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백야
(J)
눈을 뜬 건 이미 해가 중천까지 떠오른 오후였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다. 엉망으로 휘저어진 기억들 사이에서 평소의 몇 배는 술과 약을 들이켰던 것을 떠올렸다.
푹신한 침대 감촉에 위화감이 들었다. 내가 여기서 잠들었던가. 창문은 한 뼘 정도의 넓이로 열려 있었고 샛별이 달아 놓은 아이보리색 커튼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지난밤의 어지러운 풍경들이 소음처럼 귓가를 울리는 것과는 다르게 집 안 풍경은 어디까지나 평온했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눈꺼풀에 들러붙어 있던 시커먼 잔상들마저 이내 지워져 버렸다.
몸을 일으켜 바닥에 발을 디뎠다. 내 발로 걸어와 잤다면 침대 밑에 놓여 있을 것이 분명한 실내용 슬리퍼가 보이질 않는다. 맨바닥의 감촉을 낯설어하며 방을 가로질러 거실에 나갔다. 거실 또한 조용했다. 현관 앞에 놓인 작은 선반에서 실내화를 찾아 신고 미끄러뜨리듯 걸음을 옮겼다.
닫힌 문을 하나씩 전부 열었다. 기분이 묘했다. 분명 모든 것은 제자리에 놓여 있고 어제와 오늘의 상황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모든 것이 이질적이었다. 꼭 집 안 어딘가에 내가 모르는 굉장한 것을 숨겨 둔 것처럼 가슴 한구석이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화장실과 작업실 문을 열고 베란다에 연결된 창고와 부엌 다용도실까지 열어 본 뒤에 마지막으로 짐과 옷이 정리된 방의 문을 열었다. 코끝에 닿는 냄새에 움찔 얼굴이 굳었다. 다른 방과는 확연히 다른 농도의 방향제와 막 청소를 마친 듯 마른 걸레 냄새가 났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눈꺼풀을 한껏 밀어 올리며 둘러보았지만 어제와 다른 점은 찾을 수 없었다. 막 돌아서려 몸을 비트는 순간 시선 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잘 사용하지 않는 쓰레기통이었다. 옷과 잡다한 짐이 놓여 있을 뿐인 이 방에서 쓰레기가 나올 일은 거의 없었지만, 올이 풀려 입지 못하는 옷이나 빨래가 잘못되어 반으로 줄어 버린 것들은 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곤 했다.
쓰레기통에 들어 있는 것은 푸른색 셔츠였다. 그 위로 쌓여 있는 걸레와 티슈, 본 적 없는 낯선 옷까지 모두 영문을 알지 못해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때 발치에 떨어진 작은 단추를 발견했다. 단추에 감긴 것은 옷 색깔과는 잘 맞지 않는 검은색 실이었다. 연습하는 새에 실을 모두 써 버려 까만 실밖에 없었다고 쑥스럽게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샛별의 얼굴이 단숨에 가슴 속을 가득 채웠다. 눈을 뜬 직후부터 느끼던 위화감이 가득 부풀어 숨이 가쁠 정도로 목까지 차오르더니 물감을 씻어 낸 물처럼 다른 색으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먹먹하게 가리어진 기억 속에서 반짝이던 하나의 이름을 찾아낸다.
“……별아.”
지난 새벽, 가여울 정도로 울먹이던 그 얼굴에 하나의 이름을 덧붙였던 것을 떠올렸다.
아아, 나는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고 있었다.
네 이름과 네 몸짓에서 흐르는 평온한 공기가 좋았다. 네가 나를 향할 때 짓는 놀라울 만큼 부드러운 미소와 닿아 오는 모자란 손가락이 품은 온기, 이따금 몸을 움츠려 무언가를 두려워하듯 떠는 모습마저 사랑스러웠다. 그 모두를 더해 당연한 것처럼 내 가슴에 들어와 여린 숨을 내쉬는 너를, 나는 줄곧 사랑했다.
가슴이 저리고 아파서, 온몸의 피가 쓸려 내려간 것처럼 힘이 빠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숨이 막혔다. 샛별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까만 눈동자와 금세 붉어지는 작은 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사랑스러움이 가득 차올라 숨도 쉴 수 없었다.
온몸을 휩싸는 이 열망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왜 미처 몰랐을까. 샛별이 아니고서는 세상에 비추는 어떤 색도 가려 낼 수 없고, 한 덩어리로 뒤섞인 혼란 속에서 단 하나의 형상도 알아볼 수 없음을, 왜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형?”
온몸에 피가 빠져나간 것처럼 차가워진 몸이 단숨에 뜨거워졌다. 목소리를 들은 귀에서부터 손끝과 발끝, 피를 퍼 올리는 심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처럼 너의 이름을 부르며 크게 뛰었다.
몸을 돌려 바라본 곳엔 샛별이 있었다. 아니, 아주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다.
성급히 샛별에게로 다가가 두 팔로 그를 품에 끌어안았다. 샛별의 몸이 품 안에서 굳었다. 분명 당황으로 얼굴을 붉히며 습관처럼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고서 눈썹을 내려뜨리고 있을 것이다. 그린 듯이 생생한 샛별의 얼굴을 떠올리자 참을 수 없이 사랑이 넘쳐흘렀다.
“아아, 별아.”
별아. 나의 별…….
나는 울음처럼 샛별의 이름을 쏟아 내며 향기로운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울고 싶었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사랑스러웠다. 눈을 떠 바라볼 수 있는 이곳에 샛별이 있다는 것이, 그 몸을 품에 안아 실체를 더듬어 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나는 너를.”
