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고 짧은 걸 대봐도 몰라 1권-1. 첫사랑의 시작 (1/10)

1. 첫사랑의 시작

(D)

아, 큰일이다.

“내가 이거 여기 놓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새끼야!”

사장은 바닥에 널브러진 우유 박스를 노려보면서 으르렁거렸다. 홀에서 주방으로 들어올 때 오븐 옆에 쌓아 둔 우유 박스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한 탓이다. 직원 중 아무도 걸리지 않는데 유독 사장만 발이 걸리는 까닭을 모르겠다.

홀을 무리하게 넓힌 탓에 커피 머신이나 오븐을 놓은 주방은 사람 둘이 나란히 서기도 버거울 정도로 좁다. 사장은 아무리 놓을 자리가 없다고 얘기를 해도 알아서 하라는 무심한 답이나 해 놓고 막상 발이 걸리면 불같이 화를 낸다.

“병신 새끼가……. 갈데없는 놈 받아 줬더니 쓸모가 없어.”

그놈의 병신 소리 좀 안 하면 입에 가시가 돋나. 왼손의 허전한 자리를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삼키는데 사장이 손을 치켜들었다. 이쯤이면 내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죽을죄를 지었다는 듯이 굴어야 하는데 병신 주제에 고개를 뻣뻣이 치켜든 꼴이 아니꼬울 터였다.

지금이야 주택가 사랑방으로 쓰이는 카페를 운영하는 처지지만 왕년에 운동 좀 했던 사장의 손은 두껍고 딱딱하다. 게다가 손도 무식하게 커서 거짓말 안 보태고 내 얼굴을 덮을 정도였다.

맘 같아선 뒷짐 진 손을 풀어 사장 팔을 붙잡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손 대신 축구공을 차던 발이 날아올 거다. 그 발로 맞으면 족히 2주는 시커먼 멍이 빠지질 않는다. 그냥 한 대 맞고 퉁치는 게 나았다.

“보기 안 좋은데 그만하시죠.”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날 후려치기 위해 공중에 뜬 사장의 손을 붙잡았다. 키가 크고 생김새가 번듯한 남자가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그러나 불편함을 감추지 않는 미묘한 표정으로 카운터에 서서 사장과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사장과 내가 마주 선 곳은 벽을 대신하는 찬장 뒤쪽이라서 홀에서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평소에도 괄괄한 목소리를 내는 사장이 데시벨을 조절하지 못해 오늘은 유난히 소리가 컸던 모양이다.

“아이고, 손님 죄송합니다. 목소리가 원체 커 놔서. 이거 실례했습니다.”

사장은 금세 손바닥을 싹싹 비비면서 남자에게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귀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속으로는 화가 치밀었음이 훤히 보였다. 기가 차서 웃음이 나는 도중에도 사장을 따라 얼른 허리를 숙였다. 습관적으로 뒷짐 진 손을 움직여 오른손으로 왼쪽 손등과 손가락 마디를 문질렀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어린아이도 있으니 조심하셔야 될 것 같아서.”

남자는 선하게 웃는 얼굴로 사장을 똑바로 응시했다. 사장은 헛기침을 하더니 ‘가게 잘 봐라.’ 한마디를 남기고 뒤쪽 통로로 나가 버렸다.

“고맙습니다. 괜히 저 때문에…….”

사장의 뒤꽁무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얼른 고개를 돌려 남자를 봤다. 남자는 독기가 빠진 웃는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보다 커피 리필 좀 해 줄래요?”

목적은 커피 리필이었던 듯 남자의 손엔 밑바닥을 드러낸 커피 잔이 들려 있었다. 황급히 건네받아 개수대에 넣었다.

“자리로 가져다드릴게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커피는…….”

“알아요. 샷 하나에 더운 물 추가해서 연하게. 맞죠?”

남자는 진한 눈썹을 치켜세우며 장난스럽게 미소 짓는다.

“기억하네.”

자리로 돌아가 연필을 쥐는 남자를 몰래 보면서 예열된 컵을 집어 들었다. 버튼을 눌러 온수를 담고 그사이 그라인더에 갈아 놓은 원두를 꾹꾹 눌러 담으면서도 힐끔힐끔 남자를 바라봤다.

오늘도 끝내주게 멋지다.

작은 스케치북에 연필 선을 슥슥 덧대는 느슨한 얼굴도, 연필 뒷부분을 테이블에 두드리는 심각한 표정도, 이따금 멍하니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 옆모습까지 완벽했다.

“내가 이 맛에 산다.”

고개를 주억이며 중얼거릴 때 옆에서 불쑥 머리가 나타났다.

“뭐가?”

“으헉. 어, 언제 왔어 성철이 형.”

“방금.”

샷 잔에 떨어지는 액체를 바라보면서 형은 별 뜻 없이 양쪽으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짧은 머리를 잔뜩 힘주어 세운 것이 이른바 ‘예쁜 여자들이 많은 교양 수업’을 듣는 날인가 싶었다. 형은 나보다 한 살 위의 대학생으로 일주일에 사나흘 정도 오후에만 일을 돕고 있다. 형은 허리 아래로 떨어지는 검은 앞치마 끈을 뒤로 묶으면서 입을 비죽거렸다.

“가게 뒤에서 사장 줄담배 피우더만. 인사했더니 졸라 띠꺼운 표정으로 빨리 들어가라고 버럭 하더라. 뭔 일 있냐?”

“저거.”

눈짓으로 사장 발길질에 흐트러진 우유 박스를 가리키자 형이 혀를 끌끌 찬다. 소리보다 동작이 큰 과장스런 제스처였다.

“다리가 짧아서 못 피하나. 아님 눈깔이 없냐. 아무도 문제없는 걸 지 혼자 지랄이야. 그럴 거면 주방을 넓히든지.”

“내 말이.”

“새끼, 고생했다.”

머리를 툭 치려는 형의 손을 피해 잔을 트레이에 놓았다. 커피라기보단 묽은 한약 같은 갈색을 띄는 정도로 남자가 딱 좋아하는 농도였다. 혹시 몰라서 작은 컵에 우유를 담아 같이 놓았다. 남자는 가끔 내키면 우유를 넣어 카페오레를 마셨다.

“맞다. 저 손님 내가 본 적 있는 거 같다고 했잖아.”

“어어.”

“생각났어. 오늘 교양에서 봤는데.”

“응.”

“그 사람이야. 그 사람.”

“아, 그러니까 누구. 빨랑 말해. 커피 식어.”

“장석. 화가 장석 있잖아. 저번에 그림 졸라 비싸게 팔려서 뉴스 나온 사람.”

트레이를 받쳐 든 손에 순간 힘이 빠질 뻔했다.

“누구?”

“장석! 모르냐? 무식한 새끼.”

모르긴 왜 몰라. TV라곤 케이블이나 어쩌다 얻어걸리는 연예 뉴스만 보는 나라도 알고 있었다. 문화 예술계의 샛별, 연예인보다 잘생긴 예술인. 그림 세 점으로 내 기준 평생 먹고살 돈을 마련한 사람.

“진짜?”

“어, 진짜.”

성철이 형은 불쑥 앞치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내밀었다. 저번 달 초에 뜬 기사였다. 예술가로 산다는 것, 장석 화백 독점 인터뷰. 굵은 글씨로 적힌 제목 아래 준수한 외모의 젊은 남자 사진이 붙어 있었다.

‘담담하게 자신의 예술관을 설명하는 장석 화백. (사진) 젊은 나이답지 않은 침착함과 당당함이 엿보인다.’

덧붙은 설명을 그대로 그린 듯 그는 어딘가 우울해 보이면서도 잠잠하고, 동시에 피부 아래로 가득 찬 자신감이 엿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곁눈질로 사진과 남자를 번갈아 보며 가늠했다.

“진짜네?”

“그럼 진짜지, 병시……. 아니, 새꺄.”

형은 트레이 아래로 가려진 왼손을 흘끔거리며 코를 찡긋했다. 미안하다고 말은 못 하고 딴청을 부리는 모습이 웃겨서 눈을 치켜뜨고 한참을 쳐다봤다. 입버릇처럼 욕을 달고 사는 성철 형은 엄마랑 게임하다 부모 안부라도 물은 것처럼 내게 병신 소릴 하는 걸 껄끄러워했다. 심성은 착한 사람이었다.

“아씨. 꺼져, 새꺄. 보지 마, 징그러.”

“에에이, 괜히 부끄러우면서 그런다.”

“시꺼! 빨리 서빙이나 해 인마.”

“우쭈쭈, 나 없다고 울지 마요?”

목소리를 죽여 장난을 치면서 발을 뗐다. 마루를 밟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남자의 테이블 앞에 멈췄다.

“주문하신 리필 준비해 드릴게요.”

“아, 여기.”

커피 잔 자국이 동그랗게 난 자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가리키며 남자는 스케치북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잔을 놓고 그 옆으로 우유가 담긴 작은 컵을 두자 그제야 시선을 들어 나를 봤다. 눈썹 사이를 찡그려 집중하던 얼굴을 펴고 순식간에 부드럽고 유연한 표정을 만들어 미소를 지었다. 길게 빠지는 눈꼬리가 요염할 정도로 휘어졌다.

“고마워요.”

쿵. 쿵. 정신없이 심장이 뛰었다. 이 남자 때문에 요즘의 나는 매일이 혼란스럽다. 24년 만에 스스로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벌써 인사를 하고 돌아서야 했을 것을 남자의 웃는 얼굴에 정신이 팔려 자리에 오래 머물렀다. 남자는 웃던 눈을 나긋하게 뜨고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려 그런 내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마주 바라봤다.

“뭐……. 할 말이라도?”

“아. 아, 아뇨. 죄송합니다.”

“자꾸 그렇게 보면 착각할지도 모르는데. 조심해요.”

슬그머니 연필을 내려놓은 남자의 손이 트레이를 감싸 쥔 내 손등을 슬쩍 더듬었다.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리니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거두고 스케치북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이제 내 이름도 아는 모양인데, 조심해야지. 안 그래?”

“어, 네?”

그는 내 얼굴 언저리에 있던 시선을 떼고 다시 연필을 쥐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가 이리저리 선을 긋는 모습이 역시 멋있다. 넋을 놓을 뻔한 것을 애써 정신을 차려 몸을 돌렸다. 창으로 들어온 햇살에 드러난 그의 얼굴이 매끈하다. 곁눈질로도 훔쳐보고야 마는 스스로에게 몸서리치며 자리로 돌아오니 성철이 형이 뜨뜻미지근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야, 무슨 얘기 했어.”

“별 얘기 안 했는데.”

“내가 아까는 깜빡했는데 너 앞으로 조심해라.”

“뭘?”

한번 숨을 깊이 몰아쉰 뒤 형은 얼굴을 가까이 해서 숨소리에 가까운 귓속말을 흘려 넣었다.

“장석, 게이야.”

***

처음부터 그에게 관심이 있던 건 아니었다. 주택가에 드문 젊은 남자 손님이라는 점이 약간 특이했을 뿐이다. 손님 대부분이 아이를 데리고 나온 엄마들이나 근처 교회 신도들인 탓에 그가 홀에 자리를 잡으면 주변 여자들이 힐끔거리기 바빴다. 남자인 나조차 눈이 휘둥그레지는 근사한 외모니 그럴 법도 했다.

장석의 외모는 솔직히 흠잡을 곳이 없었다. 이목구비는 그린 것처럼 또렷했고 깊은 눈 그늘과 단정한 콧날은 그의 얼굴에 이국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너무 정돈되어 있어 얼핏 여자처럼 보일 것도 같은데 눈썹이 짙고 얼굴선이 굵어 아름다운 쪽에 가까웠다. 몸 또한 팔다리가 길고 옷 아래로 드러나는 라인이 군살 없이 근사했다.

그래 봐야 남자인 것을. 연예인이면 신기하다 소란이라도 떨었을지 모르겠지만 우연히 손님으로 들어온 남자에게 잘생겼다고 호들갑을 떠는 건 웃긴 일이었다. 그저 성철이 형이나 목소리가 앳된 주말 알바 여자애와 이따금 잘생겼다는 얘길 하며 감탄하는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관심이 생기고 눈이 가게 된 건 한 달쯤 전부터였다.

그날은 주말 알바가 발주를 넣은 우유 개수가 맞지 않아 냉장고에 정리가 되지 않는 일로 사장에게 혼나고 있었다. 아무리 가로세로 테트리스를 해도 우유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실온에 놓을 수도 없어서 급한 대로 냉동실에 넣었지만, 얼렸다 녹인 우유는 거품의 질이나 맛이 달라진다는 말을 하면서 사장은 노발대발했다. 평소엔 맛이나 거품 같은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으면서 트집 잡을 땐 호텔 바리스타급 퀄리티를 요구해 댄다.

“죄송합니다.”

뒷짐을 지고 허리를 굽히는데 사장의 화는 식을 줄을 몰랐다. 고작 우유 몇 팩으로 이렇게 욕을 먹어야 하나 싶을 정도로 거칠게 화를 냈다.

홀에는 장석뿐이었고 월요일 오전에 손님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인데도 사장은 그것까지 내 탓이라 생각하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다. 결국엔 꽝꽝 언 우유 팩을 내 발치에 집어 던지더니 밑 깔개로 놓은 말린 우유갑을 얼굴에 던졌다.

“그따위로 할 거면 때려치워, 새꺄!”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표정 봐라. 너 지금 고깝냐? 고까워, 어? 내가 지금 괜한 트집 잡아?”

“아닙니다.”

“어디서 이런 병신이 굴러 들어와서……. 야, 너 손가락 하나 없다고 일도 슬렁슬렁하는 거냐? 병신 티 내?”

“아닙……니다.”

“에이씨, 아침부터 재수 없게.”

사장은 나를 있는 힘껏 노려보고 뒷문으로 나가 버렸다. 여태까지 많이도 들었던 얘기인데 그날따라 유독 서러웠다.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아 목구멍으로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저기,”

“네, 네!”

홀의 한편에 조용히 있던 장석이 손을 들었다.

“아까 주문한 커피랑 베이글. 아직 안 나왔는데…….”

“죄, 죄송합니다. 금방 드릴게요.”

그러고 보니 주문은 받았는데 아직 서빙을 하지 않았다. 베이글은 오븐에 다 구워 놓은 상태여서 크림치즈를 꺼내 듬뿍 발랐다.

망할 사장 새끼, 크림치즈 내가 이렇게 많이 퍼 주는 거 모르겠지. 식재료값으로 망해라. 아니, 망하면 잘리는구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커피를 내리고 쟁반에 담았다. 평소엔 왼손으로 트레이를 받치고 오른손으로 잔을 내려놓는데, 그날은 이리저리 당황한 탓에 오른손 위로 트레이를 올리고 말았다.

“여기 주문하신 베이글, 커피 나왔습니다. 어디…….”

“아무 데나.”

지나치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노트북을 두드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살짝 약이 올랐다.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식으로 욕을 먹는 것도 쪽팔린데 이쪽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으니 괜히 무안했다. 평소보다 조금 거칠게 테이블에 잔과 접시를 놓았다.

“아.”

“예?”

평소라면 내가 잔을 내려놓는 순간 제 할 일을 시작했을 장석이 내 손을 빤히 보고 있었다. 눈을 끔뻑이다가 그의 시선을 따라 내 손을 본 뒤에야 알아차렸다.

“아, 그게. 이, 이건.”

“잠깐 봐도 될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대놓고 호기심을 드러내는 사람은 어릴 때 이후 처음이라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내 왼손의 새끼손가락이 있어야 할 자리엔 아무것도 없다. 어릴 때 사고로 잘려 나가서 왼손은 손가락이 네 개뿐이다. 사는 데 지장도 없고 딱히 불편하지도 않지만 아무래도 장애는 장애라서 내놓기에 민망한 게 사실이었다.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 조심스럽게 손가락 얘기를 꺼내면 당장이라도 같이 일할 것처럼 굴던 사람들도 얼굴이 굳어지곤 했다. 시급이 싼 알바들은 연락이 왔지만 돈이 되는 알바치고 붙어 본 적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카페는 더럽고 치사해도 어쩔 수 없이 버텨야 하는 곳이었다.

장석은 내 손가락 끝마디를 잡고 빤히 들여다보았다. 반대쪽 손까지 가져다 대는 것이 틀림없이 절단 부위를 만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는 약지를 어루만졌다.

“이건 원래부터 이런 거야?”

없는 손가락을 돌려 묻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짐작이 가지 않아 말을 더듬었다. 그는 피식 웃으면서 손가락 끝으로 약지의 점을 톡톡 건드렸다. 약지에는 세로로 나란한 점이 네 개가 있는데 그걸 가리키는 듯했다.

“예에……. 뭐, 원래 그랬, 죠.”

“꼭 별자리 같네. 잠깐 봐도 될까?”

그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옆에 내려놓은 가방에서 연필과 스케치북을 꺼내 들었다. 등받이에 가볍게 허리를 기댄 그는 테이블 모서리에 스케치북을 걸쳐 놓고 슥슥 연필을 움직여 내 손을 그려 냈다.

“됐다.”

“벌써요?”

“간단한 크로키니까. 협조 고마워.”

부드러운 그의 손이 내 손등을 살짝 쓰다듬었다.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손을 등 뒤로 감추고 허겁지겁 카운터로 돌아왔다. 괜히 영수증 내역을 눌러 보면서 딴청을 부리다 고개를 드니 그는 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그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었다.

덩달아 나도 왼손을 들어 쥐었다가 폈다. 특별히 길게 뻗지도, 굵거나 가늘지도 않은 평범한 손이었다. 거기에 빈자리마저 있어 어떤 땐 내 손이지만 징그럽다. 초등학교 때 별명이 닭발이었다. 그래서 그 옆의 약지를 눈여겨볼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특이한가? 오른손 엄지로 나란한 점을 살살 어루만져 보았다. 구부러진 마디를 가운데로 두고 위 아래로 콕콕 박힌 네 개의 점을 한참을 보았다. 비어 있는 새끼손가락의 존재감이 조금 줄어든 것 같았다.

그때부터였다. 장석이 카페에 들어오면 정신없이 눈으로 모습을 좇았다. 평소에는 늘 주머니나 뒤로 감추기 바쁜 왼손이 그의 얼굴을 보면 괜히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한 번 더 손을 잡고 특별하다 말해 준다면 상처가 다 나은 것처럼 마음이 뿌듯할 텐데.

