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그는 밤새 신열에 들떠 잠을 설쳤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건강을 예민하게 점검해 왔던 수현은, 스스로의 몸 상태를 판단할 수 있는 준전문가 수준은 됐다. 그러니까 지금 열이 바짝 오른 원인은…….
“스트레스라니까. 쉬면 괜찮아져. 진정 좀 해.”
스트레스였다.
그는 자신을 위안하듯 연신 혼잣말했다.
“금방 괜찮아져. 괜찮아진다니까. 그러니까 빨리 열 내려가라…….”
그러나 말로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다. 한참을 앓던 수현은 온몸의 열로 발산되는 마이너스 에너지들을 억누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아직 쌀쌀한 봄밤임에도 불구하고 온몸에 얼음찜질을 했다. 차가운 촉감이 살결을 아프게 할 정도였지만 결과적으로 체온을 낮추는 데는 큰 도움이 됐다.
며칠 전 다녀간 현주의 일로 내내토록 혼자 골치가 아팠다. 애초에 고민거리를 주변에 털어놓는 성격이 아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날 일로 요한에게 폐를 끼칠까 걱정이 돼 발을 동동 구르는 어머니 때문에 내색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겐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요한은 거짓말이나 에두른 변명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단독 인터뷰를 해 달라고 부탁하려면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했다.
그런데 이 일련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도 요한이 허락할까. 오히려 자신이 계속 전전긍긍하며 난감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까.
선잠에서 깨어난 수현은 집중할 곳을 찾기 위해 새벽부터 집 안을 배회했다. 다행히 치솟았던 체온은 원상 복구 되어 있었다. 그는 거실 꽃병의 물을 갈다가 가시에 검지 끝이 찔려 피를 봤다. 혈액 보급 문제 때문에 평소 워낙 크고 작은 상처에 신경 쓰고 있어서 자신의 피를 보는 일이란 드물었다. 그는 화들짝 놀라 소독을 하다가 문득 허탈해졌다.
피아니스트에게 손은 심장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손은 자잘한 상처가 생겨도 상관없는 그저 몸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너 피 나잖아!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 피를 보고 그래?”
난데없이 등짝을 얻어맞은 수현이 신음했다.
“깜짝이야. 다친 손보다 엄마한테 맞은 등이 더 아파.”
“새벽부터 뭘 하나 했네. 너 그렇게 정리가 하고 싶으면 쓰레기 매립지 같은 네 방이나 좀 어떻게 해 보든지. 하여튼 너는 요한이 반만 닮았어도. 어휴, 그건 또 뭐 하는 거야. 엄마가 해 줄게. 손 이리 내.”
깨끗하게 소독하고 밴드까지 감아 주는 어머니를 보니 생각이 많아졌다. 그녀가 이토록 염려하는 이 희귀 혈액형은 요한과 자신의 드문 공통분모였다. 애초에 이것이 아니었다면 엄마는 어린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학대당하고 불쌍한 아이들은 그가 아니라도 도처에 널려 있었으니까. 또한 어쩌면 신부님이 그녀에게 그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베르테르」가 아니라 역시 이 피, 이게 더 근원적인 문제일까.
“엄마, 요한이가 그렇게 좋아?”
“아들한테 좋고 싫고가 어딨어?”
“왜 없어? 내가 좋아, 요한이가 좋아?”
그러자 이번엔 손등을 세차게 얻어맞았다. 어찌나 매정하게 때렸던지 금세 피부가 빨갛게 부어올랐다.
“건강 관리 잘하라면서 왜 아프게 해.”
“이런 건 사랑의 매라고 하는 거야.”
“요한이가 더 좋구나. 그럴 줄 알았어.”
“납골당에서 보고 한참 못 봤다. 이젠 뉴스에도 안 나와. 우리 둘째 아들 잘 지낸다니?”
“왜 매일 밤마다 리모컨 붙들고 있나 했다. 걔가 워낙 두문불출하니까 그렇지. 얼굴도 안 보여 주는데 어떻게 매번 걔 뉴스만 나와? 이제 포기하고 일찍 일찍 자.”
“그냥 둬라. 보고 싶은 데 장사 있어? 아쉬운 사람이 우물 계속 파야지.”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그는 거실이 소란해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밴드를 손에 들고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을 잠자코 지켜보더니, 이내 신문과 우유를 가지러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는 수현의 등을 다시 한번 툭 쳤다.