샛별이 손바닥으로 가슴을 떠밀어 나를 밀쳐 냈다. 숙여진 고개에서는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샛별은 나를 바라보지 않은 채로 말을 끊어 냈다.
“형, 저 피곤해서 잠깐 쉴게요.”
샛별은 두 번 돌아보지도 않고 걸음을 옮겨 소파에 몸을 눕히더니 담요를 펼쳐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신기한 일투성이였다. 습관처럼 손을 뻗은 자리에 샛별이 있다는 것이 매순간 너무도 놀랍고 감동적이어서 나는 그만 TV를 보다 말고 눈시울을 붉혔다.
샛별이 당황한 얼굴로 괜찮냐고 물었지만 가까이 다가온 얼굴이 사랑스러워 무심코 입을 맞추고 말았다. 샛별은 놀라 어깨를 움츠리더니 떨리는 입술을 벌려 빗물을 받아 마시는 작은 새처럼 나를 받아들였다.
매일같이 하던 사소한 스킨십에도 나는 소소한 감동을 느껴 한참이나 움직이지 못하고 멈출 때가 많았다. 손을 붙잡은 채로 30분이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기도 했다.
이상했다. 샛별의 손을 잡고 눈을 감으면 잔잔한 파도가 밀려와 가슴으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샛별의 그 부드러운 몸 안에 들어 있는 어떤 ‘사랑스러운 것’이 맞닿은 피부를 통해 내게 흘러 들어오는 듯했다. 자다가 깨어 어깨 닿는 자리에 샛별이 누워 잠든 것을 보고 오래도록 숨을 죽여 울었다.
사랑. 뻔하고 지루한 그 말이, 나를 설명하기에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던 지나치게 달콤한 그 울림이 이토록 나를 들었다 놓을 줄은 몰랐다. 나는 매순간 사랑을 깨달았다. 샛별이 비운 자리에 남은 소파 가죽의 눌린 자국과 개수대에 담가 놓은 두 사람 분의 그릇, 현관에 나란히 놓인 크기가 다른 운동화 두 켤레.
샛별이 스치고 지난 자리에는 작은 빛이 반짝였다. 섬광 같은 강렬함이 아니라 빛을 본 뒤에 눈을 감아 눈꺼풀에 아롱지는 희미한 빛과도 같았다. 느리게 번져 가는 그 빛은 결코 빠르게 사라지지 않고 내 주위에 잔상을 흩뿌렸다. 눈을 감은 채로 손으로 눈두덩을 더듬어 보면 샛별이 두고 간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
눈을 떴을 때 샛별이 등을 보인 채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해가 거의 떨어져 저녁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샛별은 헐렁한 잠옷을 벗고 까만 티셔츠를 팔에 끼웠다.
마른 등이 움직임에 따라 잔잔하게 일렁였다. 날개 뼈가 두드러졌다가 사라지는 모양이 꼭 율동하는 사막의 언덕 같았다. 고귀한 형상을 눈앞에 둔 것처럼 불순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계속 바라보고 싶어졌다.
“별아.”
“응? 왜요?”
“조각, 해 볼까.”
“그림이 잘 안 풀려요?”
샛별의 얼굴이 흐려진다. 나도 모르게 허공에 손을 들어 올리던 것을 등 뒤로 어설프게 감추었다.
“그림.”
“응. 왜 그래요. 요즘 통 작업 못하는 것 같은데.”
잊고 있었다. 못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한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하루 종일 보아도 샛별은 질리지가 않았다. 숨을 쉬고 움직이는 모양은 매순간 새로 덧씌워지는 그림과도 같았다.
사람이라면 살아 움직이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그것을 처음 깨달은 사람처럼 굴었다. 샛별이 눈을 깜빡이고 입을 벌려 소릴 내고 손가락을 움직여 물건을 잡는 그런 사소한 일에도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열렬하게 바라보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 내 자신의 윤곽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순간이 있었던가. 나는 그림이 없이는 자리에 설 수 없는 사람이었다. 존재가 흐릿하고 속 안에 든 영혼이 빈곤하여 색을 칠하고 흰 종이를 가득 채워야만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가끔은 내가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이상해서 숨을 멈춰 보기도 했다. 나는 별 어려움 없이 호흡을 멈출 수 있었다. 현기증이 나서 반쯤 기절한 상태가 될 때까지도 그다지 괴롭지 않았다. 응당 그래야 했던 것을 억지로 공기를 주입하고 있었던 것처럼 호흡을 멈춘 진공 상태는 무척 편안했다.
지금은 샛별을 볼 때가 그랬다. 나는 숨을 쉬는 것도 잊고 한참이나 샛별을 바라보다가 어지럼증이 일어 비틀거리기도 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내가 샛별을 만지거나 입을 맞추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를 품에 안기도 했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감히, 품 안에서 비틀어지거나 부서질지도 모르는 것을 그토록 격정적으로 안을 수 있었을까. 과거의 자신이 조금도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다만 샛별을 어루만져 빛을 내고 곁에 두어 바라보았다.
감정을 깨달은 직후 치솟았던 사랑한다는 고백은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부끄러움으로 물이 들었다. 나는 샛별의 손을 잡고 속으로 오백 번쯤 속삭였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너를 사랑한다. 오백 번의 속삭임 뒤에 간신히 목구멍에서 끄집어낸 말은 ‘별아.’ 하고 이름을 부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형. 요즘도 새벽에…… 나 없을 때만 작업해요?”