그러나 그는 내 손을 그렸던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처럼 표정이 없었다. 한 번 더 왼손을 테이블에 내려놓아 볼까 고민하길 한 달. 그가 게이라는 사실에 나는 다시 한번 혼란스러워졌다.

***

장석은 여전히 가게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런데도 나는 최근 그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 내가 눈이 마주칠 만하면 시선을 피해 버리기 때문이었다. 멍청한 짓이라는 건 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고부터였다.

“아이씨. 성철이 형은 괜한 소릴 해서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내가 뭐.”

창고 정리를 하러 갔던 성철 형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태운 연기 냄새가 일렁였다.

“또 담배 피웠어요? 사장님 알면 뭐라고 할 텐데.”

“지도 피우는데 뭐. 손 씻고 냄새 안 나게 하면 될 거 아냐. 페브리즈 갖고 왔어. 근데 내가 뭐.”

“아무것도…… 아닌데요.”

씨알도 안 먹힐 웃음을 방긋방긋 지으며 올려다보니 형은 그새 관심이 시들해졌는지 껄렁한 시선으로 홀을 주욱 훑어봤다. 오늘도 아줌마뿐이네. 궁시렁거리는 소리에 건성으로 호응했다.

“그나저나 너 요즘 단골 관리 너무 막 하는 거 아니냐?”

“예?”

형의 시선이 홀의 한구석에 박혔다. 장석이었다.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멀리 둔 채 느리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꼭 한 폭의 그림처럼 근사했다.

“전에는 서빙이고 주문이고 네가 가겠다고 빨빨거리더니 요즘은 계산도 나한테 떠밀잖아. 사장이 나 계산하는 거 싫어하는 건 알지? 시발놈. 내가 그지도 아니고 설마 돈을 가져갈까 봐.”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 그냥 요즘 좀 준비 재료들이 떨어져서 채워 놓느라고.”

“새끼, 핑계는. 내가 전에 호모라 그런 거 때문에 그런 거 아니냐? 야, 솔직히 말해서 저 양반이 뭐가 부족해서 널 꼬시냐? 아침에 인터넷 보니깐 쟤 배우나 모델들하고 그렇고 그런 거 같던데, 너 같은 냄새나는 사내새끼가 뭘 좋다고 건드려. 안심해, 인마! 형이 보장한다!”

목소리를 낮추면서도 성철 형의 동작은 과장된 그대로였다.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목을 쭉 펴고 어깨를 으스댔다.

“그러는 형이야말로 자기가 가기 싫으니까 그러는 거 아닌가?”

“난 너랑 다르게 좀 생겼잖냐. 안 그래?”

“에이, 형도 뭐 썩 훌륭하진 않은데?”

“너 죽을래? 어? 새끼가 빠져 가지고.”

형이 킬킬 웃으면서 옆구릴 간질였다. 억 소릴 내며 허리를 구부려 항복을 외쳤다. 상철 형과 마주 보며 같이 킥킥 웃는데 장석이 시선을 돌려 이쪽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창가에 달린 핀 조명을 등지고도 그의 얼굴은 여전히 하얗다. 깊은 곳에 박힌 까만 눈동자와 마주칠 때에 그만 얼굴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허겁지겁 성철 형을 밀어 내고 옷과 머리를 정리했다. 얼굴이 붉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인정하기 겁나 계속 미뤄 왔지만 이렇게 되니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아마도 나는 저 남자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인정을 해 버리니 마음이 들썩거렸다. 홀을 둘러보는 척 스윽 돌린 시선 끝에 남자가 걸렸다. 여전히 그는 이쪽을 보고 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두근두근 난리였다.

아, 미쳤나 봐. 어떻게 저렇게 잘생겼지?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장석은 좀 전의 창밖을 바라보듯이 멍한 눈을 하고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눈을 깜빡였다. 아차 싶어 앞치마를 괜히 만지작거리면서 손을 슥슥 닦아 내는데 남자가 피식 웃었다. 눈이 부드럽게 휘어져 옅은 그늘에 감싸이는 모습에 또 넋이 나갔다.

뒤돌아서서 개수대에 물을 틀었다. 찬물에 행주를 거칠게 비벼 빨면서 다짐했다. 그래, 사내대장부로 태어나서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서 지낼 수만은 없다. 어린애처럼 뒤에서 꺅꺅거리는 건 저 사람한테도 실례일 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쿨하게 대하자. 아니, 아무 일도 없는 건 맞잖아?

손이 시뻘겋게 될 때까지 행주를 빨아서 짜 놓고 뒤로 둘러맨 앞치마 끈을 다시 조였다. 마침 홀에 놓은 레몬 물이 동이 나 있었다. 쟁반을 옆구리에 끼우고 홀을 가로질러 물통을 집어 들었다.

근처 테이블에 가서 누가 쓰고 뒀는지 모를 빈 물 잔을 치우고 행주로 테이블을 훔쳤다.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방향을 조금 바꾸어 장석의 옆으로 갔다. 곁에서 흠, 헛기침을 하니 연필로 톡톡 스케치북을 두드리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왜요?”

그가 좀 전의 다정한 미소를 다시 지으며 빙긋이 웃었다. 어른이 어린아이를 대하듯 부드럽게 어르는 말투에 입이 꽉 다물렸다. 생각해 보니 할 말도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다짜고짜 여기 와서 이러는 걸까. 이 사람은 황당할 거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옆에 와서 나 좀 보라는 듯이 헛기침이라니.

“저, 저기.”

장석이 눈썹을 살짝 움직여 나를 봤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얼굴이었다. 쟁반을 테이블 모서리에 걸쳐 놓고 나는 단호한 어조로 물었다.

“커, 커피 리필해 드릴까요!”

장석은 나에 버금가는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니. 아직 한 모금밖에 안 마셨는데.”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온몸이 배배 꼬였다. 한 손에 쟁반을 들고 다른 손에 물통을 든 채로 허둥거렸다. 그는 여전히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몸을 돌려 죄송합니다, 하고 가 버리면 될 것을 미련이 남아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댔다. 눈을 질끈 감았다.

“저기요, 저.”

“말해요.”

“제, 제 이름이요…….”

“샛별 씨, 별이. 예쁜 이름이네.”

주춤 뒤로 중심이 빠져 물통 바닥에 남은 물이 출렁였다. 레몬 조각이 물통 벽에 붙어 주르륵 미끄러졌다.

“어, 어어, 어떻게 아셨어요?”

“매니저 단샛별. 명찰 보고 알았지.”

“아, 맞다.”

“재밌는 사람이네.”

그가 소리 죽여 웃었다. 연필을 놓고 두 손을 겹쳐 쥐며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린 뒤 손가락 마디 위로 살짝 턱을 올렸다.

“나한테 관심 있나? 아니면, 그쪽이야?”

“아, 아뇨. 그게 그쪽이라 하시면, 저는 그게 이쪽인 편인데. 사실 이쪽에도 들어가 본 적이 없어서. 굳이 어느 쪽이냐 하시면, 아직은 중립인데. 그게 어느 쪽이냐면 그러니까…….”

“알았어, 알았어. 애쓰지 마.”

푸스스 바람을 내쉬며 그 사람이 웃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는 물통 손잡이를 꽉 움켜진 내 손등을 토닥였다.

“그럼, 저……. 실례했습니다.”

“아, 맞다. 별이 씨. 혹시 된장찌개 좋아해?”

돌아서는 나를 불러 그가 물었다. 영문도 모른 채로 고개를 열렬히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합니다!”

그쪽을요!

***

“다행이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선으로 멘 가방끈을 주물럭거리며 하하 웃었다. 등 뒤로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제가 거절을요? 그럴 리가. 공짜 밥인데.”

그의 뒤에 한 걸음쯤 물러서서 걸었다. 보행자보다 차가 더 많은 주택가였지만 때때로 사람들과 마주쳤다. 사람들은 흘끔흘끔 내 앞에 걷는 장석을 보면서 어머머, 저들끼리 호들갑을 떨다가 뒤에 서 있는 나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애인? 에이, 조수겠지 조수. 그림 그리는 애로는 안 보이는데? 그럼 뭐 매니저 같은 건가? 듣지 않아도 수군거림이 들리는 듯했다.

몇 시간 전, 된장찌개를 좋아한다는 우렁찬 고백에 그는 연필을 탁 내려놓으며 잘됐네, 하고 싱긋 웃었다.

“어제 너무 많이 끓여서. 근데 같이 먹을 사람이 오늘 펑크를 냈거든. 괜찮으면 같이 먹을래요?”

무조건 예스! 그가 ‘잘됐네! 그럼 좀 끓여 오시겠어요?’라고 말했어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을 거다. 그가 웃음 띤 얼굴로 빤히 쳐다보는 것에 홀려 말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기어이 내가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같이 가자고, 집이 코앞이라고 잡아끄는 그의 등을 보면서 그제야 내가 어처구니없는 일에 고개를 끄덕였음을 깨달았다.

“요즘 샛별 씨가 나를 좀 피했잖아. 이제 내가 싫어진 줄 알았어.”

기쁘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짓는 사람을 보고 ‘아까는 정신이 빠져서, 이만 가 봐도 될까요?’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거리감도 없이 내 어깨에 자신의 어깨를 부딪치거나 거리가 벌어지면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잡거나 했다. 그때마다 일일이 날뛰며 쿵덕대는 내 심장도 좀 방정맞다.

“싫기는요, 그……. 다, 단골이 얼마나 중요한데! 동네 장사는 단골 장사예요!”

그를 부를 말이 마땅치 않아 얼버무렸다. 가게를 나와서도 손님, 하고 부르는 건 웃기고 내가 뭐라고 장석 씨, 하고 낯간지럽게 부를 수도 없다. 기껏해야 저기나 있잖아요, 정도가 적당할 거다. 어차피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는 건 더 없을 테니까.

그저 이 사람은 밥을 같이 먹을 사람이 부족했던 거고 그때 마침 내가 어버버 하고 있으니 생각난 김에 물었겠지. 거기에 진짜로 예, 하고 넙죽 대답하는 빙구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여기요, 여기. 여기 병신 추가요. 그 순간의 나는 병신이 맞았다.

“샛별 씨, 나이가 어떻게 돼요?”

내게 맞추어 걸음을 반보 늦추면서 그가 물었다. 달빛이 흘러내려 하얀 얼굴이 창백하게 빛났다. 까만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어깨 아래로 힘이 주욱 빠지고 심장 소리만 귓가에 울렸다. 사람을 홀리는 뱀파이어나 몽마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스, 스물넷이요.”

“어리네. 좋겠다.”

“저어……. 어떻게 되시는데요?”

“나? 서른. 나도 작년까진 20대였는데.”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를 봤다. 서른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럼 몇 살일 거 같냐, 물으면 또 할 말은 없지만은 분위기가 성숙해서 어른 같긴 해도 얼굴은 기껏해야 나보다 두세 살 위로 보였다.

“진짜요? 와, 아닌 거 같은데. 완전 어려 보여요. 진짜로 정말. 와아, 짱이다.”

입술을 꾹 모았던 그가 피식 웃으며 입꼬리를 휘어 올린다. 아뿔싸, 평소처럼 나불대는 말투가 나와 버렸다. 진짜니 완전이니 애처럼 종알거리는 말투를 그 앞에서 보였다는 게 쪽팔렸다.

“귀엽네, 샛별 씨.”

귀가 뜨끈해지는 것 같아 손바닥으로 거칠게 문질렀다. 이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쑥스러움을 감추려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에이. 왜 그러세요, 형님.”

헤헤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앞으로 손을 싹싹 비볐다. 열이면 열, 남자치고 형님 소리 싫어하는 사람 없더라. 나이 먹으면 사장님, 선생님. 근데 젊은 남자가 형님 소리 해 주면 나이 먹은 사람들도 좋아는 하던데.

배 속에서 부끄러움이 부글부글 끓는 걸 꾹 누르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뭔가 개운치 않은 얼굴로 손가락을 들어 턱을 톡톡 두드렸다.

“형님은 무슨. 형이라고 불러요. 나도 편하게 부를게. 괜찮지?”

그럼요. 괜찮습니다. 암요, 뭐든 오케이. 아까의 실수를 잊어버린 나는 또다시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 머리는 없어도 주변머리는 있다는 게 그나마 장점이었는데 이 사람 앞에선 것도 무용지물이었다. 그냥 바보라는 거다.

“예, 예에. 혀엉…….”

“응, 별아.”

“어어…….”

그가 별아, 하고 나를 부른 순간 정말 눈앞에 별이 뿅 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닌데 마치 처음 불리는 이름인 것처럼 낯설고 특별했다.

“왜, 너무 그랬나? 이건 좀 그런가?”

“아뇨,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형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요. 꼭 라디오 DJ 같아서……. 부디 그렇게 불러 주세요! 네?”

그는 소탈하게도 하하 웃으면서 내 머리를 스윽스윽 쓰다듬었다.

“별이 너 되게 재밌다.”

자, 여기야. 다 왔어. 멈춰 선 곳은 한 동짜리의 고급 아파트였다. 경비실도 있고 출입문도 이중으로 닫혀 있었다. 여긴 유명한 사람들만 사는 곳이라던데. 여상스럽게 경비실에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하고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여는 형을 보면서 새삼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졌다.

와, 방금 나 맘속으로 형이라고 불렀지? 아주 자연스럽게. 뻔뻔스러운 자식. 적응도 잘하지! 그래 인마! 지금 저 잘생긴 형이 날 별이라고 불렀다고!

“무슨 생각해? 안 들어가?”

이미 형은 안으로 들어가 있고 나는 문밖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아하하, 웃으면서 주먹으로 죔죔을 했다. 요즘 통 혈액순환이 안 좋아서요, 사족을 덧붙이며 몸을 안으로 집어넣었다.

엘리베이터는 매끄럽게 위로 올라갔다. 10층입니다. 띵동, 벨소리도 우아했다. 아파트는 겉에서 보기에 굉장히 커 보였는데 막상 복도에 서니 집은 양쪽에 두 개뿐이었다.

그 큰 땅이 딱 두 개의 집으로 나눠진다는 것이 신기해서 다른 집이 있나 두리번거렸다. 형은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어 놓고 내가 정신을 차려 곁으로 올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신기해?”

“네, 네! 완전 신기해요. 방도 많겠다.”

“어디 보자, 하나둘……. 방은 네 개밖에 안 돼.”

“헐! 우리 집은 하난데!”

촌티는 적당히 좀 내자. 그러나 주둥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 방이 네 개면 식구도 넷인가? 아까 같이 먹을 사람이 펑크를 냈단 건 뭐지? 가족들이 여행이라도 갔나?

“그러고 보니 빈손이네요. 나중에 말씀해 주시면 제가 커피 같은 거 인원수대로 서비스 드릴게요. 가족은 몇 분이세요?”

“여긴 나 혼자 살아.”

“방이 네 개인데요?”

“응. 적당한 거 아닌가?”

슬리퍼를 신고 슥슥 들어가는 형을 따라 현관에 놓인 슬리퍼를 신었다. 형은 내게 거실 소파에 앉도록 권한 다음 셔츠 단추를 풀어 팔을 걷어 올리고 곧장 부엌으로 들어갔다. 개수대에 손을 씻는 형의 손목에 시계가 반짝였다.

“어어, 형 시계 안 풀어요?”

“괜찮아, 방수되는 거야.”

형은 왼손을 들어 물기 묻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딱 보기에도 비쌀 것 같은 시계인데 형은 그릇을 씻거나 칼질을 하는 동안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와서 먹어.”

냄새부터 벌써 위장을 자극했다. 구수한 냄새에 고픈 줄도 몰랐던 배가 꼬르륵 요동쳤다. 헤실헤실 웃으며 형의 맞은편에 앉았다. 매끈한 하얀 돌로 된 식탁에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두부 된장찌개와 달래 무침, 애호박 볶음이 놓여 있었다.

“이거 전부 형이 하신 거예요?”

건네주는 물컵을 받아 고개를 꾸벅이면서도 식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요리를 잘 못 하는 탓에 나는 집에서 라면을 먹거나 쉬어 빠진 김치, 참치 같은 걸로 반찬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엄마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바빠서 반찬을 해 놓을 짬이 없고, 해 놓아도 둘 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지 않은 탓에 금세 쉬어 버려서 결국은 냉장고를 잘 채워 놓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런 제대로 된 식사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가게에서 먹는 건 냄새가 나지 않는 편의점 김밥이나 기껏해야 햄버거 정도니까, 뜨끈한 국물이 있는 밥을 먹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응. 요리하는 거 좋아해. 색감도 예쁘고 손을 움직이다 보면 쓸데없는 생각을 덜해서.”

형은 습관처럼 손목의 시곗줄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무릎에 손을 문지르다가 형이 숟가락을 들어 밥을 뜨고 나서야 젓가락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뜨끈뜨끈한 밥을 입에 물고 숟가락으로 두부를 건져 젓가락으로 쪼개었다. 두 조각 난 것을 밥 위에 올리고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뜨거워서 질끔 눈물이 나는데 그래도 맛있었다. 후하, 입김을 불면서 밥을 씹는데 형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젓가락이나 숟가락 드는 건 불편하지 않아?”

왼손에는 숟가락을 오른손엔 젓가락을 쥔 나를 보고 하는 소리였다. 그 말인 즉슨 손가락이 하나 없어도 숟가락질에는 별 이상이 없냐는 거다. 이런 질문쯤이야 골백번은 들어 봐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형이 내 못난 곳을 보고 있는 것이 부끄러워서 슬그머니 숟가락을 놓고 왼손을 식탁 아래로 내렸다.

“하나도 안 불편해요. 제가 좀 식탐이 있어서 양손으로 설치느라고……. 헤헤, 얌전히 먹을 게요.”

“아니. 잘 먹으니까 이뻐서 그래. 많이 뜨거워? 입술 부었다.”

형의 손이 뻗어 와 톡, 하고 아랫입술을 건드렸다. 물 잔을 쥐고 있던 형의 손은 차가웠다. 움찔 목을 움츠리면서 눈을 크게 뜨니 형은 이미 손을 거두고 반찬을 집어 들고 있었다. 딴청을 부리는 척 김치를 세로로 쪼개었다.