“들었지?”
“네, 좋을 대로 하십시오.”
“그건 그렇고 너 요즘 기력이 너무 없어. 요 며칠 밥도 거의 안 먹고 애가 눈이 떼꾼해 가지고는. 얼굴은 또 이게 해골이 아니면 뭐가 해골이야? 가만있어 봐. 전복 사 둔 게 있었나.”
금세 주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무척 분주했다. 수현은 푹신한 소파에 등을 기댔다. 부산스럽게 뭔가 꺼내고 문을 여닫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이 집의 아침 식사 당번은 가족 구성원 세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하는 편이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할 때는 제대로 된 가정식을 먹을 수 있지만 수현은 별식이랍시고 시리얼이나 계란 프라이 따위로 때우기가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수현의 몫인 날에는 어머니나 아버지 중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 식사 준비를 하게 됐다. 오늘은 어머니인 모양이었다.
그는 주방으로 들어가 어머니의 뒤에 섰다. 싱크대 앞에서 전복을 씻고 있는 그녀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애교 많고 사랑을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던 그에게 지기 시작한 그늘을 그녀는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아마 망가진 오른손 때문이라는 것도 말이다. 희망을 잃고 마음을 닫아 가는 아들을 보며 착잡함이 무척 컸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너 왜 이렇게 변했니’ 따위의 질타를 한 적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정말 고마운데 나 지금은 입맛이 별로 없다.”
“그래도 한술 뜨지. 금세 돼.”
“안 먹힐 것 같아서 그래. 도시락으로 싸 주면 학교에 가서 먹을게요.”
다행히 여러 번 강권하지는 않았다.
“보온병이 여기 있을 텐데…….”
혼잣말하던 그녀는 찬장을 열어 제일 위의 칸을 뒤졌다. 문제는 팔이 조금 짧았다. 그녀보다 키가 큰 수현이 대신 하늘색 도시락 통을 꺼냈다.
“다 컸네.”
“자식은 부모님 눈에 평생을 어린애처럼 보인다면서?”
“지금처럼 훌쩍 어른 된 게 눈에 보일 때도 있어.”
그리고 그녀는 수현이 어른이 됐다는 것을 실감할 때마다 감개가 무량한 것 같았다. 늘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곤 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진짜 안 먹고 갈 거야? 올해가 작년보다 더울 거라던데 너 여름 엄청 타잖아. 좋은 거 먹고 관리해야지.”
“이 통에 꽉 채워서 싸 주면 싹 비워 올게.”
“그래, 그럼. 아, 다음 주 병원 가는 날이지? 잊지 말고 미리미리 챙기고.”
“벌써 날짜가 그렇게 됐나?”
“한 달 다 됐어. 아니, 근데 너 정말 오늘 안색이 너무 안 좋다. 혹시 간밤에 아팠니?”
정곡을 찔린 수현은 깜짝 놀랐다.
“얘, 포도당이라도 맞고 출근하면 안 돼?”
“이 시간에 문 연 병원도 없어. 진짜 괜찮아.”
더 그녀와 함께 있다간 잔소리 폭격에 시달릴 것 같았다. 한번 고삐가 풀리면 그땐 아버지도 그녀를 제어 못 했다.
보온병을 물로 대충 세척하고 빠르게 거실로 나가던 수현은 멈춰 섰다. 순간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균형을 잡느라 정지한 상태로 식탁을 짚었다. 그를 돌아본 어머니가 수선을 피우며 그를 부축했다.
“얘 좀 봐. 너 아까 피 흘려서 그런 거 아니야?”
그녀가 비명처럼 외치자 수현은 어이가 없어 픽 웃었다.
“엄마, 딱 한 방울 흘렸거든요. 바닥 미끄러워서 그래.”
걱정을 끼칠까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정말로 몸 상태가 안 좋긴 했다. 하루의 시작이 안 좋으면 끝도 대부분 나빴다. 아무 일이 없으면 좋을 텐데. 이상하게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거슬렸다.
짜증 지수가 습도 높은 한여름처럼 높아질 기세라 그는 서둘러 주방을 나갔다.