샛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그럼요? 갑자기, 왜 멈췄어요?”
“알아 버렸어.”
샛별의 눈이 묻는다. 들여다보면 한없이 깊은 곳으로 움푹 가라앉을 것만 같은 우물 같은 눈이 나에게 진실을 추궁하는 듯했다.
“내가 그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거.”
“뭘요?”
“……마음을.”
사랑을.
차마 그렇게는 말하지 못했다. 여전히 나는 내 마음이 수줍었으므로. 뜨거운 얼굴을 들어 샛별을 다시 바라보았을 때, 샛별은 멍한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살짝 문이 열린 옷 방의 내부가 보였다. 입구에 약간 비껴나 있는 쓰레기통에 담겨 있던 셔츠는 어느 새인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랬구나.”
샛별은 입꼬리만 당겨 작게 미소를 짓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랬었구나. 몰랐어요, 나는. 계속 옆에 있었는데도 눈치채지 못했어.”
무심코 손을 뻗어 손목을 쥐고 끌어내렸다. 드러난 샛별의 얼굴은 말끔했다. 어쩐지 울 것 같았는데. 괜히 머쓱했다. 손목을 놓아주고 이번에는 내가 얼굴을 가렸다. 캄캄해진 시야로 웃음 섞인 샛별의 목소리를 들었다.
축하해요, 형.
***
샛별과 몸을 섞지 않은 지도 2주일이 넘었다. 특별히 무슨 생각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다만 잊고 있었다. 샛별은 때때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시험하듯 내 손을 잡아 보곤 했다. 그뿐으로도 충분했다. 손바닥의 좁은 면적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처럼 충만해졌다.
그것이 기껍고 놀라워 나는 틈이 생길 때마다 샛별의 손을 잡거나 얼굴을 쓰다듬거나 했다. 사랑스러움이 흘러넘쳐 감당할 수 없을 때면 잠든 샛별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한다, 작게 속삭이면 대답하듯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좋았다.
“형, 이제 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뭘?”
“내가…… 다른 사람이랑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 거.”
커피 내리던 것을 멈추고 샛별을 보았다. 샛별은 두 손을 모아 무릎에 올린 채로 고집스럽게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혀, 형이 원한다면 굳이 나한테 숨기거나 몰래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얘기예요. 내가 어리석었어요. 형은 내 것이 아닌데…….”
드리퍼에서 방울로 떨어지는 커피를 내버려 두고 샛별에게 다가갔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샛별의 손을 쥐었다. 샛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차갑게 식은 손에 입을 맞추고 올려다보았다. 샛별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 필사적으로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네가 원한다면, 네 것으로 해도 괜찮아.”
“……짓말.”
거의 들리지도 않게 작게 중얼거린 샛별이 제 스스로 놀라 입을 꾹 다물었다. 손을 뻗어 창백해진 뺨을 어루만지고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샛별은 굳은 채로 미동도 하지 않다가 내 손길이 어깨를 지나 조심스럽게 팔뚝을 주무를 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할 일이 생각났어요. 커피는 나중에 마실게요.”
테이블에 있던 휴대폰만 챙겨 황급히 걸음을 재촉하면서 샛별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다녀오라는 인사를 할 틈도 없이 순식간이었다.
부풀었던 것이 다 꺼져 버린 커피 가루를 필터 채로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진하게 우러난 커피를 머그컵에 부었다. 옅게 피어오르는 김에서 고소한 향이 났지만 입으로 삼켜 그 맛을 즐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진한 커피를 잘 마시지 못하는 샛별을 위해 포트에 담겨 있던 뜨거운 물을 다른 컵에 반쯤 채우고 머그에 담겨 있던 것을 부었다. 두 잔으로 만든 커피를 소파 테이블에 내려놓고 샛별이 앉아 있던 자리 옆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였다. 아직 샛별이 앉은 자리의 자국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세 시간이 지났다. 알바에 늦지 않으려면 지금쯤은 들어와 저녁을 먹어야 할 텐데. 샛별에게선 아무런 연락도 없다. 커피는 이미 다 식어 바닥에 잔여물이 가라앉았고 더 이상 향도 나지 않는다. 샛별이 앉은 자리의 자국은 모두 지워져 소파 가죽은 판판하게 부풀었다.
“너무 늦는데.”
휴대폰과 차 키, 지갑을 챙겨 밖으로 나섰다. 일단은 조금 더 기다려 보고 연락이 닿지 않는다면 근처를 돌며 찾아야겠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쩌지. 아니다. 단순히 바람이 쐬고 싶어 산책을 하는 걸 거다. 샛별은 자기가 노출되면 내게 아주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고, 그 때문에 한낮에는 외출을 꺼렸으니까 그동안 많이 답답했을 것이다.
샛별이 다닐 만한 곳을 생각하며 건물 입구로 향했다. 유리로 된 자동문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부드럽게 열렸다. 입구에 몇 개 되지 않는 계단의 양옆엔 작은 화단이 있고, 그 높이는 걸터앉기에 나쁘지 않다. 게다가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 덕에 내가 앉아 있는 것을 돌아오는 샛별에게 들키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시한 장난이었다. 쑥 나타나 깜짝 놀래 주면 샛별이 어떤 얼굴을 할까.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입을 벌리거나, 삐칠 때 그러하듯이 눈과 입술을 모아 나를 노려볼지도 모른다.
