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한국 클래식계는 고국으로 돌아온 요한을 어떻게든 활용하고 싶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언제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 버릴지 알 수 없으니 마음이 급한 것이다.
매일 오전부터 오후까지 피아노과 학과 사무실로는 수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인터뷰 요청은 고정값이고 심지어는 서울 시향의 예술 총감독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나 서울 국제 콩쿠르의 심사 위원으로 위촉하고 싶다는 꽤 규모가 큰 부탁들도 있었다. 시향의 총감독은 대대로 지휘자들이 해 왔다. 요한이 총보를 볼 줄은 안다고 해도 피아니스트인 그에게 걸맞은 자리는 아니었다. 이런 건 당연히 거절하리라는 것을 자신들도 알 텐데…….
수현은 과 사무실로 들어온 요청 사항들을 훑어보고 김 비서에게 전부 넘겼다. 그러고는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치우고는 있는데 어째 점점 판이 더 커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사이 팩스로 공문이 한 장 내려왔다. 동시에 린에게서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
[요한한테 참석해 달라고 부탁해 줘! 이건 저어어어어엉말 좋은 기회야.]
수현은 인쇄된 종이를 눈으로 훑어 내렸다.
<프라하의 봄>
체코 프라하에서는 매년 봄 「프라하의 봄」이라는 이름의 국가적인 음악제가 열렸다. 매년 5월 12일 전야제로 개막되는데, 이는 체코의 작곡가 스메타나의 기일을 기념하는 것이다. 전야제 무대에 올리는 곡 또한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으로 대통령도 참석한 가운데 곡을 연주할 정도로 민족성이 짙은 축제였다. 이런 행사에 한국인 피아니스트가 협주곡 연주자로 초청된다는 것은 단순히 연주자로서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늘 유럽에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동양인의 한계를 깨부수는 일이었다.
“네, 전화받았어요.”
[팩스 잘 갔어?]
“읽고 있어요. 이걸 나한테 보내면 어쩌자는 거예요? 김 비서님한테 전달해요. 가뜩이나 매니저한테 갈 일이 전부 학교로 와서 전달하는 일만으로도 골치 아파요.”
[요한이 네 말은 듣는 시늉이라도 하니까 그렇지. 너무 번거롭게 생각하지 마. 요한이 더 유명해지고 더 세계적으로 도약하면 너한테도 좋은 거잖아?]
그가 진화할수록, 그의 연주를 더 듣고 싶은 욕심이 커질지도 모른다. 이쪽에서 욕심을 낼수록 그가 요구하는 삯 또한 늘어날 것이다. 기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프라하의 봄」에서…… 요한이 예전에 독주회에서 「아리랑」 편곡 연주했던 것 때문이에요?”
[그게 크지 않았을까. 아무래도 한국 하면 그런 한 같은 게 있잖아? 자기들이랑 상통하는 게 있다고 느꼈나 보지. 아무튼 꼭 잘 얘기해 봐 줘. 아주 좋은 기회야. 유럽인들 축제에 동양인이 메인 무대에서 협주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 줄 알지? 자기만 믿는다!]
전화는 일방적으로 걸려 왔다가 끊겼다. 왜 자신의 주변 사람들은 전부 이렇게 막무가내인 건지 모르겠다. 허망하게 휴대폰만 보고 있는데, 학과 사무실의 문이 바깥에서 열렸다.
“선배, 아침은요?”
눈앞에 재욱이 소포장한 샌드위치와 커피를 내밀며 서 있었다. 최근 그는 이번 학기 유달리 바쁜 수현을 도와 공강 시간마다 출석부 전달을 해 주거나 수업에 필요한 각종 악보들을 음악관에서 복사해다 주는 등 각종 잡무를 도왔다. 사근사근하고 부드럽게 웃는 얼굴은 요한과 비슷했다. 다만 요한 쪽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이라면 이쪽은 투명하게 들여다보인다는 것이 달랐다.
사실 맨 처음 수현은 그를 밀어냈다. 언제부턴가 주변에 사람이 있으면 불편해졌다. 학급 임원을 도맡아 하던 강하고 밝은 에너지의 수현만 알고 있는 중·고등학교 동창들은 지금의 수현을 보면 얼굴만 같았지 전혀 다른 사람 같다고 느낄는지도 모른다. 사람을 사귀면 언제라도 돌변해 자신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았고, 그게 자신을 또다시 다치게 할까 봐 두려웠다.
친근하게 접근해 오는 사람들이야 때로 있었지만, 있는 대로 밀어내기만 하는 수현을 끈질기게 찾아와 끝내 백기를 들게 만든 것은 재욱이 유일했다. 종종 그가 환하게 웃을 때마다 예전의 간절하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더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우울은 물든대.”
“왜 또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그냥. 너 정신 튼튼한데 안 튼튼한 나한테 물들까 봐 슬슬 걱정이 돼.”
“선배 생각에도 우리가 슬슬 가까워지고 있나 보죠? 전 좋네요. 적당히 우울한 남자는 섹시하니까 괜찮아요. 아, 손 떨어져요. 물이라 생각보다 무겁다고요.”
