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밤의 장막
(J)
잠깐 재생 버튼을 눌러 흘러가는 영상 속 사람들처럼 살아 있는 흉내를 냈던 나의 삶은 일시정지를 눌러 리모컨을 던져 놓는 순간 다시 멈추어 버렸다. 리모컨을 쥐었던 것은 샛별이었고, 내게 있어 아무런 소득도 발전도 없었다 믿었던 정체된 시간들은 유일하게 살아 있던 시간이었다.
침대에서 눈을 떠 하얗게 부표하던 햇살이 그대로 노랗게 가라앉아 기어이 까맣게 저물어 버릴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자리를 지켰다. 시야는 물로 씻은 듯이 선명하고 모든 것을 명확하게 느낄 수 있는데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눈알이 말라 시큰 눈물이 나올 때까지 눈을 깜빡이는 것을 잊어버리거나, 문득 숨을 내쉬는 것을 잊고 있다가 눈앞이 어질어질 흐트러진 후에야 급히 숨을 뱉어 내기도 했다.
사람이 들지 않는 작은 냇가에 구르는 법을 잊은 바위가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햇살이 알맞게 쏟아져 굴곡진 자리에 이끼를 키우고 비바람에 쓸려온 얕은 흙더미에 손가락 한마디만큼 싹이 트는 일도 생길 것이다. 그대로 묵묵히. 아무런 생각도, 움직임도, 호흡도 없이 죽은 듯이 멈춰 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다.
정신을 차려 보면 벽에 기대어 깜빡 잠이 들어 있었고 눈을 뜨면 창가에서 흘러내리는 햇빛이나 달빛을 응시하며 버석 말라 버린 눈을 끔뻑였다.
“내 이러고 있을 줄 알았지.”
3일쯤 지났을까. 하늬가 나타났다. 그는 일이 끝나자마자 달려왔는지 아이라인이 거뭇하게 남은 눈을 부릅뜨며 허리에 손을 짚었다.
“일어나. 삽질하지 말고, 버림받은 척도 하지 말고. 어디서 건방지게 불쌍한 척이야? 너 양심도 없어?”
“……내버려 둬.”
목이 너무 쉬어 말소리가 숨소리 같았다. 쉬익, 쉬익 낡아 버린 증기기관에서 새어 나오는 것 같은 쉰 소리에 하늬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병신, 육갑 떠네. 그러다 굶어 죽기라도 하려고?”
“글쎄.”
“작작해. 지금 당장 너무 힘들고 아파서 죽고 싶은 건 샛별이 걔지, 네가 아니라고.”
“……별아.”
뻣뻣하게 마른 혀 위로 굴려 보는 이름이 너무 달콤해서 그만 목이 꽉 막혀 온다. 목 아래에서부터 솟구쳐 머리통을 두드리던 그리움이 말라 버린 눈에서 툭툭 흘러내렸다. 눈알에 모래가 낀 것처럼 따끔거린다. 혓바닥은 누가 사포로 긁어 낸 것처럼 쓰라렸다. 단 한 번의 부름으로도 내내 차갑게 식어 있던 몸에 열이 올랐다.
더 이상은 못 하겠어. 힘들고 괴로워서, 더는 못 하겠어.
샛별이 남긴 말이 울컥 떠오른다. 외면했던 내 지저분한 사랑의 뒷면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넘치는 마음을 참지 못해 입을 맞출 때면 구역질을 참아 내듯 샛별의 어깨와 가슴이 들썩이던 것을, 손을 붙잡아 사랑한다 속삭이며 매달린 뒤엔 손이 트도록 박박 문질러 닦아 내던 것을, 내 품에 안아 샛별의 체취에 파묻혀 코를 문지를 때에 샛별이 파리하게 질려 베개에 고개를 처박던 것을.
“너 정말! ……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벽에 머리를 처박아 쿵쿵 울림을 내던 나를 거칠게 당겨 멱살을 쥔 하늬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눈이 빨갰다.
“넌 진짜 개새끼야!!”
눈앞이 핑핑 돌았다. 속이 뒤집혀 엉망으로 날뛰었다. 혓바닥이 안으로 말렸다 꾸역꾸역 입천장으로 들러붙으며 숨을 틀어막았다가 마치 관용을 베풀듯이 숨통을 열어 주었다.
“진짜 씨발, 너 같은 건 진짜 죽었으면 좋겠다. ……약은 절대 하지 않겠다면서! 그건, 정말로 하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잖아!!”
죽이지 그래 왜. 입을 뻐끔거린 것을 하늬가 알아보았을까. 그는 내 멱살을 틀어쥔 채로 침대에 매다 꽂았다. 목을 조를 것처럼 압박하고 그 위로 올라타 나를 흔들면서 후둑, 후두둑, 눈물방울을 떨구었다.
그 눈물이 나를 딱히 여겨서인지, 어처구니없는 나의 꼴에 분노를 느껴서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축축한 눈물이 뺨에 흘러내리는 감촉은 나쁘지 않았다. ……익숙한 새벽의 기척이었다.
“진짜 너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어디까지 더 망가질래? 얼마나 더 지랄을 해야 속이 시원해? 어? 말해 봐. 너의 그 더럽게 불쌍한 척하는 웃기지도 않은 낯짝을 언제쯤 갖다 버릴 건데! 그러다 정말 네가 뒈지기라도 하면 샛별이가 네 앞에서 울어 줄까 봐 그래?”
날카롭던 목소리가 애처롭게 바뀌었다. 하늬는 딱한 것을 바라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네 장례식장에 찾아와 엎드려 울면서 정말 잘못했다고, 너를 떠나가 외롭게 만들었다고 싹싹 빌면서 후회하고 통곡하고. 그렇게 그 애를 고통스럽고 외롭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울어 줄까?”
“씨발 새끼!”
하늬의 주먹이 뺨을 후려갈겼다. 눈에 핏발이 서 아까보다 더욱 붉었다. 하늬는 온몸을 떨며 분노를 참지 못하고 연달아 내 가슴팍이며 얼굴이며 할 것 없이 주먹을 갈겼다.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통증이 일어 몇 번인가 헛구역질을 했다. 그래도 하늬는 봐주지 않았다.
“너 얼마나 그 애를 더 울릴 셈이야. 네가 뭔데 그렇게 걔를 고통스럽게 만드냔 말이야!! 왜, 왜 그 애가 가진 마지막 하나마저 뺏어 버리는 건데! ……남은 것이라곤 너뿐이었는데. 정말, 너 하나뿐이었다고, 이 개자식아!”
“…….”
눈을 끔뻑였다. 내가 가진 유일한 것이 샛별이라고 믿었다. 내게 주어진 것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나의 단 하나의 별, 사랑스러운 그뿐이라고.
그럼 샛별이 가진 것은 무엇이 있지? 샛별은 무엇을 갖고 있었나. 나의 곁에 머무를 때 샛별이 쥐고 있던 것은 무엇이었나.
“난 이제 네가 뒤져도 걔한테 입도 벙긋하지 않을 거고, 저를 닮은 병신 새끼들하고 쿵짝거리면서 퍽 잘 살고 있다고 얘기할 거야. 네가 병신처럼 버려 놨던 걔 일상을 하나하나 되찾아 주면서, 너 같은 병신을 사랑해 보라고 부추겼던 내 죗값을 치를 거라고. 알아?”
“어디 있는지 알아?”
“알아! 알다마다! 너의 그 병신 같은 짓거리 때문에 매번 상처받아 숨죽일 때마다, 돌아갈 곳도 없는 애가 숨이라도 쉬어 보겠다고 가방 하나뿐인 짐을 싸고 달아날 때마다. 그 애가 도망칠 곳이 하나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
가방. 눈앞에 흐릿하게 샛별의 가방이 떠오른다. 낡고 커다란 언제나 팽팽하게 물건으로 가득 차 있던 백팩 하나. 무엇이냐 물었더니 이삿짐이라고 했다. 샛별의 속옷과 가벼운 옷가지는 늘 그 가방에서 들었다 났다 했고, 새벽녘이면 몰래 무언가를 꺼내 보다 내 기척에 놀라 집어넣곤 했다.
무엇이냐 물어보면, 인사를 하는 거라고 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그 말을 무심코 넘기고 말았던 것은 다만 나의 무심함에 지나지 않았다. 샛별은 끝내 가방 지퍼를 활짝 열어 물건을 밖으로 꺼내어 놓는 일이 없었다.
“죽어도 너한텐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얘기해 주는 편이 네가 더 괴로울 것 같아서, 샛별이한텐 미안하지만 그래도 말해야겠어. 너 샛별이가 왜 떠나야 했는지 묻기는 했어? 너라면 당장이라도 죽는 시늉까지 할 것 같았던 애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던 거, 뭐 때문인지 묻고 사과한 적 있어?”
“그건 내가…… 그 애가 싫어하는 일을 했으니까.”
하늬가 붉어진 눈을 문질러 닦으며 어깨를 들썩여 웃음을 흘렸다. 그게 명백한 비웃음이란 건 세 살짜리 어린애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내 위로 올라탄 하늬의 그림자가 나를 덮어씌우고, 나는 까맣게 그림자에 삼켜져 꼴딱꼴딱 숨만 삼켰다. 어쩐지 늪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처럼 뒷덜미가 뻐근했다.
“말 참 예쁘게 한다, 개새끼야. 네가 존나게 다른 새끼랑 떡치면서 걜 울렸을 때 샛별인 엄마를 잃었어. 너 같은 씹새끼 때문에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면서 네 좆이 다른 새끼한테 들락날락하는 걸 보는 순간, 엄마가 죽었다고.”
마지막으로 멱살 쥔 손을 짓눌렀다가 놓고 기침을 터뜨리며 몸을 새우처럼 웅크리는 나를 멸시하듯 내려다보며 하늬는 몸을 일으켰다.
“샛별이 걘 너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무것도 남지 않은 외톨이란 말이야.”
“……잠깐.”
“그리고 기어코 네가 마지막으로 그 애에게 남은 하나마저 시원하게 부숴 버렸지. 그렇게 예쁘게 웃을 줄 알던 애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그러는 거야. 너를 보기만 해도 토할 것 같대. 네가 너무 끔찍해서, 네가 숨만 쉬어도 역겨워서 속이 뒤집힌대. 네가 만지면 벌레가 기는 것 같고, 네가 사랑한다 속삭이면 귀가 썩을 것 같다고 하더라.”
신경질적으로 문을 걷어찬 하늬가 나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아, 행여나 뒤질 생각은 하지도 마라. 하나도 안 불쌍해 보이니까.”
쾅. 현관문이 요란하게 닫히고 하늬의 기척이 멀어져 이윽고 익숙한 침묵이 다시 나를 둘러쌀 때까지 나는 아무런 대꾸도,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귀가 멀어 버린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깊었던 침묵의 끝에 나의 지저분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쉬이익. 쉬이익. 갈라진 목구멍을 타고 오르는 소리는 낡아 빠진 신발 뒤축이 밟힐 때마다 나는 신음처럼 끔찍한 오물이 뒤섞여 있었다.
감히, 떠오르는 이름을 부를 수가 없었다.
***
시간이 흘렀다. 자꾸만 흘렀다. 가급적이면 시간의 뒤편에 남겨져 고인 물처럼 썩어 가기를 바랐지만, 손목을 비틀고 몸부림을 쳐 봐도 질질 끌려가고야 말았다. 배가 고프면 끼니를 때웠고 기계적으로 이를 닦고 몸을 씻었다. 졸리면 잠이 들었고 눈을 뜨면 아침이 왔다.
