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시린 겨울 (5/10)

4. 시린 겨울

(J)

“표정이 왜 그래. 꼭 도깨비라도 본 것처럼.”

나긋한 몸이 등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방바닥에 떨어진 빨간 장갑을 내려다보던 내 표정이 그렇게나 이상했던 걸까. 나는 허리를 구부려 장갑을 주워 드는 대신 늘어뜨린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길어 손바닥의 살갗을 뚫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막연한 감정이었으나 아주 생생한 욕망이었다. 이건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감정이다.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어질 때, 생각을 이어 가기가 괴로울 때 연약한 육체의 고통을 이용해 현실도피를 하는 방법이었다.

“저건 새로운 행위 예술이야? 어후, 예술 하는 사람들은 정말 모르겠어. 어렵다, 어려워.”

이름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남자가 이젤에 걸린 그림을 가리키며 코웃음을 쳤다. 정확히는 그림이 아니었고 그림일 뻔했던 어떤 것이었다. 그림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전혀 풀어지지 않은 채 덩어리진 물컹하고 축축한 마음이었다. 그런 것은 그림이 아니다.

“근데, 이런 건 얼마나 하나?”

어제부터 유난히도 내 손을 빤히 본다 싶었더니 시계가 탐이 났던 모양이었다. 속옷을 입는 것과 마찬가지로 습관처럼 두르고 있는 시계에 특별한 의미랄 것도 없었다.

“모르지. 기억 안 나.”

“이런 거 많아?”

“그렇게 많지는 않아.”

습관적으로 손목 시곗줄을 만지작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말간 눈을 하고 ‘형, 시계 물에 젖어요.’ 파드득 놀라던 샛별과는 천지차이였다.

기분이 나빠 시계를 풀어 바닥에 내던졌다. 푹신한 러그에 절그럭 떨어진 시계를 물끄러미 보던 남자는 ‘너 가져.’ 뱉어 낸 말에 두 번도 사양 않고 곧장 허리를 숙여 시계를 주워 들었다. 훤하게 드러난 손목 따윈 신경도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 네가 특별한 아이라는 건 알고 있단다. 우리가 모르는 마음의 고통이 있을 거야. 너무 힘들거든 얘기해 주렴. 그러나 그 마음이 네 세계를 세우는 근원이 되는 것 아니겠니.

눈썹이 유난히도 굵고 진하던 내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은 조각칼로 손목을 찍어 누른 제자에게 그런 조언을 했다. 너의 아픔은 아름답게 피어날 테니 그 얼마나 아름다운 축복이니.

‘선생님. 그럼 저는 줄곧 아파하면 되는 건가요?’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을 돌려 ‘사람들은 행복해할까요?’ 물었다. 그녀는 금색 펄이 반짝이는 손톱으로 내 뺨과 목선을 가볍게 긁어내렸다.

‘선생님, 저 사실은 남자가 좋아요.’

울먹이는 눈으로 고백했을 때에 그녀의 눈동자를 잊지 못한다. 혐오와 경멸의 시선은 아주 잠깐이었다. 그녀는 금세 ‘그럼 그렇지, 별종이 어디 가겠어.’ 하는 자기합리화를 마치고는 한없이 다정한 눈을 하고 내 손을 꼭 쥐었다.

‘석아, 선생님은 네가 내 제자인 것이 자랑스럽단다.’

나는 조각칼로 손목을 찍어 눌러도, 성인이 되기도 전에 난교를 벌여도, 우울증으로 열흘을 굶고 기절을 해도 그림만 그려 낸다면 언제든 자랑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나는 그들 앞에 솔직해질 수 없었다.

그 모든 기행이 나의 특별함에서 비롯되었음을 그들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었다. 예술가적 기질이라 부르는 천재성은 비행과 일탈을 눈감아 주었다. 오히려 그들은 내가 어떤 비상식적인 행위를 할지 기대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웅크린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조각칼을 들고 내 손목을 직접 겨눌 때에 내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눈앞이 흐려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고, 또 울었다. 손이 덜덜 떨려서 쥐가 날 지경이었고 울음소리를 삼키느라 목 안쪽이 사포로 긁어낸 것처럼 아팠다.

무엇보다 날카로운 조각칼의 끄트머리가 여린 살갗에 닿아 있는 감촉이 두려웠고 나는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가에 대해 백 번을 고민하다가 백한 번 대답했다.

그래야만 해. 설사 죽게 되더라도.

주위 사람들 말이 옳았다. 어릴 때의 천재는 언젠가 수재가 되고, 그러다가 평범한 사람이 되어 갔다. 파격이 언젠가의 평범이 되는 것처럼 나는 점점 더 지루한 인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건 안 될 일이었다.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나를 뺀 모든 것이었다. 주위의 찬사, 기대, 부풀린 능력, 그것으로 세워졌고 그것이 아닐 때에 나는 바닥에 떨어진 실밥보다 못 한 존재였다.

차라리 죽었으면. 지독한 고통으로 몸이 뒤틀리는 중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번, 또 한 번, 피가 콸콸 흘러 넘쳐 바닥에 가득 흘러넘칠 때까지 육지에 떨어진 물고기처럼 몸을 퍼덕이며 머리가 아릿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는 희열이 조금 섞여 있었다.

더 이상 갑옷을 두르지 않아도, 할 말이 궁한 탓에 입을 다물지 않아도 괜찮아. 친구들이 떠드는 얘기에 끼어들고 싶어도 나를 망칠까 주저하지 않아도 되고 나조차도 모르는 그림을 그리며 숨을 틀어막히지 않을 수 있어.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움직여 ‘문득 가슴이 아팠습니다.’ 따위의 인터뷰를 할 때에, 가슴 속에 부푸는 영감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를 찌르고만 가여운 예술가로 스스로를 포장할 때에, 손목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파서 울고만 싶었다. 그 모든 일이 그들이 바라는 천부적인 천재를 만들기 위한 훈장을 새긴 것임을 알게 된다면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는 특별한 사람이어야 했다. 불행하고 싶었고 부족해지고 싶었다. 다리를 자르면 그 핸디캡이 특별해질까. 거식증에 걸린다면, 암에 걸린다면, 가난하거나 집안의 핍박을 받았다면…….

