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미치광이의 밤
(J)
오색으로 찬란한 절망을 보았다. 공간이 허울지고 시간이 일그러진 채로 미끄러지다 목구멍에 걸린 한 톨의 죄악감을 짓눌러 놓는다.
그곳에 들여놓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안에 웅크려 있던 작고 단단한 좌절과 우울함은 물렁하게 불어나 부피를 키웠다.
“벌써 다 썼어? 빠르네? 얌전한 고양이가 뭐 어쩐다더니. 딱 그 짝이네.”
머리를 보라색으로 물들인 몸이 마른 사내는 한쪽 입꼬리만 당겨 웃음 지으며 나를 음습하게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법했다. 나는 그들을 쳐다보지도, 상종하지도 않았었다. 그들이 약에 취해 휘청거리며 난교를 벌이면 멀리 돌아갔고, 자리에 누운 채로 구토를 하다 기도가 막혀 누군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땐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흔들어 귀에 고인 얘기를 털어 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할 거라면 됐어.”
“정 없이 왜 그러셔. 고객님.”
그는 은색 스팽글로 반짝이는 작은 가방에서 파우치를 꺼내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안주머니에서 현찰 봉투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 자리에서 봉투를 열어 확인해 본 그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다음에도 잘 부탁해.”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멀어지는 내 등 뒤로 그의 비웃음 어린 조롱이 들렸다. 거봐, 내가 뭐랬어. 예술로 먹고 사는 놈들은 손대게 되어 있다니까. 지가 뭐 별거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노점에서 파는 핫바를 샀다. 부쩍 군것질을 많이 하는 샛별을 위한 것이었다. 샛별은 단정하게 포장된 비싼 디저트보다 아무렇게나 비닐에 포장한 먹거리를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허름한 종이봉투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벙긋벙긋 웃는 얼굴이 눈에 선했다.
집에 들어가면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졸음으로 푹 절은 샛별이 나를 마중할 것이다. 가벼운 포옹과 함께 고양이처럼 얼굴을 부비며 애교를 부릴지도 모른다.
“나 왔어.”
“혀엉!”
뜻밖에도 샛별은 반짝 잠에서 깨어난 얼굴을 하고 나를 맞았다. 내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웃음을 짓더니 코를 발름거리며 냄새를 맡는다.
“아! 맛있는 냄새!”
“나보다 이게 더 반가워?”
검은 비닐봉투를 건네며 실없이 웃으니 샛별이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일어났는데 형이 없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는데.”
가볍게 허리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자 샛별이 쑥스러운 듯 목을 구부리며 웃었다. 비닐봉투의 손잡이를 쥐고 만지작거리던 샛별은 자리에서 발을 떼지 않은 채로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그런데 형, 혹시 향수 바꿨어요?”
“응?”
“아니, 그게……. 요즘 형한테서 뭔가 조, 좋은 냄새가 나서.”
눈을 데루룩 굴려 쳐다보는 시선이 미묘하다. 팔을 들어 숨을 들이켜도 평소의 코롱 냄새 그대로다.
“먹을 것 냄새 아냐?”
장난처럼 묻자 샛별이 곧바로 떨떠름한 얼굴을 지우며 눈을 깜빡였다.
“그래, 그런가 보다. 요즘 맨날 형도 군것질해서, 그래서 그런가 봐.”
“군것질은 네가 다 하지.”
“아닌데, 아닌데.”
샛별의 머리칼을 세게 쓰다듬어 헝클어 놓고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샛별이 있을 때는 문단속을 해 본 적이 없지만 최근에는 문을 잠그는 일이 자주 있다. 아니, 매일 하루에 한 번씩 문을 닫아걸고 나를 가두어 놓는다.
품에서 검은색 파우치를 꺼내 작업실 서랍장 깊은 곳에 밀어 두었다. 그 옆에는 거의 비어 있는 또 하나의 파우치가 놓여 있었다. 지퍼가 조금 열린 그 작은 틈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발밑이 무너지는 것처럼 어지럼증이 일었다.
“형, 핫바 다 식어요. 얼른 나와요.”
똑똑. 샛별이 문에 노크를 했다. 나는 살짝 구부러진 무릎을 바로 펴고 서랍장을 닫았다. 아직 열어 놓을 시간이 아니다.
밤이 깊고 내가 뛰어들어도 흉이 지지 않을 만큼 충분히 어두워지면 나는 손잡이를 당겨 서랍을 열고 혼란을 삼킨다. 엉망으로 뒤섞이는 시야 속에서 집요하게 색깔을 찾아 헐떡이는 숨으로 붓을 짓이긴다.
“응. 금방 나갈게.”
아직은, 낮과 밤을 가를 수 있다. 그거면 충분했다. 숨을 깊이 삼켜 울컥 치솟는 달큰한 냄새를 눌러 냈다. 아직은 아냐. 조금 기다려.
***
최기준의 입술이 길게 벌어졌다. 그는 어설프게 손바닥으로 입을 감추며 눈썹을 추켜올렸다.
“이야, 이거. 역시 다릅니다. 이전에 그렸던 연작들과는 확연히 다르네요. 세일즈 포인트가 될 만한 사연이라도 있으신지요.”
“그런 건 따로 없습니다. 이전에 하던 것처럼 하면 됩니다.”
천재성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가련한 소년. 범접할 수 없던 감성의 근원은 남다른 성벽. 정재계 집안에서 예술가로 살아가는 법. 입소문만 무성한 스캔들, 그러나 알고 보면 소년 같은 그 남자. 연예 잡지에나 어울릴 법한 그따위 마케팅을 기획한 것도 모두 저 남자였다.
