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전조 (2/10)

2. 전조

(J)

일주일째 연락이 닿지 않는다.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고 문자를 남겼지만 답장이 돌아오지 않았다. 언제나 채 한 시간이 지나기 전에 내용을 꾹꾹 눌러 담은 답장을 보내고, 다급하게 전화를 받은 것이 역력한 숨 가쁜 목소리로 전화를 받던 샛별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닌 일주일이나 연락이 되지 않는 건 이상했다.

평소였다면 연락이 되지 않는 것쯤 바쁘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일주일 전 샛별을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마음에 걸렸다.

샛별은 울었다. 미처 자신도 눈물을 흘릴 줄 몰랐다는 듯이 눈을 홉뜨고서 뚝뚝 눈물을 떨어뜨렸다.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까닭도 모르는 채로 멍하니 보는 사이 샛별은 흐릿해진 눈을 하고 뭔가를 말할 것처럼 입을 뻐끔였다.

“뭐야. 병신이네.”

누워 있던 놈이 지껄인 소릴 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뭐?”

“왜 그래, 내가 뭐 이상한 말했어?”

조잡하게 생긴 놈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목 아래로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손에 집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침대 헤드 위로 처박았다. 퍽 소리를 내면서 크리스털 재떨이가 부서졌다. 샛별의 돌아서는 모습이 수백 개로 깨져 침대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동시에 쿵,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뭐라고 했냐고.”

“내, 내가 뭘.”

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두꺼운 쌍꺼풀을 바르르 떨면서 눈치를 살폈다. 나는 놈의 턱을 세게 쥐고 현관을 쳐다보았다. 이미 샛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석이 씨. 내, 내가 뭐 잘못했어?”

“야, 너. 그냥 가라.”

잠깐 고민했지만 놈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애초에 놈이 찾아온 것도 어디서 번호를 캐물었는지 먼저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과장스런 콧소리와 만들어 낸 애교 섞인 목소리에 주무르다 만 것처럼 생긴 놈의 얼굴이 목소리에 섞여 언뜻 떠올랐던 게 전부였다.

제길, 오늘이었나. 협탁에 올려놓은 달력은 지난달에 멈추어 있었다. 이틀을 새워 작업하거나 하루를 꼬박 자거나 하는 불규칙한 생활 탓에 때때로 날짜를 완전히 착각해 버릴 때가 있었다. 심지어 이번엔 지난달 달력이 그대로인 탓에 날짜와 요일이 맞지 않았다.

놈에게 전화가 왔을 때 며칠이냐 묻지 말고 요일을 물었어야 했다. 금요일이 아직 이틀이나 남았었나, 의아해하지 말고 한 번쯤 확인을 했어도 좋았을걸.

“석이 씨. 나 다음에 또 와도 돼?”

놈이 내 팔뚝을 문지르며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완전히 식었다. 대상이 무엇이 건 특별한 부분 하나둘쯤은 가지고 있고 그것이 어떤 영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식의 사고를 가진 나로서도 놈이 가진 특별함은 눈곱만큼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불을 툭 털어 내고 침대에서 나와 놈의 팔을 잡고 끌어냈다.

“나가라. 다시 오지 마.”

등을 떠밀어 놈을 내보내고 옷을 주워 입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열어 보니 출발할 때쯤 연락한 것으로 보이는 샛별의 전화와 메시지가 와 있었다.

[형, 곧 만날 수 있네요! 일주일 만이다. 빨리 갈게요.]

글자만으로도 샛별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길게 이어진 신호 끝에서도 샛별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하루가 지났을 때는 바쁜 일이 있겠지 넘겼고 3일이 지났을 때는 짬이 안 나겠지 생각했다. 5일이 지났을 때는 속이 불편하게 꼬이다가 일주일을 넘기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너 아는 거 없어?”

전화로 샛별에 대해 묻자마자 박하늬는 10분쯤 멈추지도 않고 웃어 댔다.

-우와, 장석 미쳤나 봐. 뭐야, 뭔데. 왜 그러는데.

“……연락이 안 되네.”

-그러니까 그게 뭐.

“어?”

-웃겨, 장석. 너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연락 끊겨도 끊겼는지도 모르는 양반이 왜 그래. 소름 끼치게.

“그거야, 아무 일 없이 돌아갔으면 안 그렇겠지만…….”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박하늬의 말에 기억을 되짚어 본다. 기분이 찜찜한 것은 분명하다. 찜찜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 테고 그건 갑작스런 샛별의 변덕이 아닌 그때의 오갔던 말과 행동 중에 원인이 있을 것이었다.

잘 기억나지 않는 그때의 대화를 곰곰이 떠올려 본다. 약속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했던 것, 내 책임은 있어 보이지만 연락을 끊을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과 있을 때 부르지 않겠다던 약속, 박하늬의 쨍한 웃음만 보아도 그렇게까지 고깝게 여기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낯가림이 심해 다른 사람과 있기를 다소 꺼려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게 아니라면 놈이 지껄였던 병신이란 말이 문제였을까. 아니, 카페에서도 종종 더러운 인상의 사장이 뱉어 내던 말이었다. 샛별은 그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왜. 샛별은 어째서 눈물을 흘리며 달아나 버린 것일까.

“모르겠어.”

전화기 너머로 박하늬가 키득키득 웃는다. 변함없이 재수 없는 웃음소리였다.

-내가 맞혀 볼까?

“글쎄.”

잘 들어 봐? 박하늬는 헛기침으로 목을 틔운 뒤에 하나씩 손꼽았다.

-하나. 너 딴 놈이랑 떡쳤지.

“응.”

-둘. 그리고 뒹굴고 있을 때 우리 샛별이가 봤을 거야.

“응.”

-셋. 그리고 넌 멀쩡한 얼굴로 인사를 했겠지.

“인사를 했었나.”

-넷. 그리고 샛별이의 퇴장. 아냐?

“……응.”

짝짝 박수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그럴 줄 알았지. 박하늬는 들뜬 목소리로 지껄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씹어 뱉었다.

-야, 이 불쌍한 등신아. 넌 평생 그러고 살아라.

전화가 끊겼다. 그의 말을 하나씩 곱씹었지만 어디에서 샛별이 화가 났는지는 여전히 감을 잡지 못했다.

아, 어쩌면. 다시 박하늬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별이도 같이했어야 했나.”

대답은 빠르게 돌아왔다.

-병신, 개 발싸개 같은 새끼야!! 닥쳐!

뚝, 전화가 끊기고 곧바로 카톡 메시지가 날아왔다. 조명 아래에서 고운 손을 접어 뻐큐 하는 사진이었다.

좀처럼 샛별을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을 고민해 봤다. 생각해 보니 누군가의 행동에 ‘왜’, ‘어째서’를 붙여 이해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런 식의 사고방식에 서툴렀다.

더 근본적으로 나의 공간에 들여 놓고 시간을 공유하는 사람 자체가 없었다.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파트너는 박하늬뿐이었다. 5년이 넘으면서 다소 시들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의 몸은 흥미로웠다. 자랄수록 나날이 아름답게 변하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은 꽤 뿌듯하다.

나머지는 전부 인스턴트였다. 만나서 자고 연이 닿으면 또 자고. 아니면 밀쳐 내면 그뿐. 애초에 섹스 이외의 목적으로 만나 가까워진 이가 드물었다.

일에 관련된 사람들을 일부 제외하고는 처음부터 서로의 배 속에 뚜렷한 목적을 품은 채로 만났다.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데코레이션과 같은 말장난이 있을 뿐이다. 눈이 예쁘네, 너 키스 잘하더라, 이런 건 섹스하자는 말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전화벨이 울렸다. 박하늬였다. 그릉그릉 목 울림을 참으며 그는 상냥하게 말하려 애썼다.

-잘 들어. 장석, 이 병신아. 응? 알겠지?

“뭘.”

-아오! 씨발, 걍 들어!!

기어이 버럭 소리를 지른 박하늬는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냈다.

-너 새끼는 모르실 테지만요. 원래 섹스라는 건요. 전시용이 아니거든요.

“무슨 말이야.”

-쉽게 설명해 줄까?

“응.”

-할 거면 좀 숨어서 하란 말이다. 개벼룩 같은 새끼야!

뚝.

오늘 이 녀석의 상태도 이상하다. 지낸 시간이 길어서 편하게 구는 편이긴 해도 오늘처럼 격한 욕을 섞는 건 드물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 몇 번인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하룻밤 상대의 눈물을 본 날이면 박하늬는 내 뒤통수를 때리면서 ‘병신!’ 소리를 지르기도 했었다.

‘너는 나를 보고도 남한테 보여 주는 게 얼마나 씨발 같은 일인지 감이 안 와?’

술에 잔뜩 취해 섹스를 하던 어느 밤 박하늬가 엉엉 울면서 나를 때렸던 것이 떠올랐다. 모델이랍시고 몸매 관리로 운동을 하는 탓에 주먹이 제법 매웠다.

그렇구나. 보여 주거나 보거나, 그런 게 싫을 수도 있겠다. 섹스 하는 걸 남에게 들키면 수치스러울 수도 있고, 당사자야 쾌감에 취해 모를 테지만 남이 하는 걸 볼 때에 징그럽고 불쾌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울기까지 하나.

머리가 복잡했다. 가벼운 차림으로 지갑을 들고 나섰다. 편의점에서 간단히 술을 사서 돌아오는 길에 카페에 들렀으나 오늘도 역시 샛별은 없었다. 사장은 매우 불쾌한 얼굴로 ‘병가와 휴갑니다.’ 쏘아붙이고는 병신 새끼라고 중얼거렸다.

***

그림을 그리다가 도저히 풀리지 않을 때, 두껍게 바른 물감을 걷어 내거나 스케치부터 다시 시작해 볼 때가 있다. 기억을 되감아 보는 일도 비슷하지 않을까.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지도 몰랐다. 기억을 되살려 보기 위해 스케치북을 꺼냈다.

샛별을 발견한 날은 스케치북을 새걸로 바꾼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여서 한 장씩 그림을 넘길 때마다 새삼스럽게도 그때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당연한 듯 그 자리에 있던 물건들이 전혀 새로운 것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그건 매끈한 앞면만을 보다 뒷면에 감춰져 있던 흠을 발견하거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무늬들이 빛날 때다. 샛별을 발견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잔돈을 건네던 손이 눈에 띄었다.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을 바르게 폈을 때 새끼손가락의 빈자리를 발견했다. 뭉툭하게 둥글어진 뼈마디를 보았다. 그에게는 손가락 하나만큼의 트라우마가 존재할 터였다. 겉보기에는 ‘병신’ 소리에 조금도 상처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가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감추거나 손가락의 빈자리를 더듬어볼 때 나의 궁금증은 점점 더 커졌다.

잃어버린 손가락의 행방이 궁금했다. 손가락을 얼마만큼 의식하고 있는지도 알고 싶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리의 정물만큼이나 아무런 특색이 없던 그는 갑작스럽게 배경에서 뛰쳐나와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의 과거가 지닌 힘이었다. 특별함은 불행에서 나오기가 더 쉽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손목이 근지러운 기분이 들어 손목시계의 줄 아래를 긁었다. 희미해진 흉터가 손톱에 걸려 붉게 부어올랐다.

최소한 스스로 만들어 낸 장애는 아닐 테지. 카페에 멍하니 앉아 그의 손가락에 대해 상상해 보곤 했다. 어딘가를 떠돌던 새끼손가락이 마법처럼 나타나 그의 손에 달라붙는 망상을 하기도 했다. 그것을 하나씩 스케치북으로 옮겨 보는 일은 꽤 즐거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샛별에 대한 관심은 별것 아닌 호기심 정도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쯤 상처와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발견하는 순간은 나를 흥분하게 하는 동시에 서글프게 만들었다. 그것은 모두 내게는 없는 것들이었다. 날 때부터 가지고 있거나 또는 자라면서 생기는 갖가지 빛깔의 아픔은 그들을 고유한 색으로 빛나게 했다. 나는 그것이 부러웠고 간절했다.

대체로 상대를 가리지는 않지만 섹스 파트너를 고를 때 하나의 기준이 있다면 ‘결점이 보일 것’이다. 결점이란 건 보통 애쓰지 않더라도 보이기 마련이다. 성격, 외모, 말투, 옷차림, 사소한 몸짓. 그 어딘가에서 결점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그곳을 건드리면 사람들은 움찔하며 움츠러들거나 툭, 터져 무언가를 쏟아 냈다.

그들은 그 결점이 자신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지 대체로 알지 못한다. 그것을 찾아 쓰다듬고 찬양하면 대부분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였다. 다양한 결점을 수집하는 것, 어느새인가 그것은 습관이 되어 버렸다.

박하늬를 만난 것도 그 과정 중 하나였다. 그는 흔치 않은 종류의 불행을 일찍이 겪어 낸 이였다.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얘기라고 했지만 나에게만큼은 솔직히 털어놓기도 했다. 그 불행의 정점에서 우연히 그를 구해 낸 것이 나였기 때문에.

그는 웃다가 울다가 하면서 기억을 회상하다가 그 부분에서 눈을 반짝 뜨고 나를 바라보곤 했다.

‘그때 딱, 네가 온 거지. 장석 씨. 요 장한 새끼.’

우연이었다. 나 또한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은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고 흙이 묻어 지저분한 얼굴 가운데서도 빛을 내고 있었다. 예쁘네, 순수하게 생각했다.

나는 박하늬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병원비를 댔고 퇴원 후엔 그를 집으로 데려왔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한 그를 남는 방에 넣어 놓고 단순한 동거를 했다. 집에 드나드는 파트너들을 보고 내가 게이라는 걸 눈치챘지만 박하늬는 도망을 가거나 딱히 혐오스러워하지 않았다. 때때로 어설프게 나를 유혹하다가 제 풀에 지친 듯 팔을 벅벅 긁으며 방으로 돌아가 버리곤 했다.