눈을 부릅떠 지켜보고 있으면 그 비밀스런 움직임을 멈추고 시침과 분침 사이 어느 아득한 시간으로 떨어져 버릴까 싶어, 하루 종일 소파에 앉은 채 허공을 노려보기도 했다. 또는 흐르는 시간을 모르는 체 무시하고 있으면 어느새 멈추어 있지 않을까 하며,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도록 손을 바삐 움직여 그림을 찍어 내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약을 먹지 않아도 몽롱했고 때로는 물감 냄새에도 헛구역질을 하며 몸을 들썩였다.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 초조함을 억누를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연필이 부러지도록 짓눌러 스케치를 했고 붓이 뭉개지도록 거칠게 터치를 하며 색을 입혔다. 동시에 여러 개의 그림을 그렸다.
견디기 어려운 날엔 옷장에 숨겨 놓은 약을 들이켰지만 그리 자주는 아니었다. 색을 칠하다가도 울었고 선을 잇다가도 오열했다.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색을 욱여넣으며 도저히 떠올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이름을 생각했다.
별아, 나의 별아.
그림을 가득 채운 건 새까맣게 덩어리진 나의 감정들뿐이었다. 그것은 욕망인 동시에 후회였고, 갈망이자 두려움이었다. 이 감정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그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사랑은……. 아니, 나의 사랑하는 이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바닥에 흘리고 간 시커먼 기름 웅덩이, 몇 년이나 방치된 길가의 뒤엉킨 먼지덩어리, 산기슭 한구석에 봉긋하게 솟아오른 흙무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아 내려앉은 잿빛의 폐가. 낮게 내려앉은 먹구름이 삼켜 버린 지평선. 그 모든 이미지들이 붓 끝으로 들러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원하는 것은 조금도 그릴 수 없었다. 너를 그리는 모든 갈망을 쏟아 내어도 그 어느 빛깔 하나 너를 닮지 않았다. 나는 아주 장님이 되어 버렸다. 멍청이이기도 했다.
매 순간 손가락을 목구멍에 집어넣어 억지로 구토를 유발해 내는 것처럼 손가락이 뻣뻣해지도록 괴로운 그리움을 통하지 않고는 너를 떠올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바닥으로 끄집어 내린 형편없는 내 욕망의 그 어디에도 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나의 형편을 즐거워하는 이가 꼭 한 명 있었다. 최기준이었다. 그는 이제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나를 찾아왔고 내가 그려 놓은 돼먹지 못한 심정들을 들여다보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즐거워했다.
“거봐, 내가 그럴 거라고 했잖아. 순진하게 생긴 애들이 더하다니까. 화백님만 속앓이하는 거지 뭐. 힘들어서 어떡해.”
묵묵히 붓을 찍어 누르는 나의 뒤에 서서 그는 결코 위로를 전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없는 발랄한 어조로 종알거렸다. 귓속을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이전에도 종종 이런 증상이 있기는 했지만 이제는 그 증세가 더욱 심해져 조금만 듣기 싫은 소음이 들리면, 귓바퀴를 우악스럽게 쥐어뜯을 듯이 비틀지 않고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발밑으로 가라앉아 있던 감정이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기어올라 얼굴이 뜨거웠다. 손에 들고 있던 팔레트를 집어 던지고 양손으로 귓바퀴를 잡아 마구잡이로 비틀어 댔다. 허둥거리는 최기준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그것은 내 흥분을 더욱 부추겼을 뿐이다.
나는 어느새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자꾸만 혀가 뒤로 말려 들어가 제대로 구부러지지 않는 발음으로 그를 향해 꺼지라고 외쳤다. 손에 쥐고 있던 붓이 엉망으로 뺨에 선을 그었고 마구잡이로 휘두르느라 허벅지와 옆구리가 찍혔지만 그런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그를 내쫓고 싶었다.
샛별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올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으로도 구역질이 났다. 그 이름은 내 것이었다. 별아, 하고 세상에 모든 희미하게 반짝이는 것들을 모아 놓은 듯 혀끝에서부터 따스해지는 그 울림은, 물기를 머금은 새벽녘에 잔디처럼 코끝으로 맡아지는 풋풋한 향내 어린 그 이름은, 그 부름만큼은 나의 것이었다.
전시회 일정을 전하기 위해 일주일 후 돌아온 최기준의 얼굴엔 미처 빠지지 않은 멍이 퍼렇게 물들어 있었다. 눈이 뒤집힌 나를 말리려다 팔꿈치에 얻어맞았다는데 내 기억에는 없었다. 사과 한마디 없이 멀뚱히 쳐다보고 있으려니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재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가장 외면하고 싶은 역겨운 그림 몇 개를 골라냈다.
그는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았고 나는 그림만 그렸다. 그저 붓으로 색을 채우고 다시 새 종이를 꺼내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어느 순간 내가 채워 놓지 못한 그림의 빈틈으로 빨려 들어가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마는 꿈을 꾸고 있었다.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작은 틈, 스케치를 보지 못하고 덮어 사라져 버린 얄팍한 선에 담겨 있었던 흐릿한 감정, 나도 모르게 다른 색으로 찍어 누른 하늘의 오점. 끝내 꺼내 들지 못한 샛노란 별빛. 이건 더 이상 그림도 뭣도 아니었다. 변명과 고해와 너절한 욕심을 습관적인 몸짓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초침을 부러뜨려 놓는다고 해서 시간이 멈추지는 않듯이 내 주변의 모든 것은 나와는 관계없이 바삐 흘렀다. 전시회의 얘기였다. 최기준은 내가 아주 넋을 놓고 있는 것이 퍽이나 기쁜 듯했다.
그가 종이 몇 장을 뒤적이며 내게 뭔가를 물으면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죠.’ 하고 기계적으로 답했다. 언뜻 홍보니 인터뷰니 하는 말을 들은 것 같았지만 그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짚어 주는 자리를 따라 사인을 몇 번인가 했고, 작업실의 그림들은 하나둘씩 포장되어 옮겨졌다. 남아 있는 그림과 옮겨지는 그림의 차이를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최기준의 말에 의하면 ‘비련의 농도’ 차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작업실에 남겨진 것은 모두 샛별이 머물렀을 때 그렸던 그림이었다.
전화벨이 쉴 새 없이 울렸다. 혹시나 샛별의 전화일까 싶어 하나도 빠짐없이 받았지만 다짜고짜 내뱉는 ‘OO의 XXX 기자입니다.’ 따위의 자기소개뿐이었다. 그중에는 친근한 듯 내 전시회에 들르곤 했던 일가친척도 끼어 있었고 걱정스런 부모님의 목소리도 끼어 있었다.
전화가 쏟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는 와중에도 부모님의 ‘걱정 말고 쉬어라.’는 말에는 웃음이 나왔다. 아마 그분들은 내가 다리를 자르거나 눈알을 하나 빼서 삼킨다고 해도 병원에 누운 나를 보며 같은 말을 할 거다. 그래, 네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헤아리겠니. 걱정 말고 쉬어라. 실제로 내 스스로 손모가지를 찍어 죽으려 들었을 때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던가.
최기준은 제법 꼼꼼히 일을 준비했고, 전시회 사진을 찍어 와 내게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몇 번인가 같이 가서 살펴보기를 권유했지만 내가 거절했다. 숨이 답답하여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구석구석에 가십지 기자들이 숨어 있는 것이 보였다. 최기준이 나를 데리고 나가려는 것은 전시회의 질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제가 꾸며 낸 홍보 컨셉에 살을 붙이기 위함일 것이다.
“아주 순조로워요.”
“예.”
“다 샛별 씨 덕분이죠. 딱 시기도 알맞게 퇴장해 줬고 말이죠.”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목이 뻣뻣해졌다. 고개를 들자 최기준의 얼굴에 물에 불은 종이죽처럼 흐물흐물한 웃음이 걸려 있다. 그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잡지 하나를 내게 던져 주었다. 찾으려고 애를 쓸 것도 없이 통째로 접혀 있는 부분을 펼쳐들자 성의 없는 모자이크로 얼굴이 가려진 샛별의 사진이 나타났다.
‘화가 J, 그의 새로운 뮤즈. 연인조차 몰랐던 그의 정체’
몇 달 전 인터뷰를 했던 바로 그 여자였다. 바깥에서 식사를 하던 우리의 모습과 함께 집으로 들어서는 모습, 창가에 서 있는 샛별의 모습, 그리고 나조차 알지 못했던 커다란 배낭을 멘 채 나를 떠나는 뒷모습까지…….
“뭡니까, 이게.”
“그렇게 해도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언제……!”
손바닥으로 눈가를 짓누르는데 목구멍이 뻑뻑하게 막혀 왔다. 희미한 기억 속에 취재니 뭐니 실실거리던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내내 죽은 듯이 잠잠하던 배 속이 뒤집히더니 머리끝까지 피가 몰리고 구역질이 났다.
얻어맞은 것처럼 콧등이 욱신욱신하더니 툭툭 바닥으로 피가 떨어졌다. 코피였다. 아무렇게나 코를 틀어쥐고 머리를 흔들었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기사를 짚어 내려갔다. 글자 하나하나가 모두 샛별을 조각내어 잘라 내고 있었다.
‘동료 P씨 - 원래 야시시한 놈이었습니다. 단골로 오는 손님마다 눈웃음을 치면서 꼬리를 치더니……. 순진한 얼굴에 속는 거죠. 아무리 봐도 그렇게는 안 생겼거든요.’
‘Y씨 – 꼬시는 대로 따라갔더니 거기가 J씨 집이더군요. 몰랐습니다. 워낙 적극적이라……. 당황스러웠지만 익숙해 보이기에 그대로 따랐을 뿐이에요. 그랬더니 J씨가 나타나 바람을 피웠다며 저를 때리더군요. 그 사람은 갑자기 제가 자기를 강간했다며 J씨 뒤로 숨어 버렸고요. 저만 새 된 거죠.’
‘W씨 – J씨는 원래 저랑 사귀는 사이였어요. 워낙 잿밥에 관심 있는 사람이 많아 제발 좀 사람 가려서 만나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모르긴 몰라도 뒤로 챙긴 게 한두 개가 아닐 거예요. 제가 보고 있는데도 뻔뻔하게 집 안을 뒤지는 사람이었으니까.’
나를 모르는 이들이 나를 염려했다. 집 안에 틀어박혀 미치광이처럼 사는 나를, 그리워하지 않는 이들이 가엾다고 말했다. 그저 속은 것뿐이라고, 어리숙한 얼굴에 넘어가 외로운 영혼만큼이나 가련한 마음을 빼앗기고 만 것이라고. 나의 마음은 실로 깨지기 쉬운 유리 조각 같은 것이었다고…….
황망한 눈을 들어 올리자 이제는 입꼬리를 찢어 놓은 듯이 웃고 있는 최기준이 보였다. 그는 손가락 사이에 티켓을 집어 팔락팔락 흔들었다.
“이게 바로 당신의 모습입니다.”
내 손안에 우그러진 잡지 위로 최기준이 티켓 한 장을 내려놓았다. 까만 배경 위로 휘갈겨 놓은 글씨가 눈에 박혀 들어왔다.
‘영혼의 해체— 광기와 슬픔 사이.’
***
스캔들은 연일 요란하게 인터넷에 오르내렸다. 수많은 인터넷 기사에 억측이 난무했고 그 아래에는 조그맣게 전시회 이름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것이 뻔한 수작이었지만 사람들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얘기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다만 기사의 딱딱한 글귀들에서 ‘성관계’나 ‘동성 연인’과 같은 흥미로운 단어가 나오는 것에 열광했다.
평소였다면 모든 대응을 다른 사람들에게 미뤄 두고 소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무시하며 지냈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각종 기사 댓글과 인터넷 게시판에는 나를 알고 있다는 이들의 증언이 넘쳐 났다.