“이, 이건 부은 게 아니고……. 원래 이 모양이에요. 웃기죠? 붕어 같고.”

“아니.”

형은 젓가락을 놓고 슬쩍 자신의 입술을 엄지로 훑어 냈다.

“야해 보여.”

순간 잘못 들었나 했다. 눈을 끔뻑이다가 다시 되짚어 보아도 제대로 들은 것 같았다. 야하다는 말에 내가 아는 것과 다른 의미가 있나. 아니면 야무져 보인다는 걸 잘못 들었나. 아닌데, 아니었는데…….

“에, 에이. 형 왜 그러실까. 자꾸 그럼 형이 나한테 관심 있는 거 같잖아요. 하하, 나 또 한 인기 하는 거 어떻게 알고!”

하하하! 크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이는데 형은 빙그레 웃기만 하고 대꾸가 없었다. 이럴 땐 같이 웃으면서 타박을 해 줘야 분위기가 맞는데 혹시 형은 농담이 안 통하는 타입인가? 진짜로 내가 이 얼굴로 남녀노소 인기 안 가리는 절세 미남이라고 착각하는 멍청인 줄 알면 어째. 그거 아니에요. 농담이었는데.

“관심 있다고 하면?”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고 입꼬리를 비트는 것만으로도 형의 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담백하고 금욕적으로 보이던 얼굴에서 순식간에 색기가 뚝뚝 흘렀다.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자, 자꾸 노, 농담하면…….”

여유 있는 얼굴을 한 형은 그 까만 눈으로 나를 빤히 보았다. 형이 게이라는 말이 잘 체감되지 않던 것도 한순간에 납득이 됐다. 과연, 남자를 홀리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 홀린다는 것이 구미호 같은 느낌이 아니라 넓은 성에 홀로 사는 턱시도 입은 드라큘라가 손짓하는 느낌이었다. 야한데도 우아했다.

“바, 밥 식겠네요.”

그 뒤로는 조용히 밥만 먹었다. 좀 전과 똑같은 음식을 먹는 건데도 형이 계속해서 묘한 눈길로 바라보는 탓에 하나도 맛을 느끼지 못했다. 식사의 답례로 설거지를 하고 나서는 90도로 허리를 숙여 ‘감사함다!’ 인사만 하고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엄마, 나 방금 뭔가에 홀릴 뻔한 거 같아요.’

올려다 본 하늘에 하필이면 보름달이 떠 있었다. 노르스름하게 빛나는 달을 보면서 형의 얼굴을 떠올렸다.

여름. 여름이니까. 더운 건 당연한 거다. 땀이 나는 건, 얼굴이 뜨거운 건. 그러니까, 여름이니까…….

***

어쩌면 그날 이후로 다시는 카페에 오지 않아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형은 평소와 똑같았다. 물을 보통보다 많이 섞은 아메리카노에 때때로 우유를 넣고 조용히 그림을 그리거나 멍하니 창밖을 보거나 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나는 염치없이도 형을 따라가 밥을 얻어먹었다. 그때마다 형은 예의 그 묘한 눈길로 나를 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일주일 전에 파스타를 먹던 날에는 쪼로록 빨아 당긴 면발이 얼굴을 탁 치고 입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턱과 콧잔등에 소스가 묻었다. 형은 직접 휴지를 들고 와서 내 얼굴을 닦아 주고는 엄지로 슬쩍 오른쪽 눈썹을 문질렀다.

“이런 데도 점이 있네.”

“아, 뭐……. 그러, 게요. 하하, 빼, 빼기도 뭐 하고…….”

형이 만지는 건 물론 가까이에서 숨만 쉬어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벌렁거리는데, 그런 행동을 할 때마다 정말로 갈비뼈를 뚫고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다. 형은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손도 근사해서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젓가락질만 해도 그림 같았다.

“자꾸 그렇게 쳐다보면 곤란한데.”

내 시선이 영 부담스러웠는지 형이 살짝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미안합니다. 게이에게도 취향이 있겠죠. 형이 묘하고 야하게 보이는 건 내 욕망 때문일 거다. 꼴에 남자라고 좋아하는 사람한테 콩깍지를 끼워 벌써 필터링이나 하고 있다.

사실 벌써 모, 몽정도 했다. 누가 어느 위치인지는 영 애매했는데 꿈속에서 형은 알몸으로 나타나 다짜고짜 내게 키스를 했다. 키스만으로 몽정하는 게…… 나만은 아닐 거라 믿는다.

“별아. 무슨 생각해.”

서빙을 하러 와서는 잔을 주지도 않고 멍하니 서 있기만 하는 나를 형이 불렀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맛있게 드세요.’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형이 가까이 오라고 작게 손짓했다.

“오늘 시간 괜찮아?”

“네, 네에. 괜찮죠. 완전 괜찮은데.”

“그럼, 이따 끝나고.”

“넵!”

매번 마감 시간까지 남겨 두기가 미안해서 얼마 전부터는 불편하면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얘기를 해 뒀다. 마침 전화벨이 울려서 형은 내게 고개를 끄덕이고 전화를 받았다.

“어.”

무뚝뚝하게 대답한 형이 나른한 얼굴로 통화하는 모습을 흘끗흘끗 보았다. 목소리는 간간히 들리다가 말다 했다.

“그래, 전에 얘기한 걔. ……오늘 하려고. 안 되면? 생각 안 해 봤는데. 글쎄, 일단 내가 해 보고.”

형이 전화를 끊는 순간 고개를 푹 숙여 리넨으로 주스 잔을 벅벅 닦다가 쩌억, 잔이 갈라져 버렸다. 아, 안 되는데. 이거 단종된 거라 앞으로 세 잔밖에 여유 없는데…….

당황으로 식은땀이 쭉 흘렀다. 성철 형에게 잠시 홀을 맡기고 신문지로 잔을 둘둘 감아 선반 위에 올려 둔 뒤 창고에서 새 잔을 꺼내 왔다. 창고를 다녀오는 길에 사장과 마주쳐서 욕을 열 사발 정도 쭈욱 마시고 뒤통수도 한 대 얻어맞았다.

비싼 컵이니까 뭐 이해는 한다. 사장은 손가락이 부족해 잔도 깨뜨리냐며 버럭버럭 성질을 내다가 가 버렸다. 혼자 있을 성철 형을 걱정하며 허겁지겁 돌아오니 이미 석이 형은 자리를 뜨고 없었다.

일을 마치자마자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형네 집으로 향했다. 사장이 자리를 일찍 뜬 김에 마감도 5분이나 먼저 했다. 사장은 자리를 비워 놓고서는 CCTV로 보고 있었는지 형네 집으로 가는 길에 카톡이 왔다.

[손님 있는데 마감은 왜 해. 낼 얘기하자.]

망했다. 내일은 아침부터 죽 쑤는 날이다.

“형, 저 왔어요.”

벨을 누르자 느리게 문이 열렸다. 현관에 낯선 신발이 있어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단정한 구두나 편한 단화 등을 신는 형의 신발과는 다르게 장식이 요란한 워커였다.

“형, 형 있어요?”

슬리퍼를 신고 복도를 걸어 거실로 향했다. 소파에 앉은 사람은 둘이었다. 형과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선글라스를 착용한 남자였다. 남자는 나를 향해 손을 휙휙 흔들었다.

“안녕! 석이 씨 친구야.”

“안녕하세요.”

고개를 숙이면서 형을 흘끔 보니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형의 친구라는 남자는 놀리는 투로 키득키득 웃으면서 나를 몇 번이나 쳐다봤다.

“석이 씨. 하여간 알아줘야 돼. 다음엔 그냥 안 갈 거야.”

“알았다니까. 성격하고는.”

“나 바쁜 거 다 알면서 그래! 시간 내서 간신히 왔더니 이게 뭐냐고.”

“그래. 바쁜 거 알지. 미안해. 다음에 보자, 다음에.”

형은 남자의 어깨를 토닥였다. 둘이 워낙 친밀해 보이고 또 앉은 거리가 엉덩이가 닿을 듯이 가까워서 다소 혼란스러웠다.

어어, 형의 애인인가? 아닌데, 형 애인 없다고 했는데.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이 묘한 분위기는……. 형에게 보이지 않도록 뒤로 손을 돌려 꼼지락거렸다. 뭉툭한 손가락의 빈자리를 만지작거리면서 눈치를 살폈다.

“저, 저기…….”

“어, 별아 왜.”

“이름이 별이야? 귀엽다. 나하고도 친구할래?”

“아뇨, 그게……. 하하, 하……. 제가 타이밍이 벼, 별로 안 좋았나 봐요. 두 분 가, 같이 계세요. 저는 갈게요.”

“어? 눈치는 좀 있네?”

그는 푹 눌러 쓴 모자챙을 만지작거리면서 씨익 웃었다. 형은 그런 남자의 등을 떠밀어 집 밖으로 내보냈다. 그동안 나는 거실 한구석에 쭈뼛쭈뼛 서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내 마음을 종이에 써서 눈앞에 들이미는 기분이었다. 맞다. 형도 남자고 나도 남자고, 나는 지금 게이를 좋아하고 있는 거였지. 형은 다른 남자들과 데이트도 하고 키, 키스도 하고, 그리고…….

“쟨 원래 저래. 신경 쓰지 마.”

“아뇨, 저는 괜찮은데 두 분 방해한 건가…… 하고요.”

“방해일 것도 없어. 저래 놓고 내일이나 모레 새벽쯤 쳐들어올 게 뻔하거든.”

“새, 새벽에요?”

“응.”

형은 나를 거실에 앉혀 두고 분주히 움직였다. 부엌으로 가야 하나 엉덩이를 들썩이는데 형은 쟁반을 들고 거실로 돌아왔다. 소파 앞 테이블에 내려놓은 것은 간단한 안주와 술이었다. 것도 때깔이 꼭 보리차 같은 양주.

이름이…… 필기체로 휘갈겨 있어서 잘 모르겠다. 술도 어지간히 약하고 자주 마시는 편도 아니어서 술이라고는 카페에서 파는 맥주 몇 종류와 마트에 파는 소주 정도밖에 몰랐다.

“이거 독하지 않아요?”

“글쎄, 그럭저럭 먹을 만한데. 내가 입이 심심해서. 싫으면 음료수 줄까?”

“하하……. 으, 음료수는 무슨! 이 정도는 마셔 줘야 아, 술이구나 하는 거죠!”

뚜껑을 돌려 따서 형의 잔에 먼저 채워 두고 내 앞의 크리스털 잔을 채웠다. 꼴꼴꼴, 흘러내리는 술에서 벌써 알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거 마시면 승천할 거 같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랑 하이파이브할 거 같은 기분인데. 모두의 아버지 말고 우리 아부지. 생전에 그렇게 술 좋아하셨으니 아들내미가 술로 승천해도 좋아할 거 같다.

“무리하지 마. 못 마시겠으면 두고.”

진짜 보리차라도 마시는 것처럼 꿀꺽꿀꺽 잘도 삼키는 형을 두고 이제 와서 못 먹겠다고는 할 수 없어서 호기롭게 잔을 들어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중에 3분의 1을 코와 입으로 뿜었다. 콜록, 콜록! 케헥, 기침이 멈추질 않았다. 목에 소독약을 붓는 줄 알았다. 이걸 어떻게 마신다지.

“무리하지 말라니까.”

형은 잔을 내려 두고 내 곁으로 다가와 등을 쓸어내렸다. 얼굴이 벌게지도록 기침을 토해 내고 형이 입에 대 준 물을 두어 모금 삼켰다. 티슈로 코와 입가를 닦고 기침하느라 그렁그렁해진 눈을 들어 형을 보는데…… 이건 거리가 심하게 가까웠다. 등을 토닥여 주느라 바짝 붙어 앉은 형의 얼굴이 지척이었다.

“혀, 형……. 이제 저 괘, 괜찮은데.”

“정말 괜찮아?”

오히려 얼굴을 더 가까이 붙이면서 형이 물었다.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면 입술이 실수로 부딪칠 것만 같은 거리였다. 두 손으로 꾸욱 소파를 짚어 눌렀다. 엄마야. 가뜩이나 술 때문에 열이 오른 몸에 불을 지르는 것 같았다. 형은 거의 숨이 닿을 거리에 얼굴을 두고서,

“별아, 하자.”

머리와 꼬리만 달린 말을 던졌다.

“뭐, 뭘 해요?”

가볍게 코로 숨을 내쉰 형은 기어이 코앞까지 다가와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형의 두 팔이 소파 등받이에 붙어 내가 거의 안긴 꼴이 되었다. 이건 불공평했다. 같은 남자인데 무슨 어깨가 이렇게 넓어.

“하자. 하기 싫어?”

검은 눈동자에 욕망이 고이는 것이 보였다. 설마 형이 나에게……. 이건 모두 내 필터링이다, 콩깍지다. 내가 좋아하니까 형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망상을 하는 거다.

“하, 하하. 혀, 형. 자꾸 그러면 나 진짠 줄 아는데. 그, 그러다 내가 형한테 나, 나쁜 짓이라도…….”

나를 내려다보던 형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숨결 같은 목소리로 형이 속삭였다.

“그래, 지금 내가 너한테 하려는 거잖아. 나쁜 짓.”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을까. 코로 가볍게 웃는 형의 숨결이 입가를 간질였다. 너무 심장이 뛰어서 숨이 가빠 죽을 것 같다. 어떡해, 어떡해.

“그러니까, 하자.”

어떡하긴 뭘 어떡해. 성은이 망극합니다, 하고 엎드려 받아야지. 고개를 끄덕이고 눈꺼풀을 들어 올려 형의 눈을 들여다보는 순간 뜨거운 입술이 내 입술을 덮어 머금었다.

***

푹신한 침대가 움푹 파이도록 나는 깊게 눌려 있었다. 남자 둘의 체중은 그 정도의 무게였다. 어떻게 침대까지 왔는지 가물가물했다. 키스를 했고, 또 키스를 했다. 어떻게 했는지 설명하기란 불가능했다.

형과 한 것이 내 인생의 첫 키스였으므로 혀를 넣는 게 맞는지 빼는 게 맞는지도 몰랐다. 그저 바들바들 떨면서 형의 옷자락을 쥐고 가쁜 숨을 누르며 입을 벌리고만 있었다. 형의 입술이 내 아랫입술을 집요하게 깨물어 빨고 핥는 것을 눈을 감은 채로 느꼈다.

“혀, 형……. 그러니까 제, 제가요.”

형이 티셔츠를 벗겨 내는 탓에 말을 잠시 멈추었다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아는 게 없는데요.’ 따위의 잡소리를 하려던 것이 쏙 들어갔다. 내 위에 올라탄 형이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맨몸을 드러냈다. 근사한 굴곡이었다. 가슴과 복부 모두 탄탄하고 매끄러워 보였다. 무심코 손을 뻗어 형의 복부를 짚었다.

“아, 그게. 보, 복근이…….”

당황으로 아무 말이나 내뱉는데 형의 몸을 짚은 것이 하필이면 왼손이었다. 부끄러웠다. 이렇게나 근사한 사람과 키스를 해도 내 손가락은 자라지 않는다. 삼류 드라마급 대사를 인용하자면 이렇게 형을 가까이 해 버리면, 형의 질마저 나 때문에 떨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손을 움츠리고 뒤로 물리는데 형이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손목, 속목의 뼈, 손등을 차례로 입술로 훑어 내리고 주먹 쥔 손을 펴게 해서 손가락 하나하나를 입에 머금었다. 내 손가락이 형의 입 속에 담기는 광경은 무척 생경했고, 따뜻하고 말캉한 혀가 손가락을 휘감아 그 마디마디를 누를 때엔 성기를 빨리는 것처럼 부끄럽고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형은 특히 약지에 오래 머물렀다. 약지를 입에 물고서 구음하듯이 길게 빨았다. 그러곤 약지에 있는 점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었다. 침으로 젖은 손가락을 어루만지면서 형은 바지 버클을 풀었다.

“나는 여기 이 점이 좋아. 예뻐.”

불뚝 솟은 형의 성기가 속옷을 밀어 내고 있었다. 형은 무릎을 세웠던 자세를 낮추어 내 허벅지에 걸터앉았다. 묵직한 열기가 사타구니에 번졌다. 어느새 나도 발기한 상태였다.

“그리고 여기.”

형의 입술이 비어 있는 새끼손가락 자리로 넘어갔다. 형은 민둥하니 둥근 자리를 입술로 문지르다가 살짝 깨물었다.

“귀여워.”

심장이 아프도록 뛰었다. 심장이 뛸 때마다 욱씬욱씬 가슴이 저리고 눈물이 차올랐다. 생각보다 더 형을 좋아하는 거 같아.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대로 있어도 좋겠다. 형이 가만가만 나를 만져 주고, 나는 형을 볼 수 있고, 형의 체온이 곁에 있어서 마음이 벅찼다. 벌써 행복해질 것 같아.

“아직 울기엔 이른데.”

나직이 속삭인 형이 몸을 겹쳐 다시 키스를 해 왔다. 손가락이 귀를 지분거리며 파고드는 것이 마치 형에게 범해지는 기분이 들어 허리가 떨렸다. 더욱 더, 형이라면 더 내주어도 좋다. 남김없이 모조리 만져지고 싶었다.

그 열망만으로 나는 부끄럽게도 형 앞에 다리를 벌리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도왔다. 아주 깊고 은밀한 곳이 형으로 가득 채워졌다. 아픔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행복해서, 형이 조금 더 나를 만져 주길 조르고 움직이고 기뻐하며 끌어안았다.

가슴을 마주 대자 형의 심장 박동이 내 살갗을 두드렸다. 두근두근. 건방지게도 형과 아주 가까운 기분이 들어서 섹스란 건 참 좋은 거구나, 막연하게 생각했다.

***

아침에 나를 깨운 건 형이었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어깨를 살살 흔드는 손길과 ‘일어나, 별아.’ 부르는 형의 감미로운 목소리에도 쉽게 눈꺼풀이 들리지 않았다. 간신히 눈을 뜨고 침대 위를 구르며 꼼지락거렸다. 형은 그 곁에 앉아 등을 토닥이며 간간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제 너무 무리했나.”

