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석양의 우울
(D)
먼발치에서라도 바라보고 싶어 헤매고 헤맸던 날들이었다. 나는 죄책감을 짊어지고서 형을 그리워했다. 그리움에 다른 그리움을 덧댄다는 것이 그토록 부끄러운 일인 줄은 몰랐다.
하늬에게 형이 내가 사는 동네를 맴돈다는 얘길 들었을 때 처음엔 믿지 못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래 봤자 소용없는걸. 형은 우리 집이 어디인지도 몰라. 형이 우리 집 근처라고 알고 있는 그 번화가 모퉁이는 내가 잘 다니지도 않는 길이었다. 그나마 가장 초라하지 않은 길을 고르고 골라 내밀었던 것을 형은 모를 것이다.
골목마다 치우지 않은 쓰레기가 발길을 방해하고, 울퉁불퉁한 도로에 발이 채이기 일쑤였다. 어딘가에서 늘 비릿한 하수도 냄새가 맴도는, 밖의 거리보다 두 뼘쯤 어두운 그림자를 가진 내가 사는 곳 따위 형에게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물론, 더 이상 나는 그곳에 살고 있지 않지만.
-샛별아, 내가 먼저 전화해 놓고 우스운 얘기지만. 네 등을 떠밀고 싶은 게 아니야. 그냥…… 한 번만 생각해 달라는 거야. 아직 더 생각해 볼 용의가 있다면, 그 사람을 완전히 버리고 싶어진 게 아니라면 한 번만 다시 봐 줘. 아니면 차라리 돌아올 생각 따윈 없다고 못을 박아 줘.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가느다란 숨소리를 잠시간 듣고 있던 하늬는 짧은 한숨과 함께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사람, 너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다고 매일 약을 먹고 하루 종일 잠을 자. 이러다 정말 한 통을 다 씹어 먹고 영영 잠들어 버릴까 봐 겁나. 나, 남은 가족이 아무도 없어서 그 사람밖에 없어. 형마저 나 두고 갈까 봐 무서워.
떠날까 봐 두려운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하늬 또한 그랬다. 경험이 쌓이면 더 익숙할 법도 한데 어쩐 일인지 이별을 겪는 건 경험이 쌓일수록 점점 더 두려운 일이 되었다. 사실 죄책감이나 미안함 같은 건 어느 정도 핑계였다. 하늬의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형이 떠나는 게 두려운 거구나. 정말로 영영 나를 떠나 버릴까 봐 나는 시작조차 할 수 없는 거구나.
***
서울을 떠난 지 고작 몇 달인데 완전히 낯선 도시처럼 느껴졌다. 겨울이 한풀 꺾이고 내려앉는 햇볕에 온기가 더해지기 시작했음에도 여전히 서늘하고 메마른 기분이 들었다. 챙겨야 할 짐이 많았다. 집도 완전히 정리해 주어야 하고 부동산에 들러 마무리도 지어야 했다.
겨울 내내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집은 겨울의 끝이 다가오자 곧장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시기가 이상하게 맞아떨어졌다. 하늬의 말을 듣고 움직인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런 게 아닌데. 나는 그저 이사를 하려는 건데. 아무도 듣지 않을 변명을 혼자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집은 무척 싸늘했다. 제일 먼저 보일러를 켜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싱거울 만큼 짐 정리는 빨리 끝났다. 애초에 가지고 있던 것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 온 분홍색의 예쁜 상자를 꺼내 엄마가 쓰던 양말과 아껴 바른다고 반도 쓰지 못한 화장품, 깨끗한 옷과 늘어지고 헤진 옷들을 담았다.
가구라고 부를 것도 없었다. 혼자서 옮길 수 있는 낮은 서랍이나 옷걸이가 전부여서 그것들을 밖에 내놓고 짐을 정리한 상자들은 택배로 부쳤다.
텅 비어 버린 집에 누워 누렇게 뜬 천장을 바라보았다. 사는 동안에는 가스비 걱정에 찔끔찔끔 틀어 놓던 보일러 온도를 한껏 높였다. 바닥이 절절 끓어 뜨거울 정도였다.
“우리 집 좋은 집이었네. 엄청 따뜻해요, 엄마. 여기 딱 드러누워서 군고구마도 먹고 귤도 까먹고 하면 세상 부러울 게 없겠어.”
뒤척일 때마다 나는 외투의 부스럭 대는 소리가 새로 꺼낸 겨울 솜이불처럼 느껴졌다. 옆으로 돌아누워 다리 사이에 손을 끼워 넣고 눈을 감았다.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무릎베개를 해 주면 딱 좋을 것 같다.
꿈처럼 희미하게 덧씌워지는 기억은 처음엔 느리고 억센 엄마의 손바닥이었다가 점차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형의 것으로 바뀌어 갔다.
별아,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이리 와. 나를 부드럽게 품으로 당겨 안는 손길을 느꼈다. 형의 품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그대로 뛰어들면 흐물흐물 녹아 버릴 것처럼 뜨거워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형, 이리 오라고 해 놓고 어디 가요.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린 형의 모습이 자꾸만 멀어졌다. 나는 발바닥이 바닥에 못 박힌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어서 눈만 끔뻑거리며 형이 저만치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흐, 형.”
꿈이었다. 보일러의 온도는 자꾸만 올라 나는 외투 안에서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물에 씻어 낸 것처럼 머리는 맑은데 몸은 혼곤히 늘어졌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이 끊어져 늘어난 고무줄처럼 탈력감이 들었다.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내 보니 어느새 12시가 넘어 있었다.
“큰일 났네. 오늘 안에 다시 내려가려고 했는데.”
심야 버스마저 끊겨 있을 시간이었다. 그럼 내일 첫차를 타고 내려가야 하나. 첫차는 몇 시에 있지. 머릿속으로 질문을 던지면서도 대답할 기력이 없어 느릿하게 눈만 끔뻑였다. 생각하기가 귀찮았다. 그럼 이대로 다시 잘까. 눈을 감았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한밤중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비어 버린 집이 더 휑하게 느껴졌다. 공간이 점점 부풀어 내가 콩알만 하게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아까까지는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던 방바닥의 온기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집에서 도망치듯 멀어져 다시 돌아가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기도 했다. 홀로 잠들 자신이 없었다. 집에 대한 기억은 곧 엄마에 대한 기억이기도 했다. 엄마의 온기, 포근한 냄새, 내 것보다 편안한 고른 숨소리.
잠결에 엄마 이불로 파고 들어가 허리를 끌어안으면 엄마는 내 엉덩이를 토닥이며 중얼거리곤 했다. 우리 별이 아직도 애기라서 큰일이네. 누가 이걸 데려가서 재워 준담. 딱한 내 새끼. 나 아니면 내 새끼 누가 안아 주고 얼러 준담.
“엄마가 해 주면 되지.”
뱉어 낸 말이 허공에서 부스스 사라진다. 대꾸는 돌아오지 않고 찬 바람이 드는 것처럼 몸이 서늘했다. 몸을 둥그렇게 웅크려 무릎을 끌어안았다. 축축해지는 코를 훌쩍이며 바닥에 뺨을 문질렀다.
그러게 왜 그렇게 급하게 갔어. 나는 이제 누구랑 같이 살라고.
집에 있으려니 자꾸 쓸데없는 생각만 들었다. 머리 위로 이리저리 뒤섞인 추억들이 쌓여 무거웠다. 더 견디기가 어려워 무작정 밖으로 나섰다.
새벽바람은 날이 선 듯 매서웠다. 목을 움츠리고 빨갛게 된 코를 옷에 묻고서 걸음을 옮겼다. 이 시간에 갈 만한 곳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평소에는 그렇게 많이 보이던 찜질방도 좀체 눈에 띄질 않고 그나마 24시간 운영하던 동네 사우나도 몇 달 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건물을 허물고 있었다.
결단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이정표를 보려 했을 뿐이고, 길가로 나선 것은 어두운 탓에 길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앞에 기다렸다는 듯이 택시가 멈추어 선 것도, 마침 매서운 바람이 불어 피신하듯 문을 열고 들어간 것도 모두 우연이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반쯤 잠긴 택시 기사의 나직한 목소리에 대답한 것 또한 내 의지가 아니었다.
내가 지시한 행선지가 형의 집 앞이었다는 것은 내릴 때가 돼서야 알았다. 전혀 모르는 곳에 도착한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고 택시 기사는 내비게이션을 확인했다.
“여기 맞는데요. 혹시 다른 데가 또 있나요?”
말투는 친절했으나 얼굴에는 짜증이 묻어났다. 추가 요금을 받더라도 도착한 행선지에서 차를 돌리는 것이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몹시 면구스러운 기분이 들어 지갑에 들어 있는 현금을 대강 그에게 쥐여 주었다.
“아뇨, 맞아요. 여기 맞아요.”
여기에 오고 싶었어요.
홀린 듯이 중얼거리는 나를 두고 택시는 휑하니 돌아서 가 버렸다. 땀이 난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이제 어쩌지.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났다. 형이 사는 아파트는 큰길에서 제법 떨어져 있어 일부러 부르지 않는 한 지나가던 택시가 나타날 일도, 시간이 지난다고 버스가 오갈 일도 없었다.
옅은 오렌지 빛으로 일렁이는 가로등을 바라보다가 맑은 콧물이 나는 코를 훌쩍였다. 날이 너무 춥다. 이제 곧 봄인데 왜 이리 춥지. 큰길까지는 30분은 걸어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벌써 3시였다.
형도 자고 있을 테고, 잠깐 보기만 하는 건 괜찮지 않을까. 두고 온 열쇠는 어쩌지. 그럼 문 앞까지만 가 볼까. 문고리를 돌려 열리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마음이 가뿐해질 거야.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핑곗거리를 만들고 있었다. 차가 끊겼으니까. 날이 추우니까. 어차피 만나지 못할 테니까. 이유를 붙이고 붙여 형에게 다가갈 생각만 했다. 내내 바닥과 가로등 불빛만 오가던 시선이 형이 잠들어 있을 창가에 머물렀을 때, 몸이 다 얼도록 고민한 보람도 없이 걸음은 너무도 쉽게 떨어졌다.
더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사람이 너를 기다려. 하늬의 그 한마디가 머릿속에서 왕왕 울렸다. 형이 나를 기다려. 그 한마디가 나의 모든 이유가 되었다. 핑계도 변명도 필요하지 않았다.
마음만 급해 걸음이 꼬이고 몸이 흔들렸다. 초조함으로 목구멍이 간지러웠다. 까닭 없이 손이 저려 마른세수를 하고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계단을 오르다 넘어지고 잠깐 멈춰 선 순간이 서러워 눈이 시큰했다.
부옇게 흐려진 시야로 보이는 문고리를 쥐고 막무가내로 돌렸다. 문고리가 헛돌아 문이 벌어졌다. 애초에 문은 닫혀 있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 좋을 대로 착각이 들었다.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열어 놓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형의 기다림은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정도의 사소한 것일 텐데.
“형…….”
현관에서부터 형을 불렀다. 다가가기도 전에 벌써 형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고막까지 심장 소리가 쿵쾅거리며 울렸다.
아아, 어떡해. 숨이 멎을 것 같아.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하고 허공을 헤매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형. 나 얼마나 기다렸어요? 나 보고 싶었어요? 나는요, 나는 형이…….
울음이 넘칠 것 같아 손바닥으로 목을 눌렀다. 발끝으로 걸어 형의 곁으로 다가갔다. 형은 홀로 남겨진 내가 그러했듯이 둥글게 웅크려 잠들어 있었다. 숨겨 놓았던 그리움이 목까지 차올라 숨을 헐떡였다. 그리고 그림자에 가려 있던 형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어떡해.”
정말로, 그대로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어떻게 이래요.”
부드러운 눈매가 움푹 꺼져 짙은 그림자를 만들고 턱선이 날카롭게 드러나 있었다. 내가 때때로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던 뺨은 오목할 정도로 패였고 입술에 닿아 있는 손등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말라 있었다.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세게 짓눌렀다.
“왜. 왜 이렇게 야위었어요.”
뭉글뭉글 둥글게 뒤섞이던 시야가 오목하게 떨어졌다. 형의 뺨에 떨어진 눈물방울이 마른 얼굴의 굴곡을 따라 흘러내렸다. 왜 그런 아픈 눈으로 나를 봐요. 마치 나 때문에 아프기라도 한 것처럼.
형은 눈꺼풀을 떨어 가늘게 눈을 뜨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끊길 것처럼 가는 숨을 내쉬고 바싹 마른 입술을 벌렸다.
“네가 없어서.”
그 목소리는 또 얼마나 외로움으로 잠겨 있는지. 나는 참을 수 없는 가여움과 사랑스러움으로 형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런 목소리로, 몸짓으로 나를 부르지 말아요. 나는 단순해서 또 착각하고 말아요. 형이 나를……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손바닥이 형의 이마에 닿고,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길 때에 나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형에게 닿는 순간 쌓아 놓았던 그리움이 물밀듯이 나를 떠밀었다.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나는 구제불능인가 봐요. 아직 엄마를 그리워해야 할 날이 한참이나 남았는데 계속 형 생각이 났어요. 그러면 안 되는데. 내가 그러면 안 되는데.