나는 자주 불행을 꿈꿨다. 짜 맞춘 듯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 줄 이야기가 필요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감추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 무슨 짓을 해도 용납이 될 만큼 강한 보호막이 필요했다. 숨을 쉬고 싶었다.

아아, 너는 얼마나 특별했는지.

별아, 너는 모르겠지. 눈꺼풀 위 작은 점과 내려앉은 눈매, 동그란 코와 작은 입술, 때때로 깊은 불행의 꿈으로 빠져드는 눈동자와 꿈같은 이야기를 조잘대는 입이 얼마나 특별한지. 아홉 개뿐인 손가락이 움직이는 모양이 나를 어떻게 고무시키고, 빈자리를 채우고도 남을 귀여운 점들이 이루는 별자리가 내게 어떤 빛을 던져 놓는지. 너는 아마 모를 거야.

그리고 나 또한 알지 못했다. 너를 보내고 싶은지, 붙잡아 놓고 싶은지. 너는 내 벽을 허무는 단 하나의 흠이어서 나는 두려웠다. 내 마음을 가장 특별한 곳에 올려놓아 쏟아지는 은하수를 바라보게 해 놓고 동시에 너를 바라보는 나는 너무도 평범해서 어둡고 구석진 곳으로 달아나고만 싶었다.

샛별을 바라볼 때에 내 마음은 그동안의 어쭙잖은 ‘영감’들과 비교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들끓었다. 그림을 그려야 한다면, 반드시 손을 들어 뭔가를 그려야 한다면 샛별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샛별이 웃을 때 눈꼬리에 빛줄기가 어리는 것이나 손가락이 네 개뿐인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것이 때때로 울고 싶어질 정도로 사랑스러워지는 것은 좀처럼 남들이 알기 어려운 것이었다. 처음으로 확신했다. 이건 나밖에 볼 수 없어. 나밖에 그릴 수 없어.

하루 종일 샛별을 옮기는 데 마음을 쏟았다. 그리고 샛별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 나면 이전의 나로 돌아가 가증스런 예술가를 연기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샛별을 보고 있지 않은 때에도 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한 그때에 눈치를 챘어야 했다.

그를 온전히 옮겨 놓는 일이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수백 장의 스케치와 설사 모든 시간을 담은 동영상이 있더라도 그건 온전한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나의 하잘 것 없는 실력이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리고 싶은 것이 생기자 나는 둘러쓰고 있던 깃털이 후두둑 떨어져 볼품없는 놈이 되고 말았다. 화려하고 격동적인 색감. 보는 이로 하여금 심장을 떨리게 하는 강렬한 터치. 내가 붙인 말은 단 하나도 없었지만 나를 설명하는 가장 보편적인 평가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샛별을 그릴 때의 나는 그렇지가 못했다. 지루하고 뻔한 부드러운 색. 눈에 남지 않는 흐르는 듯 구불거리는 선. 특별함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내 바닥을 드러내는 조악한 터치.

샛별을 그리면 그릴수록 나의 초라함이 드러났다. 석이 씨가 이런 그림도 그리던가? 그림이라고는 귀 잘린 고흐밖에 모르는 무지랭이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인정해야 했다. 이 그림은 실패했어. 이 그림이 밖으로 나가게 되면 나를 들키고 말 거다.

“설마, 이걸 전시에 낼 건 아니지?”

몇 년째 나를 포스터처럼 밖에 걸어 놓는 사내가 그렇게 말하고야 말았을 때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답지 않지. 여흥이었어. 그냥 그려 봤어. 너절한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나는 모두가 돌아간 뒤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놓지 못했다. 그건 필연적인 거였다. 그리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샛별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봤고, 샛별의 손가락이 피아노 치듯 구부러지며 내 뺨을 두드리는 망상을 보았다. 숨조차 아껴 쉬며 붓을 놀렸다. 흥분으로 손이 떨려 입술을 깨물어 호흡을 고른 적도 많았다.

너만은 나를 알아주겠지. 그림을 완성하면 그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고 샛별에게 선물할 생각이었다. 너만을 위한 그림이다. 나를 움직인 건 이것뿐이다. 나의 뮤즈가 되어 다오. 내게 거짓되지 않은 그림을 향한 애정이 남아 있다면 그건 바로 너일 거다. 바라는 건 그뿐이었다. 오래도록 샛별을 그려 그 모습을 온전히 캔버스 위로 옮길 수 있기를.

“형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제일 근사한 사람이야.”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것이 진실이라 믿고 있는 샛별의 앞에선 그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아마 나는 네가 알고 있는 그 모든 사람을 통틀어 가장 초라한 사람일 게 분명했다.

샛별이 나를 추켜세울 때에 그 어떤 얘기보다 뿌듯해져 오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동시에 나는 짙은 그림자로 처박혀 허우적거렸다. 샛별을 앞에 두고 나는 너무 눈이 부신 까닭에 고개를 숙여 그림자만 바라보았다.

미안해. 내가 진짜가 아니라서.

다시 그림을 바라보았을 때 도저히 눈을 바로 뜰 수가 없었다. 나여야 하는 지점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고 멍울진 감정의 덩어리만 툭, 툭, 배설하듯 떨어져 있었다.

“이건 하나도 멋있지 않아.”

