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지난밤에 꾼 악몽을 빙자한 기억의 발현으로 수현의 두 눈이 떼꾼했다. 밤새 잠을 거의 설쳤다. 그런데도 그는 이른 아침부터 쓸데없는 일로 찾아오는 학생들 전부를 최대한 친절히 응대하고 있었다. 언제나 성실한 업무 태도를 보이는 건 몸에 밴 습관이었다.
까마득한 학번의 선배 중 피아노과에 출강하는 열정 넘치는 강사가 한 사람 있었다. 수업 시간보다 반드시 15분 먼저 도착해 학과 사무실에 들르는 그녀는 학생들을 상대하는 수현을 볼 때마다 이따금 이런 식으로 말하곤 했다.
<적성에 안 맞아 보이네.>
맞는 말이었다. 그는 오늘도 그녀와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기는 서비스업 같은 거 해도 잘할 거야. 표정이 좀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긴 하지만 오히려 그런 지루한 표정과 능숙함의 조합이 서비스 직종의 정체성인 법이지.”
“놀리시는 거예요?”
“일 때려치우고 연주하고 싶지 않아? 내 눈에 그래 보여서 말이야. 사실 아까 올라오는 길에 자길 봤어. 애들 음악관 앞에 모여서 합주하는 거 지켜보고 있더라?”
“…….”
“수현 씬 정말 피아노를 좋아하는 게 제삼자인 내 눈에도 보이거든. 왜 계속 치지 않고 조교가 된 거야? 대학원 다니는 것도 아니라면서? 이건 사무직이잖아. 게다가 비정규직.”
대답할 말을 고르던 그는 어설프게 웃었다.
“손에 장애가 있어서요.”
“어머, 정말 미안. 몰랐어. 취미로 칠 정도도 안 되는 거야?”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쉬운 일도 아니에요.”
그녀는 깜짝 놀라 수현의 손을 눈으로 두루 살폈다. 그런 그녀에게 손을 맡긴 채로 수현은 이런 생각을 했다. 왜 피차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그녀와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걸까. 자신도 잘 알 수 없었다. 다만 물꼬가 한번 트이자 예상보다 마음은 편했다. 자신의 삶을 뒤흔들었던 사건의 결말을 이제는 그저 날씨를 얘기하듯 타인에게 말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이럴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보통은 밥을 사죠.”
“살게. 아주 비싼 걸로. 정말 미안해.”
“아니에요. 선배님 탓도 아닌데요. 밥 얘긴 농담이었어요.”
수현이 웃자, 그녀는 손에 장애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더 화들짝 놀랐다.
“어머, 농담도 할 줄 알아?”
“농담하죠. 장난도 치고. 제가 무슨 로봇인가요.”
“로봇이라기보단…… 말이 나와 얘기지만 그늘이 좀 있지. 애들 얘기 들어 보니까 자기 학부 때도 사람 끊어 내는 걸로 유명했다며. 그런데 솔직히 내 눈엔 그것도 적성에 안 맞아 보여. 수현 씨 사실은 마음이 되게 따뜻한 사람 같거든.”
그늘이라.
수현은 다른 사람에 비해 오감이 조금 더 발달했다. 어릴 때 건강 검진을 위해 병원을 자주 드나들면서 발달 검사도 가끔 병행했다. 그가 받은 결과지는 감각 면에서 그가 전국 평균치를 훨씬 웃돈다는 것을 상세히 알려 주었다. 냄새, 소리, 향기, 맛 따위의 감각이 남들보다 눈에 띄게 섬세했던 것이다.
그 덕분일까. 그는 늘 감각을 넘어선 감정에도 민감했다. 남들보다 잘 웃고, 잘 울고, 잘 화내고, 그런 뒤에 너무나도 미안해하는 감정 친화적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이런 행동을 하면 남이 괴로워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훨씬 친절하게 대했고, 이런 말을 하면 기뻐하리라는 것 역시 알기에 조금 더 다정할 수 있었다. 같은 음악을 들어도 그 안에 담긴 회한, 환희 그 모든 것들을 조금 더 선명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것들이 현저히 부족한 요한에게 자신이 느낀 바를 나눠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자신의 오만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것을 나눠 주기는커녕 요한의 그늘에 흡수되고 말았다.
“맞다. 참, 승요한 말이야.”
“물어보셔도 저 잘 몰라요.”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수들이며 냄새를 맡은 온갖 언론들까지 수현을 소통 창구로 쓰고 있는 통에 그는 한 달 내내 승요한이라는 이름 석 자에 시달리고 있던 판이었다.
“너무 바로 철벽 치는 거 아냐? 둘이 친구라는 소문 다 듣고 왔단 말이지. 이동준 선생 때문에 서로 안다면서. 학교에는 가끔 오는 거 같던데 대체 무슨 수업을 듣는다는 거래?”
“글쎄요. 저도 잘…….”
