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평소 수현이 정장을 갖춰 입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그는 출근할 때도 셔츠에 청바지 같은 평범한 차림을 고수했다. 그런 그가 1년에 두세 번, 칼 같은 정장 차림을 하는 날이 있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어머니가 다니는 성당의 작고한 신부님은 한국에 일가친척이 없어 그녀가 매년 대신 기일을 챙기고 있었다. 바로 승국환 신부였다.
“올핸 요한이도 한국에 있으니까 지금이라도 네가 말 좀 해 볼래?”
“엄마, 누가 그러는데 쉬운 길로만 가려고 하지 말래요. 비겁하다고.”
“그래도 양아버지 기일인데……. 한 번을 안 와. 녀석도 고집을 피울 일이 따로 있지.”
사제는 일가를 이룰 수가 없어서 본인의 호적에 아이를 들일 수는 없었지만, 그는 사촌 동생의 호적에 요한을 입적시키고 자신이 죽기 전까지 정성껏 키웠다.
처음 두 사람이 함께 살게 된 것은 요한의 친어머니가 사고로 사망한 여덟 살 때였다고 들었다. 요한의 선택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지지하고 응원하는 어머니마저 그의 냉담과 무심함에 답답함을 토로할 때가 있었는데, 바로 신부님의 기일이었다. 사고로 돌아가신 직후 수현의 집으로 와 살게 된 요한은, 그 뒤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양아버지의 기일에 그를 추모하러 간 적이 없었다.
“내가 가잖아.”
“네가 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요한 말고 다른 사람 가는 건 의미도 없는데 매년 엄만 왜 가?”
아무 말 하지 못하는 그녀의 한숨을 끝으로, 차 안은 침묵이 맴돌았다. 운전대를 꽉 움켜쥔 수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매년 승국환 신부의 기일이 되면 종종 떠오르는 것은 장례 미사를 하던 날의 요한이다. 그때 수현도 엄마를 따라 성당에 갔었다. 망자의 양아들인 요한은 얼굴이 눈물로 잔뜩 젖어 있었다. 수현은 습기가 가득한데도 그렇게 청순하기 짝이 없는 얼굴은 처음 봤다. 아이의 새카만 색 앞머리가 눈앞을 가렸다.
소리도 내지 않고 울고 있던 아이와 눈이 마주친 수현은 홀린 듯이 다가갔다. 괜찮은 거냐고 물었지만 아이는 그저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수현은 아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자 눈물만 뚝뚝 흘리던 요한이 숨을 헐떡이며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요한이 우는 모습을 본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일이었다.
“다 왔다. 엄마, 내려요.”
성당 교구의 납골당은 평일 오전인데도 꽤 붐볐다.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또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승국환 신부의 자리는 일반실 가장 끝 방. 거기서도 가장 밑이었다. 유골함의 자리는 추모객의 시야에 편할수록 비싸고, 불편할수록 저렴했다. 생전 그의 유지에 따라 가장 겸허한 자리에 그는 안치되어 있었다.
“올해도 이게 또 있네. 대체 누구지?”
유리문 바로 앞에는 꽃이 놓여 있었다.
“워낙 인망 있으셨으니까 누가 왔다 간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그런가? 서울이 신부님 연고지도 아니고 마땅히 올 사람이 없는데. 미국 사는 친척들은 몸이 불편해서 여기까지 오시기가 여의치 않다고 들었거든.”
사제는 미국에서 태어나 홀연히 한국으로 온 뒤로 일생을 외롭게 살았다. 말년에 요한을 거두긴 했지만 평생 신에게 자신의 전부를 봉헌하는 검소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친구라곤 성당에 와서 고민을 털어놓는 신도들이 전부였다. 가족도 아닌 망자를 기리러 신도들이 이곳까지 올 일은 드물다고 봐도 좋았다.
“혹시 요한이 아냐? 너 뭐 얘기 들은 거 없니?”
“글쎄. 없었어.”
한 송이의 국화꽃. 지난 7년간 매년 신부님의 기일이 되면 한 송이씩 놓여 있었다. 그러나 누가 왔다 간 것인지 어머니와 수현은 알지 못했다. 요한이 아닐까 싶었던 적도 있었으나 그 7년의 시간 동안 요한이 한국에 왔다 갔다는 소식은 린으로부터도, 뉴스로도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유골함 앞의 조그만 액자 안에서 웃고 있는 승국환 신부의 얼굴이 보였다. 수현은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의 미소가 자신을 위로하듯 서글퍼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요한이는 잘 지내요, 신부님. 아주 근사한 피아니스트가 됐어요. 아이 하나를 기르는 건 오래달리기 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잖아요. 이 정도면 제가 바통 이어받아서 잘 달렸다고 해도 될까요?”
