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9번.
이른 아침의 햇살이 비추듯 소리가 은은하게 방 안으로 스며들어 왔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9번은 본인이 ‘사랑하는 신에게 바치기 위해 썼다’라고 말한 일화가 있을 정도로 거룩한 종교 음악이었다.
수현은 바로 그 천국의 음악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아무래도 어머니가 거실에 틀어 놓으신 것 같았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는 브루크너의 음악 중 이 곡을 가장 즐겨 들었다. 클래식 애호가이자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지금은 꽤 즐기는 수준이 되었지만 사실 결혼 전의 어머니는 클래식에는 문외한이었다고 들었다.
수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앉았다. 눈에 들어오는 침대 옆 바닥은 늘 그렇듯이 옷가지들과 던져 놓은 가방 따위들로 난장판이라 흘러들어 온 아름다운 선율과는 괴리가 있었다.
어제는 도망치듯 학교를 빠져나와 곧장 집으로 왔다. 그러고는 남은 하루를 전부 수면 욕구를 채우는 데 아낌없이 썼다. 눈을 떠 보니 이미 아침이었다. 휴대폰을 켜자마자 도착한 재욱으로부터의 연락만이 어제의 일이 현실이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요한이 돌아왔다.
어머니의 기분이 아침부터 클래식을 틀어 놓고 흥얼거릴 정도로 들떠 있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리라.
요한은 성인이 될 때까지 수현의 집에서 지냈다. 미성년자인 그가 돌봐 줄 사람을 모두 잃고 혼자가 되었을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거둔 것이 수현의 어머니였다. 호적에 입적할 생각까지 했지만 요한이 원하지 않아 거기까지는 이뤄지지 않았다. 덕분에 그가 열세 살이던 해부터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친형제로 여기고 한집 생활을 했는데도 정작 수현과 요한의 성은 제각각 달랐다.
씻고 거실로 나가자 아침 식사 준비로 분주한 어머니의 뒷모습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토요일이잖아. 세차하러 나가셨지. 너 어젠 되게 일찍부터 자더라?”
“피곤해서. 엄만 주말인데 좀 쉬지 아침부터 뭐가 그렇게 바빠?”
“반찬 좀 만들어. 요한이 한국 왔잖아. 보러 가야지.”
목소리부터 잔뜩 들떴다. 지금 그녀가 기분이 좋다는 건 누구라도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좀처럼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즉흥적인 어머니와 신중하고 진중한 아버지는 때론 어떻게 사랑하고 결혼까지 결심하게 되었을까 의아할 정도로 성향도 성격도 정반대였다.
“어떻게 알았어?”
“뉴스에서 계속 얘기해 주는데 어떻게 모르니? 3월부터 너희 학교에 다닐 거라면서? 너도 참. 미리 알았으면 얘길 해 주지. 그럼 공항에 마중 갔을 거 아냐.”
안달복달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7년 전의 모습이 겹쳐졌다.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요한을 뉴스로 봤던 날부터 어머니는 며칠 내내 휴대폰만 붙들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집으로 혼자 돌아온 수현에게 왜 너 혼자 돌아온 것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폴란드와의 시차를 고려해야 한다면서 밤잠도 설쳐 가며 요한의 소식을 기다렸다.
끝내 전화는 걸려 오지 않았다. 며칠 뒤 그의 전담 매니저를 맡게 되었다면서 린으로부터 걸려 온 연락이 고작이었다. 요한은 늘 무정했다. 항상 그녀 혼자만 외로운 짝사랑을 앓았다. 7년 만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그는 이번에도 어머니에게 먼저 전화하지 않을 것이다. 기다림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제 그만 좀 해. 걘 이 세상에 지경미란 사람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을 거야.”
“너 섭섭하게 말이 왜 그래? 뉴스도 안 봤어? 요한이 사랑하는 가족 옆에서 쉬고 싶다 그랬어. 그리고 엄마 귀한 둘째 아들이야. 말 함부로 마.”
“엄마 취급도 안 해 주는데 둘째는 무슨. 아무튼 가지 마요.”
“또 그런다. 수현이 너도 같이 가.”
“걔 어디 있을 줄 알고?”
“어제 꽃집에 린이 와서 알려 주고 갔어. 매번 목소리만 들었는데 실물이 엄청 예쁘더라. 요한이 작업실 여기서 가까워. 이제 따로 거처가 있어서 우리 집에서 안 지낼 것 같다더라고.”
생각할수록 섭섭한 모양인지 어머니의 입매와 어깨가 동시에 축 처졌다. 사랑이 많은 어머니는 그런대로 공평하게 친아들과 양아들 삼은 요한에게 애정을 나눠 주려고 애썼다. 때론 수현이 섭섭할 정도로 요한을 먼저 싸고돌 때도 많았다.
