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34)

03.

귓가에 음악이 들려왔다. 덕분에 수현은 잠에서 깼다. 고개를 왼편으로 돌리니 거실 겸 미니 홀에서 연주하고 있는 요한의 모습이 바로 보였다. 피아노 치는 그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여전히 끔찍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를 조금도 극복하지 못했다. 수현은 눈을 감았다.

그는 머릿속에 피아노의 건반 여든여덟 개를 전부 떠올리고, 요한이 치는 음들을 한 땀씩 연결해서 그렸다. 따라가기에 벅찰 만큼 음표가 빼곡했다. 선뜻 떠오르는 음악은 없었다. 즉흥적이고 또 제멋대로인 곡이다. 하지만 음이 풍성하고 아름다웠다. 치밀하고 고요한 요한과는 전혀 다른 듯하면서도 닮았다. 이렇게 낯선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가 창조해 낸 곡의 일부인 모양이다. 꼭 한 편의 열정적인 시(詩) 같았다.

언젠가 카를 하이네만이 요한을 ‘살아 돌아온 모차르트’라고 부른 일이 있었다. 요한은 모차르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도 요한이 모차르트를 즐겨 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텐데 굳이 그렇게 칭하기에 기사를 눈여겨봤었다.

클래식에서는 모든 작곡가의 작품에 번호를 붙인다. 몇몇 음악가들은 이 작품 번호에 약자를 사용했는데 모차르트는 K, 슈베르트는 D, 바흐는 BWV를 썼다. 그중 가장 대중에게 유명한 것이 모차르트의 K였다. K.1…… K.550, K.551, K.552……. 해당 인터뷰에서 하이네만이 설명하기를 요한이 직접 만든 곡들의 작품 번호 약자를 S라고 칭하기에 그렇게 농담처럼 표현했다는 것이었다.

누워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수현은 몸을 일으켰다. 그가 두 손으로 시트를 꽉 쥐자, 간신히 덮여 있던 얇은 시트가 허리춤으로 천천히 흘러내렸다. 드러난 상체는 붉은 자국투성이였다. 가련한 포로는 우두커니 앉은 채로 흘러들어 오는 선율을 귀에 담았다. 계속 듣고 있자니 기분이 꽤 서글펐다.

음은 비는 구석 없이 꽉 차 있었다. 손이 워낙 크고 움직임이 빨라서, 같은 시간에 똑같은 악보로 연주를 해도 그의 것은 훨씬 충만하게 들렸다. 이 피아노 연주. 이걸 듣기 위해서 수현은 포기한 게 아주 많았다. 그의 곁에 있으려면 스스로를 놓아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이 연주는 언제 끝이 날까. 차라리 발목 잘린 빨간 구두의 소녀처럼 그의 손도 계속해서 춤을 췄으면 좋겠다.

소리에 빠져 있던 수현의 귀에 이질적인 기계음이 섞여 들었다. 휴대폰 알람 소리였다. 당황한 수현이 휴대폰을 찾아 소리를 껐지만, 이미 피아노 소리도 멈춰 있었다. 요한이 그를 돌아봤다. 수현은 본능적으로 옷가지를 찾았다. 없다.

“깼어요?”

“내 옷 돌려줘.”

“옷을 돌려주면 승천할까 봐.”

세상은 동화책이 아니야. 그리고 하늘로 도망칠 수만 있다면 진작 했을 것이다.

“농담이에요. 저쪽.”

늘 난장판인 수현의 방과 달리 요한의 주변은 극도로 깔끔했다. 언제나 오차 없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수현의 옷들은 가지런히 접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거리가 멀었다. 입으려면 저쪽까지 걸어가야 하는데, 요한의 시선이 자신에게 콱 박혀 있어 선뜻 발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수현은 나체를 간신히 가려 주고 있는 얇은 시트를 조금 위로 당겨 올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요한은 문득 웃었다.

“왜 늘 그런 눈으로 보는 걸까요?”

“그런 눈…….”

수현은 홀린 듯이 따라 말했다.

“꼭 내가 형을 강간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네가 한 건 강간이 아니라 매춘이지.”

“매춘의 말뜻은 봄을 판다는 거라면서요. 나도 팔게요. 뭐든 사 가요.”

어제 요한을 찾아왔을 때, 그는 자신을 다짜고짜 침대로 끌어들였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한번 습관이 됐던 일이라 익숙했다. 그가 관계를 원하면 수현은 토 달지 않고 수락했다. 화대로는 그의 연주를 받았다. 엄밀히 말하면 요한은 연주를 팔고, 수현은 몸을 파는 일이었으니 피차간에 매춘을 한 셈이었다. 두 사람 간의 오래된 규칙이기도 했다. 이런 얘기는 길어져서 좋을 게 없었다.