아름답지도 못하지. 너에 비하면.

그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아무것도 그릴 수 없었다. 아름다운 너는 언젠가 나를 떠나갈게 분명했고, 그때가 되면 나는 홀로서기를 하지 못하는 멍청한 허풍쟁이가 되어 있을 것이 뻔해서 나는 두려웠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는 그저 겁이 많은 어린애일 뿐인데.

***

생각보다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청소를 했고 점심을 간단히 먹은 뒤 뻐근한 몸을 움직여 운동을 했다. 찢어 버린 캔버스를 옆으로 치워 두고 아직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하얀 캔버스를 새로 이젤에 걸었다.

저녁을 차려 놓고 보니 2인분이었다. 먹고 남은 것은 식탁에 그대로 두었다가 잠들기 전 모조리 버렸다. 제사 음식 같다는 생각이 들어 우스웠다.

평소에 하던 일과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소파에 몸을 깊이 묻고서 스케치북을 팔락팔락 넘겨 보다가 허전함의 정체를 깨달았다. 시야 안쪽에 샛별이 없기 때문이었다.

“저녁이라도 먹을래?”

박하늬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스로에게 칭찬이라도 해 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더 늦기 전에 샛별을 놓치고만 것은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별 준비는 헛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샛별의 흔적은 얼마든지 있었고 어느 그림을 펼쳐도 샛별이 보였다. 아쉬울 필요는 없었다.

-나 바빠. 웬일이야? 요즘 한동안 연락 뜸하더니.

“그냥. 바쁘면 할 수 없고.”

손톱으로 소파 팔걸이를 다닥다닥 두드리며 눈을 끔뻑였다. 시선 끝에 현관문이 보였다.

-뭐 해?

“문 봐.”

-문?

이상한 일이긴 했다. 신기할 것도 없으니 어딜 보든 상관은 없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 보면 틀림없이 시선이 현관문에 박혀 들었다.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어?

박하늬가 물었다. 까딱이던 손가락을 멈췄다.

“아니.”

아니. 오지 않는다. 올 사람은 없다.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는다. 현관 옆 선반에 올려놓은 빨간 벙어리장갑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눈을 깜빡일 여유도 없이 심장이 세게 뛰어서 인상을 찌푸렸다.

-샛별이는.

“……안 올 거야.”

아아, 너는 더 이상 오지 않는구나.

괜찮은 것이 아니었다. 네가 언제고 그 문을 열고 불쑥 들어와 내 시야에 어른거릴 거라 믿고 있었던 거다. 네가 내게 건넨 이별의 증표를 믿지 않고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굴면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아서, 모른 체했다.

느린 걸음으로 현관에 다가가 걸려 있던 장갑을 품에 안았다. 절그럭 소리와 함께 열쇠와 작은 쪽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잘 지내요. 안녕.]

쓰레기통에서 발견한 구겨진 작은 쪽지와 네가 현관에 두고 간 여벌 열쇠를 주먹으로 움켜쥐고 장갑 속에 숨겨 놓았다. 나는 아무 말도 못 들은 체했다. 안녕은 작별의 안녕이 아니라 멋대로 정해 놓고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그저 네가 돌아오는 날이 조금 늦어졌을 뿐이라고.

아니었다. 너는 정말로 가 버렸다. 사실 어제 새벽에 전화를 걸었다가 없는 번호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한 번도 전화를 걸어 보지 않은 것처럼 새벽마다 네게 전화를 걸겠지만 그건 내가 기억력이 나쁘기 때문은 아닐 거다.

나는 아직 너와 이별하지 않았다.

***

일상에 습관을 들이는 건 몹시 편리했다. 눈을 떠 잠이 들 때까지 움직이는 동선에 습관을 들여 놓으면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하루가 흘러갔다. 바깥에 침범되지 않는 생활을 할 수 있는 덕분에 나는 내 일상을 온전히 관리할 수 있었다. 세면, 식사, 운동, 스케치, 다시 식사.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생활에 제법 건강해진 기분마저 들었다.

가급적 비는 시간을 만들지 않기 위해 나는 무엇이든 했다. 매일 세탁기를 돌려 빨래를 널었고, 작은 그릇이라도 사용하면 곧장 설거지를 했다. 요리 재료를 고를 때도 씻어 나오거나 포장된 것을 사용하지 않고 일일이 손질해야만 하는 것으로 골랐다.

무얼 먹을지 고민하노라면 샛별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고 마는 까닭에 인터넷으로 한 달치 식단표를 뽑아 냉장고에 붙여 두었다. 보름쯤 먹었을 때 그 식단이 다이어트 식단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바꾸지는 않았다. 어차피 무얼 먹든 입에 넣으면 버석버석 모래를 씹는 기분이 들었다.

“석이 씨, 살 빠졌어. 얼굴이 쏙 빠졌네.”

보는 이들마다 안쓰러운 얼굴을 했다. 그러나 그 눈동자 속에 어린 것은 걱정이 아닌 호기심이었다.

“뭐 작업 들어간 거 있어?”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입맛을 다시거나,

“안 그래 보이는데 우울증 있는 거 아니지?”

어딘가에 흘릴 가십거리를 찾아 나를 관찰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또는 그 틈새를 노려 자리 하나를 꿰어 찰 궁리를 하거나.

“요즘 자주 온다. 나 보러 오는 거야?”

바에 앉아 잔을 기울이는데 모르는 남자가 팔짱을 끼며 사르르 웃었다. 잔을 감아쥐는 투박한 손가락을 본 뒤에야 몇 번인가 같이 섹스를 했던 남자라는 걸 떠올릴 수 있었다.

“오늘도 갈 거지?”