* * *
음악관 8층에 있는 요한의 개인 연습실은 며칠째 텅 비어 있었다. 한동안 그의 귀국으로 떠들썩했지만 워낙 칩거하는 통에 바깥세상에서는 요한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져 가는 타이밍이었다. 다만 교내에서만큼은 그렇지가 않았다.
지난번 수업에서 즉흥 연주를 했던 뒤로 몇몇 교수들은 형평성의 문제를 들면서 반발했다. 자신의 수업에도 요한이 참여해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학생들도 평소보다 훨씬 더 음악관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곧 중간고사였으나 중앙 도서관 열람실보다 음악관 열람실이 더 붐비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그간 어마어마한 태산처럼 느껴졌던 요한과의 장벽이 조금 허물어졌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그는 며칠째 학교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8층 연습실 내에는 직사각형 테이블과 연습용 피아노가 정중앙에 조화롭게 놓여 있었는데, 늘 비어 있던 보면대 위에 종이들이 웬일로 눈에 띄었다. 수현은 천천히 다가갔다. 요한의 악보들이었다.
귀퉁이에는 ‘S.1’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바로 예의 그 작품 번호 약자인 S인 모양이다. 지난번 스치듯 그가 만든 것 같은 곡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음표가 적혀 있는 악보와는 초면이었다.
하이네만에 의하면 그는 이미 여러 곡을 만들거나 편곡하기 시작했다는 것 같았다. ‘S.1’이라면 그런 그가 가장 처음으로 만든 음악이라는 의미였다. 예상이 맞는다면 독일에서 이미 만들었던 것을 수정하고 있는 것일 테다. 겉면에 라는 표제가 적혀 있었다.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그리고 상단의 S.
요한은 어떤 인터뷰지에서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나의 인생은 정확히 둘로 쪼개진다. S와 함께한 시간. S와 함께하지 않은 시간.>
그의 이 말을 놓고 해석이 분분했다.
S는 음악이다. 승요한 자신이다. 그의 연인, 혹은 그의 가족이다…….
개중 음악이라고 해석한 사람들이 가장 많았는데, 그의 발언을 풀어서 설명하자면 음악과 함께한 시간, 그리고 음악과 함께하지 않은 시간 정도이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인터뷰 이후 기원전 BC와 기원후 AD를 지칭하는 것처럼 BS(Before S), 그리고 AS(After S)라고 그의 연주 인생을 지칭키도 했다.
그러나 음악이든 요한 자신이든 그의 연인이든 가족이든 그가 인생의 중심이라고 말했던 ‘S’가 적힌 악보를 열어 볼 자신이, 수현에게는 안 생겼다.
잠시 피아노 옆에 서 있던 그는 요한도 없는 날에 이곳 8층까지 올라온 목적을 기억해 냈다. 연습실 내부의 보안을 확인해 달라는 린으로부터의 전언이 있었다. 구석구석에 촘촘하게 설치해 둔 안전장치들은 잘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베를린과의 시차는 일곱 시간 정도니까 지금쯤 정오가량이 됐을 것이다.
“린, 저예요.”
[너 지금 몇 신 줄이나 알아? 새벽부터 전화질이야!]
받자마자 벌컥 짜증부터 내기에 수현은 실소했다.
“웬 새벽? 너무 바쁘면 지각 능력도 떨어지고 그래요? 거기 12시쯤 됐잖아요.”
[나 지금 볼리비아에 있어. 여기 새벽 5시 반이야.]
지도상 남미에 있다는 기초적인 상식 정도만 있는, 이름만 들어 본 곳이다.
“우유니 사막 있는 데 아니에요? 거긴 왜 갔어요?”
[아티스트가 갑자기 볼리비아에 가서 커피 마시고 싶대서 따라왔어. 이 바닥에 정신병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나마 집 돌이인 요한은 양반이야. 걘 사람 귀찮아해서 가끔 돌아 버릴 때 빼면 아주 기본적인 케어만 해 주면 됐단 말이야. 나 요한이랑 일하고 싶어. 돌려줘.]
“와서 데려가요, 그럼.”
건너편의 린은 잠시 침묵했다.
[난 이런 게 진짜 싫어. 나한테 없는 걸 남이 가졌는데 심지어 그게 귀한 줄도 모르는 거.]