그런 정성에 비해 요한 쪽에서 되돌려 주지 못했던 것은 분명했다. 늘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하고, 다감한 손길로 대응했지만 늘 한 겹 가로막은 장막이 있었다. 진짜 가족으로 생각했다면 때론 짜증을 내거나, 섭섭한 게 있으면 토로하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투정을 부리거나 해야 맞는 일이겠지만 요한은 늘 무서울 정도로 한결같이 예의 바르게 ‘객식구’ 행세만을 해 왔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면서 따로 집과 연습실을 구했다는 것을 보면 이제 그 객식구 행세마저 하지 않으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쇼팽 콩쿠르에 출전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집에 살던 사람이 7년 동안 연락도 없이 해외로만 도는데도 어머니는 어려워서 먼저 연락 한번 닦달하지 못했다. 열 번 망설여 어렵사리 수화기를 들어도 저쪽에서는 매니저인 린의 목소리만 들려줄 뿐이었다. 어른이 된 요한이 이 조악한 집에서 자신을 분리하는 일은 이미 예견되어 있던 일이었다.
“요한이 온 게 그렇게 좋아?”
“좋지. 그래도 너무 오래 자기 자리를 비우면 안 될 텐데 그게 걱정이다. 아무튼 한번 가긴 가야 돼. 요한이가 돈 보내온 것도 돌려줘야 하고.”
“돈? 웬 돈?”
물을 마시던 수현은 깜짝 놀라 전부 뱉어 낼 뻔했다. 요한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용돈 삼아 쓰시라는 살가운 의도로 보낸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말 안 했었나? 달에 한 번씩 인철 씨 계좌로 왔어. 빚 갚는 것처럼 달마다 와서 쓰기가 좀 그렇더라고.”
“7년이나?”
“응. 가뜩이나 액수가 너무 큰데 심지어 모이니까……. 도로 가져가라고 네가 한번 말 좀 해 볼래? 린한테는 말해도 요한의 의지라면서 안 들어준다.”
물론 그의 재능은 떡잎부터 남다르긴 했지만, 뭔가를 바라고 요한을 데려온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계산적인 인물이 못 됐다. 억만금을 주는 것보다 전화 한 번 먼저 걸어 와서 애교를 피워 주는 쪽을 훨씬 원하는 감정 친화적인 사람이었다. 천 번 망설이고 어렵게 건 전화는 받아 주지도 않으면서 기계적으로 돈을 보내오는 행동에 기가 질렸다.
“정떨어지지도 않아?”
“돈으로 보상하려는 것 같아서 좀 서운하긴 하지. 그래도 같이 가자, 수현아. 응?”
“싫어. 난 빼 줘.”
외사랑에 바쁜 어머니를 뒤로하고 방으로 도망치려는 수현의 뒤통수에 그녀의 염려 섞인 목소리가 꽂혔다.
“참, 너 월요일에 검진받으러 병원 가야 되는 거 잊지 않았지? 까먹지 말고 다녀와!”
“안 그래도 월요일 오전에 반차 냈어. 알아서 할게요.”
타악. 문을 닫고 잠시 등을 기대선 수현은 숨을 골랐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뛰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부모님과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언제나 자신을 괴롭게 했다. 죄책감에 가까운 자괴감이 요동쳤다. 아버지의 내면을 절제하는 미덕을 닮았으면 좋았으련만.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 물려받을 기질도 스스로 고를 수 없었다.
그는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서점에라도 가는 편이 좋을까. 어쨌든 집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했다. 어머니 등쌀에 못 이겨 요한이 사는 곳까지 바래다 드릴 일이 생길지도 몰랐으니까.
옷장을 열자 구겨져 있던 옷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잠시 암담하게 보고 있던 그는 수북하게 쌓인 옷더미 틈에서 반코트를 꺼내 걸쳐 입었다.
나가려던 그는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어 멈춰 섰다. 아담한 집 전체를 관통하는 거실의 중앙에는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었는데, 사실 이 보급형 피아노를 볼 때마다 아연해졌다. 어떤 천재 피아니스트는 바로 이 그랜드 피아노를 청소년기 전반 내내 연주했다.
원래 어릴 때 수현이 쓰던 피아노는 아버지가 대학 동기에게서 얻어 왔던 더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였다. 요한이 이 집에 들어와 살게 되던 그해, 요한의 될성부른 떡잎을 알아본 아버지가 잔뜩 흥분해선 없는 살림을 끌어모아 장만해 집에 들인 피아노가 바로 이것이다.
먼지 앉은 뚜껑 위를 살펴보던 수현은 이질적인 흔적을 발견했다. 한일자로 길게 닦아 낸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는 주방 안에서 분주한 어머니를 힐끗 살폈다. 이 피아노를 청소하는 것은 수현의 담당이다. 웬만해선 어머니나 아버지가 털끝 하나 건드리는 일이 없었다.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지만 수현은 금세 갈무리했다. 역시 이 오래된 피아노는 버리는 게 좋을까. 과연 다시 자신이 이 피아노를 칠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 양껏 한껏 마음껏 연주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결코 이 피아노로는 아닐 것이다.