입을 열어 대답하는 것도 귀찮았다. 가급적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다. 얼굴을 가리면 더더욱 좋고, 수줍음으로 붉어진 몸을 경련할 때까지 참다가 가쁜 숨소리로 애를 태웠으면 좋겠다. 서툰 몸짓으로 몸을 움직이다 저 스스로 부끄러워져 입술을 깨물었으면, 아홉 개의 손가락이 내 뺨을 맴돌다 등을 안아 주었으면.

밤의 스케줄은 단순했다. 피곤하면 일찍 잠에 들고 잠이 오지 않으면 샛별이 사는 동네 근처를 차로 뱅뱅 돌며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전화는 닿지 않고 샛별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밤거리를 헤맸다는 듯이 태연한 얼굴을 하고 아무 바에나 들어가 상대를 구했다.

샛별이 사용하던 모든 물건들은 옷 방 상자에 넣어 두고 그와 똑같은 옷과 물건을 구해 그들에게 입혔다. 나를 만지지 못하도록 손에는 벙어리장갑을 씌우고 섹스하는 내내 절대로 마주보지 않았다.

쾌감이 들거나 흥분으로 몸이 달아오르는 일은 없었다. 기계적인 움직임이었다. 지칠 때까지 움직인 뒤에 그들의 등을 끌어안고서 눈을 감았다. 반쪽짜리 향기를 맡고 어설픈 꿈을 꾸었다.

형, 연락 못 해서 미안해요. 너무 바빴어요. 내일은 꼭 갈게요. 샛별이 눈을 끔뻑이며 하나 부족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럼 그렇지. 내일은 연락이 올 거야. 눈을 감은 채 느린 한숨을 내쉬었다. 늦게 오더라도 태연한 얼굴을 하고 샛별을 맞아 주자. 샛별이 좋아하는 그럴싸한 모습을 하고, 어제 보고 오늘 봤듯 여유로운 인사를 건네자. 배가 고프다고 보채면 머리를 맞대고 메뉴를 정해야지. 네가 맛있다고 하는 것들은 틀림없이 맛이 있으니까 네 젓가락을 쫓아야지.

부푼 가슴으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머릿속을 깨우는 것이 포근한 너의 살 냄새가 아니라 불쾌할 정도로 단 향수 냄새여서 단숨에 꿈에서 깨었다. 샛별의 흔적이 완전히 끝자락까지 달아나 버리지 않도록 나는 침대 맡의 서랍을 열어 수면제를 세 알 입에 털어 넣고 컵에 담아 놓은 위스키를 삼켰다.

다시 반나절은 족히 너의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엔…… 네가 찾아와 나를 깨우는 상상을 한다.

***

“석이 씨. 거기 앉아도 돼?”

일상의 흐름을 깨는 목소리에 눈을 들었다. 헐렁한 회색 추리닝을 주워 입은 남자가 소파 옆자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몸이 가녀린 탓에 추리닝의 실루엣이 어그러졌다. 샛별이 입었을 땐 보기 좋게 하늘거리던 것이 촌스럽고 멍청해 보였다.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안 갔나.”

아침에 일어나 부엌과 욕실, 옷 방을 오갔으니 그는 작업실 또는 베란다에 있었던 셈이다. 작업실을 열어 두고 나온 기억은 없다. 그가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갔다고 생각하니 몹시 불쾌했고 베란다에 서 있을 풍경을 떠올리자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샛별은 환기시키는 걸 좋아했다. 두꺼운 후드를 겹겹이 겹쳐 입고서 창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로 베란다에서 햇볕을 쬐곤 했다. 짧은 머리칼의 끝이 옅은 색으로 반짝이는 것이나 바지 아래로 드러난 하얀 발목이 애틋해서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밀어 넣으며 끌어안곤 했다. 샛별은 고개만 살짝 뒤로 젖혀 내 뺨에 귀를 부볐다.

형, 오늘 구름이 너무 예쁘죠. 어라? 나 이 얘기 어제도 하지 않았어요? 하하, 내 정신 좀 봐. 형이랑 있음 세상만사가 다 너무 예뻐 보여서 그런가 봐. 형이 보는 하늘은 얼마나 더 예쁠까.

그 순간 나는 샛별의 목덜미에 코를 묻으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눈을 감는 것이 나았다. 샛별이 없인 하늘을 볼 생각도 못하는 무미건조한 사람이 나였다.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 새벽에 파랗게 뜬 별을 보며 그제야 네 이름을 떠올리며 걸음을 멈추는 게 고작이다.

아름다운 것을 떠나 그 위로 덧바를 물감 색을 어림해 보거나 붓을 찍어 누를 방법을 고심하는 게 고작인 나를 두고 너는 늘 아주 놀라운 사람이라도 보는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아, 참. 꺼져 줬어야 하는데 내가 깜빡했네.”

남자의 얼굴이 못난 건 아니었다. 눈이 서글서글하니 크고 날렵한 콧날이 얼굴을 단단히 받쳐 제법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썹 아래엔 보일 듯 말 듯 한 작은 점이 없고, 아침이면 퉁퉁 부어 버리는 둥그스름한 눈꺼풀도 없다. 아랫입술이 조금 더 두꺼워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감추는 수줍은 얼굴도 없다.

“그만 가.”

남자의 애교 있게 웃던 얼굴이 굳었다. 시선을 두지 않고 느긋하게 선을 긋던 스케치로 눈을 내리깔았다. 더 이상의 배려는 필요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벌써 돌아갔어야 했다. 밝은 낮에 그들을 마주치는 건 곤욕스럽다. 밤에 저지른 토사물을 코밑에 대고 확인하는 기분이다.

일어나면 바로 집에서 나갈 것. 그것이 하룻밤 상대로는 과한 돈뭉치의 대가였다. 나는 그들이 창부처럼 능숙하기를 바라지도 않고 내가 낸 돈만큼의 정성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저 얌전히 잠만 자고 떠나도 상관없었다. 다만 눈을 떴을 때 마주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자리도 넓은데 좀 나눠 쓰지?”