“유럽으로 돌아가. 여기 있겠다는 건 말도 안 돼.”

“그럼 나랑 같이 가 줄래요?”

“…….”

“역시 싫죠? 그래서 내가 온 거예요. 형이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어졌을 것 같아서요.”

“…….”

“그리웠어요.”

그립다는 단어의 의미를 헷갈려 하는 그에게 명확히 이런 감정이라고 정의해 줬던 것은 어린 날의 수현이었다.

<이런 거야. 너희 반 여자애 중에 제일 예쁜 앨 떠올려 봐. 학교 끝나고 집에 오니까 그 애가 자꾸 머릿속에 떠올라. 떨어져 있는 일분일초가 너무 괴로워. 그러다 조금이라도 빨리 얼굴을 보기 위해서 다음 날 학교에 제일 일찍 가고 싶어지는 거지.>

그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수현에게 요한은 덤덤한 음성으로 이렇게 대답했었다.

<전 학교 안 다녀요.>

<헉! 진짜? 미안해.>

<그래도 그게 뭔지는 알 것 같아요. 형이 보고 싶었어요.>

<…….>

<그게 그리움…….>

“내가 여기 있으면 날 독점할 수 있어요. 어차피 형은 제대로 된 연주를 못 하니까…… 듣고 싶을 때마다 내가 쳐 줄게요.”

“제대로 된 연주를 못 한다? 잘도 그런 소릴 하는군.”

뻔뻔한 것도 지나치면 폭력이 될 수 있다. 수현은 여전한 요한을 보면서 그런 것을 느꼈다. 갑작스레 손가락이 아려 왔다. 한번 뼈를 다쳤던 사람들은 장마철이 되면 괜스레 더 아픈 법이었다. 비유하자면 요한은 지금 때이른 장맛비를 내리고 있었다. 수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손목과 손가락 마디 사이에 붉게 남겨진 상흔들이 눈을 어지럽혔다.

벌써 몇 년째 지속되고 있는 이 손의 트라우마는 아마 둘 중 한 사람이 죽거나, 요한이 자신을 포기하기 전까지는 낫지 않을 것이다. 다시 그를 만나게 된 뒤로 재발한 통증이 그 증거였다. 이 시큰한 착각은 요한이 근원인 정신적 스트레스였다.

린이 했던, 요한이 자신에게 약하지만 강하다던 말이 떠올랐다. 실제로 그랬다. 그의 연주를 독점하라는 이 위험한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머리가 어지러웠다.

“자, 난 어젯밤 너랑 잤어. 그럼 이제 네가 쳐야지. 린이 넌 이제 신이 됐대. 진짜 그래?”

“이쪽으로 와요.”

멍하니 앉아만 있던 수현은 어느새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요한을 홀린 듯이 올려다봤다. 그가 조심스럽게 시트로 수현의 온몸을 감쌌다. 흠칫 놀랐지만 언제나 그래 왔듯 거절하지는 못했다. 그는 애벌레처럼 둥글게 시트로 말린 수현의 등을 손으로 받쳐 안았다. 손을 사용하는 건 되도록 지양해 달라고 부탁하던 린의 목소리가 수현의 머릿속에서 윙윙 울렸다.

“비켜. 내가 직접 일어날 거야.”

그 말과 동시에 번쩍 몸이 들어 올려져 허사가 되고 말았다. 요한은 안아 든 수현을 피아노 앞으로 데려가 옆자리에 앉혔다.

“뭐부터 하면 좋을까요. 형은 고전을 좋아하죠. 베토벤? 브람스? 하이든? 아니면 제일 좋아하는 모차르트?”

“라벨.”

“라벨도 좋겠죠. 뭐가 좋을까요.”

“「밤의 가스파르: 교수대」.”

「밤의 가스파르」 두 번째 곡인 ‘교수대’의 차가운 리듬은 교수대에 매달린 시체의 흔들림을 섬뜩한 선율로 만들어 낸다.

요한은 픽 웃었다. 본인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수현은 가끔 이렇게 도전적으로 싸움을 걸어 왔다. 시체……. 자신을 시체로 만들고 싶다는 말인가, 자신 옆에서의 수현이 시체라는 말인가. 어느 쪽이든 즐거운 일이었다. 이런 면마저 여전해서 요한은 기뻤다.