<이걸로 결별이야.>
또다. 또 예의 그 환청이 들려왔다. 안전해졌다고 애써 자위하던 지난 시간이 무색하리만치 삽시간에 밀물처럼 흘러들어 왔다. 건반을 눌러 보려던 그는 급히 손을 거뒀다. 손가락의 뼈마디가 산산조각 나고, 인대마저 전부 끊어진 경험이 있는 오른쪽 손이 문득 무척 아려 왔다.
* * *
희소한 것들은 언제나 그럴싸해 보인다. 실제로 보편적인 것에 비해 높은 가치를 지닌다. 똑같은 물건도 한정판이라고 이름을 붙이면 불티나게 팔리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희소한 것이 누구에게나 좋은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수현의 경우에는 그랬다.
Rh 마이너스 혈액형은 우리나라 인구 천 명 중 한두 명 꼴로만 존재하는 매우 드문 혈액형이었다. 수현은 동양 인구 99퍼센트를 독점하는 포지티브 혈액형 대신 1퍼센트도 채 되지 않는 Rh 마이너스 B의 네거티브 혈액형을 지니고 태어났다.
생명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Rh 마이너스 혈액으로만 수혈받을 수 있기 때문에 늘 사고나 건강 문제에 유의해야 했다. 급한 경우가 생기더라도 이들의 부모는 대개 Rh 플러스 혈액형을 가지고 있어 수혈해 줄 수가 없었다. 평소 혈액은행에 자신의 혈액을 비축해 두기도 하고, 전국적으로 마련된 희귀 혈액형 네트워크 단체를 통해 수혈 지원을 받기도 하지만 크고 작은 사고라도 생기면 포지티브 혈액에 비해 절대적인 지원량이 워낙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수현이 아주 어릴 때부터 큰 수술이 필요한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반드시 종합 건강 검진을 시켰다. 비용이 만만치 않긴 했지만 부부는 사치하지 않고 검소한 편이어서 그럭저럭 충당이 됐다. 교사인 아버지의 외벌이 월급만으로도 겨우겨우 먹고는 살 만했다.
혈액형 문제를 제외하면 수현에게 큰 건강상의 걱정거리는 없었다. 다만 초등학생 외아들이 배우고 싶어 하는 피아노가 문제였다.
그녀는 하나뿐인 어린 아들이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희귀 혈액형 네트워크의 회원들과 다니고 있는 성당의 인맥을 이용해 화장품 방판을 시작했다. 지금의 꽃집을 열게 된 것은 요한을 양육하게 되면서부터였으니 바깥에서 발품만 5년 넘게 팔았던 셈이었다.
혈액은행 거점 기관인 강남 성모 병원은 수현이 20년이 넘게 한 달에 한 번씩 얼굴을 비치는 익숙한 병원이었다. 검진차 요한과도 몇 번 함께 오곤 했다. 요한과 수현은 많은 부분이 달랐지만 두 사람을 한데 아우르는 공통분모도 분명히 있었다.
사람, 그리고 남자.
이 두 가지 기본값을 제외하고 그들을 동류로 묶을 수 있는 또 다른 소수의 이유들.
하나는 피아노였고 두 번째는 피의 성질, 혈액형이었다. 요한의 혈액형도 Rh 마이너스 B로 수현과 같았다.
* * *
검진을 마치고 학교에 오자 학장에게서 사인받아야 할 결재 서류들이 넘쳐났다. 학교 음악관에 새로 들인다는 고급 피아노들과 요한의 연습실, 그리고 승요한 홀 신축 예산안이었다. 서류로 직접 보니 그의 귀환이 더욱 실감 났다. 특히 피아노의 경우 요한의 스승인 이동준이 직접 와서 오스트리아의 조율 전문가들과 함께 최종 검수를 한다는 것 같았다. 피아니스트 이동준. 그는 요한에게도 스승이지만 수현에게도 유일한 스승이었다.
“안녕, 예스맨.”
바깥에서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이 열렸다. 서류를 취합하던 수현은 종이를 한 장 떨어뜨렸다. 평소에도 이런 일은 생각보다 잦았다. 그는 손가락 관절에 다소, 아니, 큰 문제가 있었다. 피부 아래에 박혀 있는 철심만 네 개였다.
나타난 것은 익숙한 얼굴, 요한의 매니저 린이었다. 그녀는 주운 종이와 따뜻한 커피를 함께 내밀었다. 잠깐 얘기 좀 하자는 뜻일 터라 그는 소파를 향해 손짓했다.
“예스맨이라고 좀 안 부르면 안 되나요?”