그대로 돌아가는가 싶던 남자는 다시 붙임성 있는 말투로 말을 걸어 왔다. 그러곤 맨발로 차박차박 걸어와 소파에 엉덩이를 걸치려 했다. 나는 대꾸를 하기에 앞서 다리를 들어 소파에 길게 걸쳐 놓았다.

“앉지 마. 네 자리 아니야.”

“쩨쩨하게.”

“가. 귀찮아.”

두 명이 넉넉히 앉을 수 있는 소파 한쪽 자리는 네가 떠난 날부터 비어 있다. 아침에 보니 내가 항상 앉는 쪽이 특히 더 푹 꺼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늘 발끝을 세우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해서 불편하게 앉아 있던 너의 자세가 소파에 온전히 체중을 실지 않아서였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샛별은 매사에 조심스러웠다. 아무렇게 엉덩이를 들이미는 저런 남자와는 전혀 다르다.

남자는 드디어 짜증을 얼굴에 드러냈다. 노골적으로 불쾌한 얼굴을 하고는 입고 있던 옷을 그 자리에서 벗어 소파에 집어 던지고 지난 밤 아무렇게나 벗어 처박아 놓았던 옷을 침대 아래에서 겨우 찾아내어 주워 입었다.

“솔직히 당신 진짜 별로야. 왜 그렇게 다들 떠받드는지 모르겠어. 심지어 섹스도 별로였어. 할 생각은 있어? 그렇게 하기 싫다는 얼굴을 하고 박을 바엔 내가 당신한테 박는 편이 낫겠어.”

눈썹을 치켜 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남자는 분한 듯이 발을 쾅쾅 구르면서 집에서 떠났다. 그가 남긴 불쾌할 정도의 단 향이 찝찝해서 침실 향초를 거실에 가져와 태웠다. 초 심지는 길게 늘어져 목을 구부리다 녹은 초에 머리를 처박았다.

샛별은 심지를 잘라 작아지는 촛불을 볼 때마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콧소리를 흥얼거렸다. 형, 너무 귀엽지 않아요? 요만한 애가 이 넓은 집을 꽉 채우는 거잖아요. 요렇게 손안에 가둬 놓고 들고 다니고 싶어.

샛별은 두 손을 동그랗게 모으며 나를 향해 웃었다. 네가 더 귀여워. 하고 싶던 말은 고요히 불꽃을 바라보는 너의 얼굴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그때 그 말을 했다면 네가 이 초의 심지를 잘라 주고 있었을까.

***

“진짜 뭐야. 너무 형편없잖아. 내가 어지간하면 이렇게 안 부르는 거 알지? 형, 요즘 고자라는 소문까지 났다니까?”

시끄럽게 울려 대는 벨소리에 문을 여니 박하늬가 서 있었다. 쯧쯧 혀를 차면서 들어오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온 그는 깨끗한 식탁 위에 이질적으로 놓인 빈 술병들을 삿대질했다.

“저거 뭐야. 취하는 거 싫다고 온더락으로 한 잔 이상은 죽어도 안 마시는 양반이 저게 뭐냐고. 며칠 동안 저래 놨어. 맨날 마신 거야?”

“어제.”

“뭐가 어제야.”

“어제 마신 거라고.”

머리가 징징 울렸다. 손끝과 발끝이 저리고 무거워 움직이기가 귀찮았다. 온몸의 피가 말초로 몰린 것 같다. 손가락을 구부리는데 마취를 한 것처럼 감각이 낯설다.

“미쳤어?!”

“시끄러워.”

“이걸 하룻밤에 마셨다고? 제정신이야? 그러다 죽어! 안 먹던 사람이 이만큼을 마시면 죽는다고! 아니, 이게 들어가긴 해?”

발을 질질 끌어 침실로 돌아갔다.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인상을 찌푸린 채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단단하고 따뜻한 것을 품에 안고 잠들고 싶다. 지난밤은 유난히도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까지 샛별의 동네를 맴돌다가 베란다에서 담배를 태우며 아침을 맞았다.

그사이 수면을 유도한다는 핑계를 대고 한 잔씩 마신 것이 어느새 한 병, 두 병, 늘어났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수면제를 한 알 털어 넣고 술을 한 컵. 다시 네 생각에 현관문을 붙잡고 슬리퍼를 신은 채로 복도를 서성이던 걸음을 당겨 수면제 두 알에 술을 두 컵. 마지막으로 시계를 본 것이 아침 9시였다.

“미쳤어, 미쳤어. 형 그런 사람 아니잖아. 전시회는 어쩌려고 그래. 형이 아무리 날고 기어야 을이야, 을! 그쪽에 밉보이면 끝인 거 알잖아!”

“몇 시야.”

“오후 3시.”

길어야 여섯 시간. 커튼이 사방에서 펄럭였다. 도중에 일어나 집 안 창문을 죄다 열고 밖을 내다보며 휘청거리던 것은 꿈이 아닌 모양이었다.

“더 자야 돼. 나가.”

“나한테 연락이 왔어. 형이 연락도 안 되고 진척도 없는 것 같다고. ……슬럼프라며.”

“어. 때려치울 거야. 그러니까 나가라고.”

“왜 이래 진짜. 평생 혼자서도 살 것처럼 굴던 사람이.”

“혼자 살 거야.”

“등신.”

하늬는 씩씩거리면서 침실을 나갔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슬리퍼가 바닥에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집 안에 누군가가 있다는 감각에 몸이 노곤해졌다. 기억은 멋대로 소리와 감각을 뒤틀어 샛별이 집 안을 분주히 돌아다니며 나를 돌보는 것 같은 환영을 보여 주었다. 슬그머니 미소가 비집고 나왔다.