어떤 규칙을 정해 놓은 게 아니라 그는 그저 내킬 때 나오는 정도였다. 잘 모르겠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수현도 대답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다만 어느 정도 예상은 가능했다.
“교수님들 다 기다리시는 눈치야. ‘부담은 되지만 승요한이 내 수업을 듣게 된다면?’ 싶은 거지. 지난번 교수 회의 따라갔더니 청강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지휘과나 성악과 교수님들까지 전부 들뜬 게 보이더라고. 교수들도 그런데 애들은 오죽할까.”
“교수님들께서 올해처럼 우리 과실에 자주 오셨던 적이 없긴 해요. 선배님도 청강하러 올까 봐 들뜨고 그러세요?”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지?”
“너무 기대하진 마세요. 요한이 그러겠다고 말한 건 아니지만…… 제 생각에 개설된 수업을 청강하는 일은 거의 없지 싶어요.”
“역시 그렇지? 그냥 말만 그럴 것 같았어. 자긴 진짜 친한가 보네. 승요한 실제 성격은 어때? 역시 예술가니까 좀 까칠한가?”
좀처럼 분명히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들의 연속이었다. 음악적인 면에서의 요한은 무던하다는 수식에 조금 더 가깝다. 평상시의 기본 기질도 유사했다. 물론 선호하는 환경은 있지만 그런 제반이 준비되지 못했다고 해서 굳이 예민하게 굴지도 않았다. 다만 가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는 돌발 행동을 했다. 그는 한마디로 설명하기가 어렵고, 복잡했다. 수현은 그냥 웃어넘겼다.
“잘 웃고 친절하니까 사람들은 걜 다정한 왕자님처럼 여기지만 그런 애들이 진짜 무서운 거거든. 잘 보면 웃으면서 할 말 다 하는 캐릭터잖아. 웃는 건 참 근사한데……. 속은 좀 자기밖에 모르고 냉정할 것 같아. 안 그래?”
수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녀를 응시했다. 전부터 느껴 왔지만 그녀는 사람을 꽤 잘 봤다. 문득 그녀의 머리 위로 시선을 던졌다.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그렇게 속속들이 알 만큼 친하진 않아요. 선배님 강의실 가실 시간 아니에요?”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시계를 힐끗 본 그녀는 엉덩이를 반쯤 걸치고 앉아 있던 책상에서 내려왔다. 악보들을 챙기는 모습이 분주했다.
금세 과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그녀에게 수현은 황급히 일어나 인사했다. 딸칵. 문이 닫혔다. 도로 자리에 앉은 그는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왕자님 좋아하시네.”
요한. 앞면은 다정한 척하지만 뒷면은 잔인하다.
그래서 종잡을 수가 없었다.
* * *
음악관의 전 층은 제일 위 요한의 연습실과 제일 아래 도서관을 제외하면 전부 실기 연습실이었다. 지하의 도서관 안에는 음악사, 비평, 음악 치료 등을 주제로 한 각종 음악 전문서, 악보, 총보 등은 물론이고 연주 레코드나 DVD들까지 음악에 관한 자료들이 총망라된 종합 자료실이 있었다. 다만 CD나 총보 등의 도난 사고가 빈번해 학생들은 저녁 6시 이후로는 출입할 수가 없었다.
그곳의 커다란 창문 밖으로는 언덕 아래의 교정 정경이 한눈에 보였다. 조교가 된 이후 수현이 가장 만족한 점이라면 때로 그곳 창가에 앉아 어두운 빛으로 물들어 가는 저녁 교정을 관람할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최근 작곡과는 음대의 그 어느 학과보다도 심리적으로 바빴다. 요한이 작곡을 하겠다고 이 학교로 들어왔으니 체면을 구기지 않으려면 모든 면에서 요한이 필요한 것을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했다. 옆 사무실을 쓰는 데다 피아노과에 요한이 적을 두고 있는 죄는 작지 않았다. 퇴근까지 단 5분만이 남아 있을지라도 수현은 작곡과 조교의 부탁이라면 응당 음악관에 들러 악보를 복사해 바쳐야 했다.
“수현 선배, 혹시 지금 갖고 있는 무소륵스키 악보 있어요? 아무거나.”
“없는데. 지휘과한테 물어보죠?”
“이미 물어봤죠. 저 지금 박인갑 교수님한테 가 봐야 돼서 애들한테 시키려니까 6시 이후로는 자료실에 학생들이 못 들어가는 게 생각나잖아요. 수현 선배,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기왕이면 이 곡 지휘자용 총보로.”
수현은 승낙의 의미로 손만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 작은 포스트잇이 놓였다. 그는 필요한 총보의 제목을 눈으로 읽었다.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
“지금 복사해 올게요.”
음대의 각 학과는 월말마다 소규모 테스트 과정을 거쳤다. 실기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뜻에서 교수님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종의 담합이었는데, 그 탓에 월말이 되면 각 실기실은 학생들의 대실 신청이 줄을 이었다.