최기준은 어쩌면 가족들보다 나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은 남자였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작품을 위해서라면 그쯤이야.’라며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무슨 소문이 퍼져도 ‘이 정도쯤이야.’ 하고 무마해 버리는 남자다. 그러다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고 별이를 끌어들일 생각은 하지 마시고.”
최기준이 징그러운 눈을 하고 느물느물 웃었다.
“글쎄. 왜 그렇게 신경을 쓰십니까. 지난번에는 별것 아닌 관계라고 해 놓고서.”
지난번 외출에 사진이 찍혀 잠시 나돌았던 이후 최기준은 부쩍 샛별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그 눈동자에 비친 의미는 분명했다. 좋은 먹잇감.
지금까지 겪었던 머리가 영악하거나 뒷배경이 든든한 누군가들과 다르게 샛별은 순진해 빠졌고 가진 것이 없다. 만약 최기준이 바라는 것이 변화가 필요한 시기의 바보 같은 사건이라면 샛별만큼 훌륭한 먹이가 없는 것이다.
잠깐만 생각해도 몇 가지 헤드라인이 머리를 스친다. 예술가의 괴벽에 이기지 못한 불운한 연인. 그의 잠적은 연인과의 불화 때문, 성벽을 이용해 접근하는 남자들. 어느 쪽이 나쁜 쪽이 되든 최기준은 상관없을 거다. 그저 내가 어떤 쪽으로든 이상한 사람이 되어 그림의 가치를 끌어 올리길 바랄뿐이다.
“상관없으니까 그러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나라도 아무 상관없는 사람하고 엮여서 여기저기 얼굴 팔리고 싶지는 않거든요.”
한껏 얼굴을 찌푸리며 문을 벌컥 여는데 그 앞에 샛별이 있었다. 샛별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손에 쥔 물컵을 잘게 떨었다. 그럼에도 얼굴은 웃는 낯을 하고서 나를 향해 물었다.
“형, 저…… 잠깐 외출 좀 다녀올게요.”
“응.”
“에이, 저 이제 갈 건데 그냥 계시죠. 매번 실례해서 미안합니다.”
뒤따라 나온 최기준의 얼굴에 노골적인 호기심이 어렸다.
“별아. 나 오늘 나가서 내일까지 안 들어올 거니까, 기다리지 말고 편하게 자.”
어쩐지 조금 전보다 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샛별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머니에 꽂아 넣은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려 왔다. 주먹을 꾹 쥐고 애써 태연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약의 중독성은 강하고 금단증상이 나타나는 시간은 점점 빨라지고 있다.
정신을 차려 보면 온 집 안을 헤집어 놓거나 샛별의 몸에 퍼렇게 멍이 들 정도로 거칠게 안아 버린 것이 여러 번이었다. 어느 날인가는 이불을 뒤집어 쓴 샛별이 숨을 죽여 우는 소릴 들었다. 샛별은 이불 속에 물감을 지우지 못한 내 손을 쥐고 대단히 소중한 것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굴며 울음을 쏟았다.
아마, 나의 기행을 좀처럼 진행되지 않은 작업에 대한 스트레스 발산으로 생각하는 모양인 것 같았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요즘의 나는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쓰레기다. 내 입으로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따위의 말을 하려니 몹시 심란한 형상이 떠올라 웃음이 나올 것 같지만 역시 사실이다.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을 자각하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조차 얼마 되지 않을 정도로 멀쩡한 상태의 시간이 적다는 거다.
나는 샛별이 나가기 아슬아슬한 시간까지 잠을 자며 시간을 보내다 저녁이 가까워질 무렵 슬금슬금 눈을 떠 그를 침대에 눕혔다. 언제나 사랑스런 얼굴을 하고 나의 손길을 기다리는 샛별의 모습은 가슴이 아플 정도로 아름다워서 미처 완전히 안지 못하고 끈질긴 키스와 맴돌듯 어루만지는 손길로 끝내고 만다.
샛별이 알바에 가고 나면 그가 남겨 놓은 잠옷에 얼굴을 묻고 한껏 숨을 들이켠 뒤 그것과 같은 들숨으로 가루약을 삼켰다. 그리고 어둡고 습한, 어지럽게 조명이 일렁이는 곳으로가 눈에 띠는 그 누구라도 붙잡아 바닥에 짓눌렀다.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시트에 눌러 숨소리를 죽여 놓고 구역질이 날 만큼 뱅글뱅글 돌아가는 시야 속에서 그림자의 틈새, 언뜻 스치는 붉은 조명의 끝자락, 흩어진 옷가지, 비명과 같은 신음소리, 그 가운데에 숨어 있는 샛별을 찾아 짐승처럼 낮은 울음을 냈다. 그러곤 다시 돌아와 엉망으로 붓을 짓눌러 색을 덧입히는 생활.
내가 네 몸에 새긴 퍼런 멍이 옅어져만 가는 것이 내 생활의 유일한 낙이다. 너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지겨울 정도로 한결같이 멍청한 나를 상냥하게 나를 살핀다.
“형.”
내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는 가지런한 네 개의 손가락이 사랑스럽다. 자신의 손가락을 보다 화들짝 놀라 반대쪽 손으로 바꿔 쥐는 동작도 귀엽다. 단정한 엄지손톱이 분홍빛을 띠고서 내 가슴팍 한곳을 살짝 누른다.
“여기, 단추 떨어질 것 같아요.”
“응? 그러게.”