아, 그는 이토록 긴 시간이 흐르고도 날 전혀 극복해 내지 못했구나.

“왜 웃어?”

“다시 형을 만났다는 게 실감 나서요.”

수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그런 그를 지켜보던 요한은 피아노를 향해 몸을 틀었다. 이윽고 커다란 두 손이 건반 위에 솜털처럼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유려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 * *

한국 대학교 피아노과 학과 사무실의 아침은 하루도 거르는 일 없이 감미로운 피아노 음반으로 시작된다. 운동선수의 루틴처럼 하루를 시작하는 습관 같은 것이었다. 이른 아침의 저조한 공기를 고려한 건지 대부분 발라드나 녹턴 같은 다정하고 부드러운 선율이 흘렀다. 선곡은 조교인 수현의 몫이었다.

평소보다 일찍 출근한 그는 문을 열어 환기를 했다. 매일 오전이면 흐르던 피아노음이 들려오지 않자, 커피를 마시겠다며 놀러 온 작곡과 조교가 넌지시 물어 왔다.

“선배, 오늘은 앨범 안 틀어요?”

“그냥. 매일 반복하다 보니까 이것도 일처럼 느껴져요. 이젠 내킬 때만 틀까 하고요.”

열어 놓은 창문으로 한겨울의 서늘한 공기가 들어왔다. 수현은 문을 닫으며 대충 지어낸 대답을 했다. 이른 아침부터 요한의 실연을 들은 뒤라 괜히 정제된 레코드음악으로 덧입히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선배 승요한이랑은 어떻게 알아요? 우리 학과장이 그러던데? 그 린인가 하는 여자가 승요한이랑 잘 안다고 선배를 콕 집어서 지목했대요.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길 했나 가족이 있길 하나. 입양해 준 양부모님이 계신다고 하긴 하던데…… 선배랑은 성도 다르고. 접점이 없어 보여요. 대체 무슨 관계예요?”

“그냥 이동준 선생님 때문에 조금 아는 정도예요.”

“아, 맞다. 이동준이 있었지! 승요한이 쓸 피아노 이동준이 직접 고르러 온다면서요. 언제 온대요?”

“안 그래도 연락드려 보려고요.”

빨리 나가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연락처를 뒤지기 시작하자, 이 의사 표현을 대충 알아들은 모양인지 옆방의 조교는 눈인사와 함께 나갔다. 다시 혼자가 되고 나니 힘이 쭉 빠졌다. 앞으로 이런 질문들을 숱하게 받으리라 생각하니 암담해졌다. 거짓말은 자꾸 반복하다 보면 반드시 허점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이미 요한에 관한 소문은 학교 전체로 퍼져 예년의 겨울 방학 때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학생들이 교정을 드나들었다. 우연히 그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 같았다. 특히 음악 대학의 학생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벌써부터 다음 학기를 기대하며 어떤 과목들이 개설될지, 요한이 그중 어떤 것들을 청강하게 될지 물어 오는 전화도 잦았다. 그들은 그의 연주를 가까이에서 듣게 되고, 또 그가 자신들의 연주를 가까이에서 들어 주게 되는 행운이 깃들지도 모른다고 순수하게 기뻐했다.

한국에서는 클래식이 인기가 없었다. 지루하고, 난해하고, 따분하다는 편견이 주였다. 그런 편견을 일정 부분 부숴 주고 클래식을 부흥시키는 데 일조한 것은 분명히 요한이다. 그가 얻은 세계적인 명성과 위상이 클래식에 관심을 갖게 하고, 급기야 향유하는 데까지 대중을 이끌었던 것이다.

모니터의 옆면에는 메모해 둔 포스트잇이 여러 장 붙어 있었다. 요한을 취재하고 싶다고 학교 측으로 연락해 온 기자들이 대다수였다. 그중 가장 위에는 ‘계현주 / 월간 클래시즘’이라고 적어 놓은 종이도 있었다. 수현은 졸업생 명부 파일을 열어서 확인부터 했다. 역시 있는 이름이었다. 얼굴은 가물가물했다. 어쨌든 이 정도 특이한 성에 업계 종사자라면 아마 그녀가 맞을 것이다. 수현의 성도 평범한 편은 아닌 데다 학과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으니 그녀도 짐작은 하고 있으리라.

“무슨 생각하길래 누가 들어오는지도 몰라요?”

번쩍 고개를 들자, 문을 반쯤 열고 재욱이 들어와 있었다. 그는 뒤늦게 문에 대고 노크를 똑똑, 했다.