피아노과의 아이들도 늦은 시간까지 삼삼오오 모여 연습으로 바빴다. 1학기 테스트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한 학생들은 여름에 있을 「음악인의 밤」에 교수님 추천을 받아 무대에 설 수 있기 때문에 유독 욕심들을 부렸다. 실제로 학부 때는 수현도 월말마다 바빴다. 오히려 중간·기말고사보다도 훨씬 긴장됐다.
학기 초라 그런지 바짝 독이 오른 모습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귀여워 보였다. 실기실 안의 학생들을 들여다보며 걷던 수현은 맞은편에서 뛰어오던 누군가와 부딪칠 뻔했다.
“선배! 놀라지 마세요. 저예요.”
“깜짝이야. 어디에서 나타난 거야?”
“문 너머로 선배 지나가는 거 보이길래 뛰어나왔죠.”
재욱이 연습실의 손바닥만 한 창문을 가리켰다.
“저 연습실 작은 창문 틈으로 날 봤다고?”
“네. 눈썰미 죽이죠. 안 그래도 연락드릴까 했는데 우리 인연인가 봐요.”
인연이라. 그 무거운 무게로 자신과 이어진 어떤 사람을 그는 알았다. 물론 악연이라고 하는 쪽이 훨씬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무슨 일인데?”
“내일 저녁에 뭐 하세요?”
두 손에 꼭 들고 있는 네모난 종이는 앞으로 보고 뒤로 봐도 음악회 표였다.
“저랑 공연 보러 가요. 이거 서울시가 주관하는 기념 음악횐데요. 저 콩쿠르 지원서 내러 갔다가 우연히 은사님 만나서 받았거든요. 이 공연 이동준도 협연한대요.”
“아, 혹시…… 시카고 심포니?”
“역시 알고 계셨네요?”
머릿속에 얼마 전 이동준이 직접 전해 주고 갔던 표가 떠올랐다. 제일 앞줄 정중앙으로 가장 비싼 자리였다. 재욱이 내민 표의 자리가 그것보다 좋을 순 없었다. 기왕 갈 거라면 전자를 선택하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그 표는 요한과 함께 오라며 두 사람 모두의 스승님이 선물해 준 것이었다.
“그거 자리가 정확히 어디야?”
“좋은 자린 아니고요. 2층이에요. 하지만 오히려 2층이 사운드가 더 빵빵하다는 거, 선배도 잘 아시죠?”
공연은 보고 싶었으나 요한과 동행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그와 함께 간다면 반드시 사람들의 눈에 띌 것이었다. 이동준의 공연이기도 했으니 그의 제자로 알려진 요한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쏠릴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수현은 애초에 가려는 엄두도 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 표로 몰래 보고 온다면……. 갈등이 일었다. 이동준은 수현이 제일 처음 존경하고 따르고자 했던 피아니스트였다.
“같이 가요, 네? 시카고 심포니 언제 또 오겠어요? 이동준도 한국에서 공연하는 거 재작년 세종 문화 회관에서 했던 콘서트 이후로 처음이고요.”
“언제, 몇 시지?”
“내일 저녁 7시 반요. 예술의 전당. 이르게 저녁 먹고 가면 딱이에요.”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밥은 내가 살게.”
“내일 수업 끝나고 과 사무실로 모시러 갈게요.”
“아냐. 공연장 근처에 식당을 예약해 놓을 테니까 거기서 만나자.”
학교 내에서 만에 하나 누군가의 눈에 띄어 좋을 일이 없었다. 재욱을 연습실에 도로 들여보낸 그는 건물 지하의 도서관으로 향했다.
얼굴이 익숙한 사서와 눈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위층의 소란은 꿈이라는 양 지극히 적요했다. 안으로 들어가는 수현에게 사서가 뭔가 말을 하려던 것 같았는데. 뒤늦게 돌아보니 그는 이미 상기된 얼굴로 휴대폰 통화를 하느라 바빴다.
수현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좋아하는 자료실 창가의 풍경은 여전했다. 아직 겨울이 다 물러가지 않고 봄과의 세력 싸움에서 이긴 모양이다. 이르게 지는 해는 저녁 6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도 금세 노을과 어둠을 몰고 왔다.
잠시 앉아 있던 수현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악보를 찾았다. 청구 기호들은 악성들의 이름순으로 되어 있었다.
모데스트 무소륵스키(Modest Mussorgsky). 청구 기호 M이었다. M 칸의 책장 앞에 선 수현은 인기척에 흠칫 놀랐다.
“……!”
먼저 온 손님이 있던 것 같았다. 뒤편의 책장에서부터 어떤 흥얼거림이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뒤편이면 N이니 찾고 있는 악보는 마이클 니만(Michael Nyman) 정도일까. 낮은 목소리와 손가락으로 얇은 종이를 툭툭 두드리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아까 전 이곳 사서가 수현에게 하려다 만 말은 ‘지금 그가 여기 있다’ 정도였는지도 모른다.