“안 돼요. 내가 어떻게 그래요.”
나는 그냥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거다. 내 멋대로 가 버려서 맘이 상했을지도 모르는 형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을 뿐이다. 내가 감히 어떻게 형의 곁에서 행복해질 수가 있어요. 나는 그냥 형의 옆에 있기만 해도 너무 행복할 텐데, 내가 염치도 없이 어떻게 그래.
“나 형이 미워서 가 버린 거 아니야.”
마음이 너무 쓰라리고 아팠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영영 형을 떠날 수 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형을 떠난 것처럼 혼자 청승을 떨면서 주위를 맴돌다 바보처럼 언젠가는 다시 돌아왔을 것이다. 고작 내 얼굴 찢어발긴 정도로 형에 대한 마음을 접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내가 형의 곁에서 고작 그림 하나에 죽을 것처럼 벌벌 떨며 머뭇거리던 그때, 뛰쳐나온 지 5분도 되지 않아 형이 보고 싶어 거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찔끔이던 그때, 엄마가 죽었다.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열리지 않는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내 이름 한번 불러 보지 못하고, 아프단 말도 하지 못하고, 나를 향해 뻗었던 손을 거두지도 못하고 그대로 몸이 굳은 채로 떠나 버렸다.
“근데 난…… 엄마가 보고 싶다가도 형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옆에 있어 주지도 못했는데, 내 욕심대로 형 곁에 머물러 버리면 엄마한테 미안해서 어떡해요. 나같이 돼먹지 못한 애가 무슨 염치로 그래요.
“그러니까, 이제 나 부르지 마요.”
형이 부르면, 그대로 머무르고 싶어지니까. 짓눌러 놓았던 욕심이 튀어 올라 형의 부름을 내 멋대로 착각하고선 행복해지려 할 테니까. 나 그런 몹쓸 사람 되고 싶지 않아요.
떨리는 손을 당겨 형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더 있다가는 내가 먼저 형을 붙잡고 곁에 있게 해 달라 매달리며 빌 것 같았다. 입술을 깨물어 울음을 삼켰다. 아프지 마요. 형 같은 사람이 왜 나 같은 거 때문에 아프고 그래.
손가락이 완전히 떨어지기 직전, 잠든 줄만 알았던 형이 나를 강하게 붙잡았다. 놀라 숨을 삼키고 형을 바라보았다. 눈은 잠든 것처럼 감겨 있었다.
“이거 놔요. 안 돼요, 제발.”
형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마르고 거칠어진 입술이 가볍게 떨었다. 코가 시큰하게 울리는 것이 보였다. 형이 목울대를 울렁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 안 돼. 그 말만은 하지 말아요. 그러면 나는…….
“가지 마.”
심장이 덜컥 떨어졌다.
“별아, 가지 마.”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형의 손을 놓지도 못하고 시트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흐느꼈다. 깊숙한 곳에 묻어 놓고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던 욕심이 가득 부풀었다.
“안 갈래요. 가라고 해도 안 갈 거야.”
형이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보고 싶어서 가슴이 미어질 만큼. 엄마를 부르면서 울다가도 형을 생각하며 잠들 만큼. 엄마에게는 미안해서 그만 혀라도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욕심 때문에 엄마를 외롭게 보내고서도 나는 여전히 형이 좋아서 견딜 수가 없다.
“미안해, 엄마. 내가 나중에 죽거든 뭐라고 욕해도 좋아. 근데 난 형이 없으면 지금 죽을 거 같아. 미안해…….”
형의 손을 꼭 쥐었다. 울 것처럼 일그러졌던 형의 얼굴이 점차 느슨해지고 이내 고른 숨을 내쉬었다. 형은 잠결에 내 손등에 뺨을 문지르며 안도한 것처럼 숨을 내쉬었다.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찌르르하게 전기가 오르고 눈가가 뜨끈해졌다.
내가 있어서 형이 편해지면 나, 곁에 있을 게요. 형이 날 밀어 내지만 않으면 평생 있을게. 형이 날 좋아하지 않아도 좋아. 내가 좋아하니까.
***
정신을 차렸을 땐 형의 품속이었다. 잠결에 형에게로 파고든 모양이었다. 그리운 온기와 체취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척 형의 품에 얼굴을 깊이 묻고 문질렀다. 얼마나 이 순간을 바라 왔는지.
“잘 왔어. ……기다렸어.”
낮게 잠긴 형의 목소리가 귓가에 떨어진다. 형의 손가락이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헤집어 어루만진다. 나를 어르는 듯 따스한 손길에 코끝이 찡하다. 어젯밤은 정말 꿈이 아니었다. 그 기다림이 어떤 기다림인지 알지 못하지만 나를 기다려 주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도록 행복했다.
“아침 먹을래?”
자는 척하는 걸 들켰나? 입술을 안으로 말아 잘근잘근 씹으면서 요동치는 심장박동을 억눌렀다. 조금만 더 이대로 있고 싶은데. 자는 척을 더하면 형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잠결인 척 어리광을 부리려던 것이 부끄러워 형의 품을 밀어 내려는데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희미한 속삭임이 들렸다.
잘 잤니. 이건 아니지. 언제 왔어. 이것도 말고.
웃음이 터질 뻔했다. 형은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나를 깨우지 않도록 어린애 재우듯 등을 토닥이면서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귀엽담. 형이 너무 귀여워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끄응, 신음을 내다가 한숨을 내쉬고, 같은 인사말을 어조만 바꾸어 몇 번이나 혀에 굴리는 것이 들렸다. 속 시원히 목을 가다듬지도 못하고 침만 삼키다가 다섯 번째로 잘 잤니? 하고 물었을 때 결국 참지 못하고 몸을 비틀었다.
“별아, 나는…….”
“으음. 형, 잘 잤어요?”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을 가리려 손등으로 얼굴을 누르고 몸을 꼬물거렸다. 이불을 몸에 덮어 밍기적거리다가 한참을 심호흡한 뒤에 깜빡깜빡 방금 잠에서 깬 것처럼 눈을 떠 보니 형이 감정을 알기 어려운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지한 그 얼굴에 입가에 남아 있던 웃음기가 가셨다. 해를 등진 그 모습이 눈부셔 눈을 가늘게 찡그렸다. 형은 조금도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별아.”
내 이름을 한번 불러 놓고 형의 얼굴이 휘청, 흐려진다. 형은 어제 새벽처럼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내 이름을 곱씹는 것처럼 입술을 움직였다. 당장 그 입술에 입 맞추고 싶은 것을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형, 하고 마주 부르면 분명 울고 말 거다.
형은 나를 처음 보는 것처럼 눈동자를 움직여 내 얼굴 곳곳을 세심하게 살폈다. 나 또한 형의 단정한 얼굴을, 어느 곳에 그림자가 고여도 근사하게 드리워지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 품에 안겼다.
여전히 아늑하고 향긋했지만, 뺨에 닿는 몸은 너무 말라 있었다. 딱딱한 뼈가 곧장 닿아 볼에 쓸렸다.
“……형, 여기도 말랐네.”
멋쩍은 눈물을 삼키며 형의 쇄골과 마른 가슴뼈를 어루만지는데 나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은 형이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이렇게 불시에. 예고도 없이.
형의 말은 아플 정도로 달콤했다. 반쯤 잠겨 있는 그 목소리는 너무도 애절해서 나조차도 형의 그리움이 나와 같은 거라 믿어 버릴 정도였다. 내 등에 두른 팔이, 마치 아무 데도 나를 보내지 않겠다는 듯이 힘주어 나를 끌어안아서 가슴이 죄여 왔다.
“이제 아무 데도 가지 마. 내 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
어린애 투정 같은 말투에 가슴을 꽉 조이던 압박감이 사라지고 가슴 안쪽이 몽글거렸다. 그게 뭐야. 형 꼭 말하는 게 떼쓰는 어린애 같아. 출근하는 엄마를 붙잡는 것처럼…….
생각 끝에 아른거리는 얼굴이 있어 손가락이 굳었다. 웃는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들키고 싶지 않아 얼굴을 피하는데 형의 입술이 눈가를 누르고, 다물린 나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마른 온기에 엄마의 얼굴이 조금씩 흐릿해졌다.
형은 느릿하게 입술을 문지르고 조심스럽게 내 입술을 핥아 단단히 맞물린 입술 사이를 벌렸다. 형을 부르려던 입술이 벌어진 채로 삼켜졌다. 형은 잠깐의 틈만으로도 내 안에 들어와 혀를 문질렀다.
“약속해. 아무 말 없이 사라지지 않겠다고.”
내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형의 입술이 다시 붙어 왔다. 숨이 가쁠 정도로 몰아치는 키스에 정신이 아득하다. 어제부터 정말 나한테 왜 이러지. 이러면 꼭 형이 나를……. 엉뚱한 곳으로 흘러 버리는 정신을 추슬러 형에게 매달리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아무리 호흡을 나누어도 부족하다. 이대로 완전히 뒤섞여 형과 내가 떨어지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다.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나의 키스에 오히려 형은 얌전해져서 평온한 얼굴로 숨을 골랐다. 못내 아쉬워 형의 옷자락을 쥐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나를 원하는 것처럼 굴어 주었으면.
“약속할게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얼굴을 한 형이 작게 숨을 삼켰다. 그런 어리숙한 얼굴은 처음이어서 그만 웃어 버릴 뻔했다. 형은 몇 번이나 정말? 하고 내게 되물으며 다짐을 받아 내었다. 마치 다정한 연인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웃음이 나면서도 동시에 눈시울이 뜨거웠다.
어제 새벽부터 모든 게 전부 꿈인 것만 같아서, 형이 정말? 하고 물을 때마다 정말, 하고 답하는 내 마음은 지금이 부디 꿈이 아니길 바라는 기원에 가까웠다.
형은 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몇 번인가 가벼운 입맞춤을 쏟아 낸 뒤 스르륵 베개에 머리를 뉘였다. 가물가물 풀어진 눈을 하고 나른하게 나를 바라보다가 꼭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형의 얼굴을 보니 나도 조금쯤은 기어올라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수면제를 끊으라느니, 술을 줄이라느니 하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형은 얌전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일렁이는 눈동자로 나만을 바라보았다. 거의 감긴 눈이 어찌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럽게 휘어 있는 것에 얼굴이 뜨거웠다.
“착하지, 별아.”
노래를 속삭이는 듯 낮게 울리는 목소리를 귓속에 흘리며 형은 나를 당겨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형은 입술을 우물거리며 뭔가를 중얼거리면서도 잠결에 하는 듯 나른한 동작으로 내 귓바퀴와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잠에 빠진 것처럼 몽롱하다. 나를 어루만지는 형의 손길에서 나는 나의 바람을 읽어 낸다.
형은 어쩌면 나를.
“사랑스러운 나의 별아.”
그건 꿈속의 울림이었다. 현실일 리가 없었다. 내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없이는 꿈조차 꿀 수 없는 것처럼, 솜털처럼 귓가를 간질이는 그 목소리는 차라리 꿈보다도 달콤했다. 마음이 벅차서 형의 품에 코를 묻어 숨을 골랐다.
사랑하는 형. ‘나의’ 것이라 감히 붙이지 못하고 가만히 바라만 보아도 좋은데, 형이 나를 ‘자신의 것’이라 불러 주었다. 이대로 형의 것이 되어 숨이 멎는대도 좋을 것 같았다.
***
우리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형이 식사를 만들면 나는 맛있게 먹고, 형이 그림을 그리는 곁에서 구경을 하거나 늘어져 뒹굴거리다가 형의 모델이 되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밤이 되면 어김없이 섹스를 했고, 형이 그때마다 마지막인 것처럼 집요하게 나를 애무하는 탓에 섹스가 끝나면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곯아떨어졌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에서만 빈둥거리는 것을 형은 나무라지 않았다.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가 눈을 끔뻑이며 왜요, 하고 물으면 고개를 흔들고 그저 미소를 지었다.
엄마가 남긴 보험금과 집을 정리해서 받은 전세금은 그걸 믿고 빈둥거릴 정도로 넉넉하지는 않았다. 길어야 5년, 다른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늦지 않게 새로운 일을 구하는 것이 옳았다.
“형, 나 뭐 하고 먹고 살까요.”
“일하게?”
“응. 맨날 이렇게 지낼 수는 없잖아.”
“난 괜찮은데.”
소파에 느슨하게 기대 있던 몸을 옆으로 누여 형의 허벅지에 머리를 올렸다. 형은 스케치북을 들어 올려 나를 편히 눕게 해 주었다. 그러곤 나를 빤히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정말 괜찮아. 어디 안 간다고 했잖아.”
“아니, 어디 가는 게 아니라 일해야 한다고요.”
“응. 그러니까 가지 마.”