‘자꾸 미안해서 어떡해요. 나 진짜 나가야 되는데. 알바만 제대로 구하면…….’

‘그러지 말고 진짜 모델을 해 보지 그래.’

이런저런 모임에 끌려다니는 사이 생긴 인연이 많았다. 알고 지내던 에이전시에 그를 소개했다. 모습을 가꾸고 신경을 쓰자 그는 훌륭해졌다. 금방 데뷔를 하고 많지는 않았지만 일도 들어왔다. 사교성이 좋아 평판이 괜찮았고 노력도 많이 하는 편이었다.

그가 스무 살이 되어 집을 떠나던 날, 처음으로 섹스를 했다. 괜찮겠어? 일부러 이러지 않아도 돼. 슬쩍 밀어 내는 내 무릎 위로 기어올라 그는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기왕이면 처음은 형이랑 하고 싶었거든요.’

처음이라고 했다. 그의 마음속에선 이미 그 일은 없는 것과도 같았다. 때문에 일부러 꼬집지 않았다. 박하늬는 딱히 게이가 아니지만 여자도 남자도 사랑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쉽고 편하게 나를 찾았다. 집을 나간 뒤부턴 남들처럼 ‘장석 씨’ 하고 딱딱하게 부르며 거리를 유지했다.

‘몰라. 그나마 석이 씨가 제일 섹스를 잘해. 몸 비비는 건 싫지 않아. 사랑을 못 해도 몸은 외롭단 말야. 대신 애인 생기면 깔끔하게 물러나 줄게.’

그의 상처를 다독이는 방법들은 흥미롭다. 내가 어디에 흥미를 갖는지, 사람을 볼 때 무엇을 보는지 알고 있는 그는 종종 질렸다는 얼굴로 혀를 차곤 했다.

‘그거 병이야. 그러지 말고 차라리 문신을 하거나 몸에 불이라도 질러 봐. 그럼 볼만할걸.’

‘글쎄.’

‘그러다 큰코다치지. 솔직하게 살아.’

‘밥줄 끊기라고?’

‘먹고 사는 게 걱정이야?’

‘아니. 그것 말고.’

‘나도 남한테 보여 주는 일 하지만 석이 씨 너는 더해. 마음속까지 까발리는 거잖아. 그게 연기가 되니?’

얄미운 말을 하면서도 그는 엄마들이 하듯 나를 꼭 껴안아 주곤 했다. 굉장히 불쌍한 사람을 보듯 해서 나는 그게 싫지 않았다. 그런 시선을 받으면 가슴 어딘가가 술렁였다. 그걸 알고 있어서 그가 나를 더 불쌍하게 여기는지도 모른다.

***

-생각해 봐. 다른 사람이 안 보인다고 궁금한 적 있디?

새벽녘에 다시 전화를 걸어 기억을 되짚어 보던 나에게 그가 물었다.

“그거야…….”

없다. 생각해 보니 없어지건 말건 궁금한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아직 그의 손가락에 대한 트라우마를 수집하지 못해서일까. 생각과는 달리 내 입은 전혀 엉뚱한 말을 뱉어 냈다.

“별이는 예쁘니까.”

예뻐? 웃는 목소리로 되묻는 박하늬에게 담담하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영 다른 곳으로 튀어 버린 회상을 되짚어 다시 기억 속의 샛별을 응시했다.

반짝, 한순간이었다. 연필로 헐겁게 스케치한 그림이 색을 입고 살아 뛰어다니는 것과 같았다. 커피를 내려놓는 손가락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손가락 마디가 구부러지는 모양을 따라 별자리가 변했다. 둥글어졌다가 쭉 뻗었고 다시 끄트머리가 구부러지는 것을 보다가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비어 있는 자리로 일직선으로 그어진 별자리가 뚝 떨어질 것 같아서 반대쪽 손을 받쳐 들었다. 손가락으로 비벼도 지워지지 않았고, 마찰에 살짝 붉어진 손가락은 오히려 귀여웠다.

검게 그린 손의 윤곽에 약지의 점이 있는 자리를 하얗게 비웠다. 손등이 보이도록 기울인 손에선 별똥별처럼 빛이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밤에 비치는 오로라처럼, 암막에 덧씌운 뿌연 조명처럼. 사각사각 연필이 종이에 스치는 소리가 시원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얌전히 손을 내어 준 샛별의 얼굴을 보았다. 순하게 내려앉은 눈매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접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오른쪽 눈썹 아래 자리한 작은 점 하나가 눈꺼풀을 따라 위아래로 조금씩 움직였다.

집에 돌아와 스케치북을 반쯤 소모하며 샛별의 눈과 손을 그렸다. 손목 아래로 고인 감정이 좀처럼 시원하게 뿌려지지 않아 갑갑했다.

샛별을 보기 위해 카페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는 빤히 들여다보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그 반응이 단순한 부끄러움에서 다른 의미를 가진 수줍음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남자와의 경험이 전혀 없어 보이는 샛별을 침대에 눕힌 건 특별히 의도했던 바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요즘 뭐 재미있는 일 없어? 박하늬가 그렇게 묻기 전까지 내가 그에게 성적인 흑심을 품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 요즘 꽤 재밌는 애가 있어. 입가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웃었다. 벌써 잤어? 별 뜻 없이 묻는 박하늬의 물음에 눈을 끔뻑였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의 손을 쥐고 손가락을 입에 넣어 애무하거나 눈가에 입을 맞추는 상상을 하자 아래가 묵직하게 달았다.

순진한 그를 입 안의 사탕처럼 살살 굴려 삼켰다. 달았다. 눈을 올려 뜰 때 눈꺼풀 위쪽의 살이 접히는 자리에 입을 맞추고 어쩔 줄을 모르고 침대 위를 헤매는 손을 붙잡아 깍지를 꼈다.

유난히 아래가 도톰한 입술을 물고 빨면 낮은 신음을 내며 눈썹을 찡그렸다. 붉어진 뺨을 쓰다듬고 뜨거워진 귀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더운 숨을 토해 내며 다리를 비볐다. 그 다리를 두 손으로 벌리고 사이로 들어가 내려다보면 샛별은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귀를 눌러 얼굴을 가리려는 토끼 같았다.

문제가 있다면 삼킬수록 달다는 것이었다. 삽입조차 힘들어하던 샛별이 가슴을 빨아 주는 것만으로 뒤를 조이며 앓는 소리를 낼 때 심장 아래쪽에 저릿한 물결이 흐르는 것을 느낀다. 두 팔에 가득 안고 뺨을 맞대면 샛별이 억눌린 신음을 내는 것이 귓가에 울렸다.

옆구리를 쓸어 올릴 때 허리를 들썩이는 것이나 속눈썹에 눈물을 매달고서 코를 훌쩍이는 것도 모두 몸속에 들끓는 열기를 부채질했다. 좀처럼 열기가 식지를 않아서 지쳐 잠든 샛별 위로 올라타 그의 손으로 내 것을 감싸 쥐게 해서 자위를 한 날도 있었다.

조절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매번 격렬한 섹스를 하는 탓에 다음 날이 되면 샛별은 늘 힘들어했다. 매일같이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평소보다 조금 자주 상대를 바꿨다. 못 견딜 듯이 달음박질하던 욕망은 다른 이를 품에 안으면 거짓말처럼 시들었다. 가슴이 소란스러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땐 아무나 불러들여 섹스를 했다.

가슴을 꽉 메운 것을 처치하려 연필을 들면 비슷한 그림만을 그렸다. 투박한 남자의 손, 굴곡이 많지 않은 단순한 얼굴. 그러다 참을 수 없이 답답한 기분이 들면 샛별에게 연락을 넣었다. 머리까지 뜨거워지도록 흥분한 상태로 앞뒤 없이 섹스를 했다.

샛별은 생각보다 남자와 몸을 섞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듯했다. 다행이었다. 펠라치오 같은 직접적인 행위는 다소 거북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살갗을 문지르는 애무에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어디가 그렇게 예쁜데.

장난처럼 낮게 흐흐 웃으면서 박하늬가 묻는다. 금세 바지가 불룩하게 부풀 정도의 욕망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혀로 축였다. 입이 말랐다.

“몸이. 눈이. 입술이 예쁘지.”

-또.

그리고…….

“말이 예뻐.”

-말?

섹스를 끝낸 뒤 졸음이 살살 쏟아지는 상태에서 부드럽게 감겨 오는 샛별을 품에 안으면 반짝이는 말들이 흔들흔들 귓가에 스며들었다. 우주 같아, 태양 같아, 찡하게 아파, 코가 시큰거려. 초등학생이 쓴 전시회 감상문 같은 단순한 단어들도 샛별의 입을 거치면 뿌듯하게 가슴을 채웠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돌아보는 수단으로만 보이던 외모에 대한 칭찬도 샛별이 하면 순수하게 기쁜 마음이 들었다. 발긋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작은 입을 움직여 말할 때는 다시금 허리 아래가 묵직해지면서 입을 맞추고 싶어진다.

내게 연인이 허락된다면 샛별 같은 아이가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가끔 했다. 물론 연인을 만드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단순히 어울려 줄 뿐인 샛별에게 그런 것을 기대한다는 건 실례였다.

눈을 감고 말랑한 입술을 물어 삼키고 혀를 섞을 때의 막힌 숨소리가 좋다. 입술을 뗀 뒤의 울음을 참는 듯한 애잔한 얼굴이 좋다. 훌륭한 작품을 볼 때의 두근거림을 넘어 직접 손으로 더듬어 조각에 깃든 세월까지 어루만지는 기분이었다.

눈가를 손가락으로 지분거리며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내 말에 샛별은 우는 눈을 하고 웃었다. 형이, 너무 키스를 잘해서요. 엉뚱한 말이 귀여워 꽉 안고 머리칼에 입을 맞추면 샛별은 등에 팔을 두르고 가슴팍에 안겨 왔다. 부드러운 뺨이 심장 위로 문질러질 때 크게 가슴이 뛰었다.

“어떻게 할까.”

-솔직하게 말해. 솔직하게.

“뭘?”

-지금 석이 씨가 어쩌고 싶은지 솔직하게 말하라고.

“연락이 안 되는데.”

-노력이라도 해 봐.

전화를 끊고 여전히 답장이 돌아오지 않는 샛별과의 대화창을 열었다. 손가락으로 글자판을 더듬어 보다 글자를 몇 개 눌렀다. 지웠다 쓰길 몇 번인가 반복하다 충고대로 솔직한 마음을 꾹꾹 눌러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전화기가 울렸다. 샛별이었다.

“지금 갈게요.”

울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곤 전화가 끊겼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샛별이 도착했다. 안 그래도 마른 몸이 더 말라 있었다. 통통했던 뺨이 옴폭 패였다. 눈 밑이 검고 눈꺼풀도 오목하다. 샛별은 문을 열자마자 쏟아지듯 현관으로 들어와서 내 목에 팔을 감았다.

“형, 형……. 저도 보고 싶었어요.”

숨소리가 가늘게 떨고 있어 우는 줄만 알았다. 어깨를 잡아 살짝 떼어 내고 얼굴을 살폈다. 샛별의 눈이 정신없이 내 얼굴을 훑어 냈다. 울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며칠 밤을 지새운 것처럼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아직도 아파? 몸은 괜찮은 거야?”

손등으로 뺨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샛별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얼굴을 내 목덜미에 묻고는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감아 어깨를 붙잡았다.

“형, 우리 섹스해요. 나랑 해요.”

“고개 들어 봐. 얘기 좀 하자. 그동안…….”

“그냥 해요. 망할, 그냥 하자고요.”

샛별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다짜고짜 옷을 벗었다. 속옷까지 모두 벗어 버리고는 내 목에 매달려 입술을 부딪쳐 왔다. 얼떨떨하게 키스를 받으며 닭살이 돋은 샛별의 팔과 허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여전히 어설프고 서툰 키스가 끝나고 샛별은 침통한 얼굴로 두 걸음 물러났다.

“이젠…… 나랑은 하기도 싫어요?”

“안 그래.”

“그럼 해요.”

입술과 눈꼬리를 내려뜨린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내 옷을 벗기려 드는 손목을 붙잡아 침대로 이끌었다.

“물론 해야지.”

버둥거리는 샛별을 끌어안고 흐트러진 머리칼에 입을 맞추었다. 버둥거리는 것을 멈추고 품 안에서 얌전히 호흡할 때까지 기다렸다.

“먼저 너 한숨 자고. 자고 일어나면 네가 싫다고 해도 할 거야.”

“……보고 싶었어요.”

목구멍이 조이는 기분이다. 침을 삼키기가 힘겹다. 억지로 다리를 벌려 당장 넣고 싶었다. 우는 얼굴로 내 이름을 부르고 쾌감으로 헐떡이며 붉어지는 몸을 안고 싶다. 고작 한마디에 귀에서부터 찌르르 전류가 흘렀다.

아아, 다행이다. 사라져 버리지 않아서.

“나도. 보고 싶었어.”

당장 짓눌러 범하고 싶은 욕망을 누르며 샛별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아홉 개의 손가락이 매달리듯 나를 붙잡는 것을 보며 감은 눈에 입을 맞추고, 웅크려 접은 다리에 내 다리를 감아 당겼다.

샛별은 금세 잠이 들었다. 꿈을 꾸는지 고른 숨을 내쉬다가도 눈을 찡그리고 코를 벌름이며 우는 얼굴을 했다. 그 위로 ‘괜찮아, 괜찮아.’ 속삭이며 입을 맞추면 다시 얼굴을 펴고 품으로 파고들었다. 어미를 잃은 새끼 동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까지 잠에서 깨지 못하는 샛별을 두고 머리맡에 두었던 스케치북에 간단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때웠다. 10시가 넘어 깨어난 샛별은 이불에 실례한 어린애처럼 부끄러워하며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문득 서글픈 얼굴을 했다.

“해요, 우리.”