어머니 대신 1년에 한두 번 정도 그녀와 통화할 일이 생기긴 했지만, 실물을 본 것은 수현도 이번이 겨우 두 번째였다. 늘씬하고 큰 키에 굴곡진 몸매, 풍성하고 결 좋은 머리카락, 뚜렷한 이목구비와 시원한 입매, 세련된 옷차림까지 그녀를 구성하고 있는 것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가 화려함이 넘쳤다. 꼭 요한의 연주를 닮았다.
“애칭이야. 귀엽잖아.”
“비꼬는 거 아니고요?”
“아니야. 요한의 요구에 늘 예스라고 대답해 주던 사람인데 나야 고맙지. 물론 조건부이긴 하지만 언제나 결론은 예스였잖아? 돌봐 주고, 챙겨 주고, 같이 잠도 자 주고.”
“비꼬는 거 맞네요.”
맨 처음 그녀와 마주쳤던 것은 7년 전 바르샤바의 늦은 오후, 콩쿠르 주최 측에서 마련해 준 요한의 호텔 방 앞에서였다. 그는 요한이 미팅으로 잠시 나간 사이 그곳을 빠져나가려고 급히 나오다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녀는 여전했다. 아름다웠고, 수현을 향한 눈길이 곱지 않았다.
“내가 맞다고 말하면 뭐 상황이 달라지나? 네 기분만 나쁘지. 좋게 좋게 생각해.”
“좋은 생각이 안 드는데 어떻게 좋게 생각하래?”
“그래, 그럼. 계속 편하게 나쁘게 생각하든지.”
할 말이 없어진 수현은 입을 다물었다. 소속사의 에이스인 그녀는 요한보다도 바쁜 사람이라고 들었다. 여기까지 직접 행차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차라리 용건에 대해 듣고 빨리 돌아가도록 독려하는 쪽이 자신에게도 이로운 일이었다.
“왜 왔어요?”
“네가 안 찾아오니까. 물어보고 싶은 거 많을 텐데 넌 전화 한 번을 안 하더라. 나 내일 출국해.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야지. 자, 이거.”
클러치 안을 뒤적여 꺼낸 것은 네모난 종이봉투에 담긴 카드 키와 차 키였다.
“요한 연습실 겸 작업실 겸 주거 공간. 학교랑 가까워. 주소가 그 종이 뒷면에 적혀 있으니까 참고하면 돼. 이건 차 스페어 키. 난 뻐꾸기 다 날렸어. 이제 네가 궁금한 걸 물어봐.”
카드 키가 든 네모난 봉투 안에 명함처럼 두꺼운 재질로 된 종이가 한 장 들어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주소지가 인쇄된 것이었다. 집 키와 차 키를 준다는 것은 그를 관리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학교에서 그를 발견했을 때부터 이런 건 예상했다. 수현이 궁금한 건 보다 근원적인 얘기였다.
“요한이 왜 돌아왔는지 아세요?”
“자기 말로는 건초염 기미가 있대. 당분간은 쉬어야 한다고.”
“거짓말.”
“응. 그는 멀쩡해. 거짓말이야.”
“아티스트가 잘못된 선택을 하면 말려야죠. 왜 허락했어요. 한국에 둬서 뭘 어쩌려고요. 게다가 이렇게 작정하고 쉬는 건 계약 위반 아니에요?”
연주자의 손은 기계와 같다. 쓰면 마모되고 닳는다. 반대로 안 쓰면 녹이 슨다. 소중히 다루되 꾸준히 갈고닦으며 연습해야 하는 것이다. 한창 전 세계를 누비며 활동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소속사인 클라시스가 쉽게 허락할 리 없는 휴가였다.
“요한한테 못 들었어? 안타깝지만 아니야. 애초에 이렇게 계약돼 있어. 계약 기간 중 요한이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도록 말이지. 너 아주 요한을 잘 가르쳐 놨더라? 네가 만든 그 ‘규칙’ 때문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그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뜻 파악할 수가 없어서, 수현이 눈썹을 구겼다.
“회사가 그에게 종신 계약을 요구하니까 요한은 더 큰 조건을 내밀던데? 게다가 아주 영리해서 자기 가치를 잘 알고 있더라고.”