“나 말씨름하면서 낭비할 힘 없어요. 아까 문자로 학교 작업실 점검 부탁한 거 결과 보고하려고요.”
[자기 전에 보낸 거였어. 가뜩이나 이 개새끼한테 시달리느라 밤잠 설치는데 깨워 주셔서 참 고맙다. 문자로 확인했다고 몇 글자 써서 보내면 될 일이지.]
“같이 간 사람 누구예요? 개새끼라 불렀다고 콱 이르게.”
[너 무슨 초등학생이니?]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잠기운이 가득했다. 늘 만사에 칼 같고 능수능란했던 모습만 기억하고 있는 수현으로서는 재미있는 반응이었다. 워낙 화려하고 인상적인 미인이라 비몽사몽인 그녀의 얼굴이 절로 상상됐다.
“수린 씨 저혈압 있죠.”
[아주 의사 다 되셨네. 이제라도 진로를 바꿔 보면 어때.]
“또 비꼬는 거예요?”
[이제 그건 그만 물어볼 때도 안 됐니?]
“혹시나 했어요. 아무튼 끊어요, 그럼.”
[아냐, 끊지 마. 나도 용건 있어. 요한은 어떻게 지내? 어젯밤에 통화가 안 됐어.]
“저도 이번 주엔 못 봤어요.”
지난번 그가 학교에서 연주했던 날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날 자신이 모르는 어떤 개인적인 일정이 있는 것 같았는데, 린과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면 아마 그 때문에 지금까지 바쁜 걸까 싶었다.
부르면 달려간다.
이 말은 요한을 대하는 최근의 수현을 설명했다. 다만 요 며칠 요한으로부터의 부름은 없었다. 원래 그는 혼자만의 시간을 종종 즐겼다. 같은 집에 살 때도 며칠 동안 데면데면한 적이 잦았으니 썩 의아한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는 필요할 때 자신을 부르고, 자신은 부르면 바로 달려갔다. 마치 욕구 해소를 위한 도구 취급을 받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게 사실이기도 했다. 일일이 참담함을 느끼기엔 이미 너무 이런 상황에 익숙해졌다.
대체 그는 여기서 머무르며 뭘 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이렇게 애매한 줄타기를 하면서 대체 뭘 어쩌고 싶은 것일까.
처음 그가 돌아왔을 땐 약속한 대로 독일에 가자고 고집을 피우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요한은 강제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의 최측근인 린도 이 일과 관련해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약속을 빌미로 널 데려가려는 생각은 아닌 것 같아. 네가 스스로 자기한테 오길 원해.>
정말 그게 가능하리라고 믿고 있을까. 그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걸 가지고 있어서, 수현은 차마 그걸 포기하진 못했다. 하지만 그라는 존재 자체를 원하게 될 일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책상을 한 손으로 짚어 가며 통화하던 수현은 눈앞이 아찔했다. 눈을 몇 번 깜빡깜빡하자 섬광처럼 동공 앞으로 지나가던 빛 번짐은 사라졌으나 물색없게도 시야가 점점 흐릿해졌다. 눈꺼풀이 저절로 내려앉고 있었던 것이다.
‘왜 이렇게 어지럽지.’
이대로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아 양손으로 책상을 짚었다. 그 바람에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가까스로 다시 주워서 귓가에 대자 대답 없는 수현을 향한 알 수 없는 단어들의 조합이 이어지고 있었다.
[……런 걸 그냥 하게 두면 어쩌자는 거야? 내내 그 허접한 소리 들으면서 곤욕을 치러야 한다고. 요한이 피아노를 치면 청중만 그걸 듣는 게 아니야. 제일 가까운 곳에서 듣는 건 요한 본인이야. 자기 피아노 소리를 평생 듣고 살아온 애가 그걸 어떻게 다 견딜 거며……. 요한 눈이랑 귀가 얼마나 예민한데! 다 썩을 거란 말이야. 이봐, 여보세요? 듣고 있어?]
“전 지금 린이 무슨 말씀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어요.”
[듣고 있으면 그렇다고 말을 해야지.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요한이 무슨 귀 썩는 소리를 듣는데요?”
[잠깐,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전복죽을 덜 먹어서 그런가 봐요.”