“하늬야.”
시야를 가리는 나뭇가지를 손가락으로 치워 내는데 샛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축축하고 어두웠다. 나는 계단을 밟아 내려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섰다. 발끝까지 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나 이제, 못 믿겠어.”
숨죽인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었다.
“모든 게 다 거짓말 같아.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어.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 하늬야, 너한테 가면 안 될까?”
“가다니.”
팔로 가지를 밀어 시야를 가리던 것을 치워 버렸다. 화단에 기대앉아 있던 샛별이 내 얼굴을 보고 놀라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바닥에 나뒹구는 휴대폰에선 박하늬가 샛별의 이름을 부르며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떨리는 눈썹, 크게 뜨인 눈, 괴롭게 깨문 입술. 내가 바랐던 샛별의 놀란 얼굴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어딜 가려고.”
“형, 그게 아니라…….”
“가지 않겠다고 했잖아.”
“나는…… 그게 아니라요. 형, 내 얘길 들어 봐요.”
가지 않고 곁에 있어 주겠다고 했다. 누구라도 질려 버리고 말 초라한 내 알맹이를 보고도 도망가지 않고 머물러 주었다. 웃어 주었다. 나를, 내 그림과, 그림을 그리는 나를, 그리지 않는 나를, 주저앉거나 멈춘 채로 가라앉는 나를 안아 주고 아껴 주었다.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결국 이렇게 샛별 또한 나에게 질린 걸까. 그들이 원하는 신비로움을 지키지 않아서, 사실은 생각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어서 인내심에 한계가 와 버린 걸까. 새벽을 틈타 스스로를 미친놈으로 만들어 지저분한 색을 찍어 바르던 것을 알아차린 걸까. 아니면 그마저도 할 의지를 잃어버리고 오직 샛별만을 바라보며 게으름을 부리는 꼴에 진절머리가 난 걸까.
혹은, 내 마음을 들켜서. 샛별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럴듯한 흉내조차 내지 못하게 된 내 마음을 들켜 버려서.
“네가 어떻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추궁할 수는 없는 거였다. 샛별은 잘못이 없다. 매달린 것도, 곁에 두지 않고는 숨조차 쉴 수 없이 나약해진 것도 모두 내 잘못이었다.
내가 불쌍해서 곁에 있어 주었으니, 그 애잔함이 짜증으로 바뀌어 곁에 머무를 이유가 지워져 버렸다면 더 초라해지는 것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었을까.
몸을 돌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황급히 뒤를 쫓는 샛별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듣고도 멈추지 못했다. 내 어깨를 돌려세워 샛별이 내릴 선고가 두려웠다.
나 이제 더 이상 형의 겉모습에 속지 않아요. 속아지지 않아요. 사실 그림 같은 거 하나도 못 그리는 거죠? 거짓말은 그만둬요. 다른 사람들도 더 이상 속지 않아. 당신은 가짜니까!
귀에서 소리가 왕왕 울렸다. 귀를 틀어막고 침대에 엎어져 몸을 떨었다. 틀림없다. 미루고 미뤄 왔던 악몽이 현실이 된 거다. 거봐, 너 같은 건 이렇게 될 운명이었어. 정체 모를 목소리가 머리 안쪽에서 낄낄 나를 비웃는다.
차갑게 식은 손이 나를 붙잡아 돌린다. 귀를 틀어막은 손을 떼어 내고 질끈 눈을 감은 얼굴을 품으로 당겨 안는다.
“형, 제발. 내 얘길 들어요.”
“손잡아 줘.”
식은땀으로 축축한 손을 샛별이 맞잡는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이미 내게 남은 마음이 동정심뿐이더라도 상관없다. 난 이제 정말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여기서 더 초라해져 샛별의 동정심의 기한이 늘어난다면, 금단증상으로 밤마다 구토를 하고 추하게 바닥을 기어 다니며 몸을 긁어 대는 꼴을 들켜도 좋았다.
아직까지도 시계로 둘둘 가려 놓은 손목을 들이밀어 다시 그어 버릴지도 모른다고, 이번에야말로 깊은 곳까지 날을 쑤셔 넣어 굵은 핏줄을 잘라 내고 말 거라고 떼를 쓸 수도 있다. 네가 떠나지만 않는다면.
“가지 마.”
“형.”
“키스해 줘.”
샛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입가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샛별은 나를 부를 것처럼 입을 벌려 망설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목울대가 울렁이는 것이 보였다.
샛별은 품에 안은 나를 천천히 눕히고 살며시 입술을 포개었다. 덧그리듯 부드럽게 겹치는 입술 사이에서 안으로 움츠러든 혀는 좀처럼 내 안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혀를 내밀어 핥아 내자 경직하며 굳어 버렸다.
“별아. 가지 마.”
목으로 팔을 둘러 샛별의 어깨를 쥐었다. 몸을 돌리게 해서 내가 누웠던 자리에 샛별을 눕히고 조금도 응해 주지 않는 입술을 거듭 겹치며 질척한 구애를 했다. 샛별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뜨지 않았다. 머리가 뜨겁고 가슴이 시렸다.
“아직 그럴 수 없어.”
네가 없이 어떻게 내가.