커피와 샌드위치를 급히 받아 들었지만 무게는 무척 가벼웠다. 수현이 눈을 흘기자 재욱이 샌드위치의 종이 포장을 까며 웃어넘겼다.
“참, 이 얘기 했었나? 저 서울 국제 콩쿠르에 출전해요.”
서울특별시가 주최하는 서울 국제 콩쿠르는 우리나라의 가장 유력한 연주 경연 대회였다. 유수의 대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협찬하고, 예술의 전당이 후원할 만큼 규모가 컸다.
음대생 중 해외 유학을 꿈꾸지 못하는 대다수는 이 콩쿠르를 준비했다. 입상하면 각 지역의 시향에 입단하거나 프로에 한 발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최근에는 국내 음악인들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의 젊은 음악인들이 출사표를 내기도 했다.
서울이 갑작스레 주목받는 것은 역시 요한의 영향인 것 같았다. 마침 오늘 아침 주최 측이 요한에게 결선만이라도 심사 위원을 부디 맡아 달라며 간곡히 청해 오기도 했었던 것이다.
“아르바이트하느라 바쁘지 않아?”
“시간을 최대한 쪼개서 써야겠죠?”
“가뜩이나 지금도 별로 잠 못 자고 있다면서.”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씩은 자고 있어요.”
그렇게 바쁜데 틈틈이 자기 계발도 하고, 수현의 일도 작은 것들이지만 도왔다. 학업 성적 또한 꽤 우수했다. 놀라운 에너지였다.
“멀쩡히 서 있는 게 놀랍다.”
“그래도 지금이 행복해요. 하고 싶은 거 하고 있으니까. 용돈 받아 가면서 여유롭게 사는 애들도 콩쿠르 앞두고는 저처럼 시간 쪼개서 쓸걸요.”
“기특하네. 점심은 내가 살게. 학식 말고 다른 거 먹고 싶은 거 없어?”
“그럼 밥값 말고 시간을 좀 내 주실래요? 제 연주 들어 봐 주세요.”
“내가 들으면 아나.”
“알죠. 선배 귀는 승요한 연주로 단련돼 있잖아요. 승, 요, 한.”
재욱의 손가락 끝이 책장에 길게 꽂혀 있는 음반들을 향하더니 하나, 하나 일일이 가리켰다. 수많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연주 음반들이 꽂혀 있었지만 그중 가장 손때가 많이 묻어 있는 것은 요한의 실황 앨범들이었다.
“그런데 선배 승요한이랑 무슨 사이예요? 어제 같이 저녁 먹으러 갔단 소문 짜하던데요?”
“너 그거 궁금해서 아침부터 온 거지. 이 시간 공강인 거 알아.”
“오늘은 진짜 눈이 일찍 떠졌어요.”
“그 레퍼토리라도 좀 바꾸든지.”
“에이, 선배. 네?”
수더분하게 아양 피우는 모습을 보면 더 잔소리할 힘이 사라졌다. 연주를 좀 들어 달라는데 선배로서 거절할 수는 없는 일이라, 수현은 선뜻 수락했다.
“지금은 오전이라 시간 빠듯해서 좀 그렇고. 점심시간 이후 어때? 그땐 좀 낫거든.”
“좋아요. 이따 음악관 연습실에서 봐요. 피아노 닦아 놓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피아노실. 1시 이후 아무 때나.]
휴대폰 일정에 적어 넣고 메시지를 보내던 재욱은 울리지 않는 수현의 휴대폰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빈방 확인하고 호수도 이따 보낼게요. 어…… 왜 문자 안 가지. 선배 제 번호 스팸 설정했어요?”
“아니, 기계랑 번호가 둘 다 바뀌었어.”
“그럼 연락처 다시 알려 주세요.”
“그건…… 나중에.”
“왜요?”
“그럴 일이 좀 있어. 아무튼 다음에. 용건 있으면 과사로 걸어.”
“아, 정 없게!”
왠지 당장은 재욱과 전화번호를 교환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건 수현의 직감이었다. 그는 투덜대는 재욱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 * *
아니길 바랐지만 보면대 위에 가지런히 놓인 악보는 그 음악이 맞았다.
“이게 네가 연주할 곡이야?”
“네. 협주곡은 콩쿠르 측에서 내 주는 공통 과제 중에 하나 선택할 수 있거든요.”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요한이 바로 어제 자신의 앞에서 연주했던 곡이었다. 왜 하필…….
지금 이 곡을 재욱이 아무리 현란하게 연주한들 수현의 귀에는 부족한 점만 선명하게 들릴 것이다. 모든 연주자에게 재능이란 권능이 내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재욱은 굳이 구역을 설정하자면 자발적 노력파에 가까웠다. 워낙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점마저 예전의 수현을 닮았다.
긴 연주는 수현이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끝이 났다. 연주를 끝내고 쓰러지듯 건반에 엎드려 있던 재욱이 비스듬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물었다.
“어때요?”