매끄러운 나신이 몸에 감겨들었다. 내 손을 제 허벅지와 엉덩이로 이끌면서 샛별은 입꼬리만 당겨 웃었다. 낮은 탄성을 내며 귓가에 숨소리를 쏟아 내는 것을 더 참지 못하고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 그의 밀부를 문질렀다. 색이 옅은 유두를 입에 물고 손가락을 밀어 넣어 내부를 더듬었다. 허벅지를 비틀며 신음을 참던 샛별이 스스로 다리를 벌려 은밀한 곳을 내보였다.

“어차피 할 거잖아요. 할 수밖에 없잖아요.”

눈을 질끈 감은 샛별이 몸을 돌려 엎드렸다. 엉덩이를 들어 올리며 얼굴을 베개에 묻었다.

“우린 사이가 좋으니까.”

샛별의 표정이 보이지 않아 얼핏 한숨 같았던 그 말의 의미를 알기가 어려웠다. 다만 오랫동안 기다렸던 것을 맞이하듯 샛별의 허리를 붙잡고 성급히 몸을 겹쳤다. 뜨겁고 부드러웠다.

어깨에 입술을 대고 힘껏 빨아 당겨 자국을 내는 동안 샛별은 스스로 몸을 움직여 마찰해 왔다.

“형, 혀엉, 더 해요. 더 해 줘요.”

신음처럼 나를 부르면서 샛별은 몇 번이나 절정에 올랐다. 그 목소리에 심장이 저릿해서 마른 등에 솟은 날개 뼈를 깨물었다.

참을 수 없이 화가 솟았다. 섹스는 거칠었고 배려가 없었다. 몸에 수없이 많은 잇자국을 새겼지만 샛별은 아프다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물도 없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절박하게 이불을 움켜쥐었을 뿐이었다.

(D)

일을 시작하고 한 번도 휴가를 쓴 적이 없다. 아파서 쉰 적도 없었다. 때문에 그 성격 더러운 사장이 2주일 가까이 날 참아 준 것은 꽤 놀라운 일이었다. 당장 잘릴 줄 알았는데 평소보다 조금 격한 욕을 퍼부은 게 전부였다. 아, 전화라서 그렇구나. 얼굴에 대고 얘기하는 거였으면 뒤통수를 다섯 대쯤 맞았을 거다.

집에서 쉬는 동안 형에 대한 생각만 했다. 처음 며칠은 생각의 갈피조차 잡질 못했다. 형의 연락조차 받지 않고 집에 처박혀 있는 내 마음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다 그만두고 싶은 건가. 아니면 생각보다 하찮은 관계라는 것에 실망한 건가. 형이 애타게 찾아 주길 바라면서 떼를 부리는 건가.

멍청한 짓을 그만둘 때가 된 거야. 거울을 보면서 계속해서 중얼거렸지만 정작 결심은 서지 않았다. 퉁퉁 부어 버린 눈만 보아도 그건 확실했다. 밤마다 울었지만 우는 이유는 초라했다. 형에 대한 배신감 같은 게 아니었다.

보지 말자고 생각할수록 형이 보고 싶었다. 고집을 부리면서 연락을 받지 않다가 정말로 인연이 끊길까 봐 무서웠다. 얕게 잠이 들었다가 ‘이제 너 같은 건 필요 없어.’ 단호한 얼굴로 형이 나를 내쫓는 꿈을 꾸었다. 또는 전혀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 누구세요, 하고 묻는 꿈을 꾸기도 했다.

결국 고민 같은 건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형을 좋아하는 일을 스스로 멈출 수 없다.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애초에 어떻게 그만두어야 할까, 하는 생각에 발전이 있을 수가 없었다.

인정해야 했다. 현재의 내 위치와 형과의 관계가 단순한 섹스 파트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형은 내게 빌미를 주지 않았다. 처음 몸을 섞을 때 기대에 찬 얼굴을 한 나를 보고 ‘오해하지 말라’고 하던 형을 떠올렸다.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구는 내가 불안했던 것이 분명하다.

연인은 너무 가까워서 안 돼. 가까운 사람한텐 들키기가 쉽잖아. 애인을 사귀지는 않을 거냐는 물음에 형은 곤란한 듯이 웃으며 말했다. 들켜요? 뭘? 되묻는 말에 형은 대답 없이 내게 키스를 했다. 대답을 회피할 때 형의 버릇이었다.

섹스 파트너가 뭐 어때서. 형과 얘기 한번 해 보려고 기웃거리는 사람들은 널려 있다. 나는 형과 키스도 하고 섹스도 했다. 형은 내게 사생활을 보여 주었고 자신의 시간도 나누어 주었다.

견물생심이었다. 형이 설사 특별한 사람이 생긴다고 해도 그게 나일 리가 없는데. 하늬처럼 멋진 것도 아니고 이전에 보았던 다른 파트너들처럼 몸이 근사하거나 형의 수준에 맞는 집안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혹시나 하고 가슴 속에 품었던 실낱 같은 희망이 있다면 그게 잘못된 거였다. 염치도 없이 바라는 것만 많았다.

다른 무엇보다 그저 형이 보고 싶었다.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낮은 울림으로 별아, 하고 불러 주는 것을 듣고 싶었다.

잘 들어갔니. 가게에 없더라. 아프니. 무슨 일 있어. 전화 받기 어려운 거면 편할 때 전화 줘. 별아, 무슨 일이야. 나한테 화났어. 감추어진 물음표로 가득한 형의 메시지를 몇 번이고 보았다. 형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아서 눈시울이 뜨거웠다.

딱 하루만 참자. 그만 울고 잠도 푹 자고 너무 놀아서 지겨웠다는 듯이 말짱한 얼굴로 형한테 가서 인사를 하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고 하자. 형쯤은 일상에서 빠져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형이 그렇듯 나 또한 단순한 섹스 파트너로만 형을 생각하는 것처럼 가볍게 굴자.

자다 깨길 반복하며 아침을 맞았다. 베개 밑에 묻어 놓았던 휴대폰을 꺼내 습관적으로 카톡을 열었다. 빨간 동그라미 아래 새 메시지가 와 있었다.

[별아 보고 싶어, 많이]

더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형이 나를 보고 싶다고 했다. 가벼운 충동이든 무엇이든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나를 보고 싶다고 말해 주는 지금 그를 만나야 했다. 늦기 전에, 형이 나를 잊어버리기 전에, 조금이라도 나를 생각해 줄 때.

“지금 갈게요.”

무작정 집을 뛰쳐나갔다. 형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미안, 오늘은 곤란한데. 그런 대답이 돌아올까 무서워서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달려가는 동안 보고 싶다는 그 한 마디만을 생각했다.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갈 때까지 다른 사람은 부르지 말고 오늘만, 보고 싶다는 그 말이 흐릿해질 때까지만, 나랑 있어 줘요.

숨이 턱에 닿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형의 집이 가까워질수록 뿌옇게 눈이 흐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형이 다른 사람을 품에 안고 내게 인사할 것 같았다. 보고 싶다는 말도 벌써 잊어버리고 말아서 나를 전혀 모른다는 얼굴로 누구냐고 묻지는 않을까.

오지 말걸. 전화하지 말걸. 다리는 계속해서 달려가는데 머리로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만 했다. 벨을 누르는 손가락이 벌벌 떨렸다. 문을 열었을 때 형이 조금이라도 주춤한다면, 집 안에서 다른 사람의 향기가 난다면 더는 묻지 말고 도망치자. 벨에 닿았던 손가락이 움츠러들었다. 아니다. 그럼 똑같은 일을 반복할 뿐이다.

형이 다른 사람과 몸을 섞고 있더라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똑바로 마주 보고 내 위치를 제대로 인정해서 평소와 같은 얼굴로 활짝 웃어야 한다.

형, 보고 싶었다면서요. 장난스럽게 웃어넘기자. 말을 하지 못할 것 같으면 입을 꾹 다물고 손이라도 흔들어야겠다. 다른 사람에게 형이 부끄러워지지 않도록 왼손은 뒤로 감추자. 형은 상냥하니까 이런 나라도 다정히 받아 줄 것이다.

문이 열렸다. 점점 벌어지는 문틈으로 형의 얼굴이 보였다. 아, 형이다. 까만 눈동자도 깎아 낸 듯 단정한 얼굴도 모두 그대로였다.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심장이 목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이제는 그런 짓 안 할래.

형의 목에 팔을 둘러 매달렸다. 형은 뿌리치지 않고 나를 안아 주었다. 흉하게 야위었을 나를 살피고 안부를 묻고 내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손으로 얼굴을 어루만져 주었다.

“형, 우리 섹스해요.”

나는 형하고 사랑을 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으니까.

“그냥 해요.”

적어도 섹스를 하는 동안에는 당당하게 사랑할 수 있으니까.

“나랑은 하기도 싫어요?”

형이 나랑 하기 싫어졌다고 하면 답답할 정도로 차오르는 마음을 쏟아 낼 길이 없다. 내 짝사랑에 알맞는 대화법을 이제야 깨우쳤다. 우리 섹스해요, 그거면 충분하다. 사랑한다는 말도, 보고 싶었다는 말도 신기루처럼 먼 곳에서 깜빡깜빡 흔들리기만 했다.

“나도. 보고 싶었어.”

그럼에도 형의 목소리는 너무 달콤해서 눈물이 났다. 보고 싶을 때만큼이라도 날 사랑해 주길. 마음이 아닌 몸이라도 좋으니까. 앞으로는 쓸데없는 기대를 하거나 착각하지 않을 테니까.

2주일간 텅 비었던 마음이 꽉 채워지도록 형은 세게 나를 안아 주었다. 기절할 듯 온몸을 태우는 쾌감 속에서 형의 얼굴만이 선명했다. 이 순간만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섹스 파트너라는 건 꽤 괜찮은 역할이었다.

***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오늘의 형은 특히나 더 다정하다. 섹스가 끝난 뒤에도 좀처럼 나를 놓아 주지 않고 귓가에 부드러운 목소릴 흘리며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를 물었다.

문제는 아직 삽입된 상태라는 거였다. 등 뒤로 단단한 형의 가슴이 닿고 목덜미에 부벼지는 입술에 또 서 버릴 것 같다. 다리를 꼼지락거릴 때마다 안에 들어 있는 형의 성기가 부드럽게 내벽을 눌렀다. 무심코 조일 것 같아서 긴장을 하느라 다리에 쥐가 났다.

“아무 일 없었어요. 그냥 쉬었지.”

“나한테 화난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응…….”

형은 귀 뒤에 입술을 누르며 소리가 나도록 키스를 하고 슬금슬금 허리를 움직였다. 둔한 나라도 알 수 있을 만큼 안에 품고 있던 형의 성기가 커지기 시작했다. 뜨거웠다.

“핫, 으흥. 안, 안 돼요……. 아픈데.”

“어디가. 여기?”

가슴을 무심하게 쓰다듬던 손가락이 다리 사이로 기어 내려와 따끈따끈하게 부어오른 항문의 주름을 간질였다. 움찔움찔, 내가 느껴질 정도로 주름이 움직였다.

후우. 한숨을 내쉰 형이 물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부드럽게 허리를 치댔다. 간신히 가라앉았던 몸의 열기가 단숨에 얼굴까지 차올라 뜨거워졌다. 손으로 이불을 움켜쥐고 도리질 치는데 형의 손이 내 성기를 꽉 쥐었다.

“말해 봐. 왜 그랬어.”

“흐으윽, 아! 흐읏, 놔 줘요.”

“얘기해 봐. 나 영영 안 볼 생각이었어?”

“아니, 으흐응, 안 그랬…….”

형의 것이 내 안을 휘저을 때마다 등에 맞닿은 형의 가슴도 같이 문질러졌다. 다시금 거칠어진 형의 호흡이 귓가를 어지럽혔다. 형은 귓바퀴 안으로 혀를 넣어 굴리다가 턱을 잡고 돌려 입술에 키스를 했다.

혀가 엉기는 동안 성기를 꽉 눌러 쥔 형이 엄지로 귀두 끝을 문질렀다. 나도 모르게 허리가 움찔 튀었다. 허벅지 안쪽이 잘게 떨리고 온몸이 짜르르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이불에 살갗을 비볐다. 가슴의 돌기가 우연히 문질러질 때 입이 벌어지고 신음이 흘렀다.

“그러지 마.”

머리칼 사이로 눅진한 호흡이 닿았다. 콧날을 머리칼 사이로 부비며 형이 낮은 신음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러지 마. 사라지지 마.

“형은 진짜 나쁜 남자야.”

코가 시큰거려 이불에 푹 묻고서 웃음을 흘렸다.

“응?”

“아무한테나 그러지 마요. 형은 멋있어서 진짜 반한다니깐.”

눈을 질끈 감아 눈물이 사그라들도록 기다렸다가 얼굴을 돌려 형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자꾸 그럼 나도 반할 거 같으니까.”

히죽 웃으며 형의 목에 팔을 둘렀다. 내 스스로 엉덩이를 맞춰 다시 형의 것을 안으로 집어넣고 그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숨을 깊이 들이 마시자 익숙해진 체취가 한가득 머릿속을 채웠다.

안 가요, 안 가. 내가 어딜 가겠어. 형을 두고 내가 어딜 가요. 이렇게나 사랑하고 있는데.

***

하늬에게 전화가 왔다. 몇 번인가 문자나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던 것이 생각나서 미안한 마음에 머쓱해졌다.

“왜.”

-뭐어? 왜애? 잠수를 2주일이나 타고 기껏 전화를 받고 한다는 말이 왜애? 이쁘다, 이쁘다 하니까 진짜 네가 이쁜 줄 알지?

“무슨 헛소리야.”

흠, 흠. 헛기침을 하고 콩알만 한 목소리로 미안, 중얼거리니 하늬가 킥킥 웃었다.

-뭘 쫄고 그래. 너 예쁜 거 맞는데.

“됐어. 그러지 마. 징그럽게.”

-왜. 네 님이 안 해 주니까 싫으냐?