발걸음 소리가 다시 다가왔을 때, 나는 눈을 뜨지도 않은 채로 손을 뻗어 속목을 잡아당겨 침대로 끌었다. 이리 와, 같이 자자. 달콤하고 나른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대답한 건 박하늬였다. 뭐. 나쁘진 않네. 얌전히 품에 안겨 눈을 감는 녀석을 눈을 떠 확인하지는 않았다.

너무 피곤했다. 단잠이 필요했고, 온기가 필요했다. 하품이 나는 것처럼 코가 시큰거렸다. 피곤한 탓이 분명했다.

***

“진짜 그만둘 거야?”

“글쎄.”

먼지가 쌓인 하얀 캔버스 윗면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며 박하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질문에 뚜렷한 대답을 내놓을 재간이 없다. 어떠한 결심이나 다짐도 없이 나는 그저 무기력했다. 생각을 할 기력이 없어 고민을 뒤로 미루고 그저 잠만 자고 싶었다.

“이건 왜 뒤집어 놨어.”

“손대지 마.”

작업실 한편에 그림 몇 개를 뒤집어 놓은 것을 보고 박하늬가 손을 뻗었다. 그 손목을 잡아 뒤로 쳐 내며 앞으로 막아섰다.

“뭔데 그래. 꼭 못 볼 거라도 그린 것처럼.”

“그래. 볼 만한 게 못 되니까 보지 말라고.”

조각으로 짓이겨 놓은 그때의 그림 이후에도 붓을 들면 자꾸 샛별의 그림만 그렸다. 손, 귀, 발가락, 옆얼굴, 뒷덜미, 등, 배꼽. 그 어느 곳이든지 샛별을 그림 위에 박아 놓고서 눈이 벌겋게 되어 칠해 놓고 나면 자괴감으로 숨이 막혔다.

이건 내 그림이 아니야. 이건 그냥 파도에 휩쓸린 쓰레기 같은 배설 흔적이야.

그 어느 때보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망으로 손이 저릿했으나 우스울 정도로 슬럼프가 심했다. 화랑의 담당자가 찾아와서는 슬쩍 그림을 뒤집어 보고는 얼떨떨한 웃음을 지었다.

‘장 화백님 좀 쉬어야겠어. 우리 이렇게 뻔한 건 안 하는 거 알잖아.’

맞다. 나는 너무도 뻔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만 돌아가. 피곤해.”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건데. 정말 답답해서 못 봐 주겠어, 둘 다.”

박하늬는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눈을 홉뜨고 입술을 깨물었다.

“……둘 다?”

“아니야, 아무것도. 나 그만 갈게. 피곤해 보인다.”

“너 별이 어디 있는지 알아?”

“몰라. 모른다고.”

“말해. 별이 어디 있는데.”

“진짜 모른다니까! 그냥…….”

“그냥, 뭐.”

“……아니야. 아무것도. 설사 내가 안다고 해도 얘기 안 해. 지금 만나 봐야 두 사람한테 하등 도움도 안 돼. 형은, 아직 준비가 안 됐어.”

“말해.”

박하늬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밀쳤다. 그 반동에 머리가 덜컹이고 속이 메슥거렸다. 그는 아픈 기색도 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거봐. 형은 아직이야. 참아 봐. 참아서 견딜 수 있음 참아 보라고.”

“안 참아. 참기 싫어. 데려와.”

“데려와?”

피식. 박하늬는 간단히 내 손을 털어 내 버리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한쪽 눈썹만 추켜올려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 우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웃기셔. 제 복을 발로 찬 게 누구였더라. 솔직히 난 입은 은혜가 있어서 형이 불쌍하고 가여운데, 샛별이도 그럴까? 나 같으면 너무 막 끔찍하고, 싫을 거 같아. 형은 뻔뻔하잖아. 그것도 존나 심하게. 모르지?”

그는 못내 나를 걸려하는 얼굴을 하고 돌아갔다. 찬장과 냉장고에 술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냉장고에는 ‘적당히 하고 밥 먹기 외로울 때 연락해.’ 하고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술이 부족해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수면제 한 줌을 입에 털어 넣으며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잘 거니까 깨우지 마.]

(D)

며칠 만에 휴대폰을 켰다. 아예 없애 버리고 싶었는데 처리할 일들이 많아 휴대전화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새로 번호를 받았다. 정리는 대부분 끝났고 어딘가에서 연락을 받을 일도 없어 벌건 눈을 하고 초조하게 휴대폰 시계만 노려볼 필요가 없어졌다.

잠이 오지 않아 날밤을 새는 대신 끊임없이 졸음이 쏟아져서 휴대폰 전원이 나간 줄도 몰랐다. 아, 마지막으로 밥을 먹은 게 언제였더라. 어제? 그제? 모르겠다.

“부재중 전화 스무 통에, 문자가 50개?”

나도 모르게 꺼낸 혼잣말이 푹 잠긴 목소리여서 헛기침을 했다. 말을 할 상대가 없으니 목이 잠기는 건 당연했다. 먼지를 두 주먹쯤 삼킨 것처럼 걸걸한 목소리가 났다.

[샛별아. 전화 받아.]

[나하고도 연락하기 싫어?]

[할 말 있어서 그래.]

[너 힘든 건 아는데, 그래도 산 사람은 살려야지.]

중간중간 섞인 쓸데없는 문자를 빼고서는 전부 하늬의 문자였다.

[샛별아, 내가 못된 건 아는데 나 좀 도와줘.]

마지막 문자는 불과 두 시간 전의 것이었다. 머뭇거리다가 전화라도 걸어야 하나 손가락을 꼼질거리는데 진동이 울리며 문자가 새로 도착했다.