어제? 어제 내가……. 이불에 얼굴을 처박고 잠시 회상의 시간을 가졌다. 나는 왜 낡은 이불이 아닌 뽀송뽀송한 침대에 누워 있는가. 나는 왜 기상나팔 알람이 아닌 형의 목소리로 아침을 맞았는가.

“으, 으어어…….”

“왜 그래. 많이 아파?”

형이 엉치뼈를 가볍게 툭툭 두드려 줬다. 그 부분이 찌릿하고 아팠다. 허리를 움직이자 찌르르 고통이 척추를 따라 올라와 퍽 터졌다. 동시에 무릎이 얼굴 옆으로 붙을 정도의 격렬했던 섹스가 떠올랐다. 뒤집어 누운 채로 그 위로 올라탄 형이 뭉근히 움직이던 것도 생각났다.

너 잘 조인다. 갈 거 같아. 흐트러진 형의 목소리가 귓가에 그르렁거렸다. 땀으로 젖은 형은 어디 할 것 없이 전부 야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아랫배가 찌릿찌릿했다. 새까만 눈동자에 일렁이는 욕망에 숨이 막혀서 바라보기만 했는데도 호흡이 가빴다.

“쪼, 쪽팔려서요.”

“뭐가.”

“어제, 그러니까…….”

더듬거리며 말을 고르는데 형이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처음이라서 그래? 처음엔 다들 그래.”

형은 아예 내 옆으로 털썩 눕더니 빨갛게 물든 내 귀를 손가락으로 주물렀다. 연한 뼈가 이리저리 휘어지는 것을 내버려 두고, 이불 속에서 눈을 끔뻑이며 전날에 대한 기억을 곱씹는데 형이 물었다. 여자랑 비교해서 어때?

“네?”

“여자랑 비교해서 어떠냐고. 나는 여자랑은 해 본 적이 없어서.”

고개를 돌려 형을 봤다. 정말 별다른 의미는 없었는지 형의 얼굴은 태연했다. 그렇다고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 형에게 ‘앞도 뒤도 미사용 신품입니다!’ 하고 툭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입 안에서 혀를 굴리다가 대뜸 꺼낸 말이 내가 생각해도 가관이었다.

“글쎄, 저는 별로였어요.”

형은 조금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래? 어제는?”

여기서 입을 다물고 ‘죄송합니다, 저는 마법을 익힐 수 있도록 오래도록 순결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대답했어야 했다.

형은 순수한 호기심에 물었겠지만 앞뒤 모두 경험이 없는 나와 했다고 하면 다정하고 배려 깊은 형은 죄책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이 나이까지 아무것도 겪어 보지 못한 건 그저 내 문제인데! 나는 형의 마음을 가볍게 해 주어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 의식에 사로잡혀 계속 지껄였다.

“당연히 좋았죠. 역시 잘생긴 사람은 섹스도 잘하나 봐요. 다른 남자랑은 비교도 안 돼.”

“남자도 처음이 아냐?”

인상을 살짝 찌푸린 미심쩍은 얼굴. 그래, 믿지 못할 만했다. 내가 어디 가서 얼굴로 점수 딸 근본은 못 된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죽도 밥도 안 됐다. 진실에 살짝 포장을 씌우는 것뿐이다.

“어쩌다 한번…….”

“생각보다 별이 네가 대담하구나.”

감탄 섞인 형의 목소리에 경련이 날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요. 너무 대담해서 심장이 벌렁벌렁하네요.

“그럼 그렇게까지 조심할 필요 없었네.”

깍지를 껴 뒷머리에 대고 편히 누우며 형이 중얼거렸다. 네? 몸을 뒤집어 형을 향해 돌아누웠다. 이불이 스르륵 미끄러져 몸이 드러나는데 상반신에 울혈이 가득했다. 형의 입술이 강하게 빨아들이던 감각이 되살아나 울혈 생긴 자리마다 저릿했다.

“난 또 나 때문에 괜한 짓을 했다고 후회라도 할 줄 알았어.”

“그거야…….”

형이 좋으니까. 내 다음 말을 기다리며 빤히 보고 있는 형에게 하하 웃어 버렸다. 차마 그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형은 그저 분위기에 휩쓸린 거다. 또는 최근 들어 욕구불만이었을지도 모르고 나 같은 놈도 한번 맛보고 싶어졌을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형이 나를 안아 주었다는 사실이 변치는 않았다.

“아침 먹자. 시간 있어?”

“몇 시…… 으악! 큰일 났다! 혀, 형! 미안해요! 나 완전 지각이야. 옷은 어디 있어요?”

“혹시 몰라서 건조대에 널어 뒀어. 속옷은 내 거 입고.”

“고마워요, 진짜. 꼭꼭 이 은혜 갚을게요!”

“됐어. 얼른 가기나 해.”

형이 꺼내 준 속옷과 옷을 입고 세면대에서 급히 세수와 양치를 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엉덩이 부근이 화끈거리고 허리가 뻐근했지만 그쯤은 일하다 생긴 근육통과 비교해서 꽤 견딜 만한 수준이었다. 아마 형이 상냥하게 몸을 풀어 준 덕도 있을 것이다.

현관에서 운동화를 밟아 짓뭉개듯 신는 내 어깨를 슬쩍 당겨 형은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벌건 대낮에 예고도 없이 벌어진 입맞춤에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우뚝 멈춰 있으려니 형이 피식 웃으며 등을 떠밀었다.

“다음에 또 하자.”

“네, 네엡.”

달칵. 문이 닫혔다. 복도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넘실거리며 아이보리 색의 문을 비췄다. 호수가 표시된 동그란 딱지는 반짝 빛을 반사했다. 또 하자는 말은 다시 형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뜻일까.

정말 어쩌면, 형도 아주아주 조금쯤은 나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일까.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데도 기대가 싹텄다. 그랬으면 좋겠다.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곁에서 볼 때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이 닿았을 땐 심장이 터질 듯했다. 이미 충분할 만큼 행복을 맛봤지만 사람은 욕심 많은 동물이라 행복의 기대치가 부풀어 버렸다.

첫사랑이 형처럼 아름답고 근사한 사람이라서 다행이다. 짝사랑은 제법 로맨틱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

아슬아슬하게 지각은 면했지만 평소 출근 시간에 30분 앞서 도착하곤 했던 나로서는 완전히 꼬인 스케줄이나 다름없었다. 가게를 오픈할 때가 됐는데 냉장고에 재료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큰일이었다.

사장은 전날 일찍 퇴근한 것을 욕하러 왔다가 나한테 붙들려 통조림을 따고 재료를 썰었다. 그래 봤자 파인애플과 트로피컬 통조림 두 개, 여름이라 팥빙수 때문에 팥 통조림 세 개, 디저트 메뉴를 위한 고형 치즈 조각 몇 개 정도였다. 사장은 10분 만에 모두 끝내 놓고 다시 나한테 와서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너는 말이야, 새끼가 정신이 빠져 가지고 쓸데가 없어. 어? 씨발. 매니저라는 새끼가 거지 같은 꼴로 출근이나 하고. 어제도 빨리 튀어 나가드만. 요즘 계집질이라도 하냐? 어? 아니면, 그 낯짝 반반한 놈이랑 비역질이라도 하는 거야, 뭐야?”

꽤 날카로운 지적에 입을 홉 다물었다. 이럴 땐 그저 고개를 숙이고 나 죽었다 하는 맘으로 굽신거리는게 최선이었다.

“죄송합니다. 안 그러겠습니다.”

“에이, 시팔. 통조림도 벌벌 떠는 병신 새끼를 무슨 매니저라고 월급을 처주겠다 그랬는지, 시팔. 내가 자선 사업하는 거야, 새꺄. 알아?”

“옙. 감사합니다.”

“손님 온다. 일 똑바로 해. 내가 두고 볼 거야.”

“예. 들어가십쇼.”

뒷문으로 어슬렁어슬렁 나가는 사장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를 한 다음 가게로 들어서는 손님을 향해 ‘어서 오세요!’ 우렁찬 인사를 했다. 가끔 원두만 사 가는 근처 작은 사무실 여직원이 큰 인사 소리에 놀라 엄마야! 문을 도로 닫아 버렸다.

이거 사장이 보면 안 되는데. 아니나 다를까 휴대폰으로 CCTV를 보고 있었는지 사장에게 카톡이 왔다. 시위하냐? 적당히 해, 새끼야.

그라인더를 커피 메이커 굵기에 맞춰 두고 100그램을 갈아 손님에게 건넸다. 여자는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법인 카드를 받아 그으면서 그런 것 같냐고 히죽 웃었더니 진분홍색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휘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 매니저, 맨날 아침엔 바짝 얼어 있잖아요. 근데 오늘은 사람이 핏기가 도네.”

“내가 그랬어요?”

“네. 아침에 가게 열면서 뭘 하기에 그렇게 땀을 흘리고 하얗게 질려 있나 했지. 그냥 저혈압?”

“하하, 제가 요즘 피가 잘 안 돌아서요. 어제 운동을 좀 했더니 괜찮은가 봐요.”

“젊은 사람이 운동을 좀 해야지. 자주 해요, 자주.”

운동이 맞긴 맞지? 땀도 흘리고 움직이고 기합도 지르니까. 운동이 맞다. 그 결과 나는 지금 아주 몸이 뻐근하니까.

“글쎄,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라서 아무 때나 하지는 못하고요.”

“체육관이라도 다니나? 그런 데도 잘 말하면 남는 자리에서 하게 해 주던데.”

“잘 얘기해 볼게요, 신 과장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됐어, 내가 무슨. 그럼 며칠 있다 또 올게요.”

그라인더 아래에 떨어진 커피 찌꺼기를 치우면서 운동을 자주하라는 말을 되새겨 봤다. 남세스럽기도 하지. 다음에 또 하자는 말을 들었다. 기약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 입으로 ‘형, 우리 같이 자주 땀 빼도록 해요.’ 그런 말을 어떻게 해. 나는 못 해. 절대로 못 해.

억지로 시키는 사람도 없는데 그 말을 할 때에 내가 얼마나 부끄러워할지를 상황별 시간별로 상상하면서 사장이 따 놓고 간 통조림을 밀폐 용기에 옮겨 담았다. 통조림 따개를 물에 씻어 벽에 걸어 놓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식은땀을 흘리고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던가. 좀 전에 신 과장이 했던 말을 떠올리니 상상으로 훌쩍 날아올랐던 기분이 축 가라앉았다.

“아직도 그러나. 이제 좀 괜찮은 줄 알았더니.”

내가 오픈 준비를 30분 이상 먼저 와서 하는 건 부지런해서가 아니다. 그저 오래 걸리기 때문이었다. 치즈 몇 조각 썰어 놓는 것과 통조림 몇 개 따는 것, 그게 나한테는 항상 어렵기만 하다.

냉장고를 채워 놓고 냉수를 마시면서 왼손을 허공에 들어 앞뒤로 흔들어 보았다. 벌써 15년도 넘게 지난 일인데 한 번의 사고는 내 손가락을 가져간 것뿐만 아니라 내 정신까지 못을 박아 아프게 했다.

***

사고가 난 것은 일곱 살 때였다. 아버지가 그나마 멀쩡히 걸어 다니기라도 하던 마지막 해이기도 했다.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아주 앓아누운 아버지는 2년을 환자로 지내다가 돌아가셨다.

술과 담배, 노름, 여자. 아버지는 모든 것을 했지만 차마 엄마가 버릴 정도로 지독하게 하진 않았다. 여자를 건드리다 들키면 반년 정도는 엄마에게 손찌검을 하지 않았다.

술은 매일 마셨지만 인사불성으로 집 안을 때려 부수는 건 계절에 한 번이었고, 담배는 보루로 사다 놓고 피웠지만 적어도 집에 불은 내지 않았다. 노름은 돈이 없어 잃어 봐야 수십만 원에 그쳤다.

엄마는 한바탕 난리가 난 후 잠잠해진 날들을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이렇게라도 숨 쉴 틈이 있으니 얼마나 좋으니’ 하고 수더분하게 웃곤 했다.

저거밖에 못 하는 불쌍한 사람이다. 차라리 사람이라도 찌르면 감방에라도 넣어 버릴 테고, 수천의 빚이라도 지면 없는 사람으로 내버리면 그만인 것을 외로워서 그러는 거다. 불쌍하지 않니.

내게 동의를 구하는 엄마의 눈이 간절해서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엄마가 불쌍했지 아버지는 하나도 불쌍하지 않았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 매일 같이 집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던 나는 아버지를 피하는 것이 하나의 일과였다. 아버지의 생활은 단순했다. 낮에는 술에 취해 자고 밤에는 술을 마시거나 밖으로 나돌았다.

나는 가급적 아버지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밖에서 해가 질 때까지 놀곤 했는데, 점심을 먹기 위해선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 탓에 밥을 굶기 일쑤였다. 집 안에서는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아버지가 누운 자리를 피해 방구석에서 웅크려 있기만 했다.

아버지가 나를 때리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그는 늘 술로 붉어진 얼굴을 하고 고함을 지르며 좋지 않은 냄새를 풍겼다. 때문에 아버지를 마주하는 것 자체가 싫었다. 아버지는 꼭 심술 맞은 괴물이나 도깨비 같았다. 나는 동화책에서 악당이 나오는 장면마다 크레파스로 얼굴을 짓뭉갰다. 그것들이 모두 아버지처럼 나와 엄마를 괴롭힐 것 같았다.

그때를 떠올리면 구석에서 보던 방의 전경이 선명히 떠오른다. 기우뚱 기울어 있는 옷걸이와 문짝이 너덜너덜한 옷장. 칠이 벗겨진 앉은뱅이 밥상과 꺼멓게 타 버린 누런 장판, 곰팡이가 슬어 불룩불룩 튀어나온 벽지까지. 모든 것이 아버지의 퀴퀴한 냄새에 묻혀 음울해 보였다.

그중 유일하게 내 눈을 잡아끌던 것은 엄마가 가끔 사용하던 재봉틀이었다. 손으로 돌리고 페달을 밟는 오래된 모델로 누가 버린 것을 주워 왔다. 내 옷을 꿰매거나 다른 사람에게 받아 온 일감을 처리하는 데 사용됐다.

집에 들여올 때부터 이미 많이 낡고 칠이 벗겨져 있었지만, 엄마가 까딱까딱 페달을 밟으며 몸을 앞뒤로 느슨하게 흔드는 것을 보고 있으면 눈이 살금살금 감겼다. 달칵달칵. 드르륵. 탁탁.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재봉틀 소리를 들으면서 새우처럼 몸을 말고 누우면 따뜻하고 깊은 물에 젖어 드는 기분이 들었다. 엄지를 입에 물고 빠는 늦된 버릇을 버리지 못한 난 주름이 자글자글해질 때까지 축축한 손가락을 물고서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시절의 달콤한 기억이라고는 그뿐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밖에는 비가 오고 집에는 아버지가 있고 한 칸짜리 집에서 도망갈 곳은 화장실뿐인데, 그나마도 집을 나가 빙 둘러 돌아가야 했다. 화장실엔 거미가 많아서 아버지만큼이나 싫었다.

나는 아버지가 잠든 것을 손을 흔들어 확인한 후 콩닥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살금살금 재봉틀로 다가갔다. 손으로 옆에 있는 바퀴를 굴리자 바늘이 움직이고, 페달을 까딱이자 아래위로 오르내렸다.

엄마가 어떻게 했더라. 눈을 굴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기왕에 만지는 거 제대로 실도 끼워 보고 싶어졌다. 색색의 실이 감겨 있는 반짇고리를 꺼내 하얀 실을 꺼냈다.

손에 꼭 쥐고 실을 끼우는 자리를 이리저리 살피는데 끄으응. 앓는 소리를 내며 잠든 줄 알았던 아버지가 부스럭 몸을 뒤척였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심장이 덜컥거렸다. 너무 놀라 손에 쥐고 있던 실패를 떨어트렸다.

실패는 데굴데굴 굴러 툭, 아버지의 주름진 이마를 건드렸다. 움찔. 아버지의 눈썹이 움직였다. 이어 질끈 감은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큰일이었다. 술이 덜 깬 아버지가 깨어나면 나를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겁에 질린 나는 살금살금 발끝으로 다가가 아버지 이마에 닿은 실패를 손가락으로 집어 올렸다. 숨을 집어 삼키면서 그대로 뒤로 물러나는데 아버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손목이 잡혔다. 아버지의 손바닥은 축축하고 뜨거웠다.

“뭐 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쓰벌, 애새끼라고 하나 있는 게 지 애비 보길 쓰레기 보듯 해. 내가 우스워, 빌어먹을 새끼야?”

“아, 안, 안 그랬어요.”

다리가 오들오들 떨렸다. 실패를 너무 세게 쥐어 손바닥이 뚫릴 것처럼 아픈데도 손가락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 손목을 쥔 채로 몸을 일으켰다. 끄응, 내쉬는 숨으로 역한 술 냄새가 풍겼다.

“솔직히 말해. 너 이 새끼 나한테 뭐 하려고 했어.”

두꺼운 손바닥이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머리가 픽 돌아가면서 몸이 뒤로 밀려 났다. 얼얼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럴 땐 무조건 빌어야 했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울음이 먼저 터졌다.

“아, 아부지, 잘못, 히끅! 잘못, 했, 어요, 흐읍.”

“잘못할 짓은 한 거네. 그치, 새끼야? 어? 이런 것도 새끼라고 내가…….”

수염이 지저분하게 난 아버지의 입매가 길게 늘어나 아래로 휘어졌다.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버지는 아예 팔뚝을 깊게 쥔 채로 내 몸을 흔들면서 연속으로 세 번 뺨을 내리쳤다. 입에서 피 맛이 났다. 눈물이 흘러넘쳐서 방 안 풍경이 흐릿하게 번졌다. 멀미가 났다.

“에라이, 씨발. 눈뜨자마자 씨발, 기분 더럽게…….”

팔목을 팩 뿌리치면서 아버지의 무릎이 턱 아래를 갈겼다. 혀를 씹었는지 뜨끈하고 비릿한 냄새가 입 안에 훅 퍼졌다. 몸이 푹 고꾸라졌다. 반사적으로 손에 닿는 것을 쥐었다. 손에 쥔 것은 미끄러지듯이 빙그르르 돌았다.

“아아아악!!!”

