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34)

09.

재학생 수가 많은 일반 단과 대학과 달리 예체능 상아탑에서는 소수 정예인 학생들이 4년 동안 동고동락했다. 지도자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소수의 교수진이 학생들과 꼭 그만큼의 시간을 함께해야 하는 운명 공동체였던 것이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관계가 더 끈끈했다. 특히 피아노과 부교수 선우엽은 손을 다친 채로 입학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수현을 끝까지 함께하자 이끌어 준 귀한 은사였다.

몇 해 전 졸업을 앞두고 있던 수현은 앞으로의 일이 막막해 고민이 많았다. 이런 손으로 피아노를 계속 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미 학교를 다니면서도 졸업 후 평범하게 취업할 학생 취급을 재학 내내 받고 있었다. 그런 그를 어떻게 알고 학과에서 조교를 하면서 미래를 도모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추천서를 써 줬던 것이 바로 그 선우엽 교수였다.

나이는 이동준과 동년배였지만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성은 그만 못했다. 다만 선 교수는 연주 활동을 하는 것보다 가르치는 데 순수하게 재미를 느끼고, 재능이 있든 없든 제자들 하나하나에 무척 애착을 가지는 다감한 성격이었다. 선생으로서의 입지만큼은 이동준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 수현이 이 상아탑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그를 만나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학생들에게 한번 실제 교본을 보여 주는 건 어떨까?>

<어떤 교본 말씀이세요? 필요한 악보 있으세요?>

<아니, 연주의 왕도 말이야. 정답지. 승요한 군이 내 수업에 참여해서 시범을 보여 줄 수 있는지, 자네가 한번 물어봐 주겠나?>

교수들은 요한을 어려워했다. 그들에게 있어 수현은 유일한 소통 창구였다. 그래서 이런 부탁을 듣고 기계적으로 거절하는 일에는 면역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선우엽 교수의 말이라 한 번쯤 요한의 앞에 꺼내 놓게 됐다. 며칠 전 그가 했던 부탁이 떠올랐던 수현은 이른 아침 요한의 작업실에서 빠져나오다 무심코 말을 건넸다.

<혹시 학생들 앞에서 한번 연주해 줄 생각 없어? 이건 나랑 하는 거래 아냐. 교수님 부탁이 생각나서 그냥 해 보는 말이지.>

<교수?>

<선우엽이라고 있어. 학교를 관두려던 날 붙잡아 줬던 교수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구겨 신다가 매듭이 풀린 수현의 운동화 끈을 다시 묶어 줄 뿐이었다. 당연히 거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후가 되어 보니 상황이 이랬다. 요한이 강의실에 나타난 것이다.

부탁을 들어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선 교수는 물론이고 수현도 몹시 당황했다. 거래 조건을 내민 것도 아니었고, 자신이 했던 말마따나 정말 그냥 해 본 말이었던 것이다. 특히나 요한이 콘서트 같은 정식 무대가 아닌 곳에서 공개적으로 연주하는 것은 프로로 데뷔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왜 나타났을까. 하긴 변덕쟁이에 제멋대로인 그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란 적어도 태양계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강의실은 오늘 수업을 청강하겠다며 찾아온 타 과생들은 물론이고 타 단대 학생들로 빼곡했다. 심지어 바깥까지 학생들로 가득해서 문을 열어 둬야 할 정도였다.

가까이 살수록 지각이 잦다는 농담은 실제로도 효력이 있는 것 같았다. 뒤늦게 강의실에 도착한 재욱도 미리 자리를 맡아 준 동기의 옆으로 가 몸을 욱여넣듯 앉았다. 그가 먼저 눈인사를 했지만 수현은 못 본 척 외면했다.

강의실 제일 뒤편에서는 마침 시간을 비울 수 있었던 음대의 각 전공 교수들도 꽤 서 있었다. 마치 그의 작은 음악회를 보러 온 청중들 같았다. 실제로 캠퍼스에서 가장 언덕배기에 있는 이곳까지 알음알음 온 것은 그런 이유이리라.

비좁은 단상 위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는 물밀듯이 밀려드는 사인 요청을 전부 거절했다. 대신 피아노과 강의실의 낡은 피아노 앞에 얌전히 앉았다. 수업 시간 초반부는 늘 소란하기 마련이지만 오늘은 숨소리마저 억눌려 적막했다. 들리는 것은 휴대폰 카메라 셔터 음뿐이었다.

“악보 필요할까?”