“저 분명히 노크하고 들어왔습니다. 못 들으신 거 같아 재방송해 드려요.”

“여긴 웬일이야?”

“선밴 나만 보면 웬일이냐고 묻더라. 눈이 일찍 떠져서 별일 없이 왔어요.”

그러면서 손에 든 커피와 도넛 박스를 흔들어 보였다. 수현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재욱은 학교 안에서 수현이 친밀하게 지내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학부 때 우연히 같은 수업을 듣다가 조별 과제로 연탄곡을 연주했던 적이 있었다. 손이 말을 듣지 않아 수현이 애를 먹자, 재욱이 조금 더 음을 화려하게 연주해 그의 실수를 최대한 감춰 주었다.

그 뒤로 저쪽에서 적극적으로 연락을 해 오는 통에 종종 교류했다. 음대 학생들은 워낙 성향이 개인적이라 단체 행동이나 의견을 취합하는 일에 늘 애를 먹었는데, 수현이 조교가 된 뒤로 과 대표인 재욱이 그를 많이 도와주기도 했다.

“아르바이트 갈 시간인 거 아니까 그러지.”

“오늘 쉬어요. 오후에 본가 잠깐 가야 하거든요. 할머니 제사.”

음악을 전공하고 싶어 했던 재욱과 가업을 물려주기 위해 건축을 전공하길 바랐던 부모님은 끊임없이 충돌했다는 모양이다. 그 때문에 현재 그는 경제적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고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다. 입학부터 지금까지 매주 과외와 각종 아르바이트로 바빴다. 피아노과 학생이 영어와 수학 과외가 주 수입원이라는 것이 모순이긴 했다.

커피를 책상 위에 올려놓던 재욱이 불현듯 수현의 손을 잡아당겼다.

“선배 손목에 이게 웬 상처예요?”

화들짝 놀란 수현이 방어적으로 손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도둑질을 들킨 사람처럼 황급히 오른 손목을 등 뒤로 숨겼다. 그 바람에 탁, 하고 일회용 컵이 쓰러졌다. 뜨거운 김이 솟아나는 묽은 아메리카노가 데스크 매트를 흥건하게 적셨다.

“뜨거워요. 두세요. 제가 치울게요.”

“아냐. 내가 하면 돼.”

“미안해요. 손 예민한 거 잘 아는데. 두드러기 난 것 같길래 저도 좀 놀라서요.”

걱정스러운 표정이 차양 밑 그늘처럼 한가득 드리워졌다. 바르고, 성실하고, 본인 감정에 솔직한 재욱은 몸과 마음이 건강한 청년의 표본 같았다. 그때 ‘그 일’이 아니었더라도 자신이 과연 저렇게 올바르게 자라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어릴 때의 수현은 어머니를 닮아 감정을 섬세하게 다루고 공감 능력이 좋다는 소리를 수식어처럼 듣고 자랐다. 잘 울고, 잘 웃었다. 슬픔도 기쁨도 제곱으로 느꼈다. 그 느끼고 있는 바를 솔직하게 표현할 줄도 알았다. 말로 하기 어려울 때에는 피아노로라도 구현해 냈다.

지금은 그러지를 못했다. 잔뜩 꼬이고 비틀린 내면만 잿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재욱을 대면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아플 때가 종종 있었다. 요한을 만나지만 않았다면 나도 저런 유연한 어른이 될 수 있었는데, 하고 말이다.

“다친 건 아니죠?”

“아냐. 괜찮아. 내가 미안. 예민하게 군 것 같다.”

워낙 앞뒤가 투명한 재욱 덕분에 자신도 그의 앞에선 굳이 거짓말로 둘러대거나 감출 필요가 없었다. 수현은 천천히 등 뒤로 감췄던 오른손을 편히 내렸다.

“걱정 말아요. 더 안 물을게요. 자요. 콩 한 쪽도 나눠 먹기.”

재욱이 자기 몫의 커피를 반 따라 주며 그러자, 수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 * *

클래식에는 ‘카덴차’라는 말이 있다. 협주곡 중 솔리스트의 역량을 한껏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악보의 한 부분을 지칭하는 말인데, 이는 연주자가 화려한 기교를 뽐낼 수 있도록 오케스트라의 반주 없이 홀로 연주할 수 있는 부분을 뜻한다.

