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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흐린 새벽 (10/10)

9. 흐린 새벽

(D)

“언제꺼정 이 좁아터진 시골 바닥에 비비고 있을 거여.”

심드렁한 병수 아저씨의 말투와는 달리 그가 내민 비닐봉지에는 반찬이 든 밀폐 용기가 가득했다. 칼질을 못 해 제대로 된 반찬 하나 만들어 먹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뒤로 이따금 챙겨 주기 시작한 것이 벌써 2년째다.

“이게 다 뭐예요? 저번에 주신 것도 아직 남아 있는데. ……자꾸 이렇게 챙겨 주시니까 제가 못 떠나는 거잖아요.”

봉지를 받아 들며 능청스레 웃으니 주름진 손이 옆머리에 꿀밤을 놓는다. 이제 일선에서 손을 뗀 노인이라고 해도 평생을 농사를 지었던 사람이었던 만큼 손이 억세고 매웠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얼얼해서 옆머리를 문지르고 있자니 그가 입가를 씰룩이며 역정을 냈다.

“그럼 멀쩡하게 살아 있는 걸 굶겨 죽여?! 계란 구워 김 싸 먹는 게 전부인 놈이 무슨 할 말이 있어? 그리고 저번에 찬 갖다 준 게 언젠데 그게 아직도 있어. 너 또 깨작깨작 밥알 세어 가며 먹었냐? 사내놈이 비쩍 말라서는. 어디 가서 나 안다고 하지 마라, 사람들이 정 없는 노인네라고 욕해!”

“아저씨 또 오버하신다.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계란을 구워만 먹나? 쪄서도 먹고 말아서도 먹고 삶아서도 먹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저씨의 손이 다시 한번 이마를 쥐어박는다. 맞아도 싸게 굴긴 했으니 이번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이마를 문지르며 슬슬 눈치를 보자 병수 아저씨가 가증스럽다는 듯이 흙바닥에 가래침을 퉤 뱉었다.

“하여간 누구 닮아서 이렇게 뺀질거리는지 몰라. 계집이었으면 서방 살살 꾀어내서 안방에 퍼질러 앉아 사람들 부려 먹었을 거여.”

“닮긴 누굴 닮아요. 울 엄마 닮았지.”

괜히 봉지를 벌려 반찬 통을 꺼내 놓으며 실없이 웃었다. 내 입에서 튀어나온 엄마 얘기에 아저씨는 우물우물 말을 흐리더니 머리 위에 구겨지듯 얹어 놓은 모자를 벗어 바지에 툭툭 털었다.

“하긴 네가 걜 빼다 박긴 했지. 누가 새끼 아니랄까 봐서.”

얼굴이 가려지도록 모자를 깊이 꾹 눌러쓴 아저씨가 이번에는 주머니에 꽂아 놓았던 목장갑으로 신발을 툭툭 털기 시작했다. 새로 장만했다는 운동화는 앞코에 먼지가 조금 묻은 것을 빼곤 깨끗했지만 아저씨는 흙먼지에 재채기를 하면서도 계속 장갑을 툭툭 휘둘렀다.

“……청승맞게 미련한 거 까정 닮을 건 없는데.”

아저씨는 점퍼 주머니에 장갑을 푹 찔러 넣고는 내가 꺼내 놓은 반찬 통을 향해 손가락을 휘휘 흔들며 힘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건 금방 상하니까 얼른 먹어 치우고, 저건 먹기 전에 레인지에다 돌리고, 저거는 뜨순 밥 한 숟갈 떠서 올려 먹으면 기가 막히니까 라면으로 때울 생각 말고.”

잔소리를 끝내 놓고도 남은 말이 있는 것처럼 서성거리던 그는 내 핸드폰의 진동이 울리기 시작한 뒤에야 슬그머니 발길을 돌렸다.

“어어, 난 신경 쓰지 말고 전화 받어.”

“친구예요. 이따 다시 걸면 돼요.”

“아냐, 지금 받어. 전번에 그 친구지? 바쁜 사람 기다리게 하면 못써. 얼른.”

손을 휙휙 흔들어 내가 전화를 받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완전히 걸음을 뗀 그는 도망치듯 마당을 벗어나 돌아가 버렸다.

그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아저씨는 이따금 나를 이곳에 받아 준 것을, 아니 머물도록 도와준 것을 후회하는 눈치였다. 한두 달이면 따분한 시골 생활을 접고 돌아가려나 싶었던 모양인데 벌써 2년이 넘도록 엉덩이를 붙이고 떠나질 않으니 속이 타는 듯했다.

-……아, 별아! 듣고 있냐고!

휴대폰에서 불쑥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전화를 받고도 한참이나 대답이 없으니 답답했던 모양이다.

“어, 하늬야.”

-뭐가 ‘어, 하늬야.’냐! 한참이나 대꾸도 없고. 듣는 기척도 없고.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병수 아저씨 다녀가셔서 얘기 좀 하느라고.”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하든지.

“그래서 지금 했잖아.”

차하! 하늬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혀를 찼다. 툴툴거리며 삐친 표정을 짓고 있을 얼굴이 눈에 선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웃기는……. 너 갈수록 뻔뻔해지는 거 알지?

“이게 다 네 덕이지. 나는 좀 뻔뻔해도 된다며.”

으이익! 하늬는 괴이한 소릴 내며 한참이나 분하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내가 괜한 짓을 했어! 이건 순한 양인 줄 알았더니 아주 능구렁이야, 능구렁이! 완전 깜빡 속았다니깐!

“그래서, 억울해?”