아마 얼마 전 어딘가에서 뒹굴었을 때 잡아당겨져 너덜너덜해진 듯했다. 내게는 손대지 말라고 그렇게나 경고 했었는데 피차 약에 취해 뒹군 사이에 그것까지 바란 것은 무리였다. 샛별은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내 눈치를 살피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이거…… 내가 새로 달아 봐도 돼요?”
왜였을까. 샛별의 그 말 뒤로 다른 속삼임이 겹쳐졌다. 가냘프게 떨리는 샛별의 목소리였다.
나는 스스로의 망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허겁지겁 옷을 벗어 샛별을 팔에 들려 주었다. 샛별은 환하게 웃으며 그 셔츠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내가 절대로 떨어지지 않게 튼튼하게 달아 줄게요.”
(D)
형은 푸른색 옷을 자주 입었다. 서늘하고 단정한 얼굴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에 나는 형이 푸른 셔츠를 입는 것이 좋다. 그중에서도 바다 빛깔 바탕에 연한 하늘색 스트라이프 무늬가 세로로 들어가 있는 이 셔츠를 특별히 더 좋아했다.
형이 내 손을 잡고서 뭉툭하게 잘려 나간 자리에 별자리를 심어 놓은 그날, 형이 이 셔츠를 입고 있었다는 건 나만의 비밀이다.
헐겁게 늘어진 세 번째 단추의 실을 이로 살짝 끊어 내었다. 그것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나머지 단추를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집어 보았지만 그 외에는 헐거워진 것이 없었다. 애초에 비싼 셔츠나 옷은 대부분 세탁소에 맡기는 편이었기 때문에 헐거워진 단추 같은 건 전부 수선이 돼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단추를 뜯어 낸 자리에 실로 문질러져 보풀이 일어난 것이 보였다. 어디에 걸리기라도 한 것인지 거칠게 뜯겨진 듯한 모양새였다. 손가락으로 그 자리를 문질러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오래전에 사 두고서 한 번도 꺼내 보지 못했던 작은 반짇고리를 꺼냈다. 장롱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었지만 늘 장롱을 열 때마다 눈앞에 내밀어진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곤 했다.
내 손으로 바늘을 집어 드는 날이 실제로 오리라고 진심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내가 나보다도 더 아끼는 사람이 생겼을 때 그 사람의 옷을 잡아매는 단추를 달아 보는 것은 어릴 적부터 나의 꿈이었다.
엄마는 내 옷에 단추를 달아 주며 ‘엄마가 사랑하는 만큼 튼튼하게 달아 줄게.’ 하고 장난스럽게 얘기하곤 했다. 아래위로 여러 번 실을 교차하고 그 기둥에 실을 둘둘 감아 나무기둥처럼 튼튼하게 달아 놓는 엄마의 바느질은 천이 찢어지거나 단추가 깨질지언정 옷을 버릴 때까지 잘 떨어지지 않았다.
“좋아. 까짓 거.”
한숨에 가까운 혼잣말을 흘리며 손바닥을 마주 싹싹 비볐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반짇고리 뚜껑을 열고 나란히 꽂혀 있는 바늘을 바라봤다.
지금에서야 바늘을 집어 들 용기를 내는 건 그동안 형을 덜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눈을 질끈 감고 참아 내기만 하는 일이라면 벌써 옛날에 해치워 버렸을 거다. 하지만 바느질은 눈을 감고선 할 수가 없고 눈을 뜨고선 바늘을 볼 수가 없으니 가방에 들어 있는 숙제처럼 가슴에 묵직하게 담아 두기만 했던 거다.
용기를 불어넣어 준 건 형이었다. 날이 갈수록 부쩍 초췌해지고 잠이 많아지는 것과는 달리 눈을 뜨고 있을 때의 형은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다정하다.
나를 가만히 어루만지고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짓고 품에 안아 체온을 더했다. 호흡에 가까운 느리고 부드러운 키스를 하고 난 뒤엔 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몇 번이고 이마와 뺨에 입을 맞췄다.
“형, 무슨 일 있어요?”
물어보면,
“아무것도.”
무뚝뚝한 대답을 꺼내 놓고선 조금의 간격을 두고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내 품에 뺨을 부벼 왔다.
“지금, 시간이 멈추면 좋겠어.”
형은 가볍게 떨리는 손으로 내 얼굴을 상냥하게 쥐고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문질러지는 애타는 키스를 오래도록 이어 갔다. 눈을 마주치는 것이 부끄럽다. 형이 이렇게 다정하게 굴 때면 그 전부가 내 것인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 그만 불쑥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형은 나를 좋아하나요?
“형.”
눈을 내리깔아 입 안쪽 살을 가볍게 깨물었다. 형은 여전히 내 입술에 자신의 입을 맞추거나 손바닥으로 뺨을 쓸어내리면서 목을 울려 ‘응.’ 하고 답했다.
“형은, 있잖아요.”
“응, 그래.”
목이 뻣뻣하게 굳는다. 목을 움츠리고 살그머니 형의 입술을 피해 품으로 파고들었다. 형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그 등에 두른 팔에 아주 살짝 힘을 더했다.
“다, 다, 다른 사람한테도…… 이렇게 해 줘요?”
뒷머리를 쓰다듬던 형의 손이 매끄럽게 쓸어내려 가 등을 토닥였다. 귓바퀴 뒤쪽에 더운 숨이 쏟아졌다. 형은 잠이 든 사람처럼 낮고 고른 숨을 내쉬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절대로.