내 섹스 스타일이 어떤지, 생김새나 몸이 어떤지. 그런 것을 흥미 위주로 떠들어 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나의 부도덕함을 비난하며 온갖 욕설을 뱉어 대는 이도 있었고 꽃뱀에게 잘못 물려 독박을 쓴 게 아니냐는 동정의 목소리도 있었다.
눈이 벌겋게 충혈될 때까지 시간을 소모하며 그걸 들여다보고 있었던 건 그 말이 특별히 상처를 주거나 분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완전히 거짓인 말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전부 다 아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깨끗한 사람이 아니었다. 굳이 반박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하루 종일 컴퓨터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내 이름을 검색했다. 혹시 몰라서 샛별의 이름도 검색어에 같이 넣어 볼까 하다가 연관 검색어로 떠오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하늬의 충고에 그만두었다.
그랬다. 이토록 내 가슴이 지진 난 듯 들썩이는 건 여지없이 샛별 때문이었다. 샛별이 기사를 읽었을까 봐. 자신의 얘기가 저급한 가십거리로 여기저기 떠돌고 있는 것을 알아 버렸을까 봐.
어쩌면 벌써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알고 있다고 외치는, 나를 비난하고 원망하는 목소리들 가운데에 그 애의 목소리가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알고 있다는 짧은 댓글에도 심장이 덜걱거렸다.
두렵고 가슴 쓰린 동시에 눈이 시큰할 만큼 무작정 그리웠다. 샛별이 이렇게나마 나를 떠올려 주기를 바랐다가 5초도 지나지 않아 스스로를 혐오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는 안 된다. 샛별은 감히 이렇게 소모되어 형태도 없이 소문으로 떠돌게 될 사람이 아니었다.
정체조차 모르는 샛별을 비난하며 꽃뱀이니 사기꾼이니 떠들어 대는 글을 발견하면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곤 했다. 마치 등 뒤에 서 있던 샛별이 내 어깨 너머로 그 댓글을 보기라도 할 것처럼. 하루 종일 인터넷을 뒤적거리며 샛별의 꼬리를 잡을 듯한 글들을 걸러 내고 지웠다.
본가로 연락을 넣었다. 도저히 힘들어서 작업을 할 수 없다, 전화로 뱉어 내는 절망 어린 나의 목소리에 질 낮은 노이즈 마케팅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까지야 당장 어찌하지는 못했지만 검색으로 걸려 나오는 것은 대부분 지워졌고 인터넷의 추측성 기사들은 모두 내려갔다.
최기준은 이미 충분하다는 듯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전시회 이름이 알려지고, 나의 조잡한 연애사가 그럴듯한 사건으로 보이게끔 하는 게 목적이었으므로 더 이상 스캔들을 끌어 올리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듯 다소 상기된 얼굴로 ‘샛별 씨는 그래서 어디 있는데요?’ 하고 물었다가, 답 없는 내 침묵에 입을 삐죽 내밀었을 따름이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하루 종일 댓글을 긁어내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어느새 전시가 시작되었다. 전시 첫날, 나는 포장을 두르지 않은 초췌한 낯빛으로 끌려 나가 한두 시간 회장을 배회하다 돌아왔다. 최기준은 마르고 버석한 얼굴의 나를 기자들이 둘러싼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웬일인지 더 이상은 얼굴을 비추지 않아도 된다기에 선뜻 돌아왔지만,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장석, 고통스런 칩거 생활 중’이라는 기사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납득했다. 아마 나는 배신의 상처에 고통스러워하며 사람들의 눈을 피하느라 집 밖에 나서질 못하는 만성 우울증 환자인 모양이었다.
몇 가지 단어를 제외하고 나면 그 또한 완전히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할 생각은 없었지만 밖에 나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나는 때때로 우울했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샛별의 흔적을 지워 내던 것은 어느새 꼬리잡기를 하듯 샛별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눈알이 뻑뻑하게 말라 사포로 긁어낸 듯이 따가울 때까지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는 우울도, 그리움도 잊어버리곤 했다.
수천 페이지의 웹사이트를 들여다보며 끝나지 않을 탐색에 기뻐했다. 단 한 글자도 놓치지 않도록 나는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꼼꼼히 글을 읽어 내려갔고, 내 이름으로 검색되는 한 개의 게시물을 발견하면 그 사이트 전체 게시물을 클릭했다.
우울은 아무리 클릭해도 다음 페이지가 나오지 않을 때 시작되었다. 하루고 이틀이고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아 마우스를 딸각거리다가 더 이상 읽을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 나는 돌연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마우스를 짓누르듯이 손에 쥔 채로, 다른 손으로는 무릎을 긁어내거나 목 주변을 문질렀다. 숨이 콱 막혀 올 때는 가슴을 두드리고 발을 굴렀다. 흐릿한 그리움으로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그런 울음이 아니었다. 발작적으로 몸을 떨고 목을 꺾으며 살갗이 패여 피가 날 때까지 손톱으로 벅벅 긁거나 다음 날 두드린 자리가 퉁퉁 부어오르도록 주먹질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보면 세상이 온통 나의 통곡으로 잠겨 버린 듯한 착각이 일곤 했다. 내 머리가 텅 비어 구멍이 나고, 그 구멍으로 나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가 쥐어뜯기는 듯이 아픈 심장의 울림이 다른 이들에게 공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휘청거리며 바닥을 기어가 침대 위로 몸을 누이고 동그랗게 몸을 말아 이불에 얼굴을 처박고 있으면 세상이 모두 나를 동정하는 것 같았다. 눈을 감으면 하루 종일 오르내렸던 뜬소문들이 활자의 모양 그대로 감은 눈 안쪽으로 뱅글뱅글 돌았다.
개새끼. 호모새끼. 더러운 자식. 비열한 놈.
기껏해야 1000분의 1도 되지 않는 나에 대한 욕이 목구멍 위로 부풀어 오르다 가는 샛별의 목소리가 되어 귓가에 펑펑 터졌다. 벌레 같은 모양으로 침대 위에서 꿈틀거리는 내 등 뒤로 천사처럼 아름다운 샛별이 내려앉아 부드럽게 속삭이는 것이다.
너를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 역겨워. 네 목소리가 끔찍해. 네 손길이 혐오스러워. 나는…… 너를 증오해.
달콤한 순간이었다.
잠이 들면 꿈속으로 샛별이 찾아오기도 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퉁퉁 부은 눈 위로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낀 채로 매일 기도했다. 오늘도 부디 샛별이 나타나 주기를. 형태가 흐릿해도 그 모습이 무엇이든, 그 얼굴 표정이 어떠하든 그런 건 관계없었다.
꿈속의 샛별은 대체로 나를 비난했고, 아주 가끔 동정하다가 딱 한 번…… 웃음을 지었다.
돌을 던지거나 몽둥이를 쥐어 나를 후려치는 샛별을 꿈속에서 보는 것은 그리움 외의 어떠한 감정도 남기지 않았다. 샛별이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상스런 말로 나를 욕하고 침을 뱉고 얼굴이 없는 수많은 남자들과 나란히 서서 가끔은 칼로 나를 찌르거나 몸이 성치 못한 나를 비웃기도 했지만, 나는 그저 손을 내밀어 샛별에게 닿기만을 바랐다.
꿈에서 깨어나면 스스로의 피해 의식이 역겨워 구역질이 났다. 그런 꿈을 꾼 날엔 몸 어딘가에 멍이나 생채기를 만들어야 마음이 편했다.
샛별은 때로 버림받은 나를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불쌍한 새끼. 그러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 진작 털어놓지 그랬어요. 가엾기도 하지. 너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닌데. 그저 흉측한 살덩어리일 뿐인데. 불쌍하게도…… 그렇게 살아 있네요. 이제 나는 어디에도 없는데.
나는 샛별의 무릎에 얼굴을 문지르며 그 상냥한 목소리를 만끽했다. 이대로 귀가 멀었으면 좋겠어. 네 목소리가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꿈속의 나는 자주 손가락으로 귀를 뜯어 내거나 고막을 찔러 피를 내곤 했다. 샛별은 목소리 없이 입을 뻐끔거리며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불쌍한 새끼. 불쌍한 새끼…….
딱 한 번. 꿈속의 샛별이 내게 웃음 지었을 때, 나는 맥 빠지게도 곧바로 꿈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고 입술이 바싹 말랐다. 쥐어 보려 애를 쓸수록 뒷걸음질 치던 그동안의 꿈과는 느낌이 달랐다. 머리 한쪽이 지끈지끈 아파 왔다.
그게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몸부림치다 굴러떨어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을 때였다. 힘없이 돌린 시선이 침대 아래 어둑한 그늘로 닿았다. 정체를 알아보기 힘든 윤곽들 사이로 언뜻 무언가를 발견했다.
침대 아래로 팔을 집어넣어 그것을 끄집어냈다. 먼지가 조금 엉겨 있긴 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때 네가 꺼냈던 말까지도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으니까.
‘형. 내 양말 한 짝 못 봤어요? 이상하다, 세탁기 주변에는 없는데…….’
샛별이 신던 양말이었다. 옅은 하늘색에 짙은 남색 줄무늬 몇 개가 들어가 있는 것. 그때는 무심히 스쳐 지나갔을 것이 분명한데, 지금에 와선 내가 그 양말을 벗겨 내던 순간마저 선명했다.
일을 마치고 내 품으로 돌아와 발긋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샛별을 아래로 눕혀 두고, 손가락 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입을 맞추며 입술이 닿는 곳마다 한 꺼풀씩 벗겨 냈었다.
손가락을 걸어 양말을 벗겨 냈을 때, 샛별은 가장 부끄러운 곳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발가락을 움키며 옆으로 밀어 놓은 이불 아래로 발을 감추려 들었다. 그러곤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양말을 힐끔 봤다. 샛별은 맨발을 싹싹 비비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꾸 그렇게 아무렇게나 던져 놓으니까 하나씩 없어지잖아요…….’
손바닥 아래로 감추었던 얼굴이 천천히 드러났을 때, 샛별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불을 꺼 놓아도 맑게 일렁이는 눈동자를 웃음으로 얼버무리듯 반쯤 감춘 채로, 활짝 웃고 싶은 것을 꾹 참아 내듯 가늘어진 입술을 꼬리만 살짝 들어 올리고선 온통 붉어진 얼굴로…… 나를 향해 웃었다.
그랬다. 그런 때가 있었다. 언제나 네가 웃고 있을 때가 있었다. 웃는 네 얼굴이 너무도 흔해 가만히 잠든 얼굴에 가슴이 설레고, 난감한 듯 굳게 다물린 입술에 욕정을 느끼던 때도 있었다.
고개를 들어 집 안을 둘러보자 그곳엔 온통 샛별의 웃음소리가 숨어 있었다. 나는 숨어 있는 샛별의 모습을 따라 숨바꼭질을 시작했다.
(D)
시골 생활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15분쯤 걸어가면 슈퍼가 있었고, 버스를 타고 30분을 나가면 커다란 마트도 있었다. 오래되긴 했지만 전기밥솥도 있고 3년 전에 달았다는 보일러 덕에 뜨거운 물도 잘 나왔다.
일주일에 한 번 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이미 손질이 되어 있거나 손으로 뜯어낼 수 있는 채소가 주재료였다. 물론 라면도 먹고 냉동 만두나 너겟 같은 것도 먹었다. 냉동 음식은 가급적 조금씩만 사 놓았는데, 사용한 지 30년이 넘은 냉장고의 성능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한 음식은 딱 허기를 채울 정도여서 맛은 별로였다. 싱겁거나 짜거나 했다. 어쩔 때는 소금과 미원을 착각해서 넣는 바람에 느글거리는 맛이 나기도 했다.
채소는 볶거나 굽는 게 전부였고, 국은 기껏해야 무국이나 계란국, 된장 맛밖에 나지 않는 된장국 정도였다. 퍽퍽하게 마른 밥을 데워 보리차에 말아 먹고 있노라면 형이 해 준 밥이 생각나곤 했지만 꾸역꾸역 삼켜 냈다.