혹시나 싶어 수현이 묻자 역시나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한 번 제대로 듣고, 혹은 보고 연주하기 시작하면 그 기록은 뇌리에 지층처럼 쌓여 갔다. 매일같이 연주만 하는 그의 머릿속에 든 완성된 음악들이 대체 몇 곡이나 될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누굴 연주할 셈인가?”

미소 띤 표정 반, 긴장된 기색 반으로 요한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선 교수가 물었다. 그는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모차르트로 하죠.”

“자넨 모차르트를 즐겨 치지 않는 걸로 아는데.”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닙니다.”

요한은 부드럽게 웃었다. 콩쿠르를 석권한 이후 이상할 정도로 그의 레퍼토리에는 모차르트가 없었다. 그를 분석하던 클래식 전문가들은 몹시 안타까워했다. 그의 자로 잰 듯한 연주는 기술이 부각되는 초절 기교나 에튀드에 가장 적합했지만, 그 저변에는 어딘지 고급스럽고 사치스러운 느낌이 있어 실내악과도 잘 어울렸다. 마치 19세기 프랑스 사교계의 귀부인들이 즐길 것 같은 화려함 말이다. 실내악의 거장인 모차르트의 음악을 자주 연주하지 않는 것이 아쉬울 만도 했던 것이다.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그가 모차르트를 싫어하는 게 분명하다고 잘라 말하기도 했다. 연주자가 특정 음악가만 철저하게 외면하는 것은 건방지고 오만한 태도라는 혹평도 따랐으나 요한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전부터 궁금했네만 모차르트를 자주 연주하지 않는 이유라도 있나?”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있던 질문을 선 교수는 과감히 대신 던졌다. 지켜보던 다른 교수들도 흥미롭게 연단 위를 주시하고 있었다.

“글쎄요. 공개된 자리에서 얘기하긴 좀 간지러운 이유라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이 긴 문장을 네 글자로 간단히 바꿔 말하면 ‘대답 안 함’ 정도이리라. 다행히 배려심 많은 선 교수는 캐묻지 않았다.

“승요한의 모차르트. 꼭 명작 영화의 특별 편처럼 느껴지는군. 영광으로 알겠네. 곡은 몇 번을 할 텐가?”

“466, 그리고 467 정도가 어떨까 싶군요.”

“「피아노 협주곡」 20번, 21번 말인가? 대중적인 곡도 좋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은 영화 「엘비라 마디간」, 21번은 「아마데우스」에도 배경 음악으로 쓰였던 대중적이고 귀에 익은 곡이었다. 피아노에 관심이 엄청 많은 이른바 클래식통들이 아니더라도 스치듯 한 번쯤은 들어 봤을 것이었다.

학생들도 교수들도 그의 이 선곡을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으나 수현은 과거의 어떤 순간이 떠올라 마음이 불편해졌다.

요한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선 교수와 학생들은 기대감을 발판 삼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다만 수현에게만큼은 요한이 만든 공백 시간이 억만년처럼 다가왔다.

그는 대체 뭘 하려고…….

“이렇게 하죠. 연주만 하는 건 레코드를 들어도 되고 공연장에 와도 됩니다. 여긴 강의실이니 TPO를 맞춰 보죠. 정확히 아홉 군데를 틀리게 연주할게요. 피협 20번은 다섯 군데, 21번은 네 군데. 말씀대로 대중적인 곡이니 피아노과 학생이라면 알 수 있을 겁니다.”

학생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선 교수는 학생들을 향해 빙긋 웃었다.

“초빙 강사님 말씀 들었지? 제군들, 어느 부분이 틀렸는지 듣고 적어서 나갈 때 제출하면 되겠네. 오늘 출석 체크는 그걸로 대신하지.”

선 교수가 연단 아래로 내려가자, 요한은 부드럽게 열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렸다가 떼어 냈다. 연주 전 그의 버릇이었다. 매번 습관적으로 하던 통에 이제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버릇 취급을 받았다. 끽해야 영상으로만 보던 그의 실제 연주 습관을 직접 본 학생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수현도 한쪽 구석에 서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가 이런 선곡을 한 이유가 자신의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음에 약간 절망했다. 기억 속에 있는 어떤 순간의 수치심 때문이었다.

음악에 얽혀 있는 기억들은 대부분 요한과 함께였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그리고 21번. 수현이 연주했던 이 곡에도 요한은 있었다.