속삭이는 말들에 초조함으로 발딱이던 심장이 금방 터져 버릴 것처럼 벌떡벌떡 펌프질을 했다.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들이 펑하고 터져 온통 하얗게 번쩍이는 것 같다. 눈이 시리고 꽉 깨문 이가 저리고 힘을 꾹 주고 있던 콧방울이 실룩인다.
만약 형이 한 얘기가 정말이라면, 그 의미에 ‘유일함’이 담겨 있지 않았더라도 만약 그 마음에 조금이라도 나와 같은 감정이 섞여 있다면, 아주 어쩌면……. 내가 그러는 것처럼 형 또한 나로 인해 기쁘거나 벅차오르거나 행복감을 느끼기도 한다면, 그곳의 아주 작은 조각의 티끌이라도 사랑이 있다면.
“나는, 그래요.”
나는 정말로 형뿐이에요. 이제는 정말 온 세상을 통틀어 형밖에 없어요. 인정하면 진짜 바보가 되어 버릴까 봐 꾹꾹 눌러 참고 있지만, 내 모든 마음이 형을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을 몰라요. 손을 잡고 싶은 것도, 두 팔을 벌려 안고 싶은 것도, 웃는 얼굴을 보면 쏟아지는 햇볕 아래에서처럼 벅차오르는 것도, 감히 사랑을 하는 것도 형뿐이야.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발가락을 힘주어 움켰다. 형은 나른한 동작으로 내 등을 쓸어내리다가는 이내 잠이 들었다.
끈이 툭 끊어져 버린 인형처럼 기운 없이 널브러진 형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다가 몰래 입을 맞췄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선 요즘 들어 자주 맡게 되는 달큰한 향이 났다.
“나, 형 좋아하는 거 포기하지 않아도 돼요?”
잠든 형에게 물으며 손가락으로 이불에 놓인 형의 손등을 간질이자 움찔 반응을 보인 형의 손이 내 손을 움켜쥐었다. 순간 형의 마음이 나를 붙잡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코가 시큰해졌다. 잠든 형의 품에 코를 묻어 그 체취를 맡으며 가슴속에 흐릿하게 번져 있던 글씨를 바르게 썼다.
나는 형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
형광등 불빛이 바늘 끝에서 반짝인다. 현기증이 나고 속이 메스껍게 울렁거려 한참을 눈을 감고서 심호흡을 했다.
벌써 3일째. 나는 바늘을 한 땀도 뜨지 못하고 그 예리한 끝만 노려보고 있다. 그나마 성과라고 한다면 오늘은 바늘귀에 실을 걸었다. 침실에 잠든 형의 품에서 몰래 빠져나와 저녁이 될 때까지 바늘만 쳐다보고 있기를 몇 시간, 눈이 아릿하게 아파 왔다.
옷이야 차고 넘치니 형이 당장 이 셔츠를 찾을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셔츠의 행방을 물을 경우 내 대답이 궁해졌다.
형은 나의 발작적인 증세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저 많이 놀라거나 충격을 받을 때만 그런 거라 어림짐작하는 듯했고, 칼이나 날카로운 것을 잘 다루지 못하는 건 그저 내가 손을 쓰는 일에 서툴러서라고 믿고 있었다.
반찬을 담을 때 한입 크기로 잘게 잘라 놓는 것은 형이 나를 완전히 어린애 취급을 하기 때문이지 내 트라우마를 알아서가 아니었다.
병뚜껑을 못 열어 눈을 깜빡이며 어른에게 건네는 작은 어린애처럼 형은 내가 위험한 것에 손을 대는 걸 싫어했다. 어쩌면 맨바닥에서 무릎이 고꾸라져 빼액 울어 버리고 마는 갓난쟁이쯤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뭐 해?]
서로 아주 가끔 안부를 주고받는 정도이긴 했지만,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이 중에 연락이 닿는 건 하늬뿐이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문자를 보내 놓고 애꿎은 단추만 만지작거리는데 금방 답장이 돌아왔다.
[이제 집에 가려고.]
[일 끝났어?]
[응. 왜 그러는데?]
톡톡톡 글자를 누르고 지우고, 다시 적었다가 지우길 여러 번. 머리를 벅벅 긁어 잡념을 털어 버린 후에 빠르게 문자를 눌러 보냈다.
[너 바느질 잘해?]
보내 놓고도 괜히 보낸 건가 싶어 짧은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코를 찡그리는데 싱거울 만치 답장은 금세 돌아왔다.
[쩔지.]
[그럼 나 좀 도와주지?]
[나 비싼데?]
[그럼 말고.]
찡그린 얼굴로 답장을 보내기가 무섭게 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무슨 놈의 포기가 그렇게 빨라. 사람이 무섭네.
“나 돈 없어.”
-누가 너보고 돈 달래?
“그럼?”
-……됐다, 됐어. 내가 우물에서 숭늉을 찾지!
투덜거리면서도 하늬는 금방 도착했다. 아직 형이 잠들어 있는 탓에 벨을 누르지 말라고 언질을 해 두었던 터라 전화가 걸려 왔다. 아직 아무런 기척이 없는 침실을 흘끗거리며 발소리를 죽여 현관문을 열었다. 하늬는 입을 벙긋거리며 쾌활하게 인사했다.
“이거 도와줘.”
현관문을 살짝 열어 놓은 채로 품에 안고 왔던 바느질감을 내밀자 하늬는 인상을 찌푸렸다. 짜증스런 손길로 옷감을 받아들면서 눈썹을 치떴다.
“세상에, 인사는 좀 하고 삽시다.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기야? 우리가 이거밖에 안 되는 사이였어?”
“사이는 무슨…….”