두 손으로 셔츠를 들어 올려 맨살에 입을 맞추었다. 긴장으로 움찔 몸이 튀었다. 성급한 손놀림으로 버클을 풀고 샛별의 바지와 속옷을 벗겼다. 움츠러드는 허벅지를 벌려 그 사이에 얼굴을 묻어 숨을 흘리자 샛별이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우리는 아직 사랑할 수 있다. 나는 기억한다. 몸을 섞을 때마다 샛별의 온몸이 분홍으로 물들어 촉촉해진 살결로 나를 휘감던 것을. 눈물이 맺힌 눈으로 웃다가 우리는 입을 맞추고 손을 깍지 끼고 빈틈없이 서로를 맞잡아 겹쳐진 채로 더운 체온을 나누었다.
좋아요. 습기 가득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이던 목소리를, 내 등을 힘껏 끌어안다가 부끄러운 듯 입술을 깨물던 얼굴을 나는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
한 시간을 들여 샛별의 몸을 애무했다. 아무리 입을 맞추고 손바닥으로 어루만져도 샛별의 체온은 오르질 않았다. 뒤가 풀리는 것도 늦었다. 끈질기게 손가락으로 문지른 끝에 벌어지게 되었지만 이미 허벅지까지 온통 젤로 축축하게 젖은 뒤였다.
샛별은 숨은 죽이고 눈을 감은 채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너무 낯설어 껴안아 입을 맞추면 천천히 입술을 벌려 나를 받아 줄 뿐이었다. 눈동자가 보고 싶어 눈꺼풀에 입을 맞추고 손가락으로 근처를 문질러 봐도 샛별은 눈을 뜨지 않았다. 가끔 코로 가쁜 숨을 들이켜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무릎을 잡아 벌리고 그 사이에 앉아 삽입할 준비를 하면서 나는 가물거렸던 꿈의 일부를 떠올렸다. 우리는 아플 정도로 세게 끌어안은 채로 바닥을 뒹굴었다. 나는 사랑한다 외치고 샛별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더 깊이 받아들였다.
내가 사랑한다 말하면 너는 이번에야말로 놀란 얼굴을 할까.
한 시간이나 애를 썼던 뒤쪽은 놀랄 만큼이나 빠듯하고 좁았다. 반쯤 밀어 넣자 샛별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멈추고 아프냐고 물어도 샛별은 고개만 저었다. 조금씩 넣어 결국엔 모두 집어넣고 천천히 흔들었다. 샛별은 한 번도 보지 못한 괴로운 얼굴로 숨을 헐떡이다가 단말마의 비명 같은 신음을 터뜨렸다.
“별아. 내 얘길, 들어 봐.”
나는 널 사랑해. 너 없인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네가 가면 나는.
“형…….”
처음으로 샛별이 입을 열었다. 샛별은 손등으로 눈을 가린 채로 맥없이 흔들렸다. 벌어진 입에선 마른 숨소리만 났다. 목울대가 오르내리더니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코가 빨갰다. 몸은 여전히 차가웠다.
“더 이상은 못 하겠어.”
샛별은 소리 없이 울었다. 내가 기어코 끝까지 마치지 못하고 물러나 고개를 숙일 때까지,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의 몸이 밤공기에 차게 식을 때까지 샛별은 오래오래 울었다.
“이제는 형을 안아 줄 수가 없어……. 너무 아파요. 힘들고 괴로워서, 더는 못 하겠어.”
흐트러진 이불을 당겨 샛별의 몸에 덮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미안해요. 내 멋대로 기대하고 혼자 실망해 버려서. 형은 그런 게 아니었을 텐데.”
더는 들을 수가 없어서 차 키를 들고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동이 틀 때까지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운전을 했다. 완전히 아침이 밝아 눈이 부셔 운전을 할 수 없을 때까지 계속 나돌았다. 막연하게 샛별의 생각을 했다.
구름 너머에 있는 것처럼 모든 게 흐릿했다. 손바닥 아래 핸들의 감촉도, 깔고 앉은 시트도, 전부 꿈속의 일처럼 흐리멍덩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침대는 원래 그랬던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은 척 눈을 감고서 잠을 청했다. 베개에 얼굴을 박아 문지르니 희미하게 샛별의 향기가 났다. 나는 원치 않는 꿈속에서 오래도록 눈물을 흘렸다.
(D)
눈 한번 깜빡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마치 한 몸인 것 같았다. 한 치의 틈도 없이 엉겨 붙어 입술을 누르고 살을 더듬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칼을 산발로 흐트러트린 남자는 끊임없이 웃음을 흘렸다. 어딘가가 마비된 사람처럼 웃고 또 웃다가 절박하게 자신을 끌어안고 사랑한다 말하는 형의 몸을 밀어 냈다.
형은 남자의 발목을 붙잡으며 그 발등에 입을 맞춰 사랑한다 말했다. 지퍼를 채우지도 않고 상의의 단추를 잠그지도 않은 채로 남자는 웃기만 했다.
일어나는 걸음이 불안정하다. 남자는 비틀거리며 집 안 곳곳에 몸을 부닥치면서 걸어 나갔다. 현관문을 열지 못해 한참이나 끙끙거리는 것을 손잡이를 돌려 대신 열어 주자 남자는 영 생경한 것을 보듯 나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들썩이며 킬킬거렸다.
아주 비밀스런 얘기를 하듯 한 손으론 입을 가리고 다른 손으론 형이 누운 방을 가리키며 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쉬어 버린 목소리가 속삭였다. 저 새끼, 아주 병신이야. 사랑한다고만 하면 뭐든 해 주거든. 너도 해 봐.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꺼낸 남자가 돈뭉치를 흔들었다. 물론 나도 저 새끼를 사랑하지. 이 파랗게 빛나는 종이 다발만큼!