숨을 한껏 죽인 그는 책장을 뒤지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적이 등 뒤에 있다는 사실은 그 사실만으로도 두려움이 됐다.
“돌아봐요. 그렇게 등만 보이고 있지 말고.”
“있는 줄 몰랐어. 언제 온 거야?”
“조금 전에요. 우연이 여러 번 반복되면 필연이라던데.”
오늘따라 나한테 인연 타령 하는 사람이 많네. 수현은 돌아봤다. 책들이 듬성듬성 꽂혀 있는 책장을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좁은 틈으로 쏟아지는 시선이 따가워서 괜히 횡설수설하게 됐다.
“여긴 어쩐 일…… 뭐 찾으러 온 거야?”
“특별히 찾는 게 있어선 아니고 구경하려고요. 지난번에 내려왔을 때 반밖에 못 둘러봤거든요. 자료 많다더니 베를린 음대만 못하네요.”
“그럼 손에 든 건 뭔데?”
“아, 이거.”
책장 빈틈 사이로 요한이 얇은 DVD를 내밀어 보였다. 베르디의 「오텔로」 실황 공연이었다. 셰익스피어의 원작 희곡을 오페라로 만든 것이다. 베네치아의 장군 오텔로가 부하였던 야고의 음모로 인해 아내가 간통을 저질렀다고 의심하다 끝내 파멸에 이른다는 내용이었다. 요즘 그는 편곡하는 데 재미를 들인 듯했다.
“이런 데 갇혀 있으니까 나쁜 짓 하고 싶어요. 해도 돼요?”
“요한…… 여긴 내 직장이야.”
요한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반은 농담이었던 것 같았다.
“참, 내일 이동준 선생님 공연이 있다면서요. 형한테 표 주셨다던데 왜 같이 가잔 소리 안 할까요?”
그에게서 돌아서던 수현은 흠칫 놀랐다. 모르고 있었다면 모를까 그가 먼저 말을 꺼낸 이상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선약이 있어. 난 그 공연 못 갈 것 같은데, 너한테 줄까?”
“아뇨. 공연은 별로. 난 데이트가 하고 싶었던 거예요. 버려요.”
요한은 흥미를 잃었다는 듯 다시 책장 사이사이를 살피기 시작했다. 정말로 뚜렷하게 찾는 게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인지 이쪽저쪽을 조금씩 살펴보더니 이내 밖으로 나갔다. 책장 사이에 남겨진 수현은 엉겅퀴에 발목이 감긴 듯 두 다리가 무거워졌다. 요한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던 그는, 악보를 품에 안은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나는 왜 네게 그랬을까.
인생을 통틀어 그에게 한 첫 번째 거짓말이었다.
* * *
대한민국이 낳은 위대한 피아니스트.
요한이 등장하기 전까지 그 수식어는 이동준의 것이었으나, 혜성처럼 등장한 요한 때문에 가려진 그의 이름은 이미 지는 해의 동의어가 되어 버렸다. 심지어 요한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면서 이동준이 실질적으로 세계의 클래식 무대에서 그다지 큰 영향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식으로 그를 재조명하는 일도 있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요한을 질투하거나 그와 상종하기도 싫은 게 인지상정이다. 스승의 명성을 짓밟은 제자. 일각에서는 그런 식으로 두 사람을 이어 싸움을 붙이는 일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동준은 그 어떤 모략에도 초연하게 대처했다. 요한만이 위대하며, 어쩌면 그를 세계 무대에 내보내기 위한 발판이자 도구로 쓰기 위해 신이 자신을 이 한국 땅에 내려 준 것일지도 모른다는 농담까지 천연덕스럽게 할 정도였다. 그는 요한을 진심으로 아꼈다. 적어도 그가 요한의 음악가로서의 도약을 진정성을 가지고 도왔다는 것만은 수현이 보증할 수 있었다.
정명훈의 지휘로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부족했다. 이런 것도 내성이라면 내성일까. 청중으로서 수현의 귀는 말 그대로 승요한의 연주로 단련되어 있었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7년 전 쇼팽 콩쿠르에 출전했을 당시 요한이 연주하기도 했던 곡이었다. 그 뒤로도 종종 무대에서 연주했으니 수현의 귀에는 요한의 버전으로 몇 번이나 들려 인이 박인 음악인 것이다. 스승의 연주인데도 감히 아쉬운 부분이 그의 귀를 계속 긴장시켰다.
그러나 무대 위의 협주자 이동준은 행복해 보였다. 수현은 요한의 연주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훨씬 좋아했지만, 분명 이동준의 연주가 더 보고 있기 편했다. 아마 표정 때문인 것 같았다. 요한은 피아노를 대할 때 늘 진지했고, 또 열정적이었지만 단 한 번도 연주하면서 엄청나게 행복해 보였던 적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는 태어나서 그런 표정을 지었던 적이 한 번도 없을지도 모른다.