말이야 비뚤게 하지만 하늬가 무척 고마운 사람이란 건 잘 알고 있다. 괜히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볼을 긁적이니 하늬가 눈치를 채고선 비실비실 웃으며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입꼬리에 고양이 같은 미소를 매달고서 은근한 눈으로 킥킥거린다. 일부러 뚱한 얼굴을 하고 빨리 알려 주기나 하라고 재촉했다.
바느질은 특별할 것이 없었고 나는 다만 용기가 필요했을 뿐이었으므로 잘난 척 목에 잔뜩 힘을 주었던 하늬의 강좌는 금방 끝이 났다.
쓰지 않는 옷감에 여러 번 테스트를 한 것을 품으로 다시 받아들며 어떻게 감사 인사를 해야 하나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우물거리는데 하늬가 막 생각났다는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그래서, 장석은 뭐라고 하디.”
“뭘?”
“뭐긴 뭐야. 그때 너 잠수 탈 때…….”
“뭐.”
찔리는 구석이 있어 목을 움츠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하늬는 그런 나를 빤히 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방정맞게 두 손을 흔들어 댔다.
“설마 얘기 안 했어?”
“……뭘.”
“뭐긴 뭐야, 네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꼴을 봤는데. 자꾸 발뺌할래? 언제까지 숨길 건데?”
“몰라.”
“모르긴 뭘 몰라. 장석은 여태 오해할 거 아니야. 그때 가 버린 게 그 자식 때문이 아니라…….”
하늬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있기가 힘들어 자꾸만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손가락끼리 문질거리는데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등을 턱 하고 두드렸다.
“무슨 얘기가 그렇게 재밌어.”
형이었다.
“……어?”
하늬와 나는 동시에 얼빠진 소리를 냈다. 바쁘게 눈동자를 굴리고, 시선을 교환하고, 형이 어디서부터 들었는지 초조해하며 마음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먼저 표정을 수습한 하늬가 얼굴을 활짝 펴서 웃으며 형 앞에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하이! 오랜만.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못 본 사이 더 못생겨졌네.”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서. 밖에서 뭐 해.”
“아직 자고 있다고 하길래. 깨울까 봐 그랬지.”
형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눈꼬리에 잠기운이 잔뜩 달라붙어 있고 얼굴의 어디에도 미묘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못 들었나? 눈을 굴리며 형의 기색을 살피고 있으려니 하늬가 등 뒤로 숨긴 손으로 내 옆구리를 꼬집었다.
“더 있을 거면 들어와서 차나 한잔해.”
“아니야. 가 봐야 해. 피부과 예약해 놨어.”
“거기에 뭐 손댈 거 있다고.”
“이런 건 아차! 하고 벌어지기 전에 손쓰는 거야. 장석 너도 그러다 한 번에 훅 간다.”
“됐어. 그런 건. 그렇지, 별아?”
내 동의를 조심스럽게 구하며 형의 손이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제야 덜컹 떨어졌던 심장이 평소 위치로 돌아왔다. 어제와 다름없는 다정한 손길이었다.
“응, 그럼요. 형은 어떻게 해도 멋있는걸.”
“봤지? 그럼 잘 가라.”
형은 졸음으로 느슨한 얼굴에서 눈썹만 치켜 올린 뒤에 하늬의 어깨를 밀쳤다. 엇, 바람 빠진 소리를 내는 하늬에게 눈인사를 할 틈도 없이 현관문이 쾅 닫혔다. 형은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내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다가 몸을 돌렸다.
“오늘 날이 좀 차다. 창문을 닫아야겠어.”
슬리퍼 소리가 불규칙하게 집 안에 울렸다. 형은 부산스러운 걸음으로 넓은 창을 닫고 아주 느린 걸음으로 바닥에 달라붙듯이 움직여 베란다의 창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굳어 버린 듯 멈춰 있다가 다시 잰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별이 너.”
형의 손이 내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눈이 찡그려질 정도로 강한 힘에 윽, 나도 모르게 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형은 놀라 눈을 크게 뜨더니 뜨거운 것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손바닥을 뒤집어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 그게 아니라…….”
“괜찮아요. 난 괜찮은데, 형 괜찮아요?”
순식간에 안색이 파랗게 변한 형이 걱정이다. 형은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다가 삐걱거리는 움직임으로 돌아서 버렸다.
“할 일이 생각났어. 마중…… 못 할 거야.”
형은 그대로 작업실로 들어가 알바 시간이 되어 집을 나설 때까지 문을 닫고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문은 다음 날 아침까지도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그 문에 등을 기대고 앉아 아주 느린 동작으로 천천히 바늘을 움직였다. 형이 문을 열어 줄 때까지, 내가 기어코 이 단추를 달아 놓을 때까지, 나는 얼마든지 밤을 지새울 자신이 있었다.
서툴게 옷자락을 뚫고 솟아오르는 바늘 끝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아 눌렀다. 바늘귀의 감촉을 골무 아래로 둔하게 느끼며 나는 셔츠를 입은 형의 모습을 상상했다.
단단하게 달아 놓은 단추는 자세히 보면 다른 것들과는 다르게 툭 튀어나온 모양을 하고 있을 거다. 형은 그 단정하고 아름다운 손가락으로 단추를 잠그고, 나의 마음을 매달아 곳곳을 다니겠지. 그건 너무나도 벅찬 일이었다.
너뿐이야. 사랑의 약속은 아니었지만 나는 형의 그 말을 믿는다. 나는 세상에 형뿐이고, 형의 곁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은 도저히 상상만으로도 견뎌 낼 수 없을 만큼 몰두해 있어서, 돌아갈 자리가 있었던 예전만큼 관대하지 못했다.