눈앞이 시큰하게 아려 왔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쇠바늘로 만든 전류가 흘러 척추를 달구는 것 같았다. 손에 쥔 것은 재봉틀의 바퀴였다. 무게를 실어 잡은 탓에 주르르 미끄러져 빠르게 돌아간 바퀴는 하필 바늘 아래를 짚은 손가락을 바느질하듯이 턱턱턱턱 깊게 뚫었다.

어린 살갗이 두꺼운 재봉 바늘로 난도질당했다. 바퀴가 멈춘 것은 열 번을 넘게 바늘이 오르내린 후 손가락의 가운데를 뚫고 있을 때였다.

“흐으으, 으으윽. 아, 아부지, 사,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하얗게 시야가 멀어졌다. 필사적으로 미끄러지는 몸을 세우면서 본 것은 어딘가 짜증스러워 보이는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애새끼가 씨발, 번거롭게…….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멀게 들렸다.

몸이 자꾸만 무너져 손을 더듬거리며 버티는 동안 바늘은 여전히 손가락을 뚫고 못 박아 둔 채였다. 버티지 못하고 머리를 쿵, 재봉틀 테이블에 박을 때 엄마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 것은 그 뒤로 이틀이나 지난 뒤였다. 이미 새끼손가락은 없었다. 깨어난 뒤로는 링거도, 주사도 맞을 수가 없었다. 포크만 봐도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고 머리핀만 봐도 거품을 물어서 치료를 할 땐 수면제를 먹고 억지로 재워야 했다.

이제 나는 어린애가 아닌데. 여전히 뾰족한 것을 보지 못한다. 뼈까지 뚫고 들어오던 섬뜩한 감각은 언제 어디서나 되살아나서 내 몸과 마음을 할퀴어 놓는다. 커다란 갈퀴가 등 뒤를 찢어 놓는 것과도 같은 기분이었다.

손이 떨려 주먹을 쥐었다가 펴길 반복했다. 호흡이 떨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식은땀이 났다. 사장의 말대로 나는 영 써먹지 못할 병신이었다. 눈으로 보이는 장애보다 가슴에 박힌 커다란 바늘이 더 문제였다. 너무 무서워서 여전히 나는 그것을 뽑지 못했다.

***

날은 더웠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주르르 땀이 흐를 정도였다. 나는 더운 밤을 걸어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형의 집으로 갔다. 올래? 하는 형의 카톡이 오면 두말없이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속옷 색깔 따위를 걱정했다.

칙칙한 회색만 입고 가는 것을 형이 매일 같은 것만 입는다고 오해할까 봐서 속옷도 몇 개 샀다. 속옷 같은 건 볼 틈도 없이 벗겨지기 때문에 소용없는 짓이라는 건 두세 번 더 겪어 본 뒤에야 알았다.

형의 집은 에어컨으로 식혀 놓아 공기가 서늘했다. 내 몸은 뜨거운데 살갗에 닿는 공기는 시원해서 닭살이 돋았다. 형은 어깨를 문지르는 나를 곧장 욕실로 집어넣고 더운 물을 틀어 놓은 채 옷을 벗겼다.

이제는 호흡도 조절할 줄을 알아서 간신히 형이 키스하는 것에 맞춰 혀를 움직이고 그 손이 몸에 이끄는 대로 형에게 밀착했다. 형은 일부러 길게 키스를 해서 내가 헐떡이며 목을 움츠릴 때까지 두었다가 키득키득 웃으며 목덜미를 빨아 당기곤 했다.

뒤를 길들이는 건 쉽지 않았다. 번번이 손가락으로 한참을 풀어야 했다. 형은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참을성 있게 입구가 부드럽게 풀어지도록 손가락으로 애무했지만 내가 미안했다. 그래서 형에게 연락이 오는 날은 미리 매장 화장실에서 스스로 풀어 두기도 했다. 처음 스스로 길들이고 갔던 날 형은 손가락 두 개를 내벽에 교차로 문지르며 낮게 웃었다.

“혼자 만졌어? 부드럽네.”

“으응……. 조금.”

“착하기도 하지.”

어린아이를 칭찬하듯 이마에 살짝 입술을 눌러 주는 것이 너무 좋았다. 형은 삽입을 할 때 낮은 목울음 소리 같은 것을 냈는데 아픈 와중에도 그 소리에 허리 아래가 저릿하게 울리곤 했다. 그날부터는 매장 사물함에 젤과 콘돔을 두고 다녔다. 형의 연락이 오면 화장실에서 은밀한 곳을 혼자 더듬을 생각에 얼굴부터 붉어졌다.

낮고 침착한 목소리나 평소의 여유로운 행동에 비해 형은 생각보다 많이 밝히는 편이었다. 처음엔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한쪽 가슴이 툭 튀어나올 정도로 세게 빨고 이로 깨물어서 가슴에 밴드를 붙이기도 했다.

유두가 따끔거려서 얼굴을 살짝 밀어 내면 형은 가만히 눈을 내리깔면서 ‘싫으면 안 할게’ 하고 슥 물러났다. 그러고는 아래쪽을 넓히던 손가락을 빼내어 그만할까? 물었다. 그러면 심장이 철렁해서 스스로 형의 머리를 끌어안고서 빨아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렇게라도 닿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형과 가깝게 있을 수 있을까. 그건 어림도 없었다.

“별이는 참 착해.”

땀으로 몸이 흠뻑 젖도록 격하게 움직이면서 형이 귓가에 흘린 목소리는 짜릿하게 몸을 울렸다. 삽입을 한 뒤 형은 다른 사람처럼 거칠어졌다.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몸이 흔들렸고 야동에서나 볼 법한 체위를 했다.

나는 정상위가 보통이고 후배위도 변태 같다고 생각했는데 남자들끼리의 섹스는 다를지도 모른다. 그래도 역시 형이 내 다리를 활짝 벌리게 해 놓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하는 체위는 미칠 듯이 부끄러웠다. 형은 일부러 내 성기를 흔들면서 방향을 맞춰 정액이 얼굴 위로 떨어지게끔 만들기도 했다.

“이제 여기만 만져도 조여. 알아?”

“……짓궂어.”

바짝 선 유두를 혀로 굴리며 형이 낮게 웃는다. 그러고는 슬쩍 허리를 움직여 내 안으로 깊이 밀어 넣은 성기를 문질렀다. 코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몸이 뜨겁고 입이 마른다. 형의 말대로 이제는 손길이 닿기만 해도 허리가 움찔움찔 튀었다.

형이 목덜미를 빨아 당기면 허리를 들썩였고 일부러 느리게 허리 짓을 하면 허벅지 안쪽이 경련하듯 떨렸다. 내 몸의 스위치들을 하나하나 작동시켜 보는 것처럼 형은 곳곳을 더듬어 내 반응을 살폈다.

“으응, 거기는 싫, 으읏, 흑.”

“여기도 느끼는구나.”

팔뚝 안쪽 부드러운 살을 쭉 빨아 이로 살짝 깨물면서 잘게 허리를 쳐올렸다. 엉덩이로부터 짜릿하게 전류가 올라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끈적하고 축축한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척척척 젖은 걸레를 빠는 소리였다.

참지 못하고 입을 열어 신음을 쏟자 밀착했던 몸을 일으켜 세운 형이 내 허벅지를 끌어안고 움직임을 빨리했다. 머리가 흔들리고 시야가 어지러웠다.

“어지러워, 흑. 응, 으흐응. 아, 윽……!”

“그래서 싫어?”

입꼬리 한쪽이 희미하게 비틀리는 것이 보였다. 심장이 작은 바늘로 콕 찔린 것처럼 따끔했다. 그러나 밀려오는 쾌감에 금세 희미한 아픔은 지워졌다.

“안 싫, 어요…….”

강렬한 시선이 위로 쏟아졌다. 손을 뻗어 팔뚝을 쥐는 것을 형은 내버려 둔 채로 묵묵히 허리만 움직였다.

“안쪽에 해도 돼?”

묻는 것과 동시에 울컥 안으로 더운 것이 밀려 들어왔다. 사정을 하느라 허리를 들썩이면서 형은 내 것을 문질렀다. 이미 빳빳하게 서 있던 것은 형의 손길에 쉽게도 사정했다.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을 덮어 숨결을 덧씌운다. 단것을 삼키는 것처럼 형의 입술과 혀를 삼켰다. 나는 그 어떤 섹스의 쾌감보다 키스가 좋았다. 다정한 연인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쉬운 키스 끝에 형은 잘게 버드 키스를 놓으며 내 볼을 꼬집었다.

“넌 키스만 하면 꼭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더라.”

등으로 형의 심장 뛰는 것이 느껴졌다. 섹스를 끝내고 형의 품에 안겨 있는 이 시간이 하루 중에 제일 행복했다.

“형, 형은 진짜 대단한 거 있지.”

“뭐가?”

“요즘은 TV를 봐도 심드렁하다니까. 맨날 잘생긴 얼굴 보니까 배우들도 그냥 그래. 형은 연예인 했어도 광고 찍어서 평생 먹고살았을 거야.”

“그 정도는 아니지.”

“아니야, 진짜라니까? 요즘 나오는 연예인들 다 밋밋하기만 하던데.”

팔다리를 꼬물거려 몸을 돌렸다. 형의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 보니 또 심장이 콩닥거린다. 형이 밀어 내는 기색이 없어 손을 들어 얼굴을 살살 쓰다듬었다.

“봐 봐요. 아몬드 모양 눈이 어쩌고 밤하늘 같은 눈동자가 어쩌고 하는 거 하나도 공감 못 했었는데 형 보니까 알겠어. 가만히 보고 있으면……. 최면 걸리는 것도 같고, 시간이 멈춘 것도 같고…….”

까만 형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법에 걸린 기분이 들었다. 초침이 째깍째깍. 째깍……. 점점 느리게 돌고 시간이 통째로 삼켜지는 것 같다. 평생 보고만 있어도 질릴 것 같지가 않았다. 형의 눈썹을 손가락으로 더듬고 문지르며 멍하니 입을 벌리는데 형이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그래서. 얼굴만?”

“아니이, 그럴 리가.”

내가 형을 처음부터 알아보지 못했던 건 먹고 살기에 바빠 뉴스며 TV며 거의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얼굴은 몰랐고, 광고판에 붙은 그림을 본 적은 있었지만 그게 형의 그림인 줄은 몰랐다.

알면 알수록 곁에 있다는 것이 놀라운 사람이었다. 나는 형과 몸을 섞는 도중에도 이게 꿈이 아닐까 싶어 몰래 허벅지를 꼬집어 보기도 했다.

“나야 아는 게 별로 없어서 그림 볼 줄 모르지만…….”

문이 열린 김에 작업실을 본 적이 있다. 사방이 온통 그림이었다. 우주의 아름다운 폭발, 형의 그림을 평할 때 자주 사용되는 수식어였다. 어두운 색을 덧발라 까맣게 보이는데도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했다. 눈을 감아도 눈꺼풀에 잔상이 어리고 뒤로 돌아도 형상이 꿈틀거리며 머릿속에 살아났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가빴다. 귀까지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형의 그림을 보면 여기가 아파.”

땀이 말라 끈적한 가슴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커튼 뒤에 동그란 빛을 숨겨 놓은 것 같기도 하고, 눈을 감고 태양을 보는 것 같기도 해. 눈이 부신데 볼 수가 없어서 찡하고 저려 와.”

내 말에 형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나 같은 문외한이 말해도 별로겠지?”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하하, 무식한 건 자랑이 아닌데. 볼을 긁적이며 돌아누우려는데 형이 내 손목을 붙잡아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의 점막이 달라붙을 정도로 느린 키스는 점이 박힌 약지와 새끼손가락의 빈자리까지 이어졌다.

“아니, 고마워. 듣기 좋았어.”

눈을 슬며시 감고서 형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반듯한 콧날이 체취가 섞여 있을 내 피부에 문질러지는 것을 간지러운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형의 동그란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조금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내 어리숙함을 형이 귀여워해 준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다정한 마음으로 나를 살피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꿈같은 사람이 곁에 있으니 깨지 않고 오래오래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안일했었다. 몸을 어루만지는 형의 손길이 집요한 것을 나에 대한 마음이라 여겼다. 그건 어쩔 수가 없었다. 원래 첫사랑은 멍청한 거니까.

***

마감을 할 때가 돼서야 형이 테이블에 스케치북을 두고 간 것을 눈치챘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형에게 카톡을 보냈다.

[형 바빠요? 가게에 스케치북 놓고 갔는데 어떻게 할까요? 안 바쁘면 가져다줄게요. ^^]

머신 청소를 마치고 고무장갑을 벗으며 보니 답장이 도착해 팝업이 깜빡거렸다.

[그래, 그렇게 해. 비밀번호 알려 줄게.]

곧바로 여덟 자리의 숫자가 도착했다. 살짝 실망했다. 비밀번호를 알려 준다는 건 집에 없을 거라는 얘기일 터였다. 그냥 미뤄 두었다가 다음 날 건네줄까 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는데 형 얼굴 한 번 더 보자고 욕심을 부릴 수는 없었다.

날씨는 제법 선선해져 밤에는 반팔만 입고는 서늘했다.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가게에서 형의 집까지는 걸어서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다.

형이 미리 얘기를 해 두었는지, 아니면 자주 드나든 것을 알고 얼굴을 익힌 건지 아파트 입구 문은 경비 아저씨가 열어 주었다. 고개를 꾸벅여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한 층, 한 층 올라가는 동안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형을 못 보는 건 아쉽지만 생각해 보니 이것도 좋았다. 형이 없는 집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는 아닐 거다.

사람은 좋지만 생활을 침범하는 건 싫어한다고 형이 직접 말한 적이 있었다. 기대하는 눈으로 형을 깜빡깜빡 올려다보는 내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형은 씨익 웃었다. 너는 방해 안 하니까 괜찮아. 그 말에 3일나 두근거려 잠을 설쳤다는 건 형에게는 비밀이다.

도어락을 열고 형이 하듯이 중지로 틱틱틱 번호를 눌렀다. 탈칵, 덮개를 덮자 삐리릿 소리와 함께 잠금이 열렸다. 안녕하세요오, 개미만 한 목소리로 속살거리며 캄캄한 집 안으로 들어섰다. 등 뒤로 문이 닫히고 현관 등이 켜져 노랗게 나를 비췄다.

현관에 두고 바로 나갈까 하다가 그건 너무 버릇이 없어 보여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부엌 식탁에 올려 두고 작은 쪽지를 남겨 바로 돌아 나올 생각이었다. 듣는 이도 없지만 발소릴 죽여 캄캄한 복도를 걸었다. 손으로 벽을 짚고서 한 발, 한 발 걸어 나가는데 순간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소리지. 형은 없는데. 그러고 보니 현관에 신발이 있었던 것도 같았다. 형이 평소 신고 난 신발을 꺼내 놓은 채로 두는 탓에 신경 쓰지 않았다. 슬금슬금 돌아가 손을 휘적거리자 센서 등이 다시 켜졌다.

낡은 내 운동화를 빼고 신발은 두 켤레였다. 형의 베이지색 단화와 새빨간 스니커즈. 등 뒤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대로 집을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해. 어딘가에서 깜빡깜빡 경고등이 울렸다.

아아—!

이번에는 확실하게 들렸다. 사람의 목소리였다. 입술이 말랐다. 스케치북을 두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과는 반대로 발이 안쪽으로 향했다. 형의 침실에 가까워질수록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졌다. 물기 어린 신음과 삐걱이는 침대 소리, 살을 치대는 젖은 소리.

“아으윽! 으응! 석이 씨, 좋아……. 거기, 응. 거기 찔러 줘. 아아앙, 아, 흐윽! 너무 좋아. 더, 더 세게……!”

침실은 활짝 열려 있었다. 볼 테면 보라는 듯이.

알몸으로 뒤엉킨 남자 두 명이 거칠게 헐떡이며 움직이고 있었다. 아래에 깔린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위에서 움직이는 것이 형이라는 것만이 또렷했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 곱았다. 손과 발이 저렸다.

“으읏, 응. 오늘, 진짜 좋다……. 석이 씨 굶었어?”

“그러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웃음을 흘린 형은 남자에게 몸을 겹쳐 질척한 키스를 했다. 허리를 멈추지 않고서 서로의 숨과 타액을 집어 삼키는 모습은 점액이 묻어 날까 싶을 정도로 눅진하고 야했다. 눈도 깜빡일 수가 없었다. 꽉 심장이 조여서 목구멍으로 숨이 드나들지를 않았다.

가야 하는데. 이러고 서 있으면 안 되는데.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형이 다른 사람이랑…….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스케치북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 누구 왔다.”

아래에서 신음을 헐떡이던 남자가 나를 발견했다. 한 박자 늦게 나를 알아챈 형은 느릿하게 허리 짓을 이으며 남자의 허벅지를 끌어안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별이 왔구나. 늦은 시간에 미안.”

“아, 아니에요…….”

형의 목소리는 숨이 조금 고르지 못한 것을 빼고는 지나치게 평이해서 내가 상황을 착각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고개를 흔들면서 더듬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스케치북을 주워 들었다. 코로 작게 신음을 흘리던 남자는 그런 나를 보면서 땀에 젖은 얼굴로 빙긋이 웃었다.

“저번에 그 애네. 새별, 샛별……. 뭐 그런 이름이었던가?”

“샛별이. 전에 한번 봤지? 인사해.”

“안녀엉, 전에 왜 봤잖아. 기념비적인 첫날밤에.”

남자는 키득키득 웃었다. 노골적인 말에 수치심이 들어 목이 막혔다. 생각났다. 형과 처음 몸을 섞던 날 거실에서 봤던 선글라스를 낀 몸이 호리호리한 남자. 저 사람은 어떻게 우리 얘기를 알고 있는 것일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정을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얼른 끝내자.”

여전히 킥킥 웃으며 나를 보며 눈을 끔뻑이는 남자의 허리를 잡고 형이 빠르게 몸을 치댔다. 남자는 눈에 금세 열기가 고여 형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나 따위는 까맣게 잊은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의 입술을 탐하고 몸을 더듬으면서 공기가 뜨거워질 정도로 질펀한 섹스를 했다.

형의 몸이 움직이고 남자가 뒤따라 흔들릴 때마다 누군가 머리에 망치질을 하는 것 같았다. 멀미가 났다. 눈이 핑글핑글 돌았다. 배 속이 뜨겁고 발바닥은 차가워서 중심을 잃고 넘어질 것만 같았다.