[얘가 뭐라는 거야. 드디어 미친 거야? 기왕 미칠 거라면 넌 좀 더 일찍 미쳤어야 했어.]
“그건 동의해요.”
한참 휘청거리던 그는 연습실 문단속을 하고 나왔다. 승강기를 타려면 계단으로 아래층에 내려가야 했다.
요한이 없다는 것을 다들 알기 때문인지 늘 붐비는 7층 계단은 한적했다. 그는 난간을 손으로 짚어 가며 신중히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갔다. 이른 아침부터 정신없을 기미가 보이더니 하루 종일 상태가 위태위태했다. 오전에는 눈앞이 뿌옇게 되는 바람에 학과 사무실로 들어오던 학생을 못 보고 부딪치기도 했고, 오후에는 평소 전혀 하지 않던 실수를 하는 바람에 지도 교수님께 혼쭐이 나기도 했다.
이런 날은 꼭 끝도 좋질 않다. 정말 점심에 어머니가 싸 준 죽을 반 넘게 남겨서 그런 걸까. 그녀의 말대로 퇴근하는 길에 병원에 들러 수액이라도 맞아야 하는 모양이다.
“아까 얘긴 뭐예요? 귀 썩는 이야기.”
[서울 국제 콩쿠르 결선 심사 위원으로 그가 위촉됐어. 거절했다가, 얼마 전에 철회하고 다시 수락했거든. 요한이 얘기 안 해?]
“그게 무슨…… 걔가 왜 그런 걸 해요? 전혀, 처음 들어요.”
[내 말이 그거야! 왜 그런 걸 해야 해?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난 그의 수족이라 무조건 그가 원하는 걸 해 줘야 한다고. 브레이크를 걸어 줄 수 있는 건 너뿐이란 말이야.]
“저 때문이라니 지금 린이 하는 말 영문을 모르겠어요.”
‘안 돼. 어떡하지. 아, 쓰러진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꿈속을 종횡무진 하는 자신의 모습을 유체 이탈 해서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려갈 때 최대한 신중을 기했는데도 눈앞이 어지러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낮은 계단 위에서 맨바닥으로 서서히 쓰러지면서도 수현은 그녀가 한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해석하려 애썼다.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털썩.
그는 그대로 계단 아래로 추락했다.
[아무튼, 나도 이번 주말에 한국에 가니까 그때 다시 얘기…… 야, 우수현! 이게 무슨 소리야? 끊은 거야? 아직 연결돼 있는데? 우수현!]
딱딱한 바닥에 온몸을 부딪쳐 꽤 아팠다. 떨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오른팔로 상체를 보호했는데 바닥을 짚은 손에서 꼭 뼈가 어긋나는 것처럼 우두둑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계단을 거의 다 내려와 발을 헛디딘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 7층의 승강기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환각일까. 요한은 가끔 환각을 봤다. 그와 너무 많이 자서 나도 옮은 것이라면 어떡하지. 그런데 요한은 왜 콩쿠르 심사 위원 같은 걸……. 그리고 그가 만들고 있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수현 선배?”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평소보다 훨씬 주파수가 높았지만 분명 익숙한 목소리였다. 서울 국제 콩쿠르. 사실 이 대회의 이름을 듣자마자 바로 그가 떠올랐었다. 생각은 논리적으로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는데 몸이 그 속도를 따라 주지 못하고 계속 눈앞이 흐려졌다.
“선배, 선배! 젠장, 정신 좀 차려 봐요. 선배!”
이미 무거운 눈꺼풀이 더는 떠지질 않았다. 모든 것이 아득해져 갔다. 그리고 암전. 수현은 기절했다. 그를 둘러싼 세상이 함께 아득한 수마에 빠져들었다.
* * *
익숙한 소독약 냄새였다. 소리마저 익숙했다. 삐익, 하고 곳곳에서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심전도 기계들의 단말마들은 언제 들어도 끔찍했다.
수현은 병원이 싫었다. 가능하면 평생을 내외하고 싶은 공간이나 필연적으로 가까이해야만 하는 것이 문제였다. 얇은 커튼으로 간이침대들마다 구분을 해 놓은 것을 보니 병실이 아니라 응급실인 것 같았다. 가장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기억이 계단 위에서 쓰러지던 순간이었으니 누군가 발견하고 구조를 요청해 주었겠구나 짐작이 됐다.