실의 매듭을 지어 이로 그것을 끊어 내면서 딱, 소리를 내는 순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형은 그늘진 얼굴로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네가 없을까 봐 두려웠어. 별아, 오직 너뿐이야.”
나는 그만 심장이 멎는 줄만 알았다.
(J)
망상은 그 내용을 달리하며 내 머릿속을 내달리곤 했다. 처음에는 꿈속에 머물렀던 것이 어느새 그 부피를 늘려 흐물흐물 새어 나오더니 이제는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할 지경이었다.
지난밤 꿈은 샛별이었다. 아니, 언제나 그러했듯 샛별이었다. 그러나 평소와 조금 다른 점이라면 그 곁에 다른 사람이 서 있다는 것이었다. 어디에서부터 꿈이었는지 흐릿한 가운데서 샛별은 하늬와 손을 마주 잡고 밀담을 나누었다.
내가 함께하고 싶은 건 너야. 지금은 마지못해 붙들려 있는 것뿐이야. 알고 보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빈껍데기뿐이었어.
샛별은 하늬의 품에 안겨 나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다가 나를 어깨로 떠밀어 구석에 밀어 넣었다. 잡동사니에 가려진 틈 사이로 나는 샛별이 그림자로 가려진 정체 모를 남자들과 몸을 섞는 것을 보았다. 샛별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조금씩 희미해지고 멀어져 갔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환하게 날이 밝아 있었다. 방 안에는 마르지 않은 물감 냄새가 가득하고 눈앞에 어른거리는 갖가지 색깔들로 시야가 어수선했다. 귀까지 먹먹한 기분이 들었으나 문밖에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문고리에 쉽게 손을 올리지 못하고 한참을 그대로 서서 문밖의 기척을 살폈다. 자연스러운 풍경처럼 집 안 어딘가에 있을 샛별의 존재를 탐색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미 가 버렸을지도 몰라. 내 것이 아닌 엉망진창의 환상을 빌리지 않고서는 물감 하나 바르지 못하는 나를 알고서 도망가 버렸는지도 몰라.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하고 날마다 더러운 욕정을 버리러 다니는 지저분한 꼴을 들켜 버렸을지도 모르지.
문고리를 쥐는 손이 땀으로 축축했다. 손을 얹는 것만으로 간단히 돌아가 잠금이 풀리는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숨을 멈추었다. 그사이 심장은 갈비뼈를 부술 것처럼 세차게 뛰었다.
“잘 잤어요?”
벌어지는 문틈으로 흘러 들어오는 목소리. 나는 그만 무릎을 꿇어 주저앉을 뻔했다. 커튼으로 스며드는 햇살만큼이나 부드럽게 휘어지는 가는 눈, 씻어 낸 사과 표면에 맺힌 물방울처럼 매끄러운 미소, 새벽의 촛불처럼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피어오르는 아늑한 온기. 샛별이었다.
“네가 없을까 봐 두려웠어. 별아, 오직 너뿐이야.”
너뿐이다. 나의 아침을 깨우는 것은 너뿐이다. 망상과 환상의 경계를 넘어 나를 현실 위에 올려놓는 것은 오직 너뿐이다.
부족한 나는 너와 함께하는 ‘그럴듯한 현실’을 깨지 않기 위해 환상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그것이 뒤집어져 나를 현실로부터 뒷발길질로 밀어뜨릴 줄은 몰랐다. 아침이 가까운 새벽,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남자의 벗은 몸 옆에서 깨어날 때마다 나는 간절히 네 이름을 불렀다.
역겨울 정도로 뚜렷한 정사 뒤의 냄새에 숨을 멈추고서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래, 엉망으로 헤집어 놓은 것이 네가 아니라 다행이다. 지난밤 그토록 잔인했던 말들과 섹스라기보다는 폭력에 가까웠던 횡포에 희생된 것이 네가 아니었다는 것을 위안 삼아, 나는 낯선 이의 곁에 약속된 돈뭉치를 두고 도망치듯 빠져나오곤 했다.
“이제야 끝냈어요. 여기.”
멍하니 선 나의 팔을 살짝 붙잡으며 샛별이 품에 안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단추를 달아 주겠다며 샛별이 들고 갔던 푸른색 셔츠였다. 샛별은 쑥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면서 셔츠 소매 끝을 손가락으로 슬슬 비볐다.
“내가 먼저 하겠다고 해 놓고서 부끄럽지만, 단추는 처음 달아 봐서요. 하늬 아니었음 두 달은 더 걸렸을 거예요.”
불쾌한 감정이 목구멍으로 치민다. 발밑이 묵직해지고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뿐이야?”
“예?”
“그 자식이 기웃거린 거. 그것뿐이야?”
“아, 그게…….”
샛별이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희미하게 눈동자가 떨리는 것이 보였다.
“뭔데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형이 신경 쓸 만한 건 아니라서…….”
“그렇겠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샛별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불안한 표정으로 내 시선을 좇았다. 무엇이 그토록 불안한 걸까. 내게 무얼 들킬까 초조해하는 걸까. 입 안으로 맴도는 말을 뱉어 내지 못하고 나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샛별을 지나쳐 침실로 향했다.
밤새 망상에 시달려 너무 지쳐 버린 탓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나질 않는다. 네가 곁에 다가와도 초라한 기척이 느껴지지 않도록 새벽의 냄새를 어서 씻어 내야 하는데.