수현은 곰곰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재욱의 연주는 늘 절박했다. 본인에겐 큰 장점이 될 수도 있겠으나, 콩쿠르 같은 경선에선 약점이 됐다. 혼신의 힘을 다하는 인상을 주는 대신, 작곡가가 악보에 써 내려간 음표들을 스스로 휘두르지 못하고 그저 쫓아가기 바쁘다는 인상이 따라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수현은 재욱이 정말로 피아니스트로 성공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음악을 주무르지 못하고 지금처럼 그저 뒤쫓아 가기만 한다면 그는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지 못할 것이다. 그건 무엇보다 천재를 원하는 예술계의 풍조 탓이 컸다.
“훌륭해.”
“제가 쭉 보니까, 선밴 거짓말을 잘 못하더라고요.”
“물론 부족한 부분도 있지. 하지만 아마추어인 내가 널 평가한다는 게 좀…… 교수님께 들려 드리지 그래?”
“선배한테 먼저 듣고 싶어요. 그냥 기탄없이 말씀해 주세요. 보완할게요.”
“똑같지 뭐. 네 약점은……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치는 게 어때?”
자신의 단점을 제일 잘 볼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재욱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리던 재욱은 몸을 길게 일으켰다. 한겨울의 서늘한 공기가 무색하게 이마에 식은땀이 흥건해서, 수현은 손수건을 건넸다.
실은 연주를 듣는 내내 떠오르는 감상이 있었다. 요한의 연주였다. 비단 어제 그의 연주를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여러 개의 음표가 겹쳐 소리가 화려해질 때 더욱 손의 움직임을 크게 한다거나 하는 요한의 사소한 버릇들이 눈에 보였다. 그러나 연주하는 사람에게 누군가가 비쳐 보인다거나 누군가를 따라 하는 것 같다는 말은 절대적인 금기다. 수현은 소감의 반만 말하고 반은 거두었다.
“왜 하필 이 곡을 골랐어? 요샌 대회에서 이거 잘 안 치잖아.”
“선배, 승요한이 데뷔한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이걸 쳤어요. 알아요?”
순간 수현의 말문이 막혔다.
“아마 알겠죠? 선밴 승요한 연주라면 목숨 걸고 들으니까. 언제 한번 말한 적 있었던 것 같은데 전 걔가 이상하게 싫더라고요. 연주가 너무 매끄럽고, 차갑고, 뱀 같아서 솔직히 일부러 찾아선 안 듣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에 피협 1번 한다니까 교수님이 승요한 연주 영상을 보여 주시지 뭡니까. 처음 국제 무대에 등장했을 때래요.”
말을 잇던 재욱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짐작건대 그는 요한의 연주 영상을 본 일을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걸 보는데 있죠. 그 자식이 피아노랑 섹스하는 줄 알았어요. 진짜 또라이 같더라고요. 아, 이건 저렇게 연주해야 하는 거구나. 저게 정답이다. 심사 위원 중 누가 그랬더군요. 차이콥스키가 이거 이상의 연주는 없을 거라 기립 박수 쳤을 거라고요. 다 보고 나니까 죽고 싶었죠. 심지어 그해 1위는 없었대요. 승요한을 줘야 하는데 지원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나. 스토리텔링까지 너무 완벽하잖아요.”
“교수님 잘못이야. 원래 콩쿠르 앞두고는 다른 사람 연주 안 보고 안 듣는 게 철칙인데…….”
“승요한 따라 하는 거, 선배라면 모를 리 없을 텐데 그 얘길 안 해 주셔서 오히려 더 이건 아니다 싶어졌어요. 감사해요. 계속 연습하던 거라 아까웠는데 포기할 용기가 생겨요. 이 곡은 안 되겠어요.”
차이콥스키는 땅에 던져졌다. 두꺼운 재질의 악보가 수현의 발치에서 흩어졌다. 요한은 늘 알지도 못하는 채로 수많은 인재들을 좌절시켰다. 그는 악보 그 자체는 물론이고 자신의 연주를 듣는 사람들까지 전부 손아귀에 넣어 주무르고 휘둘러 댔다. 그게 재욱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수현은 무슨 말로 그를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재욱은 피아니스트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악보를 꺼내 들었다. 수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곡을 가릴 형편은 아니겠지만 저건 절박하게 연주하는 그보단 좀 더 여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 이들을 위한 곡이 아닌가.
“넌 왜 선곡이 하나같이…….”
“아, 이거요. 괜히 도전해 보고 싶잖아요. 나랑 안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이 이상하게 하고 싶은 심리 같은 거랄까.”
“입상할 생각이 없구나.”
“아뇨, 우승할 거예요. 연습해 올 테니까 조만간 선배가 꼭 다시 들어 주세요.”
용기만은 박수를 쳐 주고 싶었다. 수현이 부드럽게 재욱의 뒷머리를 토닥였다. 그러자 그는 좀 놀란 것 같았다.
“뭐. 표정이 왜 그래.”
“아뇨, 놀라서. 선배 원래 스킨십은 좀 박한 편인 거 아시죠?”
“아, 그으래?”