요한의 연주는 카덴차를 할 때 특히 빛이 났다. 그는 어떤 화려한 음표도 자신만의 형식대로 정확하고 세련되게 재창조해 냈다. 쉽게 연주하는데도 얼마나 어려운 악보인지 머릿속에 절로 그려질 만큼 온갖 음을 꽉 붙들고 주무르는 힘이 있었다. 워낙 손이 크고 움직임이 부드러워서 연주에 최적화된 영향도 일정 부분 있을 것이다.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 법이다. 워낙 건반을 요리하고 정복하는 데 능숙한 그는 피아노를 가리지 않았다. 연주자들에게 보편적으로 사랑받는 스타인웨이앤드선스 318도, 수현의 집에 있는 15년 가까이 된 그랜드 피아노도 요한은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대했다.

학교 측은 그에게 독일 함부르크에 있는 스타인웨이 본사에 가서 그가 직접 피아노를 고르면 곧바로 공수해 오겠다는 의사를 피력했지만 요한은 번거롭다는 이유로 고사했다. 그래서 보다 못한 그의 스승인 이동준이 직접 피아노를 골라 주겠다고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를 맞이할 준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음악관 8층의 연습실과 승요한 홀은 이미 공사에 착수했다. 요한의 스승이자 피아니스트 이동준이 오스트리아의 조율 전문가와 함께 피아노를 보러 오겠다고 연락해 온 것도 오늘이었다.

<오늘 내가 점검하고, 이번 주 내로 요한이 와서 직접 건반 만져 볼 거야. 학교로 직접 갈 건데, 이따 같이 식사나 할까?>

수화기 너머 중년 남자의 진중한 목소리는 여전히 다감했다. 실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얘기하니 웃을 때 휘어지는 눈매가 다정함을 더했다. 수현은 먼저 와 자리에 앉아 있는 이동준에게 묵례하곤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사모님은 안녕하시죠?”

“그럼. 요즘도 히스테리 부리느라 장난 아니지.”

“아직도 교토에 계세요?”

“응. 여관 온천에 몸 담그고 나면 글이 술술 써진다나.”

이동준의 아내는 소설가였다. 수현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깡마른 몸과 날카로운 인상이 너무나 ‘작가’의 스테레오 타입이라고 생각해 처음엔 약간 어려웠는데, 막상 대화를 나눠 보니 성격은 꽤 수더분했다. 한번은 이동준에게 그 얘길 했더니 지금은 글을 쓰는 기간이 아니라서 그렇다는 답변과 아연실색한 표정이 되돌아왔다.

“아, 그렇지. 이 얘길 한다는 걸 깜빡했구나. 이번 달에 시카고 심포니가 내한해.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할 건데, 협주자가 나거든. 요한이가 작곡을 하겠다고 천명했으니 이 피협 편곡을 해 보면 어떨까 싶기도 한데……. 너무 급박하기도 하고, 역시 거절하겠지?”

“원래 잘 그러잖아요.”

요한은 따뜻하게 웃으면서 차갑게 거절할 줄 아는 사람이다. 수현은 이동준이 건넨 네모난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표가 두 장이네요?”

“마침 한국에 있다고 하니 보여 주고 싶은 욕심이 생기네. 요한이랑 같이 와 주겠니? 내가 말하면 거절할 테지만 네 부탁이라면 와 줄 거 아니냐.”

피아니스트 이동준에게는 평생을 통틀어 제자가 딱 두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요한이고,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나 다른 하나는 수현이었다. 요한 덕분에 수현도 그에게 가르침받게 된 것이긴 하지만, 사적인 영역만 따지자면 요한보다는 자신이 그와 훨씬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는 요한과 수현의 관계를 아는 가족 외 유일한 타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가족조차 모르는 두 사람의 은밀한 속사정까지 대충 눈치채고 있는 단 한 사람이었다.

대다수의 천재들이 처음 음악을 시작하는 나이는 미취학 아동 시절이다. 이르면 말도 떼기 전인 서너 살부터 두각을 드러내는 천재들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요한의 재능은 늦게 꽃을 피운 편이긴 했다.

요한이 처음 제대로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했던 것은 친어머니가 죽고 성당의 한 신부님이 그를 거두었던 여덟 살 때였다. 그렇게 또 한참을 방치되다 전문가에게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열세 살, 이동준에게서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요한이 수현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 해이기도 했다.