모차르트를 좋아하고 선망하던 것은 수현이었다. 방 천장에 포스터를 붙여 놓은 영화 「아마데우스」는 못해도 수십 번은 봤을 정도였다. 분명히 기억하건대 처음 수현의 집으로 왔을 때만 해도 요한은 걸출한 악성들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저 작곡을 하고, 연주를 하고, 그것들을 남기고 죽은 먼저 태어난 인간쯤으로 여겼다.

요한에게라면 틀린 정의는 아니다. 그에게는 슈만도, 바흐도, 하이든도 모두 똑같아 호불호랄 것도 없었다. 작곡가는 물론이고 곡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어느 것이나 솜이 물에 젖어 가듯 빠르게 흡수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두 사람을 함께 레슨하게 된 이동준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걸 한 번도 안 물어봤구나. 너희는 제일 좋아하는 음악가가 누구니?>

수현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모차르트 좋아해요.>

그리고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없어요.>

<연주자 중에서도?>

<연주만이라면…… 전 형이 치는 게 제일 좋아요.>

그날, 수현은 이동준의 앞에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0번과 21번을 연달아 연주했다. 요한은 치지 않고 물끄러미 그 모습만 지켜봤다. 수현은 필사적으로 열심히 쳤으나 완전하지 못했다. 한두 개까지는 헤아리다 결국 포기했지만 꽤 많은 부분에 미스 터치가 있었다.

그가 연주한 직후 요한이 곧바로 똑같은 두 곡을 연주했다. 그 두 곡의 연주에서 요한은 정확히 아홉 군데의 음을 틀렸다. 20번에서 다섯 번, 21번에서 네 번. 그때야 알았다. 자신이 총 아홉 군데나 틀리게 연주했다는 것을.

그때 느꼈던 당혹스러움은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요한과의 현격한 재능 차이는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는데도 불현듯 수치심이 치밀었다. 분한 마음에 몇 주 동안 피협 20번과 21번만 달달 연주했을 정도였으니까. 덕분에 수현은 그 두 곡을 틀리지 않고 연주할 수 있을 만큼 숙련됐지만 이제 더는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느새 요한의 연주가 시작됐다.

부드러운 터치로 시작된 연주는 과거로 회귀할 충분한 기제였다. 익숙한 부분에서 요한의 미스 터치가 있을 때마다 수현은 어깨를 움찔 떨었다. 누군가는 모차르트의 음악에 귀족들을 위한 장삿속만 있고 사상은 없다 비난하지만 그건 편견이다. 이 우아한 멜로디가 주는 감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수현에겐 관념이고, 사상이 되었다.

역시, 좋다. 그가 영원히 쉬지 않고 더 많이 연주해 줬으면 하고 바라게 됐다.

“수현아, 저쪽 정리 좀. 그리고 더 소란해지기 전에 요한 씨를 좀 배웅해 줘.”

삽시간에 연주는 끝나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흐른 시간이 꽤 됐다. 요한의 연주는 늘 그렇다. 언제 홀린 듯이 빠져들었는지 알 수 없게 집중했다가 고개를 들어 보면 어느새 종결이었다. 선 교수가 수현을 향해 피아노에 가까이 다가선 학생들을 저지해 달라 요청하자, 그는 그제야 정신이 번뜩 들었다.

자리에서 차분히 일어선 요한은 자신의 콘서트에 와 준 관객에게 인사하듯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적어도 강의실 내에서는 들어 본 적 없는 우렁찬 박수 소리와 환호성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점점 밖으로 떠밀려 나갔다. 단상에서 내려오던 요한은 우두커니 서 있던 수현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흥미로워하는 눈길이었다.

눈이 마주쳤지만 언제 그랬느냐 싶게 떠나갔다. 그는 뜨거운 박수로 화답하는 선 교수에게 인사하고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사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눈을 빛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떠밀리게 될 판이었다. 수현은 빠르게 뒤쫓았다. 인적이 드문 승강기 앞까지 걸어간 요한이 버튼을 누르곤 뒤돌아봤다.

“어땠어요?”

“옛날 생각이 났어. 물론 그러라고 하필 그걸 친 거였겠지만.”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아마 정곡일 것이다. 요한은 수현을 괴롭히길 즐겼으니까. 지금은 무뎌졌지만 수현은 그때 정말 큰 수치심을 느꼈다. 그날 얼굴을 붉히던 어린 수현을 지켜보던 요한도 꼭 지금 같은 짓궂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재밌어?”

“재미있어요. 난 취미가 형이니까.”

“네가 빨리 다른 취미를 찾길 바란다.”

“정말?”