형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못을 박아 대화를 마무리 지어 버리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럴 때 나는 우리 사이에 있었던 균열에 대해 생각한다.
가지 마. 그 말은 다시 형의 곁에 머물게 된 뒤로 수십 번도 더 듣게 된 말이었다. 형은 내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금방 어디로 증발해 버릴 것처럼 굴었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낯설어 어색하게 웃어넘기던 나도, 생활이 반복되고 익숙해지자 점점 그것을 아늑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형이 받아 주는 대로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냥 형의 말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곁에 있기만 했으면 좋겠다. 그런 철없는 생각을 하다 불쑥 현실적인 죄책감이 찾아올 때면 형의 체온에 기대었다. 형의 손을 잡고, 품에 안기고, 어딘가를 맞대고 있으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요즘은 무슨 그림 그려요?”
“그냥, 아무거나.”
잠시 헛돌았던 형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사각사각 연필이 재질이 거친 종이를 긁어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고 보니 내가 돌아온 뒤로 형이 작업실에 들어가는 걸 본 적이 없다.
“구상 중이에요?”
“어?”
“요즘 물감 냄새가 안 나서요.”
“아, 마땅한 게 없네.”
규칙적으로 연필을 움직이던 형이 이내 스케치북을 접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별아. 형 일주일째 한 모금도 술 안 마셨어.”
“와.”
“수면제도 버렸어.”
“우와.”
내 얼굴에 손가락을 올려 그림을 그리듯 덧그리던 형은 대답이 못마땅한지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바라는 대답을 해 주지 않아 심통이 난 것 같았다.
“형 진짜 착해요. 대견해. 완전 멋있어.”
몸을 일으켜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 목에 팔을 걸어 애교를 부리듯 코를 문지르자 그제야 형의 표정이 풀어진다.
“그래?”
“응, 그런 거 남들은 잘 못 해요. 형이니까 하는 거지. 형 진짜 멋있는 거 알죠?”
형의 옆에 찰싹 붙어 지내면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형이 칭찬에 약하다는 거다. 형은 정말 너무 귀엽게도 내가 멋있다고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릴 때마다 목을 빳빳하게 펴고 볼을 붉혔다. 그러고는 너무도 달아 녹아 버릴 것 같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이게 다 네 덕분이야.”
온몸이 배배 꼬인다. 너무 좋아서. 나는 아예 형의 무릎 위로 올라앉으며 음흉하게 눈을 뜨고 흐흐 웃었다.
“형,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요?”
부스스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형이 내 뒷덜미에 손가락을 감아 당겼다.
“이리 와. 해 줄게.”
***
게으른 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그렇게 말했던 반년 전의 나를 만난다면 단호히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 주고 싶다. 버릇을 들이는 건 오래 걸리지만 놓아 버리는 건 순식간이다.
돌이켜 보건데 나는 아침잠이 원래 많은 편이었다. 우유 배달이니 아침 파트타임이니 인력 사무소를 들락거리니 하면서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순간마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잠을 자고 싶어 이불 안에서 허우적거리곤 했었다.
알람이 울리면 벌떡 일어나도록 습관을 들이는 데 10년이 걸렸는데, 다 부질 없다. 나는 형의 집에 눌러앉은 지 한 달을 채우고서 게으른 애완동물 신세가 됐다. 이를 테면 털이 풍성한 고양이나 늙어 버린 개처럼.
“별아. 잠시 이리 와 봐.”
나는 집 안 곳곳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이런저런 놀 거리를 찾아서 시간을 보내다가 형이 부르면 그 곁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형의 발치에 앉아 무릎에 얼굴을 기대거나 곁에 바짝 붙어 옆구리를 부비거나 하면 형은 내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별아. 안 심심해?”
형은 나를 부를 때 꼬박꼬박 ‘별아.’ 하고 달콤하게 녹아 버릴 것 같은 목소리로 불렀다. 그 목소리만으로도 머리가 꽉 차는 바람에 나는 가끔 형이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예? 못 들었어요. 머리를 긁적이며 헤헤 웃으면 형은 다시 별아, 하고 부른 뒤 말을 이었다.
“별아.”
“……에?”
“아직 졸려?”
“아니. 아니에요. 좀 전에 책 몇 권 꺼내서 읽었는데 그것 때문에 그런가? 하하, 내가 워낙 책을 싫어해서 펼치기만 하면 10분 안에 잠들어요.”
“학교 다닐 땐 어쨌고.”
“에이, 공부를 책 보고 하나요? 감으로 하는 거지.”
이렇게 사소한 얘기를 조잘거리고 있으면, 이번엔 또 형의 눈빛이 문제다. 형은 어딘가에 팔꿈치를 대고 가볍게 턱을 받치고서 다른 손으로 내 머리칼을 간질이듯 쓸어내렸다. 간혹 손가락으로 집어 비비기도 했다. 그러고는 반 정도 내리깐 나른한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는 거다. 내가 하는 얘기마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염치없지만 그럴 때 형의 눈빛은 정말로 요염하고 섹시해서, 바로 마주 보지 않고 시선을 느끼기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고 몸에 열이 올랐다.
“별아.”
“네.”
“잠깐.”
결과는 뻔했다. 형은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을 스르륵 내려 귓바퀴를 더듬고 목덜미를 문지른 뒤에 내 어깨를 쥐고 당겼다. 얌전히 형의 품으로 당겨 앉으면 기다렸다는 듯 입맞춤이 이어졌다.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는 것처럼 느리고 정중한 키스 뒤엔 뜨거운 열락이 기다렸다.
나는 순서대로 이루어지는 예열에 길들여져 다정한 키스만으로도 그 이후에 일어날 일을 미리 짐작하고 멋대로 흥분했다. 가쁜 숨을 삼키며 형의 입술을 살짝 핥아 내는데 딩동, 벨이 울렸다.
우뚝. 형의 손이 멈췄다. 이런 타이밍에 나타나는 건 한 명뿐이지. 형은 굳은 얼굴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최근 생겨난 우리의 또 다른 일상에는 다른 사람이 끼어 있었다. 나는 형과의 달콤한 시간을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방해하는 그가 처음부터 싫었지만 알면 알수록 더욱 싫어졌다.
형은 마른세수를 하고 느린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차박차박 맨발로 현관에 다가가 몇 개나 걸어 놓은 잠금을 풀자 능글거리는 얼굴로 웃는 사내가 나타났다.
“이야, 장 화백님. 오늘도 근사하십니다. 어떻게, 진도는 좀 빼셨나요?”
“최기준 씨. 전화 먼저 하시라고 말씀드렸었는데요.”
“아이고, 제가 정신이 영 없어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형의 얼굴에도 그는 태연하기만 하다. 형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보면서, 등 뒤로 손을 감춰 휘휘 흔들었다. 나보고 방에 들어가라는 뜻이다. 나는 살금살금 일어나 발소리를 죽여 방으로 향했다.
“어, 샛별 씨도 계셨네. 어째 갈수록 얼굴이 좋아져. 연애라도 하시나?”
“예에, 안녕하세요.”
구부정한 걸음 그대로 목덜미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미처 짜증을 지우지 못한 얼굴에 급히 덧씌운 웃음이 어색했다. 눈동자만 돌려 형을 보니, 완전히 김이 새 버린 얼굴을 하고 손바닥으로 가볍게 이마를 짚어 내고 있었다.
“다녀간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또 무슨 일입니까.”
“일은 무슨. 응원차 들른 거지요. 자, 여기 구호물품도……. 으응? 어디 갔지?”
최기준은 과장스럽게 놀란 얼굴을 하고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손바닥으로 가슴부터 무릎까지를 턱턱 두드리기 시작했다. 허허, 거참.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것저것 들고 있었는데. 최기준은 너스레를 떨며 두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고서 어깨를 으쓱였다.
“주차한다, 어쩐다 하면서 주차장에 놓고 온 것 같은데요. 장석 씨. 죄송하지만 좀 가져다주지 않겠습니까? 그 봉지에 제 가방이랑 지갑도 있는데요.”
“직접 다녀오시지 그러십니까. 아니, 그 김에 얼굴도 봤겠다. 돌아가시면 좋겠습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주차장 한번 다녀오는 게 여기선 쉽지가 않아요. 경비 서시는 분들이 워낙 깐깐해서 이거저거 물어보고, 또 못 보던 물건까지 들고 오면 제 꼴에 영락없이 도둑으로 몰릴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럴 리가. 물론 여기가 굉장히 사생활 보호에 신경을 써 주는 곳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저씨들이 꽉 막힌 건 아니었다. 오히려 오랜 경험으로 인한 눈썰미가 있어 한두 번 보아도 손님을 알아보고 차종만 보아도 어느 집에 온 것인 줄 알 정도였다.
길게는 2주에 한번, 요즘 들어는 2, 3일에 한 번씩 들락거리는 저 남자를 모를 리가 없다. 내가 불만스런 얼굴로 혼잣말을 궁시렁거리는 것을 보고 최기준이 능글맞게 웃으며 쉿, 소리를 냈다.
형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 이마를 짚었던 손을 쓸어내려 눈과 코를 문질렀다. 조금 전 둘이서 있을 때까지만 해도 그나마 얼굴에 감돌았던 혈색이 싸늘하게 가셔 있었다. 잘 보이지 않던 눈 밑에 검은 그림자가 선명했다. 형은 내 곁에서 금세 잠들기는 했지만 나보다 먼저 깨어나 뒤척이는 일이 많았다. 가슴이 서늘하다.
“알겠습니다. 금방 다녀오죠. 대신, 가져다주면 금방 가시는 겁니다. 들쑤시지 말고.”
“제가 뭘 또 들쑤셨다고.”
최기준은 빙글빙글 웃으며 직접 문을 열어 형을 배웅해 주었다. 형은 최기준을 차갑게 쏘아본 뒤 안쪽에 뻘쭘히 서 있는 나를 한결 누그러진 눈빛으로 바라보고는 뒤돌아가 버렸다. 형의 피곤한 얼굴이 못내 마음이 쓰여 발을 꼼지락거리며 귓가를 긁적이는데 짝 박수 소리를 내며 최기준이 ‘자!’ 하고 말문을 열었다.
“그럼 얘기를 좀 해 볼까요? 샛별 씨.”
“……무슨, 얘기요?”
“일단 앉아요, 앉아. 다리 아파 죽겠어.”
그는 앓는 소리를 내는 것과는 달리 성큼성큼 걸어와 오른쪽 1인용 소파에 앉았다. 나는 뒷걸음질 쳐 형과 내가 거의 살다시피 하는 소파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가 다리 하나 걸치지 못하도록 길게 옆으로 몸을 눕혀 앉았다.
“그렇게 앉으면 허리 나가요. 젊은 양반이 벌써부터 몸을 그렇게 막 다루면 쓰나.”
“할 말이 뭔데요.”
뚱한 얼굴을 하고 그의 말을 잘랐다. 최기준은 내버려 두면 밤이 새도록 혼자서도 말을 조잘댈 스타일이었다. 형은 언젠가 그를 두고 오래되어 고장 난 알람 같다고 말했다. 즉, 목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다는 거였다.
“본인 입으로 말할 생각이 없으니 그 옆에 있는 사람에게라도 들어야지. 대체 장석 씨, 무슨 일이야? 숨기지 말고 얘기 좀 해 봐.”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는데요.”
능글능글 웃던 최기준의 얼굴이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마른세수로 쓸어 낸 얼굴이 조금 전과는 가면을 바꿔 끼운 것처럼 달랐다. 그는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오른쪽 손가락으로 왼손 손바닥을 두드렸다.
“빼지 말고 말해 봐 봐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갑자기 저렇게 그림이 개판이야? 막말로 지금 저거 가져다가 아무 화랑에나 가져가 봐. 3백만 원쯤 줘야 겨우 도록 좀 뽑아 주고, 전시회비 낸다고 해야 겨우겨우 귀퉁이에 걸어 주지.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저거, 진심으로 안 보여. 지금 반항하는 거잖아. 전시회 입맛에 안 맞춰 줘서 엎은 뒤로 요만큼도 잘해 보려는 의지가 없어. 대체 왜 그래?”
최기준은 단호한 손짓으로 작업실을 가리켰다. 삿대질하며 손가락을 흔들 때마다 심장이 저릿하다. 형이 노력을 안 해? 진심이 아니야? 저릿하게 아프던 심장이 이내 뜨거워졌다.
나는 화가 났다. 다른 건 몰라도 그림을 그릴 때의 형만큼은 매도해서는 안 되었다. 본인 입으로는 어쩌다 보니 계속 그리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림을 그릴 때의 형은 무섭도록 진지하고 진실했다.
형이 아무런 말도 없이 내 품으로 파고들어 허리를 세게 끌어안는 날이면 그날은 좀처럼 뭔가를 그려 낼 수 없는 날이고, 그림이 잘 풀리는 날엔 손이고 얼굴이고 잔뜩 물감을 묻힌 채로 평소보다 두 배쯤 들뜬 얼굴과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고는 했다.