어머니의 주파수 높은 음성이 평소보다 훨씬 차분해져 있었다.
“요새, 이상하게 요한이 친모 생각이 가끔 나요. 요한인 이런 말 싫어하겠지만 자라면서 점점 그 여자 얼굴이 많이 보여요.”
“그 친어머니 이야기는 왜 자세히 안 해 주는 거예요. 궁금한데.”
수현은 신부님의 영혼과 대화하는 어머니의 말 틈에 불쑥 끼어들었다. 요한이 직접 말하기를 꺼리는 오래된 과거에 관한 이야기는, 어머니의 입을 통해 가끔 훔쳐 듣는 일이 고작이었다.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좀처럼 쉽게 이야기해 주질 않아 궁금하던 차였다. 분명 그녀가 요한에게 미친 나쁜 영향이 많으리라.
“어떤 분이었어요? 그렇게 예뻤어? 사고로 돌아가셨다면서.”
“뭘 그런 걸 궁금해하고 그래.”
자신의 어머니는 다분히, 그리고 지극히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편견 있는 사람들 눈에는 다소 가벼워 보일지도 모를 만큼 거짓말도, 숨기는 것도 잘 못했다. 하지만 아주 가끔 유별날 정도로 이상한 힘을 발휘해 자신을 통제했다. 무언가 지킬 것이 있다고 느낄 때 말이다.
그 무언가는 대부분 요한이었다. 기른 정이 때때로 낳은 정보다 크다고 하니 어쩌면 일종의 모성일까. 요한에 관해서 얼마나 말을 아끼는지 자신이 아는 어머니가 아닌 것처럼 보일 때도 종종 있었다.
“그 여자…….”
언제나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고수했던 어머니의 입이, 웬일로 쉽게 열렸다. 수현은 눈앞의 승국환 신부 사진을 힐끗 봤다. 어쩌면 그의 앞에서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주 예쁘고…… 아주 나쁜 년이지.”
유리창에 비친 수현을 지그시 응시하던 그녀는 결심을 마친 듯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서로를 마주 본 두 사람은 납골당 중앙에 설치된 낮은 의자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요한이 처음 봤을 때 얘길 했었나?”
“한 적 있어.”
어머니와 그의 첫 만남에 대해선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어머니와 다른 신도 몇 사람이 성당의 승국환 신부님과 함께 동네 곳곳에 가정 방문 봉사를 다니던 때였다. 어머니는 그 일로 주말 오후마다 집을 비웠다. 피아노 학원에 갔다 돌아오던 수현을 골목 어귀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귀가했던 적도 종종 있었다.
당시 요한은 갓 학교에 입학해야 하는 여덟 살이었다. 그러나 아이의 이름은 그때까지도 호적에 등재조차 되지 않았다. 분명히 이 땅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데도 세상에 없는 아이였다. 그 사실을 안 동사무소 직원이 출생 신고를 해야 한다고 그의 친모에게 몇 번이나 권고했지만 벌금을 물기가 싫다며 번번이 미뤘던 모양이었다. 승국환 신부는 그런 아이를 직접 세상에 존재하는 아이로 만들어 주었던 사람이었다. 이름도 직접 지어 주었다.
요한의 집은 성당 뒤쪽 언덕을 넘어 고지대에 있었다. 무더운 어느 날, 신부님과 아이의 집으로 찾아간 어머니는 집 안에 깡마른 남자애가 지쳐 쓰러져 있는 것을 봤다고 한다. 때는 한여름이었다. 찌는 더위에 선풍기조차 틀어 놓지 않고 아이는 방치되어 있었다.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탈수에 영양실조라면서 애가 이 지경이 될 동안 부모님은 뭘 했느냐는 의사의 타박이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아주 종합 병원이었어. 그때가 생생해. 애가 탈수에, 영양실조에…… 막 환각까지 보더라.”
어머니는 과거의 요한을 떠올리자 문득 북받쳐 오르는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수현은 그녀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 주었다. 어린 날의 요한. 절로 그려졌다. 좁은 방 안에 시체처럼 누워 있는 그의 고집스럽고 차가운 눈매가 말이다.