어이없단 듯 웃던 수현은 그의 뒷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 * *
한국 대학교 측은 음악관 제일 꼭대기 층을 개·보수해 승요한의 개인 연주실로 만들었다. 승강기도 8층은 요한만 버튼을 눌러 출입할 수 있게 학칙까지 변경했다. 덕분에 최근 음악관 7층의 계단 밑에는 늘 몇 명의 학생들이 서성거리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수현도 예외는 아니어서 늘 7층까지 승강기로 올라왔다가 계단으로 8층까지 올라가는 번거로움을 겪어야 했다.
웬일로 요한이 이른 오후부터 학교에 나와 있었다. 어떻게 알고 바로 아래층 계단은 이미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의 피아노 연주를 귀동냥으로나마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서성거려도 새어 나오는 소리 하나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소리에 예민한 요한은 주변이 시끄러운 것을 질색했다. 우주 속에 자신만 갇힌 듯한 환경을 선호했다. 모순인 일은 그가 어떤 시끄럽고 번잡한 환경에서도 동요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학교는 그의 취향을 고려해 8층 연습실의 방음벽을 일반 방음벽의 두 배는 되는 두께로 설치하는 정성을 보였다.
수현은 이중 출입문을 열었다. 김 비서가 말없이 카드 키를 전해 주고 가기에, 현재 요한에게 자신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다. 굳게 닫힌 연습실 안에서부터 그가 치고 있는 음악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요한의 실황 음반으로 발매된 적이 있는 곡이었다. 공통 과제였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재욱이 새롭게 고른 자유곡이기도 했다. 우연치곤 지나쳤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홀린 듯이 손잡이를 돌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요한의 연주는 계속됐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중 기교적으로 가장 현란한 이 곡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카덴차 같은 난해한 곡이다. 요한같이 손의 움직임이 유연하고 거침없는 유형이 연주하기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요한에게 악성들의 음악은 전리품이었다. 흥미 없는 것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상징적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용이한 것처럼, 그도 음악을 대할 때 그런 식이었다. 이를테면 요한에게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은 퀸 엘리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던 날 쳤던 곡이기 때문이었다.
“이쪽으로 와요.”
연주를 마친 요한이 돌아봤다. 그러고는 수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시선은 늘 수현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벌서는 것처럼 피아노맡에 서자, 요한의 시선이 둥그렇게 수현의 주변을 자전하듯이 돌면서 전신을 살폈다. 머리카락, 목덜미, 손가락에 이르기까지 둥글게, 둥글게 회전하면서. 그러고는 그대로 수현의 몸을 들어 피아노 위에 앉히는 것이었다.
쾅! 수현의 둔부가 「운명 교향곡」의 도입부를 제멋대로 연주했다. 요한은 비싼 피아노 건반이 수현의 체중으로 짓눌리는 일엔 아랑곳하지 않고 못다 만진 하반신을 꼼꼼하게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 청바지에 감싸인 허벅지·무릎, 드러난 발목까지 자기 물건에 흠집이라도 난 데가 없는지 확인하듯 낱낱이 살폈다.
한 곡의 위대한 음악이 그의 전리품이라면, 나는 그에게 뭘까.
적어도 사람이 아니라 그의 손아귀에 있는 물건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뭐 하자는 거야?”
“이 안까진 안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여긴 통제 구역이니까.”
안에서부터 꽉 닫혀 굳게 잠긴 이중문은 무슨 일이 생겨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들어와 달라고 이거 보낸 거 아니었어?”
“맞아요. 형은 거부할 수도 있었죠.”
수현이 카드 키를 내밀자, 그가 부디 가지고 있어 달라는 듯 정성껏 뒷주머니에 넣어 주는 것이었다.
“학교엔 왜 왔어?”
“책 좀 볼까 하고?”
“무슨 책? 찾아다 줄게. 내 역할이 그런 거야. 까라면 까는 거.”
“린이 하는 말은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말아요. 원래 한국말을 하면 말투가 좀 상스러워져요. 앞으로도 책 정도는 내가 찾아볼게요. 도서관에 이미 들렀다 올라왔어요.”
그가 가리킨 손끝에 책들이 몇 권 겹겹이 쌓여 있었다. 우리나라 전통 음악에 관련된 이론서들이었다.
“워밍업하는 셈 치고 전통 음악들 편곡을 좀 해 보고 있거든요. 꽤 재미있어요. 혹시 피아노 버전으로 듣고 싶은 음악 있어요?”
“나 작년에 「아리랑」 했던 거 들었어. 되게 세련되고 좋던데, 그건 누가 편곡한 거야?”
“그건 앙코르곡이라 앨범에도 안 실렸는데 어떻게 들었어요?”
“도쿄 공연이었잖아. 가깝다고 엄마가 가고 싶어 하셔서 몰래 널 보러 갔었어. 뭐, 이제 몰래가 아니게 됐네.”
“내가 했어요. 앞으로도 편곡은 작품 번호를 안 붙일 계획이고요.”