수현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방어 기제로 입이 꾹 다물렸다.

“왔네요.”

어느 틈에 승강기가 도착해 아가리를 벌렸다.

“안 따라와도 돼요. 선약이 있어서 가 봐야 하거든요.”

“선약?”

그의 활동 영역은 수현이 아는 바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삶이 꽤 단조로운 편이었다. 피아노, 잠, 섹스. 이 세 가지가 원형 위에서 공평하게 굴러가는 느낌일까. 그렇게 평이하게 흐르다 어느 날 갑자기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방향으로 툭 튀어 나가곤 했다.

수현의 의아한 눈길이 요한을 향했다. 하지만 그는 어깨만 으쓱할 뿐 궁금증을 해소해 주지는 않았다. 천천히 탑승한 요한이 닫힘 버튼을 누르고 건너편의 수현을 응시했다. 그때까지도 수현은 잠자코 서 있었다.

천천히 문이 닫혔다. 그러나 수현은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승강기 문에 자신의 암담한 표정이 비쳐 보였다. 익숙한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왜.

난 왜 바로 대답을 못 했지?

요한으로 인해 자괴감을 느끼게 되는 일은 이제 그에게 거의 만성이자 습관이었다.

* * *

어머니나 아버지의 손님이 아닌 수현의 손님이 집에 오는 것은 정말이지 드문 일이었다. 사교적이었던 청소년기 때도 요한의 눈치를 살피느라 좀처럼 집까지 누굴 데려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여자.

소파에 앉아 있는 얼굴은 낯은 익되 편한 상대는 아니었다. 초대한 손님도 아니었다. 불청객이라고 하는 편이 제일 적절할 것이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안녕, 하고 손을 흔드는 것은 앞으로 봐도 뒤로 봐도 현주가 맞았다.

“여긴 어떻게 찾아왔어?”

“졸업생 명부 뒤져서 너희 집에 전화했지.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주소 알려 주시더라고. 그 뒤부터는 내가 한 게 아니라 내비게이션이 한 일이야. 어떤 사람이 그랬다지? 내 무의식이 한 일을 나한테 묻지 말라.”

나름대로 농담을 붙이는 것 같았지만 수현의 상태가 그것을 받아 줄 계제가 전혀 아니었다.

“서로 집에 찾아올 만큼 우리가 친했는지 잘 모르겠다.”

“에이, 앞으로 가까워지면 되는 거지.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너무 황당한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차 키가 소파 위로 툭 떨어졌다.

“너 기껏 찾아와 준 친구 대하는 말투가 왜 그래?”

과일과 주스 따위를 정성스레 준비해 내오던 어머니가 수현을 나무랐다. 그러고는 차 키를 주워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수현은 그때까지도 멍청하게 서 있었다.

“우수현. 옷부터 갈아입어야지. 현주 양은 오래 기다렸는데 몇 분 더 기다려야 되겠다. 미안해요.”

어머니는 거실에 현주를 두고 수현을 방으로 밀어 넣었다. 들어오자마자 그를 향해 난처한 듯 울상 짓는 표정을 보니 실수했다는 것을 이제야 인지한 듯했다.

“집으로 전화 온 여자 친구는 중학교 때 이후로 처음이라 너무 신나서 내가 실수했나 봐. 너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길래 친한 사이인 줄 알았지 뭐니.”

주소를 알려 준 것도, 현관문 잠금장치를 풀어 준 것도 모두 그녀가 한 일이니 탓할 수가 없었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 현주가 사실에 기반을 둔 부풀린 말들로 어머니를 설득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는 겉옷을 대충 벗어 두고 나가려다 멈칫했다. 바닥이 잔뜩 어지럽혀진 방 안은 쓰레기장이 따로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어휴, 너 주말에 바닥 청소 좀 해. 아니면 너 출근했을 때 엄마가 치워 줘?”

“엄마, 액자.”

“액자? 무슨 액자?”

그녀는 발밑에 액자가 있는지 찾느라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아니, 내 방 말고 거실에 요한이 사진 있잖아.”

두 사람의 눈에 반쯤 열려 있는 문틈 사이 거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현주가 보였다.

“그게 왜?”

“엄마, 현주 그냥 동기 아니야. 클래식 잡지사 기자야. 요한이한테 폐가 돼.”

“어머나! 이걸 어떡해? 요한이 자랑 많이 했는데. 너 어릴 때 사진도 전부 보여 주고 했거든. 어쩐지 이것저것 물어보더라!”

