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잔인한 시간
(J)
예상했던 대로 여자는 아주 무례했다. 샛별이 자리를 뜨자마자 손톱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눈꼬리를 빼서 웃더니 슬그머니 구두코를 내밀어 내 다리를 쓸어 올렸다. 아직도 착각하는 여자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얼른 일을 끝내죠.”
의자를 뒤로 빼고 다리를 꼬아 여자에게 닿지 않도록 비틀었다. 제법 예쁘게 생긴 여자는 이런 대우가 당황스럽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가 애써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신비주의를 위한 마케팅의 일환으로 동성애자인 척한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것이 사실인 듯했다.
“혹시 아까 그분은…….”
“관계없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애인을 만들 생각은 없고, 저 친구처럼 어린애들과 어울릴 정도로 젊지는 못해서 말이죠.”
“그런 것 있잖아요. 예술가들의 뮤즈. 장 화백님은 그런 분 없으세요?”
당황해서 꼭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는 돌아서 가 버린 샛별을 떠올리자 마음이 불편했다. 마른 과자를 맨입에 삼킨 것 같았다. 어물쩍 사생활을 캐내려는 여자의 물음은 너무 흔해서 대답할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다만, 그 물음에 반짝 하고 떠오른 것이 샛별의 손가락이었다.
매일 손에 물을 묻히는 까닭에 자주 트고 거칠어지는 손등과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 코를 박으면 샛별의 살 내음이 담뿍 나서 손등에 코를 문지르곤 했다.
“있다면 글쎄……. 눈부실 정도로 빛나는 사람이 아닐까요.”
“또 그런 식으로 피해 가시네요. 너무 숨기시는 거 아니에요?”
여자는 웃는 얼굴을 하고 옷차림에 맞지 않던 무식하게 커다란 가방에서 스크랩북을 꺼냈다.
“아이돌 최 모 군, 배우 김 모 씨, 재벌 3세 황 모 씨, 모델 박 모 씨. 스캔들 굉장히 화려한 거 아시죠? 이게 제대로 안 터져서 그렇지, 나왔으면 벌써 1면 감이에요. 이렇게 거쳐 간 사람이 많은데 정말 애인 한 명 없었어요?”
“그래서 그중에 하나라도 기사화된 게 있던가요?”
그럴 리가 없지. 꿀릴 게 없으니 당당하다. 앞으로도 그따위 기사가 수면 위로 올라올 일은 없을 거다. 하찮은 예술가의 스캔들이 쏟아지는 가십거리들 중에서 포기 못 할 정도로 매력적인 건 아닐 테니까.
뭣보다 내 커밍아웃에 눈살을 찌푸렸던 집안에서 철저하게 기사를 막고 있었다. 그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쩔 수가 없었지만 시시한 염문설까지 나돌게 하지는 않을 터였다.
아버지며 어머니는 나를 보고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점잖은 분들이다. 둘 사이의 정이 깊지는 않지만 적어도 다른 곳에 눈을 돌리는 분들은 아니었다.
여자 여럿과 몸을 섞었어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을 분들이 커밍아웃에 이어 알음알음 소문이 번지도록 나를 내버려 두는 것은 단지 내가 ‘보통 사람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분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남다르다고 들었어요. 소위 말하는 어린 천재였잖아요?”
입맛을 다시면서도 여자는 질문의 방향을 돌렸다. 더 캐물어야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미 소문은 번질 대로 번져 있고, 그걸 수면으로 꺼내지 못하는 건 모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정말 멍청한 것이 아니라면 그쯤은 알고 있겠지.
샛별을 급히 돌려보낸 건 갈 곳 없는 쓰레기 같은 호기심이 그쪽으로 머리를 트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원래 이목을 받는 것이 익숙한 연예인이나 유명인과는 다르다. 음습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이들이 얼마나 추하게 꼬리와 발목을 붙잡는지는 겪어 보지 않으면 결코 모른다.
“보통 어린 천재들은 자라면서 둔재가 된다고들 하는데, 장 화백님은 어쩜 슬럼프 한번 없이 승승장구를 하셨을까. 자기가 생각해도 천재 맞는 거 같죠?”
지겨운 질문이었다. 지겨움에 하품이 나오려는 것을 꾹 누르며 입꼬리만 가볍게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운이 좋았습니다.”
“운 정도로는 설명이 안 되죠. 미술에 문외한인 저도 장 화백님 그림을 보면 대단하다는 걸 알겠는 걸요?”
알기는 무슨. 제 입으로 문외한이라 밝힌 주제에 묻는 것마다 시시한 스캔들뿐이니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네, 아니오를 답하지 못하는 건 나 또한 모르기 때문이다. 애초에 천재라는 말을 누가 꺼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나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아무 말도 꺼내지 않으면 멋대로 기대와 호기심이 자라나 나를 짓눌렀다. 천재? 그런 건 한때지. 금방 밑천이 드러나겠지. 지금은 다들 재벌 집 도련님이니 어이구, 맞춰 주는 걸 모르나. 먼 곳에서는 나를 천재라고 부르는 모양이었지만, 가까이서 듣는 말은 그런 것들뿐이었다.
한때야, 한때. 천재는 10년을 못 간다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림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던 이들이 돌아서서는 나를 비웃었다. 사춘기가 찾아올 무렵부터는 대놓고 묻는 사람들도 생겼다.
불안하지? 슬럼프가 찾아오진 않나? 머리가 굵어지면 생각이 굳는 법인데. 특별히 관리하는 거라도 있어? 조심해. 언제 뒤처질지 몰라. 지금이야 특이하고 신선하지만 곧 지루해질걸.
내가 먼저 그림을 그리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다른 걸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무얼 해도 그림을 그리기 위한 경험의 한 자락. 밧줄에 꽁꽁 묶인 채로 허공에 끌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계속 이렇게 그림만 그려도 될까요. 다른 것도 좀 더…….’
고민 끝에 꺼낸 말에 아버지는 무뚝뚝한 평소와는 달리 내 어깨를 두드리며 환히 웃었다.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재미없는 우리 집안에 너 같은 예술가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지. 네 엄마가 미술 시킨다고 했을 땐 죄 쓸데없는 일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아버지의 말대로 집안의 분위기는 딱딱하고 고지식하다. 가업을 이어 기업을 키우고 운영하는 것밖에 모르는 집안에서 내 취급은 특별했다. 사촌 중에 한 명이 내 그림을 칼로 찢어 놓으며 했던 말을 기억한다.
‘너 같은 건 이런 그림 쪼가리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야. 너 멍청하고 모자란 거 다들 모르고서 속고 있는 것뿐이야. 난 안 속아. 뻥튀기 같은 새끼. 언젠가 모두 알게 되면 얼마나 배신감을 느낄까. 같잖은 네가 천재 행세를 하며 사람들을 아래로 깔아뭉개고 거만하게 무시한 걸 절대 용서할 수 없겠지.’
‘조금만 기다려 봐. 곧 아무것도 아닌 빈껍데기를 들키고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집안의 이름 뒤에 숨어 조용히 죽어 갈 네 모습이 훤하다.’
“그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정말 궁금해요. 장 화백님 시야에는 세상이 어떻게 보여요? 뭔가 굉장히 특별할 것 같은데.”
수백 번쯤 속으로 다짐했던 말을 꺼내 놓았다.
“모두 특별한 삶을 사는 것 아닌가요. 저 하나만 유별나진 않겠죠.”
모두가 특별하다면 나 또한 어느 한구석쯤은 특별한 부분이 있겠지. 때문에 그 누구라도 특별해질 수 있음을 믿는다.
“에이, 그래도 안 그러실 것 같아요. 평소에 영감은 어디서 받나요?”
“그건 비밀.”
상대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숨소리를 죽여 심호흡을 했다. 영감을 받아 번개처럼 머리가 번쩍 뜨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던 대로 그리고, 손이 가는 대로 붓을 문질렀을 뿐이다. 나 또한 그들이 내 그림에서 발견한다는 놀라운 세계를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말이 궁할 때는 입을 다물었다. 술김에 그려 낸 그림에 각종 해석이 붙어 여기저기에 실리는 것을 보고 말을 아꼈다. 그 누구의 해석도 그림을 그리는 내 머릿속보다는 아름다웠다.
내 삶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목표.
‘들키면 안 돼. 내가, 내용물이 없는 텅 빈 껍데기뿐이라는 걸 들켜선 안 돼.’
그래서 나는 빛을 훔친다. 모두가 하나씩 가지고 있지만 대수롭지 않게 방치해 두는 반짝임을 찾아 저장해 놓는다. 밑바닥이 드러나 불빛이 꺼지지 않도록, 나는 어쩌면 그림을 그리기보다 연기를 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평생의 연기에도 아무도 나를 밝혀 내지 못했으니까.
여자는 끈질겼다. 겉핥기식 인터뷰에 이골이 난 내가 먼저 지쳐 ‘그만합시다.’ 하고 선을 그을 정도였으니 보통은 아니었다.
이런 종류의 인간을 상대할 때는 쉽게 지치고 만다. 그들은 내가 다른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다. 나 또한 그렇게 믿고 싶을 때가 있었다. 남자를 좋아한다는 정체성을 깨달았을 때 오히려 기뻐했을 정도였으니까.
예상대로 사람들은 놀라는 한편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납득했다. 과연, 예술을 하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라. 그래서 그런 그림을 그리시나 봐요.
그런 건 다 개소리다. 한 번도 그림을 그리는 데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도움이 된 적은 없지만 굳이 그걸 알려 줄 필요는 없다. 나를 둘러싼 말은 많을수록 좋다. 그중에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럽길 바란다.
시간은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짜증스러웠다. 메시지며 부재중 전화도 쌓여 있었다. 기다릴까요? 고민하다 보냈을 것이 뻔한 샛별의 메시지도 하나 도착해 있었다. 데리러 갈게, 답장을 보내는 중에 전화가 왔다. 썩 달갑지 않은 녀석이었다.
“무슨 일이야.”
-기다리는 동안 한번 할까 하고.
녀석은 내 집에 드나드는 파트너의 또 다른 파트너였다. 두 사람은 복잡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다니면서도 파트너 관계를 청산하지는 않았다. 서로가 서로의 파트너를 구경하면서 즐거워하는 질이 나쁜 놈들이었다. 초짜들 중에 저들 손에 걸려 너덜너덜할 때까지 마음을 찢긴 뒤에 버려지는 녀석들이 허다했다.
둘을 완전히 쳐 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바텀 쪽의 녀석은 별 볼 일 없지만 지금 전화를 건 이 녀석은 특히 골치가 아팠다. 내가 가라고 한다고 얌전히 갈 성격도 아니니 문제가 되지 않도록 이따금 구색만 맞춰 주는 관계였다.
이들은 내가 누군가에게 정착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 집으로 와서 내게 셋이 하는 걸 권하거나 둘이 하는 걸 보여 주곤 했다. 그러고 보니, 녀석의 파트너는 지난번에 내가 쫓아냈는데. 입이 지나치게 가볍고 말을 가리지 못하는 것이 싫어 샛별이 가 버린 뒤 다시는 오지 말라고 윽박질렀던 것이 떠올랐다.
뻔뻔하게도 혼자서는 안 되니 둘이 온 건가.
“언제는 나한테 묻고 했나?”
슬며시 화가 나려고 했다. 뜻대로 되는 게 없다. 낮에 천박해 보이는 여자가 샛별을 만졌다는 것도 몹시 불쾌했는데 무례한 치들이 내 시간을 비집고 들어와 파헤쳐 놓고 있다.
-그래? 그럼 허락한 걸로 알고.
조만간 이사를 가든지 문짝을 통째로 바꾸든지 해야 할 것 같다. 여태까지는 딱히 불편한 게 없어 내버려 두었지만 이런 식으로 나를 무시하라고 지켜본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모든 사람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나의 생각이 퇴색해 가는 중이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통해 수집한 것들이 요즘은 시시하기만 하다. 더 솔직히 말해 보잘 것 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차에 내려가서 샛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배터리가 나가 끊겨 버렸다. 홧김에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제길, 일단 집에 드러누워 있을 불청객들을 쫓아내고 기분을 바꿔 샛별을 데리러 가자. 계획대로 바닷가를 한 바퀴 돌아 드라이브를 하고 경치가 좋은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자.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옆 좌석 시트를 샛별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엑셀을 밟았다.
(D)
“……라는데, 어떡해. 오빠한테 버림받았네.”
남자는 입매를 길게 늘여 웃으면서 눈을 맞춰 왔다. 남자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얼음으로 맨살을 문지르는 것처럼 소름이 끼친다.
“그럴 리가, 없는데.”