너무 늦게 자신을 만난 요한 때문에 이동준은 줄곧 조바심을 냈다. 천천히 자신의 밑에 두고 키우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기에 외국으로 당장 보내야 한다고 수현의 부모를 설득했다. 하지만 당시 수현의 부모는 넉넉지가 않은 형편이라 유학을 보낼 재정적 지원을 해 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정식으로 입양한 것도 아니고 그저 맡아 주고 있을 뿐인지라 요한의 인생에 대한 아무런 결정권도 없었다. 덕분에 공은 요한에게로 넘어갔다. 요한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피아노는 지금 치는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는 대답과 함께였다.

수현은 그런 요한이 너무나 부러웠다. 수현이 평생을 존경해 온 이동준이 해외로 보내는 것밖에 길이 없다고 떠받들어 주는 불멸의 천재.

“안 그래요. 제 말도 안 들어요.”

요한은 자신의 말만 잘 들어주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만 원하는 게 있을 뿐인 것이다.

“요한이 독일에서 한 인터뷰를 나도 봤다. 아무래도 그 앤 너 때문에 돌아온 것 같구나.”

그가 언급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그리고 「꽃의 왈츠」. 전부 자신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은 수현도 알았다. 그래서 기사를 읽지 말걸 하고 뒤늦게 후회했었다.

“수현아, 요한 같은 천재를 한국에 가둬 둬선 안 돼. 그의 피아노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너라면 이해해 줄 거라 믿는다. 다시 독일로 돌아가도록 설득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역시, 그는 결국 이 얘기가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요한은 저를 자신의 세계로 데려가고 싶어 해요. 하지만 저는 아직도 그가 끔찍하고 무섭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연주를 완전히 포기하진 못해서 여전히 휘둘리고…….

수현은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며 속으로만 대답했다. 스승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할 용기가 나지 않아 천천히 고개만 주억거렸다.

* * *

그는 뻔뻔하다. 속눈썹 한 올 떨지 않고 거짓말을 해 댔다. 독일에 머무를 때 한 인터뷰에서 어떻게 그렇게 차분하고 담대하게 연주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런 대답을 한 적이 있었다.

<어떤 대학에서 지능 검사 연구를 했대요. 모차르트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D장조」를 들은 학생들이 더 높은 점수를 획득했다고 하더군요. 저도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 종종 클래식을 들었어요. 만약 제 연주가 정말 그렇다면…… 그때 들었던 음악들이 그 토대를 만들어 준 건 아닐까요.>

수현의 어머니는 모차르트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D장조」가 무슨 곡인지 모른다. 그녀가 듣는 클래식은 워낙 편식이 심해서 거의 종교 음악 위주였다. 그렇다면 낳아 주신 생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하고 수현은 아주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역시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한은 술집 작부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에 입학해야 하는 나이가 되도록 쭉 집 안에만 방치되어 자랐다. 언젠가 몰래 엿듣게 된 일이지만, 수현의 어머니도 언젠가 스치듯 그녀를 한 번 본 일이 있었다고 한다. 수수한 외모와 화장기 없는 얼굴은 평범한 대학생처럼 보였다면서, 왜 그런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얘기를 아버지와 나눈 적이 있었다. 아이를 학교도 제때 보내지 않았던 요한의 어머니가 그를 앉혀 놓고 모차르트나 브람스를 들려주었을 리가 없었다.

지금 요한은 인터뷰를 요청한 언론사들을 한꺼번에 학교로 전부 불러 동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미 한국에 왔으니 어찌 됐든 거쳐야 할 관문이어서 한 번에 끝내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질문을 듣고, 대답하는 동안 수현은 열린 문 밖에서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처럼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분위기 자체는 훈훈했지만 일대일로 진행되는 심층 인터뷰가 아니다 보니 깊이가 얕고 원론적인 얘기들이 다였다.

일이 끝나 갈 기미가 보이자 수현은 반쯤 열려 있던 문을 활짝 열었다. 질문을 듣던 요한과 눈이 마주쳤다. 그 시선을 왠지 버티고 있을 수가 없어져 급히 돌아서려는데, 그보다 더 급하게 빠져나온 한 여자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만요! 역시 맞네. 너 우수현 맞지?”

현주였다. 수현의 머릿속에서 희미하던 얼굴의 윤곽이 정면으로 마주 보니 선명해졌다.

“나 기억해?”

그러고는 대답도 듣기 전에 휴대폰을 빼앗아 가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녀가 들고 있던 휴대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동기들한테 싹 연락 돌렸는데 다들 학교로 걸라 하더라고. 그래서 아, 그때 통화한 피아노과 조교가 너 맞구나 했지. 네 개인 연락처 따기가 하늘에 별 따기더라. 시간 좀 내 줄래?”

“잠깐 나온 거라 들어가 봐야 돼.”