어릴 때의 요한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다소 헷갈려 했다. 사랑, 우정, 그리움, 미움, 슬픔, 질투, 연민……. 그런 것들이 남들에 비해 희미한 것 같았다. 그래서 감정을 보다 명확히 체감할 수 있도록 수현이 늘 구체적인 예를 들어 가면서 설명했다. 그러면 그가 겨우 ‘그게 그거였구나’ 하고 깨닫는 식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자라면서 맺어 온 인간관계랄 게 전혀 없어서 사회를 이루고 있는 보이지 않는 질서를 이해하지 못했다. 텔레비전에서 본 경험이 있는, 눈에 보이는 질서들은 쉽게 받아들였다. 패스트푸드점에 가선 줄을 서서 주문을 해야 하고, 백화점에서 물건을 살 땐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누군가 부탁을 들어줬을 때 ‘고마워서’ 답례를 한다거나, 자신 때문에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었을 때 ‘미안해서’ 사례를 한다거나 하는 상호간의 작용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피차간에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것. 그것들이야말로 인간관계에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수현은 어떻게 그것을 가르쳐야 할까 고민하다가, 범위를 확장해 서로에게 원하거나 필요한 것이 생기면 적당한 조건을 붙여 교환하자는 규칙까지 만들게 된 것이었다.
린이 말한 더 큰 조건이라는 것은 요한이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다던 그 조항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회사가 을이고 소속 예술가 쪽이 갑인 것이 이쪽 업계의 생리라지만 그런 조항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미친 계약서가 아닌가. 수현이 미간을 찌푸리자 그의 의문을 모두 이해한다는 듯 린은 커피 슬리브를 손톱으로 툭툭 두드렸다.
“놓칠 수가 없었어. 우리가 포기하면 달려들 회사들이 티어가르텐 공원을 빙 두르고도 남았거든. 아마 못해도 몇 개월은 쉴 것 같은데. 잘 좀 부탁해.”
“손도 안 쓰면 녹슬어요. 다시 원상 복구하려면 두 배는 걸린다고요.”
“자신 있나 보지.”
“당신 아티스트인데 왜 남 얘기 하듯 해요?”
“남이니까! 어차피 여기서도 연주는 계속할 거야. 당분간 공연만 쉬겠다는 거라서 너무 염려할 건 없어. 아니면 진짜 걱정되는 게 따로 있나 보지?”
“알면 그냥 대답해 줘요. 마침 린은 입도 싸잖아요.”
“너야말로 그냥 솔직하게 물어봐. 약속대로 널 잡아먹으러 왔느냐 이게 궁금한 거 아냐.”
“…….”
“비밀 하나 알려 줄까?”
우리가 비밀 같은 걸 공유하는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수현은 그녀의 의중을 알 길이 없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린은 그를 빤히 지켜보다 말을 이었다.
“요한은 너와 맺은 그 규칙 때문에 돌아온 게 맞아. 다만 생각이 바뀌었는지 그때 했던 약속을 빌미로 널 데려가려는 생각은 아닌 것 같아. 네가 스스로 자기한테 오길 원해.”
그때 요한에게 내걸었던 조건은 그냥 되는대로 꺼낸 것이 아니었다. 몇 개월에 걸쳐 준비한 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집에 살게 된 이후 두 사람은 꼬박 7년간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생활해 왔다. 적어도 함께한 시간만큼은 떨어져 있어야 둘 중 누구라도 단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기한도 7년으로 미리 정했다. 조만간 요한이 자신의 희생을 요구했을 때 조건으로 내밀기 위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들리도록 몇 번이나 연습했었다.
그러나 수현이 공언했던 7년은 생각보다 짧았고, 기억이 희미해지지도 않았다. 아직도 수현은 요한이 두려웠다. 오히려 7년 전의 이야기를 꺼내며 약속을 지키라고 채근했다면, 그건 서로 간의 약속이니 체념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와 스스로 결정해서 자신에게 오길 원한다니……. 그는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다.
“왜? 그가 허무맹랑한 꿈 꾸는 것 같아? 요한은 네게 아주 약하지만 강해. 넌 그를 두려워하는 만큼 그의 연주를 좋아하잖아.”
“그건……!”
“아닌 척할 거 없어. 요한도 다 알거든. 네 어머니가 나한테 다 말씀해 주셨어. 앨범이 발매되면 늘 찾아 듣고, 영상을 찾아보고…… 아직도 지극정성이라면서.”
그녀의 말에 아니라고 답할 수가 없어서, 수현은 침묵하는 쪽을 택했다. 그간 수현은 종종 매스컴을 통해 그의 얼굴을 봤다. 아주 가끔 어머니께 소식을 건너 듣기도 했다. 연주회 실황 앨범이 발매되면 꼭 찾아 들었다. 심지어 직접 공연을 몰래 보러 갔던 적도 드물게 있었다.
수현은 그의 1호 팬이었다. 그의 연주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도, 그렇게 끔찍한 그의 곁에서 완전히 떠날 수 없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피아노 앞의 그는 꼭 사람의 마음을 훔쳐 가는 마법사 같았다.
“연주회 걱정은 할 거 없어. 어떤 공연이든 한 번 한 사람들은 절대 못 끊어. 뽕 맞는다고 하지? 비슷하거든.”