“별아, 바쁜 일 없음 기다려. 저녁 먹자.”

남자의 안에 사정을 했는지 형이 가볍게 몸을 떨었다.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빙긋이 미소를 짓는 것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형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물었기에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형에게 할 줄 아는 대답이 없었다. 나를 보면서도 형의 손은 남자의 성기를 쥐고 흔들고 있었다. 이내 비릿한 정액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속이 매슥거렸다.

“좋았어?”

“응. 오늘은 진짜 좋았어.”

둘은 서로의 코를 부비고 키스를 나누면서 후희를 느긋하게 즐겼다. 가슴을 만져 달라 먼저 허리를 들썩이는 남자를 보고 형은 쯧, 혀를 차더니 입을 크게 벌려 남자의 가슴을 입에 물고 빨았다. 코로 흘리는 교성이 방 안에 가득했다.

“씻고 올게. 잠깐만 기다려.”

자리를 뜨면서도 남자는 형의 목덜미에 입술을 누르고 뒤에서 끌어안아 복부와 가슴을 더듬었다. 결국 다시 발기하고 말았는지 욕실에 들어간 두 사람이 다시 신음을 흘리는 거친 소리가 문밖으로 들렸다.

어둡고 텅 빈 거실에 서서 나는 깊은 구덩이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 맞다. 형은 나를 좋아하지 않지. 좋아하는 건 나 혼자였지. 귀를 틀어막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두 사람의 호흡이 절정에 가까워지는 것을 들었다. 소리도 없이 툭툭 눈물이 떨어졌다.

어라, 울 일은 하나도 없는데 왜 눈물이 나지. 형은 내게 어떤 약속도 해 준 적이 없었다. 그러니 형에게 기대를 하는 것도 절망을 하는 것도 나 혼자만의 일이었다.

울면 안 되는데. 형이 당황할 텐데. 질척거린다고 오지 말라고 하면 어쩌지. 소매로 눈물을 닦아도 자꾸만 눈물이 났다. 시야가 흐려 목이 꽉 메는 데도 욕실에서 흘러나오는 그들의 뒤섞인 신음 소리 사이에 감히 내 목소릴 더할 수가 없었다.

웃는 얼굴로 인사해야지. 손가락으로 눈을 후벼 파듯이 닦아 낸 후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파르르 떨리는 것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웃는 연습을 했다. 이쯤은 아무것도 아닌 쿨한 사람이 되자. 아니, 형은 뭔가를 잘못한 적도 없다. 그저 내가 혼자서 속 좁게 구는 것뿐이니까.

욕실 문이 열리고 다정히 입맞춤을 하면서 두 사람이 나왔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기분을 애써 떨치며 연습한 대로 방긋이 웃었다.

“형, 그렇게 섹시하게 반겨 주는 게 어딨어요. 깜짝 놀랐네.”

낯선 사람에게 키스하던 입술이 내게 다가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입술을 깨물고 싶은 것을 참고 살짝 눈을 감았다가 떴다. 샴푸 향이 코끝을 스쳤다. 떨리는 손을 맞잡아 누르며 입술을 휘어 웃었다. 피가 한 방울씩 빠져나가 바닥에 고이는 듯했다.

“뭐 해, 너도 앉아.”

형의 부름에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있던 남자도 식탁으로 와서 앉았다. 자연스럽게 형의 옆자리로 가서 앉은 남자는 나를 향해 방긋 웃었다. 저녁이란 말에 당연히 형과 둘이 밥을 먹는 식탁을 떠올렸었던 나는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숙였다.

“있지, 샛별 씨. 나 본 적 없어?”

남자는 사뭇 귀여운 말투로 말하며 턱 밑에 꽃받침을 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진짜 몰라?”

“네.”

다소 퉁명스런 말투에도 남자는 조금도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 나 같은 사람을 많이 봐 왔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형과 그 남자 사이에 무척이나 편안한 공기가 흘렀다.

형이 식사를 식탁에 올리는 사이 남자는 수저를 꺼내 늘어놓았고, 찬장에서 컵을 꺼내 물을 따라 놓았다. 형의 자리에 놓이는 컵과 수저는 모두 전용으로 사용하는 것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뚝배기에 덥힌 국을 식탁 가운데에 놓고 형이 자리에 앉자 남자가 입을 비죽 내밀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석이 씨. 나 아직 멀었네, 멀었어. 젊은 애들한테는 좀 먹히는 줄 알았는데 아예 모를 줄이야. 요란한 스캔들까지 각오했더니.”

“스캔들은 무슨. 내가 그랬잖아. 생각보다 너 아직 별로라고.”

형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서 남자는 애교를 부리듯이 이마를 콩콩 찧었다. 남자는 형보다 조금 클까 싶을 정도로 키가 컸고 빈말로도 귀여운 얼굴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박한. 이름은 들어 봤어?”

“……아.”

맞다. 그런 이름의 모델이 있었지. 눈을 끔뻑이며 남자를 쳐다봤다. 박한이 저런 이미지였나. 그는 주로 옴므 라인의 모델이었다. 향수나 정장 같은 것들. 까만 조명에 굵은 선을 강조한 메이크업이 돋보이던 것들이었다.

카페에 오는 여자들이 떠들던 그의 수식어를 하나 떠올렸다. 상처 입은 외로운 재규어. 그럴 리가 없다. 내 눈 앞에 있는 남자는 재규어라기보다 도둑고양이 같았다. 사람 앞에선 순한 척 먹을 것을 얻어 내고 돌아서서는 밤새도록 잠들지 못하게 울어 대는 고약한 고양이.

“뭐, 이름은 들어 봤네요.”

그의 이름을 모를 리도, 그의 광고 하나쯤 못 봤을 리도 없는데 대답이 멋대로 퉁명스럽게 삐져나왔다. 형에게 웃는 얼굴을 만들어 내는 것과 형과 체온을 나누었던 남자를 대하는 것이 같을 수는 없었다. 그나마 교성을 흘리던 때와 평소의 목소리가 다른 것이 다행이었다. 신음을 내던 간드러진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면 나는 그의 몸을 밀쳐 버리거나 귀를 틀어막고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석이 씨는 요리도 참 잘하는데 말이지,”

계란찜을 떠 크게 한입 머금은 박한이 김을 후후 불어 내면서 말을 이었다.

“취향도 참 뷔페야. 다양하게도 즐긴다, 증말.”

그는 자기가 꺼낸 말이 꽤나 유쾌했는지 식탁을 두드리면서 한참을 웃었다. 형은 얌전히 식사를 하면서 그의 입에 물컵을 대 주었다.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치며 남은 웃음을 마저 쏟아 낸 그는 불쑥 내게 손을 내밀었다.

“실은 내 이름 소속사에서 멋대로 지어 준 거고 본명은 박하늬. 이름 귀엽지?”

“저는…….”

“샛별이라며. 샛별. 난 이름이 귀여운 사람이 좋더라. 반가워.”

조금 전까지 티타임이라도 가졌던 것 같다. 그는 가장 은밀한 행위를 들킨 것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봐도 소용없다는 자신감일까, 알아서 떨어져 나갈 거라는 학습에 의한 행동일까.

“반갑……습니다.”

마주 잡은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눈을 들어 그를 봤을 때, 그는 생각보다도 훨씬 앳된 얼굴로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

속이 너무 안 좋았다. 결국 식사를 하다가 말고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기 커버를 올리고 쭈그려 앉자마자 배 속이 뒤집히면서 삼킨 것들이 목구멍으로 치솟았다. 먹은 것을 전부 게워 내고 신물에 목이 따끔하게 아플 때까지 헛구역질을 했다.

물을 내리고 지저분하게 묻은 것들까지 닦아 낸 다음 몸을 일으켰다. 혹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차라리 배탈이 난 걸로 하는 게 나았다. 형이 만들어 준 것을 게워 냈다고 얘기할 것이 벌써 속상해서 눈이 시큰거렸다.

세면대의 수도를 열어 얼굴과 입을 씻어 냈다. 눈이 벌겋게 충혈 되어 있었다. 머리카락을 빗어 내려 앞머리로 가려도 하얗게 질린 얼굴에 붉은 눈만 선명했다. 길게 찢어진 못난 눈, 남자답지 못한 동그란 입술. 선이 또렷하지 못한 단조로운 얼굴을 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형과 박한이 나란히 앉은 모습은 꼭 그림 같았다. 사진으로 찍어 두면 방에 놓을 액자용으로 아쉽지 않을 그런 조합이었다. 그 옆에 내 얼굴을 덧붙여 보다가 너무 말이 안 되는 그림이라서 조소가 나왔다.

박한은 나를 보고 형의 취향이 뷔페라고 했다. 비싼 돈을 내고 뷔페에 가면 사람들은 줄을 서서 스테이크를 먹고 잘 먹어 보지 못한 이국의 요리를 건드려 본다.

나는 아마도 뷔페의 구석에 놓인 드링크 바의 콜라쯤 되지 않을까. 양옆으로는 라임 잎을 띄운 에이드와 직접 즙을 낸 주스가 놓여 있어서 헛배가 부를까 컵을 가져다 댔다가도 두 모금쯤 마시고 컵을 밀어 놓는 싸구려 음료.

형은 먹어 본 게 많아서 입이 텁텁했을 수도 있고 뷔페값쯤은 아깝지 않아서 아무렇지 않게 컵을 콜라로 가득 채웠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스테이크가 있고, 누군가 한잔쯤 와인을 권한다면 그때도 콜라를 마시려고 할까.

“쓸데없이 이게 무슨 생각이야.”

꼬리를 무는 생각들에 피식 웃어 버렸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다고, 내가 이런 식으로 칙칙한 생각을 하는 건 형에게는 상상도 못할 일일 것이다. 생각 밖이고 상식 밖이었다. 뷔페에서 먹은 음식을 셀 때 ‘콜라’를 얘기하는 사람을 없을 테니까.

잡생각을 길게 한 덕인지 눈의 충혈이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세수를 하느라 비눗물이 눈에 들어갔다고 한다면 어찌 넘길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내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부엌에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났다.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가 ‘오래 기다렸죠?’ 하고 짠 나타나 하하, 웃기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석이 씨, 원래 취향이 그랬어?”

“내 취향이 뭐. 내가 취향이란 게 있었나.”

하긴, 그랬지 참. 박한이 무릎을 치면서 웃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갈 거 같은데?”

“뭘.”

“으음—”

“왜 그렇게 봐.”

“좀 수상해서.”

더 엿들어서는 안 될 것 같은데도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심장 소리로 귀가 시끄러운데도 둘의 목소리는 선명했다. 박한은 조금 뜸을 들이다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목소리를 낮췄다.

“이번에는 나한테 언제 넘길 건데?”

“……글쎄.”

가슴이 터질 것 같다. 방망이질하는 심장 소리로 정신이 아득했다.

“저, 저기!”

오른발을 먼저 딛었는지 왼발을 먼저 딛었는지 모르겠다. 무작정 앞으로 걸어 나가서 뻣뻣한 얼굴을 경련하듯 움직여 웃었다. 둘은 대화를 딱히 숨기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지 표정 변화 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저, 속이…… 영 안 좋아서요. 저, 저기……. 머, 먼저 가도 될까요?”

“아직 밥 반도 안 먹었는데. 별아 많이 안 좋아?”

형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거짓말을 하는 기분에 딸꾹질이라도 날 것 같아서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속이 안 좋은 건 맞지. 거짓말은 아니지. 속이 좁아서 배배 꼬인 것뿐이지만.

“아, 그럼 나도 갈래, 나도!”

박한이 손을 번쩍 들면서 눈을 깜빡거렸다. 화장을 지워 놓은 탓인지 제법 남자답긴 해도 젊은 또래 애들에게서 묻어나는 싱그러움이 느껴져 애교 섞인 행동들이 이상하지는 않았다.

“저, 먼저 갈게요.”

“같이 가요, 샛별 씨. 내가 데려다줄게. 몸도 안 좋다며.”

“괜찮은데…….”

“괜찮으면 나 심심하니까 같이 가요.”

진퇴양난이었다. 얘 왜 이래? 당황스러워하는 것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박한은 깔깔 웃으면서 싫은 티가 너무 난다며 타박 아닌 타박을 했다.

“그런 거 아닌데…….”

“그런 거 아니면 같이 가자고.”

“그렇게 해. 쟤 운전은 잘해.”

그새 식사를 마쳤는지 수저를 내려놓은 형이 박한에게 동조했다. 마음 같아서는 맞아요, 나 저 사람 싫어요! 외치고 형에게 찰싹 달라붙어 그의 번듯한 낯짝을 밀어 내고 싶었다. 하지만 형에게 늘 착하고 바르고 심지어 쿨하고 유쾌한 사람인 척 굴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나는 하하 웃고 말았다.

박한은 순식간에 선글라스를 끼고 모자를 푹 눌러쓰더니 내 쪽으로 달려와 어깨동무를 했다.

“그럼 신세 좀 질까요?”

“고럼 고럼. 나한테 맡겨 봐.”

박한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매끈한 입매를 휘어 씨익 웃었다.

“혀, 형. 그럼 저 가요.”

“그래. 오늘은 괜히 수고했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박한이 주차장에서 차를 빼러 먼저 내려가 버리고 형과 둘이 남았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형이 낯설고 어색했다. 쭈뼛거리며 몸을 돌리는데 손목을 붙잡혔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사장이 또 뭐라고 한 거야?”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면서 형이 가까이 다가왔다. 허리에 팔을 둘러 나를 가볍게 당긴 형은 뺨과 귓가를 스쳐 내려온 손으로 내 턱을 들어 올렸다. 가벼운 입맞춤 뒤에 뜨거운 혀가 밀고 들어와 입 안을 느긋하게 훑어 냈다. 그만 스르르 눈이 감기고 몸에 힘이 빠졌다. 눈두덩이가 뜨끈하게 달았다.

어떡하면 좋아. 상황과 맥락에도 관계없이 형이 나를 만져 주는 것이 너무 기뻤다. 단정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순간이나마 나를 걱정하는 빛으로 물드는 것에 지조 없는 심장이 금세 좋다고 발딱발딱 뛰었다.

“그런 거 아니야.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런가 봐.”

가슴이 떨려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이 바닥을 헤매는데 형의 손이 어깨를 감싸며 나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는 손길이 다정했다. 형은 기본적으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다만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다정한 거다.

“그럼 다행이고. 눈도 빨갛고, 얼굴도 창백해. 아픈 것 같아서 걱정했어.”

머리카락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는 형의 입술이 아쉽다. 어리광을 부리듯 형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서 머리를 부볐다. 그대로 어기적거리면서 현관까지 걸었다. 형은 직접 문을 열어 주고 팔을 놓지 못하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낯가림이 심할 줄은 몰랐네. 다음부턴 다른 사람 있을 땐 미리 얘기해 둘게.”

깍지를 꼈던 손가락에 힘이 스르륵 풀렸다. 고개를 숙인 채로 두어 걸음 물러나 세게 입술을 씹었다가 놓았다. 뒷짐을 지고 손등을 꼬집었다. 어딘가 따끔하니 아프지 않으면 자꾸 다른 생각이 끼어들어 얼굴이 흐려졌다.

“으응,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저녁 잘 먹었어요.”

손을 흔들면서 뒷걸음질 쳐 형의 집을 벗어났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마자 마구잡이로 눈물이 쏟아지는데 멈출 수가 없었다. 팅,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손등으로 허겁지겁 눈물을 닦아 내고 열리는 문의 건너를 응시했다. 그곳엔 겸연쩍은 얼굴로 고개를 숙인 박한이 서 있었다.

차 안은 조용했다.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매끈한 차였지만 관심도 없었다. 박한은 시동을 걸고 내 안전벨트를 챙기고 기어이 손에 휴지 뭉치를 쥐여 주었다.

“집이 어디야?”

“……근처에 대충 내려 줘요. 알아서 갈게요.”

“에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안 그럼 우리 집 데려간다?”

고개를 팩 돌려 노려보니 박한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거울에 얼굴을 비춰 딴청을 부렸다. 짜증 내기도 지쳐 시트에 몸을 푹 묻고서 눈을 감는데 박한이 말을 걸었다.

“너무 그러지 말지? 누가 보면 내가 장석 애인이라도 된 줄 알겠네.”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알면 됐고. 나는 그냥. 음,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설명 안 해도 돼요.”

종알거리는 것이 시끄러워 아예 창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박한은 내비게이션을 켜고 끈질기게 우리 집 주소를 물어 목적지를 설정했다.

“나는 몸이 외로운 사람이고, 장석은…… 그냥 미친놈이고.”

“형 미친 사람 아니거든요!”

벌떡 몸을 일으켜 소리를 지르니 박한이 과장스럽게 귀를 틀어막는 시늉을 하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엄마야, 깜짝이야.”

내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숨까지 들썩이면서 노려보는 것을 빤히 보다가 또 장난처럼 씨익 웃는데 그 얼굴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약이 올라 귀라도 잡아 뜯어 놓고 싶었다. 모성애를 불러일으킨다느니, 상처 입은 재규어니 했던 놈들 다 나와. 그거 다 쌩 구라야. 이놈은 고양이도 아니고 그냥 여우다.

“그래, 미친놈은 아니지. 미친놈이고 싶은 거지.”

박한의 시선이 먼 곳을 향한다 싶더니 창밖의 풍경이 움직였다. 차가 출발하는지도 몰랐다. 비싼 차여서 그럴 거다. 어둑한 조명 아래 앞을 응시하는 박한의 옆모습이 그럴듯해서 괜히 심통이 났다.

“자기도 뭐가 문젠지 모를걸.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장석, 걔는 좀 이상해. 같이 노는 나도 미친놈이지만.”

어깨를 으쓱해 보인 박한은 핸들을 잡지 않은 손으로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들고 보니 초콜릿이었다.

“그거 다크 초코야. 살 안 쪄. 나 살찌는 거 먹으면 매니저한테 엄청 혼나거든.”

“혼자 드세요.”

“근데 샛별 씨는 몇 살이야? 나랑 비슷해 보이는데.”

“스물넷.”