어머니는 늘 요한을 보고 싶어 했다. 다만 유럽까지 갈 여력이 안 돼 그리움만 쌓여 갔다. 그러다 가까운 옆 나라에서 도쿄 필하모니와의 협연이 예정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수현을 몇 날 며칠 들들 볶아 댔다. 그는 결국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마지못해 따라가긴 했지만 한편으론 기대되는 마음도 있었다. 실황 앨범을 듣는 것도 좋지만, 공연장에서 직접 함께 호흡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날 그 공연에서 이전까지 요한의 레퍼토리에는 한 번도 없었던 아리랑 피아노 편곡이 도쿄 한복판에서 앙코르곡으로 과감하게 연주되었던 것을 들었다.
<「아리랑」을 편곡한 다음에 시부야 한복판에 가서 연주하면 통쾌하고 재밌겠다.>
까마득한 옛날, 우연히 들렀던 인사동에서 「아리랑」을 연주하는 길거리 악단을 보고 수현이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교복 차림이었던 수현은 엉덩이가 더러워지는 것도 불사하고 맨바닥에 앉아서 끝까지 연주를 들었다. 그 때문에 요한도 덩달아 그래야만 했다.
어쩌면 그는 기억하고 있었을까. 그러나 수현은 굳이 그때의 기억을 꺼내 들지 않았고, 요한도 해명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수현이 자신을 보러 몰래 왔다 갔다는 말을 듣고도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의 평온한 표정을 보고 수현은 직감했다.
“너 내가 널 보러 갔던 거 알고 있었구나.”
이젠 대체 그가 물밑으로 어디까지 손을 미쳐 오고 있었던 것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자신만 정말 까마득하게 아무것도 몰랐다.
“그런데 왜 「아리랑」 편곡 연주했던 거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봤어?”
“진짜 날 보러 왔었나 궁금했어요. 린한테 듣긴 했지만 반신반의했거든요.”
“인간이 이렇게까지 의뭉스러울 수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군.”
수현은 기가 막혔다. 피아노 위에서 내려가려 하자, 요한이 저지했다.
“린한테 들었어요. 날 설득하라고 했을 것 같아서, 일부러 여기 와서 기다렸어요.”
그는 늘 선수의 선수를 친다.
“맞아. 부탁받았어. 너 「프라하의 봄」에 초대됐어. 거기 가게 도와 달래.”
“뭘로 날 설득할 거죠?”
“네 경력에 도움이 되겠지.”
“농담이죠? 그 부분에서 난 이미 완벽해요.”
“이런 기회는 쉽게 오는 게 아니잖아.”
“천만에요. 앞으로 더 크고 더 좋은 수많은 기회가 있을 거예요.”
그가 맞다. 마지못해 이유를 찾아 설득하던 수현은 끄덕였다. 요한이 진짜 가치 있는 대단한 피아니스트라면 앞으로 몇 번이고 다시 러브콜을 해 올 것이다. 그리고 그가 연주를 그만두지 않는 한 아마 그 일은 반드시 일어나리라.
“사람들 많은 곳에서 연주하고 싶지 않아? 그건 한번 하면 못 끊는다면서.”
“잠시 쉬겠다고 하고 한국에 왔어요. 지금은 특별히 그런 생각 없고요. 좀 더 그럴싸한 거 없어요? 너무 하기 싫은 티가 나.”
“…….”
“좋아요. 내가 도와줄게요. 이건 어때요? 그냥 무대에 오를 순 없으니 수락하면 비행기 시간까지 전부 계산해서 최소한 1주일은 체코에 있어야 하거든요. 내가 무려 1주일이나 눈앞에서 안 보이는 거예요. 형은 자유죠.”
동요한 수현이 몸을 비틀었다. 그가 깔고 앉은 피아노의 음들이 한꺼번에 널뛰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요한은 우와, 하고 놀라는 듯싶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설득해 볼 마음이 생겼어요?”
“넌 왜 이러는 거야? 체코에 가고 싶어?”
“별로.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요.”
“난 할 일이 많아서 못 따라가.”
“그건 날 더 가고 싶지 않게 만드는 발언인데요. 실패했네요.”
애초에 거절하리라는 것을 알고 왔다. 자신도 설득하지 못하면서 그를 설득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닌가. 단지 린이 한 부탁을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일 뿐이다. 어느 쪽에도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를 계속 한국에 있게 하는 일이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수현은 매일 밤낮으로 끊임없이 고민했다. 어떻게든 도시락이라도 싸 들고 다니면서 그를 돌려보내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그러려면 자신이 그를 따라나서야만 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으므로. 하지만 수현은 한국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가족이 있는 이곳은 최후의 저지선이었다.
요한의 피아노는 독점하고 싶을 만큼 숭배하지만 요한에게 영영 사로잡히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담배나 마약 따위가 몸에 해롭단 걸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사람들 마음이 꼭 이럴까. 그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요한.”
발목의 툭 튀어나온 복사뼈를 만지작거리던 요한이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왜 약속 지키란 말 안 해?”
“하면, 따라올래요?”
“…….”
“거봐.”
“왜 그렇게 내가 필요해?”