“게다가 요한이 너처럼 희귀 혈액형인 건 잘 알지?”
수현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갓난아이라면 모를까 머리가 다 큰 아이를 데려다 키우는 일에 회의적이던 아버지가 찬성으로 입장을 선회한 것이 바로 그 이유였던 걸로 기억했다. 수현과 같은 혈액형이니 필요한 경우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처음에는 그런 속물적인 이유로 그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 일을 두고 어머니는 두고두고 아버지를 원망했었다.
“애가 자기가 Rh 마이너스 혈액형인 것도 모르더라. 정말 몰랐는지, 알았는데 제 엄마가 모르는 척했던 건지.”
사실이야 모를 일이지만 짐작건대 아마 후자이리라. 어쩌면 언젠가 한 번쯤 들은 적은 있었더라도 요한에게 워낙 관심이 없어 금세 까먹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날 처음 제대로 그 여자 얼굴을 봤었지. 애 데리러 오라고 신부님이 애 엄마 일하는 가게로 연락을 했는데 새벽이 다 돼서야 술에 찌들어 나타나선. 애틋하게 이름 한 번 불러 주지도 않았어. 보자마자 한 말이 뭐였는지 아니? 너 때문에 저녁 장사 공쳤잖아. 그 한 문장은 평생 잊히지도 않더라.”
얼마 전 요한이 했던 말이 수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숨소리가 끔찍하다는 말을 가끔 했는데 다른 건 견딜 만했어도 그건 꽤 상처였어요.>
낳아 준 어머니로부터 그런 소릴 듣는다는 건 얼마나 참담할까. 왠지 심장이 쓰렸다. 그리고 그를 위해 가슴 아파 해 주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쁜 년. 엄만 그 여자 사고로 죽었다는 얘길 들었을 때도 전혀 불쌍하지가 않았어.”
그녀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났다. 가슴이 아파 더 이상 말하는 게 힘에 부쳐 보였다.
수현도 입을 닫았다. 그는 액자 속에서 환히 웃고 있는 신부님의 얼굴을 응시했다. 쪼그리고 앉아 기도를 올리기 시작하는 어머니는 한참을 일어날 기미가 안 보였다. 이곳에 오면 종종 저랬다. 그러면 수현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도 선 채로 잠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한참이 흘러도 어머닌 요지부동이었다. 수현은 그녀를 일으켜야 하는 게 아닌가를 잠시 고민하며 눈을 떴다.
“……!”
전면의 유리창에 익숙한 얼굴이 비쳤다. 시야 아래는 기도하고 있는 어머니, 그리고 녹슨 기계처럼 고개를 돌리자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요한이 있었다. 그가 싱긋, 웃었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은 출구였다. 당황한 수현이 어머니를 힐끗 살폈으나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요한을 따라나섰다. 기둥에 기대어 있던 요한이 수현을 보고 몸을 바로 세웠다. 검은 정장. 창백한 피부와 대조되어 음산함을 풍겼다. 그는 무슨 옷이든 맞춤옷인 듯 잘 어울렸다.
“꼭 저승사자 같다.”
요한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여긴 어쩐 일이야? 기일에 여기 따라온 적 없었잖아.”
묻고 보니 이상한 말이어서 수현은 당황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은 완벽한 타인이고, 이쪽이 양아들이었다.
“우연히 형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자신은 그가 건반을 누르기만 해도 곁으로 쫓아가는 충실한 존재였다. 꼭 파블로프의 개처럼 본능에 따라 훈련되어 있었다. 자신을 만나러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수현은 그저 끄덕였다. 이곳까지 온, 말하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었으리라 짐작할 따름이었다.
“왔으면 말을 하지.”
“두 분 얘기가 재밌더라고요. 끼어들기가 뭐해서요.”
“그건…… 엄마 탓이 아니야. 내가 궁금해서 해 달라고 졸랐어.”
“비밀 아니었어요. 괜찮아요.”
“저 국화꽃 네가 놓고 간 거야? 매년 오늘마다 놓여 있던데.”
요한은 수현을 빤히 쳐다봤다. 종종 그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림잡기가 힘들었다. 괜히 마음이 불편해진 수현이 머쓱하게 서서 침묵의 실을 짜고 있는데, 어머니가 나와 요한을 발견하곤 호들갑스레 반겼다.
“역시, 요한이가 왔던 게 맞았구나! 여태 국화꽃도 너였어?”
“어머니 점심 사 드리려고요. 그런데 국화꽃이라니, 또 누가 왔다 갔나 봐요?”
