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잔인한 시간
***
달콤한 희망에 젖어드는 건 일주일로 충분했다. 유난히도 멍하고 어딘가에 홀려 있던 형의 모습은 일시적인 착각이 아니었다. 이상한 걸 눈치챈 건 집 안의 공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냄새 때문에. 숨을 들이키면 텁텁한 느낌이 목구멍을 간질였다. 인위적인 달큼한 향과 그것으로도 숨길 수 없는 눅진한 냄새가 났다. 나는 이 향을 알고 있었다.
작업실에 틀어박힌 형을 보지도 않고 곧장 침실로 들어갔다. 까맣게 타 버린 향초 심지가 오목하게 파인 초의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쯤 고개를 세우고 있었다. 불면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하늬에게 선물 받았다는데, 형이 그 향을 꽤 좋아해서 바닥을 드러내기 전에 새것으로 바꾸어 놓곤 했다.
향초는 본래의 목적으로 쓰이지 않고 지금에 와서는 섹스를 한 뒤 땀 냄새를 지우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침대에서 빠져나가자마자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초의 심지를 알맞은 길이로 잘라 놓는 것이었다. 손가락 반 마디 정도. 향초로도 미처 지우지 못한 냄새를 맡으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언제 왔어. 왔으면 날 부르지.”
등 뒤에서 손이 뻗어 나와 허리를 끌어안았다. 형은 내 목덜미에 코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보풀이 부석거리는 니트에 코를 문지르며 목을 낮게 울려 그르렁 소리를 내었다. 혀로 입술을 축이면서 잠시 고민했다.
형, 혹시 다른 사람이랑 잤어요?
“형.”
“응. 얘기해.”
“……배고파요.”
“뭐 먹을래. 다 해 줄게.”
얘기를 꺼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대체 내가 무슨 자격으로 형에게 그걸 따져 물을 수 있을까.
형이 다른 사람이랑 자는 게 싫어요.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좋으니……. 아니,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형이 내게 친절한 게 사실은 좋아해서라고 얘기해 주면 좋겠어요. 나는 그냥 조금 바보 같고 불쌍할 뿐인데, 형이 작업실에 모아 두는 어딘가 깨지거나 부러진 장식품처럼 다만 신기하고 재밌어서 곁에 두는 건 아니라고 해 줬으면 좋겠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입을 열면 쓸데없는 말이 흘러넘칠 것 같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어쩌면 형이 나를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미비한 망상을 품었던 것만으로도 나는 배신당한 것처럼 속이 쓰리고 가슴이 아렸다.
“형, 잠시만요.”
허리를 감싼 손을 밀어 두고 몸을 돌렸다. 어쩌면 벌써 붉어졌을 눈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면서 곧장 입을 맞췄다. 형은 조금 당황한 듯 허공에 손을 띄우고 있다가 자연스럽게 내 허리와 등을 감싸 안고 마주 입을 맞추었다.
“왜 그래, 별아.”
“그냥. 보고 싶어서.”
이상했다. 형의 체온이 나를 감싸고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이 옷자락 너머로 느껴지는데도 형이 보고 싶었다. 온몸을 모두 맨살로 겹쳐 빈틈없이 형을 휘감기 전에는 계속 보고 싶을 것 같았다. 춥고, 슬펐다.
“힘든 일 있었어?”
“응. 위로해 줘요.”
형에게 실연당했으니까, 위로 좀 해 줘요. 침대 아래에 떨어져 있는 낯선 속옷을 발끝으로 밀어 버리며 형의 목에 팔을 감았다. 잠시 그대로 아무런 움직임이 없던 형이 뿌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깨물더니 내 뒷목을 손바닥으로 세게 쥐었다.
“내가 너를 어쩌면 좋을까.”
고민하지 말아요. 형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만인걸. 내치기가 어려워 망설이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돼요. 나는 언제든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형이 못 본 사람처럼 내버려도 그대로 조용히 그림자 속으로 사라질 준비를.