저기압인 아들을 향해 ‘왜?’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던 어머니가 화들짝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가뜩이나 어려워하는 요한에게 조금이라도 폐가 될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한동안 계속 마음에 걸려 할 것이다.

방문 판매를 오래 하면서 가끔 험한 꼴을 봐 온 어머니는 문전박대를 잘 못했다. 전화도 걸려 오는 족족 받아 상대했다. 닫힌 문 앞에서 돌아가는 일이나, 받지 않는 전화를 끈질기게 거는 일이 얼마나 비참한 기분인지 잘 아니까. 그래서 보이스 피싱이 처음 성행하던 시절에는 협박을 곧이곧대로 믿고 누군가의 대포 통장에 5백만 원가량을 입금했던 적도 있었다. 이제는 웃으면서 말할 수 있게 됐지만 그때의 어머니는 무척 절박했다.

그래서 수현은 이런 어머니의 성격을 이용해 무작정 쳐들어온 저 무례한 동기가 무척 원망스러웠다. 원치 않게 사생활이 공개된 셈이니 이 일을 요한에게 전해야 할 테고, 그럼 어머니가 얼마나 마음 쓸까가 너무나 선했다.

수현은 겉옷을 챙겨 다시 거실로 나갔다. 그러고는 탁자 위에 요한의 연주하는 모습들이 찍힌 액자들을 전부 엎었다.

“굳이 그럴 거 없어. 이미 다 봤거든.”

“지금 네 행동이 사생활 침해에 속한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 준 것뿐이야. 이만 나가 줘.”

“나 아직 과일 한 조각도 손 못 댔는데?”

“부탁 아냐. 정당한 요구지. 나가.”

순순히 일어나지 않으면 물리적 행동이라도 불사하겠다는 양 단호하게 버티고 서 있자, 그녀도 마지못해 일어섰다. 어설프게 웃고 있는 어머니에게 다음에 ‘또’ 뵙겠다고 꾸벅 인사를 하더니 그대로 현관으로 걸어 나가기에 수현도 묵묵히 따라나섰다.

* * *

집 근처의 조그만 카페는 가장 안쪽 카운터에서 가장 바깥쪽 창가 자리까지의 거리가 몹시 좁아 아담했다. 조금만 목소리를 높이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 낱낱이 들릴 정도였다. 가게를 둘러본 순간 수현은 장소를 잘못 고른 게 아닌가 싶긴 했지만 이제 와서 마땅히 옮길 곳도 없었다.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내부의 훈훈한 온도를 역행하는 기묘한 냉기가 흘렀다. 현주는 얼어붙은 공기를 풀어 보고자 부드럽게 웃어 가며 수현을 달랬다. 수현은 잠시 침묵했다. 이런 상황에 있을 때 요한이라면 어떻게 대응했을까. 아마 그라면 ‘전 곤란한 상황을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거 딱 질색이에요’ 정도의 말을 부드럽게 웃는 낯으로 하지 않았을까.

수현은 한숨을 내뱉었다. 동시에 매끄러운 찻잔 손잡이를 매만졌다. 아무래도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았다.

“다 알고 온 거야?”

“아냐.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숨겼는데 어떻게 알았겠어. 「클래시즘」은 1인 미디어라 아직 그 정도 정보력은 없다고. 그냥 후배들한테 들으니까 승요한이 너 때문에 우리 학교로 왔다 하지, 또 모든 소통 창구를 너로 일원화했다 그러지. 꽤 친하구나 한 것뿐이야. 무엇보다 성도 다르고……. 이동준이랑 셋이 같이 찍은 사진 정도 건지려나 했는데 월척이었지 뭐.”

“월척? 넌 지금 뭐가 잘못된 건지 전혀 이해를 못 하는구나.”

그가 그러자 아차 싶었는지 또 모호한 미소로 웃는 것이었다. 한 번만 더 난감한 상황에서 명확한 해명 대신 저런 식으로 웃으면 상상 속의 요한처럼 쏘아붙여 줄 셈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꾹 눌러 참았다.

“어디까지 들었어? 어머니한테 이것저것 물었다며. 나중에 어머니한테 교차 확인하면 답 다 나오니까 그냥 지금 솔직하게 말해 줘.”

“그냥 요한에 관한 얘기? 요한을 마음으로 낳은 아들처럼 여기고 계신다고 하셨고……. 찬양 일색의 승요한 찬가였지, 뭐. 별건 없었어. 말씀해 주시는 내내 약간 방어적이셨거든. 걜 좀 어려워하시는 거 같더라? 난 다른 어떤 사실보다 그게 아주 흥미롭더라고.”