얼른 집으로 돌아와 함께하자고 했는데. 형이 나를 원한다고 했는데. 황망한 눈으로 끊겨 버린 전화를 보았지만 이미 형의 이름은 액정 속 어둠으로 사라져 버렸다.
“들었지? 내가 그랬잖아. 이 새끼 원래부터 돌려 먹는 거 좋아한다고.”
“아, 아니, 뭔가 오해가,”
“장석 그 새끼가 싸고도는 어린 년 하나 있다기에 어지간히 예쁜가 했더니 것도 아니야. 대체 뭘 보고 너보고 애인이니 첩년이니 하는 소리가 도는 거야?”
“그러니까 저는.”
남자는 혀를 차면서 내 목을 틀어쥐었다.
“거참 시끄럽게 구네. 어차피 너도 그냥 그렇고 그런 구멍 중 하나 아니냐. 뭘 그렇게 애절하게 쳐다보고 그러세요.”
남자가 손아귀에 힘을 잔뜩 주어 목을 눌렀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깔딱깔딱 숨이 넘어가는데 남자는 나를 떠밀어 침대에 머리를 짓눌렀다. 겨우 목젖을 누르던 손가락은 사라졌지만 뒷목을 잡힌 채로 처박혀 고개를 움직일 수 없었다.
남자는 그르렁거리며 웃었다. 허리에 올라타 앉아서 팔을 위로 꺾어 올리더니 제 허리춤에서 빼낸 벨트로 묶었다. 손을 바들바들 떨며 몸부림치는데 남자가 어라, 하고 손등을 침대 헤드에 눌렀다.
“뭐야, 병신이었네. 장석 새끼 요즘도 재활용 수집하나.”
손가락을 구부려 주먹을 꽉 쥐었는데 그래 봐야 소용없다는 듯 킬킬 웃으며 손가락이 없는 자리를 이로 깨물었다. 입을 벌려 뭉툭한 곳을 혀로 핥고 뼈가 빠질 것처럼 세게 깨물었다.
“아, 아파요, 아파!”
“시끄러.”
무릎으로 머리를 짓눌렸다. 버둥거릴수록 호흡이 가빠졌다. 눈앞이 가물가물 흐려지려 했다.
“그거 알아? 뒤에서 그 새끼 고물상으로 불리는 거. 남이 버린 걸 기가 막히게 잘 주워 가. 나는 그래서 그 새끼도 쓰레기일 줄 알았는데 그냥 좀 또라이지. 쓸 만큼 쓰면 낼름 놓는데 그걸 또 내가 가져가니 나는 개쓰레기인가?”
남자의 웃음소리가 흐릿하게 들린다. 팔다리에 힘이 빠져 가늘게 떨렸다. 입을 벌려도 이불만 한 움큼 삼켜졌다. 침으로 척척하게 젖은 이불은 입 안에 들러붙어 숨을 막았다.
“아, 미안. 기절하면 섭하지. 재미없잖아.”
머리가 찢어질 듯 아프더니 고개가 들렸다. 머리채를 쥐고 한껏 당긴 남자가 두꺼운 손바닥으로 뺨을 두드렸다. 허억, 컥, 허어억, 목구멍에서 쇳소리가 났다. 정신없이 기침을 했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귓구멍에 미지근한 눈물이 흘러들어가는 것이 아주 느리게 느껴졌다. 눈이 팽팽 돌았다.
“야, 얼굴 좀 들어 봐. 여기 봐, 여기. 그렇지, 좋아. 각도 좋고 인물 좋고.”
눈꺼풀을 뜨기도 어려운데 남자가 내 앞으로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까르르 웃는 소리가 났다.
“이 새끼 맞아?”
-몰라. 형은 벌써부터 애를 그렇게 잡았어, 그래. 우는 거 봐. 못생겨 가지고.
“아씨, 됐고. 이 새끼 맞냐고. 진짜 장석 그 새끼가 이런 놈 때문에 너 쫓아냈다고?”
-진짜라니까? 씨발, 더러워서. 그 새끼 병신 맞지?
“어.”
-그럼 맞아. 형, 여기 나 뺨에 상처 난 거 보여? 병신이라고 한마디 꺼냈다가 그 새끼가 재떨이 던졌다니까? 미친 거 아냐?!
“개새끼, 누구 이쁜이 얼굴을 저따위로 만들어 놨어.”
머리채를 쥔 채로 나를 질질 끌고 간 남자가 내 머리를 바닥에 매다 꽂았다. 몸을 가누지 못해 그대로 떠밀리듯 얼굴을 바닥에 처박고 넘어졌다. 구역질이 났다. 머리가 징징 울렸다. 두 팔이 묶인 채로 팔꿈치로 바닥을 눌러 엉금엉금 기었다.
형, 어디 있어요. 빨리 와요. 저 사람이 자꾸 이상한 말만 해요. 형은 그런 사람 아닌데.
“씨발, 넌 어디가.”
우악스런 손이 바지를 벗겨 냈다. 힘을 끌어 모아 발길질을 하고 몸부림을 쳤지만 몸 위로 올라타 갈긴 뺨 한 대에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가 밝아졌다.
“우리 서로서로 기쁘고 행복하려면 배려가 필요하겠지? 내가 알아서 다 해 줄 테니까, 너는 그냥 존나 가만히만 있으라고. 오케이? 자꾸 움직이지 마라. 씨발, 강간하는 거 같아서 존나 꼴리니까.”
무릎으로 목줄기를 눌렸다. 반항하면 다시 아까처럼 목을 짓누를까 무서워졌다. 어쩌면 더 심하게 두들길지도 몰라. 언뜻 그 얼굴에 아버지가 겹쳤다. 그는 손을 싹싹 비비면서 짙은 웃음을 지었다.
“와, 씨발. 간만에 횡재하네.”
“싫, 싫어. 비켜! 안 해, 안 한다고!!”
“뭘 안 해. 너 인마, 내가 그동안 장석 그 새끼한테 빡친 게 몇 번인지 알아?”
“비키라고! 비켜!”
무섭다고 해도 이대로 얌전히 당해 줄 수는 없는 거였다. 그러니까…… 나는 게이도 아니고 형 핑계를 대고 피해자가 되기는 더더욱 싫으니까. 전부 오해일 거다. 아닐 거야. 형이 그랬을 리가 없다. 예전의 형은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야. 나도 사람 보는 눈이란 게 있다. 분명 아닐 거야.
“고마워. 간만에 씨발, 신나는 일 하나 생겼네.”
남자의 무릎이 목을 으깰 듯이 짓눌렀다. 그는 휘파람을 불며 내 머리채를 잡아 꽝, 꽝 바닥에 처박은 후 기절 직전의 나를 들춰 매듯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나를 침대에 던졌다. 목과 어깨가 간헐적으로 떨렸다.
내가 꺼낼 수 있는 말은 아흐으으 하는 괴상한 신음이 전부였다. 남자가 입꼬리를 길게 늘였다.
“하, 하지 말라고……!!”
“내가 왜?”
싫다는 말을 뱉으려 입을 벌렸다. 그 사이로 축축한 남자의 혀가 기어 들어와 구불구불 엉켰다. 혓바닥 아래를 샅샅이 핥고 입술을 지근지근 씹으면서 남자는 더운 숨을 훅훅 뱉어 냈다. 시야가 가려져 캄캄했다. 차라리 어두운 것이 나았다. 남자의 쾌감에 젖은 얼굴 따위 조금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욕정의 대상이 나라는 것이 비참했다.
“……뭐야, 지금.”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귓가에 훅 끼치는 남자의 숨결이나 멍청하게 흘려 대는 내 울음소리보다 훨씬 크게 들렸다. 형의 목소리였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억눌린 목소리를 들었다. 형이다. 형이 여기서 날 꺼내 줄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가슴에 고여 있던 설음이 단숨에 치솟았다. 더 짜낼 것도 없을 것 같았던 울음이 펑펑 쏟아졌다.
형, 나 좀 꺼내 줘요. 나 죽을 거 같아.
형의 품에 안겨 숨을 고르고 싶었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바닥이 내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말해 주기만을 바랐다.
“네가 하라며. 해도 된다며.”
남자가 짜증스럽게 투덜거렸다. 별것 아닌 장난을 하고 있다는 투였다.
형, 왜 이렇게 늦었어요. 입을 뻐끔거리는 것을 형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다. 깊고 검은 눈동자 속에 무언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꺼져.”
“너 끼워서 한 판 더 하자. 씨발, 이제 뭣 좀 해 볼라니까.”
“꺼지라고.”
“내내 숨겨 놓고 혼자 놀았냐. 새끼, 안 그런 줄 알았더니 제법이네. 아주 로맨스 났어. 어떻게 길들였기에 이렇게 반응이 따끈따끈해. 와씨, 나 이렇게 흥분한 거 오랜만이야.”
형은 성큼성큼 다가와서 남자의 어깨를 쥐고 내 몸에서 뜯어냈다. 세게 밀쳐 거의 바닥에 넘어질 뻔했던 것을 멱살을 틀어쥐었다.
“다시는 얼씬도 하지 마.”
낮게 으르렁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멱살을 잡지 않은 손이 주먹을 꾹 쥔 채로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농담을 지껄이면서 나와 형을 번갈아 보며 킬킬대는 남자를 문밖까지 쫓아내고 돌아온 형은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움찔움찔 떠는 나를 보다가 스윽, 시선을 피했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아서 숨을 부러 크게 쉬는데 형이 시선을 피한 채로 다가와 손을 묶은 것을 풀어 주고 벨트를 바닥에 집어던졌다.
“혀엉……. 미, 미안해요. 저 사람이.”
저 사람이 형과 나의 공간을 부숴 버렸어요. 오로지 형뿐이었는데, 내가 지키고 싶었던 걸 가볍게 때려 부쉈어. 내가 그걸 막지를 못했어.
“뭐가 미안한데.”
감정이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은 무뚝뚝한 목소리가 툭, 떨어졌다. 눈을 올려 뜨자 불쾌한 기색으로 고개를 돌린 형이 보였다. 형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그 안에 들어 있던 돈을 몽땅 협탁에 내려놓았다.
“상처 덧나면 안 되니까 병원 가고, 갈 때 택시 타고.”
한숨과 동시에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던 형이 마저 말을 뱉어 냈다.
“쉬다가 너도…… 가라.”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주워 침대에 던지며 형이 완전히 등을 보이고 돌아섰다. 형, 어디 가요. 쉰 소리로 불렀으나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형은 그대로 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가 버렸다.
***
형의 등이 잔상으로 남아 눈앞에 아른거리는 줄 알았더니 꿈이었다. 꿈속에서도 나는 형의 등을 쫓아 뛰었다. 형, 가지 말아요. 내가 더 잘할게요. 귀찮게 굴지도 않을게요. 약속해요. 구질구질하게 굴지 않고, 쿨하고 얌전하게 기다릴 테니까. 형은 저벅저벅 걸었다.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형의 얼굴을 잊어버릴까 봐 더럭 겁이 나서 눈을 질끈 감고 손가락을 이로 꽉꽉 씹으며 기억을 떠올리려 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나는 건 축축한 호흡과 낄낄 웃는 여럿의 목소리뿐이었다.
안 돼요, 가면.
서럽게 뱉어 내는 말과 함께 눈을 떴다. 어스름한 새벽이었다. 커튼 사이로 푸릇한 햇볕이 스며 들어와 코끝을 서늘하게 건드렸다. 온몸을 망치로 두들긴 것 같았다. 저민 고기가 된 것처럼 뼈까지 부서져 침대에 눌어붙은 듯 몸이 무겁다. 팔과 다리를 질질 끌어 옷을 추슬렀다. 관절을 구부릴 때마다 악 소리가 나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간신히 밖으로 나갈 꼴을 갖췄을 땐 이미 식은땀으로 몸이 흠뻑 젖은 채였다. 그대로 기듯이 형의 집을 벗어나려다 벽을 짚어 돌아왔다. 협탁에 놓인 현금 다발을 물끄러미 보다 집어 들었다. 돈이 탐이 나서 그런 건 아니었다. 형이 준 거니까.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나를 우습게 볼지도 모른다거나, 그런 짓을 하고 돈을 받을 만큼 뻔뻔한 인간이 아니라는 어필을 할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충분히 알고 있었다. 형에게 있어 이 정도 돈은 아무에게나 툭 건네주어도 상관없는 금액이었다. 가져가든 가져가지 않든 형은 알아차리지도 못할 거다.
형이 던지는 돈엔 그 돈이 갖는 물질적 의미 외에 그 어떠한 뜻도 담겨 있지 않다. 그렇게 믿는 편이 나았다. 이건 그냥 돈이야. 나를 깔보려는 어떤 의미도 없는 그냥 돈.