인터미션 시간이 되자, 청중들은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수현은 그때까지도 일어설 수가 없었다. 무대와 자신의 자리까지는 끝과 끝으로 멀었지만 그곳의 아득한 행복감이 이곳까지 전이되어 왔다. 그리고 무심코 뺨이 따가워 돌아보자,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재욱의 시선이 눈앞에 있었다.
“왜?”
“선밴 정말 피아노를 좋아한다 싶어서요.”
“아주 좋아하지.”
그에게 피아노는 이루지 못한 첫사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 모든 파국의 파편들을 견딜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어땠어요?”
“글쎄. 감히 평가하긴 그렇고, 최소한 선생님이 행복해 보이셔.”
“선배도요.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승요한 레코드 들을 땐 이상하게 좀 힘들어 보였거든요. 연주자의 기운이 듣는 사람들한테까지 오는 걸까요? 승요한은 다 가졌는데도 가끔 좀 이상할 정도로 불행해 보일 때가 있어서…… 아, 맞다. 물 사 올게요.”
잠시간의 휴식 후 공연은 재개됐다. 마침내 본 공연이 전부 끝나고, 앙코르 무대까지 보고 밖으로 나오자 이미 사위가 어둑어둑했다.
로비부터 대기실로 가는 길목이 취재진들과 꽃다발을 들고 있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마침 승요한이 한국에 와 있는 와중이라 이동준에게 쏠리는 취재 열기가 평소보다 훨씬 뜨거웠다.
수현이 재욱을 이끌고 도망치듯 나가려는데, 마침 공연장 뒷문으로 나오고 있던 이동준이 그를 붙잡았다.
“수현아!”
수현은 꽃다발 하나 없는 자신의 빈손을 머쓱하게 매만졌다.
“선생님, 죄송해요. 조용히 왔다 가려고 했던 거라 꽃이 없네요.”
“와 준 것만으로도 고맙지.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길래 못 오나 했더니. 너 이쪽으로 나가는 게 보이더라고. 나 눈 좋잖아.”
공연장 정중앙의 좋은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수는 없어서 표를 타 과 교수님께 선물로 드렸던 터였다. 정말 쥐 죽은 듯이 왔다가 조용히 가려고 했는데, 수현의 얼굴 위로 낭패감이 스쳤다.
“옆에…… 요한이가 아니네?”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니 재욱이 어정쩡하게 서서 통로를 막고 있었다. 이동준은 재욱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이름이?”
“저는 심재욱이고요. 한국 대학교에서 피아노 전공하고 있습니다. 팬입니다, 선배님.”
“그래요? 고마운 일이네.”
이동준은 대답하며 싱긋 웃었다.
“재욱아, 나가서 차 좀 빼 올래?”
차 키를 건네받은 그가 꾸벅 인사하고 나가자 비좁은 통로에 수현과 이동준만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난감해진 수현이 고개를 저었다.
“요한이한텐 오늘 못 본 걸로 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지. 네 부탁이라면.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 정돈 알아야 협조할 수 있지 않을까?”
차마 대답하지 못한 채로 수현은 손만 그러쥐었다. 다행히 이동준은 수현과 요한의 긴 역사를 아는 몇 안 되는 인물이자, 두 사람 모두를 아끼고 배려심이 많은 성정을 지녔다. 일일이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는 자신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어려우면 관두렴. 나는 오늘 널 못 본 걸로 하겠다.”
“실은…… 거짓말하고 왔거든요. 오늘 선약 있어서 이 공연 못 볼 것 같다고요.”
고해 성사를 듣고 있던 이동준의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뜨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수현은 쓰게 웃었다.
“수현아, 나만 입 다문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면 어쩌게? 만에 하나 요한이 알게 되면 그땐 어떡하려고.”
“저도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요한과의 약속을 어겼던 수현에게 내려진 것은 파국이었다. 그때 결과가 어땠는지를 똑똑히 봤기 때문에 여태 거짓말 같은 건 시도한 적이 없었다. 수현이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요한이 어떻게 나올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요한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는 이동준의 얼굴에 수심이 깊어졌다. 오랜 스승은 이미 수현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다는 듯 그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요한일 너무 자극하진 않는 게 좋지 않겠니? 오늘 일은 네가 경솔했다. 기회가 되면 솔직하게 얘길 하도록 해. 아무튼, 와 줘서 고맙구나. 그럼 난 인터뷰가 남아 있어서 가 봐야겠다.”
셋에서 둘로, 둘에서 하나로. 마침내 홀로 남겨진 수현은 그대로 벽에 등을 기댔다. 뭐 하고 있는 짓인지 모르겠다. 요한에게 굳이 말로 꺼내지 않는 것들, 침묵한 채로 감추는 것들. 물론 많았지만 그건 ‘거짓말을 한다’라기보단 그저 ‘말하지 않는’ 범주일 뿐이었다. 다만 도서관에서 요한이 들고 있던 실황 공연 DVD가 하필이면 베르디의 「오텔로」였다는 게 꼭 자신의 인생을 통튼 복선처럼 느껴져 소름이 돋았다.