그는 그녀를 향해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 *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과거엔 수현이 가장 좋아했고, 이제는 요한이 가장 좋아하는 책이었다. 요한이 처음 이 글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수현 덕분이었다.
수현이 열넷, 요한이 열두 살이던 해였다. 그때 이미 서로를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성당에서 간헐적으로 마주치긴 했지만, 눈인사를 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런데 그날따라 우연히 나란히 앉아 대화할 여유가 생겼다. 수현의 어머니와 승 신부가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며 그들을 소예배실에 두고 대예배실로 가 버렸던 것이다.
갑자기 요한과 단둘이 남겨진 수현은 무척 당황했다. 아무리 자신이 친화력이 좋다고 한들 저렇게 입을 꾹 다물고 세상만사에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이는 아이와 친밀해지기란 하루아침에 모차르트를 전부 마스터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나 기억해? 왜, 작년에 저 앞에서 우리 꽤 오래 얘기했는데…….>
어렵게 입을 열어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수현도 머쓱해져서 더 살갑게 말을 하지는 못했다. 두 사람은 소예배실 한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수현은 자신의 가방 끝만 만지작거리다가 무심코 머리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샹들리에를 쳐다봤다. 이곳에 처음 들어왔던 몇 년 전에도 느꼈지만 무척 위험해 보였다.
그는 다시 요한을 쳐다봤다. 나가 버리거나 다른 곳으로 가 버리지 않는 것을 보면 요한은 아마도 신부님의 일정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자신이야 조금 뒤 어머니를 따라 가 버리면 그만이지만 이 아이는 저녁까지 기다려야 할 텐데……. 수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옆에 서 있자 가만히 쳐다보는 듯하더니 이내 흥미를 잃고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는 것이었다.
<뭘 들어? 피아노곡?>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아이의 연주를 들어 본 적 있는 어머니가 잔뜩 흥분해선 너도 꼭 한번 들어 봐야 한다며 신신당부를 했을 정도라, 계속 궁금했었다. 피아노라면 수현의 유일한 관심사이자 취미이자 꿈이었다. 그러니까, 전부였다. 대체 얼마나 잘 치는데 음악엔 문외한인 엄마까지 저렇게 난리일까 궁금했다.
소예배실에는 낡은 피아노가 있었지만, 아이는 실력 행사를 해 보일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다만 고작 열두 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손으로 무릎을 건반 삼아 부드럽게 연주하기 시작했다.
왠지 방해할 수가 없어서 수현은 차분히 기다렸다. 기다란 손가락이 무척 아름답고 우아하게 춤을 췄다. 그는 홀린 듯이 그 모습만을 바라봤다. 그 어떤 콘서트 무대보다 집중해서 본 것 같았다.
작년에도 한번 요한이 손가락으로 소리 없이 연주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사이 아이의 몸은 조금 더 자랐고, 손도 조금 더 커졌다.
10여 분쯤 흘렀을까. 천천히 잦아드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보며 그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아, 직접 들어 보고 싶다…….
<여전히 능숙하네. 손가락 연주 말이야.>
요한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그거 들어 봐도 돼?>
아이의 어깨를 두드리는 수현의 손길이 무척 조심스러웠다. 마침내 요한의 눈짓이 자신에게 향하자 그는 이어폰을 가리켰다. 요한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안 돼?>
순순히 이어폰을 내미는 손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다시 봐도 무척 컸다. 수현은 아주 조심스럽게 왼쪽 귀에 아이가 내민 이어폰을 꽂아 넣었다. 아무런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 아무것도 안 나오는데? 들으면서 치는 줄 알았어. 그럼 왜 이어폰을…….>
<시끄러워서…….>
어렵사리 목소리를 듣게 된 수현이 무작정 반가워하다가 아이가 만들어 낸 단어를 조합하곤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시끄…… 나?>
<다른 소리가요.>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는 수현의 눈에 조그만 창문 틈으로 멀리 보이는 건설 현장이 들어왔다. 그는 오감이 발달해 소리를 남들보다 잘 듣는 편이었다. 그런 수현도 아득하게 들릴 만큼 크지 않은 소리였다. 거리가 아주 많이 멀었으니까.
저 소리를 들은 건가? 그러나 요한이 덧붙인 말을 듣고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소음들이 자꾸 귀를 괴롭혀요.>
수현은 집중에 집중을 더해 아득한 소리들을 귀로 수집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공사장의 소음 공해에 귀를 기울였다.