두고 가 버리면 정말로 이 돈이 ‘화대’처럼 여겨질까 봐 나는 돈을 가지런히 모아 품에 넣었다. 너무 아파서 택시를 탈까 잠깐 고민했지만 도로까지 나가 버스를 탔다. 첫차여서 손님이 없었다.
흐트러진 차림새에 창백한 얼굴을 보고 버스 기사는 알 만하다는 듯이 혀를 차며 나를 응시했다. 멋쩍게 웃으며 엉금엉금 뒤로가 구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속이 메슥거리고 몸이 욱신거렸지만 덕분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곧장 대부분이 빈칸으로 비어 있는 다이어리를 서랍에서 꺼냈다. 차마 자세히 적기도 쑥스러워 형과 만났던 날을 작은 동그라미들로 표시해 둔 것이 다였다. 맨 뒷장 클립에 돈 다발을 끼워 두고 날짜를 적었다. 다이어리를 닫고 서랍 깊이 넣었다. 당분간은 꺼내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나는 스스로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보잘 것 없는 내 가치라는 건 형의 세계에서 신기한 별미 같은 거라는 걸. 그 가치가 부서진 지금 나는 형에게 있어 못나고 부족한 그냥 하잘 것 없는 사람일 뿐일 거다.
그 사실을 확인하기가 두려워서 당분간 형을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건 걱정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일주일이 넘도록 형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J)
침대 위에서 두 사람의 몸이 엉켜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너무도 당연하게 ‘지난밤 먹었던 비타민제에 환각제가 섞여 있었나.’ 하고 생각했다.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샛별이 다른 남자에게 안긴다는 것은.
무엇이 그렇게 이상했을까. 사실 내게는 그다지 자극적인 풍경은 아니었다. 나는 약 따윈 입에도 대지 않지만 약을 한 인간들이 짐승처럼 엉기는 모습은 많이도 보았다.
그건 때때로 영감 비슷한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순수하게 흥분을 돕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주 남의 일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이토록 기분이 더럽지는 않았다.
샛별이 다 쉰 목소리로 나를 형, 하고 불렀을 때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맙소사. 뺨이 따가울 정도로 세게 마른세수를 했다. 심장을 중심으로 아래위로 피가 벌떡벌떡 뛰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생전 겪어 보지 못한 감정들이 심장을 주물러 댔다. 그냥 답답하고 살갗 아래 어딘가를 쥐어뜯어 무작정 소리를 지르고픈 감정이었다.
‘미안해요.’
평소의 나는 수줍은 얼굴로 미안해요, 속삭이는 샛별의 얼굴을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더 순해질 수도 없을 것 같은 얼굴이 더욱 부드럽고 여리게 변하며 뺨에 붉은 기가 도는 것이 어린 아이처럼 귀여웠다. 그러나 이런 식의 미안하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다른 남자의 품에서 붉어진 얼굴을 하고, 잔뜩 흐려진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모습은 정말이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다. 애초에 나는 샛별과 누군가를 연관 지어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샛별과 나, 그 사이에는 다른 무엇이 없었다. 또는 몹시 흐렸다. 샛별의 배경과 주변은 아주아주 흐릿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그 어떤 것도 고개를 쳐들지 않았다. 그저 샛별은 그 자체의 따뜻한 살결과 쾌활한 웃음으로 내 주위 어딘가에 놓여 있었다.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이를 테면 텃밭에 향기로운 과일나무가 심겨진 기분이었다. 그 나무는 어느샌가 열매를 맺고 내가 물을 주지 않아도 싱싱하게 자랐다. 과일을 따 한입 머금으면 달콤한 과즙이 입 안을 적시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허리가 저릿할 정도의 향으로 가득 차올랐다.
매일 매일 나는 원하는 만큼 과일을 씹어 삼키고 때때로 햇볕 아래 싱그럽게 자라난 모양을 보며 감탄하곤 했다. 언제 자라났는지도 누가 기르는지도 모르는 그것을 바라보는 심정은 제법 뿌듯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가지 끝에 누군가 손을 댔다고 해서 이런 마음이 들 줄은 몰랐다.
샛별을 보고 있으면 가슴 어딘가가 자꾸 쓰라리고 목구멍에 위산이 오르는 것처럼 따끔거려서 자리를 피했다. 뒤를 돌아서자마자 처량하게 울던 얼굴이 따라붙었고 한 발자국씩 옮길 때마다 나를 가늘게 부르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스치듯이 본 줄 알았는데 걸음을 옮길수록 샛별의 모습은 선명해졌다. 팔뚝의 멍 자국, 부어오른 뺨, 비정상적으로 충혈된 눈, 경련하듯 떨리던 몸.
“거기 서.”
놈은 아직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놈이 돌아보기도 전에 뒷덜미를 잡아채 비상문을 열고 집어 던졌다. 방비할 틈 없이 비틀거리던 놈이 계단을 굴러 떨어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놈이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어억, 비명을 질렀다. 추잡했다.
감히 어디에 손을 대. 귀가 먹먹할 정도로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그건 네가 손댈 수 있는 게 아니야. 주제를 알아야지.
“씨발……. 뭐냐.”
벽으로 붙어 서면서도 놈은 눈을 치켜뜨고 날을 세웠다. 그 위로 시뻘겋게 붉어진 샛별의 눈동자가 겹쳤다. 거창한 뭔가를 돌려주기에도 아까웠다. 머리채를 쥐고 질질 끌어 다시 계단으로 떠밀었다. 난간을 쥐고 버티려는 걸 발목을 걷어찼다. 아까보다는 완만하게 굴렀다.
몸을 일으키기 전에 아무 곳이나 쥐고 또다시 아래로 굴렸다. 어딘가 머리를 부딪쳤는지 놈은 머리를 흔들면서 비틀거리다 구역질을 했다. 생긴 것만큼 더러웠다.
“천박한 새끼.”
계단이 짧은 것이 아쉬웠다. 1층까지 그대로 떠밀어 웅크린 채로 반쯤 기절해서 덜덜 떠는 것을 현관에 던져 놓았다. 경비가 놀라 나와 놈을 번갈아 보았다.
“도둑입니다.”
경비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비 업체처럼 보이는 그럴듯한 이들이 노란 위액을 뱉어 내는 놈을 차에 실고 가 버렸다. 아주 약간 와일드한 경비 업체였다. 비싼 관리비에는 얼마간의 보호 비용도 들어 있으니까.
아파트 입구의 외진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아주 느리게, 숨이 끝날 때까지 들이마시고 가는 숨이 떨릴 때까지 연기를 뱉어 냈다. 몽롱하게 머리가 비워져 막 떠오르는 태양으로 시야가 아른아른거릴 때 샛별이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다리를 조금 절었고 오한이 든 것처럼 몸을 떨었다. 그러나 넘어지거나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나는 시야에서 샛별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머리가 온통 뿌옇게 연기로 흐려질 때까지 담배를 피우고 싶은 기분이었다. 생각이 많다는 건 나에게 썩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선명해지려는 어떤 윤곽들을 흩어 놓으며 생각을 보류했다.
우습게도 샛별의 손을 쥐고서 보들보들한 머리칼을 만지고 싶은 충동이 들어 담배를 질근 씹었다. 텁텁한 혓바닥에 달콤한 과일을 올려 과즙이 흥건하도록 짓누르고 싶다.
***
깜빡 잠이 드는 순간마다 샛별의 꿈을 꾸었다. 샛별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형, 하고 나를 부르는 입술은 부르텄고 머리칼은 흐트러져 엉망으로 눌려 있다.
손을 뻗으면 금방 닿을 것 같은데 아무리 몸을 기울여도 닿질 않는다. 그저 샛별이 엉망으로 흔들리는 모양을 바라볼 뿐이다. 문득 눈을 감았다 뜨면 샛별의 얼굴로 가득 차있던 시야는 멀어져 있었다.
언젠가 내가 봤던 이들이 차례로 샛별의 위로 올라탔다. 그들은 미끄럼틀이라도 타는 것처럼 샛별의 양팔과 다리를 꽉 쥐고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샛별은 아아, 앓는 소릴 내며 멍한 얼굴을 했다. 그러다가,
‘생각해 보니 꼭 형일 필요는 없었어.’
붉은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여 호선을 그렸다. 낮게 쿡쿡 웃은 샛별은 두 팔과 다리를 낯선 놈의 몸에 휘감고서 고개를 뒤로 젖히며 매끄러운 신음을 냈다.
‘깜빡 속을 뻔했지 뭐야. 형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란 걸 진작 알려 주면 좋았잖아.’
아주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샛별이 어깨를 감싸 쥐고 부르르 떨었다.
‘잘 들어. 넌 가짜야.’
아주 정교하게 다듬어진 가짜. 언제고 사람들이 알게 되면 너는 버림받을 거야.
샛별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밀어내지 못할 정도로 쏟아져 손으로 틀어막은 귀 안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 와 머릿속을 모조리 헤집었다. 그러고 나면 지독한 멀미와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잠을 이루지 못해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한 3일째 아침, 나는 인정해야 했다. 나는 샛별이 온전히 내 손 안에만 들어 있길 바라고 있었다.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한 채 내가 주는 것들에만 만족하며 그것이 최선이라고 여겨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않도록. 더 솔직히 말해 나는 겁이 났다.
그림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생각이 많아질 때면 습관처럼 스케치를 하던 버릇조차 나오지 않았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얼음처럼 굳어 있는 거다. 이건 분명 이상했다.
샛별에 대한 내 태도와 의식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언제라도 내 가치를 증명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평범하고 지루한 사람이어서는 안 되었다. 차라리 조금 비난을 받는 편이 나았다. 나를 향한 편견과 비난, 헛소문들은 내 본질을 가리고 부풀려 훌륭한 방어막이 되어 주었다.
형은 특별한 사람이에요. 내가 만나 본 사람들 중에 가장 특별하고 대단해. 가끔 막 신기해서 형 잘 때 볼 꼬집어 보는 거 알아요? 꿈인 거 같다가 문득 손잡고 있음 아, 진짜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맨날 봐도 나는 형이 맨날 신기해. 형 같은 사람은 나랑은 다른 재료로 만들었나 봐. 분명 그럴 거야.
섹스를 하고 난 뒤의 기분 좋은 피로감에 감겨 몸을 길게 늘어뜨리고 누워 속살거리는 샛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하나의 습관처럼 되었다. 매일 거울을 보며 눈동자에 엿보이는 불안의 조각을 억누르거나, 완성되는 그림 하나하나를 토할 것 같은 심정으로 꺼내놓던 것을 거짓말처럼 편안하게 해 주었다.
샛별을 보면 이틀쯤은 아무런 악몽 없이 잠들 수 있었다. 매일 삼키던 수면 유도제를 끊은 게 언제였더라. 서랍을 열어 보니 알약은 눅눅해져 서로 들러붙어 있었다. 약통을 통째로 쓰레기통에 버리며 불안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아차, 어느새 이렇게 되었지. 이건 위험하다. 샛별은 지나치게 깊이 내게 들어와 있다.
이건 곤란하다. 나는 어디까지나 혼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을 공유한다는 건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는 것과 같았다. 친구도, 연인도, 심지어는 가족도 그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는 건 사양이다.
그들이 원하는 장석은 창밖을 보며 하늘은 파랗구나, 하는 단순한 감각을 느껴서는 안 되고, 그려 놓은 그림에 의미를 찾지 못해 어리광을 부리듯 누군가의 허벅지에 누워 억지로 잠을 청하지도 않는다. 방법을 모른다면 나를 감추고 입을 다물면 그만이었다.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샛별은 눈치를 챘을지도 모른다. 작업실에 놓인 작은 그림을 가리키며 ‘저건 네가 들려준 노래가 듣기 좋길래’라고 솔직히 털어놓았던 것이 떠올랐다. 다른 사람이 물었다면 그저 빙그레 웃으며 두루뭉술한 제목을 둘러댔을 텐데.
샛별이 묻지도 않은 것들에 대해 나는 스스로가 먼저 털어놓은 일이 많았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었다. 그러나 박하늬와 함께 동거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았다. 그때의 우리는 최소한의 대화만 나누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혼란스러운 거다. 고작 샛별이 부재할 가능성을 아주 조금 맛본 것만으로 생활이 어그러졌다. 경고의 신호가 머리에 삑삑 울린다. 샛별이 의도를 했든 아니든 그는 내 약점을 쉽게 캐낼 수 있는 어떠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제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쥐고 있을래. 아니면 더 늦기 전에 놓아 버릴래.
