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그래. 우루크가 라가쉬를 제일 먼저 욕심낸 것도 라가쉬의 군주가 이난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나택은 이 문명에 들어오자마자 노예 신분으로 강등되었다. 메데우스가 깨끗한 도기 몇 개를 나택이 앉은 테이블 위에 올려 두더니, 출처 모를 웬 짚더미를 나택의 앞에서 흔들었다. 그 리듬에 맞춰 먼지가 폴폴 날렸다.
“콜록, 콜록. 뭐, 뭐 하시는, 콜록. 겁니까!”
“앞으로 여기서 지낼 거야. 오늘 밤 편히 자려면 지금부터 청소를 좀 해 둬야 하니, 너도 거들어.”
나택이 얼굴 앞에 떠다니는 먼지를 손으로 마구 휘저어 흩트렸다.
말로 하면 되지. 이걸 꼭.
나택은 눈물 콧물을 쏙 빼면서 갈대로 만든 먼지떨이를 받아 들었다. 메데우스가 돌 테이블 구석에 개켜 있는 천 하나를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키쉬도 오래전부터 이난나를 주신으로 모셨는데, 듣기론 이난나 신전에 예언이 내려왔다더군. 악칼디아 마을에 이 땅을 통일할 영웅이 태어날 거라고. 그 이야기를 들은 키쉬의 선대 엔시가 곧바로 아누 가문을 전멸시켰어.”
성의 없이 먼지를 털어 대던 나택의 손이 그대로 굳었다.
“말이 되는 소립니까 그게……”
하지만 신의 계시라는 명목으로 살육을 자행하는 건 다른 신화나 문명에서도 숱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당장 두 사람만 해도 신의 계시를 운운하는 루할자게시에게 뒤통수를 맞아 이곳으로 도망 온 게 아니던가.
나택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테이블과 벽의 먼지를 털어 내던 메데우스가 그 모습을 보며 흐리게 웃었다.
“하지만 예언 때문에 내가 살아남은 것이기도 해.”
“어떻게요?”
“나도 어렸고, 쿠샨나도 엔시가 아니었을 때의 일인데.”
먼지를 닦는 하얀 손은 예상외로 야무졌다. 나택의 시선이 저절로 메데우스의 하얀 팔로 내려갔다.
“키쉬군이 마을을 떠난 직후에 마침 쿠샨나가 이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다고 해. 쿠샨나는 마을 주민이 몰살된 이유를 듣자마자 곧바로 악칼디아로 왔어. 그러다 나를 발견하고는 거두어 간 거지. 악칼디아 마을의 생존자가 나뿐이었거든. 빈사 상태였긴 했지만.”
나택이 느리게 먼지떨이를 흔들었다.
“그 예언이란 걸 알면서도 데려간 겁니까……?”
“그래. 키쉬 군주는 제 권좌를 빼앗을 영웅이 태어날 거라고 두려워했지만, 쿠샨나는 자신을 비옥한 평야의 왕으로 만들어 줄 수하가 태어난 거라고 받아들인 거야.”
같은 예언을 같은 시대에 사는 사람조차도 이렇게 다르게 받아들이다니. 황당하고 웃긴데 웃을 수 없는 비화였다. 이 이야기를 듣자 쿠샨나가 메데우스를 감싸고 돌던 이유가 더더욱 납득되었다. 쿠샨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된 거다. 거물로 성장해 가는 메데우스가 자신을 메소포타미아의 왕으로 만들어 줄 진짜 영웅이란 걸.
“그런데…… 그걸 저주라고 하기에는 너무 건설적인 예언 아닙니까?”
“저주지. 아누 가문을 몰살하는 것으로 당장의 불씨는 껐지만, 앞으로 이 마을에 살게 될 누군가가 또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 역시 영웅이 될 가능성을 가지는 거니까. 학살이 되풀이될 여지가 있었어.”
이해가 될 것 같다가도 되지 않았다. 이 문명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역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암갈색 홍채가 어둡게 침잠해 가는 그때, 메데우스가 나택의 손에 쥐여 있던 먼지떨이를 도로 가져갔다.
