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뭘요?”
뭘 말해. 어떤 걸? 내가 방금 뭘 했는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과일 가게 상인의 얼굴에도 홍조가 물들었다. 메데우스가 천천히 나택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주먹 쥔 아래를 살살 간지럽히며 긁자 꾹 닫힌 나택의 손가락이 열렸다. 그 안에 있는 커다란 알 두 개가 메데우스의 손으로 옮겨 갔다.
“포도를 그렇게 좋아했으면 진작 얘길 하지.”
알 하나가 메데우스의 입 안으로 쏙 들어갔다.
“아. 포도요. 포도. 네. 좋아합니다, 포도. 예.”
메데우스는 입 안에 넣은 알을 씹지 않고 물고만 있었다. 볼록해진 한쪽 볼이 마치 아이의 젖살 같았다. 좌우로 입 안에서 알을 굴리는 행동이 나택의 기분을 더욱 이상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시장, 관객처럼 둘을 시켜보는 과일 상인, 그리고 제 사타구니를 만진 성인 남자 앞에서 태연하게 포도 알이나 물고 있는 메데우스.
지금 상황의 모든 게 이상했다. 나택이 괜히 제 코밑을 훔치며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좀 말씀하지 마세요. 헷갈리지 않습니까.”
“뭐가 헷갈리는데.”
“마치 제가 일부러 만진 것처럼……. 합.”
어느새 메데우스의 손이 나택의 입 앞에 와 있었다. 커다란 알이 나택의 입 안으로 쏙 들어왔다. 나택이 입 안에 들어온 포도를 씹었다. 터지는 껍질 사이로 달곰한 과즙이 스며 나왔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요즘 들어 메데우스와 접촉할 일이 더 많아지는 것 같았다.
아니,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운이 나빠서 그런가.
나택은 타인과 하는 스킨십을 즐기지 않는 타입이었다. 특히나 같은 성별인 남자하고는 더더욱 그랬다. 이런 상황들에 적응이 되지 않는 게 그런 이유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대에 이 정도의 접촉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가.
메데우스는 별 감흥 없이 대하는데, 혼자서 의식하는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자 다시 마음이 편안해 졌다. 입 안의 포도도 순식간에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제가 먹고 싶은 과일은 다 담았습니다. 이제 가도 될,”
“사람을 찾고 있는데. 혹시 이쪽으로 키가 큰 남자 둘이 오지 않았나.”
과일 가판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옷감을 팔던 장사꾼의 가게였다.
“키 큰 남자가 한둘이어야지. 여기 오는 손님들 중에 북쪽 출신들이 얼마나 많은데. 키가 하늘에 닿을 것 같은 사람도 여럿이오!”
“잘 생각해 보시오. 한 사람은 밝은 색 머리를 하고 있고,”
“밝은 색 머리를 한 손님이 지천인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소. 장사 방해하지 말고 저리 가쇼!”
상인이 팔을 휘휘 내저었다. 소란스러운 자리가 나택과 메데우스의 눈길을 끌었다.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입은 옷이나 생김새가 영락없는 우루크인이었다.
설마 우리를 쫓아온 건가?
“아, 저리 가라니까!”
돈 될 손님이 아닌 걸 확신한 상인이 매몰차게 우루크인을 내쫓았다. 메데우스와 나택이 재빨리 시선을 주고받았다.
메데우스는 들고 있던 은을 모두 과일 상인의 손바닥 위에 털어 내고는 나택의 손목을 꼭 붙잡았다. 장신의 두 사람이 북적이는 인파 사이로 유유히 사라졌다.
* * *
“왜 여기까지 찾으러 온 걸까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마 우루크군을 장악하기 위해서 일거야.”
“우루크군 장악은 이미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메데우스가 손도 못 써 보고 도망칠 수밖에 없던 거였고.
아가디스에게 들은 루할자게시의 만행은 나택의 입을 빌어 메데우스에게 전달된 뒤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메데우스는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런 식으로는 병사들을 휘어잡을 수 없어.”
어느새 과일 바구니는 나택의 손에 들려 있었다. 나택은 마치 팝콘을 집어 먹듯 바구니 안의 포도를 한 알씩 씹으며 걸었다.
“군병을 통솔하고 기강을 잡는 건 오직 그들의 우두머리만 할 수 있는 일이야. 일시적이라면 몰라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어설픈 협박이나 공갈로는 그들을 움직일 수 없어. 그래서 전쟁에서 승리하면 가장 먼저 적군의 수장 머리를 치는 거야.”
가만히 듣던 나택이 수긍했다.
“내가 없는 자리를 대신해 군을 통솔할 만한 사람이라면 아가디스뿐일 텐데, 아가디스는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야. 루할자게시도 그걸 알아. 놈은 내 목을 가져가서 우루크군의 기강을 잡고 싶은 거야.”
톡 소리를 내며 탱탱한 포도 알 하나가 나택의 입 안에서 터졌다. 우물거리는 볼 안에는 이미 씹다 만 알이 세 개나 들어 있었다. 포도 알 하나를 더 입에 넣으며 나택이 눈을 찌푸렸다.
망할 놈……. 누구 목을 넘봐. 절대 못 주지.
“그럼 다른 도시로 옮겨야 할까요?”
“아니. 어딜 가든 마찬가지일 거야. 오히려 키쉬가 안전해. 다민족이 모여 사는 도시라 너나 나 같은 사람이 돌아다녀도 눈에 띄지 않거든. 그리고 이럴 때일수록 익숙한 곳이 안전해.”