가슴 안쪽의 시커먼 허공에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귀를 기울이고 한참을 기다려도 답은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은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 상황이 그러했다. 내 주위의 그 누구도 그런 식의 괴로운 표정을 지은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도의적인 책임감을 느꼈을 가능성도 있다. 같은 고민이 빙글빙글 돌아 일주일이 흘렀을 때, 머리가 터질 것처럼 생각이 가득 차 뭐가 뭔지 전혀 모를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일단 확인해 보기로 했다. 막상 샛별을 보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평소의 얼굴로 인사를 건네 온다면 나 또한 보통과 다르지 않는 얼굴로 인사를 하면 그만이다.
“……잖아요,”
“뭐 어때.”
“……다니까.”
“야, 진짜 이러기냐.”
샛별이 마칠 시간에 맞춰 밖으로 나섰다. 카페 근처의 주차장을 지나는데 억눌린 목소리가 들렸다.
“왜 이래. 진짜.”
“아, 시발. 내가 괜히 그래?”
목소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귀가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뭘, 내가 뭘 어쨌다고. 미쳤어?”
“그러니까 씨발, 내가 미친 건지 아닌지 확인 좀 해 보자고.”
“미친 새끼. 형 지금 미친 거야. 네가 좋아하는 년들이랑 가서 놀아. 여기서 왜 이래.”
“말은 똑바로 해, 시발아. 일하는 내내 색기 줄줄 흘리면서 꼬리 친 게 누군데.”
“내가?”
“솔직히 말해 봐. 너 그 새끼랑 잤잖아. 아냐?”
발소리를 죽여 다가가니 목소리가 분명해졌다. 한쪽은 뒷모습이어서 잘 알아보지 못했지만 다른 한명은 확실히 샛별이었다. 분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문 채 상대방으로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내게 등을 보이고 선 남자는 어깨를 둥글게 구부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샛별을 달랬다.
“그러니까 나랑 한 번만 해 보자고. 어차피 이번 달에 나 관두면 볼 일도 없을 텐데.”
“아니, 그러니까 그 얘기가 왜 그렇게 튀냐고.”
“씨발, 그냥 좀 하자. 싼다고 임신하는 것도 아니고 존나 빼기는.”
“개새끼.”
“너도 생각해 보라고. 내가 해 보고 좋은지 얘기해 준다니까? 어? 그 새끼 보통 아니던데 너도 꼬시려면 좀 발전이 있어야 될 거 아니냐. 어디서 처맞고 다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럴 정도면 너도 인마 벌써 끝장이라는 거야. 막말로 씨발, 네가 나랑 떡을 쳤는지 아닌지 그 새끼가 어떻게 아는데. 그리고 뭐 네가 그 새끼랑 사귀기라도 하냐? 어?”
“……조용히 해.”
일그러져 있던 샛별의 얼굴이 울 것처럼 변했다. 입술과 아래턱을 바르르 떨면서 주먹을 쥐었다. 씨발. 낮게 욕지거릴 씹어 뱉은 남자는 허리를 숙였다. 샛별은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그렁그렁한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그런 남자를 노려보았다.
“야, 그럼 일단 입술만 좀 빨아 보자. 너 진짜 그런 얼굴 할 때 존나 사람 꼴리게 하는 거 아냐?”
“……내가?”
샛별의 목소리가 조금 흐려진다. 남자의 허리가 조금 더 숙여졌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것 같다. 샛별의 얼굴이 남자의 뒤통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래?”
“그래. 존나 그래. 그러니까 딱 한 번만.”
남자가 고개를 틀자 그제야 작은 얼굴이 조금 드러났다. 넘칠 듯이 흔들리던 눈망울에서 또륵, 눈물이 넘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샛별은 상황을 회피하듯이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D)
성철 형이 이상하게 구는 건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최근 나를 대하는 태도가 묘하게 부드럽다가 어색했다가 하는 것이 전과는 달랐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한숨을 내쉬고 뭐라 중얼거리며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의 대화가 오고 가게 될 거라는 건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일이 끝나고 나를 불러낸 형은 뒤늦게나마 군대를 가기로 했다며 이번 달까지만 알바를 한다고 했다. 아쉽다. 언제 술 한잔해요. 악수를 건네는 내 손을 잡아당겨 꽉 끌어안은 성철 형은 ‘그러니까 한번 자자’고 했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알고 하는 거야?”
“어. 알고 하는 거야. 더 정확히 말해 줘?”
“아니, 됐고. 왜 그러는 건데요.”
“말했잖아. 네가 자꾸 사람 정신병자 만든다니까?”
말이 통하질 않는다. 말이 통해야 대화를 하는데 형은 막무가내였다. 그냥 무조건 자자고 했다. ‘잘해 줄게’ 살살거리며 나를 어르다가 ‘너 진짜 비싸게 굴 거냐?’ 짜증도 내다가 종국에는 ‘왜, 돈 줄까?’ 하고 물었다.
석이 형과 그런 사이가 됐다는 걸 들켰기 때문인 걸까. 나를 놀리려는 심산인 걸까. 믿지 못하고 뿌리치는 나를 붙잡아 세우며 성철 형은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석이 형을 들먹이며 ‘어차피 너도 그렇고 그런 정도 아니냐’고 몰아붙이는 데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야, 한 번만 하자.”
애절하게 부탁하는 것이 불쌍해서도 아니었고 험악한 표정을 짓는 것이 무서워서도 아니었다. 눈에 번들거리는 욕정을 담고서 가까이 다가오는 성철 형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서 있었던 것은 그만 맥이 탁 풀려 버린 탓이었다.
형이 때때로 값싸게 구는 이들에 대해 천박하다고 욕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 생각은 애써 하지 않고 접어놓고 있었지만 여자에 환장하는 성철이 형이 나를 보고 꼴린단다. 내가 꼬리를 쳤대.
그러고 보니 나를 타고 눌렀던 그 자식도 그런 말을 했었다. ‘나를 꼬시는 눈빛을 하고 있었어요.’ 강간범들이 하는 단골 대사로 몹시 개소리리라는 건 인정하지만 그 원인이 조금도 내게는 없는지 묻는다면 대답이 궁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실제로 내가 꼬리를 치고 안 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형도 나를 그렇게 봤을까. 아무 데서나 기색을 줄줄 흘리고 다니는 값싸고 천박한 놈으로 보였을까. 그래서 돈을 줬던 걸까.
형이 일주일간 아무런 연락도, 방문도 없는 것을 애써 모른 척하고 있던 것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러게. 나도 모르게 형이 좋아하는 마음이 지나쳐 천박해진 모양이다. 마음을 얻지 못할 바엔 몸이라도 가질래. 형이랑 하는 섹스에 만족할래. 다시 돌아보니 몹시 우스운 생각이었다.
그러게. 어차피 형은 조금도 모를 텐데.
“별아.”
뭉글거리는 눅진한 바다에 빠져 있는 것 같던 정신이 단숨에 깨어났다. 성철 형의 가슴팍을 밀치고 뒤로 물러섰다.
“형…….”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석이 형이 불쾌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는 성철 형 뒤쪽에서 느린 걸음으로 다가왔다. 형의 표정은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단정한 얼굴이 가면처럼 딱딱해져 성철 형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더러운 것을 피하듯 성철 형 곁을 멀리 돌아 내 앞에 섰다.
“뭐 하는 거야.”
낮고 부드러운 음색이었지만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형은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목소리 아래에 날카로운 기색이 깔렸다. 깊게 호흡한 형이 단호한 몸짓으로 내 손목을 쥐었다. 아플 정도로 꽉 쥐고서 이를 깨물어 으르렁거리듯 다시 물었다.
“뭘 하고 있는 거냐고.”
“그냥…….”
“그냥 뭐.”
손목이 아프다. 손이 저릿했다. 형은 조금의 여유도 두지 않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성철 형 쪽을 봤다. 이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허둥지둥 둘러보니 주차장을 빠른 걸음으로 벗어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억센 힘으로 형이 턱을 잡아 돌렸다.
“왜. 아쉬워?”
“그런 게 아니라.”
“저 새끼 뭔데.”
“그냥 같이 일하는 형이에요.”
“그냥 같이 일하는 사이에…… 아니다. 됐다.”
형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내 손을 뿌리치고 옆으로 돌아섰다. 다급한 손길로 안쪽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연거푸 두세 모금을 빨아 길게 연기를 뱉어 낸 형이 담배를 쥔 손의 엄지로 미간을 살살 긁었다.
“내가 너랑 그런 말을 나눌 사이는 아니지.”
한숨처럼 흘러나온 말이 가슴을 쿡 찌른다. 마치 실망했다는 말처럼 들렸다. 너에게 아주 조금 기대를 갖고 있었는데 역시나 넌 그 정도였구나. 형이 꺼내지 않은 말이 제멋대로 머릿속에서 문장이 되어 쟁쟁 울렸다. 너랑은 그런 사이가 아니지. 너는 아무것도 아니지.
“차라리 잘됐다. 덕분에 머리가 좀 식었다.”
빨간 담뱃불이 타오르는 것이 보일 정도로 깊게 담배를 빨아 당긴 형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길게 늘인 입술로 연기를 흘렸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형,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는데 그런 거 아니에요. 변명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재빨리 뿌리치지 않았던 내 모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런 게 아닌데. 진짜 아닌데.
“그래. 너는 나랑 그런 게 아니니까.”
목구멍까지 기어오르던 말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눈앞이 꺼멓게 물드는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의 변명도 구차한 설명도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나마 힘주어 잡혀 있던 손목이 저릿하게 울려 가슴이 찌르르 아팠다. 더 확실한 말이 어디에 있을까. 형과 나는 아무런 사이도, 변명이 필요한 관계도 아닌데.
나는 형의 뒤로 돌아가 허리를 끌어안았다.
“응. 그러니까 화내지 말아요.”
형이 화내는 얼굴은 아무래도 가슴이 아파. 진심이 덜해도 좋으니 날 볼 땐 웃었으면 좋겠다. 같이 있는 시간만큼이라도 불안으로 두렵지 않도록. 이마를 형의 등에 부비며 입술을 깨무는데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끈 형이 허리에 두른 내 손을 당겨 손등을 쓰다듬으며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별아. 너, 그림 모델 좀 해라.”
형의 손가락이 손등을 간질이는 것이 좋아서 허리에 감은 팔을 조였다. 형의 얼굴을 보기가 두려운 까닭이기도 했다. 형은 잠시 내 손을 쥐고 만지작거리다가 허리에 감은 팔을 풀게 하고 뒤로 돌아섰다. 바닥을 내려다보던 내가 시선을 들어올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그림. 도와줄 거지?”
형의 부탁 어느 곳에서도 이상한 부분은 없었다. 형이 내 손이나 몸 어느 한 곳을 쥐고서 간단한 스케치를 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너무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네, 대답하고 형이 그림 그리는 근사한 모습을 구경하기만 하면 되는데 이상하게 불안했다.
“별아.”
내 손을 당겨 손바닥에 입술을 부비는 형의 눈동자가 깊다. 한밤의 우물을 들여다보는 듯 형의 눈 속에 고인 것이 일렁였다. 고개를 젓고 싶어졌다.
“두고두고 계속 보고 싶어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서늘한 공기로 내려앉았다. 부르르 몸이 떨렸다. 입술을 악물고 괜히 터질 것 같은 눈물을 참아 내는데 형이 등을 감싸 안으며 키스를 해 왔다. 이번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입이 열리고 울음 길이 뚫리면 못난 말들이 쏟아질 것 같았다.
싫어. 그냥 옆에 두고 보면 되잖아요. 어디 가지 말고 계속 보면 되잖아. 그리지 않아도 눈에 선명할 만큼 오래오래 봐요. 난 그래. 난 보지 않아도 형이 눈에 어른거려.
“부탁, 들어줄 거지.”
뺨에 입술을 누르며 말을 뭉그러뜨리는 낮은 목소리에 가슴이 찌르르 아프다. 내가 어찌 그를 거절할 수 있을까.
“응. 당연하죠.”
입 안쪽 살을 세게 씹었다. 피가 배어 나오도록 어금니로 짓씹다가 눈두덩이 더 이상 뜨겁지 않을 때에 고개를 들었다. 너덜너덜한 입 안 살을 혀로 치워 내며 입꼬리를 당겨 미소를 지었다.
“내가 형한테 안 된다고 한 적 있었어요?”
농담으로 꺼낸 말에 왈칵 눈이 뜨거워진다. 모른 척 고개를 떨구며 형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형은 내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목을 울려 낮게 웃었다.
“그러게, 우리 별이는 착하지.”
주문과도 같은 그 말을 가슴에 새기며 눈을 감았다. 착하고 착한 나의 별. 꿈인지 아닌지 모를 몽롱한 곳에서 형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
형이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다. 형은 특별히 나에게 포즈를 요구하거나 가만히 있으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그의 집 곳곳을 돌아다니는 나를 보다가 문득 연필을 집어 들곤 했다.
“그냥 아무렇게나 있으면 돼요?”