[장석, 그 미친놈 좀 어떻게 해 줘. 이러다 진짜 큰일 날 거 같아.]

(J)

“시끄러워.”

머리 안쪽에서 망치를 휘두르는 것처럼 두통이 일었다. 다시 잠들고 싶은데 눈을 감아도 시야가 흔들리기만 했다. 소리조차 머리를 두드리는 것처럼 느껴져서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목소리도 귀찮기만 했다.

“시끄러, 조용히 해.”

목소리가 탁하다. 가래가 낀 것처럼 답답하고 걸걸한 소리가 났다. 목에 힘을 주어 소리를 뱉어 내는데 머리가 핑 돌아 눈 안쪽이 어지럽다.

“병신아, 작작해. 작작하라고!”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려 위를 보니 박하늬가 붉어진 눈을 하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시끄럽다고 했지.”

“너 제정신이야?!”

그는 어깨를 파르르 떨면서 휴대폰을 쥔 손으로 눈가를 거칠게 훔치고는 방문 쪽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밖에 저거 뭐야. 어제 나 돌아갈 때까지만 해도 하나도 없었잖아. 하룻밤 동안 저걸 다 먹었어? 약은, 약은 얼마나 삼킨 건데. 지금이 몇 신 줄은 알아?”

“몇 신데.”

“밤 12시.”

해가 뜨는 걸 보고 잠이 들었으니 하루 종일 잔 것만은 분명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어 보려다 머리가 아파서 관두었다.

“그래서?”

무겁게 느껴지는 이불을 밀어 내면서 베개에 얼굴을 다시 파묻었다. 아직 반나절은 더 잘 수 있을 것 같다. 몸에 추를 매단 것처럼 무겁고 하루 종일 물에 담가 놓은 것처럼 축축하다. 목이 따끔거리고 눈이 뜨겁다.

“너…… 이틀을 내리 죽은 듯이 잤던 게 바로 얼마 전이야.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이러다 내가 못 올 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할래? 아님, 정말로 응급실이라도 실려 가서 대문짝만하게 기사라도 낼 셈이야? 장석, 고질적 우울증으로 자살 기도. 뭐 이런 기사라도 나야 정신 차릴래? 온 동네방네 자랑이라도 할 거야?”

“것도 나쁘지 않지.”

차라리 소문이라도 났으면 좋겠다. 아마 샛별이 돌아오지 않는 건 내 모습을 모르기 때문일 거다. 신문에 내 얘기가 실리고 소문을 떠들기 좋아하는 이들이 나를 가지고 물고 뜯고 마음껏 얘기를 부풀려 그 애에게 얘기해 주었으면 좋겠다. 샛별은 심성이 착하고 남을 쉽게 걱정하니까 아마 내 얘기를 듣는다면 문병이라도 와 주겠지.

“이러는 이유가 뭐야. 슬럼프 때문이야, 아님 샛별이 때문에…….”

슬럼프 탓이다. 어떤 그림을 그려도 볼품이 없고 지리멸렬해서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더 이상 그럴듯한 척을 할 수가 없는데,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몰라서 잠을 자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는다.

그래서 샛별이 필요했다. 꾸밈없이 나를 추켜세우는 다정한 말과 부드러운 온기. 아마 내가 제대로 서지 못하는 건 네가 갑자기 나를 흔들어 놓았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도 몽롱했다. 그래서 나를 내려다보는 네 흔들리는 눈동자가 꿈인 것만 같아서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했다. 툭, 볼에 떨어지는 미지근한 물방울에 눈꺼풀을 떨다 숨을 내쉬었다.

“왜, 왜 이렇게 야위었어요.”

“네가 없어서.”

입 밖으로 새어 나온 목소리가 탁하다. 여전히 머리는 뜨겁고 속은 울렁인다. 손바닥으로 내 이마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툭툭, 떨어뜨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아침에 눈을 다시 떠도, 꿈에서 깨어나도 네가 내 곁에 남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지 마. 별아, 가지 마.”

약하고 초라하고 볼품없는 나를 너는 좋아해 주지 않겠지만 괜찮다. 지금은 꿈이니까. 스르르 미끄러지는 손을 붙잡아 품에 당겨 안으며 다시 한번 속삭였다. 가지 말고 내 곁에 있어 줘.

***

“으으음…….”

곁을 파고드는 온기에 눈이 뜨였다. 놀라울 정도로 쉬운 기상이었다. 근래 들어서는 항상 술이나 수면제 탓에 머리가 어지럽거나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 눈꺼풀을 밀어 올리는 데에도 긴 시간이 필요하곤 했는데, 지금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것처럼 머리가 가벼웠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나는 곧 품 안에 온기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아, 돌아왔구나.”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굳이 품 안에 곱게 잠들어 있는 그를 깨우지 않아도 분명하게 느껴졌다. 코에 걸린 숨소리, 웅크려 나를 붙잡는 손.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 나의 다리 사이로 발을 밀어 넣는 잠꼬대. 햇볕의 향기가 나는 머리카락.

기나긴 새벽을 지나 네가 돌아왔다. 유난한 아침이다.

“잘 왔어. ……기다렸어.”

혹시라도 샛별이 깨어날까 봐 머리칼 끝을 만지작거리거나 옷 위로 그의 등을 쓸어내리면서 숨을 죽였다.

샛별이 일어나 눈을 떴을 때, 그 눈동자에 황망함이나 실망이 어릴 것이 걱정이었다. 왜 이렇게 초라해졌어요. 예전 같지 않아. 밝은 햇살 아래 드러날 내 모습이 얼마나 흉한 꼴을 하고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아 불안은 더욱 컸다.