멀어지는 남자의 발자국 소리는 그 웃음소리만큼이나 불규칙하고 꺼림칙했다. 현관문을 닫자 이번에는 불규칙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가쁘게 내달리다가 금방이라도 끊어져 버릴 것처럼 금세 미약해졌다. 발소리를 죽여 다가가니 벗어 놓은 옷더미를 끌어안은 형이 방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옷 한 겹으로 겨울을 나는 사람처럼 무섭도록 덜덜 떨면서 형은 울먹이고 있었다. 다가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겁을 집어먹은 듯 질끈 눈을 감고 있던 형이 천천히 눈을 떴다.
너도 해 봐. 남자의 목소리가 귀 뒤를 간질인다.
손을 뻗어 형의 뺨에 살며시 올렸다. 형은 내 손바닥에 얼굴을 느리게 문지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울음소리는 났지만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사…….”
목이 막혔다. 보물처럼 간직해 오던 말이었다. 엄마를 잃고 나를 지탱하던 다짐들을 버려도 내놓을 수 없던 마음이었다.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 내게는 오직 형뿐이다. 내가 가진 것은 형에 대한 사랑뿐이고, 그나마 쥐고 있던 사소한 것들은 모두 잃어버렸다. 문득 주머니를 뒤집어 보니 나는 새끼손가락 하나가 아니라 팔과 다리, 움직일 수 있는 힘조차 잘려 나가고 말았다.
그 마음을 바늘에 꿰어 형에게 살짝 매달았다. 내 손으로 단정한 셔츠를 입혀 단추를 채워 줄 때에 형의 목 아래에 매달아 놓은 마음을 어루만져 보고 싶었다. 매일은 아니어도 형의 곁에 머물러 하루를 보낼 마음을 싣고 싶었다.
곁에 있어 달라, 가지 말라 나를 붙잡은 형의 마음이 나와 같지 않더라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 뒤섞여 사라져 버릴 아무런 마음은 아닐 거라고, 멋대로 믿어 버렸다. 눈이 멀었던 것이 틀림없다.
세탁물에서 맡았던 낯선 향수 냄새. 잠든 형의 머리칼에서 풍기던 옅은 담배 냄새. 잠꼬대로 내뱉던 낯선 말들. 나를 품에 안을 때 순간 낯설어하며 내 얼굴을 확인하던 당황한 표정. 무심코 우악스럽게 팔다리를 쥐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물러나던 순간.
나와 형은 둘이었던 순간이 없었다. 온전히 둘이라 믿었던 이 비밀스런 시간들조차 나는 이름도 모를 수많은 사람들과 동침하고 있었다. 형, 그리고 나. 그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유쾌한 남자들.
내 모습만큼이나 나의 마음 또한 촌스러웠다. 나는 또다시 부끄러워졌다. 잘난 것도 유별날 것도 없다. 돈으로 바꾸어 한 손에 쥘 수 있을 만큼 내 마음은 훨훨 가벼웠다.
“사랑해요.”
그 누구보다 더. 그런 유치한 말은 꺼내지 않았다.
붉게 충혈된 형의 눈이 나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미소를 짓는가 싶게 벌어진 입으로 구역질을 했다. 나의 고백은 토사물에 쓸려 그 가치에 걸맞은 냄새로 뒤덮였다.
뒤늦게 눈을 감았지만 모든 것이 너무도 선명했다.
웅크려 잠든 형의 옷을 벗기고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아 내 다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는 동안에도 형은 한 번도 깨어나지 않았다. 축 늘어진 몸은 무거웠다. 어깨에 팔을 둘러 반쯤 질질 끌어 침대에 옮겨 놓고 나자 이마에 땀이 맺혔다.
걸레를 빨아 땀과 정액으로 지저분해진 바닥을 닦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했다. 아무렇게나 내버려진 옷가지를 주워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그 속에는 내가 단추를 꿰맸던 형의 셔츠도 끼어 있었지만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탈취제를 뿌리고 마른 걸레로 물기를 모두 닦아 내어 말끔히 정리를 끝냈다.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걸레를 들고 욕실로 들어가 더러운 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빨아 놓고서 찬물로 몸을 씻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대강 털어 낸 뒤 미리 꺼내 놓았던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욕실 문을 열고 발을 내딛었다. 고요한 집 안을 채우기 시작한 햇빛은 하얗게 눈이 부셨다.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야 했다.
나는 언제나처럼 형의 은밀한 시간에 존재하지 않은 것과도 같았다. 아파트 복도를 서성이며 새벽의 향기가 가시지 않은 아침 냄새를 맡았다. 천천히 우리를 둘러싼 풍경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거리에 사람이 지나고 차가 지나는 소리를 들었다. 아주 천천히, 새벽녘의 잔상을 삼켜 냈다. 나와 관계없는 곳에서 웃음소리가 한 번, 짜증스런 투정이 한 번. 그렇게 사람들이 흘러가는 소리를 들으며 보고야 말았던 깊은 두 눈의 동요와 짙은 외로움을, 나로는 견딜 수 없었을 형의 가난한 사랑을 흐물흐물하게 불어질 때까지 입으로 녹여 삼켰다.