“응. 괜찮아,”
다만 어딜 가더라도 형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이 부끄러웠다. 형은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집요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시야에서 멀어지면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고 나를 따라왔다.
형이 차려 준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이를 닦았다. 괜히 뻘쭘함에 신발을 정리하고 더 치울 것이 없는지 이리저리 기웃거리기도 했다. 할 일도 없고 더 할 수도 없었다. 참을 수가 없어 형을 돌아보면서 울상을 지었다.
“형, 미안한데 나 화장실 좀.”
하루 종일 형이 따라붙는 통에 화장실을 가지 못해서 다리가 배배 꼬였다. 형은 태연한 얼굴로 빨갛게 된 내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
“그러니까 그게……. 따라오지 말라고요.”
“왜?”
“꼭 그런 것까지 봐야 해요?”
“응.”
결국 문을 반쯤 열어 놓고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 있기로 합의를 봤다. 쪼르르 떨어지는 물소리가 부끄러워 죽을 거 같았다. 오래 참은 탓이지 소변은 멎지도 않고 길게 쏟아졌다. 뒤를 돌아볼 엄두도 나지 않아 물을 내리고 손을 씻는 동안에도 목은 움츠린 채였다.
“이, 이제 정말 문 닫을게요. 씻을 거니까…….”
“그래?”
탁. 바닥에 스케치북과 연필이 내던져졌다. 태연한 얼굴로 상의를 벗어 마찬가지로 바닥에 던지며 형이 한 걸음씩 다가왔다.
“그거야 말로 봐야지.”
반사적으로 문을 콱 밀었는데 어림도 없었다. 형은 한 팔로 문을 밀고 들어와 내 상의 아래로 손을 쑤욱 집어넣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하고 팔과 어깨를 움츠린 채로 눈만 데룩데룩 굴렸다. 억지로 상의를 벗겨 내고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리던 형이 뺨에 입을 맞췄다.
“혀, 형?”
목소리가 모기처럼 왱왱 가늘게 울었다. 눈을 홉뜨고 잔뜩 웅크린 채로 올려다보는데 그제야 형이 부스스 바람을 흘리며 웃었다. 눈이 매끄럽게 휘어졌다.
“뭐야. 장난이었어?”
“아니, 아니. 가까이서 보려고.”
기어이 나를 홀딱 벗긴 형은 그 말을 그대로 실천했다. 물을 틀어 놓고 몸을 씻겨 준다는 핑계를 대며 내 몸을 문지르더니 거품이 씻겨 내려가는 것을 코를 박을 기세로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얼굴, 팔, 옆구리, 등, 허벅지. 어디 한 군데 빼놓지 않고 집요하게 형의 시선이 나를 훑었다.
형이 세심하게 머리를 감겨 주고 몸을 씻겨 주는 건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조금 좋았다. 아니, 꽤 많이 기뻤다. 형의 손이 닿는 곳마다 몽글몽글한 감정이 퐁퐁 솟았다. 히히 웃으며 떨어지는 물을 받아 세수하는 것을 빤히 보던 형은 나를 품에 가두고서 귓바퀴를 깨물었다.
“조각을 해 볼까.”
머리를 수건으로 말려 주며 형이 중얼거렸다. 머리칼이 거의 마를 때까지 물기를 닦아 낸 형은 옷을 주지도 않고 나를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다시 스케치를 시작했다. 부끄럽다고 다리를 웅크리고 몸을 뒤집는 것을 붙잡아 벌리게 한 형은 고민하는 기색으로 연필을 만지작거리다 던져 버렸다.
“겉핥기만 해선 안 되지.”
진중한 얼굴로 옆구리를 쓸어내린 형이 눈썹을 가볍게 당겨 올렸다. 마찬가지로 벗고 있는 형의 중심을 보니 준비는 끝나 있었다. 그대로 침대에 눕혀 다리 사이에 손을 문지르며 형은 가는 눈을 뜨고 나를 응시했다.
“여길 제대로 아는 건 나뿐이야.”
***
새벽에 전화가 왔다. 형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를 빠져나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숨소리처럼 작게 낸 목소리에 다급한 목소리가 대꾸했다.
-안녕하세요, XX 병원인데요, 강숙자 님 보호자 맞으시죠?
벼락을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하얘졌다. 심장이 무겁게 뛰었다. 애써 뒤로 던져 버리고 있던 엄마에 대한 죄악감과 미안함이 울컥 치솟아 머리를 가득 채웠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에, 금방 가요, 금방 갈게요, 그쪽에서는 이미 대답이 없는데 나 혼자서만 대답을 반복했다.
옷을 주워 입고 신발을 찾아 신고 허겁지겁 준비를 마쳤다. 억누른 숨을 내쉬며 돌아보니 아직 형은 잠들어 있는 채였다. 금세 눈물이 차올라 형의 모습이 뿌옇게 흐려졌다. 손등으로 눈가를 거칠게 비비고 뛰쳐나갔다.
택시를 타고 가는 내내 두 손을 꽉 맞잡은 채로 기도를 했다. 엄마의 발작은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늘 생명이 달린 고비였다. 평소에도 가슴이 답답하다거나 현기증이 나는 등의 증세는 있지만, 발작으로 쓰러졌다는 건 아주 위험한 상태였다.
거리에 쓰러진 것을 누가 병원으로 데려다 놓았다고 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런 일이 없도록 밤과 새벽에는 늘 엄마와 연락을 놓지 않고 곁에 있어 주곤 했었는데……. 전부 내 잘못이다. 이렇게 엄마가 잘못되어 버리면 어떡하지. 꼭 내가 심장병에 걸린 것처럼 심장이 꽉 죄어 와 아팠다. 주먹으로 가슴을 세게 두드려도 나아지질 않았다.
“가, 강숙자 씨 보호자인데요.”
눈물로 범벅이 된 붉은 얼굴을 보고도 접수처 직원은 놀라지도 않았다. 침착하게 확인을 마치고는 조치는 끝났으며 조금 이따 같이 귀가하면 된다는 말을 전했다.
“입원하시면 좋은데 환자분이 워낙 강경하게 귀가하시겠다고 하셔서요.”
그녀는 피곤이 가득한 눈을 내리뜨며 타자기를 두드렸다.
엄마는 아직 응급실에 누워 있었다. 링거가 반 이상 줄어 있는 것을 보니 곧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접수처 직원의 말대로 나는 가급적이면 입원을 시켜 엄마를 쉬게 하고 싶었지만 어차피 답이 없다는 건 엄마도 나도 알고 있었다.
입원이 길어진다 해도 병원에서는 수술을 권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고, 엄마는 수술을 받을 바엔 차라리 집에서 죽겠다며 으름장을 놓을 게 분명했다.
평생 빚만 갚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나에게는 빚을 더 이상 지우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발작으로 병원에 실려 오는 걸 볼 때마다 차라리 장기라도 팔아 엄마를 살려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수술을 한다고 해도 반드시 성공할 보장이 없고, 수술 중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설명에는 나도 고개를 젓고 마는 것이다.
“아, 보호자분 오셨나 보다.”
의자에 앉아 엄마의 손을 약하게 쥐고 있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낯설지 않은 목소리였다.
“제가 원래는 이렇게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 아닌데, 오늘따라 유난히 그러고 싶더라고요. 아주머니 깨어나셔서 다행이에……. 어? 별이 아냐?”
세수라도 했는지 얼굴 주변 머리칼이 촉촉하게 젖은 채로 나타난 박하늬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는 주변에 실례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하하 소리 내어 웃더니 부드러운 얼굴로 내 어깨를 쥐고 만지작거렸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내가 도운 것이 네 엄마라서 정말정말 다행이야.”
엄마의 숨소리가 고른 것을 확인하고 곤히 잠든 것을 바라보다가 하늬와 같이 복도로 나왔다. 지갑에 넣어 뒀던 돈은 택시비로 써 버려서 자판기 음료가 고작이었다. 단 냄새가 훅 끼치는 율무차와 밀크 커피를 뽑아 들고 가서 내밀자 하늬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율무차를 골랐다.
“밀크 커피는 마시고 나면 입에서 냄새가 난단 말야.”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모양이 덩치에 맞지 않게 귀여웠다.
“얘기했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엄마가 없거든.”
없는 셈 치기로 했어. 입술을 쭉 내밀어 푸르르 바람을 뱉어 내고 다리를 꼰 채로 까딱거리는 것이 꼭 장난 같았지만 허투루 하는 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늬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눈이 감겨 보이지 않도록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요즘은 장석 그놈이랑 어때?”
엄마에 대한 얘기에 대꾸를 못 하고 쥐 죽은 듯 서 있는 내가 딱했던지 하늬는 화제를 바꿨다. 어느 쪽이든 말하기 어려웠다. 형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 건 어느 때라도 부끄러운 일이어서 서늘하게 식었던 얼굴이 홧홧하게 뜨거워졌다. 한 손에 종이컵이 쏟아지지 않도록 살살 쥐고 다른 손으로 귓불을 주무르며 사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어, 늘 비슷하지.”
“잘돼 간다는 뜻? 아니지. 장석 그놈이 하던 대로면 썩 좋은 건 아닌데.”
인상을 찌푸린 하늬가 율무차를 호로록 삼키고 입맛을 다시며 쩝쩝거렸다. 자세히는 몰라도 형과 하늬의 관계가 남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얘기를 할 때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심드렁한 형이지만, 하늬 얘기를 할 때는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춰 주거나 먼저 얘기를 꺼내 줄 때도 있었다.
왜, 그놈이 더 좋든? 장난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묻고는 혼자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클었다.
하늬가 스스럼없이 ‘그놈’이라고 형을 지칭하는 것이 어쩐지 부럽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형을 두둔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두둔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이 형이 나쁜 것은 없지만 어쨌든 머리를 굴려 말을 골랐다.
“형이 요즘은 내 그림도 그려 줘.”
“뭐?”
하늬는 놀람과 짜증이 뒤섞인 얼굴로 종이컵을 쥐지 않은 손바닥으로 뺨을 거칠게 문질렀다. 귀에 주렁주렁 걸린 피어스들이 손가락에 걸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림을 그렸다고?”
“응. 요즘은 내내 그래. 하루 종일…… 내 뒤꽁무니만 따라다녀.”
그의 반응이 의아하긴 했지만 내 나름의 자랑거리였기에 배시시 웃으며 종이컵 모서리를 이로 뚝뚝 뜯어냈다. 모서리 둥근 부분을 모두 펼쳐 쭈글쭈글하게 만들어 놓고 밑바닥에 깔린 설탕 맛뿐인 커피를 삼켰다. 하늬는 가루가 다 가라앉아 멀겋게 된 율무차를 흔들다가 의자 옆에 내려놓았다.
“꼭 그러리란 법은 없지만 말이야.”
아이씨. 갑자기 왜 그런데. 노망이 났나. 하늬는 머리를 벅벅 긁더니 두꺼운 철이 용접된 의자 테두리를 손톱으로 두드렸다.
“내가 독립할 때도 그 인간이 그림을 그렸거든.”
자료 수집인지 증거 수집인지 그 잘난 콧대를 세우면서 말야. 그때 그린 내 그림이 스케치북 두 권은 될걸.
내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떨어뜨린 하늬는 다리를 떨었다. 그 모양이 내겐 ‘그러리란 법이 없다.’는 말을 번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말이지. 별이 널 보면 막 목덜미가 간지럽고 귀가 가렵고 그렇거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초조하게 떨던 다리를 멈추고 하늬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빼꼼히 입술만 내밀어 말을 꺼내는데도 시무룩하게 내리떴을 그의 눈매가 보이는 듯했다. 늘씬한 키와 세련된 생김새와 달리 하늬는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형에 대한 얘기를 의식적으로 피하며, 나는 잘 정돈된 하늬의 분홍빛 손톱을 빤히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마. 난 그냥, 네가 사랑을 하고 있는 게 좋아.”
대단한 고백이라도 한 것처럼 길게 한숨을 내쉰 하늬는 손가락을 구부려 양 뺨을 긁어내리고 스스로 팔뚝을 벅벅 문질렀다. 아으, 진짜 변태 같다. 그런 거 아닌데, 하고 중얼거리면서 힐끔 나를 쳐다보더니 금세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니까, 꼭 그 사람이 장석이 아니었어도 그랬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면 내 눈에 보였을 리가 없으니 제쳐 두고 나는 그냥……. 네가 누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두근거리거든. 네 마음이 나한테 옮는 것처럼. 물에 물감 풀어놓은 것처럼 포로롱 하고 번지는 거야.”
두 손을 쥐었다 펴며 군데군데가 하얗게 된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하늬가 피식 웃었다. 엉망으로 문지른 탓에 붉어진 얼굴을 하고는 쑥스럽다는 듯이 목을 웅크리며 양쪽 어깨를 꿈틀거렸다.