최근 한 달. 그러니까 내가 돌아온 뒤로 뭔가를 채색하는 일은 없었지만 스케치만은 정말 하루 종일 했다. 연필을 너무 오래 쥔 바람에 나중에는 숟가락을 쥐는 손이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형이 특별히 뭔가를 완성하지 않아도 내가 크게 불안해하지 않는 까닭은 그 때문이었다.
천재이건 아니건 그런 문제를 떠나 형은 정말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아니, 좋아한다기보다 숙명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것도 아니면 자신에게만 맡겨진 운명 같은.
“안 그래요. 형 대충 그린 적 없어요. 잘못 보시는 거 아니에요? 어딜 봐서 형이 엉망이라는 거예요. 말이 진짜 심하시네.”
발끈해서 뱉어 낸 내 대답에 그는 허! 헛웃음을 치고는 벌린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허리를 숙였다. 부쩍 가까워진 거리에 허리를 뒤로 빼는데 그는 아랑곳없이 눈썹을 찡그린 채 말을 이었다.
“섬광처럼 번쩍한 거.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별천지 같은 거. 그리고 우주의 먼지처럼 외로운 거. 그게 장석의 장점이라고. 그게 다야. 기교가 특별하고 대단히 섬세해서 대중이 그를 사랑하느냐. 아니지. 섬섬옥수 고운 얼굴에 파격적인 색감을 덕지덕지 발라 그림을 그리는데 이게 심지어는 외롭고 쓸쓸한 거야. 크으, 예술가의 고독! 장석은 타고났어! 우울한 천재. 그림 같은 화가. 그런 마케팅에 타고 났다고.”
뭐가 어쩌고 어째? 그는 별것 아닌 단어들로 사람 가슴을 몹시 들끓게 하는 재주를 가졌음에 틀림 없다. 그가 말하는 형은 평생 우울함을 안고 살아야만 하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게 당연하고, 사람들의 볼거리를 위해서라면 기분도 무엇도 관계없이 오로지 섬광처럼 빛을 내기 위해서 스스로를 불태워야만 하는 그런 존재.
“그래서 뭘 어쩌라고요.”
“그런데, 요즘은 어떤지 알아?”
모르죠. 툭 말을 내뱉고 그를 노려보았다. 최기준은 조금도 시선을 피하려 들지 않고 오히려 집요하게 나를 응시했다.
“지루하고 뻔해. 아늑하고 그럭저럭 괜찮은 달달한 감성. 뭐 이런저런 말을 갖다 붙이면 ‘따뜻한 감성’이니 ‘시대를 아우르는 다정한 시선’이니 따위의 말도 할 수 있겠지만, 그게 장석이어선 안 되지. 아무 가치가 없어. 장석은 그런 쪽으로는 아니야. 스토리가 없다고.”
그는 혀를 한번 쯧, 차더니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언뜻 지루한 것 같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곧 얼굴을 싹 굳힌 최기준이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요즘은 가난한 애들이 따뜻한 마음을 갖는 것도 지리멸렬한 테마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더더욱 재수 없어. 그런 건 솔직히 안 하는 게 나아. 가슴에 단비니 어쩌니 해도 팔리는 건 결국 특별하고 짜릿한 서사를 가진 작가란 말이지. 우린 그림을 파는 게 아니야. 그림을 그린 작가의 인생을 떼어다 파는 거지.”
그는 자신의 손을 겹쳐 쥐고 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면서 한숨도 내쉬었다.
“이렇게 되면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 보는 수밖에 없거든. 우리도 먹고 살아야지.”
“……뭘요?”
그의 가라앉은 말에서 음침하게 깔린 그림자를 느꼈다. 그는 느리게 혀로 입술을 축이고 한쪽 눈썹을 당겨 올린 채로 나를 빤히 보면서 고개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서정성이 넘치는 호모 섹슈얼. 조수? 웃기지 말라 그래. 딱 보면 샛별 씨 견적이 나오거든. 근데 생각보다 오래 붙어먹는 거 같으니까 같이 윈윈 좀 하자. 내가 섭섭지 않게 보수는 챙겨 줄게.”
그의 의도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도 손과 발이 차갑게 식는 것이 느껴졌다. 호모, 보수. 그런 단어들만 보아도 그가 좋은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얘기 좀 만들어 보자고. 불안하고 외로운 천재를 완전하게 만드는 호모 뮤즈. 그럴듯한 스토리 좀 뽑아 봐. 그런 거 많이 해 봤을 거 아니야. 장석 옆에 붙는 놈들이 다 그렇지. 예술에 관심 있는 척, 고아한 척 굴면서 뒤로는 장석 돈 떼먹고 스캔들 팔아 돈 버는 놈들이거든. 내가 잘 알지. 한두 번 겪어 보나?”
“저는……!”
“알아, 알아. 샛별 씨 연기 잘하는 거 나도 알아. 그래, 훌륭해. 나한테까지 그럴 필요는 없지만 적을 속이려면 아군을 속이랬다고, 나까지 깜빡 속아 넘어가게 구는 거 아주 훌륭해. 그래서 말인데 샛별 씨 손가락은 왜 그래? 만들어 둔 스토리 하나쯤은 있을 거 아냐. 의심 많은 남자 친구한테 잘렸다든가 사채를 잘못 썼다든가 하는.”
“거기까지.”
내 앞으로 손이 쑤욱 나타나 눈을 가렸다. 나는 그 감촉과 체취만으로 그것이 형임을 알아차렸다. 벌렁벌렁 뛰던 심장이 놀랍도록 빠르게 가라앉았다.
“나가.”
형은 흡사 씹어 뱉는 것처럼 그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내가 괜히 이러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같이 일한 게 몇 년인데. 장석 씨도 순식간에 이러시면 안 되지. 응? 상도덕이라는 게…….”
“알았으니까, 나가라고.”
“그러니까 내 제안을 들어 봐요. 그리 나쁘지 않다니까? 별일 아니잖아, 이런 거.”
눈이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손가락 사이로 그가 어깨를 으쓱이는 것이 보였다. 그때, 요란한 소리를 내며 유리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손을 떼어 내 보니 형이 손에 들고 있던 봉지를 거실 찬장에 집어 던진 거였다.
찬장 유리 앞면은 전부 깨져 버렸고, 안쪽에 진열되어 있던 식기들도 부서지거나 바닥으로 떨어져 동강이 났다.
“나가라고. 그 빌어먹을 요란한 그림 그릴 테니까, 여기서 나가.”
뭐, 그렇다고 하면야. 최기준은 끝까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재수 없을 만큼 발랄하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그가 나가 버리고 삐리릭, 잠금장치가 작동하는 소릴 들으며 우리는 침묵했다. 나는 곳곳에 흩뿌려진 뾰족하고 날카로운 조각에 창백하게 질렸고, 형은 우울한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벌벌 떨리는 팔을 누르며 베란다에서 빗자루를 가져와 허리를 굽히는데 형이 팔목을 잡아 품으로 당겼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나를 꽉 끌어안은 형이 내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미안. 미안하다.”
“형…….”
“미안해. 내가 모자란 탓이야.”
“아니에요, 그런 거. 나 괜찮아요.”
일부러 높은 목소리를 내어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해도 형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내 떨림이 무색해질 만큼 힘겨워하는 몸짓으로 형은 쉬지 않고 내게 사과했다.
괜찮아질 거야. 미안해. 조금만 더. 이제 금방 정신 차릴 테니까. 미안. 조금만 참아.
형은 내 손에서 빗자루를 빼앗아 바닥에 던져 놓고 나를 끌어안은 채로 방으로 향했다. 그러곤 내 품에 안기듯 파고들어 잠이 들 때까지 나를 놓지 않았다. 나는 형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머릿속에 자꾸만 떠오르는 악의적인 말들을 삼키다 깜빡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거실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찬장에는 덮개가 씌워져 있었고 어제의 요란한 사건이 없었던 것처럼 집 안은 깨끗했다.
그러나 한 가지 바뀐 것이 있었다. 집 안을 가득 채우는 코끝이 찡해지는 독한 냄새. 닫혀 있는 작업실 문틈으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이, 다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상할 것은 없었다. 형은 늘 그림을 그렸다. 스케치북과 연필에서 이젤과 붓으로 도구가 바뀐 것뿐이었다. 그저 그뿐이라고, 붓을 든 형의 모습에 특별한 의미를 담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만 쓸데없는 생각들이 넘실거렸다.
형은 내가 돌아온 뒤로 줄곧 붓을 들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데에 일정한 규칙이나 시간을 정하는 것이 아니니 한 달이든 1년이든 형이 원치 않으면 그럴 수도 있었다. 심지어 형은 돈이 궁한 사람도 아니었다.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을 쉬었다고 해서 형이 다급히 그림을 그려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집 안에 넓게 번진 유화 물감 냄새에 커피를 급히 들이켠 것처럼 불안하게 가슴이 뛰고 마는 것은 애써 잊고 있던 그림 하나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폭발할 것처럼 번쩍이던 섬광. 그건 나도 형의 그림에서 느꼈던 바였다.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애처롭고 가여운 마음도, 시뻘겋게 칠하고 시커먼 점을 짓이겨도 처연하게 아름답고야 마는 것이 형의 그림이었다.
그러나 내가 보았던 형의 마지막 그림은 달랐다. 끝내 완성되지 못하고 너덜너덜하게 버려진 그것은 그동안의 것과 달랐다. 물에 불어 버린 비스킷처럼 무른 질감과 얇은 커튼으로 한 꺼풀 덮어 바라보는 듯한 옅은 색감, 가운데에 한없이 작아질 것만 같던 무언가가 넓게 팔을 벌리는 듯한 온화한 존재감.
나는 여전히 그 그림을 선명히 떠올릴 수 있다. 또한 내게는 눈물이 날 정도로 가슴이 벅차던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였을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지루함과 뻔함. 나에게 그만큼 잘 어울리는 수식어가 어디 있을까. 사람들 앞에 내세울 수 없는 점까지도 닮았다. 아직 최기준은 거기까지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았지만 나는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내가 형을 녹슬게 한다. 나의 지루한 평화가 형을 좀 먹고 있다. 내가, 형의 세계를 갉아 부스러뜨리고 있다.
정말로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나였다. 어쩌면 형은 너무도 특별한 탓에 뻔하디뻔한 내가 특별해 보일는지도 모른다. 때문에 자신의 아름다운 부분을 미처 돌아보지 못하고, 어딘가 함몰되어 버린 나의 불완전함을 별다른 것으로 생각하고서 그림에 녹여 버린 것은 아닐까.
머뭇거리는 걸음을 옮겨 문 앞에 섰다. 두 뼘쯤 열려 있는 문틈으로 반듯한 형의 등이 보였다. 형은 네 개의 다리가 교차로 가로질러진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이젤을 마주 보고 있었다. 제법 분명한 경계선을 나타내는 연필 선 위로 먹빛이 얇게 발려 있었다.
“형. 언제부터 일어났어요. 새벽부터 없는 거 같던데.”
문고리를 쥐고서 차마 밀고 들어가지 못한 채 발가락을 문지방에 두드렸다. 어깨를 흠칫 떤 형이 망설임 없이 일어나 다가왔다. 내 어깨에 손을 올려 방 밖으로 밀어 낸 형은 뒤로 손을 돌려 문을 닫았다. 형의 몸에서 새벽의 한기가 가시지 않은 마른 냄새가 났다.
“응, 잠이 일찍 깼어.”
“더 자지. 좀 더 잘래요?”
말을 꺼내면서 고개를 빼 들고 슬쩍 형의 어깨너머로 닫힌 문을 봤다. 형은 내가 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눈을 일자로 접으며 난감한 듯 웃었다.
“별아.”
“응. 왜요?”
두 손이 나를 향해 뻗어 와 얼굴을 감싸 쥘 듯하다가 멀어졌다. 형은 물감이 묻은 손을 어색하게 허공에 들고 있다가 두 손을 겹쳐 쥐고 안으로 손가락을 말았다. 알싸한 향기가 코끝에 희미하게 감돌았다.
“당분간은 작업실 들어오지 마.”
좀 씻어야겠다.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형이 먼저 돌아서서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반사적으로 형을 따라가려다 멈춰서고 말았다. 너는 괜찮아. 늘 나를 형의 세계로 들여놓던 허락의 말이 사라져 버렸다.
형은 녹슬지도, 부서지지도 않아.
역시 형은 현명하다. 눅눅하게 들러붙는 곰팡이에는 거리를 두고 귀한 것을 떨어뜨려 두어야 하는 법.
고맙게도 형은 곰팡이가 쓴 것을 모조리 버리는 대신 다른 칸에 넣어 두는 길을 택했다. 아직 그 곁에 머물 수 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내게는 과분할 정도로 반짝이는 아름다운 일상이다.