처음부터 어떠한 밝은 엔딩도 꿈꾸지 않았기 때문에 불행을 상상하는 편이 훨씬 손쉬웠다. 나처럼 부족한 사람이 형처럼 반짝이는 사람을 만났을 때 가장 하기 쉬운 착각은 ‘나도 드라마 주인공처럼 그 사람의 특별한 사람일지도 몰라.’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어느 드라마 속 주인공이라도 가난과 촌스러움과 그가 지닌 특수한 불행을 모두 뒤엎을 정도의 특별한 매력이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이를 테면 백마 탄 왕자님의 유일한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놀라운 포용력이나 흔들리는 그를 붙잡을 굳은 심지, 위기에 처한 그를 옆에서 도울 수 있는 뛰어난 재치와 지식, 가난을 스스로 이겨 낼 수 있는 잠재적인 능력. 엄마와 같이 솜이불을 덮고서 지켜보았던 수많은 드라마에서 확인했던 것들이었다.
‘엄마. 저건 신데렐라가 아니지. 저 여잔 저 남자 아니었어도 잘 살았을 거 같은데.’
툴툴거리며 꺼낸 말에 엄마는 무릎을 성의 없이 긁으며 하품을 했다.
‘끼리끼리 만나게 되어 있는 거 아니겠냐. 저 여자는 점집에서 사주팔자를 보면 떡 하고 사모님 팔자요, 써 있을 거다. 팔자란 게 그런 거거든.’
엄마의 시선이 드라마 속의 서로 부둥켜 않은 연인을 향했다. 그들은 원래부터 한 쌍으로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아주 잘 어울렸다. 그토록 그들을 고단하게 했던 신분의 차이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제 몸에 맞지 않는 옷은 튿어지기 마련이야. 큰 걸 줄이는 것도 어려운데 작은 걸 늘리는 게 어디 쉽겠니.’
우스운 얘기지만 내 눈엔 형이 백마 탄 왕자님처럼 보이고 형의 눈엔 내가 재투성이 아가씨처럼 보이겠지. 그러나 나는 아쉽게도 왕자님 눈에 들어 빗자루 대신 결혼반지를 움켜쥐는 쪽이 아니라 ‘옆집 신데렐라가 왕자님한테 시집갔더라.’ 하는 소식에 부러움의 한숨을 내쉬는 쪽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허리를 놀리던 형이 내 이마에 키스를 놓으며 속삭였다. 나는 의식적으로 다리를 벌리며 입을 벌려 아아, 소리를 냈다. 형의 성기가 내가 느끼는 곳을 누를 때마다 쾌감보다도 눈물이 먼저 났다.
살갗에 닿는 이불이 너무 차가워 오한이 들었다. 대신 형의 몸을 움켜쥐어 보아도 추위가 가시질 않는다. 이곳에서 다른 누군가가 형과 섹스를 했을 거라 생각하면 몸을 감싸는 보드라운 이불이 벌레의 더듬이처럼 느껴졌다. 형이 나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제대로 가슴까지 전해지질 않았다.
“정말 안 좋은 일 있는가 보네. 몸이 안 좋아?”
“진짜 겨울은 겨울인가 봐. 춥다.”
“아직도 추워?”
일정한 속도로, 몸이 달아 간지러움과도 같은 쾌감으로 팔다리가 바르작댈 만큼만 내 안을 문지르던 형이 허리를 멈추었다. 그러곤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쏟아질듯 다정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숨이 막혔다.
“형, 실은 나 다 알아요.”
말을 뱉어 낸 후에야 생각이 뒤따랐다. 막연한 불안함. 멍한 형의 얼굴을 볼 때마다 느끼던 울음이 터져 나올 듯한 가슴의 조임. 붙잡아 놓듯 나를 뒤따르던 형의 시선.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게 감추는 다른 사람과의 섹스.
“뭘?”
형은 나랑 헤어지고 싶은 거잖아요. 나 다 알아요.
하늬가 옳았다. 형은 조금씩 나를 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헤어짐에 준비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에 기뻐해야 할지 버림받는다는 것에 슬퍼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어쩐지 알 수 있었다. 형의 눈길에 담긴 영롱할 정도의 따스함은 영원을 기약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 남지 않은 자에게 베푸는 선의 같은 거였다.
“아마 형은 모를수도 있는데.”
형의 눈꺼풀이 가볍게 깜빡였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움직여 그림자의 꼬리를 뺨으로 드리우는 모양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휘어 미소를 지었다.
“형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제일 근사한 사람이야.”
“무슨 소리야 갑자기.”