“와, 장석 그 새끼 어디서 영계들은 척척 물어 와. 하여간 돈발, 얼굴발. 더럽다, 더러워.”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초콜릿을 입에 까서 넣었다. 달기보다는 썼다. 쓴 것을 입에 굴려 말랑할 정도로 녹이고 나니 그제야 단맛이 감돌았다. 입천장에 붙여 놓고 혀를 굴려 느리게 녹여 먹는데 박한은 자꾸 시키지도 않은 말을 꺼내면서 내 주의를 끌려고 했다.

“우리 친구 하자. 나 다섯인데 한 살쯤 깎지 뭐. 응? 하늬야, 하고 불러 봐 봐. 좀 닭살인가?”

“내가 왜요.”

“에이, 친구 하자. 나 친구 없어서 그래.”

친구는 무슨 친구. 도무지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는 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나랑 형을 공유해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관계가 단단해서 나를 꼬드기는 건지, 형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건지 가늠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샛별 씨, 장석 진짜 좋아해?”

뜨끔. 심장을 꼬집힌 것처럼 따끔거렸다.

“그러는 그쪽은요?”

“그쪽이라니, 정 없게. 나도 장석 좋아해! 근데, 애절하고 절절하고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좋은 거야. 딱 그 정도야. 나한텐 워낙 고마운 사람이라서.”

장난스럽기만 했던 박한의 얼굴에 얼핏 그림자가 스쳤다. 잘못 봤나 싶어 고개를 빼는데 박한이 입술을 비죽 내밀면서 성을 냈다.

“그러니까 하늬라고 부르라니깐? 응? 샛별아. 우리 친구 먹자.”

그림자는 무슨. 저놈은 아무 생각도 없는 게 틀림없다. 시트에 몸을 푹 묻고 눈을 질끈 감아 고개를 돌렸다. 박한이 키득거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박한은 정말 운전을 잘했다. 눈을 감고 있으니 꼭 얼음을 미끄러져 나가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멈춘 것도 모르게 고집스럽게 눈을 감고 있는데 귓가에 숨결이 느껴졌다. 눈을 반짝 뜨니 붕어처럼 주둥이를 쭈욱 내민 박한이 눈을 깜빡였다.

“어라, 자는 거 아니었어?”

“안 잤거든.”

“데려다줬으니까 요금으로 뽀뽀 한 번만 하자.”

“넌 친구랑 뽀뽀하냐?”

“친구 해 줄 거야? 난 또 나랑 친구 안 하면 섹파 하자는 줄……. 읍!”

쓸데없이 지껄이는 주둥이를 손바닥으로 퍽 밀어 내고 차에서 내렸다. 허둥지둥 따라 내린 박한이 발을 종종거리며 삐쳤냐고 묻는다. 귀찮기도 어지간히 귀찮은 녀석이었다.

“안 삐쳤어. 얼른 가라. 바, 박하늬…….”

마지막에는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소리를 냈는데 용케도 알아들었는지 하늬는 손을 빨빨 흔들면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칭구야, 잘가 칭구야!’ 혀 짧은 소리로 빽빽거리는 것을 손을 휘저어 내쫓아 버리고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히며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주름 사이사이 피곤으로 그늘진 얼굴을 하고 가는 숨을 내쉬며 웅크려 누워 있었다.

“사람이 자면서도 이렇게 기를 못 펴고 그러냐.”

엄마의 손과 발을 펴서 이불 속에 넣고 손을 깊숙이 넣어 가만가만 다리를 주물렀다. 그러고 보니 잠든 엄마의 얼굴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요즘은 형을 쫓아다니기 바빠서 엄마 몸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약은 잘 챙겨 먹는지, 발작은 없었는지, 힘든 일은 없는지, 나 아니면 물어 줄 사람도 없는 이를 두고 바깥에 홀랑 정신이 팔려 있었다.

“엄마, 미안.”

엄마는 고질적으로 심장이 좋지 않았다. 가끔 발작도 하고 아파서 끙끙거리기도 하는데 수술을 하려면 돈이 아주 많이 들었다.

아끼고 아껴 통장에 모두 쏟아부어도 좀처럼 모이질 않아서 노가다를 뛰기도 했다. 엄마가 거칠고 뻣뻣해진 손을 내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고생스런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울먹이지만 않았다면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의 자신은 스스로가 봐도 한심하다. 저녁까지 일을 늘려 볼까 고민하다가도 형을 만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지레 포기하려 들었다.

엄마보다 형이 좋은가? 그렇게 물어보면 그건 아니라고 즉답이 나와야 맞는데 홀로 속마음으로 생각하는 것도 망설여졌다. 진짜 좋아해? 하늬의 물음을 스스로에게 되새겨 봤다.

형의 무엇에 반했더라. 근사한 외모에 반했을까? 아니, 그건 아니다. 그랬다면 첫눈에 반했어야 했다. 내 손을 잡으며 웃어 주었을 때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꼈지만 나는 그 전부터 이미 형을 좋아했던 것 같다.

형이 먼 곳을 바라볼 때 그 주위에 감도는 특별한 분위기가 시선을 잡아끌었던 것을 기억한다. 텅 빈 페트병에 후후, 바람을 불어 넣으면 휘파람과도 같은 구슬픈 소리가 났다. 웃거나 울거나 그 어느 쪽도 아닌데도 형에게선 때때로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쓸쓸해 보였다.

그림을 그릴 때 코를 살짝 찡그리는 버릇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괜히 얼굴이 홧홧해졌었다. 형의 비밀을 엿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형은 코를 찡그려 집중하다가 탁 얼굴에 긴장을 풀고 눈꼬리를 아래로 내려뜨리며 희미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작은 스케치북 안에서 대단히 아름다운 것이라도 본 것처럼 까만 눈이 반짝였다. 아름다웠다.

형에 대한 내 마음은 결국 아름다움으로 귀결되곤 한다. 형의 기다란 손가락도,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도, 밤처럼 까만 머리와 눈동자도, 모두 아름답다.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뛰고 입이 말랐다.

좋아한다는 말 외에 어떤 말로 이 마음을 이름 지을 수 있을까. 아주 작은 ‘좋아함’의 불씨가 생기면 사소한 불꽃이 튀어도 그 마음은 점점 자라나기 마련이다. 하물며 곁에 있는 것이 꿈만 같은 상대라면야 없던 불씨가 생기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는걸.

엄마의 옆에 누워 눈을 감았다. 형이 다른 사람을 품에 안던 것이 자꾸만 떠올라 가슴이 꽉 막히고 숨이 괴로워졌다. 그래도 형을 생각하는 나를 멈출 수가 없다. 한심하다는 걸 알고 있어도 맘처럼 되질 않는다.

엄마 미안해. 조금만, 조금만 더 바보처럼 살게요.

***

형과의 관계는 변한 것이 없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형이 부르면 가서 몸을 섞었다. 나를 부르지 않는 날에도 괜히 형의 집 앞에 쪼그려 앉아 새벽까지 머무르던 날도 며칠 있었다. 아파트로 들어가는 모든 남자들이 형의 상대인 것 같아서 홀로 속을 끓이고 새벽마다 숨 죽여 울었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별아, 요즘 일이 많이 힘들어?”

막 침대에 누워 형을 올려다보는데 걱정스런 눈빛이 쏟아졌다.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끔뻑이는데 형의 손가락이 눈꺼풀 위로 올라와 가볍게 쓰다듬었다.

“눈이 많이 부었어. 피곤해 보여. 혹시, 억지로 오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나도 좋아서 오는 건데.”

히쭉 웃으면서 형의 손을 잡아 뺨을 부볐다. 형은 조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형이랑 만나면 오히려 피곤이 싹 달아나는데? 형은 나 보면 피곤해지고 그래요?”

형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그 말이 하고 싶었지만 꽉 물어 미소를 지은 입술 안으로 감추었다. 형의 손가락이 가슴과 복부를 더듬어 내려와 허벅지 안으로 미끄러졌다. 젤을 발라 미끈해진 안으로 손가락을 넣고 익숙하게 문질러 왔다. 조금의 자극에도 금세 몸이 달아 발바닥을 이불에 비비며 안달 내는 것을 형은 웃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나도 너랑 하는 거 좋아해.”

두 다리가 형의 어깨에 달랑 걸쳐졌다. 평소보다 급하게 삽입한 형은 틈을 주지 않고 곧장 허리를 흔들었다. 깨물던 입술이 퉁기듯이 풀리고 형은 뜨거워진 내 입술을 빨면서 옆구리를 쓸어내렸다. 살갗에 닿는 모든 손길이 예민하게 느껴졌다.

“너랑 하면, 기분이 좋아.”

형의 말에 나는 단숨에 오르가즘에 오르는 듯했다.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형의 입술이 내 발등에 올라앉았다. 간지러운 감각이 짜릿하게 핏줄을 타고 온몸으로 번졌다.

“별아, 얘기해 줘. 뭐든, 아무거나.”

“하으윽, 으, 읏! 형, 아, 앞이 캄캄해요.”

내 말을 경청하듯 눈을 지그시 감고서 형은 내 안으로 깊이 들어왔다 나가길 반복했다.

“흐윽, 그, 그러다가 갑자기 으흐응. 아, 여기저기서 밝은 게, 흣! 으흡, 바, 반짝거려.”

꼭, 형의 그림처럼.

형과의 섹스는 머리가 타 버릴 것처럼 머릿속을 가득 채워 뜨겁게 만들었다. 밝기보다는 어두웠고 까만 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는 것처럼 불시에 곳곳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멀어 버릴 것 같다.

절정에 올라 들썩이며 흠칫거리는 내 허리를 붙잡고서 형은 오랫동안 말을 고르듯 입술을 혀로 축이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나보다 낫다.”

희미하게 중얼거린 목소리를 들었다. 형의 손이 땀으로 젖은 머릴 쓸어 넘긴다. 이마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형의 손목시계다. 무엇을 하든 형이 시계를 벗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두 번쯤 물었다가 대답하길 원하는 것 같지 않아 그만두었다.

“다음에 또 하자.”

이마와 이마가 닿아 마주 부벼졌다. 형은 목을 울려 낮게 웃으면서 가벼운 키스를 몇 번이나 떨어뜨렸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세게 끌어안고 싶었지만 그의 등에 두른 내 팔은 힘없이 껴안는 시늉뿐이다.

꼭 끌어안고서 그러면 나랑만 할까요, 물으면 형은 어떻게 대답할까. 대답을 상상해 보다가 아찔해져 눈을 감았다. 감긴 눈꺼풀 위로 형의 숨결이 닿았다.

네 몸은 따뜻해서 좋아. 내가 망설였던 것을 간단하게 해치우며 형의 두 팔이 나를 세게 끌어안았다. 자꾸만 염치없는 희망이 불쑥 솟아올라 가슴에 난 작은 흠집을 두드린다. 코로 형의 체취가 물씬 풍겼다.

아직은 이걸로 만족하자.

형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웃는 얼굴을 연습했다. 간지러워. 형의 웃는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너무도 쉽게 진짜 웃음이 났다.

***

볼일이 있으니 먼저 집에 가 있으라는 형의 말에 일을 끝마치자마자 형의 집으로 향했다. 드물게도 작업실의 문이 닫혀 있었다. 잠긴 것은 아니어서 슬쩍 열고 들어가 안을 둘러보았다.

형은 작업을 할 때 일부러 나를 옆에 앉혀 놓기도 했었다. 생각나는 게 있으면 뭐든 말해. 참고할게. 형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지만, 부끄러운 말도 쉽게 꺼낼 수 있는 침대 안을 빼고는 형의 그림에 대해선 입을 꼭 다물었다. 아는 것도 없는 내가 말도 안 되는 말들을 지껄이는 것을 형이 귀엽게 봐주고 있는 것일 터였다.

새로 그린 그림은 없었다. 지난번에 그리던 그림에는 암녹색 물감이 두껍게 덧발라져 있었다. 완성되지 않은 그림이었지만 어딘가 가슴이 찌르르하고 아파 왔다.

“야, 너 거기서 뭐 해.”

문틈으로 낯선 얼굴이 보였다. 남자는 방금 욕실에서 나온 참이었는지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있었고 속옷도 입지 않은 나신이었다. 목덜미에 붉은 자국이 하나 보였다. 내가 옷으로 가린 자리에 가득히 피어 있는 것과 동일한 자국이었다. 섹스를 할 때마다 서너 군데씩 자국을 남기는 탓에 형을 만난 뒤로 대중탕에도 가질 못했다.

“저기, 누구…….”

“너 신참이구나?”

남자가 나를 아래위로 훑으며 입가를 비틀어 웃었다. 알 만하네.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남자는 삐딱한 눈으로 나를 흘깃거렸다.

“나와, 멍청아. 거기 들어가면 안 돼.”

“네? 왜, 왜요?”

“너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오빠랑은 얼마나 됐어?”

남자가 사용한 오빠라는 단어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자가…… 맞다. 분명히 달려 있었다. 내 눈이 바보가 아니면 저건 고추가 맞는데.

“오빠 만날 때 철칙이잖아, 이년아.”

내가 답답했는지 남자는 문을 반만 열고 들어와 내손을 잡아끌어 밖으로 끄집어냈다. 문을 닫고 두 팔로 내 어깨를 밀친 남자는 마뜩찮은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뭐 어쩌라고. 내가 너 도와주는 거잖아. 오빠 작업실 보는 거 엄청 싫어해. 걸리면 너 여기 발도 못 들여. 그런 식으로 쫓겨난 년들이 한둘인 줄 알아?”

그렇지만 형이 먼저 작업실을 보여 줬는데. 남자가 하는 말에 대꾸도 못하고 눈만 끔뻑였다. 남자는 수건을 목에 두른 채로 방바닥에 널브러진 옷들을 하나씩 주워 입었다.

“이만한 월척이 어디 있어. 섹스 잘하지, 지랄도 안 부리지. 용돈도 후하게 주지, 잘생겨서 트로피로 딱이고. 오빠랑 자면 네 퀄리티도 오르는 거야. 앞으로 다른 놈들도 너 먹으려고 안달 낼걸?”

뭐, 오빠가 너 같은 애랑 왜 노는지는 진짜 이해 못하겠지만.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아까와는 다른 흥미가 어린 눈으로 나를 훑었다.

“너 뭘 그렇게 잘하길래 오빠랑 자는 거야? 펠라 잘해? 아님, 보기랑 다르게 허리를 잘 돌리나?”

노골적인 말들에 얼굴만 새빨갛게 물들이면서 우물거렸다. 손을 꼼질거리면서 뚫어져라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남자의 말들이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남들은 형이랑 자면 용돈을 받나? 내가 형과 저녁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밥값이나 택시비라도 받는 걸까.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웃거리는데 삑삑삑 현관에서 소리가 들렸다. 형이었다.

형은 거실에 마주 서 있는 남자와 나를 번갈아 보다가 반가워 어깨를 들썩이는 나를 두고 남자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너 왜 아직도 여기 있어. 일어나면 바로 가라니까.”

평소보다 형의 말투가 사나웠다. 오늘 나쁜 일이라도 있었나. 전시회 관련해서 사람들을 만난다고 했는데 일이 원하는 대로 안 됐을지도 모르겠다. 형이 그들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몇 번 들었다.

“미안, 미안. 가려고 했지. 근데 오빠 정력도 좋아. 나랑 어제 밤새 해 놓고 오늘은 또 다른 년이야?”

“나가.”

“말 안 해도 갈 거야, 가.”

살짝 겁이 날 정도로 차가운 형의 태도에 벽으로 붙어 섰다. 아무렇지도 않게 작업실에 드나들던 일이 갑자기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남자의 말대로 형이 싫어하던 일이면 어쩌지. 내가 워낙 멍청해서 예의상 물어본 권유를 착각했을 수도 있으니까. 얼굴이 화끈거렸다.

“별아, 왜 그래.”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형이 내게 물었다.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젓는데 상황이 아니꼬웠던 남자가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나를 손가락질했다.

“오빠, 관리 좀 잘해. 쟤가 아무 데나 쑤시고 다니잖아. 그림에 손이라도 대면 어쩔 뻔했어? 옛날에 어떤 미친년이 들고 튀려고 했던 거 기억 안 나? 저거 한 장에 얼마짜린데. 딱 봐도 생긴 것도 없어 보이는구만.”

“무슨 소리야.”

눈매가 날카로워진 형의 눈빛이 남자를 향했다. 엄마야, 나 진짜 잘못했나 봐. 형이 그런 얼굴을 하는 건 처음 봤다. 눈매가 곱고 예쁘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형의 눈에 불쾌함이 넘실거렸다. 눈이 매섭게 변하고 입매가 단단히 굳었다. 남자도 살짝 기가 죽어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아니, 나는…… 쟤가 버릇없이 작업실을 휘젓고 다니니까. 그게, 신경이 쓰여서…….”

형은 눈을 두어 번 감았다 뜨며 얼굴의 긴장을 풀고는 가볍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여전히 평소보다는 무섭지만 불쾌감이 지워진 눈빛이 나를 향했다. 이제 혼날 차례인가 하고 움츠러들려는 어깨를 애써 펴면서 눈만 올려 떴다. 형은 그런 나를 보면서 순식간에 얼굴을 풀어 픽 웃더니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쓰다듬었다.

“별이는 괜찮아.”

“괜찮……아요?”

“응.”

엄지와 검지로 내 턱을 살짝 쥐고서 얼굴을 더듬어 보던 형이 고개를 돌렸다. 입술을 질끈 깨문 남자의 벌게진 얼굴이 보였다.

“그러니까 너는 가.”

형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남자는 붉어진 눈을 하고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고 형에게 내밀었다.

“차비 줘.”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 형은 척 보기에도 절대 차비라고 할 수 없는 지폐 다발을 그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됐지? 연락하지 말고.”

남자가 가는 것도 돌아보지 않고 형은 내 어깨를 감싸 안고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퉁퉁퉁, 거친 발소리 뒤에 쾅 하고 문이 닫혔다. 형은 가볍게 혀를 차면서 천박한 새끼, 하고 중얼거렸다.

“혀, 형……. 제가 오늘도 타이밍 별로였어요?”

눈치를 보다 간신히 꺼낸 말에 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날 바라봤다.

“하하, 내가 좀 타이밍이 별로다. 맨날. 나 왜 이렇게 눈치가 없지?”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눈동자만 또르르 굴려 형을 보는데, 형이 입가에 손을 대고서 소리 낮추어 웃었다.