<무슨 소리가 들려?>
<어린애가 울어요.>
요한은 신경질적으로 이어폰을 귀에서 빼냈다. 칭얼거리는 소리가 무척 듣기 싫다는 양 미간에 짜증이 가득했다.
<나 귀가 엄청 예민한 편인데, 나한텐 울음소리가 안 들려. 공사하는 소리라면 모를까.>
그러자 예상하지 않았던 말이라는 듯 수현을 물끄러미 보는 것이었다.
<너 혹시 환청이 들리니?>
<뭐가 환청인지 구분할 수가 없어요.>
아. 수현이 탄식 섞인 음성을 내뱉었다. 자신이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만약 환청이 들리는 게 사실이라면 이건 어른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었다. 어머니나 승 신부님에게 상담해 봐야 할 문제 같았다. 하지만…… 뭔가 도와주고 싶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을까.
<지금 주변이 많이 시끄러우면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면 어때?>
<…….>
<넌 한 번 듣고 잘 기억한다면서? 내 목소리를 머릿속 기억함에 넣어 두고 그거에만 귀를 기울여 봐.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요한은 그러겠다, 그러지 않겠다 어떤 답변도 주지 않은 채 침묵했다. 수현은 이 화제를 더 꺼내고 싶지 않아 한다고 여기곤 아이가 기분 상하지 않도록 자연스레 말을 돌렸다.
<그거 알아? 우리 비슷한 점 진짜 많다. 피아노 좋아하지, 우리나라에서 딱 1퍼센트밖에 없는 혈액형 갖고 태어났지, 귀도 좋지. 너 눈도 되게 좋다며.>
혼자 신나서 너무 알은체를 했나. 어느새 표정이 사라지고 빤히 직시하는 눈동자에선 아무것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청소년기의 한 살 차이는 성인의 10년 차보다 더 큰 위력을 지녔다. 그리고 자신이 두 살 위의 형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이상할 정도로 위압감을 주는 아이였다. 머쓱해진 수현이 조금 웃었다. 그가 침묵하는 사이 요한의 뜬금없는 질문이 이어졌다.
<그립다는 건 어떤 느낌이에요?>
<응?>
<얼마 전 본 백건우 리사이틀 영상에서 슈만을 연달아 치더니 그런 얘길 했어요. 오래도록 그리워한 사람을 드디어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이가 그립다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란 데 생각이 미쳤다. 가끔 어머니가 신부님과 통화하는 것을 몰래 엿들었던 것뿐이지만 아무래도 요한은 여러모로 결핍이 많은 아이인 것 같았다. 수현은 편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런 거야. 너희 반 여자애 중에 제일 예쁜 앨 떠올려 봐. 학교 끝나고 집에 오니까 그 애가 자꾸 머릿속에 떠올라. 떨어져 있는 일분일초가 보고 싶어서 너무 괴로워. 그러다 조금이라도 빨리 얼굴을 보기 위해서 다음 날 학교에 제일 일찍 가고 싶어지는 거지.>
<전 학교 안 다녀요.>
<헉! 진짜? 미안해.>
<그래도 그게 뭔지는 알 것 같아요. 형이 보고 싶었어요.>
<…….>
<그게 그리움…….>
줄곧 전전긍긍하며 요한을 대하던 수현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는 자신을 콕 집어 가리켰다.
<잠깐! 나?>
<한동안 안 보이길래…….>
<나 기억하고 있던 거 맞구나! 아, 저기 산 뒤쪽에 예중 있는 거 알아? 나 거기 다녀. 입시 때문에 한동안 성당 못 나왔던 거거든. 앞으론 다시 꼬박꼬박 나오려고. 사실은 나도 너 보고 싶었어. 많이 궁금했고.>
요한에겐 작년 이곳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하게 동질감이 들었다. 또 가당찮긴 하지만 약간의 연민도 느끼고 있었다. 친해지고 싶었고, 잘해 주고도 싶었다.
신이 난 수현이 들뜬 얼굴로 최근의 근황을 설명하자 요한이 불현듯 웃음을 터트렸다. 수현은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아이가 소리까지 내어 웃는 모습을 보고 다소 놀랐다.
그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요한이 이어폰 한쪽을 자신이 끼더니, 나머지 한쪽을 다시 내밀었다. 그러고는 엄지손가락만 한 아이팟의 음악 목록을 뒤적여 한 곡을 재생했다. 수현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귀에 꽂았다.