“나도 잠깐이면 돼.”

수현은 의외로 여자에게 거절을 잘 못 했다.

음악관 1층에는 작은 브런치 카페가 한 곳 있었다. 수현은 그곳의 한 테이블에 현주와 마주 앉았다. 명함을 내밀기에 일단 받아서 눈으로 확인부터 했다. 「클래시즘」. 여전히 낯선 이름이었다.

“아까 번호는 교환했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소개할게. 앞으로 자주 연락하게 될 것 같거든. 이야, 승요한 진짜 잘생겼더라. 독일 리사이틀 티켓 구하기도 별 따기던데 내가 승요한 실물을 한국에서 다 보네.”

마주 앉아 있다 보니 학부 시절의 그녀 모습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대화한 적은 거의 없었고, 함께 수업을 들었던 적만 몇 차례 있었다.

한국 대학교 음대는 국내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음악 대학이었다. 입학도 졸업도 까다롭고 소수만 뽑았다. 한 과의 몇 명 안 되는 동기들을 4년 내내 봐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의 기억이 많지 않은 건 거의 접점 없이 안 친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수현이 워낙 인간관계 형성에 소극적인 탓도 있을 것이다.

신이 난 그녀가 쉴 새 없이 말하는 동안 수현은 뭐라 꺼낼 대화 거리가 없었다.

“나 학교 정말 오랜만에 와 봐. 저 건물 어떻게 쓰려나 싶었는데 저 자리에 승요한 홀이 생길 줄이야.”

“그러게.”

“그런데 네가 피아노과 조교였다니 놀랐어. 안 그래도 통화하고 나서 이름이 익숙하다 싶더라고. 야,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승요한 동선 좀 알려 줘. 작업실이나,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개인적인 정보들.”

친구. 수현은 그 낯선 단어를 곱씹었다. 나이는 달랐지만 재욱의 얼굴 정도가 떠올랐다.

“혹시 나 개현주라고 애들이 불렀던 거, 아나 모르겠는데…….”

물론 알고 있었다. 그 풍문이 그녀에 관해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정보였으니까.

“그거 맞아. 나 되게 집요한 구석이 있거든. 마침 승요한 좀 파고 있었는데, 네가 조교라는 얘기 듣고 없던 행운이 막 뒤늦게 쏟아지는 기분이더라니까? 오랜 팬이라 나 지금 엄청 흥분 상태야. 네가 좀 도와줘. 동기 좋다는 게 뭐야!”

마땅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수현 대신에 한참을 떠들던 그녀는 문득 시계를 보더니 벌떡 일어섰다.

“나 가 볼 데가 있어서 먼저 일어난다. 오늘 커피 얻어 마셨으니까 다음엔 내가 살게.”

“그럴 필요 없어.”

“아냐, 꼬옥 살게. 또 연락할게. 다음에 보자, 우수현!”

제멋대로 구는 타입에는 이미 면역이 돼 있었다. 그가 부모님 말고 세상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요한도 퍽 제멋대로인 편이었다. 다만 현주가 말 그대로 다른 사람 생각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구는 부류라면 요한은 멋대로 굴 수 있도록 상대가 스스로 선택하고 순응하게 만든다는 점이 달랐다.

혼자 남겨진 수현은 테이블 위에 놓인 손바닥만 한 명함을 눈으로 살폈다. 골치가 아팠다. 그는 명함과 영수증을 함께 쓰레기통에 버리고, 일어섰다.

* * *

음악관의 앞에는 호숫가의 산책로처럼 마련된 기다란 길이 나 있었다. 밤이 되면 타 단대보다 훨씬 으슥해져서 캠퍼스 커플들이 가로등이 고장 나기만을 기다린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였다.

오후에 피아노과 학회 학생들 때문에 개방했던 소규모 연주 홀의 문단속을 위해 그 길을 걷던 수현은 희미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혼불이라도 보고 홀린 사람처럼 멈춰 섰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이 화려한 음을 간결하게 연주하는 방식은 요한이다. 얼마 전 피아노를 직접 점검한 이동준이 요한이 직접 쳐 보러 올 것이란 얘기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수현은 빠르게 걸어 홀의 뒷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무대 뒤의 활짝 열린 육중한 문 옆에 서서 연주 소리를 들었다. 요한은 까다롭게 악기를 고르는 편은 아니지만, 어쨌든 낡은 피아노와 좋은 피아노가 내는 소리는 기본적으로 다른 법이라 좋은 피아노일수록 완성된 소리가 깔끔해졌다.