***
일주일쯤, 형은 작업실에 틀어박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방금 씻고 나온 몸에서도 물감 냄새가 났고 어딘가 한구석엔 닦이지 않은 물감이 묻어 있었다. 식사 때와 잠을 잘 때에만 형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눈 밑이 검어진 초췌한 얼굴로 기계적으로 밥을 씹으며 형은 멍하니 반찬 그릇의 귀퉁이만 보았다. 내가 형, 하고 부르면 한참을 눈동자를 떨며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어 스치듯이 스윽, 훑어보고는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형, 오늘 뭔가 허전하네. 물감이 닦여서 그런가.”
혼자 떠드는 일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서울을 떠나 엄마의 고향집에서 머무는 동안 나는 늘 액자 속의 엄마와 얘기를 했다. 액자 속에서 그저 벙긋이 웃기만 해도 하루 종일 떠들 수 있었는데 눈앞에 형을 두고 말이 궁할 리가 없다. 형이 귀찮아할까 조심스러운 것뿐이지.
형은 내 얘기를 듣고 반사적으로 자신의 몸을 곁눈질로 살폈다.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고는 다시 수저를 움직였다.
“맞다, 시계. 형, 유난히 손목이 허전하다 했어. 나 형이 시계 안 찬 거 처음 봐요.”
형의 얼굴이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형은 뻣뻣한 눈을 하고 수저를 내려놓은 손으로 급히 왼쪽 손목을 가렸다.
“넌 마저 밥 먹어.”
“어어, 왜요? 형 아직 반도 안 먹었잖아.”
“다 먹었어.”
테이블 아래로 급히 숨기는 형의 왼손이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형은 급한 걸음으로 욕실에 들어가 달그락거리는 소릴 내더니, 그대로 날 보지도 않은 채 다시 작업실로 들어가 버렸다. 형이 다시 얼굴을 내민 건 저녁이 되어 최기준이 벨을 눌러 대기 시작했을 때였다.
“왜 또 왔대, 저 인간은.”
투덜거리면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나보다도 먼저 형이 작업실에서 나와 현관문을 열었다. 거의 뛰다시피 하는 빠른 걸음이었다.
“이야, 일주일 사이 아주 말쑥해지셨습니다.”
볼이 홀쭉해지고 눈이 쑥 들어간 형의 얼굴을 보고 최기준은 활짝 웃었다. 심지어는 땀으로 축축한 손으로 쩍쩍 소리가 나도록 박수까지 치고는, 자신이 매우 호탕한 사내라도 된 듯한 얼굴로 형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자, 보러 갑시다.”
“예.”
찡그린 눈썹과 굳은 뺨이 보이는데도 형은 그를 떨어뜨려 놓지 않았다. 둘은 그대로 작업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반은 호기심, 반은 걱정으로 핑계 댈 것을 찾아 헤매다가 컵에 오렌지 주스를 따라 쟁반에 받쳐 들고 문 앞에서 서성였다.
안에서 속닥거리는 것 같은데 소리가 뭉개져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들어갈 때의 요란한 웃음소리와는 달리 작업실 안에서는 어떤 큰 소리도 나지 않고 내내 조용했다. 입이 마르고 초조했다.
최기준 몫으로 따라 놓은 주스를 신경질적으로 들어 홀짝홀짝 마시는데 엇흠,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럼 다음을 기대하도록 합시다. 과장된 뉘앙스의 최기준의 목소리였다. 나는 급히 컵 입구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닦고 문에서 두 걸음 물러섰다.
“다음 스케줄은 언제로 잡을까요?”
“다음……. 아니, 2주 뒤로.”
“뭐라도 방법이 있는 모양입니다?”
“재료를 구하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그거 참 기대됩니다.”
최기준은 내가 마셔 손가락 두 마디쯤 줄어든 컵을 흘끗 보더니 그걸 집어 들어 느리고 오래 삼켰다. 그저 주스를 마시는 것뿐인데 보는 것만으로도 왜 속이 매슥거리는지 모를 일이다. 그 옆에서 형은 묘한 얼굴을 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늘어뜨린 손으로 왼손의 시곗줄을 만지작거리는 것이 보였다.
최기준이 돌아간 뒤 형은 베란다로 나가 오랫동안 통화를 했다. 그러곤 오랜만에 나를 똑바로 마주 보고 끌어안아 주었다.
“별아. 우리 오랜만에 맛있는 거 먹으러 나갈까?”
“피곤할 텐데 잠이라도 더 자지 않고서.”
“갔다 와서 잘 거야.”
눈가를 손등으로 문지르는 형의 얼굴은 너무나 지쳐 보였다. 피곤한데도 구태여 밖으로 나가려는 건 나를 위한 배려이기도 할 테고, 형에게도 좋은 기분 전환이 되겠다 싶었다. 얼굴이 줄줄 흘린 걱정스런 기색을 자연스럽게 주워 담기가 어려워 내 딴엔 장난스럽게 꺼낸다는 말이 생각보다 너무 능글거렸다.
“와서 잠만 잘 건 아니죠? 우리 일주일 만인데.”
마치 젊은 여직원 궁둥이를 보면서 ‘미스 김은 남자 친구랑 외박도 하나?’ 따윌 묻는 아저씨 같은 말투였다.
말을 꺼내 놓고 억지로 잡아 벌린 미소가 부끄러워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뒷걸음질 치는데 형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하하, 웃음소리가 들리기에 슬쩍 눈을 떠 보니 형이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린 미묘한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뭘로 만들었을까.”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눈만 끔뻑이는데 형의 손이 나를 당겨 품에 안았다. 형의 가슴팍에선 마르지 않은 물감 냄새가 났다.
“무엇으로 만들면 네가 될까.”
형의 손바닥이 내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조각을 했으면 좋았을걸. 아니, 연금술사라도 되어야 했을까. 작은 중얼거림이 귓가에 떨어졌다.
“……형?”
“아주 조금 이상한 상상을 해 봤어. 그건 말 그대로 너무 이상한 일이어서 썩 석연치가 않더라.”
“무슨 상상이요?”
형은 콧등을 내 머리칼에 문지르며 낮게 웃다가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글쎄. 잊어버렸어.”
툭. 손으로 어깨를 가볍게 한번 두드리고 형은 나를 품에서 떼어 놓았다.
“슬슬 나갈 준비하자. 더 늑장 부렸다가는 아무 데도 갈 곳이 없겠어.”
씻을 곳 없이 말끔한데도 형은 다시 샤워를 하겠다며 욕실로 향했다. 그사이 갈아입을 옷을 챙겨야겠다 싶어 거실을 가로지르는데, 하얀 무언가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작업실 문틈에 끼어 있는 작은 종잇조각이었다.
나는 얼른 뒤를 살폈다. 욕실 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고 작업실 문고리는 쉽게 돌아갔다. 문틈에 끼어 있던 건 구겨진 채로 바닥에 버려진 스케치북 페이지의 일부였다. 그것을 주워 들었다.
“별아, 준비하고 있어?”
“네, 네에! 네!”
욕실 안에서 들어온 형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종이를 다시 구겨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나는 발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화다닥 움직여 서랍장에서 속옷과 옷을 꺼내었다. 구겨 버린 종이는 부피를 줄일 수 있도록 대강 접어 유일한 짐으로 가져왔던 배낭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
“좀 더 좋은 곳에 가지 않고서.”
“다 마감 시간이라는데 어쩔 수 없지, 뭐. 난 여기도 좋은데. 여기도 써는 건 맞잖아요?”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들이 우리를 둘러쌌다. 형은 경직된 동작으로 낯설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양손에 접시와 술병을 옮기던 직원과 부딪칠 뻔한 것을 겨우 피하고서 형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도 우리가 출발한 시간은 9시가 다 되었다. 거기에 갑자기 차가 움직이질 않아 콜택시 회사에 전화를 걸었는데 그쪽도 연락이 닿질 않았다. 큰길이 나올 때쯤 형과 나는 가볍게 챙겨 입었던 외투를 벗고 손등으로 땀을 훔쳤다.
당연하게도 시간이 늦어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형은 못내 아쉬운 얼굴로 아는 곳들에 연락을 해 보겠다고 했다. 나는 그런 형을 잡아끌어 일단 불빛이 번쩍이는 곳들로 데려갔다. 막상 데려오긴 했는데 나도 마땅히 보이는 것이 없어 큼지막한 간판만 보고 무작정 들어갔다.
돈가스, 함박. 정직한 글자체로 적힌 간판만큼이나 그 집의 메뉴는 간단했다. 낮에는 식사로 돈가스와 함박 스테이크를 팔고, 저녁이 되면 돈가스와 튀김류를 바탕으로 술을 함께 파는 곳이었다.
형은 나를 빤히 보다가 가게를 둘러보고 한숨을 내쉬고, 의심 어린 눈으로 옆 테이블의 음식을 보다가 다시 나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못내 석연치 않아 하는 형을 두고 돈가스 두 접시와 맥주 두 잔을 주문했다.
“나갈래? 형이 집에서 돈가스 해 줄게.”
“벌써 주문했어요. 앉아요, 앉아.”
보기 드물게도 초조한 얼굴로 계속 시계를 보거나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내 열어 보곤 하던 형은 마침내 나온 돈가스의 모습에 입을 벌렸다. 손바닥 두 개를 합친 크기의 돈가스와 케첩과 마요네즈가 듬뿍 뿌려진 양배추 샐러드가 큰 접시에 담겨 나왔다. 그 옆으로 생맥주 잔이 놓였다.
맥주잔 손잡이에 손가락을 걸고 머뭇거리는 형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키득키득 웃음이 나려 했다. 형을 이런 공간에 넣어 두면 이렇게 서툰 모습이 나오는구나.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귀여운 탓에 웃음이 나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나는 제일 옆에 나란히 놓인 포크, 나이프를 두고 숟가락을 들었다. 숟가락을 옆으로 세워 옆의 날을 이용해 돈가스를 꾹꾹 눌러 잘라 냈다. 오래 튀겼는지 돈가스는 딱딱하고 질겼다. 숟가락으로 눌러 자르는데 손등에 핏줄이 섰다.
“뭐 해?”
“아, 칼질 서툴러서 그냥 이렇게 먹으려고요.”
뭉툭하고 무딘 돈가스용 나이프도 긴장을 하고 들어야 하니 차라리 숟가락을 쓰는 게 마음이 편했다. 간만에 형과 함께 하는 외식에서 긴장하느라 깨작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형은 손이 뻘겋게 되도록 낑낑거리는 내 모습을 빤히 보다가 접시를 뺏어 자기 앞에 두었다. 그러곤 날도 잘 들지 않는 돈가스용 나이프로 능숙하게 돈가스를 잘랐다. 반듯하게 잘린 것을 다시 내 자리에 놓아 주고 자신의 몫을 자르기 시작하면서 형이 턱짓으로 먹으라고 접시를 가리켰다.
“나 먹으라고 잘라 준 거예요?”
“그럼. 어서 먹어. 시장할 텐데.”
“형도 다 자르면 같이 먹을래요.”
“그럴래?”
형은 바람을 흘리는 웃음소릴 내며 나이프를 잠시 내려놓고 팔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그사이 포크로 내 접시에 있는 돈가스를 콕 찍어 형의 입에 들이밀었다.
“아, 해요.”
입술에 소스가 묻도록 꾹꾹 눌렀다. 오랜만의 외출이라 그런지 나는 많이 들떴다. 형은 그런 나를 나무라거나 불편해하지 않고 입을 벌려 얌전히 돈가스를 받아먹었다.
“괜찮네. 너도 얼른 먹어.”
포크로 내 접시 위의 양배추 샐러드를 슥슥 섞어 주며 소스가 묻어 번들거리는 입술로 형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뽀뽀하고 싶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의자 다리에 다리를 감으며 배배 꼬는데 두 테이블쯤 떨어진 자리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정확히 우리를 향해 박혀 왔다.
“야. 쟤네 그거 아니냐. 그거.”
“맞는데, 씨발. 저런 새끼가 이런 동네엔 왜 오냐.”
벽에 걸린 시계를 보는 척 자연스럽게 돌아보니 한 명은 불긋한 얼굴로 휴대폰을 들어 흔들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술잔을 입에 털어 넣으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소주병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보지 마, 별아.”
아주 낮게 형이 속삭였다.
“괜찮아. 너는 등을 돌리고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뒤에 후드 눌러쓰고. 밥은 다음에, 다음에 형이 근사한 걸로 사 줄게.”
형은 태연한 움직임으로 자리를 정리하고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우연이라도 다른 곳을 쳐다보지는 않았다.
“별거 아냐. 이대로 가면 아무 일 없어.”
자, 가자. 형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가게의 모든 소음이 한순간에 사라지도록 요란한 마찰음이 났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얼굴이 불긋한 남자가 테이블 위를 손으로 쓸어 소주병을 바닥으로 떨어뜨려 모조리 깨뜨렸다. 그는 얼굴 근육을 이리저리 비틀며 씩씩대다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일어났다.
“시바, 야! 너, 너 그거 맞지.”
“가자.”
형은 코앞에 디밀어지는 삿대질에도 아랑곳 않고 내 손을 쥐었다. 점차 가게 내의 시선들이 우리 쪽으로 몰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수군대는 것이 보였다.