두 사람은 사귀고 있는 것도, 그 무엇도 아니다. 그가 자신에게 소유권을 주장하고는 있지만 실상은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위태로운 관계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그를 배신한 것만 같은 죄책감이 들었던 것이다.
* * *
탁! 자작하던 수현은 술병을 목재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방금 전 재욱이 했던 충격 발언을 곰곰이 곱씹었다.
“선배, 혹시 그거 알아요? 우리 처음 만난 거 학교 아니에요.”
두 사람의 첫 만남이 학교에서가 아니었다는 것은 생각보다 꽤 놀라운 일이었다.
“우리 누나 바이올린 전공했거든요. 지금은 시집가서 전업 됐지만.”
“그건 알아. 나랑 졸업 연주회에서 협주했던 바이올린 심재영 선배, 맞지?”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말한 적 없잖아요? 나만의 비밀이었는데!”
“너 그 선배 졸업 연주회 하던 날 나 처음 봤었다며? 네가 그랬었잖아.”
“네. 그랬지만요.”
“심재영, 심재욱. 연관 못 짓는 게 바보 아니냐?”
재욱과는 그가 입학한 뒤 선후배 사이로 만나 지금의 친구 관계가 되었지만 사실 안면을 튼 것은 그보다 조금 더 전의 일이었다.
한국 대학교 졸업 연주회에는 독주뿐만 아니라 합주도 종종 공연되곤 했는데, 현악 전공 학생들이 종종 피아노과 재학생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가 있었다.
1학년 때, 수현도 우연히 한 번 도움을 줬다. 바이올린을 전공한 선배 중 심재영이라는 여학생의 부탁이었다. 그 뒤로는 협주 요청을 전부 거절하는 바람에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도움이 되고 말았다. 재영의 동생이던 재욱은 그날 공연을 관람하러 왔다가 수현을 처음 봤었다던 모양이다.
“전 이미 아실 줄 몰랐어요. 말씀을 하시지.”
“꼭 말해야 알아? 이름도 비슷하고, 그 선배 공연 보러 고등학생이 굳이 대학 캠퍼스에 왔었다는데 머리가 있으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 그리고.”
“그리고요?”
“둘이 똑같이 생겼어.”
“어쨌든! 그렇게 말했었지만. 사실 진짜 처음 본 건 학교에서가 아니었어요.”
재욱이 하는 말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던 수현은 이내 자신의 과거로 뛰어들었다. 그는 기억의 페이지마다 조금씩 떠올렸다. 아무리 되새겨 봐도 재욱과 마주친 기억은 없었다. 재욱은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잘난 얼굴이었다. 인연이 있었는데 이런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난 기억에 없어. 누나 얘기 꺼낸 거 보면 공연장 같은 데서 봤나?”
“맞춰 봐요.”
“네가 대답해 주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싶은데.”
“꼭 쉬운 길로 가려고 하더라? 그건 아주 비겁한 태도예요.”
그가 푸념하듯 농담하자, 수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재욱은 빈 술잔을 내밀었다. 수현이 가득 채워 주니 그것을 한입에 털어 넣고 결심했다는 양 입을 여는 것이었다.
“누나도 주니어 콩쿠르에 자주 나갔거든요. 예선에서부터 잘하는 애들 바글바글하잖아요. 몇 번 나가서 물 먹더니 한번은 너무 긴장된다고 같이 가재요. 뭐, 자꾸 떨어지는 게 긴장해서 그런 것 같길래, 응원해 줄까 해서 갔었죠. 누나가 저 있으면 좀 괜찮아져서요.”
그에게는 그런 점이 있었다.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묘한 기류. 인간의 생체에 기류가 흐른다면 아마 재욱의 것은 그런 종류의 것이리라.
“콩쿠르에서 날 봤다는 거야?”
“네. 차이콥스키 주니어 콩쿠르요. 거기에 나갔다가 선밸 봤어요.”
차이콥스키 주니어 콩쿠르는 수현도 출전했었던 대회였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의 세 가지 경연 대회를 동시에 여는 우리나라의 꽤 큰 청소년 음악 대회였다. 10여 년 전의 중학생이던 수현은 거기에 출전해 피아노 부문 2등을 수상했다.
줄곧 절박했었다. 요한과 같이 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여서 그에게 끊임없이 자극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몇 개월 동안 집중해 연주해 왔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1번을 결선에서 연주했다. 최선을 다했고, 실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1등이 아니었다. 1등은 마지막 순간 음을 이탈했지만 훨씬 감정이 풍부하다는 평가를 들었던 다른 출전자가 수상했다.