“익숙하다고요?”
한참을 걷던 메데우스가 한 갈대 울타리 앞에서 멈추었다.
“내가 태어난 곳이 여기거든.”
“……여기요?”
입가에 과즙을 잔뜩 묻힌 채 나택이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키쉬의 성곽 바깥에 있는 이곳은 누런 흙바닥에 잡초가 무성하게 나 있는 자리였다. 빽빽하지는 않지만, 지평선을 가릴 정도로 키가 큰 대추야자 나무도 여러 그루 자라 있었다.
풀과 나무들 사이에 다 쓰러져 가는 흙집이 보였다. 갈대 줄기를 엮어 만든 문과 창문, 그리고 반쯤 무너진 벽들. 집도 흙바닥도 똑같은 누런색이라 구분이 되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수풀이라고 생각했던 덩어리들은 전부 무너진 폐허들이었다.
앞장서는 메데우스를 따라 나택이 한 발을 내딛을 때였다.
‘악칼디아 마을’에 진입합니다.
시스템 안내창이 밝게 앞을 비추었다. 한 걸음을 더 내딛자 파삭, 발밑에서 풀이 밟히는 소리가 났다.
어느새 저만치 멀어진 메데우스가 웬 풀숲 앞에 멈췄다. 폐허 사이에 있는 풀 더미였다. 나택이 넓은 보폭으로 다가가 메데우스의 뒤에 섰다. 하얗고 큼직한 손은 길게 자란 풀을 쓰다듬고 있었다.
“이건 뭡니까?”
그러나 나택은 질문하는 동시에 알아차리고 말았다. 메데우스의 발끝 앞에 흙먼지가 쌓인 향로가 있었다.
“나의 가족.”
메데우스가 덤덤하게 답했다. 커다란 풀 더미 두 개는 메데우스의 어머니와 아버지였다. 그제야 나택의 눈에 또 다른 풀 더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이 신을 믿었거든. 그런데 같은 피를 나눈 사람 중에 살아남은 사람이 나뿐이야. 그 결과만 놓고 봐도 신이 저버렸다고 말하기에 충분하지 않아?’
언젠가 아누 신에 대해 물었을 때가 떠올랐다.
악칼디아 마을. 이곳은 메데우스가 태어난 마을이며, 아누 가문이 몰살당한 마을이었다. 마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무덤이었다. 하지만 버려진 마을은 을씨년스럽다거나 음습한 분위기를 풍기진 않았다. 적어도 나택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바람이 불자 풀들이 머리카락처럼 휘날렸다. 메데우스가 무덤과 조금 떨어진 집으로 향했다. 기울어진 갈대 문을 떼서 바로 고치는 뒷모습을 보는데 순간 의문이 피어났다.
메데우스가 우루크에 온 지 10년도 넘었다고 하지 않았나……?
악칼디아 마을은 키쉬 도심과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게다가 작은 면적이 아니었다. 이 넓은 공간이 사람이 사는 것도 아니고, 가축을 키우는 것도 아닌 상태로, 왜 아직까지 이렇게 버려져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택은 쪼그려 앉아 무덤 앞의 향로 가장자리의 먼지를 털어냈다. 그리고는 메데우스에게 다가갔다.
“마을을 떠난 지 꽤 오래되신 거 아닙니까.”
“맞아. 이곳을 떠난 지는 10년이 훨씬 넘었지. 그래도 정찰을 나갈 때나, 북쪽에 일이 있을 때 한 번씩 들르곤 해.”
“그런데 왜 마을이 아직도 그대로인 겁니까. 도시하고도 가깝고, 사람이 살기에 나쁘지 않은 위치 같은데요.”
“저주 때문에.”
“……저주요?”
덜컹-.
메데우스가 갈대 문의 가장자리를 주먹으로 내리치자 문이 마찰음을 내며 반듯하게 꽂혔다. 단단한 팔이 문을 작은 폭으로 열었다 닫았다 하며 제 솜씨를 확인했다.
“신의 저주.”
“그놈의 신…….”
나택이 혀를 내두르며 눈을 감았다.
“그게 뭔지 여쭤봐도 됩니까?”
메데우스가 대답 대신 고친 갈대 문을 활짝 열었다. 집 안에 들어간 나택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오래전에 버려진 집일 텐데, 겉보기와 다르게 흙으로 만든 벽과 천장은 그다지 부서진 곳 없이 멀끔했다. 벽장처럼 움푹 파인 자리에는 항아리 같은 도기들이 있었다. 메데우스는 그중에서 쓸 만한 것을 골라냈다. 나택은 벽과 이어진 돌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쳤다.
“사람들이 어째서 이난나 신에게 그렇게 목을 매는지는 알고 있지?”
수눈키 유저로서 나택 역시 이난나 가문을 선택했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었다. 수눈키 설정에서 이난나는 사랑의 여신이자 전쟁의 여신으로 설명된다. 설정 탭에 있는 내용을 보면 이난나는 수메르 신화에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른 신의 지식을 훔쳐 오기 위해 별짓을 다 하는 괴짜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지하세계를 들쑤시기도 했으며,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온갖 만행을 서슴지 않기도 하는 걸출한 신이었다. 그만큼 이 문명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고, 권세를 떨친 존재였다.
나택은 제가 알고 있는 정보를 간략하게 요약했다.
“그만큼 힘이 있는 신이니까요. 이난나의 가호를 받으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고, 사랑도 쟁취할 수 있으니 다들 그렇게 이난나를 추앙하는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