“형, 많이 힘들어요?”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샛별이 내 어깨를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돌아누운 채로 나는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등 뒤로 샛별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아무런 말도 건넬 수 없었다. 평소와 같이 근사한 척 얼굴을 가리고 아무렇지 않다고 미소를 지어야 하는데 지금 입을 열어 꺼낼 말은 지독한 이기심으로 범벅된 억지스런 말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샛별의 손이 조심스럽게 떨어지고 기척이 살그머니 멀어졌다. 작게 낮춘 목소리가 나를 향해서가 아닌 허공을 향해 속삭였다.
“어, 덕분에 잘 끝냈어. 응, 너는? 일 끝났어?”
나는 눈을 감고 잠든 시늉을 했다. 다행히 샛별의 기척은 거기서 더 멀어지지 않고 이따금 나를 살피듯이 말을 한참이나 멈추었다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응. 형은 간신히 잠들었나 봐. 전에 네가 얘기하려다 말았던 거……. 사실은 뭐 있는 거지.”
샛별의 발소리가 자박자박 초조하게 방 안을 맴돌았다.
“아니, 나는 별로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니까. 나중에, 나중에 다 정리되면 얘기할 거야. 괜찮아. 형도 이해해 줄 거야. 말을 아끼는 거 보면 눈치챈 건가 싶기도 하고…….”
딱딱, 손톱을 이로 뜯어내는 소리가 났다. 응, 응, 하고 한참이나 대꾸만 하던 샛별이 긴 한숨을 다시 내쉬었다.
“무슨 소리야. 아무 관계도 아니야. 너 괜히 여기저기 말 흘리고 그러지 마. 안 그래도 요즘 그거 때문에 얼마나 애를 먹고 있는데…….”
앞뒤를 잘라먹은 말에도 심장이 덜컥덜컥 요동쳤다. 오로지 내 것만 챙기느라 바빠 반쯤은 강제로 밤에만 생활을 하게 된 샛별이 얼마나 답답했을지 눈치채지 못했다. 뜻하지 않게 모르는 이들의 얘기에 오르내리게 되어 곤란해졌거나, 최기준 같은 작자들에 의해 싸구려 가십거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을 것이 분명한데 내가 잘되면 모두 수습될 거라고 오만을 떨었다.
“……알고 있는 건 너뿐이니까, 알지?”
작았던 목소리가 더욱 작아져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였다.
“기다려 줘. 부탁할게.”
간절했다. 샛별의 목소리에는 가뭄이 든 자의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
단 한 번이라도, 샛별이 내게 그런 애원을 한 적이 있었던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다. 그 애타는 기다림 끝엔 결국 샛별이 떠나고 마는 걸까.
나도 모르게 멈추었던 숨을 코로 길게 내쉬었다. 내쉬는 숨결이 흐느끼듯 떨렸다. 나는 울고 싶어졌다. 때때로 샛별을 생각할 때에 이유 모를 그리움이 솟아오르고 마는 것처럼, 샛별의 살 내음을 맡으며 잠을 청할 때에 허공에 부유하는 꿈을 꾸는 듯 했던 것처럼, 나는 샛별을 바라보지 못할 때 바닥없는 공허함을 느낀다.
숨을 억누르려 손등으로 입술을 눌렀다. 내쉬는 숨이 뜨겁다. 머리가 어지러워 터질 것 같다.
침을 뱉거나 기침을 하는 것처럼 크게 숨을 뱉어 버리면 무언가를 토해 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가슴에서, 살갗 아래의 뜨거운 곳에서 뭉글거리거나 단단해지며 형태를 이루고 있는 그것은 한 장의 그림에 담길 것처럼 가까웠다가, 다시 태양의 점만큼이나 멀어지길 반복했다.
“잘 자요. 나쁜 꿈꾸지 말고.”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샛별의 손가락이 옆머리를 쓸어내렸다. 깃털처럼 가볍게 움직인 손가락은 내 눈가에 머물러 작게 원을 그리다가 뼈가 불거진 뺨에 닿았다.
“나는 달아 놓은 마음이 떨어질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꿈을 꿀게요.”
마른 입술이 귓가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입술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의 여운은 길었다. 두드린 북의 마지막 진동이 하루 종일 머리에 맴도는 것처럼 귓바퀴를 벗어나지 않고 바스락바스락 귀를 울렸다.
선잠을 자고 일어나니 해가 반쯤 지고 있었다. 잠을 깨운 것은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정신을 차리고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집 안을 둘러보아도 샛별은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가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 아닌가 의아해하며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는데 깜빡 알림이 떠올랐다.
[형, 오늘 대타를 해 주기로 해서 조금 일찍 나가요. 아침엔 비슷하게 들어갈 거예요. 무리하지 말고 쉬어요.]
장난스런 얼굴로 윙크를 하는 이모티콘이 툭 튀어나왔다.
냉장고를 열어 냉수를 벌컥 삼켰다. 이상하게 허기가 도는 기분이 들어 미리 씻어 놓았던 방울토마토 몇 개를 집어 입에 넣는데 역한 냄새가 훅 끼쳤다. 그대로 화장실로 달려가 속을 게워 냈다. 먹은 것이 없어 나오는 건 노란 위액뿐이었다.
목이 칼칼하고 눈이 뻑뻑하다. 머리는 띵하고 속은 쓰리고, 피부에 닿는 공기도 찼다. 불명확한 형상들이 각각의 색으로 뒤섞이며 가슴을 가득 채우는 기분이었다.
소매로 입을 문질러 닦고 초조한 걸음으로 옷장으로 달려가 서랍을 열어젖혔다. 형태를 붙잡아야 했다. 가슴에 새겨지는 모양, 그것을 두 눈으로 보아야 했다.