“저주받은 마을에 굳이 찾아올 사람은 없어. 여기만큼 안전한 곳이 없지. 궁금증이 다 풀렸으면 이제 제대로 도와.”
버려진 곳이라 할지라도 집 안 구석구석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남아 있었다. 나택은 메데우스를 거들어 집 안의 먼지를 털어 내고 묵은 때를 훔치며 버려졌던 시간을 거두었다.
청소를 거의 끝마친 나택이 벽에 기대 털썩 주저앉을 때였다. 덜커덩 소리를 내며 등허리에 딱딱한 돌출부가 닿았다.
뭐야 이건.
더듬거려 만져 본 자리에 웬 손잡이 같은 것이 잡혔다. 몸을 완전히 돌려 보자 장처럼 보이는 나무 문과 손잡이가 있었다. 문 크기로 봐서는 기껏해야 작은 박스 하나 정도 들어갈 공간인 듯했다. 다른 수납 공간은 대부분 손닿기 편한 곳이나 눈높이에 맞춰져 있는데 이곳만 낮은 높이에 자리한 게 신기해 호기심이 일었다.
“열어 봐도 됩니까?”
나택의 물음에 멀리 서 있던 메데우스가 건성으로 답했다.
“마음대로 해. 이 집에 네가 봐선 안 될 건 없으니까.”
나택은 곧바로 둥근 손잡이에 검지를 걸어 당겼다. 덜컥 소리와 함께 허술한 문이 열렸다. 안에는 점토판 네다섯 개가 놓여 있었다. 책장도 아니고, 잡동사니를 넣어야 할 것 같은 자리에 점토판이라니. 그중 하나를 집어 든 나택이 무료한 시선으로 판을 훑었다.
“어……?”
적힌 내용을 확인하던 나택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점토판에 적힌 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알파벳이었다. 게다가 시작부터 끝까지 새겨져 있는 문자 중에서 고대의 것은 단 한 자도 없었다. 델람의 갈대 벽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 역시 문자를 알아볼 수는 있었지만, 내용은 해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가장 윗줄에 있는 한 문장을 본 나택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번졌다.
[dear my hero]
“디어 마이 히어로……?”
학창 시절 영어 교과서에서 몇 번이고 보았던 편지의 서두였다.
이 시대에서도 영어를 썼나? 아니면 한글 패치 오류인가.
나택의 머릿속의 물음표가 수십 개 떠올랐다. 나택은 수눈키를 만든 개발사가 어느 나라였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분명 북유럽 어디의 개발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스위스? 스웨덴? 어디였지.
의문은 끊이지 않았다. 그 나라가 영어를 쓰는 나라였나? 아닐 텐데. 아니면 수출용 게임이라서 공용어인 영어 패치가 되어 있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두 번째 문장부터는 아무리 봐도 영어가 아니었다. 게다가 나택이 플레이했던 수눈키의 한국어 패치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가중되는 혼란이 나택을 얼뜨기처럼 고장 나게 만들었다.
“벌레라도 씹었어? 표정이 왜 그래?”
메데우스가 나택에게 가까이 왔다.
“이게 뭡니까?”
나택이 슬쩍 메데우스에게 점토판을 내밀었다. 메데우스가 털썩 나택의 옆에 앉더니 고개를 점토판 가까이 기울였다.
“혹시…… 여기에 적힌 글자 읽을 줄 아십니까?”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부분도 있는데, 대충 읽을 줄은 알아.”
나택의 가슴에 의구심이 피어났다. 그러고 보니 갈대 벽 뒤에서도 메데우스의 도움을 받아 에아의 전언을 해석했었다. 그때 써 있던 언어와 여기에 적힌 게 같은 나라 언어인 걸까.
나택이 곧바로 물었다.
“이게 어느 도시의 말입니까?”
“북쪽. 어머니가 북쪽 출신이거든.”
북쪽……. 확실히 북유럽이 여기로부터 북쪽에 있긴 했다. 어지러워진 머릿속이 좀처럼 정리가 되질 않았다. 나택이 로봇처럼 고개를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하며 메데우스와 점토판을 번갈아 보았다. 방황하는 나택의 시야로 밝은 시스템 안내 문구가 떴다.