“어우, 진짜 왜 그래.”

전화기 너머가 소란스러웠다. 전화기를 살짝 떨어뜨려 놓고 인상을 찌푸리는데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지금 촬영 중이라 좀 시끄러워. 그래서 얘기는 좀 했냐?

“뭘.”

-장석이랑. 내가 살다 살다 그놈이 그런 꼴을 보일 줄은 몰랐지.

“뭐가?”

-어? 장석이 암말 안 했어? 둘이 합친 거 아냐?

“무슨 소릴 하는지 도통 모르겠네.”

-아오!

하늬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 웅웅 울렸다. 비상구나 좁은 방에서 전화를 받는 것 같다. 하늬는 미친 새끼, 또라이 새끼, 중얼중얼거리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너는!

“어?”

-너는 뭘 어쩔 건데! 그냥 앞으로도 쭈욱 걔랑 쿨한 척 섹스나 할 거야? 어? 그럴 거야?

“시, 시끄러! 너도 할 거면서…….”

-내가 하는 건 싫고, 딴 놈이랑 하는 건 괜찮아? 그래?

“됐어. 그만하자.”

-그럴 거면 나랑도 놀아. 요즘 장석이 나랑은 잘 안 놀아 준단 말이야.

“뭐래. 바쁘다며, 끊어.”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 있었다. 보름 가까이 쉬었던 것 때문에 사장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다. 최소 5분 전에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을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그때 돌연 전화기 너머로 ‘선배니이이임!’ 하고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씨. 저 새끼 또 저래, 또.

“뭔데?”

-몰라. 생또라이 같은 새끼 있어. 그럼 담에 밥이나 먹자.

전화를 끊고 창고 밖으로 나가자 마침 담배를 태우던 성철이 형이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내가 가게를 빠지는 동안 대타를 많이 해 줘서 미안하긴 했지만…….

“형이 여기 있음 가게는 누가 봐요.”

“어? 그러게.”

엄마야, 이거 사장한테 걸리면 엄청 깨질 텐데. 잰걸음으로 달려 가게로 들어섰다. 카운터 앞에 바른 자세로 서 있는 근사한 남자가 보였다.

“커피 마시러.”

형이 나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입이 비죽비죽 웃으려는 걸 꾹 참으며 계산을 하는데 결제할 카드 위로 작은 쪽지가 붙어 있었다.

[저녁에 보자.]

길쭉하게 뻗은 형을 닮은 글씨에 결국 참지 못하고 비실비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야, 너 왜 그래.”

성철이 형이 옆으로 와서 어깨를 툭 쳤다. 헤 벌어진 얼굴을 수습하고 돌아보니 성철 형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한동안 안 그러나 싶더니 너 요즘 저 새끼랑 부쩍 친하다?”

“어? 그런 거 아닌데. 그냥 단골이니까.”

“아닌 거 같은데. 그러다 너도 호모 된다니까, 조심 좀 해.”

성철 형이 손바닥으로 툭 엉덩이를 때렸다. 어제도 질펀하게 섹스를 한 탓에 꼬리뼈가 징징 울렸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아앗, 소리가 새어 나왔다. 성철 형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뭐, 뭐냐. 바, 방금. 나 닭살 돋은 거 보여?”

성철 형이 새빨갛게 된 얼굴로 뒷걸음질을 치다 카운터 끄트머리에 놓은 쿠폰함을 떨어뜨렸다. 쿠폰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져 널브러졌다.

“새, 새끼. 그러니까 내가 아, 아무나 친해지지 말라니까.”

헛기침을 하더니 귀까지 빨개져선 고개를 숙여 쿠폰을 주워 모았다. 나도 다리를 굽혀 그 옆에서 같이 줍는데 손이 닿았다. 어어억, 이상한 소릴 내면서 형이 뒤로 발랑 넘어졌다.

“돼, 됐어. 넌 냉장고 정리나 해.”

나를 팩 밀치고는 성철 형이 등을 돌렸다.

“씨발, 좆같네 진짜. 병신같이 에이, 씨발.”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욕을 하던 형이 귀를 쫑긋거리며 나를 돌아봤다.

“너한테 하는 말 아니다.”

“어, 어어.”

“에이씨. 나 담배 좀 피우고 올게.”

“방금 피웠잖아. 좀 있음 사장 올 텐데…….”

“아, 좀!”

엉망으로 쌓아 놓은 쿠폰을 올려두고 돌아서는 형의 소매를 붙잡았다. 성철 형은 화들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 내 손을 뿌리쳤다. 그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너, 조심해 인마. 어디서 야시꾸리한 눈을 부릅뜨고 있어.”

“나 눈 부릅뜬 적 없…….”

“씁!”

“네에…….”

쿵쾅쿵쾅 발소릴 내며 성철 형이 밖으로 나가 버리고 쿠폰을 한 장씩 방향을 맞춰 정리하는데 이마가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스케치북도 내려놓은 채 석이 형이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설프게 헤헤 웃어도 형은 마주 웃어 주지도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다가 휙 고개를 돌렸다. 무안한 기분에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던 것처럼 홀을 한 바퀴 빙 둘러보고 고개를 훅 숙였다.

가게를 나설 때까지도 형은 제법 무뚝뚝한 얼굴이었는데, 일이 끝나고 형의 집으로 가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리둥절해하며 혹시 오늘 기분 나쁜 일이 있었는지 묻자 형은 고개를 저었다.

“평범했어.”

“그래? 아까 기분이 안 좋아 보이길래.”

“아, 그거.”

형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우물거리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머리를 쓸어 넘기고 손가락으로 입가를 매만지다가 생각하길 포기했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형은 결국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그보다 내가 어디서 재밌는 물건을 받았는데.”

고급스럽게 포장된 검은 상자를 꺼내 와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윤기가 도는 상자에는 분홍색 리본이 감겨 있었다. 형은 손가락으로 상자를 톡톡 두드리다가 뚜껑을 열었다. 그 안의 내용물에 대해선 할 말을 잃었다.

“어어. 형, 설마…… 아니죠?”

“맞는데. 전에 인터뷰했던 여성지 기자가 선물로 보냈어. 내 사생활이 그렇게 흥미로웠나.”

내용물의 모양에 맞추어 홈이 파져 있었고, 파인 홈은 총 네 개였다.

“이, 이런 걸 줘요? 그 사람들 미친 거 아니에요?”

“뭐. 장난이겠지. 별생각 없는데 너한테 쓰면 재밌을 거 같아서.”

뜨끔. 가슴이 바늘에 찔린 듯 아프다. 잘 느껴서 귀여워, 너랑 하면 좋아, 재밌을 거 같아. 나쁜 말도 아닌데 형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가슴이 따끔거린다.

“에헤이, 나 그런 취미 없는데. 형 변태야?”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 중 하나를 꺼내 손에 쥐면서 형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커, 내가 커?”

“……비슷한가? 아니, 형이 좀 더 큰가?”

분홍색의 굵은 딜도가 형의 손에 쥐어져 있는 광경은 실로 묘했다. 형은 딜도를 든 채로 제 다리 사이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거 진동도 된다.”

아래쪽 버튼을 올리자 딜도가 꾸물꾸물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 벌레 같아. 저게 뭐야. 어깨를 안고 몸을 부르르 떠는데 형이 딜도를 내려놓고 로터를 집어 들었다. 역시 분홍색이었다. 근데 형, 딜도부터 끄면 안 될까요? 자꾸 기어서 이쪽으로 오는데.

“이거 써 본 적 있어?”

그럴 리가요. 동그란 바퀴 모양 레버로 진동을 조절하게 되어 있는 로터는 최대로 세기를 올리자 분신술을 쓰는 것처럼 잔상을 남기며 붕붕 움직였다.

“어느 게 좋아?”

형은 딜도와 로터를 양손에 쥐고 내게 선택하라는 듯이 내밀었다.

“그, 그 거기 나머지는 뭔데요?”

두 개가 남았잖아. 딜도는 징그럽고 로터는 무섭다. 저걸로 가슴을 문지르면 분명 소리도 못 내고 헉헉거리면서 흉한 얼굴을 할 게 뻔했다.

“이건 러브젤.”

물풀을 크게 만든 것 같은 둥근 통에 담긴 젤이 꿀렁이는 게 보였다. 포장지에 적힌 요란한 글씨를 읽어 보니 딸기 향이었다. 썩 기대되는 향은 아니었다.

“이건…….”

마지막 물건은 형도 낯선 모양인지 눈앞으로 들어 올려 이리저리 돌려봤다. 울룩불룩한 면봉 같다. 저게 뭐지. 투명한 케이스에 담겨 있는 흰색의 작은 막대는 아무리 생각해도 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 그거구나.”

형이 케이스를 내 쪽으로 넘겼다. 두 손으로 받아들고서 뒤에 붙어 있는 스티커의 설명을 읽었다. 엄마아, 거짓말하지 마.

“형, 진짜예요?”

“응.”

“이걸?”

“응.”

“거기에?”

“응.”

케이스의 아래위를 엄지와 검지로 집어 다리 사이에 슬쩍 대보았다. 거짓말. 말도 안 돼.

“에이, 형 장난치지 마요. 그런 게 어디 있어.”

“맞는데, 정말.”

내가 앉은 소파 등받이를 손으로 밀치듯 다가선 형이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숨이 닿을 거리에서 나를 은근히 바라보며 혀로 귓불을 핥았다.

“해 볼까.”

“뭐, 뭘.”

“이거. 써 보고 싫으면 버리자.”

으으응. 고개를 저었다. 망측하게 저게 무슨 장난이야. 딜도니 뭐니 하는 것들은 야동에서나 나오는 거 아니었나. 실제 성생활에서 저런 게 쓰일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니, 형이 쪼끔 밝히는 걸 감안한다 해도 꿈틀대는 딜도나 바르르륵 떨어 대는 로터는 징그럽고 무서웠다.

으으, 특히 면봉 같이 생긴 저건 꼴도 보기 싫다. 진짜 싫어.

“꼭 해야 돼요? 나 진짜 싫…….”

눈썹을 아래로 내려뜨고 입을 비죽 내밀어 작게 우물거렸다. 그 순간 별생각 없이 켜 놓았던 TV에서 화장품 광고가 흘러나왔다. 광고 모델은 요즘 제법 잘나가는 배우였다. 어린애처럼 순한 인상에 뽀얀 피부로 연상의 여자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었다. 강아지 같은 인상이 귀여워 기억하고 있었다.

“저 녀석.”

형은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막듯이 꾹 눌러 지분거리는 채로 TV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광고를 보던 형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을 뱉어 냈다.

“쟤 입으로 잘해.”

“응?”

“잘 받더라.”

두어 번 눈을 끔뻑인 뒤 형은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입을 맞춰 왔다. 눈을 굴리며 형의 표정을 살폈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형은 그저 마침 눈에 보이기에 말을 꺼낸 것뿐 뭔가를 의도한 건 아닌 것 같았다.

별생각이 없는 건 형뿐이고 나는 달랐다. 아직도 나는 형의 것을 반이라도 제대로 물어 본 적이 없다. 예전에 봤던 야동에선 입도 작은 여자들이 잘만 삼키고 물던데 나는 도저히 못 하겠더라. 반만 물어도 입이 아프고 턱이 얼얼해서 눈물이 찔끔찔끔 났다.

형은 아주 가끔씩만 입으로 해 줬지만 그때마다 정말 뿅 가게 좋았다. 그래서 나도 되돌려 주고 싶은 마음에 막대 아이스크림을 쭙쭙 빨아 보기도 했는데 이만 시리고 효과는 없었다. 형의 말에 따르면 ‘유난히 입이 작고 입 안이 예민해서’라지만 난 상추쌈도 크게 싸 먹고 이를 닦을 때 구역질을 하지도 않는다.

사실 나도 알고 있다. 마음은 안 그런데 몸이 아직 완전히 익숙해지질 않았다. 내 첫 키스도 첫 관계도 모두 형인데, 그건 내가 20여 년간 상상해 온 것과는 많이 방향이 다른 것이었다. 좋아하는 사람하고 한다는 건 같지만 내가 그런 곳으로 섹스를 하게 될 줄도 몰랐고 나랑 같은 게 달린 사람이랑 물고 빨게 될 줄도 몰랐다.

키스하는 것도 몸을 어루만지는 것도 모두 좋은데, 그걸 입에 넣는 것만은……. 솔직히 아직 익숙해지질 않는다. 그 구조를 빤히 알고 있고 그 감촉이 어떤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데, 심지어 형의 것은 좀 무서울 정도로 크다. 몸을 꽉 끌어안고 서로의 것을 비빌 때면 차라리 내 것은 귀여워 보일 정도였다.

사랑하면 그 사람의 코딱지도 예쁘다는데 그깟 고추가 뭐라고. 눈을 질끈 감고 이건 사탕이다, 바나나다, 소시지다 세뇌하며 빨아 봐도 맛있어지지 않았다.

내가 사실은 형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닐까. 형의 그럴듯한 겉모습만 좋아하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해 봤지만 그건 아니었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입에 무는 게 문제가 아니라 손에 쥐는 것조차 싫었을 테니까.

어설프게 형의 성기를 물고 고개를 들어 빤히 쳐다보면 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입에서 빼낸 것을 엉덩이 골에 문지르며 목덜미나 어깨를 깨물었다. ‘너 정말.’ 형이 으르렁거리듯 속삭이는 목소리에 움츠러들어 눈을 질끈 감곤 했다. 생각해 보면 형이 나같이 어설픈 놈과 섹스를 하면서 만족할 리가 없는데.

“해요.”

간신히 꺼낸 말에 살며시 눈을 감고 있던 형이 눈꺼풀을 들어 올려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형의 속눈썹이 뺨을 간질인다.

“저거, 해요. 재밌을 거 같다면서요.”

“싫은 거 아니었어?”

“아닌데. 나 완전 이런 거 궁금했는데.”

