가 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손등으로 제 눈을 덮으며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다시 옆으로 돌아누운 메데우스가 나택을 조심스럽게 훑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억누르는 데 쓰였던 손을 나택에게로 뻗었다. 매끈한 뺨을 매만지며 메데우스가 나택에게 진심이 담긴 말을 흘렸다.
“……지켜 주긴 뭘 지켜 줘. 이제는 내가 널 지켜 줄 거야. 그러니까 마음 놓고 편히 자.”
메데우스가 엄지로 감겨 있는 나택의 눈 밑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누운 자리의 침대 맡에는 메데우스가 늘 차고 다니던 검이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