최근 내 일상은 단순했다. 밥을 먹거나 청소를 하거나 주변을 산책하거나. 그밖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하다못해 망가지고 부서진 곳이 없나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지만 집은 생각보다 훨씬 멀쩡했다. 밖에서 보기에는 다 쓰러져 가는 기와집이었지만 꾸준히 사람 손을 탄 덕분이었다.
엄마는 때때로 고향의 누군가에게 돈을 부치곤 했는데, 그게 이 집의 관리비였다는 것을 이번에 와서야 알았다.
집이 멀쩡했던 건, 외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 종종 우리 대신 할머니를 돌봐 주시곤 하던 병수 아저씨 덕분이었다. 그는 언덕 아래에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를 했지만 때때로 위로 올라와 이곳을 관리해 주었다고 했다. 엄마가 보내는 약소한 관리비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요즘도 가끔 이 집에 들러 내 안부를 살폈다.
정작 엄마가 살아 있을 땐 이렇게 오랫동안 머무른 적이 없었다. 언제 한번 가 봐야지, 다음엔 내려가 봐야지, 그렇게 말만 하다 결국 나 혼자 돌아오고 말았다. 그나마 명절마다 내려오던 것도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줄어들어 1년에 한 번 내려올까 말까 했고, 최근 3년간은 내려온 적이 없었다.
평소에 참았던 것이 한꺼번에 몰려오는지 엄마는 휴일만 되면 끙끙 앓았다. 가벼운 몸살이라 자고 일어나면 한결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때 억지로라도 일을 쉬게 하고 여기에 같이 내려왔었더라면 좋았을걸. 하루 이틀 휴가에 전전긍긍할 게 아니라 아예 한 달쯤 여기서 살다 갔어도 좋았을걸.
이렇게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고 보니 한 달, 두 달, 아니 1년쯤 남들과 같은 흐름에 섞이지 않고 쉬는 것이 별일인가 싶다.
하여간 남 좋은 일만 하지. 보일러가 돌아 따뜻해진 방바닥에 누워 괜한 투정을 중얼거렸다. 방바닥에 볼을 찰싹 붙인 채로 군데군데 누런 그을음이 남은 장판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눈을 감자 방바닥의 눅눅한 온기에서 엄마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울적한 기분에 뺨을 문질렀지만 방바닥에 쓸려 따갑기만 했다.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몸을 동그랗게 말아 무릎을 감싸 안았다. 금방이라도 눌어붙을 듯이 따뜻한 데도 방바닥이 나를 밀쳐 내는 듯 겉도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슬리퍼를 신어야 하는 찬 바닥에 누운 기분과도 비슷했다.
그건 아마 여기가 ‘내 집’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돌로 된 무거운 기왓장을 올리고, 바깥엔 턱이 높은 마루가 있고, 까치발을 들지 않아도 안이 들여다보이는 낮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이곳으로 돌아올 것은 본래 내가 아니라 엄마였어야 했다. 나를 위한 장소가 아닌 것이다.
‘사람은 돌아갈 곳이 있어야 돼. 도망갈 구석이 없는 사람은 궁지에 몰렸을 때 까무러치기 마련이야.’
엄마는 이따금 그런 말을 했다. 퉁퉁 부은 엄마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일 좀 그만두면 안 되겠냐 볼멘소리를 꺼내 놓는 내게 해 주는 얘기였지만, 당신 스스로 다짐하는 말인 것 같기도 했다. 당장이라도 까무러치지 않기 위해서 돌아갈 곳을 만들어 두었다는 듯이.
엄마가 옳았다. 내게 있어선 ‘돌아갈 곳’이 아닌 ‘도망갈 곳’이었지만 그게 있는가 없는가는 커다란 차이였다. 만일을 위해 준비했던 엄마의 보금자리는 나에게 있어 훌륭한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나를 그렸던 그림이 찢어발겨진 걸 발견했던 그날, 내가 처음으로 형에게서 도망쳐 나왔던 날, 내게 남은 것이 엄마의 영정 사진 하나뿐이게 되었던 그날. 찬바람이 부는 길바닥에 서서 나는 엄마의 돌아갈 곳을 떠올렸다.
그곳은 분명 따뜻하고 푸근할 것이다. 다른 무엇도 필요 없이 오직 엄마를 그리워하고 보고파 할 수 있는 곳. 딱딱하게 각이 진 엄마의 사진을 끌어안고 무작정 이곳으로 왔었다.
그리고…… 다시 겨울이 돌아오는 메마른 늦가을, 나는 이곳으로 돌아왔다. 홀로서기는 불가능했다. 누군가의 삶에 빌붙어야만 숨을 쉴 수 있는 하찮은 존재인 것이다.
피로함뿐이던 엄마의 삶에, 아름답고 위태롭던 형의 곁에, 그리고 다시 엄마를 위해 마련된 자리에. 딱 맞춘 듯이 나를 위해 준비된 자리라는 건 없었다. 구차하게 매달리거나 없는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거나, 간신히 버텨 낸다고 해도 그 자리가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혼자가 되어야 했다. 그게 옳았다. 내가 곁에 있는 것이 누군가를 좀먹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제는 나 스스로를 갉아먹어야 할 때였다.
눈을 감으면 또 다른 삶이 떠오르기도 했다. 나의 것이 아닌, 온전한 그들의 삶. 내가 없었을 엄마의 삶. 나를 만나지 않았을 형의 삶. 돌로 짓이기는 듯 괴로운 감각을 떨치기 위해 아무리 갖가지 방향으로 생각을 떠올려 봐도 소용이 없었다. 내가 없는 그들의 삶은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홀가분하게 이곳으로 돌아와 대청마루에 길게 누워 낮잠을 자는 엄마의 모습. 보는 이로 하여금 심장이 꽉 막히도록 폭발하는 듯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나갈 형의 모습. 어떤 방향으로 삶을 그려 봐도 지금만큼 참담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가장 큰 불운은 나를 만났다는 데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떠올릴 때 괴로워지고 만다. 나로 인해 고꾸라진 그들의 모습에, 더는 가까이할 수 없는 그들의 존재에. 어루만지면 어루만질수록 더욱 괴로워지고 마는 자학과도 같은 멍청한 사랑에.
***
깜빡 잠이 들었다. 해야만 하는 일이 없는 까닭에 나는 내키는 대로 잠들었다가 눈이 떠지면 일어나곤 했다. 눈을 떠 보니 벌어진 문틈 사이로 벌겋게 익은 해가 보였다. 해가 뜰 무렵인지 질 무렵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아 눈을 끔뻑였다.
시계를 보니 5시 반 정도 되었다. 몸을 일으켜 앉아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어깨를 늘어뜨린 채로 벌어진 문 틈새만 바라봤다. 저쪽에서 까만 것이 어른거리더니 점점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부스스한 머리를 매만지고 먼지가 들러붙은 옷을 대강 털어 내고 나서 다시 보니 이쪽으로 다가오는 이의 얼굴이 보였다. 병수 아저씨였다.
“얼굴 보니까 방금 일어났구만.”
“네, 잠깐 잤어요.”
문을 밀어 활짝 열어 놓으며 어정쩡하게 일어났다. 그가 손을 아래로 휘휘 저으며 다시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반쯤 꿇어앉으며 그가 앉을 자리를 피해 뒤로 물러났다.
그는 초록색 야구 모자의 챙을 들썩거리며 휘유, 긴 숨을 내쉬더니 힘겨운 듯 끙 소리를 내며 마루에 올라왔다. 평소보다 더욱 버거워하는 그의 걸음에 의아해하며 살피니 그의 옆구리에 무언가 끼워져 있었다. 박스를 뜯어낸 종이로 둘둘 말아 놓은 것이었는데 그리 두꺼워 보이진 않았다.
비워 놓은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며 그가 옆구리에 끼웠던 것을 내려놓았다. 집에서부터 쉬지 않고 걸어왔는지 얼굴이 붉다. 병수 아저씨의 집은 여기서부터 언덕을 내려가 그 사이 밭을 한참이나 가로질러 가야 했다.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는데, 병수 아저씨 아들이 그의 건강을 염려해 정류장 가까운 곳에 새로 집을 지어 올린 지 3년 되었다고 했다. 그 전에는 이 집의 바로 근처였었다. 한동안은 이쪽에 발길을 끊었던 모양이지만 내가 돌아온 뒤로 일주일에 한번은 들러 나를 살폈다. 내가 사는 모양이 영 미덥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쩐 일이세요?”
그냥 앉아 있기가 민망해서 보리차라도 한잔 내오려고 일어나니 그가 바닥을 두드리며 앉으라고 채근이다. 다시 엉덩이를 붙이며 그를 쳐다봤다. 그는 끈으로 대강 묶어 놓은 것을 풀어 겹겹이 덧대어 놓은 박스 종이를 치워 냈다.
“전번에 아들이 왔다가 이거 안 쓴다고 주고 갔는데, 나는 영 작아서 못 쓰겠더라고.”
“노트북이네요?”
“응. 그래도 넌 나이가 어리니까 이런 거 잘 쓸 거 아녀. 와서 짐 풀 때 보니까 콤퓨타 하나도 없더만. 맞지?”
“없어요. 쓸 일이 없어서…….”
“그러면 못 써. 평생 여기서 살 것도 아닌데 바깥 사정 영 모르면 어떡하려고 그래. 간간이 인타넷도 하고 그 뭐냐 채팅도 하고. 응? 쓸 줄 알면 너 쓰라고.”
병수 아저씨가 꺼내 놓은 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꽤나 낡아 보이는 노트북이었다. 두께도 손가락 두 마디가 넘게 두꺼운 데다 묵직해 보였다. 그다지 컴퓨터를 사용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마저도 감지덕지하긴 했지만, 솔직히 컴퓨터가 있어도 쓸 일이 없었다.
친구가 있어서 메신저를 하기를 하나, 게임을 하기를 하나, 그렇다고 가십을 좋아하기를 하나. 둬 봤자 애물단지가 될 게 뻔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아저씨, 이거 인터넷 쓰려면 선도 있어야 되고 그래요. 그냥 이거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사람도 없는 집에 인터넷이 될 리가. 듬성듬성 있는 인가에, 사람이 잘 살지 않는 언덕 위쪽이라 설치조차 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알지, 그럼. 이 집에 인타넷 선 깔 적에 내가 와서 봤는데. 너 작년에 잠깐 왔다가 다시 서울 안 올라갔냐. 그때 혹시 몰라서 내가 싹 깔아 놨지.”
“정말요?”
“저기 코드 꼽는 거 옆짝에 구멍 안 보이냐. 저거 쓰면 된다더라. 내일 전화만 한 통 넣어. 너무 오래 안 써서 어쩌고저쩌고 시끄럽길래 알아서 하라고 했드만, 다시 전화하면 쓰게 해 준다더라. 응? 그래, 쓸래 말래. 안 쓰면 가져가서 남 주고.”
그의 손가락을 가리키는 곳을 보니 장롱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벽에 랜선을 연결하는 구멍이 있었다. 장롱과 벽 틈에 돌돌 말려진 랜선도 놓여 있었다. 생각이 닿지 않으니 무심결에 지나쳤던 모양이다.
“매번 이렇게 받기만 하고 죄송해서…….”
민망한 기색으로 볼을 긁적이니 병수 아저씨가 어깨를 들썩이며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알면 되았어. 내가 여기 을마나 신경을 많이 썼는지는 알지? 집 고치고, 보일러 놓고. 여기 죄 바람 새는 것도 내가 다 막아 놨어. 숙자 걔가 보내 준 돈으로는 어림도 없지, 어림도 없어. 그게 다 느 할머니 덕 아니냐. 나 어릴 때 못 먹어 딱하다고 곶감 주시고 식혜 맥이고 몰래몰래 밥 주시고 그랬다, 네 할머니가.”