끔뻑끔뻑거리며 형의 옷깃을 쥐었다. 아닌 척 했지만 심장이 쿵덕쿵덕 뛰었다. 형의 손이 복부를 쓸고 내려가 하반신을 더듬고 봉긋하게 부어오른 주름을 문지를 때 옷자락을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이거 한번 잡고 있어 볼래.”

형은 내 손에 로터를 쥐여 주고 손목을 잡아 내렸다. 로터가 옷 위로 가슴에 닿았다. 리모컨 하나로 연결된 두 개의 로터가 나란히 유두를 누른다.

“그래 그렇게 대고 있어.”

형은 나직이 웃으며 로터의 진동을 올렸다. 간질간질 살갗에 진동이 닿는다. 으흐우, 아직까진 가슴 부근에서만 근지러운 느낌이 맴돌았다. 러브젤 뚜껑을 열어 향을 맡아 본 형이 옆으로 쭉 밀어 놓고 서랍에서 원래 쓰던 젤을 꺼냈다.

“냄새가 별로다. 딸기 좋아해?”

“아니요, 흐으, 읏…….”

손바닥에 젤을 쭈욱 짜내어 성기에서부터 회음까지 넓게 문질렀다. 가슴에 고여 있던 저릿한 느낌이 순식간에 배꼽을 지나 허벅지까지 내달린다. 온몸이 저릿저릿하다. 복부가 옴찔거리며 튀었다. 손가락이 안으로 파고드는 느낌이 서늘하다. 가슴이 빠르게 뛰는데 비단 쾌감이나 부끄러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귀여워.”

어깨를 둥글리며 쓰다듬는 손길이 상냥해서 시야에 자꾸 들어오는 것을 무시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열기를 띄지 않는 것이 주름을 누르며 빙글 돌았다.

“하윽, 흐으윽. 혀, 형, 그거 너무 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귓가에 속삭이던 형의 입술이 입가로 다가와 키스를 했다. 서로의 입술을 당기고 혀를 내어 핥는 사이 젤에 끈적하게 젖은 딜도가 쑥 안으로 들어왔다. 둔통에 가까운 아릿한 느낌에 눈물이 찔끔 나서 입술을 깨물었다. 형은 손으로 턱을 살살 문질러 내 입을 벌리게 하고 다시 입을 맞추었다. 질척한 키스가 이어지는 동안 딜도는 거의 끝까지 삽입됐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흑, 아파아……. 흐으응, 빼 줘. 아파…….”

“여긴 섰는데.”

손가락이 톡, 선단을 건드렸다. 형의 말대로 아프다는 말과 달리 내 성기는 바짝 선 채로 꺼떡꺼떡 흔들리고 있었다. 다리를 배배 꼬면서 필사적으로 감추는데 형의 두 손이 무릎을 잡아 벌린다.

“귀엽다니까.”

쪽. 형이 젤과 프리컴으로 젖은 내 성기에 입을 맞췄다. 찌르르. 가슴에 진동하는 로터보다 안에서 꾸물꾸물 요동치는 딜도보다 훨씬 짜릿하다. 허리가 들썩였다. 두 다리를 형의 허리에 감아 문지르고 싶다. 형에게 안겨 아무 생각도 나지 않도록 흔들리고 싶다.

두 손으로 쥐고 있던 로터도 놓아 버리고 형의 목에 매달렸다. 형은 나를 뿌리치지 않고 허리를 감싸 안은 채로 성교하듯 딜도를 움직였다. 형의 숨결이 귓가에 스치고 손바닥이 엉덩이에 닿아서 진짜 섹스를 하는 것 같았다. 딜도를 깊은 곳까지 꾸욱 눌러 빙글 돌릴 때 ‘별아’ 하고 거친 숨소리로 부르는 형의 목소리에 픽 사정해 버렸다.

“벌써 나왔네. 기분 좋았어?”

형의 입술이 젖은 머리칼을 헤집어 누른다. 예민해진 안쪽을 쉼 없이 건드리는 딜도 때문에 몸이 달아서 형의 허벅지에 다리 사이를 눌러 스스로 문질렀다. 입이 마르고 머리가 뱅글뱅글 돌았다. 뜨거운 손바닥이 가슴과 복부를 느리게 문질러 주는 것이 기분 좋다.

손가락으로 유두를 집어 당기고 로터로 옆구리 선을 쓸어내리는 감각이 허리를 따라 머리까지 울린다. 자꾸만 가슴을 괴롭히는 형의 팔을 당겨 끌어안고 뺨에 문질렀다. 형은 곤란한 듯이 웃다가 손가락으로 뺨을 톡톡 두드렸다.

“안 되지, 그럼.”

달칵. 플라스틱 뚜껑이 열리는 소리에 가물가물한 시야를 억지로 떴다. 형은 흰색의 올록볼록한 막대를 들고 있었다. 애써 모른 척하고 있던 불안함이 쾌감을 누르고 목구멍까지 단숨에 차올랐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숨이 거칠다.

“별아, 이리 와 봐.”

형은 소파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그 사이의 빈 공간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여전히 반대쪽 손에는 막대가 들려 있었다.

“시, 싫은데…….”

“이리 와.”

커다란 형의 손이 목 뒤를 부드럽게 주무른다. 머리끝까지 돋았던 소름이 잠시나마 가라앉았다. 그래, 별것 아니야. 고작해야 손가락 길이만한 막대일 뿐인데. 나를 해칠 일도 없고, 형은 나를 다치게 하지 않는다.

형의 무릎 사이에 앉아 등을 가슴에 기대었다. 고개를 돌려 형의 목덜미에 파묻고 눈을 감았다. 젤로 끈적해진 손이 성기를 쓸어 올렸다. 흠칫 몸을 떨며 맥이 뛰는 자리에 입술을 눌렀다. 땀이 흐른 체취가 나를 진정시켰다.

“조금만 참아.”

뾰족한 것이 귀두 끝을 건드렸다. 어깨가 굳었다. 그것은 귀두의 주변을 맴돌며 예민한 살갗을 살살 긁어내렸다. 소파의 쿠션을 쥔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요도 입구에 다소 버거운 굵기의 막대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코와 입이 틀어 막혔다. 눈을 감아도 보였다. 오히려 선명했다.

드드드드드드득, 드르륵, 득득득, 드르르륵.

손가락을 짓이기던 바늘 끝이 나를 노리고 있다. 조금만 긴장을 풀면 내 벗은 몸을 온통 벌집으로 만들고 말거다. 몸이 굳었다. 식은땀이 흘러 몸이 미끄러졌다. 막대기가 조금 더 깊게 파고들었다.

무서워서 죽을 거 같아.

“흑, 끄으으……. 으윽, 흑! 싫, 싫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손과 발을 버둥거렸다. 형의 팔을 밀어 내고 몸부림을 치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팔로 머리를 감싸 쥔 채 벌벌 떨었다. 눈앞이 캄캄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드드드득. 요란한 재봉틀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별아, 왜 그래.”

“싫어……. 싫어, 아파……. 하지, 마. 무서워. 흐윽, 엄마, 무, 무서워……. 아파요.”

숨이 막혀서 가슴을 쥐어뜯었다. 내 팔을 붙드는 손길을 밀쳐 내며 몸부림을 쳤다. 손과 발을 마구 휘둘러 밀어 내며 엉엉 울었다. 그가 나를 붙잡아 바늘 밑으로 집어넣을지도 몰라. 이번엔 손가락이 아니라 팔도, 다리도, 온통 찢어 놓으려고. 붙잡히면 죽을 거야.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손길은 나를 놓아 주지 않고 점점 더 센 힘으로 몸을 눌렀다. 힘이 빠져 늘어진 채로 눈물만 줄줄 흘릴 때까지 나를 누른 팔과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일은 없었다.

시야는 부옇게 떠 허공으로 흩어지고 몸은 버석버석한 모래 더미가 되어 손끝부터 부서지는 것 같다. 차라리 때리고 부수어 내팽개쳤으면 좋겠다.

온몸으로 퍼진 공포는 쉽게 가라앉지를 않았다. 심장박동은 여전히 지나치게 빨랐고 목으로 껄떡껄떡 넘어가는 숨으로 괴로웠다. 몸이 저리고 아프다. 맞은 곳도 없는데 전신에 멍이 든 것처럼 쑤셨다.

“별아. 나 좀 봐.”

아까부터 누군가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나를 불렀다. 다정하고 애절하게. 나를 무척 아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상하다. 울 엄마 말고 나 좋아하는 사람 없는데. 몽롱한 정신에도 괜히 서러워져서 코를 훌쩍이며 울었다.

“괜찮아. 이제 아무것도 없어.”

곱아든 손가락을 펴고 그 사이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깍지를 꼈다. 손을 단단히 붙잡으며 목소리는 다시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목소리에 온기가 담겨 있었다. 속삭임을 듣는 것만으로도 차갑게 식은 몸에 조금씩 열이 났다.

“착하지. 여기 봐.”

눈을 깜빡였다. 쉬지도 않고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온 탓에 눈을 뜨는 것도 버겁다. 눈꺼풀이 무겁다. 어른어른 흐릿한 시야로 사람의 형상이 비친다. 까만 머리에 까만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사람이다. 눈을 떼지 못하고 벌어진 입으로 밭은 숨을 쏟아 내었다.

“그래. 천천히 숨 쉬어. 그래, 그렇게.”

토닥토닥 가슴을 얌전히 두드려 주는 손바닥이 기분 좋다. 좀 더 토닥여 주면 좋겠다. 머리도 쓰다듬고 끌어안아 등도 쓸어내려 주면 좋겠다. 눈을 감고 물에 잠긴 듯이 찰랑찰랑 흔들리고 싶다.

“착하지. 울음 그치고, 뚝. 응. 착하다, 우리 별이.”

이마에 닿는 입술을 보지 않고도 그려 낼 수 있다. 그 색과 벌어지는 모양, 입 안의 열기까지 나는 알고 있다.

이 사람은 누구더라. 아주 좋은 향기가 난다. 큰 손이 기대한 대로 머리칼 사이를 빗어 내리는 것이 기분이 좋아 눈을 감고 몸을 비비적거렸다.

목소리는 나를 당겨 안으며 느리고 따뜻하게 나를 어루만졌다. 아, 기분 좋아. 아주 어릴 적 엄마의 냄새를 구분해 낼 수 있던 시절의 아련하고 평온한 기운에 휩싸인다. 엄마의 가슴 아래에서 날 것 같은 살 내음과 작은 몸이 온전히 감싸 안긴 안정감에 코가 시큰거린다.

“내가 잘못했어.”

간신히 꿀꺽 삼켰던 울음이 목을 아릿하게 비집으며 올라와 턱이 바르르 떨렸다. 그 말이 왜 그렇게 서러운지 모르겠다.

목소리는 내 뺨과 이마에 번갈아 입을 맞추며 용서를 구했다. 가슴이 턱 막히는데 그게 왜 그런지를 알 수 없어서 울음을 한숨으로 내쉬는 이상한 소리만 났다. 나는 그 사람에게 온몸으로 매달려 얼굴을 묻고서 몸을 떨었다. 너무 추웠다.

***

정신을 차린 건 새벽이었다. 몸이 뻣뻣하다.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구분하기도 어려울 만큼 눈꺼풀이 무거웠다. 마라톤이라도 뛴 것처럼 근육통에 팔다리가 저릿저릿했다.

으, 이게 무슨 일이야. 손바닥으로 뺨을 누르고 이불에 옆얼굴을 문질렀다. 지독한 숙취처럼 머리도 아팠다.

이불에 얼굴을 푹 묻은 채로 깊게 호흡하자 달큰한 섬유유연제 향이 났다. 눅눅한 곰팡내가 나는 집의 이불이 아니었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다 떠야 반밖에 떠지지 않는 눈을 크게 뜨고 눈동자를 굴렸다.

밤사이 저질렀던 일들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맙소사.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미쳤나 봐. 발작으로 뒤집어졌던 순간은 드문드문 끊겨 있었지만, 그 뒤에 형에게 매달린 채로 몸이 씻긴 것과 춥다고 떼를 부리며 몸을 옹송그려 옷을 갈아입히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순간들은 생생했다.

형은 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내가 춥다는 말로 눈물을 억지로 짜내며 엉엉 소리 내는 것을 차분히 달래었다.

‘추워? 이리와. 잠깐 안고 있자.’

나를 품에 넣고 떨림이 멎기를 기다렸다가 티셔츠를 입히고, 다시 투정을 부리며 끅끅 우는 것을 달래어 속옷과 바지를 입혔다. 기어이 목에 매달려 놓지 않는 것을 침대까지 옮겨 잠들 때까지 등을 토닥여 주었던 것까지 모조리 기억이 났다. 심지어 마지막 기억은, ‘나 잘 때까지 어디 가면 안 돼.’였다.

미쳤지, 미쳤어. 죽자 단샛별.

이런 발작이 처음인 건 아니었다. 다들 절차는 비슷했다. 선단 공포증을 눈치 챈 사람이 생기고 그중 한두 명은 반드시 짓궂거나 못돼 처먹었다.

처음엔 젓가락이나 연필로 장난을 치며 내가 경기를 일으키는 꼴을 지켜보던 놈들이 체한 것을 따 준다는 이유로 바늘을 꺼내 손가락을 찌르거나 단추를 꿰매 준다는 구실로 팔뚝에 바늘을 들이댈 때 눈이 뒤집어지고 발작이 나는 것이다.

그때마다 나타나는 꼴사나운 모습에 대해선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 차라리 눈을 뒤집고 몸을 떨어 대는 거면 부끄러움은 덜할 텐데, 내 발작이라는 건 어린애가 발광하며 떼쓰는 모양에 가까워서 끝난 뒤의 쪽팔림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남고였던 고등학교 때 짝꿍에게 폭 안겨 양호실까지 실려 갔던 것은 물론이고 군대에서 아버지뻘 선임에게 낑낑거리며 그 무릎 위에 앉아 잠들었다는 건 거의 전설이었다.