케이스를 열자 단 냄새가 코밑에 받친다. 한껏 들이켜 입으로, 코로 들이마실 수 있는 모든 것으로 게걸스럽게 망상의 물감을 집어삼켰다. 시야가 흐려질수록 흐릿하던 가슴의 문양은 뚜렷해졌다.
숨소리가 거칠어 귀가 멀어 버릴 것만 같다. 피가 위아래로 멋대로 들썩이다가 고막을 두드리고 손등의 얇은 살갗을 부풀렸다. 눈이 한 뼘만큼이나 커진 것 같았다가 붓을 쥔 손이 개미만큼 작아져 아무리 휘둘러도 캔버스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하기도 했다.
허리를 기울이고 무릎에 팔꿈치를 올려 팔을 고정한 채로 집요하게 색을 좇았다. 눈동자, 손가락, 얌전히 모은 마른 무릎, 머리카락 아래로 감추어진 동그란 귀, 늘 끄트머리가 붉은 색을 띠는 길쭉한 발. 각각의 부위들은 모빌처럼 빙글빙글 돌다가 캔버스 곳곳에 달라붙어 주르르 흘러내렸다.
숨을 한번 들이마시면 까맣게 빛나던 색이 새빨갛게 죽어 버렸고, 배 속을 긁어낼 것처럼 숨을 내쉬고 나면 동그란 눈동자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찌그러졌다.
손가락 끝에 자글자글 주름이 졌다. 옆구리에 손이 붙어 버려 뻗을 수가 없다. 한겨울과 같은 차가운 바람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 발밑에 고이고 지나치게 뜨거워진 눈꺼풀 아래로는 고장 난 텔레비전처럼 불빛이 튀어 오른다. 나는 캔버스 모서리를 손끝으로 긁어내리며 목을 움츠렸다.
이 그림의 이름은 외로움이다.
***
허탕을 쳤던가 아니었던가. 밖으로 나섰던가 아니었던가. 흔들리는 시야로 눅눅하게 눌어붙은 가로등 불빛을 보았던 것 같은데 다시 눈을 깜빡이자 내 방 천장이 보였다. 시야는 흐릿하다가 선명해지길 반복하며 제대로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
작은 소리를 들었다. 인기척에 돌아보니 샛별이 어두운 방에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다. 반짝반짝. 샛별의 주위로 점점이 작은 빛이 휘돌았다. 넓은 창으로 쏟아지는 파란 달빛 속에서 샛별은 환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입술을 벌려 뻐끔였다.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아. 귀를 기울여도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샛별은 자꾸 웃기만 했다. 음소거 버튼을 누른 세상 같았다.
눈을 찌푸려 샛별을 바라봤다. 입술이 껌을 씹는 것처럼 우물거리다가 참지 못한 웃음으로 길게 벌어졌다. 그 안으로 반들거리는 속살과 작게 움직이는 혀가 보일 때마다 가슴이 크게 뛰었다.
‘어서 이리 와.’
입 모양을 보았다. 샛별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리고……. 길게? 어떻게? 어리둥절한 나는 허리를 구부려 샛별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샛별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둠 속에서 손이 뻗어 나와 내 옷깃을 쥐어 당겼다.
이건 안 돼. 단추를 풀고 싶지 않아. 이대로 목을 졸라 두고 싶어.
잘 구부러지지 않는 손가락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물빛 단추를 눌렀다. 손가락 아래가 뜨겁다. 단추의 모양과 질감, 단추를 동여맨 실의 궤도가 지나치게 선명하다. 둥근 모서리 끝에 빛이 흔들거리다가 그림자에 지워졌다.
그림자는 내 앞을 가로막고서 커다란 손을 뻗어 툭툭 나를 뜯어 버렸다.
으지끈. 천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단추가 튀어 올랐다. 그 궤적을 쫓기도 전에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갈 곳을 잃은 시선의 끝에 샛별이 두 팔을 벌렸다.
‘어서 와요, 내게.’
나를 향해 품을 벌린 너의 모습은 지나치게 근사해서 입이 말랐다. 나는 이 그림의 이름을 찾아야만 한다는 강박으로 머리가 아파 왔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외로움 그리고 그리움. 허기와 갈증. 아니다. 그것은 나의 초상이다.
헐떡이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너는 두 팔과 다리를 벌려 나를 맞았다. 네 이름을 찾는다. 혀끝이 뻣뻣하게 굳어 더 이상 다른 단어를 찾아낼 수 없게 되었을 때, 네 입술이 나를 머금어 적셨다.
‘아.’
몸 구석구석의 세포가 동시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외쳤다. 나는 이 말을 처음 알았다. 글자의 형상이 네 모양으로 바뀌어 허리를 흔들었다. 정수리에 두꺼운 파이프를 꽂아 넣은 듯 허리뼈 마디마디가 긴장으로 요동쳤다.
네 이름은, 네 초상의 이름은…….
나는 너를.
“사랑한다.”
(D)
툭, 가벼운 낙하 뒤에 데구르르 굴러 내 발치에 떨어진 것은 손톱만 한 단추였다.
태어날 때부터 감을 줄 몰랐던 사람처럼 나는 눈을 감지 못했다. 파랗게 쏟아지는 새벽의 밤은 아름다웠고, 그 아래 뒹구는 두 사람의 섹스는 짐승 같았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그 고백에 땀에 젖은 긴 머리를 쓸어 넘기던 남자가 크게 웃었다. 온통 까맣게 눈을 감은 집 안의 그림자 속에서 나만 눈을 감지 못하고 다만 숨을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