스스로 몸을 움직여 형의 것을 깊숙이 품으면서 목을 끌어안았다. 형의 뺨에 얼굴을 부비면서 아아, 아, 신음을 흘렸다. 온몸이 차게 식어 들어갔다. 분명 평소처럼 쾌감도 느끼고 형의 애무 또한 다정한데도 이상할 정도로 침착했다. 억지로 입을 벌려 소리를 내지 않으면 눈시울이 금방 흐려졌다.
의심스런 눈으로 나를 훑던 형이 오래 지나지 않아 내 귓가에 거친 숨을 쏟으며 허리를 치대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가볍게 내 뒷목을 당겨 안으며 ‘별아.’ 속삭였을 때 그만 눈물이 나서 발가락을 세게 움켰다.
목덜미를 깨물고 귓바퀴를 입술로 빨면서 형은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불렀다. 흐트러진 숨결 사이사이로 내 이름이 스미는 것을 들으며 나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왜 울어. 눈물이 흐른 자국을 따라 온통 키스를 퍼부으며 아름다운 얼굴을 흐리는 형을 보며 그저 웃었다. 흐흐, 실없이 웃음이 났다.
“몰라. 다 형 때문이에요.”
손등으로 눈을 세게 부비며 눈물을 훔치는데 형이 양 손목을 붙잡아 얼굴에서 치워 냈다. 콧등끼리 맞닿도록 느리게 부비던 형이 입술에 닿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반쯤은 한탄하듯 뱉어 낸 농담 같은 말에 형은 자기도 울어 버릴 것처럼 서글픈 얼굴을 했다. 가볍게 입술을 물었다 놓더니 눈꺼풀을 떨며 신음처럼 나약한 소릴 뱉어 냈다.
“미안해.”
다 나 때문이야. 내가 진짜가 아니라서. 그래서 그래.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형은 반쯤 물렁해진 성기를 내 안에서 꺼내 그대로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아니에요, 형 때문이 아니야. 헛꿈을 꾸었던 나 때문이지. 그렇게 곧바로 대꾸를 해야 했을까. 미안하다 속삭이던 형의 구슬픈 눈빛이 잊히질 않는다.
하루에 한 번쯤은 내가 무얼 하는지를 묻던 형의 연락이 사라졌다. 못해도 3일에 한 번은 만날 약속을 잡던 것도, 내 쉬는 날을 기다려 낮부터 나를 기다리는 것도 없어졌다. 2주일이나 형을 보지 못한 채로 해가 바뀌었다. 겨울이 깊어졌고 눈이 쌓였다.
보고 싶어요. 수십 번이나 썼던 문자를 다시 지웠다. 모든 다짐은 두려움 앞에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했다. 이제 그만 사라져야 할 차례인데 그만두자는 말이 무서워 나는 형을 만나러 갈 수가 없다. 차마 내 손으로 헤어질 약속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귀를 막아도 12시 종은 울리고 꿈같았던 하루가 저물고 말텐데 나는 고집을 부렸다.
형을 만날 생각을 한 건 하늬 때문이었다. 낮부터 전화기가 울려 대는가 싶더니 일을 끝마치자마자 부재중 전화를 되돌려 걸었을 때 하늬는 불쑥 형의 이름을 꺼냈다.
“장석, 걔 왜 그래.”
“뭐?”
“왜 그러냐고, 대체. 너희 벌써 끝났어?”
“무슨 소리야 그게.”
대꾸를 하면서도 씁쓸함에 입꼬리 한쪽이 비틀렸다. 이미 하늬는 우리가 끝난 걸로 알고 있나 봐. 그 생각을 하니 배 속이 뭉근하게 아픈 기분이 들었다.
“아, 미치고 팔짝 뛰겠네. 너도 몰라? 진짜로?”
“그러니까 대체 무슨 일이냐고. 일단 범위를 좀 좁혀 봐. 다짜고짜 아냐고 물으면 어떻게 알아?”
“그림 말야, 그림.”
하늬가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 전화 너머로도 들렸다. 탁탁탁, 신발로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좁은 공간에 울려 빈 소리가 났다.
“나 아는 사람 중에 장석 그림 맡아 주는 화랑 관계자가 있거든. 내가 진짜 존나 싫어하는 꼰대긴 한데, 아무튼 그 양반이 아주 노발대발해서 장석, 그놈의 새끼, 시팔 놈, 개놈 하는 걸 들었단 말이야.”