꾸역꾸역 기어오르는 비릿한 냄새들을 메마른 공기에 밀어 내고 소매에 코를 묻어 형과 나 사이의 아담한 공간에서 흐르는 향기를 맡았다. 팔과 다리가 뻣뻣하게 굳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후, 길게 숨을 내쉬었다. 손을 들어 입술을 더듬어 보았다. 그 어디에도 지난 새벽 실수처럼 흘려 버린 고백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하늘을 향해 손을 활짝 펼쳤다. 손가락 사이로 하늘은 작게 조각이 나다가 약지를 지나서 흘러가 버렸다. 뭉툭하게 둥글어진 기형적인 뼈마디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손으로는 어차피 쥘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억울할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집 안에 들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은 지난 새벽과 같이 그곳에 있었다. 나를 부르는 것처럼 빼꼼 열린 문까지 같았다. 형은 바닥에 앉아 등을 웅크리고 기억을 더듬듯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목이 뻣뻣해졌다.
“별아…….”
그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사랑한다는 말을 꺼내 놓던 목소리가 아무런 악의도 없이 나를 부른다.
내 기척을 따라 형이 시선을 돌렸다. 부드럽고 깊은 눈동자,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아플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 형은 여전히 형이었다. 그 곁으로 달려가 무릎에 누워 숨을 한껏 들이켜고 싶었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손을 잡고, 초라한 고백보다 달콤한 키스를 나누면 우리는 어제의 우리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녹을 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형이 나를 부를 때, 그 향기로운 얼굴을 내게 묻어 애틋한 울림을 반복할 때에 나는 더 이상 어제의 나일 수가 없었다. 그만 내 고백에 쏟아 내었던 형의 대답만큼이나 격렬한 구역질이 치솟아 올랐다.
차마 형의 얼굴에 구역질을 쏟아 낼 수는 없어 몸을 돌렸다. 형이 닿았던 자리마다 모두 인두로 지진 듯이 뜨거워졌다가 벌레가 기는 것처럼 근지러워졌다. 수없는 이들의 악취로 뒤섞인 어지러운 체취만이 나를 뒤따라왔다. 잃었던 시간들이 점점 선명해져 코끝을 찌르기 시작했다.
***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메말랐다. 버석버석 흙모래가 일어 부서지도록 가물고 싶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면, 매 순간 내가 살아 있음을 깨닫게 하는 육체의 감각이 없다면 형에 대한 마음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를 테면 형이 조심스럽게 입을 맞춰 오는 새벽녘, 내게 다가오는 미지근한 숨결과 부드럽게 문질러지는 살덩이의 감촉으로 나는 금방 깨어났지만 눈을 뜰 수 없었다.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앞니로 입술을 긁어 살점을 떼어 내고 숨결이 닿았던 살갗을 손톱으로 긁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완전히 깨어나지 않도록 깊은 악몽으로 나를 밀어 넣는 것뿐이었다. 짐승 같았던 그 새벽을 떠올리면 마음은 차라리 편안해졌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애절하고도 혼절할 듯 어지러웠던 그 고백을 두고 형은 수줍게도 ‘마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미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던 대로, 형과 나의 사랑은 닮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내가 목격하지 않은 그 수많은 밤 동안 형은 ‘인간을 닮은 것’이 되어 피를 토하듯 사랑을 고해바쳤을 것이다. 그러니 미적지근한 체온과 함께 들러붙어 오는 사랑한다는 한마디에 바보처럼 기뻐할 필요는 없다.
내게 사랑이 단 하나뿐인 삶의 지푸라기와 같았다면, 형에게 있어선 길가에 널린 잡초를 짓밟는 행위와도 같았을지 모른다.
껍데기뿐인 고백에 나도 모르게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괴로워질 정도로 아파 와 애틋해질 때면 나는 또다시 수많은 새벽을 떠올렸다. 낯선 향기와 자국, 짐승의 흔적을 지우지 못했던 찌꺼기들과 그 사이에 바보처럼 주저앉아 한 곳만을 바라보던 날들.
“네가 원한다면, 네 것으로 해도 괜찮아.”
아름다운 그는 여전히 짐승의 꿈과 나른한 현실을 잘라 내지 못하고 내게 달콤하게 속삭인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당신은 거짓말을 알지 못하는 거짓말쟁이다. 꿈속에 머무른 시간은 그곳에 남겨 두고 꿈처럼 나른해지는 한낮에는 누구보다 순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형이 사랑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견딜 수 있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만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리고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
형이 초록과 보랏빛으로 짓눌러 놓았던 하늘을 아름답다 했던 것을 나는 후회했다. 하늘은 어디까지나 푸르러야 했다. 형의 곁에서 언제나 나는 이해심 많은 얌전한 강아지처럼 굴었지만 그건 내가 현명해서가 아니었다. 아는 것이 적어 이해를 할 어떠한 기준도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알던 것을 울퉁불퉁 멍이 들도록 짓이겨 놓았을 때 그의 사랑이 그토록 참담한 것인 줄 알았다면,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 모든 말은 변명과도 같았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형의 손을 가만히 잡아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스스로를 시험해 보는 일뿐이었어도 나는 여전히 형을 사랑했다. 내 사랑을 사랑할 수 없는 형을, 달콤한 숨결 한 자락조차 견딜 수 없게 된 형을,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것을 사랑하는 형을. ……메마른 내게 입 맞춰 수줍은 사랑을 속삭이는 형을.
형이 어떤 괴물이 되어도 좋았다. 그가 사랑을 속삭이는 짐승이 되는 순간만큼은 나는 형의 ‘사랑’일 수가 있었다. 내일은 기억하지 못할 몽상 속의 덩어리가 되어도, 짜낸 뒤에 쓰는 것을 잊어버린 물감만큼의 감정이라 해도.