그는 예전 일이 떠오르는지 눈시울을 붉혔다. 손등으로 대충 눈가를 꾹꾹 찍어 누르고 헛기침을 하더니 주머니에 꽂혀 있던 장갑을 빼 들어 괜히 바지를 털었다. 큼큼. 헛기침에 이어 곁에 휴지를 당겨 가래까지 뱉어 낸 후에야 진정이 됐는지 병수 아저씨는 제가 쓴 휴지를 손에 꼭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한 얘기까지 꺼내 놓은 것이 민망한지 멋쩍은 얼굴이었다.
“그냥 잘 지내라고. 서울이 좀 복잡하냐. 가끔 와서 이렇게 쉬고 자고 그래. 여기는 아저씨가 계속 안 무너지게 딱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놀고먹고 하다가 지겨우면 또 서울 가고, 가서 또 못 살겠으면 내려오고. 숙자 걔처럼 다 지나서 오지 말고……. 됐다, 말 길면 못 써. 나오지 마라. 나 간다.”
아저씨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서둘러 마루를 내려갔다. 신발도 대충 꺾어 신고는 그대로 손을 휘적휘적 흔들며 대문을 나가 버렸다. 제대로 마중할 틈도 없었다.
노트북을 쓸 생각은 없었지만 기왕 받은 것 썩혀 두는 것도 뭣했다. 아저씨 말대로 인터넷 회사에 전화를 거니 오후가 되기도 전에 기사가 도착했다. 그는 선을 쓸 수 있는지 간단한 확인만 하고 노트북에 연결해 준 뒤 돌아갔다.
사용이 잘되는지 확인하는 전화가 걸려 왔고, 그동안의 요금을 아저씨가 내 주고 있었던 것도 알게 됐다. 내 통장으로 요금을 돌려 놓고 전화를 끊었다.
노트북 화면에는 익숙한 포털 화면이 열려 있었다. 며칠 전 사 왔던 과자 봉지를 뜯어 옆에 내려놓고 노트북을 밥상에 올렸다. 노트북이 워낙 커다란 탓에 작은 밥상이 꽉 찼다. 마우스가 있었어도 놓을 자리가 없었겠다 싶었다.
키보드에 손을 올렸지만 뭘 검색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날씨? 그건 하늘만 보면 알겠고, 바깥에 흘러가는 뉴스야 서울 살 때도 몰랐던 것들이고. 키보드 위에 올린 손가락을 까딱거리기만 하면서 아무런 단어도 찍어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손바닥 아래쪽 부분이 미끄러져 터치 패드를 눌렀다.
포털 사이트 한가운데 있는 ‘오늘의 식단’이라는 키워드가 잘못 클릭됐고, 곧바로 검색 페이지로 넘어갔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저녁에 뭘 먹을지 생각이나 해 보자 싶어 손가락을 터치 패드로 옮겨 놓는데, 오른쪽에 깜빡거리는 실시간 검색어 순위가 눈에 들어왔다.
봐야 어차피 모르는 연예인 이름이나 오르락내리락하겠지 했던 내 생각은 반만 맞았다. 상위권을 차지하는 낯선 이름들 아래, 이제 막 실시간 검색에 순위에 올라온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전문가, 비평가 ‘장석’ 맹비난’
그 이름을 발견했다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이미 손가락은 형의 이름을 클릭하고 있었다.
(J)
사람들은 내 안부를 묻는 것을 그만두었다. 안부를 묻는 것조차 민망했기 때문이다. 박하늬는 썩 좋은 징조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나로선 나쁠 게 없었다.
대신 최기준의 얼굴이 흙빛으로 죽어 갔다. 서류상 문제로 몇 번 나를 찾아왔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더디게 찾아오더니 그제는 다른 사람을 보내 사인을 받아 갔다.
만날 때마다 초췌해지는 낯빛이며, 덤덤한 얼굴로 서류를 읽어 내려가는 나를 바라보던 적의 어린 눈빛이며, 숨기지도 않고 흘려 대는 신음과도 같은 한숨 소리에서 그의 심정을 유추해 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전시회는 완전히 실패했다. 관람객은 예상 인원의 반의 반도 채우지 못했고, 그림 판매도 시원찮았다. 광고에 실린 대표작 한두 점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낮은 가격에 낙점되었다. 막대한 마케팅 비용은 고스란히 빚으로 돌아왔다.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지만, 나를 팔아먹는 것을 업으로 삼는 최기준에겐 매우 좋지 못한 소식이었다.
하루 이틀 잠깐은 반응이 좋은 것처럼 보였던 전시회가 이토록 추락해 버린 것은 주간지나 신문에 내 스캔들이 오르내리게 된 시기와 일치했다. 샛별의 뒷모습이 오르내렸던 그 스캔들과는 또 다른 얘기였다.
호텔 침대 위, 수풀이 듬성듬성 뻗쳐 있는 야외, 조명이 번쩍이는 클럽 어느 한구석. 내가 누군가와 붙어먹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 실린 기사들이었다. 제정신으로 서 있었을 때가 없었으니 기억조차 선명하지 않았다.
“미안하다. 곧 정리해 주마.”
“아닙니다, 형님. 저는 괜찮습니다.”
파랗게 질린 얼굴의 최기준이 신문을 들고 찾아왔던 것이 벌써 한 달도 전인데 본가에서 연락이 온 것은 오늘 아침 즈음이었다. 전화를 걸어 온 둘째 형님은 서론도 없이 곧장 ‘정리해 주겠다’고 했다.
모두 전시회 그림을 뽑아내기 위해 약을 하던 때의 일이었다. 언뜻 빛깔이나 그때의 냄새가 되살아나는 듯도 했으나 결국 사진이 찍힌 날짜나 내용은 기억해 낼 수 없었다.
샛별을 보낸 뒤로 밖으로 나돌았던 적이 없으니 최소 한 달 이전의, 아니 내 하찮은 마음을 자각한 뒤로는 그런 일이 없었으므로 두 달 이전의 사진일 것이다. 아주 예전 일처럼 까마득하게 여겨졌다.
뒤늦게 본가에서 연락이 왔다.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얘기였다. 둘째 형님 업체에 밀려 도산한 곳이 있다고 했던가……. 내게 매일 새로운 파트너를 소개해 주던 인상이 흐릿한 남자가 언뜻 떠올랐다. 언제나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활짝 드러내며 웃던 입모양이 기억에 남아 있다.
사진이 찍혀 밖으로 떠돌게 된 것이야 어찌 되었건 내가 난잡한 짓을 하고 돌아다닌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를 나무라는 목소리는 전혀 없었다. 그들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오히려 기품이 넘치는 목소리로 작업에 향정신성의약품이 더 필요하다면 도움을 주겠다고도 했고,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하다면 해외에 작업실을 얻어 주겠다고도 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나는 뼛속부터 다른 인종이었다. 정신력을 좀먹는다는 이유로 커피조차 절제하는 그들이었지만 내 입으로 들어가는 마약은 유쾌한 사치품일 테고, 혼외자로 인한 재산 싸움과 화류계 스캔들을 가장 천박하게 여기는 이들이었지만 내가 벌인 음란한 섹스들은 넘치는 예술가의 기질로서 여겼다. 혐오스러워하지도 놀라워하지도 않는다.
원래 그런 인간이니까. 태생부터가 다르니까.
***
수많은 이들이 나를 비난했다. 가문의 이름을 짊어지고 자라난 빈 껍질의 범재. 한 명의 천재를 만들기 위해 소모된 비용. 이전부터 내 이름이나 집안을 숨긴 적은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그 모든 것이 나를 비난하기 위한 화살로 변모했다.
아니다. 그들은 드디어 알아차린 것이다. 내 모든 것이 허영이자 크게 부풀어 난 풍선과도 같았음을. 내가 발라 내는 색과 떨리는 손으로 그려 내는 선은 결코 세대를 넘겨 아름답다 말하기에 충분하지 않음을.
습관처럼 들어가는 많은 사이트에서 나에 대한 얘기를 떠들어 댔다. 빈익빈 부익부. 나의 재능은 돈다발에서 피어난 썩은 열매라며 일컬었다. 수많은 댓글이 달렸고, 나는 그 전부를 샛별의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황홀하고 잔인한 시간이었다.
사건은 그뿐이 아니었다. 다만 내 그림과 허울에 대해 조명을 할 거라 생각했던 건 나의 안일한 생각이었다. 그들은 생각보다도 훨씬, 나의 그림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나를 이렇게 만든 인생, 격렬하거나 또는 엉망이었을 과거. 그들은 내 인생을 증명해 보이기를 원했다. 과거의 자살 시도와 함께 내 그림을 분석하기 시작한 수많은 전문가들 덕분에 내 이름 뒤로 수십 가지 정신병명이 따라붙었다.
일각에선 내가 환각을 보거나 환청을 듣는 중증의 병을 앓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고, 마약을 하는 게 아니냐는 조심스런 추측도 있었다. 그 와중에도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기도나 대인 기피증, 공황장애와 같은 병명은 기정사실인 것처럼 덧붙었다.
사람이 두렵지 않았지만 그들의 가면 속에 샛별의 목소리가 섞여 있을까 두려웠고, 그들의 시선에 우울해지진 않았지만 샛별이 없는 나는 언제나 끔찍하도록 눅눅했다. 반박할 말을 꺼낼 혀끝이 무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러다 너 진짜 감방 들어가는 거 아냐? 지금 노리고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잖아.”
내 손목을 노려보는 박하늬의 시선이 날카롭다. 그는 새삼 내가 충격에 빠져 자해라도 할까 봐 최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박하늬는 나를 만나러 올 때마다 냉장고와 베란다를 뒤져 과음을 하지는 않았는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말라비틀어져 있지 않은지를 살폈다. 최근에는 볼품없이 마른 몸을 들춰 다치거나 상한 부분이 없는지도 확인했다.
“글쎄…….”
“말을 말자, 말을.”
그는 답답해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는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하기야 내놓은 자식이라고 해도 그 댁에서 마약 밀수범 나오게 내버려 둘 것 같지는 않고. 형네 집이야 뭐 워낙…….”
박하늬의 눈길이 마우스를 쥔 내 마른 손등에 머물렀다가 떨어진다. 그가 도착했을 때부터 한시도 컴퓨터 앞에서 떨어지지 않는 나를 이제는 떼어 낼 기력도 없는 것 같았다.
“요즘 같아선 차라리 석이 형, 네가 감방에라도 들어가면 좋겠어. 가서 시간 되면 일하고 밥 먹고. 지금보단 나을 거 같아.”
“글쎄.”
나의 대답에 남아 있던 기운마저 쑥 빠져 버렸는지 그는 내 등이 보이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등받이에 어깨를 기대고 몸을 반쯤 돌려 소파에 다리 한쪽을 올려 두고는 한탄조로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허여멀건 해서 유령이 따로 없어. 꼴 보기 싫어 죽겠다니까. 형네 집도 진짜 이상한 거 알아?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하나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전화 한 통이 끝이야?”
“슬럼프라고 알고 계셔.”
“참나. 슬럼프 두 번만 겪었다가는 송장 치르겠네.”
어깨까지 길게 기른 머리를 벅벅 긁어 쓸어 넘기면서 박하늬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나는 가볍게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슬럼프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흙빛으로 얼굴이 죽어 버린 최기준이 내게 전시회 도록을 건네주었을 때, 입버릇처럼 둘러대던 슬럼프가 내게 찾아왔음을 비로소 실감했다.