누군데? 왜 그 있잖아. 저번에 그 가수랑 찌라시 돌았던. 아, 남자 배우 누드모델로 쓴다는 핑계로 따먹는다던? 그런 찌라시도 있었나? 저번에 경매 팔린 건 몇백억이라며. 그 돈 벌어서 이런 데 왜 오냐. 야, 뻔하지. 도박 아니면 밤나들이지. 근데 우리나라에도 호모가 갈 만한 호빠가 있냐? 씨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더럽게.
나를 달래는 것처럼 형의 손이 부드럽게 내 손등을 어루만졌다. 멀찍이서 찰칵, 카메라 구동음이 들렸다. 형은 얼굴을 가리거나 어깨를 움츠리지 않고 바로 선 자세 그대로 돌아섰다.
“집에 가서 마저 먹자.”
“응, 가요.”
얼굴이 화끈거리고 어쩔 줄을 몰라 후드를 뒤집어쓴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형은 그런 나를 대각선 뒤로 세우고 팔로 머리 뒤를 감쌌다. 앞으로 두른 형의 손이 내 시야를 가려 앞이 잘 안 보였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세 걸음이나 걸었을까. 뒤에서 우악스럽게 붙잡는 손길에 나는 뒤로 벌렁 넘어질 뻔했다. 중심을 못 잡고 흔들리는 것을 형이 당겨 내 얼굴을 바로 품에 숨겼다. 놀란 탓에 벌렁거리는 심장으로 씨근씨근 숨을 내쉬면서 어둑한 형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넌 좋겠다, 개새야. 너 호모라는 것도 설정이지? 그치? 아니면, 돈이 원래부터 썩어 나게 많아서 뒷돈 뿌린 거 아냐? 네가 천재라고? 나도 그림 좀 그려 봐서 아는데 너는 쓰레기야. 네가 무슨 그림을 그려. 그게 그림이냐? 낙서지.”
흥분으로 어눌해진 발음을 하고도 남자는 또박또박 말하려 애썼다. 억눌린 설움 같은 것이 줄줄 흘러내렸다. 목소리만 듣고도 나는 그 기분을 어설프게 이해했다. 그냥 어디에든 하소연할 곳이 필요했던 것뿐, 그 대상이 형이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짊어진 나 스스로에 대한 열등감으로 나는 남자를 이해하는 동시에, 알지도 못하면서 형을 싸잡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그의 말을 참기가 어려웠다. 형의 품을 밀치고 나가 무슨 말이라도 쏘아붙이려는데 형의 두 팔이 더 단단히 나를 품었다.
“알아.”
“뭐?”
“안다고. 나는 내 입으로 천재라는 얘길 한 적이 없어. 댁들이 갖다 붙인 거지.”
“씨바, 개소리하지 마! 말장난하지 말라고!”
“장난 아니야. 나는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어. 단 한 번도. 거짓말 같아?”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말들이 날카롭다. 어조는 평이하고 말에는 조금도 험한 기색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형의 말은 날카롭게 가슴을 죄여 왔다.
“멋대로 쥐여 주고서 이제 와서 다들 내놓으라는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네. 왜, 너도 뜯어 가 보지 그래. 어떻게 뜯겨 줄까. 어떻게 뜯겨 줘야 만족할래.”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형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소리가 났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살다 살다 더러워서……. 씨팔 새끼야, 네가 줘도 안 가져. 너 같은 새끼들은 지 잘난 맛에 살다가 언젠가 콱 고꾸라지게 돼 있어. 면역도 없이 빌빌 약한 새끼들이라 그러다 콱 지 스스로 손목이나 찌르고 목이나 매달고 쇼를 하겠지.”
카악, 퉤. 가다가 콱 뒈져라.
형의 몸이 흠칫 굳었다. 고개를 빼 들어 눈을 올려 뜨니 형이 싸늘한 얼굴로 뺨에 묻은 침을 손으로 털어 내고 있었다.
“형, 석이 형.”
“신경 쓰지 마. 너한테 하는 말들 아니니까.”
형은 어느새 뒤로 다가온 주인이 내민 휴지로 뺨을 닦고 이어 내밀어진 종이에 씁쓸한 얼굴로 사인을 했다.
“소란 피워 미안합니다. 지금 식사하시는 분들 것까지 같이 계산해 주세요.”
어머, 안 그러셔도 되는데. 주인은 앞치마에 손을 서둘러 닦고 형에게서 카드를 받아 계산을 했다. 카메라 울리는 소리의 간격이 더 짧아지고 있었다. 가게를 나서기가 무섭게 형의 전화가 울려대기 시작했다. 부재중으로 넘어가는 수많은 전화를 보며 형은 마른세수를 했다. 집에서 출발하기 전보다 곱절은 피곤해 보였다.
“예, 여보세요. 벌써 소식이 갔습니까. 아뇨, 신경 크게 안 쓰셔도 됩니다. 특별히 문제가 될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쏟아지는 전화 중에 하나를 골라 받은 형이 말을 하다가 말고 후드로 얼굴을 둘둘 감은 나를 흘끔 보았다.
“일행은 말끔히 지워 주세요. 예, 노이즈고 뭐고 그런 쪽에 얽힐 일 없는 앱니다. 예.”
전화 통화를 하면서 큰길로 서둘러 빠져나간 우리는 뭐에 쫓기듯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동안 우리는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형은 뭔가 말하고 싶은 얼굴로 내 쪽을 계속 힐끔거렸는데, 내가 형을 볼 수가 없었다.
형에게 쏟아진 모욕적인 언사들에 나는 반박할 자격도, 대신 화를 낼 처지도 못 된다. 그런 소릴 듣게 만든 장본인이 나니까.
형의 불안한 얼굴과 두리번거리던 행동이 주변을 의식해서라는 걸 몰랐다. 집에만 박혀 있던 탓에 현실 감각이 완전히 물렁해져 형이 아무렇게나 돌아다닐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잊었고, 나와는 다른 세계에 머물고 있음을 잊고 지냈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런 이들을 견뎌 내기 위해서 형은 얼마나 지겹도록 같은 상황을 반복했을까.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라 안전과 편안함을 위해 선택한 형의 배려들을 내가 깡그리 무시해 버린 탓이었다. 혼자 우쭐해서 앞뒤 없이 나대고 말았다.
“……별아, 미안하다. 나 때문에 먹지도 못하고.”
현관문을 열다가 말고 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아니에요. 형.”
말이 콱 막혔다. 내가 무슨 염치로 형에게 사과를 들어. 형은 정말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자꾸 형이 사과를 하는지 모르겠다. 형은 그저 나 같은 거랑 어울린 죄밖에 없는데. 형에게 죄가 있다면 그건 곁에 있는 나였다. 염치도 분수도 모르고 귀한 것을 탐하는 죄의 덩어리.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형은 곧장 욕실로 가서 세수를 했다. 뺨에 들러붙었던 침이 깊이 스며들기라도 한 것처럼 뺨을 긁어내듯 씻어 수건으로 닦아 낸 뒤에도 형의 뺨엔 손톱자국이 붉게 부어올랐다.
“별아, 얘기 좀 하자.”
“네.”
나는 집 안으로 완전히 들어서지 못하고 현관에서 신발만 간신히 벗은 채로 벽에 등을 붙이고 구부정하게 섰다. 수건을 어깨에 걸쳐 놓은 형이 곁으로 다가와 손을 잡았다.
“형이 호텔 구해 줄 테니까, 당분간 그쪽에서 자.”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형의 얼굴은 어딘가 흔들리고 있었다. 시선이 자꾸 나를 마주 보지 못하고 옆으로 돌았다. 형은 무언가를 참아 내는 것처럼 호흡을 크게 했다. 나 때문이다. 분명 내가 눈치도 못 채고 야금야금 형을 지치게 해서. 아까 일로 형에게 피해를 끼쳐서…….
“형, 아까 그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억지로 형 데리고 다녀서? 미안해요. 안 그럴게요. 저 밖에 안 나갈게요. 그냥 방 밖으로 안 나갈게요. 얌전히 있을게요, 네?”
“그런 거 아니야.”
형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내 눈을 바로 보지 못했다. 한참이나 턱 끝에 매달려 있던 시선은 내가 뒷걸음질을 친 뒤에야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형의 손을 놓고 벽에 등을 붙인 채로 물러섰다. 현관과는 반대 방향으로 발을 질질 끌었다.
“방해 안 할게요. 정말이에요. 그냥 구석에서 숨만 쉬고 있을게요. 절대로 형 방해 안 해요. 이제 밥 먹을 때 억지로 말 시키지도 않을게요. 아니, 형 밥 먹을 땐 밖으로 안 나올게요. 그냥 얌전히 있기만 할 테니까.”
“별아.”
“진짜예요. 정말 다른 거 해 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형이 부끄럽지 않도록 제대로 숨어 있을 테니까…….”
“별아, 진정해. 내 얘길 들어.”
“그렇지만, 그렇지만 형이 나한테 먼저 가지 말라고 해 놓고서…….”
“그래, 그랬어. 별아, 그게 아니야.”
형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붙잡아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나를 가둔 손바닥의 단호함과는 달리 형의 눈동자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내가 형을 붙잡아 놓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불안으로 떨리는 눈이 힘겹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몇 시간만, 잠을 잘 시간에만, 그때만 잠시 비워 주면 돼.”
내 얼굴을 감싼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형은 한마디를 뱉어 낼 때마다 엄지로 내 뺨을 쓸어내렸다. 내 위치를 확인하는 것처럼 손가락 끝을 구부려 내 윤곽을 더듬고, 말끝마다 시선으로 내 얼굴 구석구석을 살피는 탓에 얘기는 몹시 더뎠다.
“새 작업을 시작할 거야.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 그뿐이야.”
“……정말요?”
“응, 정말.”
“아까 내가 실수한 것 때문에 그런 것 아니에요?”
형은 입술 끝만 보일 듯 말 듯 휘어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계속 얘기하려고 했어. 오늘 식사라도 하면서 차분히 얘기하려고 했는데.”
나를 빤히 바라보던 형의 얼굴이 점점 다가왔다. 입술이 포개어지고 가는 숨을 뱉어 내며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형의 온기가 나를 휘감았다. 몇 번이고 내 호흡을 가늠하듯 입을 맞추었다. 숨이 가빠 어깨를 슬쩍 밀쳐 낸 후에야 형은 입술을 떼어 냈다.
“그러니까 아무 데도 가지 마.”
그 얼마나 달콤한 어리광인지. 형은 내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어 숨을 고르고 두 팔로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얇은 티셔츠 위로 숨결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형의 뒷머리와 등을 쓰다듬으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가지 말라는 말의 의미도, 애절할 만큼 긴 입맞춤의 의미도 묻고 싶었다. 형에게 있어 나는 무엇인지, 곤란하게만 하고 무엇 하나 돕지 못하는 비루한 나를 어떻게 견뎌 내는지 그 입으로 듣고 싶어졌다.
“형, 형은 나를…….”
“응.”
“……아니에요.”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그냥 아는 애, 가끔 섹스도 하는 애. 한없이 다정했던 몸짓 뒤에도 그런 소릴 들었다. 지금의 나는 형에게 어떤 존재로 머물러 있나. 어쩌면, 신경조차 쓰이지 않을 정도로 미미한 존재일지도 몰라. 또는 애완동물을 기르는 심정일지도 모르지.
잡생각에 휩싸여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대는데 형이 나지막이 ‘별아.’ 하고 불렀다.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던 형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가지…… 않을 거지?”
“응, 안 가요. 아무 데도 가지 않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는 한숨을 뽑아내고 형은 비로소 굳어 있던 얼굴을 느슨하게 풀었다.
“조금만, 조금만 참으면 돼. 금방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형은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리며 얼굴을 내 품에 문질렀다. 그 말은 스스로에게 건네는 다짐에 가까워 보였다. 괜찮을 거야. 아무것도 버리지 않고서도, 괜찮을 수 있어. 그 중얼거림이 완전히 사그라들 때까지 형은 나를 끌어안은 채로 놓아 주지 않았다.
두근, 두근, 눈치 없이 급하게 뛰는 심장 소리조차 가라앉을 만큼 꽤 오랜 시간 우리는 서로를 놓지 못했다.
***
더는 멍청하게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의 게으름은 어느 정도 형을 핑계로 대고 있었다. 형이 쉬고 있으니까, 곁에 있어 달라고 했으니까. 얌전히 호텔 방에 틀어박혀 편히 잠을 자는 건 염치가 없는 걸 떠나 그저 형이 주는 원조를 즐기는 꼴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것만큼은 싫었다.
“형, 저 아르바이트 할래요.”
“갑자기 왜. 용돈 필요해?”
당장이라도 지갑을 꺼낼 것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는 형을 간신히 말렸다. 형은 정말 모르겠다는 눈으로 나를 빤히 보았다. 그 눈에는 가벼운 의심조차 담겨 있었다.