<원랜 이걸 들으려고 했어요.>
<브람스 「피아노 4중주」 3번? 와, 이거 내가 진짜 좋아하는 곡이야! 너도 좋아해?>
금세 음악이 재생됐다. 연신 말을 쏟아 내던 수현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입을 다물었다. 첼로와 비올라, 바이올린, 그리고 피아노의 4중주가 장엄하게 어우러졌다. 우울하기 짝이 없는 음악이지만 한편으론 그 우울마저 아름다웠다.
가만히 듣고 있던 수현은 이 곡이 지닌 분위기가 요한과도 무척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어떤 환경에서 지내고 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쌓인 편견일지도 모른다.
3악장은 10여 분 정도 됐다. 두 사람은 연주가 끝나고 나란히 앉아 여운을 즐기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요한이었다.
<이 곡 제목에는 「베르테르」라는 이름도 있대요.>
<맞아. 왜 「베르테르」인지도 알아?>
<알려 주세요.>
<괴테라는 독일 작가의 소설 중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글이 있는데, 이 글 주인공 이름이 베르테르거든? 이 곡을 만들 때 브람스가 바로 그 베르테르한테 심취해 있었대. 그래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나 봐.>
<어떤 내용이에요?>
<친구인 빌헬름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돼 있고…… 괴테 자전적 소설인데 어, 그러니까……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래. 베르테르한테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 샤를로테라고. 그 여자도 베르테르를 사랑하긴 했는데, 이미 알베르트란 남자랑 결혼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나 봐. 그래서 결혼을 강행했지.>
<…….>
<베르테르는 샤를로테를 너무 사랑하는데, 이제 영원히 자기 것이 될 수 없어져 버렸으니 좌절했고. 결국 권총 자살을 하게 돼.>
<그렇구나.>
잠시 대화가 단절됐다. 그사이 요한은 다시 손가락을 굴려 트랙 리스트를 눈으로 살폈다. 수현은 별 반응 없는 요한 때문에 왠지 초조해졌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글을 요한도 좋아하길 바라는 마음이 싹텄다. 그래서 아이의 양어깨를 덥석 붙들었다. 그 바람에 귀에 아슬아슬하게 꽂혀 있던 이어폰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내 설명이 좀 아쉬웠지? 그래도 직접 읽으면 그것보다 훨씬 재미있어. 한번 읽어 보고 싶지 않아?>
때때로 무언이 긍정의 뉘앙스라는 것은 역사가 유구한 일이었다. 그는 용기를 냈다.
<그 책 내가 구해다 주면 안 될까?>
<직접 읽어 줄 수도 있어요?>
<물론이지!>
어린 요한은 싱긋 웃었다.
* * *
요한의 연습실은 빛이라곤 없이 무척 어두웠다. 어둑어둑한 어둠이 침대 위에 겹쳐진 두 개의 인영 위를 커튼처럼 드리웠다. 타인의 맨몸을 통해 온기를 나누는 일은 아무리 반복해도 영 적응이 쉽지 않았다. 하반신이 꿰뚫릴 때마다 신이 구분해 놓은 음과 양의 조화를 정면에서 거스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괴로웠다. 그사이 요한은 자신의 일부를 수현의 안에 깊이 찔러 넣었다.
“읏……!”
수현의 전신을 감싸듯 그의 뒤에 겹쳐진 요한은 삽입된 자신의 것을 빼냈다. 천천히 빠져나온 성기 끝에서 정액이 흘러나왔다. 그는 수현의 허벅지 사이에 성기를 끼우고 천천히 사정했다. 수현의 턱을 잡아 옆으로 돌려 키스하자, 진득한 혀가 질척하게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갈라진 혀끝에 기다랗게 타액이 고였다. 숨이 가빠진 수현이 시트 위를 꽉 붙들어 쥐었다. 그러고는 고꾸라지듯 시트 위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커다란 손이 수현의 드러난 날개 뼈를 매만졌다. 그렇게 한참이었다.
“무슨 생각해요?”
“옛날 생각.”
“무슨 옛날 생각.”
“베르테르.”
언제부턴가 수현도 음악을 요한처럼 어떤 순간을 기억하는 오브제로 대하게 됐다. 브람스 「피아노 4중주」. 그러니까, 「베르테르」. 수현에게 그 곡은 곧 요한과의 인연이었다. 그 곡만 아니었다면 그들은 친해질 계기가 없었을 수도 있었다.