“아, 나 이런 말 진짜 닭살 돋아서 싫은데.”
하늬가 허공을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초조한 듯이 두 손을 싹싹 문지르다 무릎 위에 올렸다.
“나는 사랑 같은 거 안 믿어. 사랑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예쁘거나 좋은 거란 생각은 더더욱 안 한단 말이야. 근데, 네가 장석을 보거나 장석에 대한 얘길 하는 걸 보고 있으면 괜히 아무렴 어떤가 싶어지면서 낙천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거야. 뭐 저렇게 나이 헛먹고 예쁘게 짝사랑하는 놈이 다 있나 싶고…….”
얘기를 하다 어느 부분에서 찡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늬는 코가 시큰한지 검지로 코끝을 슥슥 문질렀다. 그러다가 고개를 퍼뜩 들고 순박한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순간 하늬가 고등학생처럼 몹시 어려 보였다.
“이기적인 거 아는데……. 그래도 나는 네가 계속 예쁘게 좋아했으면 좋겠어.”
코를 찡끗한 하늬는 그 모든 말을 한 번에 뒤집으며 시원스레 웃었다.
“물론, 장석 그 자식이 미친 짓을 하지 않을 때 말이야.”
나는 장석 그놈한테 빚진 게 많아서 어쩔 수 없지만 너는 아니니까, 꿀릴 거 하나 없잖아. 안 되겠거든 그냥 놓고 가 버려. 옷 싸 들고 애들 싸안고 사라진 선녀처럼 휙 하니 가 버리란 말이지. 마음만은 네 편이야, 나는.
“개소리 잔뜩 했네.”
하늬는 목을 쭉 빼더니 월월 개 짖는 시늉을 했다. 형이 내 그림을 그리고 나를 쫓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둑해졌던 머리가 하늬의 웃음으로 밝게 개었다.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내 답은 간단했다.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고민해 봐야 부질없는 일이다. 형이 나를 먼저 떠나건 내게 질려 방치하건, 미리 알거나 모르거나 내가 형을 좋아하는 일이 없던 것이 되지는 않았다.
좋아할 만큼 좋아하고 그것을 멈출 수 있다면 그 마음이 갖는 가치가 얼마나 될까. 하늬의 말에 기대어 조금 우쭐거려 보자면 형을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일등이라고 자부한다. 하늬를 향해 씨익 웃었다.
“그래, 부러울 거다. 이만큼 열렬한 사랑을 해 보는 게 쉬운 줄 알아?”
그 말 그대로였다. 하늬가 부러워해도 어쩔 수 없다. 생각만 해도 눈이 뜨거워지고 마음이 달음질치는 이 마음은 누구에게 줄 것도 없이 내 것이었다. 이렇게나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건 언제가 되어도 내게 소중한 추억이 되어 줄 거다.
이따금 형의 혼란스러운 태도로 복잡하던 머리가 순식간에 깨끗해졌다. 내가 형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 그것 말고 더 뚜렷한 사실이 어디 있을까.
“잘났어, 정말.”
혀를 끌끌 차던 하늬가 신발 코로 내 종아리를 툭 찼다. 자리로 돌아가니 엄마는 벌써 깨서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말 미안하고 고맙게도 하늬는 병원비를 내주었다.
형에게는 5백 원짜리 하나 받는 것도 그렇게나 속이 불편하고 민망했는데 이상하게도 하늬가 그러는 건 싫지 않았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맙다고 하자 하늬는 피곤한 눈가를 문지르며 느슨한 얼굴로 웃기만 했다.
“인마, 친구끼리는 원래 다 그러는 거야. 이건 빚지는 게 아니라 덕 본다고 하는 거고.”
“친구?”
“어, 친구.”
주먹을 말아 쥐고 어깨를 툭 치는 하늬의 동작이 어색했다.
“너도 친구 없구나?”
장난으로 꺼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끔뻑이는 모양이 웃겨서 푸하 터지는 웃음을 참지 않으며 대꾸했다. 나도 친구 없어! 하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러니까 잘해, 인마.
마지막까지 엄마와 나를 집에 태워다 주고 돌아가면서 하늬는 연신 싱글거리는 얼굴로 웃었다. 나와는 전혀 접점이 없을 것 같은 하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엄마가 미심쩍은 기색을 내비치자 하늬는 잔잔하게 틀어 놓았던 노래조차 꺼 버렸다.
“어머니, 아들 하난 참 기가 막히게 잘 키우셨어요. 요즘 이렇게 진국인 친구 만나기 힘들어요. 다들 겉멋만 들어 가지고 쉬어 빠졌지.”
저처럼요. 덧붙이며 눙치는 것을 보고 엄마도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에 집에 오면 맛있는 밥 한 끼 대접하겠다는 엄마의 말에 하늬는 눈이 휘어져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최근엔 사장에게 진심으로 염치가 없다. 나 원래 이렇게 아무 때나 일 빼먹고 그런 사람 아닌데, 요즘 일진이 사납게 꼬이는 걸 어떡해. 아무리 그래도 어제 당장 응급실에 다녀왔던 엄마를 혼자 둘 수는 없어서 일을 쉬었다. 엄마는 괜찮다고 했지만 아직도 얼굴이 핼쑥했다. 가슴이 답답한지 연신 주먹으로 문지르는 것을 보며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오늘은 안 와?]
저녁 무렵 형에게 문자가 왔다. 생각해 보니 말도 없이 새벽에 빠져나가 연락 하나 남겨 놓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아침에 일어나 당황했을 형을 생각하니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못가요. ㅠㅠ]
[왜.]
왜냐고 묻는 형이 낯설어서 잠시 눈을 끔뻑였다. 형은 나에게 ‘왜’를 묻는 사람이 아니었다. 알겠다고 미련 없이 돌아서거나 그런 대답이 나올 수도 없이 ‘얼른 와.’ 한마디를 던져 놓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얘기를 할지 망설이다 엄마가 편찮아서라고 답장을 보냈다.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더라도 납득이 갈 만한 이유였다. 형에게 더 이상 답장은 없었다. 카톡을 읽기는 했으니 답장이 없단 건 이해할 수 있다는 표시일 것이다.
오랜만에 엄마 곁에 붙어서 어리광을 부리고 살갑게 굴었다. 엄마는 함빡 웃는 얼굴로 큰 소리로 깔깔 웃었다. 진작에 이렇게 했어야 했다. 민망함과 죄송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집 냄새가 푹 물들어 있는 이불에 파묻혀 엄마랑 귤을 까먹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앞으로도 쭈욱 엄마랑 같이 살 건데, 이렇게 엄마랑만 같이 지내면 형도 잊을 수 있지 않을까? 귤을 반 개쯤 먹었을 때 그 생각을 접었다.
귤 참 맛있다. 형도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먹기 좋도록 흰 껍질까지 벗겨 맨들맨들해진 귤 알맹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서 시큼함에 인상을 찌푸리다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을 형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보고 싶었다.
꾸벅꾸벅 졸았다. 귤껍질이 비닐봉지를 반쯤 채우고 손톱이 노랗게 변했을 때쯤 간만에 뜨끈하게 틀어 놓은 보일러 탓에 엄마도 나도 깜빡 잠이 들었다. 식은땀이 나도록 뜨뜻한 바닥에 등을 비비고 무거운 솜이불을 덮는 감촉이 좋았다. 장판이 달궈지는 냄새에 손가락으로 나이를 셀 수 있을 무렵의 꿈을 꾼 것도 같았다.
드르륵 드르륵,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휴대폰 진동 소리였다. 알람인 줄 알고 습관적으로 손가락으로 액정을 그었는데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가라앉은 목소리의 형이었다.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밖으로 나와.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입가에 흐른 침을 엄지로 슥 닦으면서 귀에 휴대폰을 바싹 붙였다. 엄마는 아직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혹시나 엄마가 깰까 봐 엉금엉금 문턱을 넘어가며 속삭였다. 형, 무슨 일인데요?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지 ‘뭐?’ 되물었던 형은 이도저도 귀찮은지 늘어지는 말투로 다시 얘기했다.
-일단, 나와.
옷을 갈아입을 틈도 없었다. 형은 이전에 약속 장소로 정했던 집 근처 지하철역 주변에 차를 대고 있다고 했고,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니 가급적 빨리 나오라고 말을 끝낸 뒤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럴 만도 했다. 밤이 되면 이따금 차가 다니는 소리가 소음의 전부인 형의 동네에 비해 10분만 걸어도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우리 동네는 지나치게 번잡스러웠다. 번잡함을 극도로 싫어하는 형이 여기까지 온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무슨 일이지, 내가 혹시 새벽에 급히 나가느라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도둑이라도 든 걸까. 아님 형도 어디 아픈 걸까. 황급히 야상을 걸쳐 입고 모자를 푹 눌러 쓴 채로 뛰듯이 달려 나갔다.
차가 주차된 자리에 가까워질수록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아무리 마음이 급했다지만 지금 꼴은 너무했다. 무릎이 늘어난 회색 추리닝에 앞이 다 헤진 오래된 운동화, 패션이라기보단 덮개라고 놀려도 할 말이 없는 촌스러운 싸구려 캡 모자, 주머니가 많은 게 유일한 장점인 낡은 야상. 내 차림은 고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고 낡기만 했다.
형을 만날 때면 옷장을 탈탈 털어 번듯한 척 굴었지만 사실 이게 내 원래 모습이었다. 군데군데가 까맣게 물든 운동화 끈이 꼭 내 꼴 같아서 나는 밝은 간판과 가로등을 피해 그림자를 가로질러 걸었다.
선팅을 해 놓은 차 안은 실내등까지 꺼 놓자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똑똑 구부린 손가락 마디로 창문을 두드리자 곧 창문 유리가 내려가고 반쯤 기대 누운 형의 얼굴이 드러났다.
형은 모자 아래로 가려졌을 내 얼굴을 빤히 보다가 불쑥 손을 내밀어 턱을 붙잡았다. 고개를 숙이며 피하려 드는 것을 굳이 붙잡아 꺼끌한 턱을 만지작거리고 건조한 방 안에서 거칠게 부르튼 입술을 매만진 후에야 놓아 주었다.
“잠깐 들어오지.”
“저 금방 가 봐야 되는데.”
“나도 금방 갈 거야. 잠깐만.”
헐렁한 추리닝 바지에 손을 슥슥 문지르다 어기적거리며 차를 반 바퀴 돌아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리 길지도 않은 야상을 한껏 끌어 내려 억지로 무릎을 덮었다. 형은 내 손이 꼼지락거리며 몸을 감추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불시에 입을 맞춰 왔다. 내가 도망갈 수 없도록 애초에 아래서 부터 입술을 밀어 올렸다.
등받이에 꼼짝없이 떠밀려 두 손으로 야상 끝자락을 간절하게 붙잡아 내린 채로 목을 움츠렸다. 형은 숨이 닿을 거리에서 제 입술을 혀로 할짝이며 옅게 웃었다.
“귤 먹었구나. 아직 시네.”
“아……. 네, 아직 시어요.”
형의 손바닥이 야상을 걷어 내고 흐늘거리는 추리닝 위를 쓸어 올렸다. 눈썹을 움찔거리며 시선을 피하는데 툭, 형의 손등이 모자 캡을 쳐올렸다. 그늘에 가려 위쪽이 흐릿하던 형의 얼굴이 훤하게 드러남과 동시에 엉망으로 눌린 내 머리도 드러났다. 두 손으로 허겁지겁 머리를 쓸어내리고 구레나룻을 만지작거리는데 형이 킥킥 웃었다.
“귀여워.”
“에? 네, 뭐가요?”
엄지와 검지로 내 귓불을 만지작거리던 형의 손이 미끄러져 내려와 턱 주변을 문질렀다. 수염이 빨리 자라는 편은 아니었지만 말끔하지 않은 턱이 신경 쓰여 목을 뒤로 빼는데 웃음을 매단 형의 입술이 다가와 뭉개듯이 입을 맞췄다.
“다음에는 그렇게 입고 와. 그렇게 입고 있는 거 그리고 싶어.”
“싫어요. 쪽팔려.”
“왜? 귀여운데. 대체 신축성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그런 바지는 어디서 사는 거야.”
머리를 만지느라 야상 밑단이 끌려 올라가 펠리컨 주둥이처럼 늘어진 추리닝 무릎이 드러나 있었다. 손가락으로 집어 들고 흔들면서 형은 소리 내서 웃었다. 아, 진짜 예상치 못한 데서 귀여워 너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 내는 시늉을 하면서 남은 웃음을 어깨를 들썩여 흘려 내보냈다.