아무튼, 이놈의 지랄병은 낫지도 않는다. 무슨 대단한 트라우마라고 여지껏 가슴에 품고 사는지 어이가 없다.

이쯤 되면 툭툭 털고 대바늘로 이불이라도 꿰매야 나이에 맞는 건데, 아직도 주사가 무서워서 병원엘 가지 못한다니 이건 진짜 웃겼다. 제대로 보험을 들어 놓은 것도 없지만 그 때문에라도 나는 아프면 안 된다. 답도 없었다.

슬금슬금 옷을 챙겨 입고 뒤꿈치를 들어 몰래 빠져나갈 준비를 했다. 어깨를 한껏 움츠리고 어둠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딛었다. 현관에서 센서 등이 켜졌을 때는 바짝 얼어 목이 뻣뻣할 정도였다. 형이 어디 있는지 몰라도 다행히 내다보지 않았다.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 문고리를 심혈을 기울여 쥐고 돌렸다. 달칵. 현관문이 닫히고 나서야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새벽의 공기는 차갑고 상쾌했다. 퉁퉁 부은 두 눈이 딱 알맞게 시원하다.

콧노래를 부르며 비상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갔다. 펑펑 울어서인지 쪽은 팔려도 어딘가 가슴에 응어리졌던 곳이 시원하게 비워진 기분이다.

“어디가.”

아파트의 입구를 벗어나려는 찰나, 형의 목소리가 뒷덜미를 붙잡았다.

“어어, 형…….”

형은 드물게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담배를 피우는 건 처음 본다. 눈을 끔뻑이며 빨갛게 불이 타들어 가는 담배를 보고 있으니 형이 재를 털어 내고 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담배를 비벼 껐다.

“좀 더 자지. 왜 벌써 가.”

쪽팔려서요. 형의 얼굴을 보자 찬 공기에 수그러들었던 부끄러움이 다시 되살아났다. 형의 입술 사이에서 연기가 길게 흘러나와 새벽의 공기에 흩어졌다. 입김처럼 보이기도 했다.

담배라면 질색을 하는 나였지만 형이 담배를 피우는 건 넋을 놓고 보게 된다. 구름을 한입 물어 곱게 불어 내면 그런 모양이 날까. 그 숨을 받아 삼키면 가슴이 사르르, 녹을 것 같다.

마음과는 달리 바람이 불어 코로 연기가 스며들자 급한 기침이 났다. 주먹으로 입을 꾹 누르고 기침을 참았다. 대신 눈물이 찔끔 나왔다. 형은 놀란 얼굴로 눈썹을 치켜 올리고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얼굴이 창백해. 자고 가. 안 되겠어.”

“싫, 어요. 갈래요.”

“왜.”

“부끄러워.”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 형의 손을 피했다.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시선 끝에 지저분한 운동화 앞코가 보였다. 운동화마저 초라하다. 그 끝을 바닥에 비비면서 헐겁게 묶인 운동화 끈만 노려보았다.

“별아.”

“응.”

“부끄러울 거 없어.”

뒤로 피하기도 전에 형의 손이 먼저 내 턱을 쥐었다. 가지런하게 내려앉은 눈썹이 다가왔다. 그늘진 깊은 눈매가 고요히 날 바라본다. 새벽 공기에 차갑게 식은 콧등이 뺨에 눌렸다. 담배 연기의 잔향이 남은 입술이 다가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어제 정말 예뻤어. 정말이야.”

하아. 작게 내쉬는 숨결이 뺨을 스치고 귓가에 닿았다. 옴찔, 귀가 움츠러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동그랗게 몸을 말고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가슴이 너무 크게 뛰어서 숨을 쉬기가 벅차다. 아마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을 거다.

“……정말. 그런 소리 아무한테나 하면 안 된다니까.”

형은 작게 웃었다. 내 어깨를 당겨 세게 꼭 한번 끌어안고 머리칼에 턱을 부볐다. 가지 말지. 조금만 더 있지.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형의 말투에 코가 시큰했다. 찬 공기에 알몸으로 선 것처럼 몸이 춥다. 방금 전까지 누워 있던 포근하고 향긋한 형의 침대가 간절해진다. 그러나,

“갈래요.”

꿈이 달면 깨어난 뒤는 더 허망한 법이다. 형과 함께 맞는 아침은 너무 행복해서, 쏟아지는 햇살이 비추는 형의 잠든 얼굴을 보는 일은 너무 벅차서, 그래서 내가 감당할 수가 없다.

손이 떨려서 차마 형의 얼굴을 쓸어 보지도 못하고 주먹을 움켜쥐었던 아침을 기억한다. 아,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 딱 죽어도 좋겠다. 목까지 울음이 차올라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잠든 척 숨을 들썩였다. 기약 없는 행복이 무서웠다.

“또 봐요.”

아침을 맞이한 채로 헤어지는 것보다 내일을 약속하며 헤어지는 편이 견디기가 쉽다.

“그래. 그럼.”

손을 흔들며 돌아서는 형의 뒷모습을 보는 것보다 먼저 돌아서는 편이 덜 아프다. 그래서 나는 형한테는 제법 쿨할 수 있는 모양이다. 이 정도의 쿨함이 딱 알맞다. 더 뜨거워지지 않도록 찬 공기를 담뿍 들이마셨다. 코까지 뻥 뚫려 눈물이 쏙 들어갔다.

***

오랜만에 주말을 형과 함께 보냈다. 팽팽 놀았던 결과로 주말에도 쉬지를 못 하다가 3주 만에 맞이한 휴일이었다. 그래 봐야 일요일은 출근을 해야 했고 쉬는 건 토요일뿐이었지만 충분했다.

“그래? 쉬는 날이라고? 쉬지 않아도 괜찮아?”

“뭐, 괜찮아요. 아직 젊으니까.”

전화를 걸어 휴일을 알리자 형은 걱정스런 목소리로 피곤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별이 쉬니?”

통화로 휴일에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조잘조잘 떠드는데 뒤에서 엄마가 물었다. 엄마의 표정에서 기대감과 불안함을 동시에 읽어 냈다. 내가 형에게 ‘바빠요?’ 하고 물을 때의 표정과 비슷했다. 손가락으로 휴대폰 볼륨 버튼을 만지작거리다가 스피커를 막았다.

“아니. 이번 주까지는 안 될 거 같아.”

“으응, 그래.”

“응. 미안.”

“미안할 것도 셌다. 엄마도 바뻐. 신경 쓰지 말어.”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는 척 몸을 비틀며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고 나서야 전화기를 귀에 붙였다. 여보세요? 다급히 묻자 느긋하게 응, 대답하는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어? 생각나는 거 없는데.”

“맛있는 거 먹을까.”

“형이 해 주는 밥이 젤 맛있는데.”

“그거 말고.”

가볍게 목을 울려 웃은 형이 말했다. 나도 좀 쉬려고. 농담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해서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어어, 이게 아닌데. 혹시 형을 밥순이 취급했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안절부절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당연히 쉬어야죠. 저는 그냥 아무거나 주워 먹어도 되는데!”

“그냥, 겸사겸사. 볼일이 좀 있는데 괜찮으면 조금 기다렸다가…….”

“네!”

“뭔지 안 들어 봐도 돼?”

안 들어도 예쓰! 들어도 예쓰! 네, 네, 네, 돼요, 돼요! 다섯 번씩은 외친 것 같다. 보일 리가 없는데도 전화기를 들고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럼.”

“네! 네! 꼭이요! 꼭!”

그대로 전화가 끊기나 싶어 형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라도 더 들으려 귀를 바싹 붙이는데 형이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몸은 어때?”

“예?”

“그때 말야. 안 좋아 보여서 혹시나 하고.”

“아하하, 괜찮다고 얘기했잖아요. 부끄럽게 왜 자꾸 묻고 그러실까.”

픽 쓰러지는 것도 아니고 발작하듯 떨어 댔던 내 꼴에 꽤 많이 놀랐던 듯 형은 때때로 정말 괜찮은지 물었다. 괜찮다고 밀어 내는 말에 물음을 삼키는 표정은 단순한 걱정이 아닌 해소되지 않은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그에 대해 더 얘기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어서…….”

형이 말을 흐린다. 뒤에 따라붙을 말들이 불안하다. 듣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고 엄지를 가져가는데 형이 한숨처럼 말을 덧붙였다.

“써 봤는데 별로였어.”

“뭘?”

당황스런 맘에 말이 짧아졌다. 눈을 크게 뜨고 끔뻑였다. 형은 말을 하는 도중에 망설이는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말을 꺼내기 전엔 할 말을 고르며 음, 하고 침음성을 내는 습관이 있었다. 음, 으음, 잠시 뜸을 들이던 형이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별로 아파하진 않았는데, 생각보다 재미없더라.”

“아하하, 하하…….”

머리가 핑글 어지럽다. 이게 무슨 소리지.

“걔네요?”

“아, 응. 너도 봤던가. 한 명은 본 적 있을 텐데. 그…… 머리가 새빨간.”

“아, 그 사람.”

하하하, 아하하, 실없이 웃음을 흘리면서 질끈 눈을 감았다 뜨길 수십 번 반복했다. 알다마다. 바로 저번 주에 마주친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집 안이 아닌 밖이었지만 발긋한 얼굴과 붉은 눈, 흐트러진 머리, 강렬한 머리색. 한눈에 형의 ‘상대’라는 것쯤은 알아봤다.

게이더라고 하던가. 이젠 형의 아파트 근처에서 보는 사람들 중에서 골라 낼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일주일에 보통 두세 명쯤. 형은 지치지도 않아요? 섹스가 끝난 뒤 침대에서 넌지시 물었었다. 형은 손으로 내 등을 쓸어내리다가 발갛게 부어 오른 엉덩이를 꽉 쥐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그러니까 그때 그 남자의 새빨간 모습은 모두 딜도와 로터, 빨대 삼 형제의 작품이라는 소리였다. 세 놈을 다 썼을지 한 놈만 죽자 사자 썼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에이, 그렇다니깐. 사람이 살을 맞대고 살아야지 그런 걸 쓰면 쓰나.”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 가는데도 내 목소리는 태연하다. 전화라서 다행이다.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상태에선 목소리마저 떨렸을 거다. 손등으로 눈두덩을 슥 문질러 닦고 비실비실 웃음을 흘렸다.

“그렇지만…….”

형은 못내 아쉬움이 남는 목소리로 말을 얼버무렸다.

“그럼 그렇게 하고 싶음 차라리 나한테 써요. 아, 면봉만 빼고.”

일부러 과장스럽게 말한 보람이 있었다. 형은 하하 웃으며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목소리가 떨리는 걸 가리기 위한 과장법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통화는 더 길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나는 끝까지 태연함을 가장할 수 있었다.

이런 건 형에게 돌아오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별것 아니었다. 형은 내가 보기에 충분히 애쓰고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저녁을 먹다 형의 휴대폰에 벨이 울렸다. 무방비하게 놓인 휴대폰의 액정을 흘끔 보자 ‘별이 오는 날’이라고 쓰여 있었다. 알람이었다. 어라, 이게 뭐지? 무심결에 알람을 끄는 내 손에서 휴대폰을 가져간 형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너 다른 사람 마주치는 거 안 좋아하는 거 같아서.’

틀려? 눈을 올려 뜨며 순종적인 대형견처럼 묻는 형이 귀여워서 웃어 버리고 말았다. 맞아요, 맞아. 나 부끄러움 많잖아. 다른 사람이랑 마주치면 부끄러. 그 사람도 그럴 거야. 와르르 웃으며 꺼낸 대답에 형이 눈을 반짝이며 마주 웃었다.

‘다행이다. 나 너한테 전화 오면 알람 먼저 맞춰. 시간 감각이 없으니까, 알람이 없음 며칠인지도 모르겠어.’

‘잘했어요. 우리 형 완전 착하다. 나 싫을까 봐서?’

‘또…….’

머뭇거리던 형이 수줍은 얼굴을 하고 입술을 늘여 배시시 웃었다.

‘또, 사라지면 안 되니까.’

오목이 들어간 깊은 눈이 나를 응시했다. 형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호흡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봐도 봐도 형은 너무 근사해서 때로 나를 보고 나붓하게 미소라도 지을 때면 아찔, 숨이 멎을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정도는 괜찮다. 쓰레기통에서 발견하는 사용한 뒤의 콘돔과 침대 밑에 떨어진 다른 이의 속옷, 다른 이와 만날 약속을 하는 모습 같은 건 눈을 감고 모른 척 넘기면 그만이다.

숨을 가만히 멈추고 눈을 감고서 속으로 되뇌는 것이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화낼 일도, 슬퍼할 일도 아니야. 형은 나를 속이지 않았어. 나는 그저 형의 섹스 파트너일 뿐이야.

생각보다 나는 마음이 단단한 모양이다. 내 처지를 바닥에 툭 던져 놓고 있는 그대로 보다 보니 적응이 되었는지 아니면 애초부터 무덤덤한 성격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형과 섹스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상대로 한 섹스에 대해서.

‘가끔 오는 놈들 중에.’

‘응.’

‘키스만 하면 싸 버리는 녀석이 있어.’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형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예전 같았으면 형이 다른 사람과 키스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저릿저릿해서 말도 못했을 텐데 이제는 웃기도 했다. 하하 웃으면서 손바닥으로 형의 등을 찰싹 두드렸다.

‘그게 뭐야. 키스 잘한다고 자랑해요?’

‘그런 건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형이 얌전히 눈을 감고 내게 입술을 내밀었다. 가볍게 쪽, 입술을 부딪치고 혀를 내밀어 할짝이자 형이 낮은 웃음을 흘리며 가늘게 눈을 떴다.

‘별이 너도 잘해.’

‘아, 하하, 하하……. 그, 렇다니 다행이네.’