“대체 왜?”
“내가 묻고 싶다 진짜. 그 새끼 미친 거 아냐? 장석 그놈은 까고 보면 예술가 타입이 아니라 그냥 전문직 타입이란 말이지. 사무실에서 전시회 잡으면 날짜 맞춰서 그림 그리고 또 그리고. 아무튼 기간을 길게 잡아서 그렇지 절대 배 불뚝 내밀면서 ‘영감이 모자라 안 되겠소.’ 내빼면서 도망가는 새끼는 아니란 말이야. 너 전시회 잡힌 건 알아?”
“응.”
알다마다. 형이 요즘 그리는 모든 그림은 그 전시회를 위한 거였다.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뚝딱 나오는 것이 아니어서 내가 알고 있는 미술이란 게 붓질하는 시간이 전부인 것과 달리 형이 ‘작품’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썩 넉넉하지는 않은 걸로 알고 있었다.
“그걸 뒤집어엎었어. 안 하겠다고 했대. 나 그놈이 그러는 거 처음 봐. 매번 수능 보는 것처럼 기간 맞춰서 벌벌 떨던 새끼가 못 하겠으니 엎으라고 했다고.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장석한테 전화도 해 봤는데, 이게 더 골 때려. 샛별아. 너…….”
하늬는 말을 꺼내다가 말고 숨을 골랐다. 나는 이미 손톱으로 옷자락을 뜯고 있었다. 다급한 하늬의 목소리를 따라 심장이 다급하게 뛰었다.
“석이 형, 우는 거 본 적 있어?”
“울……었어?”
미치겠네, 정말. 하늬는 거의 우는 목소리를 냈다. 코를 삼키는지 막힌 숨소리를 내다가 끝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울었어. 거의 알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하긴 했는데, 울고 있었어. 어딜 가도 모양 빠지는 소리 같은 건 하나도 하지 않는 사람이 꼭 시한부 선고라도 받은 것처럼 결연한 목소리를 하고서는, ‘나는 이제 안 돼.’ 하면서 숨을 참는데……. 샛별아. 나 어떡해. 그 사람 그런 거 처음 봐. 왜 그러는 건지 정말 몰라? 응?”
“내가 그걸…….”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 말을 잇기도 전에 숨이 가빠 왔다. 형이 어둠 속에 숨어 숨죽여 울고 있을 모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려도 소용이 없고 목구멍까지 딱딱한 숨이 차올랐다.
하늬는 한참을 숨만 몰아쉬다가 미안하다는 말로 허겁지겁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뒤에서 누군가 하늬를 부르는 목소리가 난 것으로 보아 일하던 도중이었던 것 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내가 알지 못하는 형과 하늬 사이의 그 끈끈한 우애를 질투하거나 부러워하며 가슴을 두드렸을지 모르겠지만, 하늬가 전한 형의 외침이 잊히질 않았다. 그 말이 이전의 ‘다 나 때문이야.’ 하던 그 말과 겹쳐져 머릿속에 왕왕 울렸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불길한 감각이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멍청아, 언제까지 무서워서 바닥을 설설 기기만 할래. 그러다 형이 정말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때는 어쩔래.
자꾸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형은 감정 기복이 심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만은 예외인 사람이었다. 안 돼, 나는 안 돼, 그 말이 멋대로 이런저런 문장을 만들며 부풀더니 ‘이제 나는 안 되니까 죽어야 해.’로 바뀌었다. 형에게 연락이 없는 것도 모두 그 탓인 것만 같았다.
내가 내 감정에 취해 쓸데없이 낭만적인 감상에 매달리는 사이, 형의 괴로움을 외면한 것은 아닐까. 내가 알아주지 못한 외로움에 다른 누군가를 찾아 헤맸던 것은 아닌지, 형의 집에서 발견했던 다른 이들의 흔적 모두가 형이 괴로워 했던 지표처럼 여겨져 두려워졌다.
집으로 가던 길을 되돌려 형에게로 향했다. 언제 올 거니. 더디게 썼을 엄마의 문자에 ‘엄마, 나 늦어요.’ 답장 하나를 남겨 놓고 형에게로 달려갔다. 억눌러 놓았던 형에 대한 그리움이 걱정과 미안함으로 얼룩져 시야를 흐렸다.