핸들에 양팔을 겹쳐 올리고 느슨하게 몸을 기댄 형이 가는 눈을 뜨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괜히 얼굴이 빨개졌다. 형이 일부러 올린 것을 내 손으로 막 끌어 내릴 수도 없어서 반만 걸친 모자챙을 만지작거리면서 창밖으로 힐끔 시선을 돌렸다.
“그래, 이 정도면 제값은 한 거 같다.”
몸을 뒤로 젖힌 형이 뒷좌석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하나가 아니었다. 드라마에서나 봤던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과일 바구니랑 크기가 그리 크지 않은 두꺼운 천으로 된 스포츠 백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형이 쓰는 거니까 비싼 가방일 게 뻔해서 손잡이에 손도 못 대고 눈만 끔뻑이니 형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거 아니야. 쓰고 돌려줘. 안에 건 다 비워서.”
“뭔데요?”
“그냥. 너도 없고, 할 일도 없어서.”
“그러니까 이게…….”
“가서 봐.”
옆으로 헤드라이트를 켠 차가 지나갔고 순간 형의 얼굴이 조명에 스쳐 붉어 보였다. 언뜻 형이 쑥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눈을 감았다 떠서 다시 봤을 땐 형은 평소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내게 가방을 내밀고 있었다.
“진짜 괜찮은데…….”
“내가 과일 놓고 정물화 그릴 때는 지났지. 그냥 네가 가져.”
얼떨결에 품으로 다 감싸지지도 않는 커다란 과일 바구니와 스포츠 백을 받아들었다. 우물쭈물 가방 손잡이에 손가락을 거는데 내 손을 붙잡아 올린 형이 손가락 끝에 코를 문지르며 킁킁거리다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손가락도 노래. 내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가 가볍게 부비더니 혀를 내어 핥아 낸 형이 매끄럽게 눈썹을 기울였다. 별아, 네 손에서 겨울 냄새 난다.
그러고 보니, 겨울이다. 차 문을 열어 한쪽 발을 내딛는데 코끝에 스치는 바람이 시리다. 떠도는 공기의 가운데서 찬 것을 뭉쳐 놓은 허전한 냄새가 났다. 괜히 겨드랑이 아래가 시린 기분이 들어 팔을 딱 붙였다.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서서 기다리는데 발밑이 냉랭했다.
머쓱한 기분을 모자 아래로 감추며 터덜터덜 걸었다. 형을 보내는 마음이 유난히도 스산했다. 이래서 다들 결혼을 하는구나. 돌아서는 걸음이 춥고 아쉬워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온기가 있을 리 없는 과일 바구니와 스포츠 백을 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둥켜안고서 동그랗게 번진 가로등 밑을 가로질렀다. 이상하게도 귀 뒤쪽이 뜨거웠다.
***
스포츠백이 무겁다 싶었더니 내용물이 많이도 들어 있었다. 딱 봐도 엄마를 위해 만들었을 전복과 야채가 들어간 죽이 커다란 보온병에 들어가 있었고, 내가 형네 집에서 맛있다고 몇 번이나 발을 동동 굴렀던 제육볶음이나 간장 닭볶음도 큰 통으로 들어 있었다.
이게 다 웬 거니. 잠에서 깨어난 엄마가 컬이 늘어진 파마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올리며 가방에서 꺼낸 것들을 뒤적거렸다. 방 한구석에 놓아 둔 과일 바구니를 보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어디 병문안을 가냐고 물었다.
“병문안은 무슨……. 엄마가 환자잖아.”
“아니, 저런 게 왜 우리 집에 있어.”
탱탱하게 랩에 쌓인 것을 지문이 남을까 쉽사리 손도 대지 못하고 빤히 보기만 하던 엄마가 아, 탄성을 내더니 작게 박수를 쳤다.
“그래, 그때 그 멀끔한 친구구나.”
엄마가 하늬에 대해 ‘멀끔하다’고 표현한 것이 이상해서 입맛을 다셨다. 엄마는 평소에 남자가 귀걸이만 해도 저걸 어따 쓰니, 기집애 꼴을 해선 하고 혀를 차는 편이었고 얄쌍하게 딱 붙는 옷만 입어도 눈살을 찌푸리며 저러다 고추 상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편이었다.
하늬는 한쪽 귀에만 다섯 개가 넘어가는 피어스를 했고 긴 다리가 시원하게 보일 만큼 딱 붙는 옷도 입었었다. 평소라면 멀끔히 아니라 지랄이라고 했을 것을 엄마는 뻔뻔한 얼굴을 하고 기대감 어린 말투로 물었다.
“아쉽지만 아니거든.”
“그럼 누구.”
“있어. 어엄청 잘생기고 끝내주게 능력 있는 동네 형.”
“에이, 그런 사람이 이 동네에 어디 있어.”
“동네 형 같다는 거지. 엄마 아들 너무 띄엄띄엄 보는 거 아냐? 나 그런 사람들이랑 친해. 전에 봤던 걔 있지? 걔는 심지어 모델이다. 엄마 아들이 이렇게 잘나간다고.”
“진짜? 어쩐지 인물이 훤하더라. 그래, 요즘은 그렇게 생긴 애들을 두고 세련됐다고 하더라만은, 그래도 어디 우리 아들 인물만 하겠어?”
“그치? 엄마가 봐도 엄마 아들이 잘생기긴 했지?”
“그럼, 그럼. 내 새끼.”
엄마의 손이 궁둥이를 팡팡 두들기는데 힘이 들어가지 않아 툭툭 치고 말았다. 사소한 일에도 자꾸 코가 시큰해지니 큰일이다. 코를 킁킁거리며 돌아서서 형이 보내 준 죽을 그릇에 옮겨 담았다. 엄마에게 내밀고 어때? 묻자 후후 불어 크게 한입을 떠 넣은 엄마가 정색을 하고 눈을 부릅떴다.
“아드을, 솔직히 말해.”
“뭘.”
“너, 여자 생겼지.”
“무슨 소리야.”
“감추는 게 더 수상해. 애 딸린 과부나 쭈글쭈글한 할머니라도 돼?”
“아니, 그러니까 무슨 소리냐고.”
연거푸 세 숟갈을 떠먹은 엄마가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러곤 조용히 숟가락을 그릇에 푹 꽂아 두고 엄지를 들어 내밀었다.
“이건 보통내기의 솜씨가 아냐. 최소한 30은 돼야지. 20대의 풋내 나는 손끝으론 요런 맛이 안 나지. 솔직히 말해, 여자 친구가 나이가 더 많아?”
뜨끔. 이럴 때 보면 엄마가 진짜 무섭다. 얼어붙어 말을 어버버 하는 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엄마는 아주 자애로운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다. 엄마는 네가 외계인이랑 결혼한다고 해도 이해한다. 그냥, 손주만 보자.”
엄마 미안한데, 그건 못 할 거 같은데요. 순식간에 형이 외계인보다 못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걸 들으면서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아니지, 굳이 따지자면 내가 형네 부모님께 외계인만도 못 한 놈이 되는 거구나. 아니, 애초에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 그저 순수하게, 그게 꼭 순수한 건 아닌데 마음은 순수하거든요.
순식간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애매한 표정을 짓는 나를 보며 엄마가 계속 눈썹으로 꿈틀꿈틀 신호를 보냈다. 못 본 척 반찬통 뚜껑을 열어 제육볶음 한 조각을 들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이런 게 인생의 맛이구나. 눈가가 찌르르 울리는 건 제육볶음이 매운 탓만은 아니었다.
형을 찾아갈 수 있게 된 건 그 뒤로 나흘 후였다. 엄마 성화에 못 이겨 카페로 출근은 했지만 차마 형에게 팔랑팔랑 놀러 갈 수는 없어서 일이 끝마치자마자 집으로 달려갔다.
하루는 엄마가 좋아하는 오뎅, 그다음 날은 호떡, 그다음 날은 붕어빵을 사 갔지만 엄마는 형이 해다 준 음식을 제일 맛있게 먹었다. 3일 만에 큰 통에 담아 왔던 제육볶음이며 닭볶음, 죽까지 싹싹 긁어 먹어 치운 엄마는 통을 깨끗하게 씻어 내게 내밀었다.
“이게 보통 정성이 아니다. 정말 잘 먹었다고 꼭 전하고 너도 가서 섭섭하지 않게 인사해 둬라. 살면서 이런 사람 만나기가 어디 쉽니?”
엄마의 컨디션도 많이 회복된 것처럼 보였고 또 형이 보고 싶기도 했기 때문에 그 핑계를 대고 형을 찾아갔다. 퇴근 전 ‘오늘 가도 돼요?’ 보낸 카톡에 ‘기다릴게’라고 답장이 돌아왔다. 심장이 쿵덕쿵덕 뛰었다.
형이 나를 기다린다니. 휑한 집에 덩그러니 앉아 현관문을 보고 있을 형의 모습을 그려보다가 웃음이 나서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익숙하게 비밀번호 키패드를 누르고 들어가 나 왔어요, 인사를 하는데 형이 인사보다 먼저 불쑥 뭔가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 하고 쳐다보니 시장에서나 팔 법한 흐물흐물한 면 추리닝 바지에 메이커의 짝퉁 로고가 새겨진 펑퍼짐한 후드 티였다. 거기에 심지어는 파란색 양이 그려진 수면 양말까지.
“갈아입어.”
“이걸요?”
“응.”
신종 장난인가 싶어 옷 무더기를 한번, 형을 한번, 번갈아 쳐다보는데 형은 내민 손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쭈뼛거리며 옷을 받아 들고 눈치를 살피니 활짝 웃으며 드레스 룸까지 열어 주었다.
집에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차림이었다.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내 몸에 맞춘 듯 편안하고 좋았다. 무릎이 잘 늘어나는 쥐색 추리닝은 아무렇게나 앉거나 누워도 편하고 앞에 주머니가 달린 후드 티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자면 귀도 시리지 않고 좋다. 집에 색색별로 수면 양말도 있는데 형이 건네준 건 쫀쫀하고 털이 북실북실한 걸로 꽤 비싼 거였다.
“이럼 돼요?”
문을 열고 나가면서 쑥스러움에 후드를 뒤집어썼다. 형은 식탁에 붙어 서서 날렵하게 깎은 연필심으로 종이를 긁다가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이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성큼성큼 다가와서 내 양 볼을 꼬집듯이 쥐었다.
“잘 어울려, 정말. 사 두길 잘했다. 시장은 처음 가 봐서 긴장했는데 옷이 너무 싸서 나도 모르게 많이 사 버렸어. 같은 옷이 열 벌씩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입어.”
“여, 열 벌이요?”
“응. 그리고 이것도.”
뒷주머니에 꽂아 놓았던 것을 꺼내어 내밀었다. 형이 손 위로 올린 것은 빨간 벙어리장갑이었다. 형은 장갑을 한 쪽씩 내 손에 끼워 주었다.
“별이 네 손가락이 장갑 속에서 초라해지는 게 싫어.”
벙어리장갑을 끼니 내 새끼손가락도 감쪽같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둥글게 감싸여 얌전히 장갑 속에 들어 있는 모양이 제법 귀엽기까지 했다. 가운데 꽈배기 무늬가 있고 안뜨기, 겉뜨기가 두꺼운 간격으로 들어간 장갑의 감촉은 썩 부드럽지는 않았다. 익숙하고, 거칠었다.
“이것도 시장에서?”
“돌아 나오는 길에 웬 할머니가 바닥에서 팔더라고. 이게 제일 예뻤어.”
내 양손을 모아 쥔 형이 비어 있는 새끼손가락 부분을 손가락으로 비볐다. 손을 당겨 뺨에 대고는 가늘게 뜬 시선으로 날 응시했다.
“너를 그리고 싶어.”
“새삼스럽게…….”
“아무렇게나 말고, 온전하게 그리고 싶어.”
허리에 손을 감아 가볍게 입을 맞춘 뒤 형은 나를 침대에 걸터앉게 했다. 식탁 의자를 끌어와 지척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곧 연필을 움직였다. 스걱 스걱, 연필이 움직이는 소리에 귀가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건, 어때요?”
나는 아주 느린 동작으로 천천히 후드 티를 벗고 바지를 끌어 내렸다. 회색 속옷도 다리 아래로 끌어 내렸다. 형은 묵묵히 내가 하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 파란 양이 그려진 수면 양말과 빨간 장갑이 내가 입은 전부였다. 다리를 오므리거나 이불을 당겨 몸을 가리는 대신 허벅지에 팔을 두고 자연스럽게 장갑 낀 손으로 사타구니를 가렸다.