“되게 속 편해 보이네요. 여기에 요한을 처박아 놓는 건 당신들 직무 유기 아닌가?”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만 적당한 기행은 몸값 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도 생각해. 나중에 회고록에 쓸 내용이 생기니까. 다만 네가 안식년의 기간을 조금 줄이게는 도와줬으면 좋겠어. 사실 승요한은 나보단 네 전공 아니니?”
부담의 추를 이쪽으로 기울이는 것을 보니 린이 한국에 머무르면서 직접 요한을 관리할 요량은 아닌 것 같았다. 워낙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데다가 원래 주력은 연주회 컨설팅인 사람이니 비활동기의 요한까지 일거수일투족 따라다닐 수는 없을 것이다.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긴 하지만 무늬만 한국인이지 독일 국적의 교포인 그녀는 이쪽에 연고 하나 없었다. 수현이 요한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는 것도 맞았다. 그녀가 펼치는 논리도 전부 이해했다. 다만 비교적 운신이 자유로운 학생 신분이던 과거와 달리 지금의 자신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저도 하는 일이 있어요.”
“그래서 너 편하라고 요한이 직접 학교로 왔잖아. 너 이 학교 소속이고, 계약을 했으면 위에서 까랄 때 까야지. 아, 여기 올 때마다 너한테도 연락 넣어 두라고 말해 뒀어. 이건 이쪽 비서인 은희 씨 연락처.”
그녀는 수현의 휴대폰을 빼앗아 명함에 적힌 번호를 꾹꾹 찍어 눌러 다시 건넸다. 물끄러미 화면을 내려다보던 수현은 번호를 저장했다. 학교 내에서의 관리 정도라면 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이미 피아노과 교수들의 교내외 일정 관리도 그가 하고 있었으니 사람만 한 명 더 추가됐다 여기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넘겨준 차와 집 열쇠가 그것뿐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열쇠들을 손가락 끝으로 매만지다 그녀의 앞으로 밀어냈다.
“이건 가져가요.”
그러자 린이 도로 수현의 앞에 그것들을 밀었다.
“밥까지 떠먹여 주라는 건 아니니까 너무 겁먹지 마. 필요한 일은 은희 씨가 다 할 거야. 격주로 내가 한 번씩 한국 들어올 거기도 하고. 이걸 준 이유는 아주 가끔 그의 사적인 영역을 들여다봐 달라는 거야. 요한이 자살이라도 하면 어떡해.”
단어 선택에 거침이 없는 건 예의를 중시하는 한국인의 습성은 아니다.
“계속 말이 기분 나빠. 여태 우리 엄마한테도 이런 식이었던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 난 누울 자리를 아주 잘 본다고. 그리고 예술가들 자살하는 거 흔한 일 아냐? 그냥 이따금 주의를 기울여 달란 얘기였어. 아니면 요한한테 험한 말 하는 게 싫어?”
“우린 대화가 그다지 잘 안 통하는군요.”
“나도 너랑 오래 말 섞기 싫어. 그러니까 빨리 하겠다고 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그가 대답하자 그녀가 코웃음 쳤다.
“웬 시간? 이건 내가 대변하고는 있지만 원칙적으로 요한의 요구야. 조건은 그쪽에 가서 달라고.”
만나지 않은 지 벌써 7년이나 흐른 뒤였다. 자신이 여전히 요한을 감당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마음이 복잡해진 수현이 침묵하는 동안 린은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 가며 주의 사항을 설명했다. 잠자코 그것들을 곱씹던 수현은 허탈하게 웃었다.
피아노 연주를 제외하곤 손을 사용하는 일은 되도록 지양할 것.
요리나 운전 따위의 부상 위험이 있는 행위는 최대한 금지시킬 것.
매일 연주를 다섯 시간 이상 하는지 체크할 것.
전부 가까이에서 그를 보좌하는 매니저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건 그 비서라는 분한테 얘기하세요.”
린은 받아들여 주는 시늉도 하지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그냥 너한테도 일러두는 거야. 사실 네 진짜 역할은 따로 있어.”
“해야 할 게 또 있어요?”
“요한이 어지간히 쉬고 다시 독일로 돌아가게끔 성실히 설득해 줘. 적당한 일탈은 환영이지만 요한이 너무 오래 쉬면 우리도 손해라고. DG만 신났어. 당분간 공연을 볼 수 없게 됐다니까 앨범이 불티나게 팔린다나 봐. 계속 활동하면 낼 앨범이 수두룩한데 나무만 보고 숲은 못 보는 돈벌레 새끼들이지. 아무튼 네가 마음을 하루빨리 굳혀 주면 되겠네.”
“여기 생활 다 버리고 요한을 따라가란 거예요? 난 싫어요.”
“싫은데 날더러 어쩌라고? 어차피 너희 사이에 약속된 거잖아? 왜 요한만 요구 조건을 지켜야 해? 심지어 이미 그가 많이 봐주고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내 스스로 자길 선택하게 만들고 싶다고 했다면서요. 선택하고 싶지 않다고요.”