“다른 사람 있을 때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했었잖아.”

웃는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형은 허리를 살짝 숙여 나를 정면에서 끌어안았다. 내 어깨에 얼굴을 톡 떨어뜨리고는 어리광을 부리듯이 코를 부볐다. 피곤한 일이 있었나 보다. 손을 들어 등을 토닥거리자 잠꼬대처럼 작게 앓는 소릴 내며 형의 손이 스르르 내려와 엉덩이를 쥐었다.

“별아, 나 오늘 좀 피곤해.”

“그럼 잘래요? 나 갈게. 어서 자요. 많이 힘들었나 보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평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나한테까지 이러는 걸 보면 일이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진 모양이었다. 얼른 돌아가는 게 좋겠다 싶어 어깨를 살짝 밀어 내는데 형은 오히려 나를 세게 끌어안으면서 엉덩이를 쥐었던 손을 움직여 안쪽을 꾹 눌렀다. 허리가 움찔 튀었다.

“피곤하니까, 해야지.”

귀를 가볍게 물었다 놓으며 형이 웃었다. 물기 어린 웃음소리가 등줄기를 타고 찌르르 울렸다.

“저, 저녁은 먹었어요? 배 안 고파요?”

당황해서 얼떨떨하게 튀어나오는 말에 진지한 목소리가 답했다.

“먹을 거야. 별이 너.”

그 자리에서 홀랑 벗겨져서 선 채로 몸을 섞었다. 형에게 한쪽 다리를 들려 삽입당하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는 나를 벽에 세우고서 형은 다소 성급하다 싶을 만큼 움직였다. 딱딱하고 차가운 벽에 곧추선 성기가 문질러지는 감촉은 몹시 이질적이어서 숨을 헐떡이다 평소보다 이르게 사정하고 말았다.

침대로 눕혀진 후에는 더 집요하고 끈질긴 섹스가 이어졌다. 흐트러진 꼴이 얼마나 우스울지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터라 늘 완전히 물렁해지지 않도록 조심하곤 했는데 전혀 소용이 없었다. 형은 내가 울면서 매달려 스스로 허리를 흔들 때까지 오랜 시간을 들여 애를 태웠다.

어떻게든 몸부림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감각에 끙끙거리며 형의 몸짓에 맞추려는 날 내려다보면서 형이 몇 번이나 혀로 붉은 입술을 축이고 매끄럽게 웃는 것을 보았다. 생각만 해도 쪽팔려. 앙앙대는 꼴이 얼마나 웃겼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얼굴을 감싸 쥐고 몰래 주먹으로 침대를 두드리는데 형이 어깨를 붙잡아 돌렸다. 등을 보이고 있던 것을 정면으로 마주 보자 한결 느슨해진 형의 얼굴이 보였다. 곧장 내 턱을 붙잡아 키스를 하는 것에 다리를 배배 꼬면서 등을 둥글게 말았다. 얇은 이불의 감촉이 맨살에 바스락거리는 것도 선명했다.

형의 손이 복부를 쓸고 올라와 옆구리를 어루만졌다. 겨드랑이 아래까지 기어오른 손바닥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가슴을 문질렀다. 흐으, 비음을 쏟으며 눈꺼풀을 떠는데 팔과 다리로 몸을 얽어매면서 형의 품 안으로 쏙 안겼다.

“오늘은 좀 힘드네.”

“일이 잘 안 됐어요?”

형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형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 목소리가 웅웅 울리는 탓에 꼭 형이 머리에 직접 속삭이는 기분이 들어 부끄러웠다. 손가락으로 꼼지락 귓바퀴를 반으로 접어 조물거렸다. 귀가 뜨겁다.

“으응, 아니야. 일은 잘됐어.”

코로 내쉬는 가벼운 한숨 뒤에 형의 입술이 머리칼에 문질러졌다. 말랑한 입술이 머리카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따끈한 두피에 눌렸다.

“그 사람들 만나는 게 지긋지긋해서 그렇지.”

“형 못살게 굴어요? 내가 혼내 줄까? 내가 이래 봬도 쌈은 좀 하는데!”

거짓말. 낮게 후후, 웃던 형이 손으로 머리칼을 헤집었다. 품에서 바르작거리면서 소리 내어 웃었다. 어릴 적 또래 애들 하고 몸 장난이라도 하는 것처럼 팔다리를 휘저어 가면서 투닥거렸다. 그러면서도 형에게서 요만큼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똑바로 보질 않아.”

그림을? 묻는 말에 형은 가만히 웃기만 했다. 형이 무작정 ‘화려한’, ‘천재적인’ 따위의 입 발린 수식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 수식어를 붙인 것이 그들인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형은 그들에게 그림을 보이는 것이 싫을지도 모르겠다.

“눈이 낮은가 보다. 어떻게 안 보지? 안 볼 수가 없는데. 응? 나는 눈을 못 떼겠던데. 너무 봐서 이러다 혼이 빠져나가나 싶어.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움직이지 않거든 형 그림에 홀렸다고 생각해요. 그게 다 형 때문이라니까?”

왜? 입 모양으로 묻는 형에게 씨익 웃으면서 ‘형이 잘생겨서 그림도 닮나 봐!’ 했더니 형이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나를 빤히 바라봤다.

어깨를 더듬고 내려가 형의 손을 쥐었다. 내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사이를 어루만지던 형이 웃음을 흘리며 깍지를 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는 코를 꽉 쥐었다 놓고 형이 이마에 키스를 놓았다.

“별이 너는 사기꾼 체질이야.”

“내가 뭘요.”

“아니지. 속아도 속은 줄도 모르니까 사기꾼 정도가 아니네.”

“그러니까 내가 뭘……!”

바락 대들며 고개를 드는데 형의 입술로 입이 막혔다. 형은 한참이나 입 안을 부드럽게 휘젓고서 평소보다 오랫동안 내 아랫입술을 깨물고 빨았다. 저릿하게 아파 올 정도였다.

“한번 속아 볼까.”

오늘의 형은 조금 이상하다. 어쩐지 흐릿하고 뿌옇게 바래는 기분이 들어 형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

한동안 자만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형에게 ‘작업실’을 허락받은 사람이라는 것에 어느 정도 분별력을 잃었던 거다. 형의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했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따뜻한 체온, 맞대었던 살갗의 감촉 따위를 나만의 것일지도 모른다고 마음 깊은 곳에서 믿고 싶어 했다.

어쩌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잖아. 형은 나에게 보고 싶다는 말도 해 주었고, 안고 싶다는 말도, 나를 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도 해 주었다. 나보다 오래 알고 지낸 듯한 파트너들에게도 보여 주지 않는 그의 작업실을 보여 주었고 작품을 보고 헐렁한 감상을 내놓는 나에게 사랑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 주기도 했다. 형이 나를 ‘특별’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곳곳에 뿌려져 있었다.

형은 남자를 좋아하지만 애인을 두지는 않는다. 나에게 다른 잠자리 상대가 있다는 것을 숨기지도 않았다. 보고 싶다고는 했지만 그립다고는 하지 않았고, 내 몸을 안는 것이 좋다고는 했지만 나를 좋아한다고는 하지 않았다.

전부 나만의 착각이었던 거다. 희망의 조각이라 믿었던 것들은 내가 쏟아 낸 마음에 팅팅 불어 버린 관계의 허물이었다.

즉흥적으로 약속을 정했던 평소와는 달리 일찌감치 만날 약속을 잡았다.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낸 건 처음이었다. 일주일 내내 재고 정리와 냉장고 정리로 바빠서 시간을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이 너무 길었다. 손을 바삐 움직이면서도 머리로는 형을 떠올렸다. 약속한 날을 디데이로 바탕 화면에 걸어 놓고 휴대폰 시계를 볼 때마다 형을 생각했다.

조금쯤은 나와 만나는 날을 기다렸을까. 형이 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어두운 골목길에선 형이 나를 다급하게 끌어안고 입 맞추는 상상을 했다. 호흡이 뒤섞이는 거친 키스 뒤에 기다릴 달콤한 아픔과 허리가 저릿할 정도의 자극을 기대하며 조급한 마음으로 날짜를 셌다.

형, 나도 보고 싶었어요. 아주 많이. 넘치는 마음을 들키지 않도록 아주 조금만 드러내야지. 형이 다가오기 전에 먼저 그리웠던 마음을 부딪쳐 봐야지.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몸을 섞고 그 뒤로 부드럽게 흐를 시간까지 천천히 상상하면서 스스로가 할 말과 행동을 맞춰 보곤 했다.

부끄럽기도 하고 서툴기도 해서 내 쪽에서 먼저 애무를 해 준 적이 거의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몇 번이나 형의 것을 능숙하게 입과 혀로 애무했지만, 막상 그것을 앞에 두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손이 떨려서 입이 벌어지지도 않았다. 어린애 장난 같이 입술을 뾰족 내밀어 뜨거운 곳에 쪽쪽 입을 맞추고 떨어져 고개를 푹 떨군 채로 꼼지락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형은 그런 나를 탓하지 않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너한테 그런 걸 기대하는 건 아니니까. 그 말 뒤에는 ‘오럴쯤은 잘하는 애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 숨겨져 있었지만 흘려 넘겼다. 형이 하는 말들에 대해 깊이 해석하지 않는 건 나도 모르게 생긴 버릇이었다.

“형, 나 왔어……”

말을 다 잇지 못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어둑한 실내와 흐트러진 두 켤레의 신발을 보았다. 불이 꺼진 집 안에는 낯익은 공기가 흘렀다. 귀 뒤를 무심코 긁어내리게 되는 은밀함이 있었다.

침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형과 내가 서로를 안고서 얘기를 속살거리던 침대에서 알몸으로 뒤엉킨 두 남자가 보였다. 형은 낯선 남자의 허벅지를 당겨 안아 허리를 흔들면서 농밀한 키스를 하던 중이었다.

“형, 오늘…….”

말을 꺼내지 않고 얌전히 돌아가야 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는 두 가지만 맴돌았다. 오늘은 형과 내가 약속한 날. 그리고 형은 다른 사람이 있을 때에 나를 부르지 않겠다고 했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내가 날짜를 착각했거나, 아니면 침대에 있을 둘은 사실 내가 모르는 사람으로 내가 잘못 보았을 것이다. 날짜는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했으니 아닐 것이다. 나를 내버려 둔 채 눈을 깜빡한 사이 하루가 흘러가 버리지 않고서야 그럴 것이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형이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형의 눈에는 가벼운 놀람이 담겨 있었다.

형이, 형이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 그렇게 말하면 속이 아파도 ‘괜찮아요’ 활짝 웃으면서 돌아가야지. 이미 나는 그렇게 다짐하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다. 일주일 내내 나는 형만 생각했지만 형은 다른 일로 바빠 날짜를 세는 것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르니까.

침으로 젖은 형의 입술이 불쑥, 내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야?”

아, 나는…… 형이 보고 싶어서.

“오늘 온다고 저번 주에 얘기했었는데.”

형의 눈동자가 위를 향했다.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나와의 약속을 떠올리고 뜨끔해할지도 모른다. 먼저 입을 열어 ‘바빴으면 잊었을 수도 있죠!’ 하고 물러나려는데 형이 말했다.

“그랬었나.”

보고 싶어, 오늘 올래? 형의 말에 아쉬움을 삼키며 다음을 기약한 것이 일주일 전이었다. 그럼 다음 주 금요일이요. 안 돼요? 말꼬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미련에 형은 흔쾌히도 알겠다고 답했었다. 흔들리던 웃음소리는 술기운이었던가.

“미리 연락을 하지 그랬어.”

형의 손은 남자의 가슴을 주무르는 그대로였다. 남자는 흐느끼듯 신음하다가 몸을 비틀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미, 미안……. 깜빡했어. 미안해…….”

남자의 눈이 둥글게 휘어져 웃음을 만들었다. 그는 물기 어린 눈을 깜빡여 나를 빤히 보다가 붉은 입술을 훑어 낸 젖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쟤 누구야?”

발밑이 서늘하게 식었다. 손가락 끝이 구부러진 채로 굳었다. 돌아서고 싶었다. 형의 대답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꿈에서 몇 번인가 같은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형은 웃는 얼굴로 나를 끌어안으며 알아듣기 어려운 목소리로 중얼거리기도 했고,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으면서 입을 다물기도 했다. 꿈속에서조차 대답은 선명하지 않았다.

움직임을 멈춘 형이 가볍게 숨을 내쉬며 눈을 반쯤 뜬 채로 나를 보았다. 음, 말을 고르는 듯 침음을 내던 형이 입을 열었다.

“그냥 아는 애.”

킥킥. 남자는 길게 뻗은 다리로 형의 허리를 감으며 살살 허리를 흔들었다. 붉은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아는 애? 장난스럽게 되묻는 소리에 형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

부질없이 희망이 고개를 쳐들었다. 설명하기 어려워 얼버무린 것이다. 그저 ‘아는 애’로 그칠 사이는 아니니까. 우리는 키스도 하고 섹스도 했다. 그저 아는 사람끼리 그런 짓을 하지는…….

발밑에 꿈틀거리는 희망을 짓눌러 터뜨리며 형이 말을 꺼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나를 부르는 말을 찾았던 것뿐이었다.

“단골 가게 직원.”

“친해?”

아, 아, 좋아. 낮게 신음을 흘리며 남자는 몸을 움직였다. 두 사람의 시선은 내게 향한 채였다.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나는 눈 하나도 깜빡할 수 없었다.

“응. 친하지.”

“얼마나. 이런 것도 하나?”

높은 비음을 흘리며 남자가 눈을 감은 채로 허리를 들썩였다. 형의 손이 남자의 허리를 쥐었다. 쾌감을 참는 낮은 목울음 소리가 났다. 심장이 저릿해지도록 내가 좋아하던 순간이었지만, 그 대상이 내가 아닐 때에 심장을 손아귀에 움켜쥔 것처럼 아플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하지.”

“뭐야, 아는 애가 아니네.”

키득키득 웃으면서 두 팔을 뻗은 남자는 형의 몸을 더듬었다. 날렵한 쇄골 선을 쓸고 단단한 가슴과 움직일 때마다 윤곽을 드러내는 복부를 어루만졌다. 형은 한번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섹스 파트너. 그쪽이 맞겠네.”

웃는 소리, 신음 소리. 살과 살이 부딪쳐 나는 마른 소리와 은밀한 곳이 문질러지는 젖은 소리. 그 모든 것이 뒤섞여 머리를 어지럽혔다. 바닥이 단숨에 눈앞까지 튀었다가 천장이 훅 다가오기도 했다. 비틀거렸다. 머릿속에 나무 꼬챙이를 밀어 넣고 휘젓는 것 같았다.

듣고 싶었던 대답은 그게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닌 애라고 대답했다면 더 서글펐을까. 아니, 그보다는 누구라도 될 수 있는 형의 잠자리 상대일 뿐이라는 것이 더 괴롭다. 아무것도 아닌 것만도 못 하다. 그건 형의 곁에 머물 수 있는 어떤 이유도 되어 주지 못했다. 형이 조금이라도 내 몸에 질려 버린다면, 무엇 하나 재밌는 점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그 정도의 사람이었다. 저기 누워 있는 낯선 남자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처지였다. 형에게 안길 수는 있지만 형의 사람이 될 수는 없다. 형의 체온을 잠시 빌릴 수는 있지만 내 것이 되진 않는다.

애써 미뤄 두었던 생각이 빠르게 내달렸다.

나는 형에게 특별해지고 싶었다.

마음이 홀랑 뒤집어져 바깥에 드러난 것처럼 부끄러워졌다. 아닌 척, 쿨한 척, 무엇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연기하고 스스로를 속였던 욕심이 목구멍으로 가득 차올랐다.

“나는……. 형 나는, 있잖아요. 나는…….”

“별아.”

형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 벽에 걸린 거울로 내 모습이 비쳤다. 허옇게 질린 얼굴로 힘겹게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손은 부자연스럽게 허벅다리를 문질렀고 무릎을 살짝 구부린 채로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초라했다.

“나 갈래. 갈 거야…….”

“왜 그래. 얼굴이 안 좋아.”

“갈 거야, 가 버릴…….”

기어이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안 돼, 더 이상은 안 된다. 더 있었다가는 내 마음을 모두 뱉어 버리고 뭔가를 끝낼 말을 쏟아 낼 것 같았다. 이렇게 초라하게는 안 되는 일이었다. 손으로 허벅지를 꼬집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뭐야, 병신이네. 작게 중얼거린 목소릴 들었다. 형의 시선이 남자의 얼굴을 향했다. 눈썹을 치켜 올리는 형의 시선에 남자는 킥킥 웃으면서 나를 눈짓했다.

도망쳐 나왔다. 남자의 말에 형이 맞장구라도 친다면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지금은 형이 어떤 말을 해도 모두가 아팠다. 내게 보이는 관심이 겉핥기의 예의라는 것을 굳이 더 지켜보고 싶지는 않았다.

문이 닫히기 전 무언가 부딪치는 큰 소리가 들렸던 것 같지만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고 뛰쳐나온 탓에 계단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계단을 굴러 팔과 다리가 쓸렸다. 피가 났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그저 뛰었다.

숨이 막혔다. 울음이 목이 막히도록 치솟았다. 내쉬는 숨소리가 게걸스럽다. 부끄러웠다. 초라했다. 숨고 싶었다. 작은 상자에 몸을 욱여넣고 골목의 그늘에 내버리고만 싶었다.

잘 알고 있었다. 결코 내가 형에게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쯤은. 나는 푼돈이나 받는 가난뱅이고, 길거리 어디에 두어도 눈에 띄지 않는 희미한 얼굴을 가졌고, 손가락이 아홉 개뿐인 병신이었다. 손가락을 모두 접어도 열을 세지 못한다.

잃어버린 열 번째에 열쇠가 숨겨져 있었던 걸까.

이럴 바엔 형의 시선이 닿았던 네 번째 손가락도 없는 편이 나았다. 손톱을 세워 약지를 긁어냈지만 손가락은 떨어지지 않았고 깊이 박힌 점은 빠지지 않았다.

꼭 별자리 같네. 형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나는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피가 흐르는 약지에 입술을 눌렀다. 재봉틀의 바늘은 그 형태를 바꾸어 언제나 나를 찌르고 다닌다. 그래서 이렇게 아픈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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