새벽에만 밖으로 나돌아 다닌 탓에 제대로 거울을 본 것이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면도를 하고 세수를 했지만 그때에 거울 속 내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다.

또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슬그머니 뒤로 도망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 이거 제가 착각을 했네요. 악의 없는 네 얼굴에 나는 반박도 하지 못하고 주저할 것이다.

아침 먹을래? 입 밖으로 조그맣게 소리를 내었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자연스럽고 평범하게, 샛별이 상황을 깨닫기도 전에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갈 특별한 인사가 필요했다. 잘 잤니. 아니, 이건 너무 고루하다. 별아, 언제 왔어. 이 말도 아니다. 얼른 돌아가라는 것처럼 들릴 지도 모른다.

“별아, 나는…….”

“으음. 형, 잘 잤어요?”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목소리에 부스스 샛별이 움직였다. 네 개뿐인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기지개를 켜고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손등으로 부볐다. 코로 웃음을 내쉬며 느슨하게 깜빡깜빡,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모양은 언제나의 샛별이 맞았다.

아침 햇살에 연한 빛을 띠는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목이 뜨겁다.

“별아.”

고작 이름 한 번을 불러 놓고 숨이 조여 온다. 허공에 부르던 네 이름은 모두 헛것이었다. 음절을 뭉쳐 놓은 소리의 장난과 온기를 곁에 두는 부름은 그 음색부터가 달랐다.

샛별은 나를 살피듯 눈동자를 굴리며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하품이 나는 것을 꾹 참는지 코가 작게 벌름이고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입술을 꾹 조여 기어이 하품을 참아 낸 샛별이 저 혼자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내 품으로 고개를 묻었다.

“……형, 여기도 말랐네.”

샛별의 손가락이 불룩 튀어나온 쇄골을 더듬도록 둔 채 입을 열었다. 머릿속으로 고민한 보람도 없이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다. 나는 네가 보고 싶었다.

말을 꺼내 놓고서야 분명해졌다. 차마 움켜쥐지 못하고 조심스레 샛별의 등에 두른 팔에 힘이 들어갔다. 오랫동안 준비한 얘기였다. 나는 매일 아침 내 품에서 눈을 뜨는 네가 보고 싶었다. 내 곁에 앉아 즐거운 얼굴로 얘기를 종알거리는 것과 내 팔을 베고 곤히 잠드는 것을 보고 싶었다.

“이제 아무 데도 가지 마.”

내 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 맥락 없이 꺼낸 내 억지스런 말에 네가 어린애처럼 웃는다. 웃음으로 휘어지는 눈꼬리가 붉어 나는 참지 못하고 입을 맞췄다. 형, 하고 여린 목소리로 나를 부른 너는 마치 첫 키스를 하는 소년처럼 입을 다물고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애타는 나의 애무에 간신히 아기 새처럼 입술을 열어 주었다.

“약속해. 아무 말 없이 사라지지 않겠다고.”

대답을 들을 것이 두려워 네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입술을 붙였다. 너를 한입에 집어삼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오랜만에 나누는 너와의 키스는 감히 욕망을 품는 것조차 죄스러울 정도로 담백하고 포근해서 거칠었던 호흡조차 이내 얌전해졌다.

“잠깐.”

꼼지락거리던 손가락으로 내 입을 막고서 샛별이 붉어진 입술을 안으로 말아 삼켰다.

“약속할게요.”

“정말?”

“정말.”

얼핏 샛별의 얼굴에 고민하는 기색이 어렸으나 금방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기에 그 말을 믿기로 했다. 샛별은 장난스런 얼굴로 새끼손가락을 걸지는 못하지만, 하고 중얼거렸다.

다섯 번쯤, 정말 정말 정말이에요, 하는 대답을 받아 낸 뒤에야 나는 되묻는 것을 멈췄다.

하아,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방금 전 너무나 말끔하게 눈을 뜬 것과 달리 갑작스럽게 졸음이 쏟아졌다. 온몸이 축 늘어져 손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우스웠다. 나도 모르게 나는 샛별의 부재에 긴장하고 있었다.

“대신.”

자꾸만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샛별을 더욱 품으로 당겨 안았다. 놓아 주고 싶지 않았다.

“푹 자고 일어나면 나한테 맛있는 밥 해 주기.”

“응. 뭐든지.”

“술도 그만 마시고.”

“응.”

“수면제도 그만.”

“안 해.”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네가 있는 식탁은 오렌지 빛과 노란빛이 섞인 생기로 흘러넘칠 테고 너를 품에 안으면 불면은 없을 터였다. 그 모두를 하나하나 손으로 꼽아 샛별에게 얘기해 주고 싶었지만 도저히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잠이 쏟아졌다.

“그러니까…… 일단 한숨만 더 자자.”

“또 자? 나는 안 졸린데.”

주인을 보채는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샛별이 내 품에서 빠져나오려 낑낑거렸다. 허리도 아프고, 팔도 저려요. 나 형 기다리면서 TV 보면 안 돼요? 샛별이 눈을 큼지막하게 뜨고 입꼬리를 축 내려뜨렸다. 뒷덜미에 손을 감아 샛별의 얼굴을 당겨 입술을 부볐다.

“착하지. 별아.”

졸음이 엉망으로 뒤섞인 목소리에 샛별이 눈동자를 굴리다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치, 그런 건 반칙이지. 웅얼거림을 가슴팍에 묻으며 샛별은 내 곁으로 완전히 안겨 왔다. 품 안에 가득한 온기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난해한 감정이 떠돌았다. 이럴 때 쓰는 말이 있었는데, 뭐였더라.

아, 그래. 나는 잠의 구덩이로 떨어지기 직전, 간신히 그 말을 떠올렸다. 뭉개지는 혀끝에 그 말을 굴리며 나는 만족스런 기분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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