“거기부턴 네가 요한이랑 직접 협상을 해야지.”
틀린 말은 아니다. 어차피 그가 돌아온 이상 계속 모르는 척할 수도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엔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것들이 많이 있었다. 수현은 마지못해 끄덕였다.
“그래요. 요한과 직접 얘기하죠. 할 말 다 끝났어요?”
“웬만큼?”
“그럼 내 용건도 얘기할게요. 오래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왜 당신 뻑하면 반말이지?”
“오래전부터 너 재수 없어서. 아니꼬워도 넌 반말하지 마. 내가 세 살 많아.”
“고작 세 살. 서른 살은 더 먹은 줄 알았네. 가끔 되게 한국 사람 같은 거 알아요? 물론 이건 욕이에요.”
“핏줄이 한국인이고 키워 준 양부모도 한국계 독일인들이었는데 그 정돈 당연한 일 아냐?”
이 밑도 끝도 없는 당당함이 황당해서 반박할 말을 찾고 있는데, 학과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수화기를 손에 쥔 채로 잠시 망설였다. 계속 그가 그러마고 대답하지도, 전화를 받지도 않은 채 가만히 있자 린은 참을성 없이 그대로 일어나 버리는 것이었다.
급한 것부터 해결하자. 수현은 전화부터 받았다.
“네, 피아노과입니다.”
[오, 조교님 드디어 전화받으시네요? 오전 내내 걸었는데 부재중이시더라고요. 아, 전 「클래시즘」 계현주 기자입니다.]
클래식 잡지는 수요가 적어서 가짓수가 적었다. 덕분에 음악 대학 자체적으로 학과 사무실 앞으로 전부 구독하고 있어 잘 알았다. 분명히 처음 들어 보는 회사다. 하지만 기자의 이름은 익숙했다. 계현주. 피아노과 동기 중에 그런 이름이 있었다. 성도 별명도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계씨를 개로도 발음할 수 있어서였는지, 아니면 진짜 소문대로 한번 물면 개처럼 물어뜯는 성미를 가지고 있어서였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꼭 성과 함께 이름이 불리곤 했었다.
수화기를 쥐고 있는 그를 놀리기라도 하듯 동시에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리고 옆 과 사무실인 작곡과와 성악과 사무실의 전화벨도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지금 정확히 1시야. 한국 사람들 예의 참 잘 지켜. 점심시간 끝나자마자 전화 폭탄이네.”
손목시계를 툭툭 치던 린이 수현의 앞으로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귓가로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요한의 이름이 섞여 있었다. 방학 중에 학과 사무실마다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전화가 걸려 올 일은 없었다. 아마 전부 요한의 거취를 묻기 위한 전화들이리라. 서서 기다리고 있던 린은 아연해진 수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거절은 애초에 선택지에 있지도 않았다는 양 끝인사를 하고 문을 벌컥 열었다.
나가기 전, 돌아본 그녀가 이런 말을 덧붙였다.
“너, 요한이 데뷔한 뒤로 연주하는 거 가까이에서 본 적 한 번도 없지? 네가 기억하는 요한이 천재라면 지금의 그는 신이야.”
수현은 소리가 흘러들어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수화기를 손바닥으로 막았다.
“요한이 전해 달래. 널 위해 연주하고 싶다고. 마침 작업실에 새 피아노를 들였거든.”
쾅! 문이 닫히고 그녀의 그림자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수현은 황망해졌다. 린의 말이 맞았다. 요한은 수현에게 약하면서도 강했다. 그는 가장 증오스러운 사람이면서도, 수현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그것을 조건으로 내민다면 이번에도 무턱대고 절대 안 된다고는 말하지 못하리라.
길가에 핀 꽃마저도 마음껏 사랑하던 수현에게, 이제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것은 단 두 가지만이 남았다.
가족.
“계 기자님, 잠시만요. 마침 손님이 오셔서 제대로 못 들었습니다. 무슨 용건이시라고요?”
그리고 그의 피아노.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괴물이 만들어 내는 그 찬란한 선율.
* * *
혹독한 겨울은 꽃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계절이다. 꽃집에도 성수기와 비수기가 있는데, 한겨울은 후자였다. 물론 크리스마스나 연말연시, 졸업 시즌 같은 날이 되면 온갖 꽃의 수요가 꽤 있긴 했으나 반짝 한철이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1년 365일 중 거의 매일 단 한 사람의 손님이라도 맞이하기 위해 늦은 시간까지 꽃집을 지켰다. 두 자식이 이젠 모두 어른이 되었으니 이제 그녀에게도 이 심심한 시간을 낭비하는 사치를 부릴 정도의 여유는 생긴 셈이었다.