콩쿠르에는 콩쿠르의 법칙이 있다. 실수를 최소화하는 것은 중요한 평가 기준 중 하나였다. 수현은 실수하지 않았고, 누군가는 했는데도 자신은 2등에 머물렀다. 매일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연습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준비했던 경연이었다. 그런데도 우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재욱이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날인 것 같았다. 그때 수현은 줄곧 마음속으로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애써 외면해 왔던 불편한 진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영원히 타고난 사람들을 이길 수가 없구나. 나는 그들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1등이 될 수 없겠구나. 나는 요한처럼은 될 수가 없는 거구나.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 있게 준비해 왔던 콩쿠르였고, 예선부터 줄곧 느낌도 좋았다. 그래서 경연을 보러 오라고 요한까지 결선에 굳이 초청했었는데……. 객석에 앉아 무대를 보고 있을 요한을 떠올리자 너무나 낯이 뜨거워 혼이 났었다. 그래서 그날은 수현에게 아주 조금은 뇌리에서 지우고 싶은 순간이기도 했다.
“그랬구나. 네가 말하니까 나도 그날이 선명하게 생각나네. 한동안 잊고 있었거든.”
이번엔 수현이 잔에 찰랑거리는 술을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또 자작해서 한 번, 두 번, 서너 번 기계적으로 털어 넣자 뒤늦게 재욱이 말려 왔다.
“그날 생각나서 그래요? 선밴 정말 멋졌어요.”
“그리고 우승은 못 했지.”
“선배 연주가 더 멋있었어요. 제 눈에는요.”
수현은 픽 웃었다.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술기운이 조금씩 오르는 모양이었다. 재욱의 앞에 있으면 괜히 속마음을 털어놓게 되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술이 조금 들어가니 더했다.
“난 그 대회에 나가서…… 꽤 큰 걸 배웠어. 나랑 경쟁하고 있는 많은 아이들, 심지어 날 제치고 1등 한 그 애마저도 있잖아, 아무리 몸부림치고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도 요한처럼 될 수는 없다……. 난 어떻게든 계속 쳐 보려고 콩쿠르에도 나가 보고 별짓을 다 했지만 요한은 콩쿠르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어. 거들떠도 안 봤어. 이동준 선생님이 그렇게 외국으로 나가야 한다고 삼고초려를 하는데도 듣는 시늉도 안 했어…….”
수현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던 재욱이 고개를 갸웃했다.
“둘이 그렇게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였어요?”
“이동준 선생님이 정말 가르치고 싶어 했던 건 요한이었어. 난 옵션 같은 거였달까. 아니면 깍두기 같은 거였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졸라서 배우게 됐지. 그것마저도 요한 덕분이었고.”
“그 새낀 그냥 천재잖아요. 천재랑 날 비교하는 건 나만 갉아먹는 일이에요. 음악 전공하는 사람이니까 그 정돈 학습했는 줄 알았는데요.”
“너 지금 나 가르쳐?”
“모르면 배워야죠. 공자 아저씨가 한 말도 몰라요? 삼인행필유아사!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가운데 반드시 내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잖아요.”
“네, 「논어」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래도 선배, 말했죠. 승요한은요, 진짜 잘 쳐요. 쇼팽의 현신 같아요. 그래도요……. 난 선배 연주 쪽이 더 좋아요.”
“나 손 병신인 거 몰라? 먹이는 거야, 지금?”
평소의 수현이었다면 지그시 노려보곤 무시하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보통 때와 달리 일일이 발끈했다. 지켜보던 재욱이 손으로 천천히 그를 다독였다. 웬일로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보니 술기운이 올라 있는 듯한데, 무척 귀여워 보였다. 재욱은 어떻게 대답을 해야 가장 현명할지를 고민하는 동시에 곧 숙취 해소제라도 사러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선밸 존중하는 거예요. 전 우수현 씨처럼 피아노를 사랑하는 사람 보듯 만지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뭐랄까, 승요한 연주는 꼭 욕구를 분출하는 것 같아요. 선밴 사랑을 표현하는 것 같고요. 이 차이, 알겠어요?”
“모르겠어. 되게 기분 나빠.”
“모르겠으면 어쩔 수 없고요. 어쨌든 적어도 선배 연주를 보고 피아노를 배워야겠다 결심한 사람이 한 사람, 이 세상에 있다는 거죠.”
소처럼 크게 깜빡이던 수현의 눈이 일순 가느다랗게 뜨였다. 그는 재욱을 직시했다.
“정말이에요.”
날카로운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 내던 재욱은 믿어 달라는 듯 테이블을 탁, 내려쳤다.