계속 대화를 나누다 보니 수현도 감이 왔다. 그녀는 뭐가 잘못됐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니라 흥미를 느끼고 있기 때문에 결례를 거듭하는 것이다. 또한 애초에 화법이 날것에 가깝다는 것도 불쾌한 점 중 하나였다. 이런 편견은 최대한 갖지 않으려고 했지만 동기들 사이에서 평판이 그렇게 좋지 않은 것이 이해가 됐다.

수현은 미지근해진 얼 그레이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떫었다.

“사실 수현아, 돌아가신 우리 아빠랑 승국환 신부가 아는 사이셔.”

신부님의 이름이 여기서 나올 줄은 전혀 몰랐다. 수현은 정말 깜짝 놀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응. 남겨 주신 유산으로 이 짓 하고 있는 거지, 뭐. 불효녀야. 그렇다고 불쌍해하진 마. 그 덕에 청년 부자 됐거든. 아, 전혀 안 궁금하겠지만 나 엄마도 안 계셔. 날 낳다가 돌아가셨대.”

개인사에 대해 더 듣고 있다간 그녀가 잘못한 부분도 딱 잘라 비난하기 어려워질 기미가 보였다. 그건 곤란할 것 같아서 수현은 본론으로 다시 돌아왔다.

“아버지께서 신부님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셨는데?”

“승국환 신부님 출생을 미국에서 했어. 알아?”

“그건 알아.”

“친구셨대. 우리 아빠 내가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셔서 신부님을 실제로 본 적은 딱 한 차례밖에 없어. 장례식장.”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처음 봤나 보구나.”

“맞아. 그 전까진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지. 어쨌든 빈소를 며칠 내내 같이 지켜 주셨던, 되게 따뜻한 기억으로 나한텐 남아 있었거든. 그러다 얼마 전 승요한 취재하는 중에 유년기에 그를 키워 준 사람 사진을 우연히 보게 됐는데……. 바로 그분 얼굴이랑 딱 겹치는 거야.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니?”

“…….”

“그런데 이미 돌아가신 지 한참이더라.”

그녀는 잠시간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녀가 했던 말대로 신부님이 따뜻한 기억으로 마음 깊이 남아 있었는지 그의 부고 소식을 말하는 일이 조금 속상해 보였다. 그래서 수현은 잠자코 기다렸다.

“처음엔 신부님이 요한의 친부인 줄 알았어.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그를 키워 줬고, 무엇보다 성이 같잖아. 그래서 지난번에 승국환 신부님 얘길 꺼내 요한을 건드려 봤는데 린이란 여자가 중간에 통제하는 바람에 길게는 얘길 못 했어.”

“…….”

“따로 찾아보니까 사제라서 애를 입적할 수가 없었나 봐. 미국에 있는 신부님 사촌 동생 아들로 되어 있더라? 그래서 요한이 지금까지 인터뷰에서 얘기해 온 가족이 그분들이라고만 생각했지. 난 그분들에 대해 조사하려고 했던 거야.”

“요는 우리 집엔 아무것도 모르고 왔다는 거지.”

“몰랐어. 일단 성이 다르잖아. 요한을 조사하려다 보니 딱 떠오른 취재원이 너였고. 결국 오늘의 참사가 일어난 거야. 어머니껜 내가 찾아가서 불편하셨다면 죄송하다고 전해 줘. 악의는 없었어.”

적어도 수현의 가족이 언론에 직접 노출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요한의 개인사란 현주처럼 특별한 연관 관계가 있지 않은 이상 알기 어려운 일이었다. 우선 한국에서 살 때의 그는 인간관계가 좁았다. 아니, 그런 말로는 부족했다. 학교도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이동준 선생을 제외하면 전무했다. 그에 관한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갈 일이 거의 없었다. 수현의 가족과 함께 살긴 했지만 법적으로 얽힌 것이 아니어서 추적해 본들 나오는 것도 전무했다.

무엇보다 독일로 건너간 뒤로는 아예 발길을 끊다시피 했다. 가끔 하는 연락도 린을 통해 취하던 게 전부였다. 그쪽에서는 클라시스가 철저하게 비공개로 관리해 주고 있어서 사생활이 노출될 위험이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 현주의 존재는 그야말로 복병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한 마디도 안 할 수가 있어? 동기들도 아무도 모르던데? 나라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동네방네 자랑하고 점심 먹고 동료들한테 자랑하고 밤에 자기 전에 SNS에 자랑 글 올리고 그럴 텐데. 네가 정말 부럽다.”