그들이 친해지지 않았다면 어머닌 선뜻 그를 데리고 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자신은 여전히 피아노를 치고 있었을 거고, 이렇게 모순적인 자신에게 시시때때로 자괴감을 느낄 일도 그를 두려워하며 괴로워할 일도 없었을 텐데…….
역시 「베르테르」가 문제인 걸까.
어깨 주변의 살결을 부드럽게 스치던 손이 천천히 내려와 수현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오른손을 자신에게로 끌어 올린 요한은 잘게 선 핏줄 위에 부드럽게 입 맞췄다. 수현은 저항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화답하지도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있었다.
이미 요한과 조금이라도 결부됐을 때 느껴지는 손의 통증은 만성이었다. 실제로 느껴지는 통증이라기보단 착각에 가까웠다. 이미 잘려 나가 없는 부위에 느껴지는 고통인 환상지통 같은 것이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나아야 했다.
“꼭 신부님 기일에 나랑 이래야 했어?”
수현은 눈을 감아 생기 없는 눈동자를 감추곤 얼굴을 베개 위에 푹 파묻었다. 뒤통수를 쓰다듬는 손길이 퍽 다정했다.
“신부님 기일에 우리가 자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네가 좀 징그러워서 그래.”
몸을 일으키자, 등허리부터 몸을 가리고 있던 시트가 스르륵 내려갔다. 요한은 그것을 수현의 어깨 위까지 끌어 올려 덮고, 드러난 목덜미에 도장 찍듯 입을 맞췄다.
“피곤할 텐데 좀 더 자요.”
“찝찝해. 씻을래. 온몸이 네가 싸 놓은 정액투성이야.”
뿌리치고 일어서는 수현을, 요한은 두 번 가로막진 않았다. 수현이 바닥에 발을 내딛자 애벌레가 벗은 허물처럼 시트 자락이 벗겨져 발치에 덮였다. 그는 그것을 그대로 지르밟고 맨발로 걸었다.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씻고 싶은 열망이 강렬해 가뿐히 무시했다.
쏟아지는 차가운 물을 맞고 있자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뒤늦게 오늘 납골당에 요한이 나타난 일이 궁금해졌다. 그는 그 국화꽃의 주인이 아닌 척했지만 수현은 생각할수록 그인 것 같았다. 지난 7년 동안 몰래 한국에 드나들면서 기일마다 그곳에 왔다는 게 자신이 아는 요한과 썩 어울리지는 않더라도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다만…… 요한이 그렇게 누군가를 애틋하게 정성껏 기리고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이토록 마음 한편을 가시라도 걸린 듯 꺼끌거리게 하는 불안감은 대체 뭘까. 수현은 워낙 오감이 예민하기 때문인지 남들에 비해 직감도 정확한 편이었다.
요한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신부님의 존재는 늘 마음에 걸렸다. 신부님이 돌아가시던 그날부터, 아니, 신부님이 돌아가시던 날 서럽게 눈물을 흘렸던 요한을 발견한 그 순간부터. 그는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던 것일까. 눈물도 흘릴 줄 아는 사람이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었는데 말이다.
계절감을 잃고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나오자 온몸에 한기가 스산했다. 수현은 대충 머리를 말리고 침대로 향했다. 요한은 그 위에 쓰러지듯 누워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만으로는 잠들었는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천천히 요한의 곁에 앉았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요한의 곧게 뻗은 목으로 손길이 향했다. 요한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너무나도 복합적이라 말로 다 표현해 낼 수가 없었다. 그가 미웠고, 그를 증오했고, 그가 두렵고 무서웠지만 한편으론 그의 연주를 열망했고, 존경했고, 그가 부러웠다.
수현은 그의 목덜미를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소설 속 베르테르는 끝내 사랑을 앓다 자살을 택했다. 너도 날 사랑한다고 말했으니까, 그냥 그의 자살을 내가 도와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면 돼. 이대로 이 목을 조르면…….
나의 베르테르.
“……!”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천천히 뻗던 손은 요한에게 붙잡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 수현의 두 손을 놓아주었다. 툭, 요한의 상체 위에 수현의 양손이 떨어졌다.
“깼구나.”
수현은 그대로 요한의 어깨 위에 얼굴을 묻었다. 가느다란 숨소리가 그의 툭 불거진 쇄골 위에 흩뿌려졌다.
“독일에 있는 동안, 나 불면증이 다시 생겼어요. 깊은 잠에 못 들고, 또 쉽게 깨고.”