그때의 수현은 그렇게 능숙하게 잘 치면서도 참 절박해 보였다. 그는 애틋하게 건반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1등이 하고 싶다기보단, 누구보다 가장 피아노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그 간절함이 어린 재욱의 눈에도 선연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때까지의 그는 악기에 큰 관심이 없었다. 평범하게 태어난 누나가 음악을 전공하면서 얼마나 많이 좌절했는지를 옆에서 봐 왔기 때문이었다. 재영이 자신의 재능을 탓하면서 좌절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저 조그만 현악기가 꼭 악령같이 느껴지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재욱은 갑작스럽게 피아노가 배우고 싶어졌다. 한글을 쓸 수 있게 됐을 때부터 건축가가 꿈이었던 그는 단번에 진로를 선회했다. 이후 예고에 가려고 몰래 지원했지만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래서 아쉬운 대로 일반고에 진학해서 몰래 피아노를 계속 공부했다. 그리고 몇 년 뒤 누나인 재영의 졸업을 축하하러 한국 대학교 대강당에 발을 들였던 그날, 누나의 연주에 피아노 반주를 해 주고 있는 수현을 발견했다.
이건 운명이다. 그때의 그는 그 두 글자 말고 떠오르는 단어가 아무것도 없었다.
“왜 진작 말 안 했어? 그 전에 봤다는 거.”
“졸업 연주회 땐 손이 많이 불편하신 거 같더라고요. 못 본 사이에 다치신 건가 싶었죠. 주니어 콩쿠르가 선배 중학생 때였고, 제가 본 건 학부 1학년 때니까 그 몇 년 사이에……. 아무튼 다치시기 전에 봤단 얘기 하기가 좀 그렇더라고요. 무엇보다 선배가 많이 어두워져 있었고요. 그것도 역시 손 때문인가 싶어서 차마…….”
손을 다친 것은 대학에 입학하기 직전이었다. 그때 일어난 일 이후로 수현의 피아노 연주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당연히 피아노가 전부였던 그의 인생 또한 절로 구겨졌다.
그는 손을 다친 뒤 학적을 등록만 해 놓고 꼬박 1년을 쉬었다. 갑자기 가던 길이 가로막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듬해 재입학해서 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심했던 이유는 자신의 의지보단 부모님의 끊임없는 격려와 응원 때문이 컸다.
재욱의 예상은 정확히 맞았다. 손이 다 망가진 그는 점점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게 됐다. 다시는 피아노를 제대로 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몇 날 며칠 울고불고하던 그는 점점 슬픔도, 아픔도, 암담함이나 좌절감도 전부 얼굴에서 감추게 됐다.
부모님이 걱정하시는 게 불편했다. 무엇보다 여전히 자신의 곁에서 태연한 얼굴로 앉아 있는 요한에게 혼자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싫었다. 괴로워하면 할수록 그가 기뻐할 것 같았다. 자신이 맞았다고 착각할 것 같았다.
“그럼 왜 이제야 얘기하는데? 너 때문에 전부 다 생각나잖아.”
콩쿠르에서 입상하던 날도, 손을 다치던 날도 한꺼번에 떠올라 머릿속에 새삼 각인됐다. 수현은 한 잔을 더 입에 털어 넣었다. 굳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 알은체를 하지 않은 것은 그의 다정한 배려심일 것이다.
그럼 끝까지 모르는 척해 주지. 왜 이제 와서…….
수현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선배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져서요.”
“주제넘게 굴지 마.”
“주제넘게 굴고 싶어요. 이 질문이 주제넘지 않아질 때까지.”
솔직하게 미안해하고, 또 호감을 표현해 오는 재욱은 좋은 친구지만 그를 대할 때 늘 어느 한구석에 불편한 마음이 있었다. 예전의 자신을 닮았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일 수 있는 좋은 핑계였다.
얼굴 위로 닿아 오는 눈빛이 뜨거웠다. 수현은 저런 종류의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예의 눈빛보다 훨씬 모서리가 깎여 있는 둥글둥글한 색채이긴 했지만 어쨌든 본질은 같았다.
그러니까.
요한처럼.
“너 나 좋아해?”
“선배가 절 그냥 좋은 후배로 생각한다는 건 잘 알아요. 선전 포고 했으니까 앞으로 더 노력할게요.”
“아냐. 그러면 안 돼…….”
“왜 안 되는데요?”
“그럼 요한이 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릴걸. 걘 그럴 수 있거든. 이거 농담 같아?”
“아뇨. 왜 여기서 승요한 얘기가 나오는지 모르겠지만요.”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요한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베토벤, 모차르트, 하이든,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원하는 그 무엇이든지 대리 만족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외의 모든 시간 동안 요한은 공포였다. 언제 그 아름다운 손으로 자신의 목을 억죄어 올지 모르는 날카롭고 차가운 갈퀴였다. 요한을 떠올리자 등골이 서늘했다. 지금은 속 모를 얼굴로 웃고 있지만 언제든 안면을 바꾸고 약속을 지키라고 자신의 숨통을 조를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눈이 점점 감겼다. 뒤늦게 한계까지 오른 술기운이 자신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취하게 하는 것일까.
무거워진 머리가 점점 테이블이 있는 방향을 향했다.
“그건 왜냐면…… 어, 나 쓰러진다…….”
“선배, 진짜 취했어요? 선배!”
털썩!
낮게 경고하던 수현은 그대로 테이블 위로 고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