“그런 무서운 소리 꺼내지도 마. 난 조용히 살고 싶어.”

수현은 생각만으로도 오싹한 일이라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게다가 그녀가 두 사람 사이를 세세하게 알게 되고 나서도 정말로 부럽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있지, 수현아. 내가 요한을 계속 취재해도 될까? 네가 조금만 도와주면…….”

“우리 집 얘기를 가십으로 삼으려는 거라면 관둬.”

“하지만 요한의 가정사는 자기 입으로 얘기했던 적도 있잖아. 좀 더 심층 취재해서 구체적으로 살을 붙이려는 것뿐인데 문제될 거 없다고 봐.”

“문제가 돼. 대중에 공개된 건 건축물로 치면 구조 정도야. 내부가 어떻게 설계돼 있는진 구체적으로 노출한 적 없었어.”

“우수현, 예술가의 삶은 곧 예술이라고. 대중이 알 필요가 있어. 걔한텐 자기 건물의 내구도가 어떤지를 알릴 의무가 있는 거라니까?”

“의무?”

수현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요한을 잘 모르는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이군.”

“넌 잘 안다는 것처럼 들린다? 하긴, 반은 가족이었지. 너무 충격적이어서 자꾸 까먹는다.”

“자기가 숨겨 왔던 게 강제로 공개되면 얘긴 180도 달라질 거야.”

“숨겨 왔던 거, 너희 가족?”

“가족이라기보단…….”

대답하던 수현은 잠시 뒷말을 망설였다. 아마 수현의 존재가 직접 연관돼 있지 않은 이상 요한은 부모님이 어떤 곤란한 상황을 겪든 별 관심 없어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건드리면 요한이 특히 돌아 버리는 끓는점은 사실 수현이었다.

이걸 어떻게 말을 해야 그녀가 곡해 없이 받아들일까. 에둘러 설명하는 것으론 납득하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있는 사실을 솔직히 말하자니 그건 더 답이 안 나왔다. 날 건드리면 걔가 미쳐…… 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숨겨 왔던 것은 가족이라기보단 수현 그 자체에 가까웠다. 그리고 승국환 신부의 존재도. 수현도 왜인지 이유는 몰랐다. 요한이 그의 존재에 대해 철저하게 함구한다는 사실만 알 뿐이었다.

한참 침묵하던 그는 아서라 하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싫어해.”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요한은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을 싫어했다. 못 견딘다고 하는 편이 나으리라. 그는 덧붙였다.

“그리고 현주야, 요한은 한번 화가 나면 자비가 없어.”

이건 물론 섣부르게 행동하지 말란 의미의 경고이지만 1할 정도는 그녀를 배려해서 한 충고이기도 했다. 이미 세계 무대를 뒤집어 놓고 돌아온 요한이 국내 클래식계에서 행사하는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저명한 클래식 잡지사도 말 한 마디면 엎어 놓을 수 있는 그가 1인 미디어인 그녀 하나쯤 매장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또한 그는 그런 짓을 하고도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협박보다 세게 먹히네. 나 사실 승요한 좀 무서워. 가끔 눈빛이…… 차가운 광기 같은 게 보여서. 그런데 예술적 광기라기보단…… 아니, 이 얘길 너한테 더 해서 나한테 좋을 게 없겠어. 아무튼, 여태까지 그렇게 감춰 온 덴 이유가 있겠지. 네 말은 접수했어. 네 가족에 대해서 갑자기 터트리거나 하진 않을게.”

“그래. 그럼 오늘 일은 잘 얘기 된 걸로 알고, 난 먼저 일어난다.”

용건이 끝난 그가 먼저 일어나려던 차였다. 피곤했다.

“그런데 수현아, 너 내가 왜 동기들 사이에서 개현주라고 불렸는지 아니?”

다급히 이어지는 현주의 말이 그를 붙들었다.

“잘 물고 늘어져서? 그것도 맞지만 나 코도 무척 민감해.”

그녀는 씨익 웃었다. 지금까지 수현이 하는 말들을 쭉 들으며 확신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가 자신의 가족을 보호하고 싶어 하는 열망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승요한이 지키고 싶은 게 너희 가족이 아니라 자기 자존심이든, 통제할 수 있는 환경이든, 뭐든 상관없어.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수현이 네 생각이야. 넌 너를 포함한 너희 가족 지키고 싶을 거 아냐.”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몰랐다면 몰라도 이제 내가 알게 됐으니 앞으로 너희 부모님, 그리고 너, 내가 매일 쫓아다니면서 계속 괴롭힐 수도 있다 이거지. 꼭 언론에 공개해야만 특종이니? 나 혼자만의 호기심 충족으로도 난 만족해.”