“밤새 일할 거면 어차피 형도 아침에 잠들 거 아니에요. 나도 그때 같이 잘래. 그래서 야간 알바 구했어요. 11시부터 7시까지 하는 걸로.”
“위험해. 안 돼.”
“형은 가끔 잊어버리는 모양인데, 나 군대도 갔다 왔어요. 어디 가서 해코지는 안 당해요.”
“퍽이나.”
전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하고 눈썹을 찡그리면서 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이전에 일했던 카페의 사장이나 성철이 형을 떠올리는 거겠지. 거기에 대해선 나도 할 말이 있다. 사회생활이 뭐 그렇게 호락호락한가. 성질 죽이면서 참고 참는 거지. 그 말을 했다가는 형이 더욱 불안한 얼굴을 할 게 뻔해서 입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위험한 거 아니에요. 시간 때우는 정도의 편의점 알바예요.”
“밤에는 취객이 많잖아.”
“번화가 근처 아니에요.”
“그럼 외진 곳이라는 건데, 위험해.”
“아니에요. 주택가 근처예요.”
“주택가에서도 나쁜 일은 일어나.”
“방범도 잘되어 있어요. 비상벨도 있고, 전화기도 달려 있고.”
“그래도 위험해.”
뚱하니 입술을 내밀면서 형이 팔짱을 꼈다. 단단히 맞물린 팔 모양을 보니 여간 단호히 마음을 먹은 게 아니었다.
“위험하기로 따지면 호텔도 만만치 않을 텐데.”
슬그머니 형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서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형은 눈썹을 살짝 까딱해 보였을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치사하게.
“맨날 호텔이나 드나드는 애로 알고 누가 찝쩍거리면 어떡해요. 나이 많은 누님이나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그럴 일이 실제로 벌어질 거라곤 요만큼도 생각하지 않지만, 평소 형이 나를 대하는 태도를 생각하면 그 편이 납득하기 쉬울 것 같았다. 과연, 형은 움찔 어깨를 떨더니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탕을 주면 졸졸졸 나쁜 아저씨를 따라가 버리는 꼬마 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보다가 눈을 내리떴다.
“……그 사람들한테 갈 거야?”
맙소사, 역효과였다. 형은 팔짱을 풀어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상황이었다. 당신은 배신자야! 어제 보았던 드라마의 앙칼진 목소리가 덧씌워지는 착각에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형, 진짜 안 되겠네. 내가 형 앞이라서 꼬리 말고 얌전히 내숭 떠는 거지, 내가 얼마나 와일드한 남자인지 한번 보여 줘 봐요? 어?”
주먹을 말아 쥐고 허공에 휘휘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형은 못내 불안한 얼굴을 하고 허공으로 뻗는 내 손목을 간단히 잡아 저지했다.
“같이 가자. 내 눈으로 봐야겠어.”
기어이 편의점으로 찾아가 사장 얼굴을 확인하고, 그 근처를 세 바퀴나 돌아 위치를 확인한 후에야 형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아요. 나 갈 곳도 없는 거 알잖아요. 형밖에 없어.”
집으로 돌아와 신발을 벗기도 전에 형의 품으로 파고들어 꼬옥 끌어안았다.
“응, 다행이다…….”
나를 마주 안았던 형이 한참의 머뭇거림 끝에 간신히 물었다. 어머니는?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가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멀리 있어서…… 괜찮아요.”
“다행……이다.”
형은 쑥스러워하는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먼저 슬리퍼를 꿰어 신은 형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턱 끝까지 차올랐던 그리움이 단숨에 무너져 흐트러져 버렸다. 나는 이기적이다. 내 그리움을 모두 형에게 떠밀어 버리고선 사랑에 매달리는 순진한 흉내를 내고 있었다. 사실은 그 무엇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형의 곁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것을 유기해도 되는 것처럼 구는 것이다. 그건 어디로 보아도 영원을 꿈꾸는 마음은 아니었다.
비겁하게도 나는 형에게 달아나 버렸던 그때의 간격을 완전히 좁히지 못하고 한 발자국 뒤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
우리는 방학이 일주일도 남지 않은 학생처럼 집 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알바를 시작하기까지 일주일 정도 여유가 있어 미리부터 자리를 피해 줘야 할지 물었더니 괜찮다고 했다. 그럼 나도 그때부터 시작하지. 형은 틈만 나면 나를 끌어안고 내 어딘가에 코를 묻고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딱 하루, 형이 잠시 외출을 다녀온 일을 제외하고는 일주일 동안 단 한 발자국도 집 밖에 나서지 않았다.
“어디 다녀와요?”
말린 과일을 우물거리며 TV를 보고 있을 때 형이 외출에서 돌아왔다. 형은 출장 다녀온 아버지의 모양새로 양손 가득 군것질거리를 들고 있었다. 하루 종일 집에 틀어박혀 있으니 때가 되도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아 집에 있는 군것질들만 축낸 탓이었다.
형 한 입, 나 한 입, 하고 나면 과자 한 봉지도 금방 텅 비었다. 그 마저도 사실 과자 하나 입에 넣고 뒷맛이 없어질 때까지 형과 장난을 치느라 느려진 거였지만.
“볼일이 좀 있어서.”
그러고 보니 평소엔 들고 다니지 않던 작은 가방이 형 옆구리에 끼워져 있었다. 형은 바닥에 묵직한 비닐 봉투를 내려 두고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는지 옷장 문이 달칵이는 소리가 나고도 한참을 부스럭거렸다.
형이 가져온 봉투에 손을 넣고 달달해진 입 안을 짭짤하게 바꿔 줄 과자를 찾아 뒤적거리는데 웅웅, 휴대폰 진동 소리가 들렸다. 소파 쿠션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을 간신히 찾아내어 받았다. 하늬였다.
“오랜만.”
-응, 오랜만. 잘 지내? 아무 일 없지? 아직 장석이랑 있는 거야?
“좀 천천히 물어. 뭐가 그리 급해.”
전화를 받기가 무섭게 하늬는 빠른 속도로 말을 쏟아 냈다.
-장석은. 장석, 옆에 있어?
“으응, 아니.”
-어디 있는데.
“방에 있어, 방에.”
-아……. 그래. 쓸데없이 돌아다니거나 그러는 거 아니지?
“하루 종일 집에 있어. 새로 작업한다고 준비하느라 정신없을 거야.”
-그래, 그럼 됐어.
“무슨 일인데 그래?”
-아냐, 아니야. 내가 착각했나 봐. 아닌 거 같아. 그래, 아니겠지. 다음에 보자. 이만 끊는다.
대답할 틈도 없이 하늬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뒤쪽이 내내 소란스러웠던 것을 생각하면 일하던 도중에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었다. 다급하고 초조했던 하늬의 목소리가 못내 찝찝하게 귓가에 남았다. 휴대폰을 소파에 던져 놓고 설탕 가루가 남은 입술을 할짝이는데 형이 방에서 나왔다.
“형, 방금 하늬한테 전화 왔었는데요.”
형은 들어갈 때와는 다른 다소 상기된 얼굴을 하고 내게 다가왔다. 평소보다 배는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낮은 목 울림을 내며 덥석 나를 품에 안았다.
“별아, 아무 말 하지 마.”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없어.”
우울한 말투와는 달리 형은 자꾸만 웃었다.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웃으며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자국이 붉게 남을 때까지 입술로 오래 빨아 당겼다.
“아무 일도 없었잖아. 그렇지?”
키득키득 웃던 형은 별다른 말도 없이 내 옷을 들추고 맨살에 코끝을 문질렀다.
“아무렇지도 않은걸. 응, 아무것도 아니었어.”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형을 따라 어설프게 웃다가 이내 웃음을 거두었다. 눈썹을 찡그린 기묘한 얼굴로 웃던 형의 눈가가 빨갛게 익었다. 형은 내 옷자락을 쥐어 얼굴을 묻은 채로 어깨를 들썩였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소리가 났다. 다만, 형의 얼굴이 닿은 옷은 미지근한 액체로 점점 더 축축해졌다. 형은 얼마 전부터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는 괜찮다는 말을 쉼 없이 내뱉으며 웃다가 울기를 반복했다.
***
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형은 작업에 몰두했다.
아르바이트는 무난했다. 때때로 친절한 손님이 오는가 하면 지루함에 하품이 날 때쯤에 진상이 한둘 다녀갔다. 한적한 주택가 편의점이라 전혀 할 일이 없을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혼자서 모자를 푹 뒤집어쓴 채로 술을 골라가는 손님이나 이미 한잔 걸치고 온 듯 붉어진 얼굴을 한 일행 두세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많아 보이는 안주를 부둥켜안고 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저들이 술에 취해 잘못 보았다는 것처럼 눈을 끔뻑이거나 손가락으로 눈을 문지르며, 내 손가락과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담아 드려요?”
“네? 네에.”
여자 둘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들은 딱 보아도 둘이서 자취를 하는 가까운 친구 또는 자매로 보였는데 새벽마다 술을 잔뜩 사 들고 가는 일이 많았다. 번갈아 가면서 오기도 하고 둘이 동시에 오기도 했다. 그중에 긴 머리를 헐겁게 묶은 여자가 눈을 찡끗거리며 물었다.
“손…… 안 아파요?”
“네, 안 아파요. 하나도.”
옆에 서 있던 회색 후드를 뒤집어쓴 여자가 그녀를 나무라듯 옆구리를 쿡 찔렀다. 둘은 허겁지겁 편의점을 빠져나갔고 한동안은 찾아오지 않았다.
“젊은 사람이 고생을 많이 했구먼.”
어느 날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남성이 불룩 나온 배를 등 뒤로 손을 짚어 버티며 비틀거리는 모양새로 말을 걸어왔다. 그 나이 대 아저씨들의 상상이란 뻔한 거였다.
“허, 나도 말이야. 왕년에 안 해 본 일이 없어. 이따—만 한 톱으로 나무를 자르다가 다리 한 짝을 날릴 뻔했다고, 내가. 어? 그렇게 살았단 말이야. 그땐 그거밖에 없었어.”
“네, 봉투 담아 드려요?”
“시바, 들어 봐.”
“젓가락 넣어 드릴까요?”
사내는 침을 흘릴 것처럼 축축한 발음을 내면서 헛 트림을 끅끅거렸다. 앞뒤로 불안하게 걸음이 흔들릴 때마다 카운터의 작은 사탕 박스와 뒤쪽 초콜릿 매대가 흐트러졌다.
“요새 젊은 놈치고 그런 놈이 어디에 있나.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고……. 따악— 봐도 그래. 어이, 거기. 학교 다닐 때 부모님 말씀 안 듣고 사고나 치고 다녔지? 내가 딱 보면 안다고, 딱.”
“…….”
“그러다 부모님 돌아가시면 후회해. 그러지 말고 지금이라고 공부해, 공부. 형설지공이라고, 어? 알아? 그렇게도 공부를 하면 크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이거야.”
“……부모님 없는데요.”
“뭐? 이씨, 야. 내놔. 시바, 내놓으라고, 봉투. 담배 넣었어?”
“아까 말씀 안 하셨는데요.”
“보면 알잖아, 보면. 딱. 어으, 젊은 놈의 새끼가 패기도 없이 계산대나 찌질 대고 있으면서…….”
“……예, 그러네요. 새벽이라 날이 추워요. 살펴 가세요.”
화가 난 건 잠깐이었다. 그보다는 사내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아버지가 나이를 먹었다면 저런 느낌이었을까. 아니면 더 엉망으로 닳아빠진 쓰레기가 되어 있었을까. 고작 20여 년의 굴곡조차 이렇게 버거운데 그는 그 세월을 무슨 힘으로 버텨 내었을까.
……엄마는 어떻게 버텨 온 걸까.
“아, 형 보고 싶다.”
사내의 등을 밀어 편의점에서 내보내고 밖으로 나와 심호흡을 했다. 아무리 날이 푹해졌다지만 티셔츠 하나만 입은 건 역시 조금 얇았다. 어깨를 손으로 문질렀다.
살을 맞대고 있는 시간이 워낙 길어 요즘 형과 떨어진 채로 보내는 일이 어색하고 허전했다. 무심코 허공에 손을 뻗었다가 형이 그 자리에 없다는 사실에 당황하기 일쑤고, 어디로든 머리와 어깨를 기울이면 형의 단단한 몸이 나를 받쳐 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작 여덟 시간 남짓한 아르바이트를 참지 못하고 한숨을 푹푹 내쉬고 몰래 찍어 놓은 형의 사진들을 보며 침울해지기 일쑤였다.
그리고 아침이 밝아 눈이 아플 정도로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시간이 되면 우리의 밤이 시작된다. 하루를 시작하는 이들 특유의 낮게 가라앉은 고요가 아니라, 일과를 마친 이들의 피곤함이 깔린 얼굴을 하고 밤새 버텨 낸 어둠을 눈 밑에 매달고서 재회를 했다.
“어때요? 오늘은 좀 진전 있었어요?”
“응, 눈 깜빡하니 아침이었어.”