형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를 살핀 뒤에 가볍게 입술을 씹었다가 놓았다. 대답은 입술 새로 흘러나온 작은 한숨으로 충분했다. 잠깐 자리를 비우는가 싶었던 형은 손에 빨간색과 파란색 파스텔을 쥐고 돌아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밤이 깊도록 우리는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은 채 서로의 어딘가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형의 재능이나 실력에 대해 의심을 했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이 하는 일에 대해 뚜렷하게 의식하고 있지도 않았다.
가벼운 크로키나 완성된 그림, 또는 진행 중인 작품의 일부를 보며 감탄하는 일은 많았다. 형은 내게 그림을 보여 주는데 박하지 않았고 그림이라고는 졸라맨을 그리는 게 전부인 나로서는 형이 긋는 선 하나도 특별해 보였다.
그러나 요즘의 형을 보면서 생각을 바꾸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형이 천재라고 불린다는 것. 한눈에도 우월해 보이는 아름다운 얼굴과 길게 뻗은 팔다리 외에 그토록 많은 이들이 형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아마 그걸 알았다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을 테지만.
형은 정말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다. 내가 침대에 누워 슬금슬금 잠에 빠져들 때부터 스케치북을 펼쳐 들고 내가 이른 새벽 깨어날 때까지 한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릴 때도 있었다.
나를 보고 그림을 그릴 때도 있었고 옆에 두고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그릴 때도 있었다. 그럴 때에도 어쩐지 알 수가 있었다. 형은 나를 그리고 있구나. 그 까맣고 깊은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구나.
어서 와. 잘 다녀와. 그게 요즘 형이 하는 말의 거의 전부였다. 형은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입을 다문 채 손만 움직였다. 나는 그 곁에 앉아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이따금 뭔가를 떠올렸다는 듯이 깜빡이는 모양을 바라보거나, 여름밤처럼 푸르고 검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는 것을 응시했다.
그동안 겪어 보지 못한 종류의 벅찬 감정이 일었다. 그건 아주 이상한 감정이었다. 형이 나를 바라볼 때에 내 안의 작은 연못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고, 반대로 내가 형을 바라볼 때는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조용한 바다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쪽이든 잔잔한 물결이 일어 가슴을 흔들었다.
어릴 적 방 안에 혼자 누워 엄마를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었을 때, 문득 꿈결 같은 감촉이 귓가를 간질이면 엄마가 돌아왔다는 신호였다. 엄마는 내가 깨지 않도록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허벅지에 얹어 놓고서 머리칼과 귀를 만지작거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누렇게 눌어붙은 장판과 비슷한 색의 해가 스며드는 해 질 녘, 나는 그 콧소리를 더 오래 듣고 싶어 자는 척을 하곤 했다.
딱 그때의 그런 기분이었다. 아직 지나지도 않은 현재를 놓고서 손바닥 위로 올린 작고 예쁜 과거를 떠올리는 것처럼 아련해했다. 어쩐지 자려고 누우면 눈물이 나서 이불을 두 손으로 꽉 움키고 눈두덩을 꾹 눌렀다.
하늬의 말이 생각나서 서글퍼지는 때도 있었다. 이상하긴 했으니까. 모든 게 이별을 위한 의식이라고 한다면 말이 되었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도 형은 안녕을 준비해 주는구나. 손바닥으로 가슴을 둥글게 문지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내 멋대로 생각했다. 아주 어쩌면 형은 나를 조금쯤은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나 같은 걸 위해 번거롭게 거짓말을 준비할 사람은 아니니까. 내 손의 불완전함을 어여뻐하거나 별 볼 일 없는 손가락의 점 따위를 예쁘다고 해 주는 것을 믿어 보는 것이다.
다 자란 나이에 귀엽다고 속삭이는 것에 가슴이 떨리는 것도 부드러운 구석 없는 딱딱한 몸을 안으며 좋다고 말해 주는 것도, 일종의 사랑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형. 나 그리는 거 지겹지 않아요?”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형의 손이 멈췄다. 깊은 눈꺼풀을 깜빡여 눈동자에 나를 담은 형이 여상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전혀.”
***
“날도 안 추운데 무슨 장갑이야.”
2주 만에 돌아온 휴일에 낮부터 형의 집으로 갈 준비를 하는데 엄마가 불쑥 물었다. 12월이면 춥지 뭐. 빨간 벙어리장갑을 늘어나지 않게 당기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추워. 엄마도 장갑 하나 사 줄까?”
“됐어, 작년에 네가 사 준 장갑이 아주 좋더라.”
“근데 왜 안 껴.”
“추우면 낄라 그러지.”
“춥다니까? 그러다 엄마 손 또 틀라. 핸드크림은 발랐어?”
“어어, 바르고 있지. 그럼, 그럼.”
“또 개미 눈물만큼 찍어서 바르는 거 아냐? 엄마, 그거 비싼 크림 아니야. 듬뿍듬뿍 써야 효과 있댔어.”
“그 뭐냐. 손 트면 바세린 바르면 돼.”
“그러지 좀 말라니깐.”
투덜투덜하면서도 나갈 준비를 마쳤다. 밤에 돌아와서 엄마 손에 잔뜩 크림을 발라 주고 비닐장갑을 끼워 줘야겠다. 고생스런 일만 하느라 엄마 손은 남자인 나보다도 딱딱하고 거칠다. 손가락 마디마디는 움푹 패여 있고 겨울이면 딱딱해진 살이 벗겨져 피가 나기도 했다.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겨울은 겨울이다. 숨만 쉬어도 화들짝 놀랄 만큼 찬 바람이 콧구멍을 후벼 왔다. 벙어리장갑에 코를 푹 묻고서 입김을 내쉬었다. 털실에 작은 물기가 맺혀 축축해졌다. 시린 코가 따뜻해질 때까지 입김을 불면서 걸었다.
보일러를 틀어도 외풍이 들어 추운 우리 집과는 달리 단열과 난방이 훌륭한 형의 집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몸이 노곤해졌다. 형네 집에선 티셔츠 한 장에 헐렁한 바지 하나만 입어도 따뜻하다.
겨울인 탓에 심적으로 추운 기분이 들어 돌돌 감싸는 것뿐이지 정말 하나도 춥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돈 모아서 좋은 집으로 이사 가는 건가 싶다. 심지어 화장실도 춥지 않다. 외투를 입고 따뜻한 물이 나오길 기다렸다가 후다닥 씻어 버리는 우리 집이랑은 천지차이였다.
“으! 형 왜 이렇게 추워요!”
기대가 와장창 무너졌다. 형네 집은 바깥이나 다름없이 추웠다. 형은 길고 두꺼운 파카를 입고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멀뚱히 서 있다가 움츠렸던 목을 조금 뺐다.
“환기 시키려고. 머리가 아파서.”
내내 공기 청정기가 돌아가는 형의 집에서 냄새가 날 리도 없는데. 의심스런 얼굴로 숨을 들이키자마자 납득했다. 코를 찌르는 유화 물감 특유의 냄새가 났다. 코를 찡그린 채로 벙어리장갑으로 얼굴을 틀어막으니 형이 무표정한 얼굴을 움직여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조각 같은 얼굴이 미소를 지을 때마다 부드럽게 바뀌어 생기가 도는 것은 아무리 봐도 신기하다. 형은 가까이 다가와서 내 손을 잡고 장갑 낀 손을 자신의 뺨에 대었다.
“빨간색 잘 어울려. 선물하길 잘했다.”
형의 손은 말라붙은 색색의 물감으로 엉망이었다. 형의 아름다운 손이 지저분해지는 것은 그림을 그릴 때뿐이다. 장갑에 물감이 묻을까 봐 초조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장갑 낀 손으로 형의 뺨을 문질렀다. 코가 빨갰다.
“너 오기 전에 환기 끝내고 창문 닫으려고 했는데.”
“얼마나 이러고 있었어요?”
“한 시간쯤?”
“춥겠다. 창문 닫아요. 이제 괜찮을 거 같은데.”
“냄새나지 않아?”
형은 내 기색을 살피며 코를 킁킁거렸다. 내내 물감을 쓰고 있으면 후각이 마비되어 냄새를 잘 못 맡는다고 했다. 나는 활짝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웬일로 작업실 방문이 단단히 닫혀 있다. 잠근 것은 아니었지만 늘 조금의 틈을 두고 열어 놓았던 문이 닫혀 있는 것이 낯설어 자꾸만 시선이 향했다.
이른 저녁을 먹었다. 형은 밥을 먹는 내내 어딘가로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한 숟갈을 입에 떠 넣고 씹다가 생각에 잠겨 턱을 멈추거나 허공에 숟가락을 든 채로 굳거나 했다. 팔을 뻗어 형의 이마를 짚었다. 형은 그제야 내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이미 곤죽이 되었을 밥을 씹어 삼켰다.
“형, 어디 안 좋은 거 아니에요? 감기 걸렸다거나. 얼굴이 너무 안 좋아.”
요 근래 계속 좋지 않기는 했다. 형은 잠을 잘 자지 못한 탓이라고 했고 한번 작업에 몰두하면 얼마나 집중하는지를 본 뒤였기에 나도 그 말을 믿었다. 무리하지 말라거나, 몸을 챙기라는 잔소리는 주제넘은 짓 같아 꾹 참고 있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단순히 피곤한 것을 넘은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형은 눈을 감고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 눈빛은 아주 낮게 가라앉아 있어서 무언가를 결심하는 것처럼 단호하기도 했고, 또 망설이는 것처럼 불안하기도 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글쎄.”
얼버무리는 것이 아니었다. 형은 자기도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턱을 매만지다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살짝 미간을 좁히고서 눈가를 문지르던 형은 작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좀 아프네.”
“괜찮아? 쉴래요? 나 그만 갈까?”
형을 따라 일어나 뒤를 쪼르르 따라가는데 돌아보지도 않고 형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별아. 뭐 하나만 물어보자.”
“응. 물어봐요.”
형은 얼굴을 보여 주지 않고 내 손을 단단히 잡은 채로 말을 이었다.
“네가 보기엔 내가 어때 보여.”
“어떤 점이?”
“그냥. 그냥 날 봤을 때.”
그냥…… 좋은데. 형 보면 그냥 좋은데. 그걸 묻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하다못해 형의 얼굴이라도 보면 뭘 묻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뒤통수만 보였다. 내 손목을 쥔 손가락이 가늘게 떠는 것 같았다.
“아니다, 아니야. 대답하지 않아도 돼.”
손가락 하나하나가 천천히 벌어지더니 아주 느리게 형이 내 손목을 놓았다. 그러곤 그대로 침실로 걸어가 쓰러지듯 털썩 누웠다.
“형, 잘 거예요?”
“응. 피곤해.”
말을 끝마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금세 고른 숨소리가 났다. 나는 살금살금 걸어가 형의 양말을 벗기고 바지 버클을 풀어 놓고 침대 바깥으로 튀어나온 다리를 이불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다시 살금살금 걸어 나오는데 닫혀 있는 작업실 문이 유난히도 눈에 들어왔다.
보지 말라는 말은 없었으니까 봐도 괜찮지 않을까. 괜히 입이 마르고 침이 꼴깍 넘어갔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 머리에 열이 올랐다. 귀까지 심장박동이 터질 듯이 울릴 때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었다.
불을 켤 필요도 없었다. 커다란 창으로는 하얗게 빛나는 달빛이 넘실거리며 흘러 들어왔고 그 빛이 닿는 자리에 이젤이 놓여 있었다. 그림이 보였다. 아직 채색을 끝내지 못해 군데군데 빈 곳이 보이고 뭉툭하게 가려져 있었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그걸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분홍의 밤, 다홍빛 별, 파란 눈동자, 은하수처럼 부드럽게 구부러진 손가락. 그건 나였다. 그냥 알 수 있었다. 가늘게 그려진 눈썹과 옴폭 패인 자리 위쪽의 작은 점은 구름 뒤로 숨어들고, 뭉툭하게 잘려 나간 손가락 자리에 놓인 별자리가 약지에 매달린 점과 이어 붙어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막무가내로 가슴이 벅찼다.
아, 형이 보는 나는 이렇구나. 이런 색이구나. 이렇게나 빛날 수가 있구나.
그림보다 아름다운 건 형의 눈이었다. 그저 물감을 섞어 바른 것뿐인데도 그림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밤보다 깊고 달빛보다 눈부셨다. 발밑에서 몸 안쪽으로 가지가 자라 머리까지 가득 차올랐다. 몸은 뻣뻣해지고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이 그림 앞에 묶여 있는데도 머릿속 환상이 밤하늘 너머까지 날았다.
아주 작은 희망이 가슴을 두드렸다. 나 사랑받고 있는지도 몰라. 가슴이 너무 벅차서 눈물이 나는 것을 유화 물감 냄새가 배어 버린 벙어리장갑으로 닦아 내었다. 그 모두가 향기로워서 웃음이 났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