적어도 수현은 그의 피아노를 사랑했다. 그에게 자신을 지불할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요한이 자신에게 가진 감정은 사랑이 아니며, 만일 본인이 그렇게 느끼고 있더라도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가 왜 이렇게 자신에게 연연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지극히 평범하고, 또 아무런 음악적 영감도 줄 수 없었다. 심지어 스스로 제대로 된 연주를 하지도 못하는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만일 성적이든 감정적이든 욕구를 해소하는 데 도구가 필요하다면 자신보다 훨씬 다루기 쉽고 편한 수많은 사람들이 자청하고 나설 것이다.
“사랑해요.”
“그건 내가 원하는 설명이 아니야.”
“이 말을 듣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원한다면 얼마든지 말해 줄 수 있어요.”
“네 그 사랑한다는 말 안 믿어. 그 말을 믿게 하고 싶었다면 나한테 그러지 말았어야지. 그럼 나,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잘 착각하고 감사하면서 네 옆에 거머리처럼 붙어 있었을 거야.”
“…….”
“가끔 환청이 들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수현은 죽고, 또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졌다.
“아직도 화났어요?”
요한의 커다란 손이 발목을 타고 올라와 종아리, 허벅지를 훑고 축 늘어진 손목으로 향했다. 수현의 오른쪽 손목에는 뼈가 도드라져 있었다. 그 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쓸어내리는 것이었다.
한참을 그러다 손목에 꼼꼼하게 입을 맞췄다. 수현의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미 상처는 다 나았는데 아직도 종종 아프다는 착각에 빠져들 만큼 깊은 트라우마가 남고 말았다.
“화? 아직도 화가 났냐고?”
수현은 요한의 손을 뿌리쳤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그는 순순히 내쳐져 주었다. 다급히 목을 틀어쥐고 숨통을 조일 듯이 압박하자, 눈을 가늘게 뜨며 웃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수현의 목덜미에 소름이 쓱 돋아났다. 두 손은 힘없이 떨어졌다. 요한은 그런 수현을 받쳐 안고 끌어 내려, 으스러져라 품에 안았다.
“나한테 왜 그랬어? 요한…….”
“…….”
“차라리 네가 영원히 없어졌으면 좋겠어.”
요한은 숨을 몰아쉬는 수현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 * *
누구에게나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친구가 되는 존재가 있다. 대부분 책이나 술이겠지만 수현의 경우에는 ASMR이라는 이름의 소음이었다. 뇌를 자극해 심리적인 안정을 유도하는 것으로 적당히 익숙한 소음이 방아쇠로 작용해 기분 좋은 안정을 얻게 되는 것이다.
수현은 연필이 종이 위에서 사각거리는 소리를 재생하고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그러면 동시에 요한이 악보 위에 음표를 그리는 모습이 상상됐다. 그는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재생했다. 그러면 요한이 부드럽게 내려치는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이 떠올랐다.
그는 ASMR 기계를 끄고 라디오를 켰다. 클래식 채널에 주파수를 고정하자 서두를 여는 진행자의 추천곡 설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청취자 여러분들께서 신청곡 많이 보내 주고 계시는데요. 네, 우리나라가 배출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승요한이 한국에 왔죠? 틈틈이 저희 음악 산책에서도 승요한의 연주 여러 번 틀어 드렸었는데 이 곡은 없었나 봐요.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자주 들을 수 있고요. 저도 즐겨 듣는 곡이거든요. 이 음악 들려 드리면서 오늘 「클래식 음악 산책」 문 열어 볼게요. 승요한이 연주하는 프란츠 리스트의 「사랑의 꿈」.]
“없는 데가 없군.”
그는 어디에나 있었다.
그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불현듯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파 왔다. 수현은 라디오마저 꺼 버렸다. 어디에든 있다. 언제라도 그가 있었다. 고요함이 수현의 전신을 수놓았다. 죽기 전엔 이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끝없이 암담해졌다.
불안 증세에 시달리는 환자처럼 그는 정신없이 미간을 구기고 침대에 온몸을 욱여넣을 듯 엎드렸다.
요한은 그저 재미있어서, 흥미 있어서, 가장 잘할 수 있어서 치는 그 피아노를 수현은 목숨만큼 사랑했다. 그 소중한 피아노를 나눠 가지려고 했던 게 잘못이었을까. 같이 나누는 데 익숙하지 않은 요한은 자신의 몫까지 전부 가져가 버렸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말했다.
<시시한 음악가는 빌린다. 위대한 음악가는 훔친다.>
위대한 음악가는커녕 시시한 음악가조차 되지 못하는 잔챙이에 불과했던 수현을, 위대한 그는 빌리지도 훔치지도 않고 그저 빼앗아 버렸다.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지만, 벌써 9년 전의 일이었다. 요한이 수현의 집으로 와서 함께 산 지 6년째 되던 해였다. 그때의 수현은 스승 이동준의 추천과 몇 번의 주니어 콩쿠르 입상 경력으로 한국 대학교 피아노과 특기자 전형 수시에 합격한 상태였다.