맨 처음 수현의 집에 왔을 때만 해도 요한은 밤에 쉽게 잠들지 못했다. 게다가 조그만 소음으로도 쉽게 깼다. 이상하게 수현이 옆에서 도닥여 주면 그제야 편안히 잠에 들고, 또 수현만큼은 분주하게 굴어도 깨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한동안은 같은 방을 쓰기도 했었다. 요한을 제때 제대로 재우기 위해서.
그 옛날의 예민한 잠버릇이 도진 모양이었다. 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버릇대로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줄 뻔했다. 습관이란 자신의 의지로도 통제되지 않아 무서웠다. 겨우겨우 참아 냈다.
“어떡해요. 난 다시 잘 못 자는데. 앞으로도 망설이는 사이 금방 깰 거예요.”
머리 위로 퍽 한심하게 여기는 듯한 낮은 한숨이 느껴졌다.
“요한…….”
“왜 거짓말했어요?”
목소리는 평이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언제나의 요한이다. 하지만 그의 이 한마디에 수현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온몸을 요한에게 의지하고 있었으니 그도 이 긴장을 알아챘을 것이다. 아무런 부가 설명도 없었지만 수현도 요한도 짐작하고 있는 거짓말은 분명히 존재했다.
“이건 내가 기대한 반응이 아닌데. 여자?”
“…….”
“아니면 남자? 그럼 더 문젠데.”
“…….”
“내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될지 몰랐어요. 이런 질문 하는 거 좀 싫기도 하고요.”
요한은 수현의 상체를 자신에게서 떼어 냈다.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형 바람났어요?”
사실이 아니니까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꺼림칙한 공포감에 온몸이 휘말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가 그냥 상상하게 둬선 안 되는 일이다. 수현은 초조했으나 머리와 마음 모두가 들끓는데도 입은 떨어지질 않았다. 가까스로 떨어진 입에서는 단 한 마디만 뱉어 낼 수 있었을 뿐이었다.
“아냐. 애초에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고.”
“정말? 난 우리 사이에 그런 개인적 합의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형은 내 거고, 형은 날 싫어할지언정 내게 절대 거짓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
“난 우수현이 그런 사람이라 사랑하는데.”
요한의 기다란 손가락 사이에는 얇은 종이 두 장이 끼워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천천히 수현의 앞에 내보였다가, 침대 위로 그대로 떨어뜨렸다. 며칠 전 보고 온 시카고 심포니 내한 공연의 티켓이었다. 좌석은 맨 뒷자리. 맡아 두고 있다가 파쇄기에 직접 버린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자신이 샤워하는 사이 요한이 지갑을 확인했다가 발견한 모양이었다.
수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왼손을 등 뒤로 감췄다. 요한의 독점욕은 이미 뼈저리게 겪어 잘 알고 있었다. 밝고 상냥하고 친절했던 수현이 천천히 사람들에게서 유리되고 고립되게 된 이유는 오직 요한이었다. 요한은 수현을 다른 사람과 조금이라도 공유한다는 개념 자체를 참아 내질 못했다. 그 때문에 수현은 점차 사람들 사이에서 관계를 맺는 일이 요원해졌다. 사실 손을 다치기 전까지만 해도 수현은 그게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요한, 살려 줘.”
그는 애원하는 수현을 두고 일어났다. 수현은 그를 붙잡기 위해 반사적으로 따라 일어났다. 요한은 결코 수현이 먼저 내민 손을 거절하는 일이 없었다. 수현이 손을 뻗으면 애틋하게 맞잡지는 않더라도 전면으로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건 타인과의 스킨십 일체를 기피하는 요한이 내준 특별한 곁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요한이야말로 수현에게 있어 예스맨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여태까지는 말이다.
“오늘은…….”
“…….”
“이만 돌아가요.”
요한은 수현의 내밀어진 손을 차분히 밀어냈다. 거절당한 두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수현은 그대로 정지해 있었다. 약속을 어겼을 때 그로부터 돌아왔던 처벌은 이 손을 제단 위에 올리는 일이었다. 그 한 번의 잘못으로 수현은 영영 피아노를 잃었다. 그를 화나게 해 나머지 한쪽 손마저 망가질까 두려워 온몸이 덜덜 떨렸다.
방금 그가 준 건 일말의 관용이다.
당장 도망쳐야 해.
수현의 머릿속에 경보음이 울렸다. 그래서 그는 달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