형의 가슴 부근에 시선이 뱅뱅 돌았다. 형은 내 턱을 쥐고 눈을 뜬 채로 입을 맞춰 왔다. 나 또한 눈을 감지 않고 형과 시선을 맞췄다.

배꼽이 홧홧하게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수십 번도 넘게 한 키스 때문에 몸을 부비는 사이에도 얌전하던 성기가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형의 까만 눈동자가 내 얼굴을 핥을 듯이 살피는 것에 발가락이 곱아들고 허벅지 안쪽이 간지러워졌다.

‘지금처럼만 해야겠다.’

다리 사이에 뜨겁던 것이 조금 식었다. 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먼저 다리 사이에 형의 허벅지를 끼워 문질렀다. 발긋한 눈가는 성욕 때문인 것처럼 입과 눈을 흐물흐물하게 풀어 헤픈 얼굴을 하고 형의 뺨에 콧등을 문질렀다

‘형, 내일 상관없으니까 지금 해요. 하고 싶어졌어.’

‘또 그런다. 울 것 같은 얼굴.’

눈을 질끈 감았다. 형은 내가 때때로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키스를 하거나 섹스를 한다고 놀리곤 했지만 그건 여지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형과 키스하고 살을 맞대는 매 순간마다 울고 싶어졌다. 나는 여기까지, 여기까지만. 형과의 스킨십이 농밀할수록 나는 스스로의 위치에 못질을 한다.

그래. 오늘도 여기까지만.

***

피곤함에 눕자마자 뻗어 버렸던 전날 밤과는 달리 토요일 아침은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다. 새벽 5시였다. 형과의 약속은 12시. 아직 여섯 시간이나 남아 있는데도 더 잠이 오지 않았다.

시내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오후에 잠깐 형이 볼일을 보는 동안 기다리기로 했다. 그 뒤는 아직 미정이었다.

드라이브라도 할까? 아님, 일찍 들어가서 쉴래? 형이 물었을 때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던 건 기쁜 마음을 그대로 토해 낼까 봐여서였다. 이거 진짜 데이트 같잖아. 어떡해. 심장이 쿵쿵 뛰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4시에 첫 물을 담았다는 깨끗한 탕에서 30분이나 몸을 불리고 박박 몸을 밀었다. 형이 무리하지 말라는 듯 나를 얼렀으니 오늘 밤은 아무 일도 없이 귀가할지도 모르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라 엉덩이도 뽀독뽀독 닦았다. 자주 핥아지는 귀 뒤쪽이나 팔 안쪽, 허벅지 사이는 더더욱 신경 써서 닦았다.

거울이 부옇게 흐린 탓에 잘 몰랐는데 몸을 헹구면서 보니 몸 이곳저곳이 키스 마크로 얼룩덜룩했다. 뜨거운 물에 담갔다가 바로 타월로 문질러서 살이 벌겋게 익은 탓에 도드라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집에 돌아와 보리차에 밥을 말아 먹고 밖으로 나섰다. 적금 부을 돈과 엄마에게 생활비로 건네는 돈, 병원비로 사용할 비상금을 빼고 나면 쓸 수 있는 돈은 20만 원 정도였다.

친구가 없어서 다행이다. 쉬는 날에 나갈 일이 없으니 내 용돈은 그대로 굳었다. 형과 만날 땐 늘 집에서 만나니까 특별히 돈이 들지도 않는다. 그동안 형을 만난답시고 속옷을 몇 개 사고, 옷도 조금 사고, 부끄러워서 써 보진 못했지만 왁스나 향수 따윌 사 본 것이 지출의 전부였다. 그렇게 모인 돈은 조금 더 있지만 지난달 엄마의 한약을 짓느라 대부분 써 버렸다.

이건 어쩌면 형과 나의 첫 데이트다. 아니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곤란하다. 그냥 가볍게 밥을 먹을 수도 있지. 아는 동생이랑 섹스도 하는데 밥쯤이야…….

비뚤게 흐르기 시작하는 생각을 바로 잡으며 두 손으로 뺨을 탁탁 두드렸다. 어찌 되었건 형과 함께 시내로 나가는 건 처음이어서 긴장됐다. 어떻게 해도 비교될 수밖에 없겠지만 하다못해 형이 부끄러워지는 건 막고 싶었다.

집 근처의 번화가로 가서 평소 입는 것과 다른 부드러운 질감의 바지와 단추가 많은 셔츠를 샀다. 일을 해야 하니까 무조건 편하고 구김이 가지 않는 것들만 입었어서 살에 감기는 듯한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 낯설었다. 점원은 다리가 예뻐서 잘 어울린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거짓말하지 마요. 우리 형 다리가 훨씬 예쁜데.

집으로 돌아오니 어느새 10시였다. 구김이 가지 않도록 조심해서 바지를 끼워 입고 무난한 티셔츠 위로 진녹색 셔츠를 걸쳤다. 단추가 달린 옷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단추가 떨어지면 바늘을 써야 하는 탓에 어느새부터인가 입지 않았다. 교복을 입을 때도 단추가 떨어지는 것이 싫어서 체육복을 입었을 때가 아니면 뛰어놀지도 않았던 나였다.

“저, 저기, 실례합니다.”

댕그랑, 청량한 종소리가 울렸다. 다음 코스는 미용실. 늘 다니던 곳이 아닌 전면 유리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제법 큰 미용실이었다. 밝은 조명에 절로 목이 움츠러들었다.

“어머, 무슨 일로 오셨어요? 커트? 파마?”

“그…… 저기 미용실에서 거, 것도 해 주신다고…….”

눈 화장이 유독 진한 여자가 빨간 입술을 휘어 웃으며 다가왔다. 쭈뼛거리며 가방에서 집에서 가져온 왁스를 꺼냈다. 손바닥에 한번 덜어서 문질렀다가 소가 핥은 것처럼 눌린 머리가 돼서 다시는 써 보지 않은 거였다.

“아, 머리 왁스하시려구. 다듬진 않아도 돼요? 손질 좀 해야 될 거 같은데.”

“그, 그건 괜찮아요!”

자리로 안내돼서 목에 가운을 두르면서도 혹시나 그들이 가위를 가져오지는 않는지 연신 흘끔거렸다. 옆자리에서 머리가 긴 여자가 서걱서걱 머리칼을 자르고 있었다. 침이 꼴딱 넘어갔다.

다른 미용실에 와 본 것은 처음이었다. 가위질이 무서워 도저히 혼자는 자를 수가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미용실을 향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는 더 무서웠다.

그나마 동네의 미용실에서 타협한 것이 눈을 감은 채로 가위 날이 목덜미나 귀 뒤에 닿지 않도록 자르는 거였다. 끄트머리에 지저분한 부분들을 손발을 꽉 움키고 1분 안에 빠르게 정리하는 식이었다. 머리를 한번 자를 때마다 눈물을 줄줄 흘리는 꼴을 아무 곳에서나 보일 수는 없었다. 엄마가 아는 분이 나 중학교 무렵 미용실을 개업한 뒤로 줄곧 그곳만 다녔다.

“그래도 얼마 안 받을 테니까 밑에만 좀 다듬을래요? 이대로 하면 머리 모양도 많이 안 예쁜데요.”

여자는 애교스런 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에 가위를 끼우고 짤각거렸다. 나는 고개를 재빠르게 저으며 눈을 크게 떴다.

“진짜 괜찮아요! 진짜로! 머리 안 자르면 안 되는 거면, 갈게요.”

“아이, 그건 아니지. 기다려 봐요. 이건 넣어 두고, 우리 쓰는 거 있으니까 그걸로.”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불안한 표정을 하는 것에 이상함을 느꼈는지 여자는 좀 전보다 다소 굳어진 미소를 지으며 가위를 내려놓았다.

그 뒤는 꽤 순탄했다. 여자는 머리칼을 축축이 적셨다가 드라이기로 다시 말렸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느낌이 나쁘지 않아 가만히 눈을 감고 허벅지 사이로 손을 끼워 넣었다. 형과의 하루를 떠올리며 배실배실 웃는데 여자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원래 성격이 밝은 건지 아니면 직업적인 고충인지는 모르지만 여자는 대꾸가 시원찮은 내게 자꾸만 말을 걸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 반이었다. 만나기로 한 역이 코앞이라서 뛰어가면 그만이지만 초조해졌다. 가운 아래로 손바닥을 비비며 신발 안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데 여자가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문질거리며 말을 걸었다.

“일부러 미용실까지 오신 거 보면 좋은 데 가시나 봐요. 데이트?”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저, 저기, 제가 시간이…….”

“금방 해요, 금방. 어, 손님. 전화 오는 거 같은데.”

거울에 달린 선반에 올려놓은 전화기가 부르르 진동하고 있었다. 형이었다. 잠시 양해를 구하고 전화기를 귀에 닿지 않도록 조금 떼어 들었다.

“어, 별아. 어디니.”

“설마 벌써 도착?”

“응. 생각보다 차가 안 막혀서.”

“어어, 어쩌지. 나 지금 당장은 못 나가는데.”

“손님, 5분이면 되는데.”

곤란해하는 내 얼굴에 뒤에 서 있던 여자가 소곤거렸다. ‘어디야?’ 탁, 차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고 바깥의 소음이 짙어졌다.

“……미, 미용실이요.”

“그래.”

기어이 미용실 이름까지 물어 대답을 들은 형은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미용실에 나타났다. 계산을 하고 있는데 점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 남자 봐. 잘생겼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배운가? 아니야. 저 사람 그 사람이잖아, 장석. 어쩐지. 잘생긴 남자는 임자가 있거나 게이거나 고자거나 셋 중 하나라더니. 희망을 갖자. 고자라서 게이라고 거짓말하는 걸지도 몰라.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확 돌아보았다. 점원들은 시치미를 뚝 떼며 바닥을 쓰는 시늉을 했다. 저것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 형 다섯 번은 거뜬하거든요!

“별아, 다 했어?”

형이 손을 들어 습관적으로 내 뒷덜미를 가볍게 주물렀다. 조금이지만 왁스로 올린 탓에 훤하게 드러난 목덜미가 부끄럽다. 형은 주위의 시선 같은 건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와 귀 뒤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화장품 냄새 나. 왁스 바른 거야?”

“응. 냄새 독해요?”

“아니, 괜찮네. 나쁘지 않아.”

목덜미가 뜨뜻하게 열이 오른다. 아마 귀까지 빨갛게 익었을 거다. 형은 무심한 눈으로 미용실 안쪽을 스윽 훑어본 뒤에 목덜미를 주무르던 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 쥐었다.

“나한테 말하지. 내가 머리 해 줬을 텐데.”

형 만나려고 한 건데, 형이 해 주면 의미가 없잖아요.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술을 꾸물꾸물 비틀며 눈썹을 까딱이는데 형이 가볍게 혀를 찼다. 내 머리를 만졌던 여자가 가까이 다가와 눈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웃음을 쳤다.

“어머, 장석 님 아시는 동생분이시구나, 동생분이 너무 귀여우시더라고요. 어떻게, 머리는 괜찮은 거 같으세요?”

“아, 뭐.”

그냥 남자가 좋은 게 아니라 여자가 싫은 건가? 형이 잘 모르는 사람한테 저렇게 불친절한 건 처음 봤다. 동네에서 아주머니들이나 여학생들 사인해 줄 때는 저런 표정 아니었는데. 형은 네모난 눈을 하고 여자를 위아래로 훑어본 뒤 고개만 까딱였다. 그러곤 내 손을 움켜잡았다.

“가자. 별아.”

차에 올라탈 때까지 형은 굳은 얼굴을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치를 보면서 안전벨트를 매고 두 무릎을 붙인 얌전한 자세로 정면을 응시했다. 뭐라도 할 말을 떠올려야 하는데 형이 입을 길게 늘여 꾹 다문 모습이 낯설어서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질 않았다.

“하, 하하. 그게, 그렇죠? 안 하던 짓을 하면 사람이 죽는다는데. 괘, 괜히 이런 거 했나? 웃기죠. 그래, 이것도 하던 사람이나 해야지. 나 같은 애가 괜히 이런 거 해 봤자 촌스럽기만 하지.”

손을 들어 머리칼을 흩트리려 하는데 형이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지 마. 안 이상해. 예뻐.”

“형은 가끔 간지럽게 그러드라. 나 같은 게 뭐가 예쁘다고…….”

귀 뒤를 긁적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형은 붙잡았던 손목을 슬그머니 놓고 어깨를 가볍게 쥐고 어루만졌다. 손바닥이 어깨뼈를 둥글리며 사락사락 옷에 스쳤다.

“원래 예쁜데, 오늘은 더 예뻐.”

핸들을 놓고 허리를 기울인 형이 내 뺨에 입을 맞췄다. 눈꺼풀을 들어 올려 형을 바라보자 느슨한 눈매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속눈썹이 형의 옆얼굴에 닿았다. 간지럽다는 듯이 부스스 웃음을 흘린 형이 그대로 입술을 벌려 가볍게 귓바퀴를 깨물었다.

“너무 귀여워서 콱 깨물어 주고 싶네.”

웃음 섞인 목소리가 구불구불 귀를 파고들었다. 쇠 말굽을 두드린 것처럼 귀에서부터 지이잉, 전율이 일었다. 목을 움츠리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갈까. 점심 먹어야지.”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부드럽게 입술을 휘어 웃는다. 형은 핸들을 손톱으로 톡톡 두드린 뒤 다른 손을 뻗어 흐트러진 내 옷매를 다듬어 주고 손바닥으로 세게 쓸어내렸다. 출발하자고 해 놓고 시동도 걸지 않고 내 쪽만 빤히 쳐다보는 것이 몹시 무안하고 면구스러웠다.

“왜 자꾸 봐요,”

“자꾸 보면 안 돼? 닳아?”

“……닳아요. 요만큼씩.”

손가락 한 마디만큼을 짚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침에 반 그릇밖에 먹지 않은 물에 만 밥이 벌써 소화가 다 됐다. 배고픈 건 괜찮은데 꼬르륵 소리가 날 것 같아서 배에 힘껏 힘을 줬다.