적요에 기대 차츰 선잠에 빠져 가는 수현의 머릿속에 그날의 기억이 바람처럼 흘러들어 왔다.
* * *
때는 수현이 갓 스무 살이 되던 해, 2월의 어느 늦은 밤이었다.
마침 아버지 친구의 부고로 장례식장에 간 부모님이 집을 비웠다. 수현도 새 학교에서 만나게 될 예비 동기들과 늦은 시간까지 함께 보냈다. 아담한 집 안에는 요한 혼자였다. 그는 수현의 아버지가 그를 위해 들여놓은 그랜드 피아노로 늦은 밤까지 연주했다. 10시가 넘어가자 밖은 비가 쏟아져 내렸다. 비 내리는 풍경은 꽤 운치 있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수현에게 우산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으, 완전 다 젖었네.>
늦은 새벽 집으로 돌아온 수현은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된 자신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홀딱 젖어서 물이 사방으로 뚝뚝 떨어졌다.
수건으로 몸을 대충 닦은 그는 거실로 걸어오다 피아노 위에 쓰러지듯 잠들어 있는 요한을 발견했다. 사실 맨 처음 요한이 곤히 잠든 장면을 봤을 땐 혹시 죽은 게 아닌가 싶었다. 너무나 고요하고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그는 꼭 시체 같았던 것이다.
잠든 요한의 앞머리가 조금 젖어 있었다. 씻고 나온 건가……. 수현은 요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려다가 손을 떼어 냈다. 여전히 축축하게 젖은 자신의 손 때문이었다. 대신 그가 깨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담요를 덮었다. 그리고 마침내 씻으러 들어가려는데, 손목이 덥석 붙잡혔다.
요한이 깨어 있을 것이란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에 수현은 비명부터 질렀다.
<으악! 놀랐잖아! 나 때문에 깼어?>
소리를 벌컥 질러 놓고도 도리어 요한이 놀랐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는 손바닥의 물기와 냉기를 없애기 위해 담요에 마구 닦아 내더니, 요한의 하얗게 질린 양 뺨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왜 여기 이러고 있어. 들어가서 자야지.>
보면대 위에 악보는 없었다. 오늘은 어떤 곡이었을까. 그가 밤늦도록 연주할 줄 알았으면 약속 같은 건 잡지 말고 집에 있을걸. 사실 요한이 없는 모임 같은 건 하나도 재미없었다. 뒤늦게 후회해도 늦은 일이었다.
<나 아까 너 닮은 사람 봤다?>
<…….>
<뭘 연주했어? 내가 너무 늦게 왔지. 비가 많이 와서 택시가 잘 안 잡히더라.>
손목은 여전히 부자유했다. 요한은 앉은 채로 자신의 손을 수현의 손목에서 손등으로, 마침내 손가락 마디마디까지 내려 뼈마디를 더듬거렸다. 이윽고 다시 손목을 붙들었다.
<술 냄새가 나요.>
<나도 이제 마실 수 있으니까. 애들이랑 마셔 봤어.>
<나 그거 정말 싫어하는데.>
<그래. 넌 이런 거 절대 배우지 마. 별맛도 없더라.>
<…….>
<표정이 왜 그래. 요한, 무슨 일 있어? 아파. 손 좀 놔줘.>
눈빛이 서늘했다. 이상하게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주위에 이상 징후가 있으면 어디로든 대피해야 한다.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상대는 친동생 같은 요한이었다. 수현은 몸이 굳어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미 요한이 결박하듯 그의 전신을 뒤에서 감싼 후였다. 수현이 머금고 있는 물기 때문에 자신의 얇은 옷이 축축해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요한……!>
수현이 소리쳤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등 뒤에 선 요한은 그대로 수현의 손목을 들어 올려 건반 위에 놓았다. 위험을 감지한 수현이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요한은 그대로 뚜껑을 있는 힘껏 닫아 내렸다.
쾅!
그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뚜껑과 건반 사이에 꽉 끼인 오른손은 있는 대로 옥죄여 있었다. 안 돼. 두려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왜 이래. 너……. 머릿속에서 경보등이 울려 댔다. 당장 어떻게든 이 손을 치료해야 했다.
<병원, 나 병원 가야 돼. 이러지 말고…… 아파!>
<아파?>
<읏, 아파! 죽을 것 같아…….>
요한은 다시 한번 그의 손을 붙잡아 건반 사이에 끼우고 뚜껑을 내리려고 했다.
<안 돼……!>
수현이 울부짖었다. 그러자 이번엔 자신의 손아귀에 틀어쥐고 손가락을 힘껏 비트는 것으로 그 울음소리에 응답했다. 마치 피부 안에 감춰져 있는 뼈를 전부 부러뜨릴 듯 자비라곤 전혀 없었다. 아악! 뒤늦은 비명을 지르던 수현의 얼굴이 창백하게 식어 갔다.
<이걸로 결별이야.>
낮은 목소리가 전주곡처럼 음산하게 울렸다.
<너.>
늘 불편할 정도로 깍듯한 존댓말만 고수하던 요한의 입에서 나온 첫 하대였다.