마치 유치원생이 반항이라도 하듯이 처바른 색색의 캔버스엔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게 없었다. 오로지 찌꺼기뿐이었다. 티셔츠 밑단에 힘없이 늘어진 실밥을 뜯어내듯이, 어느새 자라 버린 수염을 밀어 내듯이, 세탁한 옷에서 머리카락을 뽑아내듯이. 나의 감정은 자투리처럼 들러붙어 꼴불견으로 덕지덕지 처발려 있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습관, 그리움, 사랑. 나는 길들여져 있었다. 그를 사랑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었고, 그를 바라보는 습관에 목이 메었다. 그리움은 낯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사랑’에 만큼은 아무런 힘도 겨눌 수 없는 빼빼 마른 어린애에 불과했다. 나는 사랑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불러 보았다. 이미 다 지나 버린 그림자의 꼬투리를 향해.
나는 형편없는 나의 비명이 곳곳으로 퍼져 나가길 바란다. 모든 사람이 나를 향해 비난하기를 바란다. 가벼운 장난일지라도 내가 죽어 없어졌으면 하고 돌을 던졌으면 좋겠다. 그 파문이 번져 하늘 꼭대기의 가장 높은 별에 닿기를 소원한다.
자비롭고 상냥한 그 별은 나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종종 생각했다. 내 숨을 잠식해 오는 그 물결이 그에게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하고.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깨어나는 새벽마다 다짐한다. 너의 그 목소리가 진심이라면, 이대로 숨이 멎어 죽어도 좋겠다고. 그 목소리가 나를 부르는 마지막 부름이라면.
나는 여전히 바라고 있다. 네 목소리가 나를 부르기를. 석이 형, 하고 달콤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네가 뒈져 버렸으면 좋겠어, 하고 나를 위한 장송곡을 읊어 줬으면.
나의 사랑은 이토록 달콤하다. 너를 사랑한 이후로 나는 하루도 메마르지 않는다. 향기만으로 아득한 봄꽃처럼 활짝 피어 있다.
그저 모든 상처가 곪아 죽어 버릴 때까지 목숨이 끊어지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
놀랍게도 내 모든 것을 이루고 있다고 믿었던 껍데기가 헐벗겨진 뒤에도 나의 삶은 평온했다. 아니, 처음으로 나는 평온함을 손에 넣었다.
예술을 한낱 사치스러운 취미로만 여기는 집안에서야, 그림의 가격이 오르고 내리는 건 변덕스러운 일이 아니냐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것 이외에 모든 것을 타인에게 떠맡기고 잘난 듯이 들어앉은 나였지만 그 사실을 아주 모르지는 않았다.
적어도 내 이름의 가치는 바닥에 떨어진 것과도 다름없었다. 술집 골목에서 반쯤 찢겨진 채 발견되는 성인 나이트 전단지 속 가수들과도 같았다. 이름이 지워지지는 않을 테지만 더 이상 예전 같지는 않을 것이다.
예전과 똑같은 그림을 그려도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는 가격에 낙찰받지도 못할 테고, 내 그림을 아름답다 칭찬하는 이들은 나와 같이 삼류급으로 취급되어 그 취향을 의심받을 것이다.
내 모든 것은 만들어진 마케팅의 힘이자 신기루였으며 우연히 때를 만나 솟아오른 행운에 불과했다, 고 모든 이들은 말한다. 그들은 과거에 내 그림을 예찬한 것을 부끄러워했으며, 자신의 집에 걸린 그림을 서둘러 뒤집어 놓거나 헐값에 팔아넘기며 분노했다.
이따금 언젠가는 그 진가를 알아줄 시대가 돌아올 거라며 꿋꿋하게 그림을 걸어 놓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건 제 안목을 번복하는 것이 자존심 상할 뿐으로 딱히 내 그림을 사랑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평화로웠다.
붓을 들어 캔버스를 채우기 시작한 이후로 한 번도 버릴 것을 의심해 보지 않은 천재의 껍질이었다. 이미 내 살 껍질과 들러붙어 그걸 벗겨 버리면 그대로 죽는 것이 아닌가 싶었던 시간이었다. 타인에 의해 발가벗겨지는 것이 두려워 차라리 스스로 벗어 버리고자 손목을 긋고 끝끝내 마약에까지 손을 대며 발악했었다.
그림조차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장석’의 삶이란 까마득히 높은 절벽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처럼 그 바닥을 들여다볼 수 없는 것이었다.
죽게 될까. 아니면 모두에게 버려져 비참함에 말라비틀어지다 소리 소문 없이 물 밑으로 가라앉을까. 모든 이들의 차가운 시선 속에 하루하루 절망하며 죽지 못하는 삶에 괴로워하게 될까.
껍질을 벗어 놓은 뒤에야 깨달았다. 나의 망상에는 구체적인 이미지가 없었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나락의 끝에는 깊은 바다처럼 새까만 이미지만이 넘실댈 뿐 구체적으로 어떤 절망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건 바닥을 경험해 보지 못한 자의 사치였다. 실제로 버림받은 적도, 끝으로 내몰려 본 적도 없는 애송이의 망상일 뿐이었다.
껍질이 벗겨진 뒤에도 나의 삶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부끄러울 만큼 아무런 불편도 없다. 나는 여전히 끼니 걱정을 하지 않고, 홧김에 부수어 버린 TV를 보고도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번민이란 내 주위를 둘러싼 얄팍한 시선들의 문제였을 뿐 당장 내 살갗을 찌르고 들어오는 문제는 없었다. 그야말로 허공을 향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그 얄팍한 시선이 인생의 전부라고, 그걸 잃어선 가슴이 찢어져 죽고 말 거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내가 지금처럼 한순간에 껍질이 벗겨졌다면, 정말로 가슴이 뭉개져 하루하루 말라 가다 어느 조용한 새벽 손목을 긋거나 창문에서 뛰어내렸을지도 모른다. 가급적 비범하고 애처롭게 보일 죽음의 형태를 고민하면서.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 있어선 그 모두가 부질없는 장난으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내 이름 앞에 달려 있던 화려한 수식들이 떨어져 나가고 나서야 선명했다. 내가 갖고 싶었던 달콤한 욕망이.
더 이상 나는 천재로서의 삶을 갈망하지 않는다. 손쉽게도 부수어질 타인의 시선으로 쌓아 올린 탑을 지킬 마음이 없다. 이미 허물어진 껍질을 억지로 붙들고 있었던 건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직 그 아이를 붙들어 놓기 위해.
그 아이의 감탄이 달콤했다. 속이 텅 비어 있는 나를, 대단한 무어라도 보는 듯 반짝이는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다만 버림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가 덧씌운 절망에 몸부림치는 나를, 숭고한 무언가를 위해 고통받는다 가엾이 여기며 어루만져 주는 손길이 사랑스러웠다.
어느새부터인가 천재라는 가면을 허겁지겁 붙들어 매는 건 샛별을 붙잡기 위한 몸부림이 되어 있었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특별한 나를 꾸며 내기 위해 스스로를 비틀고 억눌렀던 그 어린 시절처럼, 나는 샛별의 눈에 들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시늉을 했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신을 감추기 위해 부러 기괴한 것들을 주워 삼켰다.
꾸며 낸 내 속에 숨겨진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진짜 나를 발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니 그가 떠난 지금에야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아무런 흉내도 내지 않는다. 비범한 색깔도 바르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교묘한 말로 바꾸어 타인에게 발각될까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홀랑 벗겨져 초라한 알맹이가 드러난 내게 남은 것 또한 하나뿐이라 나는 오직 한 색으로만 하루를 덧씌웠다.
“장석 너, 요즘 그림 그려?”
어김없이 나를 감시하러 온 박하늬가 반쯤 열린 작업실 문을 흘끗거리며 물었다.
“글쎄.”
그가 가져온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애매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걸 그림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하고 덧붙이려다 샌드위치를 다시 한입 베어 물었다.
“너도 참 어지간하다. 1년 넘게 집에 들러붙어 있으면 안 답답해? 사람들이 다 너 죽은 줄 알아. 요즘은 인터넷도 안 보지? 다 너 자살한 줄 알더라고. 사실은 그렇게까지 형편없는 건 아니었다 뭐 그런 얘기도 나오고……. 이제 슬슬 굴에서 좀 나오지?”
박하늬는 실내용 슬리퍼를 질질 끌어 식탁 근처로 다가오더니 내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았다. 식탁에 한쪽 팔꿈치를 대고 손바닥에 턱을 괴어 나를 바라보는 눈초리엔 한심하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집에서 벗어나지 않는 나만큼이나 지치지도 않고 들여다보러 오는 그쪽도 보통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는 건지. 그럴 거면 오지 말든가. 무심코 말을 흘리려다 말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다고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건 아니잖아. 마트도 가고 머리도 잘라. 굶어 죽진 않을 테니 일일이 먹을 거 들고 오지 않아도 돼.”
“오지 말라고?”
“아니…….”
고개를 들어 다급하게 말을 덧붙이려다 말문이 막혔다. 심통 맞게 눈을 흘기고 있을 줄 알았던 박하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기 때문이었다. 아차, 싶었다. 그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말을 은근히 두려워하는 나를 놀려먹은 거다.
“왜, 내가 오면 좋겠어? 응? 이제야 내 정성에 감동해서 마음이 움직인 거야? 혀엉!”
아예 양손으로 턱을 괴고 눈을 깜빡거리며 아양을 떠는 그를 무시하고 다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식탁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손바닥으로 쓸어 접시 위에 털어 내고 작은 한숨을 뱉었다. 그 바람에 접시에서 빵 부스러기가 다시 튀어 나갔지만 쓸어 담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얼음덩어리가 목에 걸린 것처럼 가슴이 싸하고 머리가 얼얼했다.
“……그래서, 이번엔 다른 일 없고?”
내내 목구멍에 걸려 있던 말을 뱉어 내자 심장이 빠르게 뛰며 관자놀이까지 두근거렸다. 귓바퀴가 뜨겁고 손끝이 차갑게 굳었다. 매번 같은 말인데도 점점 더 꺼내기가 어려워졌다.
“치. 대꾸하는 시늉이라도 좀 해 봐라. 사람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그래서 이번엔…….”
“아! 알았어, 알았다고. 이 앵무새야.”
양손을 번쩍 들며 의자 등받이에 기댄 박하늬가 질려 버렸다는 듯 혀를 찼다. 머리칼을 엉망으로 흩트리며 짜증스럽게 악악 소리를 지르더니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참, 나도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야. 내가 뭐가 좋아서 이렇게 따박따박 먹을 거 들고 찾아뵈러 오는지 몰라. 이게 누구 때문에……!”
갑작스레 입을 텁 다문 박하늬는 찜찜한 얼굴로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크게 한숨을 쏟아 냈다.
“그래, 좋아. 그렇게 간절한 얼굴로 압박 주지 않아도 다 얘기한다고. 뭐 별거나 있어야지.”
차갑게 곱아드는 손가락을 식탁 아래로 감추고 그렇게도 숨길 수 없는 초조함으로 가볍게 다리를 떨었다. 식탁 아래서 슬리퍼를 신은 박하늬의 발끝이 내 종아리를 가볍게 찼다.
“다리 떨지 마. 멀미 나. 내가 어제도 몇 시간이나 운전했는지 알아?”
“미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지. 석이 형, 네가 미안하단 얘길 다 하고.”
“……그래서.”
“그래서 별일 없었습니다! 울지도 않고! 씩씩하게!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또?”
“아, 증말. 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물어보라니깐.”
행여 염치없는 물음이 튀어 나갈까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박하늬가 몇 번 더 종아리를 걷어찼지만 다리를 떠는 걸 멈출 수는 없었다. 아니 그냥 몸이 떨리는 것도 같았다. 묻고 싶은 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동시에 알게 되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공연히 희망을 품게 될까 봐서.