수현은 억지를 쓰는 현주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제야 본론을 말하게 돼 속이 시원하다는 양 씨익 웃었다. 애초에 이 링 위에 올라서면서 그녀는 요한이 아니라 수현과 적당히 타협하려고 결심했던 것 같았다.

수현은 내심 당황했다. 갑작스럽게 사생활이 노출된 요한을 대변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리 자신 주변에는 결계를 치지 못했다. 어쩐지 개처럼 물고 늘어진다던 소문의 그녀가 단지 몇 마디 말로 쉽게 받아들인다 했다.

그는 잠시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공허한 시선을 밖으로 던졌다. 창밖은 이미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기분이 썰렁해서인지 아스팔트마저 차갑게 식어 있는 것만 같았다. 듬성듬성 불빛이 켜져 있는 아파트들과, 그 앞쪽의 옹기종기 소담하게 모여 있는 주택가들을 눈으로 훑어보던 수현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쯤 침대 위에 뻗었어야 했는데……. 만사가 귀찮았다. 더 그녀와 마주 앉아 있고 싶지도 않았다.

“협상을 하겠다는 거지? 바라는 게 뭔데.”

“너만 협조해 주면 네 부모님이나 너 절대로! 귀찮게 하지 않을게.”

“본론만 빨리 얘기해.”

“승요한 단독 인터뷰.”

수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현주는 몸을 수현 쪽으로 한껏 기울이며 설득하기 시작했다.

“말했잖아. 나 승요한 팬이야. 연주는 물론이고 걔가 했던 인터뷰까지 전부 구해서 탐독했을 정도라고. 불쾌해하는 포인트 잘 알아. 절대로 무례하게 굴지 않을게. 게다가 나 1인 미디어라서 도약하려면 한 방이 필요해. 승요한만 한 게 없다고. 수현아, 응? 동기 좋다는 게 다 뭐야!”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단 명함 줘.”

“명함? 그때 내가 주고 따로 핸드폰 번호도 교환했잖아.”

“그건 이미 버렸고 핸드폰은 고장 났어. 다시 줘.”

“어쩐지 통화가 안 되더라. 나 차단한 줄 알았어.”

그녀는 명함 케이스에서 뻣뻣한 종이를 꺼내 수현의 앞으로 건넸다.

“스케줄 무조건 맞출게. 요한이랑 얘기해 보고 연락 줘. 만에 하나 사흘 내로 연락 없으면 나 당분간 너희 어머니 꽃집으로 출근했다가 너희 집으로 퇴근할까 해. 응, 협박 맞아.”

“너 참 대단하다.”

“물론이지. 부모 그늘 없이 혼자 힘으로 살아가려면 이런 생존력을 제일 먼저 배워야 돼. 칭찬으로 들을게.”

“칭찬 아니야. 욕이야.”

“너무 빡빡하게 그러지 말자. 동기 간에.”

“학연 지연도 200퍼센트 활용하고.”

“그것 또한 물론이지.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대학 나왔는데 인맥을 활용해야 하지 않겠어? 학연은 고학력일수록 응집이 잘돼서 꽤 쓸모 있는 문화라고. 너도 유념해. 4년 동안 낸 학비가 얼만데 뽑을 건 다 뽑아 먹어야지. 아무튼 그럼 나 먼저 일어날게. 오늘도 잘 얻어 마셨어. 나도 커피 두 번은 무조건 사야겠다.”

두 번이나 더 단둘이 마주 앉아 차 마시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그는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말대로 이루어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용건을 모두 마친 그녀는 이쪽의 의사는 타진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수현은 불편한 관계일수록 예의를 더 따지는 편이라서 처음엔 무척 황당했다. 두 번째쯤 되니 그때만큼 당혹스럽지는 않았다.

혼자 남겨진 그는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요한이 한국에 돌아온 뒤로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었다. 요한과 자신이 하나의 지구에서 조화롭게 공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정말 제로인 게 아닐까.

그는 남은 홍차를 천천히 마셨다. 이미 다 식어 있었다. 창밖의 색채는 시시각각 더 어두워졌다. 입 안에서 떫은맛이 더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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