“와, 역시 형이야. 나는 내내 지루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내가 오기 직전 형은 몸에 묻은 물감을 씻어 내고 완전히 녹진해진 몸으로 나를 맞는다. 혹시나 형이 잠들었을까 열쇠로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가면 현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부드럽게 안아 주었다.
다녀왔어? 귓가에 닿는 숨결 같은 웃음소리가 너무 좋아서 밤새 일했다는 사실은 슬그머니 잊어버리고 방금 일어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만다.
“피곤하면 먼저 자지. 눈 밑이 까매요. 요즘 자긴 하는 거죠?”
“그럼. 너랑 같이 자잖아. 가자.”
가자고 말해 놓고서 형은 현관에서 다섯 걸음을 떼기도 전에 나를 벽으로 밀어붙여 입을 맞춰 왔다. 요즘은 늘 이런 식이다. 작업을 하던 흥분감이 남아 있는 탓인지, 밤을 샌 피로로 머리가 어지러운 탓인지. 형은 반쯤은 어딘가 나사가 풀린 얼굴을 하고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거침없이 움직여 나를 벗겨 낸다.
벽에 밀쳐진 채로, 또는 바닥에 엎어진 채로 숨 돌릴 틈도 없이 짐승처럼 섹스를 한 뒤에야 형은 눈을 끔뻑이며 나를 안고 숨을 골랐다. 형은 머리를 몇 번이나 흔들고 손등으로 눈두덩을 눌러 미간을 찌푸리고 나서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 가늘게 호흡했다.
“별아.”
“응.”
“별아.”
“으응.”
“……나 어때?”
잠긴 목소리가 안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을 붙잡아 형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형의 눈동자는 가늘게 떨면서 흔들리다가 어쩔 줄을 모르고 내 눈을 피해 아래로 향했다. 나는 형의 이마에 몇 번이나 키스를 하며 대답했다.
멋져. 아주 멋있어요. 형은 늘 세상에서 제일 근사해.
형은 요만큼도 멋지지 않은 나의 대답에도 환하게 웃어 주었다. 그럼 됐어. 그거면 돼. 가벼운 숨결을 토해 내는 형의 입에선 맡아 본 적 없는 묘한 향이 났다.
날이 갈수록 형과의 섹스는 집요해졌다. 형은 붉게 충혈된 눈을 하고서 허덕이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툭, 줄이 끊어져 버린 인형처럼 기절하듯 잠들어 버리기도 했다. 먼 허공을 향해 내 이름을 부르거나, 내가 한계에 다다라 울며 그만해 달라고 빌 때까지 예민한 곳을 만져 내 모습을 관찰하기도 했다.
이상하다고는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작업을 시작한 탓에 감이 잡히지 않아 헤매는 중일 수도 있고, 내가 모르는 형만의 생각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살을 맞대고 입을 맞춘다고 해서 별세계처럼 멀기 만한 형이 단숨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형이 내게 많은 부분을 허락해 주었다고 해서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번 작업만 해도, 형이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끔 하는 걸 보면 분명 나는 짐작도 못 할 대단한 것을 해내는 중일 거다. 어림짐작으로 그렇게 믿을 뿐이었다.
그러나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가위를 높게 쳐들어 수십 개의 캔버스를 찢어 내는 형을 보았을 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열자마자 들리던 기묘한 소리는 형이 목을 꽉 잠근 채로 울음을 내는 소리였다. 그림은 가위에 구멍이 뚫려 거실 이곳저곳에 던져졌다. 형은 자신의 얼굴이 긁혀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온몸이 땀에 푹 젖을 정도로 격한 움직임으로 그림을 부수고 있었다. 입으로는 들어 보지 못한 음울한 울음소리와 함께 뭔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안 돼. 말려야 해. 머릿속으로 생각했지만 눈 하나 깜빡할 수 없었다. 형의 손에 들린 가위의 날이 번뜩이고 그 날에 닿는 것들이 찢겨 나가는 것을 볼 때마다 숨이 가빴다. 형의 그 손이 나를 해칠 리가 없다는 것쯤 알고 있는데도, 어서 형의 손에서 그것을 떼어 놓고 멈추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도 움직일 수 없었다.
“허……. 흐, 형…….”
몇 번이나 숨을 뱉어 내고 손가락으로 가슴을 쥐어뜯어 입 밖으로 밀어 낸 말은 ‘형.’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목이 꽉 조여들고 심장이 아팠다.
“형.”
눈가가 시큰시큰해지는 것을 참으며 다시 한번, 조금 더 큰 목소리를 쥐어짜 형을 불렀다.
“아.”
우뚝. 형의 손이 멈췄다. 굳어진 손가락이 천천히 벌어지고 가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어진 가위는 막 형이 헤집어 놓은 그림의 구멍 사이로 박혀 들었다.
“왜…….”
형은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가위를 들고 있던 모양새 그대로 굳어 버린 자신의 손을 보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손가락 끝에서부터 천천히 시작된 떨림은, 이내 팔 전체로 번져 눈에 보일 정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 나, 난.”
떨리는 손이 얼굴을 짚었다. 얼굴을 뭉갤 것처럼 문지르던 손이 떨어져 나가고 형의 붉어진 얼굴이 다시 나를 향했다.
“형. 괜찮…….”
말을 맺지 못했다. 멍하니 흐려져 있던 형의 눈동자에 빛이 살아나 나와 마주치는 순간, 다시 꺼멓게 죽어 버렸다. 일순 표정을 잃었던 얼굴이 어찌할 수 없을 만큼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절망의 빛이었다.
“보지…… 마.”
나를 보지 마.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형이 바닥에 웅크려 앉아 몸을 떨었다. 둥글게 몸을 말고서 자신의 손으로 망가뜨린 그림들 사이에 파묻혀 흐느꼈다.
나는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려 형의 몸이 모래성처럼 스르르 무너질 때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보지 마. 한없이 깊은 웅덩이로 끌려가는 듯한 형의 그 절망적인 목소리에 붙들렸다.
무엇이 형을 그토록 절망적으로 만드는 건지 알 수 없어서. 혹시 그 꼬리를 따라가 밟은 끝에 내가 있을까 봐서.
형을 비웃는 듯했던 최기준의 말투. 형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외출에서 사진을 찍혔던 것. 모른 척했지만 며칠이나 문을 두드리던 낯선 사람들의 기척과 그 직후 형이 작업을 시작하겠다고 했던 것. ……형이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던 이유.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결론을 앞에 두고 눈을 돌렸다. 온 집 안에 흩어진 캔버스들을 모아 창고 구석진 자리에 쌓아 두고 천으로 덮었다. 문이 열려 있었지만 작업실 안은 보지 않았다.
문을 닫고 나와 괴로운 얼굴로 잠든 형의 옷을 갈아입히고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베개를 넣어 주고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 옆에 나란히 누워 눈을 감고서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의식적으로 고른 숨을 내쉬었다.
잠에서 깨어난 형은 흐린 눈으로 나를 한참이나 보다가 괴로운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형, 형은 날 보고 착하다고 했었죠. 사실은 전혀 아니에요. 난 형의 옆에 있을 수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어요.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생각하는 것을 멈추라고 한대도 괜찮아요.
“형, 잘 잤어요?”
“별아…….”
“어지간히 피곤했나 봐. 무슨 잠을 거실 바닥에서 자요. 바닥도 찬데.”
“…….”
눈꺼풀이 느리게 닫혔다가 꼭 그만큼의 속도로 열리기를 반복했다. 형의 눈동자가 나를 빤히 보다가 눈꺼풀 아래로 숨었다. 형은 숨을 고르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내가 어제. 아니, 아침에.”
“왜요?”
스르륵 손바닥이 미끄러진 자리에 남은 형의 얼굴은 얼핏 당황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나만 물어볼게.”
“응, 물어봐요.”
머뭇거리던 형의 입술이 다가와 내게 입을 맞췄다. 중학생이나 할 법한 조심스러운 베이비 키스 뒤에 내 입가에 떨리는 숨을 쏟아 놓았다.
“……나, 어때?”
“어떻긴.”
나는 두 팔로 형을 꼬옥 끌어안았다. 금방 무너져 버릴 것처럼 위태로운 형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불안한 내 얼굴을 감추려 가슴으로 형의 눈을 가렸다. 형의 괴로움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물어볼 수가 없어서, 세상 모두가 형에게서 떠나가라 손가락질을 할 것만 같아서 두렵다.
“어제보다 더, 너무너무 멋지지.”
눈을 감은 채 뱉어 낸 말에 눈 아래 그림자를 드리운 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제야 웃는다.
엉망으로 머리가 흐트러져 있어도, 수척한 얼굴이 검게 가라앉아도, 단정치 못한 자세로 구석에 웅크릴지라도 형은 언제나 멋져. 그야 세상에 유일한, 하나밖에 남지 않은 사랑하는 사람인걸.
“매일매일, 조금씩. 형은 언제나 더 근사해지고 있어요. 내 눈엔 그래.”
형은 작게 목을 울려 웃으며 내 머리칼을 헝클었다.
“가지 마.”
형의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옷 아래로 들어와 내 몸을 살금살금 더듬는다. 가지 마. 그 목소리 어디에서도 아침에 보았던 괴로움과 불안은 숨어 있지 않은데도 나는 괜히 가슴이 아파졌다. 저미는 것처럼 아파서 형의 손목을 잡아끌어 그 위로 눌렀다.
“여기, 여기 만져 줘요.”
상의를 벗기고 형이 그 위로 올라탔다. 형의 속눈썹이 간질간질 가슴께에 닿는다. 형은 두 손으로 부드럽게 내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어깨에 입술을 눌렀다. 너무 이상했다. 형이 다정하게 나를 어루만지고,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줄수록 자꾸 가슴이 아프다.
“왜 울어.”
내 안으로 들어와 부드럽게 압박하는 형을 느끼면서도 나는 모자란 애처럼 울고야 말았다.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지고 다시 형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걱정스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랑스러운 사람.
“형이랑 있는 게 너무 좋아서.”
손등으로 눈을 가리고서 입으로만 웃었다. 틀림없이 멍청한 꼴이었을 텐데, 형은 눈을 가린 내 손바닥 위로 입을 맞추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나도. 네가 곁에 있는 게 좋아.”
***
며칠이나 고민한 끝에 그날 일을 형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정말로 없던 일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 뒤로 형의 이상했던 태도는 완전히 사라졌다. 아니,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주의 주말, 우리는 아주 먼 일처럼 느껴지는 불과 한 달 전의 생활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빈둥거렸지만, 형은 어딘가에 감시당하는 사람처럼 초조해 보였다. 가만히 있다가도 벌떡 일어나 방 안을 배회하거나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은 옷을 들추며 자꾸만 머리카락이나 손톱 같은 것이 걸려 있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리고 주말이 지나 다시 형과 나의 시간이 밤을 사이에 두고 나뉘게 되었을 때, 일을 끝내고 돌아온 아침, 형은 집에 없었다.
형은 점심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와 내 손을 잡아끌고서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그다음에 이어질 행위들을 떠올리며 발끝을 꼬았지만 형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나를 끌어안은 채로 잠이 들었다.
“형, 어디 다녀왔어요?”
이른 저녁 시간 함께 식사를 하며 물었더니, 조깅을 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집에만 있으니 머리도 몸도 무거운 것 같아서. 조금 뛰고 왔어.”
그러고 보니 형에게서 희미한 땀 냄새가 났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괜찮은 거 같아. 오랜만에 잠도 푹 잤고.”
눈가는 여전히 거뭇했지만 요 근래 봤던 것 중엔 그나마 가장 안색이 좋았다. 형은 젓가락질을 능숙하게 하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유난히 애를 먹는 생선 살을 발라 내 숟가락 위에 올려 주었다.
“이건 딱히 손가락 때문은 아니에요. 그냥 내가, 그…….”
“알아. 엑스자로 젓가락질하는 거 귀여워.”
목까지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을 거다. 형은 콧노래를 부르며 생선 살을 먹기 좋게 전부 발라 놓고 키친타월을 가져와 가시를 전부 치워 버렸다. 모르는 척해 주지만, 무심코 집어 든 생선에 가시가 끼어 있으면 내가 움찔, 눈을 찡그리는 것을 봤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형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을까.”
“응. 예감이 좋아. 다 잘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밥을 먹는 내내 형은 내 숟가락에 반찬을 집어 주고 내가 양 볼 가득히 음식을 넣고 우물거리는 것을 관찰하며 빙긋이 웃었다. 그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려서 음식을 씹던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형의 미소는 근사했다.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진 것만 같았다. 형은 매일 기분이 좋아 보이고, 나는 오랜만에 바깥에서 일을 하는 것이 꽤 즐겁다. 첫 월급을 받아 꽃다발을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갔더니 형은 몹시 기뻐하며 침실에 꽂아 두었다.
그리고 그 꽃이 다 시들어 말라 버린 것을 내버릴 때까지 우리는 단 한 번도 몸을 섞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