<그리고…… 네가 사랑하는 피아노.>
<이거, 놔! 이 미친 새끼야! 요한, 제발……!>
<이제 그만 쳐요.>
그는 수현의 이미 부러진 손가락을 붙잡고 한 번 더 꽉 비틀었다. 뚜둑, 하고 뼈마디가 완전히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미쳤어! 갑, 갑자기 이게 무슨…… 아아악! 놔! 제발……! 119 불러 줘. 이 손 놔줘. 제발 부탁이야…… 제발. 요한!>
피아노를 쳐야 하는 손이다.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던 일부였다. 수현의 얼굴에 식은땀이 계속 흘렀다. 핏기 없는 얼굴에서 핏발 선 눈가만이 붉었다. 원망할 정신도 없었다. 이 절망적인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느냐를 생각해야 했지만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요한이 내게 왜……. 천재인 그가 자신에게 열등감이 있어서 이런 짓은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넌 대체 왜…….
요한은 이렇듯 횡포를 부려 놓고도 아무런 동요조차 없었다. 수현은 흐느꼈다. 찢어진 피부 위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이런 상처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뼈가 다 부러진 듯한 이 손…… 어떡하지. 지속된 압력으로 인대가 전부 끊어진 게 아닐까 싶었다. 다 망가진 손을 내려다보던 수현은 요한이 가까이 다가오자 발로 밀어냈다. 물끄러미 걷어차인 자신의 양다리를 내려다보던 요한은 한 걸음 물러섰다.
처음으로 수현의 눈동자 속에 두려움이란 색깔이 비쳤다. 그걸 본 요한이 무슨 생각을 하든 수현은 더 이상 상관없었다. 이미 오른손 절반이 완전히 망가진 채로 혼이 다 나가 있었다.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눈으로 보고도 현실감이 없었다. 완전히 망가진 자신만의 악기가 눈앞에서 맥없이 덜렁거렸다.
음악에도 프렐류드가 있다. 그러나 요한의 이 기이한 행동에는 그 어떤 전주조차 없었다. 수현에게 이건 생사를 넘나드는 일에 필적할 만큼 심각한 일이자,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엄청난 재앙이었다.
피아노는 내게 전부였다. 너는 왜 내게 이런 짓을…….
<대체 왜…….>
<왜?>
<…….>
<이게 규칙 아니었어요?>
<하, 하아……. 요한, 난 진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네가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어……!>
<그 옆자린 내 거였어.>
규칙.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돌이켜 보던 수현은 아연해졌다.
지난해 두 사람이 러시아에 갔을 때 일이다. 나란히 앉아 「꽃의 왈츠」를 쳤던 두 사람은 연주가 끝난 뒤 말로는 하지 못할 어떤 심리적인 교감을 느꼈다. 그때 수현은 앞으로 두 대의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은 서로와만 해야겠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뱉었다. 그걸 듣고 요한이 규칙을 만들자고 말했다. 그래서 자신은 한쪽 손을 자르는 한이 있더라도 투 피아노만큼은 다른 사람과 치지 않겠다고 농담했다. 긴장하고 있는 자신을 요한이 알아챌까 봐서였다.
하지만 그건 그냥 관용적 표현이었어. 절대 널 속이거나 기만하지 않겠다는 의지였을 뿐이라고. 안에서 뼈가 부러져 손가락이 너덜너덜해진 손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끝도 없이 암담했다.
<너 설마…… 하…… 아까…… 너였어?>
<비가 많이 오길래. 우산을 가지고 갔었어요.>
아까 전 강남역의 술집에서, 요한과 비슷한 사람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예비 동기와 함께 피아노를 치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자신을 잠시 지켜보다가 이내 사라지길래 요한이 보고 싶은 마음에 환시라도 본 모양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미성년자가 출입할 수 없는 술집 안이었기에 진짜 요한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음부턴 이렇게 늦지 말아요.>
뒤이어지는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졌다. 딸칵. 요한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수현은 그대로 차가운 맨바닥에 누워 있었다. 뭐부터 해야 할지를 몰랐다. 119……. 그런데 휴대폰을 어디에 뒀더라……. 제대로 생각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까 전 자신의 손을 망가뜨리던 그의 표정은 수현의 등골을 다 서늘하게 했다. 사는 동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차가운 얼굴이었다. 게다가 그 순간의 자신은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저 요한의 표정으로 뭐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됐구나 하고 인지했을 뿐이었다. 그는 말했다.
《그 옆자린 내 거였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해서라든지, 자신을 오랜 시간 증오해서 따위의 이유였다면 차라리 납득했을 것이다. 정말 오늘의 그가 아까 전의 일로 이런 사태를 벌인 거라면, 그는 잘못된 집착과 독점욕으로 미친 정신병자다.
<하…… 윽. 너무 아파…….>
부러진 오른손의 통증이 극심했다. 눈에서 눈물이 자꾸 흘러나왔다. 수현은 손이 다 망가진 이 암담한 현실이 너무 끔찍하고 두려운 나머지 그대로 정신을 놓고 기절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