“그냥 자꾸 눈이 가네.”

“그럼 맨날 이러고 다닐까?”

손바닥으로 배를 꾹 누르면서 하하 웃었다. 형은 고민스런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뜨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그러지 마.”

갑자기 정색을 하고 고개를 젓기까지 했다.

“그럼?”

“평소만큼만 해.”

“난 지금 마음에 드는데?”

“너무 눈에 띄잖아.”

아니, 지금 이 사람이 뭐라고 하는 거야. 형이 지금 나한테 ‘눈에 띈다.’는 말을 한 게 맞나? 어이가 없어 입을 반쯤 벌리고 눈만 끔뻑였다. 눈에 띄기로 따지면 형을 따라올 사람을 주위에서 본 적이 없는데.

동네니까 그나마 사람들이 체면 차리고 모른 척 지나가는 거지, 좀 전만 해도 미용실에 들렀다가 차에 타는 그 짧은 거리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형을 돌아봤었다. 방금 봤어? 소곤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개중에는 형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도 있었고 모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체로 반응은 비슷했다. 먼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어어, 멍하니 섰다가 휙 뒤를 돌아봤다. 뒷걸음질 쳐서 형의 얼굴을 힐끔하며 가는 치들도 있었다. 여자도 그랬고 남자도 그랬다.

“난…… 완전 묻힐 텐데. 형 옆에 있음 난 보이지도 않을 걸요?”

“안 그래. 그러니까 아까 걔네들이.”

말을 이을 것처럼 숨을 들이마셨던 형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코로 길게 숨을 내쉬고 가볍게 눈꺼풀을 내렸다가 들었다.

“그 여자 마음에 들었어?”

“뭘요?”

“아까 그 여자. 입술 새빨간. 형이 번호라도 따 줘?”

“아뇨, 필요 없는데요.”

“내가 깜빡했네. 너 원래 이쪽은 아니었지.”

“진짜예요, 필요 없어요. 저 그런 취향 아닌데.”

굳이 말하자면 취향 같은 건 있지도 않았지만 지금은 형이지. 무심한 듯한 얼굴이 웃음을 지을 때 환히 빛나는 사람. 말을 할 때마다 낮은 울림이 귀를 간질이는 사람. 체온이 뜨겁고 손바닥이 커서 몸을 어루만져 줄 때 넓게 뒤덮이는 기분이 드는 사람. 때때로 자기도 모르게 달콤함이 뚝뚝 떨어지는 사랑스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

거기서 모두를 사랑하는 박애주의만 빼 주면 완벽하다. 아니지, 그럼 나랑 안 놀아 주나? 그럼 것도 더하고.

“……나는?”

“네?”

“나는 어때. 네 취향이야?”

두 손을 가볍게 핸들에 올리고 시트에서 등을 뗀 형은 다소 초조해 보였다. 아래로 내려뜨린 눈썹에 심장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형의 사소한 표정 하나에도 나는 죄책감과 우월감 사이를 오간다.

형은 모를 테지만, 나를 바라보며 건네는 그 어떤 말에도 형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가슴이 뛴다.

“당연한 걸 묻네. 형은 취향 아니기가 더 힘든 사람이에요. 취향을 초월하는 힘이 있지.”

무진장 진심이라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장난처럼 말했다. 코를 찡끗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형은 내 말의 의도를 파헤치려는 것처럼 물끄러미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형은 잠시 고민하는 기색으로 눈동자만 굴리다가 의아하게 물었다.

“내가 여자 같은 구석이 있나?”

“뭣, 무슨 소리예요, 그게.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애초에 형은 나보다 키도 훨씬 크고 어깨도 넓은데?”

“그냥. 가끔…… 신기해서.”

부연 설명은 뒤따르지 않았다. 그대로 시선을 돌려 앞을 향하더니 시동을 걸어 차를 운전했다. 어색한 분위기에 농담이라도 꺼낼까 했지만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머리 모양을 거울에 비춰 보기도 하고 엉덩이를 들썩이며 불편한 자세를 고치기도 하면서 형을 힐끔거렸다.

굳이 내 정체성에 대해 얘기를 꺼낸 적은 없지만 형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하긴 조금만 얘기해 봐도 견적이 뻔했다. 나이를 스물넷이나 먹고 섹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던 처음의 내 꼬락서니만 보아도 경험이 없다는 것쯤은 빤했을 거고, 그 대상에 남자가 들어 있지 않았다는 것도 들켰을 거다.

그렇다고 나에게 물어봐도 곤란하다. 나는 형이 좋은 거지 남자가 좋은 건 아니고, 살면서 가볍게 두어 번쯤 짝사랑 비슷한 걸 해 본 적은 있지만, 형을 좋아하게 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정도 감정쯤은 인간에 대한 가벼운 호의에 지나지 않았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사랑한다는 열렬한 고백을 퍼붓는 이들을 보며 늘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대체 어디쯤에서 사랑이라는 확신을 하고, 그 증거를 발견하는가.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이 정말 사랑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신체적인 욕구로 판단하기에는 기준이 쉽게 흔들리고, 마음은 꺼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마치 신기루 같다고 생각했다. 또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이들은 나와 다른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서 어쩌면 나는 평생 동안 가슴이 홧홧하게 뜨거워지는 마음 따윈 가져 볼 수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어느 날 문득 눈을 떴을 때, 이유도 없이 가슴이 먹먹하게 차오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 나는 지금 사랑을 하고 있구나. 어젯밤 하늘이 아름다웠던 건, 아침에 눈을 뜰 때 허공에 누군가를 덧그리게 되는 건,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뜨겁게 되는 건 모두 그 때문이었구나.

손바닥으로 가슴을 누르며 울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헛된 착각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나는 정말로 형을 좋아하는구나. 마음껏 좋아할 수 있겠구나.

“……아, 별아.”

어깨를 쥐는 손길에 파드득 정신을 차렸다. 형이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도착한 것인지 차는 이미 어둑한 주차장 한구석에 멈춰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뇨, 아무것도…….”

어색하게 히이, 웃다가 형과 눈이 마주쳤다. 조금 전에 하고 있던 낯부끄러운 생각이 들킬 것만 같아 재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너 정말…….”

형의 손이 핸들을 세게 쥐는 것이 보였다. 형은 안전벨트를 던지듯이 풀어 버리고 몸을 기울여 다짜고짜 내 턱을 들어올렸다.

“혀, 으읍……!”

날카로운 시선이 나를 쏘아보는 것에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형은 으르렁거리는 듯한 한숨을 내쉬며 거칠게 입술을 부딪쳐 왔다. 입술을 크게 머금었다가 아랫입술을 조금 아플 정도로 깨물었다. 굳은 몸을 옹송그리며 반사적으로 형의 어깨를 쥐었다.

형은 내 허리를 감고 목 뒤를 세게 주무르며 자신의 품으로 나를 당겼다. 마치 절정에 오를 때처럼 거친 숨소리를 내며 혀가 얽어 들어왔다. 아찔하게 머리가 비워지고 코끝이 찡하게 저려 왔다. 오랫동안 소변을 참다가 눌 때처럼 온몸에 짜릿하게 전기가 올랐다. 단지 키스뿐인데도.

“내가 누구야.”

“혀, 형은.”

“지금은 나랑 있는 거잖아.”

“알고 있어요.”

눈앞이 팽팽 돌았다. 형은 말끝마다 내 입술을 깨물었다. 애가 닳아 먼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형은 눈썹을 찡그린 그대로 나를 잡아먹을 듯이 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눈치를 보다가 턱을 내밀어 쪼듯이 입을 맞추자 나직한 한숨이 입가에 달라붙는다. 힘이 잔뜩 들어가 있던 형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다정한 웃음을 지었다.

“정말……. 안 되겠다.”

“뭘……요?”

“오늘, 빨리 돌아가자. 점심만 먹고 가자. 안 되겠어.”

눈을 둥그렇게 뜨며 껌뻑거리는데 형이 가볍게 귓바퀴를 깨물었다 놓으며 한쪽 눈썹을 추어올렸다.

“얼른 가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먹고 싶어.”

손목이 급작스레 붙들렸다. 형이 손목을 끌어당겨 놓은 곳은 형의 사타구니였다. 뜨겁고, 크게 부풀어 있었다. 손바닥이 문질러질 때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가늘게 눈을 뜨고 젖은 숨을 내쉬며 형은 아쉽다는 듯이 내 입술을 길게 빨았다.

“제길. 그냥 돌아갈까?”

내 손바닥을 다리 사이에 꾸욱 누르며 형이 속삭였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네. 아, 그래요. 도착했습니다. 네.”

전화기 너머에서 높은 톤으로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기다릴게요. 어서 오셔야 해요.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쨍쨍 울린다. 형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한손으로는 전화기를 쥐고, 다른 손으로 내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간지러워 목을 움츠리는데 나지막이 웃던 형이 혀를 내어 내 코끝을 핥았다.

“그럼 올라가서 뵙겠습니다.”

뚝. 전화를 끊고 형은 뒷좌석으로 휴대폰을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목뒤를 받쳐 나를 통째로 삼킬 것처럼 깊은 키스를 한 뒤에야 놓아 주었다.

“나머지는 이따가.”

형은 물티슈를 꺼내 내 얼굴과 목덜미를 꼼꼼히 닦아 주었다.

“너무 세게 닦았나. 얼굴이 빨갛네.”

그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빨간 건데.

“올라가자. 어쩔 수 없지.”

“아, 맞다. 오늘 뭐 하는 건데요?”

문을 열고 주차장 바닥에 발을 내려놓으며 형은 미묘한 얼굴을 했다. 씹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입에 넣고 침이 가득 고이도록 물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인터뷰.”

“인터뷰? 어떤?”

“그냥…… 남들 씹으라고 만드는 껌이야. 내용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얼굴만 대충 보여 주면 되겠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중에 형은 막 생각이 난 것이 있다는 듯 아, 하는 소릴 냈다.

“가서 누가 뭘 묻거든, 그냥 모른다고 해. 아니다. 따로 들어가는 게 나을지도……. 차에서 기다리게 할걸 그랬어.”

형의 곤란한 얼굴에 아주 조금 심장이 따끔했다.

“괜찮아요. 다른 일행인 척할게요. 일 끝나면 전화할래요? 눈치 보다가 먼저 나가 있을 테니까, 아님 내가 늦게 나갈까요?”

“그래. 그게 낫겠어. 먼저 내려갈 테니까 나중에 내려오는 걸로…….”

형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곱슬곱슬한 머리를 휘날리며 높은 구두를 신은 여자가 빠르게 다가왔다. 형이 손을 들어 내 어깨를 어루만지던 참이었다.

“어머, 일행이 있으셨네.”

여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호호 웃었다. 형은 재빨리 내게서 떨어진 다음 여자의 옆으로 섰다. 굳은 얼굴을 하고 사무적인 딱딱한 말투로 내게 말을 건넸다.

“그럼 그건 그렇게 하지. 나머지는 나중에 정하는 걸로.”

“아, 같이 일하는 동료분이세요?”

“조금. 얼마 안 된 신입이라.”

“어쩐지 너무 어리고 귀엽더라.”

호들갑을 떨며 웃던 여자는 자리를 안내하기 위해 몇 명이냐 묻는 종업원의 말에 형보다 먼저 ‘셋이요!’ 하고 외쳤다. 형은 불편한 얼굴로 뭔가를 얘기하려고 입을 달싹이다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장 화백님은 언제부터 아신 거예요?”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대뜸 나에게 질문이 날아왔다.

“며, 몇 달 안 됐는데요……?”

눈을 굴리다 작게 대답을 꺼내니 형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뻐끔거리는 입 모양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입을 황급히 합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 친구는 금방 갈 겁니다. 상관없는 친구예요.”

점잖게 웃으며 형이 허리를 펴고 앉았다. 존재감이 뚜렷해졌다. 여자는 어딘가 미련이 남는 얼굴로 나를 힐끔거렸다. 형은 살짝 미간을 좁히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설마 내 취향을 아무렇게나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어머, 너무하시다. 내가 장 화백님 수준을 아는데. 이건 아니죠.”

여자는 킥킥 웃으며 검지로 아래쪽을 가리켰다. 셔츠 자락 밑으로 대롱대롱 매달린 택이 보였다. 아, 어떡해. 여태까지 이걸 달고 왔어? 왜 몰랐지.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화끈 뜨거워졌다. 쭈뼛거리며 다리 사이로 손을 꼬물거리다가 벌떡 일어났다. 물을 준비하러 왔던 서버와 부딪쳐 물이 바닥에 왈칵 쏟아졌다.

“죄, 죄송합니다. 그게, 저는…….”

“농담인데. 너무 순진하시다. 가위 달라고 할까요?”

속눈썹을 붙인 커다란 눈이 나를 얕보며 웃었다. 형은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서버에게 유리잔을 내밀었다. 쪼르르, 포물선을 그리며 은빛 주전자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물에 축축이 젖은 싸구려 셔츠와, 급히 만진 어색한 머리. 그 무엇도 고급스런 빛을 띠는 이 공간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가, 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뒤돌아 걷는 등 뒤로 여자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우, 너무 냉정하시다. 괜찮겠어요? 웃음소리 뒤로, 얼른 시작하시죠. 형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나빴다. 처음부터 알아차리고 차에 얌전히 숨어 있었으면 될 것을. 호박에 가는 줄 하나를 그어 놓고 수박이라도 된 것처럼 우쭐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못났다. 어쩜 이렇게 못났을까. 내가 형의 옆에 나란히 서도 될 리가 없는데.

수치스러운 기분이 들어 축축한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좀 전까지 형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았는데 그 어디에서도 형의 냄새를 맡을 수가 없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마침 열렸으나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뒤로 물러서는 것을 보고 발길을 돌렸다. 비상문을 열고 계단을 밟았다.

아무도 없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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