“그래서, 사실은 그게 궁금한 거지? 별이랑 나랑 아직도 사귀는 건지?”
박하늬는 눈을 반짝 빛내며 싱글싱글 웃었다. 내내 집에 박혀 있느라 나날이 창백하게 질려 가는 나와는 달리 웃는 얼굴이 봄날 이파리처럼 싱그러웠다.
“……어때?”
차마 고개를 끄덕이진 못하고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건강은 어때? 사는 건 어때? 얼굴은 어때? 박하늬가 애매한 말꼬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단순한 안부로 알아듣기를 바랐지만, 눈치가 빠른 그는 벌써 내 애매한 물음의 뜻을 알아채고 의미심장한 미소로 화답했다.
“어떠냐니. 뭘 말이야. 별이랑 나랑 얼마나 알콩달콩하게 지내는지, 그런 걸 묻고 싶은 거야? 아니면 지지난밤 별이가 얼마나 예쁘게 울었는지, 뭐 그런 거? 시시콜콜하게 쏟아 놓자면 밤을 새도 모자란데. 굳이 듣고 싶다면……. 좋아! 얼마든지 들려줄게.”
“그런 거 아니야.”
접시 위엔 샌드위치가 반쯤 남아 있었다. 더는 턱을 움직여 씹어 삼킬 기력도 나지 않아 접시를 들고 일어났다. 음식물을 모아 놓는 작은 쓰레기통의 레버를 밟아 입구를 벌리고 남은 샌드위치를 털어 넣었다. 뒤에서 박하늬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빈 접시를 개수대에 넣어 두고 물을 틀었다. 접시에 빗맞은 물줄기가 싱크대 안에서 이리저리 튀었지만 흩어지는 물방울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물 다 튀잖아. 뭐 해, 안 잠그고.”
“……아.”
빵 부스러기만 조금 남은 접시는 이미 깨끗했다. 의식적으로 수세미를 들어 접시를 훑어 내고 물기를 가볍게 털어 건조대에 올려놓았다. 수도를 잠그고 물소리가 끊기고 나니 도리어 귀가 먹먹했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은 때엔 차라리 소음이라도 귓가에 대고 있는 편이 나았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별이는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고 했어. 괜히 네가 끼어들어서 걔 인생 망쳐 놓을 생각하지 말라고. 걘 형 너만 없으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애야.”
“그래.”
별안간 내가 앉았던 의자를 식탁 아래로 걷어찬 박하늬가 짜증스런 얼굴로 소리쳤다.
“내가 그랬잖아. 죽어도 너한텐 걔 있는 곳 안 가르쳐 줄 거라고. 어디 평생 후회하면서 반성해 보라지. 네가 걔한테 몹쓸 짓한 만큼 내가 행복하게 해 줄 테니까.”
발길질 때문에 뒤로 벌렁 넘어진 의자를 일으켜 세우며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 같은 건 정말, 정말 요만큼도 별이 근처에 갈 자격이 없으니까!”
“그랬지.”
집요하게 나를 노려보는 박하늬의 시선을 내버려 둔 채 커피포트를 들어 머그컵에 따랐다. 내내 보온이 되어 있던 커피는 아직도 따뜻했지만 맛은 없었다. 입에 머금자마자 뱉고 싶어질 정도로 맛이 쓰고 텁텁했다.
다른 컵에 커피를 한 잔 더 따라 박하늬에게 건네니 그는 씩씩대면서도 홀짝이며 잘도 마셨다. 그를 곁눈질하며 몇 모금 더 마셨지만 여전히 혀가 얼얼하도록 맛이 없었다. 사실 문제는 커피가 아니라 내게 있다. 박하늬가 찾아오기 전, 바로 오늘 아침에 나는 똑같은 커피 한 컵을 깨끗이 비웠었으니까.
“……요즘은 뭐 하고. 아니, 아니다. 건강하다면 됐어.”
차마 더 삼킬 수가 없어 커피를 전부 개수대에 흘려보냈다. 컵을 가볍게 헹구어 건조대에 올려 두고 슬리퍼를 느슨하게 끌어 창가로 향했다. 줄을 당겨 바닥까지 드리워져 있던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고 창문을 한 뼘쯤 열었다.
아침저녁으로는 날이 서늘했지만 아직 오후의 햇볕은 알맞게 포근한 빛을 냈다. 곧 찾아올 겨울을 예고하듯 노란 햇볕마저 한구석으로 헛헛한 기운을 품고 있는 것이 늦가을다웠다.
햇살이 길게 드리워져 소매를 걷어 올린 팔뚝과 뺨에 내려앉았지만 눈이 부실 정도의 빛깔 말고는 따스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손을 펼쳐 손바닥 위로 햇살을 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아찔할 정도로 해가 쏟아지는 창밖의 풍경에 조금 전에 먹었던 샌드위치가 들썩이며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혓바닥으로 입 안을 쓸어 토기를 누르며 블라인드의 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모두 못돼 먹은 나의 성질머리 때문이다. 한 달을 1년처럼 박하늬가 물어다 주는 네 근황에 목이 말라 애타게 기다리면서도, 막상 네 소식을 듣고 나면 소태를 삼킨 듯 목 뿌리가 얼얼해지고 손발이 딱딱하게 굳는다. 살덩이의 감각은 가물가물해지고 눈앞이 부옇게 흐려 그만 꿈을 꾸는 것처럼 다리에 힘이 풀린다.
“어때. 이제 슬슬 그만 듣고 싶지? 포기할 때도 됐잖아.”
어느새 뒤로 다가온 박하늬가 불쑥 묻는다. 찾아올 때마다 묻는 고약한 질문이다. 그가 원하는 것이 나의 포기인지 내 형편없는 몰골을 지켜보는 것에 대한 즐거움인지 아직 모르겠다.
그는 쩔쩔매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놀려 먹는 것을 기꺼워하면서도 막상 파랗게 질려 비틀거리는 내 꼴을 보고 나면 곁에 붙어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면서도 딱 하나, 못을 삼킨 듯이 괴로워지는 그 말만은 내려놓질 않는 것이다.
“소용없어. 아무리 석이 형, 네가 힘들어도 별이는 안 돌아와. 내 옆에 둘 거니까.”
끝내 동아줄처럼 붙잡고 있던 블라인드의 줄을 놓으며 바닥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그래. 그랬지.”
박하늬는 망설이는 얼굴로 내 앞에서 서성이더니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또 쓸데없는 이들의 명함이라도 내미는 건가 싶어 고개를 내젓는데 그의 지갑에서 불쑥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이 튀어나왔다.
“포기해. 진심이야. 이제야 겨우 이렇게 웃어. 네가 없으니까 이제야 겨우…….”
내게 사진을 건네는 하늬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다. 그는 죄를 뒤집어쓴 어린애처럼 억울한 얼굴을 하고 반쯤 던지듯이 사진을 건넸다.
얼떨결에 받아 든 사진에는 샛별의 웃는 얼굴이 싱긋 피어 있었다. 그 어떤 근심도 상처도 없는 것처럼, 내가 너를 처음 만나 향긋했던 커피를 건네받았을 때처럼. 그리고 내가 모든 걸 망쳐 버리기 전 우리 둘만의 세계에 머물렀을 때처럼. 아니, 그보다도 더 맑게.
내가 지워진 세계에서야 네가 웃는다. 매일 밤 꿈에 나오는 나를 원망하고 괴로워하던 얼굴이 아니었다.
“다행이다.”
내가 사라진 덕에 네가 웃을 수 있어서.
박하늬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멍청한 새끼!’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돌아가 버렸다. 나는 그가 남기고 간 사진을 조심스레 손바닥에 올리고 눈을 감았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햇살이 따스했다.
1년 만에 보는 샛별의 얼굴이었다. 여전히 싱그러웠다. 순한 눈이 해사하게 휘어져 웃음 짓는 사이로 눈동자가 반짝였다. 긴장감 없이 미소 지은 뺨이 동그랬다. 살짝 부풀어 오른 듯 통통한 입술도 어김없이 부드럽게 휘어져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TV 속에 나오는 연예인들처럼 있는 힘껏 활짝 웃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 점이 더욱 샛별다웠다. 눈동자를 한껏 반짝이며 즐거워하면서도 수줍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어 제 얼굴이 활짝 피어나는 것을 눌러 내는 것이.
샛별은 온 얼굴이 휘어지도록 활짝 웃음을 터뜨릴 때면 한 손을 가로로 눕혀 제 눈을 가리곤 했다. 마치 짚더미에 얼굴을 감춘 꿩처럼, 제 눈을 가리면 다른 사람이 제 벌어진 얼굴을 못 볼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 치아가 드러나도록 웃음을 지은 샛별의 입술이나 한껏 당겨 올린 뺨은 귀여웠지만 그걸 꼬집어 말하진 않았다. 말하면 두 손으로 얼굴을 전부 가려 버릴까 봐서.
머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짧았다. 박하늬가 직접 머리를 잘라 주고 있다더니, 그의 손길은 정말로 괜찮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샛별은 가위나 칼, 뾰족한 물건에 서툴렀다. 홀로 남아 온 집 안을 들쑤시며 샛별의 흔적을 그러모은 뒤에야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이따금 분위기 좋은 곳을 골라 스테이크를 먹으러 갈 때마다 찹 스테이크만 골라 주문하던 것도, 감기에 걸려 열이 펄펄 끓으면서도 주사 맞기가 싫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꾸역꾸역 버티던 것도, 내 곁에 붙어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하다가도 식사 준비만 시작하면 멀찍이 떨어져 뒷짐을 지던 것도 뒤늦게야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나는 그저 그가 귀여웠다. 칼질을 못 하는 서툰 몸짓이, 내가 모르는 생활 요령은 백 개도 넘게 알면서도 할 줄 아는 요리가 계란 프라이와 라면밖에 없는 것이, 어린애처럼 주사가 무섭다고 칭얼거리는 빨갛게 달뜬 얼굴이.
그래서 그 뒷면의 뭔가를 놓치고 있었던 거다. 손목시계에 가려 놓았던 내 부끄러운 흉터처럼 샛별 또한 서툰 웃음으로 무언가를 얼버무리고 있었던 거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바로 그 셔츠였다. 집 안에 남겨진 샛별의 흔적을 찾기에 몰두해 있던 때의 일이었다. 아무것도 남겨져 있지 않을 거라 여기며 마지막까지 들여다보지 않았던 옷 방 구석에서 반쯤 구겨진 채 엉망으로 개어 놓은 푸른색 셔츠를 발견했다.
단추들이 엉망으로 뜯어져 있었고 누가 쥐어뜯어 놓은 듯 구김이 심했다. 옷을 펼치자 기묘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코를 틀어막고 급히 숨을 멈추었다. 시큼한 땀 냄새, 희미한 알코올 냄새, 매캐한 연기 냄새, 달큼하고 눅눅한 혼돈의 향기.
나는 그 사이에서 어울리지 않는 달콤한 속삭임을 떠올렸다. 사랑스러운 나의 별아. 사랑하는 나의 별. 나의 첫 고백은 허공만 왕왕 울리다 바닥으로 꺼져 버렸다. 네가 나를 그토록 끔찍해하는 줄도 모르고.
셔츠 단추는 튀어나온 눈알처럼 실에 매달려 늘어져 있었는데 그중 하나의 단추만이 비어 있었다. 빈자리엔 셔츠와 어울리지 않는 까만 실밥이 짧게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무심결에 손톱으로 실밥을 뽑아내려다 말고 나는 우뚝 멈추었다.
‘내가 절대로 떨어지지 않게…….’
환청을 듣는 듯 희미한 음성이 머릿속 한구석에 흐릿하게 들어왔다가 붙잡기 전에 사라져 버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질어질한 시야에 눈을 감자 머리를 쓰다듬는 상냥한 감촉이 되살아나며 또 다른 목소리가 속삭였다.