‘기원의 편지’를 읽을 수가 없다. 도움을 요청해 볼까?
“…….”
기묘한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형태가 불분명한 제 기분을 살피는 것보단 시스템의 명령을 수행하는 게 우선이었다. 나택이 메데우스에게 점토판을 건네며 말했다.
“저는 이걸 읽을 줄 모르는데……. 혹시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궁금해?”
“예. 궁금합니다.”
메데우스가 받아 든 점토판을 몇 번 조몰락거리더니 다시 장 안으로 넣었다.
“여기 있는 점토판의 내용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 메데우스는 장의 문을 닫았다.
……알려 주기 싫다는 건가.
“제가 알면 곤란한 얘기입니까.”
“아니. 저게 없어도 알려 줄 수 있어서 넣은 거야. 어릴 때부터 외우고 있었으니까.”
“저 편지의 내용을 전부요?”
메데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가 아니고 가사야. 어머니가 자기 전에 항상 불러 주시던 노래라 잊혀지지 않거든.”
벽에 등을 기댄 메데우스가 무릎 한쪽을 세우며 그 위에 팔을 얹고 턱을 괴었다.
“자장가 같은 겁니까. 무슨 내용인데요?”
“영웅에 대한 이야기. 어릴 때는 이 노래를 굉장히 싫어했어. 이것 때문에 이난나의 계시라는 게 내려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거든. 그래서 어떻게든 잊어버리려고 했는데, 마음대로 되질 않더라고.”
나택은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시스템의 제안대로 점토판의 내용을 들어야 하는데, 저 안의 기록이 메데우스의 아픈 과거를 헤집는 도화선이 될 것 같았다.
나택을 빤히 보는 옅은 눈동자가 창가의 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눈꺼풀 아래에 맺히는 빛의 점이 눈물처럼 보였다. 거기에 홀려 나택이 입을 열었다.
“그런 거라면… 말씀해 주지 않으셔도 되고요…… ”
머릿속에서 사고가 정리되기도 전에 입이 먼저 말을 뱉었다.
아, 이게 아닌데.
나택은 말을 뱉자마자 곧바로 후회했다. 메데우스의 사정 따위 봐줄 때가 아닌데, 마음속에 남아 있는 최소한의 인간성이 먼저 선을 그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택의 배려는 거절당했다.
“다 지난 얘기야. 이제 어릴 때 기억은 잘 나지도 않고. 그나저나 내용이 궁금하다며. 말해 주지 않아도 돼?”
나택이 슬그머니 시선을 올리자 메데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나택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알려 주시면…… 감사하고요.”
그러자 메데우스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걸 누구한테 얘기해 주는 건 처음인데. 한 번만 말해 줄 거니까 잘 들어.”
나택 역시 아픈 사연이 있는 남의 추억을 반복해서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나택이 메데우스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확실히 들어 두겠다는듯.
메데우스는 턱을 괸 채로 고요히 나택을 마주 보고 편지의 내용을 읊어 주었다. 길을 잃은 동쪽의 이방인과 영웅을 잃은 북쪽의 야만인이 한데 모여 희망의 서사시를 나누었다.
북쪽의 달을 보며 눈을 감았더니 비옥한 대지에서 해를 맞이했네.
갈 곳도 있을 곳도 잃은 몸이라서 정처 없이 평야를 헤매는데
비루한 이를 구원해 줄 꿈이 나타났으니, 당신은 나의 진정한 영웅입니다.
북쪽의 달이 그립지 않다면 거짓이겠으나, 새 터전에서 소중한 씨앗을 틔울 것이니.
이제는 외롭지 않습니다. 나를 빛으로 이끌어 줄 당신은 나만의 숨겨진 영웅입니다.
메데우스의 낮은 목소리가 차분히 깔렸다. 영웅의 서사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그 어떤 설화보다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메데우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스템이 밝은 메시지를 띄웠다.
‘기원의 편지’가 해독되었습니다!
‘나의 영웅’ 키워드를 획득했습니다!
나의 영웅.
그 글자가 사라질 때까지 나택은 메데우스의 눈을 한참 동안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여기를 탈출하기 위해 알아야 할 단서 중에…… 메데우스 어머니의 비밀이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