사랑의 말을 배운 형은 갓 옹알이를 배운 아기만큼이나 서툴다. 바라보는 모든 물건에 음마, 하고 옹알거리는 아기처럼 눈을 감고 뜨는 그 순간을 구분 짓지 못하고 맞닿은 살결에 속삭이는 것이다. 사랑한다, 하고.
***
형은 그 어느 때보다 사랑스러웠다. 싱그러운 이끼에 달큰한 햇볕 냄새가 나는 늪처럼 향기로웠다. 그 향기가 마르지 않도록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형이 내 곁으로 와 부드러운 머리칼이 흐트러지도록 내 다리에 머리를 누일 때면 극심한 구역질과 동시에 바라 마지않던 순간에 대한 행복감으로 나는 바닥에 메다 꽂힌 채로 발목을 들려 하늘로 실려 가는 기분이었다.
이전의 우리도 그랬지만, 막 옹알이를 시작한 형은 잠시도 내 옆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잠을 자러 침실에 가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그것을 양손 가득 쥔 채로 나를 따라 침실로 들어왔고, TV를 볼까 싶어 거실로 향하면 슬리퍼를 반쪽만 신은 채로 허겁지겁 나타나기도 했다.
나는 그 모든 사랑스러운 징후를 그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착각의 얇은 막을 걷어 낸 덕이었다.
이젠 아르바이트로 집을 비운 시간 동안 형이 가엾게도 혼자 남겨져 있을 걱정이나, 혹은 작업이 잘 풀리지 않아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부수고 마는 충동에 대해 염려하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낯선 흔적을 외면하거나 혹시 형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날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잠든 틈에 도둑질하듯 키스하는 것 외에 우리는 꽤 오랫동안 사랑을 아니, 섹스를 하지 않았지만 형은 조급해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형과 몸을 섞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이때에도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형을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 그리고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과 형이 내게 질리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시시한 그 말놀음이 있기 전부터 형이 나에게 의미를 두었던 것은 오직 그뿐이었다. 우리가 몸을 섞을 때에 나는 형의 연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깨어지기 쉬운 도자기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다가도 깨부수어 껍질을 털어 내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거칠게 몰아치기도 했다.
그 어느 때에도 형은 삼킬 수 없을 만큼 뜨거운 동시에 삼킨 줄도 모를 만큼 말랑말랑했다. ‘네 손가락이, 그 빈자리가 아름다워. 감은 눈에 아롱진 그림자는 또 얼마나 애처로운지. 붉어진 가슴이 오르내릴 때 나 또한 그 속도에 맞추어 호흡해 보곤 해.’ 모든 일이 끝난 뒤에 나를 품에 안은 채 형이 속삭이던 말들은 별처럼 반짝였다.
내겐 형의 모든 것이 그래요. 형이 그림을 그리는 손도, 그 손끝에서 번져 나온 빛깔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흔들림 없는 형의 눈동자도 내겐 전부 특별해요. 형의 품에 코를 문지르며 속삭이면, 형은 단단한 그 품을 가늘게 떨며 나를 끌어안았다.
‘네 모든 것을 내 품에 가둬 새겨 둘 수 있다면.’
다정한 연인의 밀어와 같은 그 말에 웃음이 삐져나와 형의 가슴에 더 깊게 얼굴을 묻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알몸으로 뒤섞이지 않게 된 이때, 메마른 내게 형이 얘기하는 것이다. 네 것이 되어도 좋겠다고.
“나 이제, 못 믿겠어.”
나는 더 이상 아무런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도 지난 새벽의 순결을 믿을 수가 없다. 내가 외면했던 시간들을 코앞에 들이밀어 그 흔적마저 스스로 지워야 했던 밤, 나는 형과 했던 모든 시간의 빛을 잃었다.
“모든 게 다 거짓말 같아.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어.”
이제는 내 마음조차도 거짓말 같다. 형을 정말 사랑한다면, 그동안 형의 모든 행위들을 외면하고만 있었을 뿐 이미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다면 이전과 같이 형을 사랑하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형의 품에서 행복해야 했고, 그가 날 위해 준비한 허황된 거짓말에 파묻혀 인형처럼 웃을 수 있어야 했다.
“너한테 가면 안 될까?”
“가다니.”
겁에 질린 내면의 외침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 형의 절규인 것을 알았을 때, 내 얼굴은 일그러져 무너지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뱉어 버린 그 말을 되짚어 깨닫고야 만 것이다.
아아, 이제는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여전히 형을 사랑하고 형은 내게 꿈결과도 같지만, 나는 형의 곁에서 행복할 수가 없다. 도망가고 싶다. 벗어나고 싶다. 툭, 떨어져 어딘가로 굴러가 버리고 싶다.
그도 그렇잖아요. 온 힘을 다해 갈퀴처럼 매달렸던 내 마음을 잡아 뜯어 내친 건 형이었어요. 그때, 내 손가락과 맞바꾼 아픔을 견디며 형의 옷에 바늘을 수없이 찌르던 그때. 그 마음이 뜯겨 수많은 밤의 의미 없는 사랑에 뒹굴어 축축해지고 말았을 때 나는 비명을 질렀을 거예요.
나는, 내 사랑은 이렇게나 초라하고 가벼웠던가요.
그 순간 내가 형을 향해 준비된 미소를 짓지 못했던 건 마지막 남아 있던 실밥 하나가 끝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