웃음을 머금은 나의 질문에 하늬는 피이이, 하고 만화같이 귀여운 소릴 냈다. 잡지나 광고에서 볼 땐 눈빛만으로도 세상을 홀릴 듯하면서도 내 앞에선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는 게 싫지 않다. 본래 성격이 소탈하고 밝은 것도 있었지만, 이렇게 애교 부리듯 구는 건 내 앞에서만이라고 했다.

-야, 원래 더 좋아하는 쪽이 지는 거라고 했어. 어떡하냐, 내가 져 줘야지.

“왜 이래? 나도 너 좋아해.”

-뻥치시네.

“진짜야.”

웃으며 꺼낸 말에 장난을 치는 거라 생각하고 빈정이라도 상한 걸까. 하늬는 한참이나 대꾸가 없었다. 삐뚤빼뚤 입술을 내밀고 콧등을 실룩일 것이 눈에 보일 듯했다.

-나는 내가 일등으로 좋다는 사람 아니면 싫다 뭐.

“에이, 나한텐 네가 일등이지.”

-선택지가 나밖에 없는 건 아니고? 이 은둔형 외톨이야.

하늬의 목소리가 삐죽빼죽하다가 은근슬쩍 나를 놀리는 말투로 바뀌었다. 병수 아저씨에 이어 이번엔 하늬의 잔소리가 이어질 차례였다.

“내가 무슨 은둔형 외톨이야. 여사님들이 나를 얼마나 예뻐하시는데.”

-야! 촌구석에 박힌 코딱지만 한 마트에 젊은 남자라곤 너밖에 없으니까 그러시는 거지, 거기 내가 가면 넌 댈 것도 아냐!

“아니야. 여사님들이 너 이번에 찍은 광고 포스터 보시고 별로라고 하시던데? 내가 더 낫대.”

-그건 너 치켜세워 주려고 그러는 거고!

크흠, 큼! 얼마나 길게 잔소리를 하려는지 하늬는 헛기침을 하며 목까지 가다듬었다. 그러곤 요 몇 달 동안 지겹게도 반복했던 레퍼토리를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너 그만하면 충분히 했잖아. 어? 안 심심해? 나랑 놀고 싶지 않아? 내가 이 피곤한 몸을 끌고 네 얼굴 보겠다고 그 촌구석까지 가야겠어? 아니, 이 산뜻한 도시의 향기가 그립지 않냐고! 꼴랑 읍내에 있는 마트 캐셔 하겠다고 두 시간씩 걸어 다니는 거 안 지겨워? 하다못해 좀 읍내 가까운 데로 옮기던지. 겨울이면 물 얼고 여름이면 방으로 뱀이며 개구리며 지네며 싹 다 기어 들어오는 그런 집에 계속 살 거냐고!

도중부터는 휴대폰을 귀에서 반쯤 떼어 놓았다. 처음에야 한마디 한마디 꼬박꼬박 성실하게 답했지만 그렇게 해도 그가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잔소리가 멈추지 않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반쯤 포기해 버렸다.

하늬는 구제불능을 포기하지 않는 것에 대단한 재능을 가진 것 같다. 근 2년을 지치지도 않고 내게 안부를 건네거나 굳이 이 먼 곳까지 찾아와 얼굴을 살피거나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얼마 전부터는 병수 아저씨와 합심해서는 나를 이곳에서 끌어내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내가 무얼 하든 그저 행복하기만 하면 그만이라며 내버려 두던 그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은 조금 의아했으나, 시골구석에 처박혀 세월을 낭비하고 있는 나를 1년을 넘도록 보고 있자면 답답하기는 할 것이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나조차 꿈쩍도 않는 내가 답답한데 지켜보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오버하지 마. 너도 그렇고 아저씨도 그렇고 갈수록 과장이랑 뻥이 늘어. 뱀이랑 개구리는 마당에 지나가는 거고, 지네는 작년에 딱 한 번 마루 밑에 나왔던 건데 그걸 그렇게 과장을 하냐? 그리고 공기는 여기가 산뜻하지. 난 거기 시끄럽고 복잡해서 별로야. 여기서 살다 보니까 점점 더 조용하고 아늑해서 좋아. 오기 힘들면 애쓰지 말고 여유 될 때 오면 되잖아. 무리하지 말고.”

기다렸다는 듯이 꺼내 놓는 내 대답에 수화기 반대편에서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한숨 끝에 허으으, 하고 앓는 소리를 낸 하늬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은 네가 하는 거지. 아직도…… 형이 걸려서 그래?

“아니야. 내가 무슨. 그런 거 아니라니까.”

-너 때문 아니라니까. 걔가 쫄딱 망한 건, 걔가 못나서 그런 거지 너 때문이 아니야. 응? 샛별아. 걔는 잘 먹고 잘 살 텐데 왜 너만 이렇게 쭈그리고 있어.

“……아니라니까.”

나를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안쓰러운 마음에 다그치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하늬의 말에 대꾸하는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기만 했다.

“그래서…… 요즘은 어때?”

개미 똥구멍만큼이나 작아진 목소리로 웅얼거리니 ‘하여간 그 새끼도 너도.’ 하고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아냐. 내가 장석 그놈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알아. 말했잖아. 너 그렇게 떠나고 나서 나도 화딱지 나서 ‘개새끼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라!’ 하고 인연 끊었다고.

“그래도 혹시나 하고…….”

더 묻는 것도 민망해져서 말을 흐렸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속내를 벌써 알고 있다는 듯이 하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올라오는 거다? 응?

끝내 우물쭈물 말을 흐렸지만 하늬는 확답을 들은 것처럼 의기양양해서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되고 보니 약속을 한 것만 같아 가슴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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