수현이 꽃집에 도착했을 때, 마침 문을 잠그고 나오는 어머니와 마주쳤다. 몇 분만 늦었어도 엇갈릴 뻔했다.
“여긴 웬일이야, 우리 아들?”
“엄마 보려고. 왜 벌써 문 닫아?”
“그냥.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히네.”
한국에 온 지 며칠째 아무런 연락도 없는 요한 때문이 아닐까 짐작할 따름이었다. 이미 잔뜩 만들어 놓은 갖가지 반찬들도 커다란 냉장고 한구석에서, 어머니처럼 그의 소식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수현보다 더 친아들처럼 여기지만 소식은 뉴스로만 전해 듣는 속이 좀처럼 편하지는 못할 터였다. 요한은 자기 영역 침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 집으로 데려왔을 때는 이것저것 수현에게 하듯이 챙기려던 어머니도 점점 요한의 그런 성향을 인정하고 배려하다 보니 서로의 앞에 쌓인 벽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지고 말았다.
“내가 가 볼게.”
“그럴래? 애 먹을 반찬도 다 해 뒀는데…….”
“그건 다음에. 콩쿠르 우승했는데 축하도 제대로 못 해 줬다고 미안해했었잖아. 오늘은 대신 엄마가 만든 꽃다발이라도 사 갈까 하는데. 어때?”
“얘는 벌써 몇 년도 더 된 일을.”
말은 아무렇지 않게 한다 해도 표정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화색이 된 그녀는 문단속을 하다 말고 다시 출입문을 벌컥 열어붙였다. 수현은 잠자코 따랐다. 그녀는 부산하게 꽃다발을 만들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훨씬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무리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 해도 기본 성질이라는 게 있잖니. 계절 까먹게 하고 억지로 키워 낸 것보단 겨울 꽃이 좋겠다. 그렇지?”
“그건 무슨 꽃인데?”
“라눙쿨루스. 예쁘지. 지중해에서 태어난 꽃인데 요샌 우리나라에서도 꽤 자생하거든. 결혼식에 신부 부케로도 많이 써.”
꽃집 주인의 아들로 10년이 훌쩍 넘게 살았지만 아직도 수현에게 꽃이란 미지의 세계였다. 피아노 말고는 세상에서 그의 주의를 이끄는 대상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겨울에 살아남는 꽃들은 정말 강한 아이들이야. 볼 때마다 생각해. 생명력 있게 살아남아 줘서 고맙다고.”
“어차피 겨울에 피는 꽃이라면서 뭘 또 생명력 있게 살아남아 줬대?”
“얘는 겨울 태생이긴 해도 저온에선 못 견디는 애야. 실내에서 잘 돌봐 줘야 해. 우리 아들들처럼 정성껏 키운 거지. 자, 다 됐다.”
만개하여 풍성해진 파스텔빛 꽃잎들은 강인하다는 수사보다는 조금 더 연약한 수식이 어울렸다. 수현은 꽃다발을 손에 꼭 쥐었다.
어머니의 이 외로운 짝사랑은 끝이 나긴 하는 것일까.
“같이 저녁이라도 먹게 시간 나면 꼭 연락 달라고 해. 꼭!”
“누가 오란다고 오는 앤가. 뭐가 그렇게 매일 애틋해.”
“우수현!”
“글쎄 알았다니까.”
네모난 종이에 적힌 주소지는 수현의 집과 도보 30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였다. 다만 옹기종기 모인 주택으로 빼곡한 자신의 동네와 달리 무척 한적했다. 넓은 길목에는 드나드는 차량이 많지 않았고, 건물도 띄엄띄엄 세워져 있었다. 조용한 동네이니 아마 실내 방음에 꽤 신경을 썼을 것이다.
벌써 거주할 곳이 마련된 것을 보면 이 한국행을 미리 계획하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린이 남기고 간 계약서 이야기로 짐작하건대 처음부터 이러고자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수현은 대문의 초인종부터 눌렀다. 그리고 기다렸다. 아무런 응답 없이 안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요한이었다.
그의 눈높이가 전보다 조금 더 높아져 있어서, 키가 컸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것은 그대로였다. 그의 시선이 수현이 들고 있는 꽃다발에 잠시 향했다. 그러고는 수현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봤다.
“아, 이거…… 어머니 선물. 라눙쿨루스래.”
이상하게도 혼신의 힘과 전신의 용기를 다해 꺼내 놓았던 목소리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 요한의 차례였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그는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기다렸어요.”
동시에 수현의 손목이 요한에게로 이끌렸다. 안쪽에서 휙, 잡아당기는 바람에 수현의 몸이 얼결에 현관으로 진입했다. 요한은 수현의 허리를 꽉 당겨 안고 깊숙이 입을 맞췄다. 뜨거운 혀가 미끄러지듯이 수현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목석처럼 축 손을 늘어뜨린 수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툭, 그가 들고 있던 꽃다발이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