비가 올 모양인지 하늘이 흐렸다. 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하늘을 흘끔 보다가 달리고, 빨간 신호등에 걸려 발을 동동 구르는 동안 부옇게 빛나는 달을 보면서 눈물을 훔쳤다. 매연이 끼어 있는 것처럼 답답하게 가려진 밤하늘을 응시하는 동안에도 그 모든 것이 내가 놓치고 있던 형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어떡해, 어쩌면 좋아. 잇새로 흘러나오는 중얼거림을 손등으로 막아 억누르면서 발길을 재촉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번호키를 누르고 열쇠로 현관문을 열면서도 나의 불안은 멈출 줄을 몰랐다.
“형, 형. 괜찮아요? 괜찮은 거죠.”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어 삼키던 흐느낌은 울음과 함께 들이마신 공기 중의 탁한 냄새로 멈추어 버렸다. 익숙한 냄새였다. 희미했지만 분명했다. 나는 불안을 얼싸안고 달려왔던 그 모든 목적을 잊어버린 채 숨을 죽이고 발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침실 문은 열려 있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방 안 풍경을 뚜렷하게 받아들일 수 있음에도 나는 부러 눈을 감고 뜨지 않았다. 호흡을 다섯 번이나 고른 후에야 감았던 눈을 떠 고개를 들었다.
이불이 흐트러진 채로 부둥켜안은 두 인영. 형은 아주 소중한 것을 품듯이 내가 모르는 누군가를 끌어안고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목에 걸린 숨소리를 들킬까 손에 쥔 것으로 입을 막으면서도 나는 그 광경에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니야.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이건 그냥, 그러니까……. 형이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내가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으니까. 형은 그저 누군가가 필요해서, 그동안 그랬듯이 특별할 것도 놀라울 것도 없는 일일 뿐인데.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목에 걸린 숨을 작게 뱉어 내며 침실을 빠져나와 작업실로 걸음을 옮겼다. 형이 괴로워했던 조각을 찾으면 훌륭하게 위로할 수 있을 거라 믿으려 했다. 내가 모르고 있는 그 조각을 찾게 되면 침대에 누워 형의 체온을 보태는 이가 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무릎이 휘청이는 것을 손바닥으로 눌러 버티면서 비틀비틀 걸었다.
작업실 문은 평소보다 더욱 활짝 열려 있어 공들여 그 안을 살펴볼 필요조차 없었다. 밝은 불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색을 보지 않아도, 숨은그림찾기 하듯 어딘가에 놓인 형의 마음을 찾아볼 것도 없이 모든 것은 명확했다.
“아……. 그랬, 구나. 그랬던 거면 말을 하지.”
나를 향한 형의 마음이라 믿었던 것은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나 때문이었구나. 내가 형을 망쳤어.”
나의 눈과, 나의 부끄러운 손과, 어쩌면 형이 사용할 작은 재료라도 될지 모른다 여겼던 내 모습이 담긴 그림은 이젤에 비스듬하게 누워 구름 새로 흘러나온 달빛을 받고 있었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눈치챘으면 되는 걸, 너무 욕심을 부려서……. 난 그냥 형이 너무 좋아서.”
그림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잘게 찢겨 있었다. 뻥 뚫린 구멍으로 달빛이 흘러 들어가 바닥을 비추고 그 사이로 이젤의 뼈대가 보였다. 몇 번이나 나이프를 들어 찢어발겼는지 내 손가락 하나 남아 있지 않고 모두 마디마디로 토막 나 너덜너덜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알았으니까……. 잘 알았으니까.”
손이 덜덜 떨리며 힘이 풀렸다.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쥐고 있던 푹신한 덩어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내 마음을 들킨 듯 빨갛게 익어 있던 벙어리장갑이 바닥에 검붉게 나뒹굴었다.
형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서 휘청이는 다리를 추슬러 삐걱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씩 발을 내딛을 때마다 등 뒤에 걸려 있는 그림이 내 등을 칼로 찢어 내는 것 같았다. 아프고 아팠다. 꼭 그림 속의 내가 찢어발겨진 만큼 나는 아픔으로 어깨를 떨며 발을 내딛었다.
겨울은 길고 밤도 길어서, 나는 오래오래 밤길을 걸어 형에게서 멀어졌다. 나만 아는 실연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