‘달아 놓은 마음이 떨어질 때까지만.’
멍청한 첫사랑에 들떠 나를 끔찍해하는 네 눈동자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때처럼, 나는 다 늦어 버린 지금에서야 떠올렸다. 네 마음을 형편없이 뜯어 놓은 것이 누구였는지를.
***
박하늬가 샛별의 소식을 전해다 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샛별의 흔적을 좇아 집을 뒤지고 다니는 것조차 지쳐 온종일 기억 속 목소리를 곱씹어 보던 때, 온종일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샛별의 앉은 자리를 어루만져 보던 그때.
그때의 나는 마치 식물 같았다. 해가 내리쬐는 자리에 앉아 뿌리를 내리고 싶었다. 오전이 조금 지난 시간부터 오후 서너 시까지, 문을 활짝 열어 놓으면 거실 가운데까지 볕이 닿았다. 나는 낮은 테이블을 치우고 소파를 당겨 오후 내내 해가 닿도록 했다.
적당히 따뜻해진 소파 위에 무릎을 당겨 앉고 머리를 묻고 있으면 머리에 솜털 같은 햇살이 쏟아졌다.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부드럽게 스미고 들어와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그 볕은 샛별의 체온을 닮아 있었다.
그 애와의 시간을 가치 없이 낭비하던 무렵, 파랗게 밝아 오는 새벽이 오면 나는 샛별의 품에 파고들어 마른 가슴에 코를 문지르곤 했다. 이불 속은 따스하고, 맨살에 닿는 공기마저 훈훈한데도 아침이 오는 기척이 느껴지면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며 서늘해지곤 했다.
또 해가 뜰 테지. 숨을 곳도 없이 환하게 밝아와 나를 까발리려 들겠지. 바닥에 널브러진 어제의 허물을 주워 입고 목을 조여 오는 두려움을 모른 체해야겠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을 샛별의 살에 붙이고 크게 숨을 들이켜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유약한 두려움이 슬그머니 꼬리를 말고 사라졌다. 뺨에 닿는 일정한 심장 박동, 머리카락을 간질이는 고른 숨결, 옅은 땀내와 햇볕에 잘 마른 흙이나 이슬이 촉촉한 풀밭과 같은 그 애의 체취. 그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새벽은 포근했다.
해가 뜨면 다 시들어 버린 새벽의 기억을 끄집어내 골몰했고, 해가 지면 침대에 파고들어 그 애의 머리 위로 태양이 반짝이던 꿈을 꾸었다.
“그래서 영영, 이렇게 시들시들하다 죽어 버리겠다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햇볕을 가리는 그림자에 고개를 들자 팔짱을 낀 채 짜증스런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박하늬가 보였다.
“왜 왔어.”
“다 지나고 무슨 청승이야. 그런다고 걔가 널 가엾이 여겨 돌아와 줄 것 같아?”
“아니. 오지 않겠지.”
고개를 숙여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가급적 해가 지기 전에 비켜 줬으면 싶었지만 머리 위로 드리워진 박하늬의 그림자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형 너도 네 살길 찾아.”
“멀쩡히 살아 있잖아. 금방 숨이라도 멎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잘 살아 있다고.”
좁은 보폭으로 슬리퍼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흘낏 눈을 뜨니 바쁘게 움직이는 발이 보였다. 그는 오른쪽으로 다섯 걸음쯤 걸었다가 다시 왼쪽으로 다섯 걸음 움직이며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그의 걸음에 맞춰 햇살이 가늘게 머리를 내밀었다 잘리고 다시 자라나다 잘려 버리길 반복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그림자를 틀어쥐어 옆으로 내동댕이치고 싶었다. 짜증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며 미간 사이가 딱딱하게 굳었다.
삭삭. 실내용 슬리퍼가 바닥에 마찰하는 소리가 귓가에 가득 고였다. 그만 좀 해. 소리라도 지르려던 차에 그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박하늬는 방향을 돌려 내게서 몇 걸음 떨어지더니 등을 진 채로 말을 꺼냈다.
“포기하라고 하잖아. 이제 샛별인 내 거야.”
“그러니까 포기하고말고 내가.”
버석하게 마른 이마를 문지르던 손길을 멈췄다. 슬리퍼를 끄는 소리가 귓가에 남아 얼얼했다. 사삭, 사삭. 희미하게 꺼져 가는 소리 뒤로 박하늬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가슴을 두드렸다.
“……나 지금 샛별이랑 사귀고 있어. 그러니까 포기하라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내가 그 애를 어쩌려는 건, 내가 무슨 마음을 먹는다고 해도…….”
두서없이 꺼낸 말이 힘없이 사그라들었다. 박하늬는 한참이나 말을 잇지 않고 묵묵히 서 있다가 나를 보지 않고 몸을 홱 돌려 현관문으로 향했다.
“난 그 애가 더 이상 불행해지지 않기를 바라. 그건…… 형도 마찬가지야.”
조금 전과는 달리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뱉어 낸 박하늬는 나의 대꾸를 듣지도 않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가 머릿속을 왕왕 울렸다.
어차피 대꾸할 말조차 없었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그 애를 불행하게 만든다. 내가 절절해질수록, 나의 마음이 명확해질수록, 내 속에 고름처럼 들어찬 형편없는 과오가 흘러나오는 것 같다.
내가 어루만지는 것만으로도 발갛게 열이 오르던 너는 끝내는 내 숨결이 닿는 것만으로도 파랗게 질려 몸을 떨었다. 역겨움과 혐오감이 뒤섞인 얼굴로 미소 지으며 내가 잡은 손을 슬그머니 뿌리치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렇게 예쁘게 웃을 줄 알던 애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그러는 거야. 너를 보기만 해도 토할 것 같대. 네가 너무 끔찍해서, 네가 숨만 쉬어도 역겨워서 속이 뒤집힌대. 네가 만지면 벌레가 기는 것 같고, 네가 사랑한다 속삭이면 귀가 썩을 것 같다고 하더라.’
박하늬의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 늘어져 노이즈가 끼기 시작한 비디오테이프처럼, 너덜너덜하게 곱씹은 기억 속에서 나는 그 조각들을 발견해 냈다.
사랑에 겨운 내가 별들이 고인 사랑스런 손을 쥐고 입을 맞출 때마다 몸서리치던 어깨의 떨림과 차갑게 식어 버리던 손끝. 잠든 네 등에 코를 문지르며 사랑을 속삭일 때에 숨조차 쉬지 못하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던 억눌린 울음. 사랑한다 속삭이며 조심스레 입을 맞출 때에 힘겹게 울렁이던 목덜미와 눈가의 경련.
그때부터였다. 단순히 네 흔적을 찾아내고 속을 게워 내듯이 억지로 기억을 끌어 올리는 것만으로는 네 얼굴을 떠올릴 수가 없게 되었다. 어떻게 해도 떠오르는 건 샛별의 차가운 손가락과 파랗게 질린 낯빛뿐이었다.
네 상냥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발리지 않은 하얀 캔버스 앞에서뿐이었다.
‘형은 정말 대단해. 난 손톱만큼도 따라 하지 못할 거예요. 나 같은 거 말이에요. 나 같은 애도 형이 그려 주면 근사한 작품이 되는 거겠지? 아무리 형이라도 그건 무리일려나?’
벌벌 떨리는 손으로 무언가 그리기 시작하면 이상하게도 샛별의 발랄한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뭔가에 홀린 듯이 색을 바르고 있으면 샛별의 손가락이 내 손등을 더듬는 듯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플 정도로 굳어 있던 어깨도, 터질 것처럼 아파 오던 머리도, 쥐어짜는 듯 답답하던 가슴도 점차 편안해지고 슬금슬금 손목이 가벼워졌다.
하나, 둘, 셋……. 빈틈없이 색으로 메꿔진 캔버스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슬럼프를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내가 그리는 건 우스울 정도로 감정에 휘둘린 망상덩어리뿐이었다.
내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다가는 엄지를 뻗어 이마에서부터 콧등과 인중, 마른 입술을 살그머니 더듬어 보던 마른 손가락. 깍지를 끼면 손등의 튀어나온 뼈마디를 전부 누르지 못하던 하나가 모자란 손가락.
함빡 머금었다 놓으면 발갛게 장밋빛을 내던 도톰한 입술. 웃음을 짓다가 말고 이로 깨물어 억누르던 작은 미소. 아주 가까이 들여다보아야만 보이던 턱 끝의 작은 점. 입술 사이로 때때로 드러나던 고른 치아. 저도 모르게 활짝 웃을 때만 볼 수 있던 살짝 튀어나온 송곳니.
촉촉하게 땀이 배어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면 동그랗게 드러나던 이마. 하는 일 없이 뒹굴거리던 날이면 고무줄로 묶어 올려 솟아올라 있던 앞머리. 부끄러울 땐 이마부터 빨갛게 물들어 손바닥으로 얼른 가리던 것.
깊은 잠이 들었을 때 내던 코에 걸린 숨소리. 자다 깨어나 나를 발견하면 짓던 보드라운 옷감을 닮은 미소. 잠결에 내 등을 감싸 안아 문지르던 맨들맨들한 손바닥. 마른 가슴. 오목한 배꼽. 어렸을 때라면 물을 끓이다가 데였다는 허벅지의 작은 흉터. 무릎의 모양. 도드라진 복숭아뼈. 간지럼을 태우면 쥐가 나도록 꾹 움키던 발가락.
눈, 너의 눈동자.
수면에 나를 비춰 보듯 부드럽게 일렁이던 눈동자. 오래 들여다보아도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던 깊고 깊던…… 어쩌면 나를 사랑, 아니 가엾이 여겼을지도 모를 다정한 시선.
네 눈동자가 움직여 나를 더듬어 볼 때면 이유도 없이 가슴이 꽉 막혀 오던 때가 있었다. 죽고 싶은 기분과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건 일종의 감동과도 같은 거였다. 나를 들킨 것 같은 두려움과 불안이라 여겼지만 그것 또한 아니었다. 놀라움이었다.
전혀 다른 인종의 행색을 꾸며 내던 나를 신기해하던 너처럼, 나 또한 네가 신기했다. 신기하고 사랑스러웠다. 아름다웠다.
조심스레 끄트머리만 쥐고 있던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스스로의 망상에 골몰해서 만들어 낸 허상이 아니었다. 샛별의 미소는 놀라울 만큼 아름다웠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선을 잇고 붓을 눌러도 가슴을 두드릴 만큼 그려 내지는 못하던 얼굴이었다.
묵혀 두었던 그리움이 울컥 기어올라 목이 막혔다. 동시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가슴이 벌떡거리며 숨이 트였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닿을 수 없다는 절망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동시에 네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내일을 더듬어 살아 낼 만한 기력이 났다.
보고 싶다, 문득 뱉어 낼 뻔한 말을 삼키며 바닥에 웅크렸다.
티셔츠에 가려진 어깨. 구부린 무릎과 무늬 있는 양말을 신은 발. 놀라 높이 솟은 눈썹과 환희 웃느라 살짝 주름진 뺨. 살짝 벌어진 바람에 튼 입술. 피아노를 연주할 듯 내 손등을 두드려 보던 조금 가벼운 손가락. 가늘게 뜨인 눈꺼풀 사이로 별처럼 빛나던 눈동자. ……그리고 너의 사진.
나는 오늘도 너에게 둘러싸여 잠을 청한다. 다행이다. 내 손으로 만들어 낸 것이 전부 거짓은 아니어서. 내가 사랑하는 네가 여전히 아름다워서.
창가에서 쏟아지는 달빛이 한낮의 햇살보다 따스해 눈가가 뜨거웠다. 시야를 덮은 눈두덩 위로 노란 달빛이 흔들흔들 너의 흉내를 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