새로운 피아노를 접하게 되면 적응기가 필요하지만 요한에게는 그런 낯가림이 없었다. 그다운 일이었다. 작은 홀을 울려 바깥까지 퍼져 나오는 소리가 풍요로웠다.

그러다 뚝, 음악 소리가 멈췄다.

“그림자 보여요.”

깜짝 놀라 한 발자국 물러서자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림자도 알아볼 수 있거든요. 일으켜 줄래요?”

천천히 무대 위로 나서자, 요한이 손을 내밀었다. 망설이던 수현이 그에게 왼손을 뻗었다. 그는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내가 올 줄 알았다고?”

“여기 문단속을 피아노과 조교한테 부탁해 달라고 한 게 나예요. 나갈까요?”

어쩐지. 학내 시설 관리에 큰 관심이 없는 학장으로부터 직접 문단속 요청이 들어와서 의아하던 차였다. 수현은 요한을 따라 나와 으슥한 음대 앞길을 걸었다.

“여전히 낯을 안 가리네.”

“가릴 필요가 없거든요. 나한테 피아노는 항상 형 같아요. 뭐랄까…… 평생 친해지지 못할 평생선 상의 친구 같달까.”

애초에 전부 내려놓고 접근하기 때문에 낯도 가릴 필요가 없단 얘기일까.

“나도 네가 그래. 멀어. 불편하고, 구역질 나.”

날이 선 대꾸를 듣고도 요한은 그저 웃었다.

“너무 마음 상하지 마. 네가 역겨운 만큼 나 자신도 그러니까.”

“공평해서 좋네요. 나한테 게워 내도 돼요.”

수현은 혹시나 듣는 사람이 있을까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시야 안에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왜 굳이 학교로 오기로 한 건지, 안 물어봐요?”

그건, 린이 설명해 준 대로 자신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 같아서였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너 때문이라는 말을 들으면 필연적으로 책임감을 느끼게 되니까 가능한 한 피하고 싶었다. 어쩌면 답을 들어도 수현이 해 줄 말이 없어서라는 쪽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대답하지 못하는 수현의 마음을 읽어 낼 수 있다는 듯이, 그는 재촉하지 않았다. 요한은 어두운 길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음. 여길 걸었겠고.”

조금 걷다가 그들이 나온 등 뒤의 소규모 홀을 뒤이어 가리켰다.

“저런 데서 가끔 공연을 했겠네요. 재작년 졸업 연주회는 증축한 대공연장에서 했을 거고. 아, 못 와 봐서 미안해요.”

“…….”

“시험 기간엔 저기 중앙 도서관에서 공부했어요? 합주 연습은 저쪽 강의동 피아노 연습실에서? 그리고 여긴 호수가 있네요.”

그는 길 끄트머리에 둥그렇게 난 커다란 호수를 가리키더니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수현의 코트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내 드는 것이었다. 수현이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요한은 그대로 휴대폰을 던져서 호수 속으로 빠트려 버렸다.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그것은 아래로 조금씩 떠내려가 깊은 곳에서 침전되어 가고 있을 것이다.

“무슨 짓이야!”

“망가졌겠다. 새로 사야겠어요. 내가 선물할게요.”

“현주랑 연락처 교환한 거 때문에 이래? 그냥 이름만 아는 동기고, 게다가 그건 걔가 막무가내로!”

“알아요. 그래도 난 싫은 걸 어떡해. 이참에 전화번호도 바꾸는 건 어떨까요?”

청유형이지만,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 앞에서 수현은 마땅히 내걸 조건이 없었다. 그가 웃자, 아름다운 얼굴이 달빛 아래에서 빛났다. 수현은 더 발끈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느껴 체념했다. 그러자 그가 덧붙여 물어 왔다.

“그런데 졸업 연주회에선 뭘 연주했어요?”

이렇게 돌아와 일상을 헤집어 놓는 그를 보고 있자니, 수현은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간 한 번도 연락하거나 만나러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과 직접적으로 물리적인 연결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불과했다. 아마 그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수현을 지켜봐 왔을 것이다.

그는 성취욕과 집념이 무척 강한 편이었다. 왜 멍청하게 그가 자신을 조금씩 잊어 가고 있노라 속 편히 생각했을까. 7년 동안 정말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기에 여차하면 이렇게 멀어질 수도 있겠구나 안일하게 여겼다. 전부 착각이었다.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자신이 졸업 연주회에서 쳤던 곡은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였다.

“아아, 라벨?”

수현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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