추락한 사람의 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온몸이 멀쩡했다. 다리에도 흔한 깁스 하나 없었다. 수현은 몸을 비틀어 일어나려다가 멈칫했다. 오른 손목에 보조 깁스가 달려 있었다. 손에 친친 감겨 있는 붕대는 분명 하얀색이었는데, 마치 피가 스며든 것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장. 하얀 천장의 기다란 전등, 그리고 병원의 엠블럼이 새겨진 동그란 무늬가 눈에 익었다. 벌써 몇 년 전의 일인데도 모양이 그대로였다. 그는 예전에 이곳에 누워 저 천장을 바라보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던 적이 분명히 있었다.
<아드님이 피아노 전공하는 학생이라고요? 하지만 이 정도 부상이면…… 앞으론 전혀 칠 수가 없겠는데요.>
수현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커튼을 열어젖혔다. 팔뚝에 연결된 링거 바늘이 빠지는 것도 몰랐다. 피가 하얀 시트 위에 알알이 분수처럼 튀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맨발로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바닥에 처참하게 떨어져 뒹굴었다. 의료진들은 물론이고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환자들의 시선까지 그에게로 쏠렸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간호사들이 다가오려고 하기에 비명을 질렀다.
“오지 마!”
“환자분, 환자분! 진정하세요. 이 환자 보호자 어디 갔어요?”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제발! 이거 고쳐 주세요! 아냐, 아니에요. 요한이 오기 전에 여기서 절 내보내 주세요. 빨리요!”
한참 동안 애걸복걸하던 그는 땅 위에 온몸을 질질 끌듯이 기었다. 어느새 그의 눈에는 붕대에 감겨 있던 오른손이 덜렁덜렁 반대편으로 꺾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뼈가 전부 부러진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인대가 전부 늘어난 손은 점차 살마저 모조리 녹아서 흐물흐물해져 가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예전에 입원했을 때 벽면에 붙은 병원 내 조감도를 본 적이 있었다. 구조가 변하지 않았다면 응급실 밖으로 나가 그대로 우회전해서 직진하면 주차장이다.
일단 여길 벗어나야 했다. 그에게서 달아나야만 됐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를 않았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도망가야 하는데 이런 상태로는 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좌절한 그는 그나마 남아 있는 살가죽이라도 지키고자 왼 손바닥으로 힘없이 늘어진 오른 손목을 받쳤다. 그 상태로 또 몇 발자국가량 기다가 몸을 웅크린 채로 흐느꼈다.
어떡하지. 저를 좀 구해 주세요. 조물주라는 게 있다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방치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제발. 나한테 무작정 요한을 던져 놨으면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함께 알려 줬어야 했어요.
그때였다.
“선배, 괜찮아요. 저예요.”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길이 수현의 등을 쓰다듬었다. 얇은 니트 위로 따뜻한 손바닥의 체온이 선연했다. 귀에 익숙한 목소리라 조금이나마 안심이 됐다. 그는 신줏단지 모시듯 오른 손목을 받친 채로 고개를 들었다.
“걔가 내 손을 망가뜨렸어. 이 붕대 좀 봐. 피가 이렇게나 흥건해서…… 나 도와줘. 여기서 나가게 해 줘. 부탁이야.”
재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침착하게, 그리고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는 바짝 약이 오른 냄비처럼 흥분 상태인 수현을 진정시키고자 노력했다.
“피는 선배가 링거 바늘 함부로 빼는 바람에 옷에만 조금 튄 것뿐이에요. 그 링거는 그냥 컨디션 조절차 놓은 수액이고……. 그리고 사실 뼈가 부러진다고 피가 분수처럼 나고 그러진 않아요. 의사가 손이랑 손목 말고는 다친 데 없다고 했어요. 몸 여기저기에 찰과상 정도는 입었는데 큰 상처는 아니라 그랬고요. 운이 엄청 좋았대요. 지금까지 선밴 그냥 잠들어 있었어요.”
“하지만 손이…….”
“아, 오른손을 다치긴 했는데, 원래 좀 부실…… 죄송해요. 하여튼 약한 부위라 거기만 좀 타격이 있었던 것 같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두툼한 보조 깁스 위에 새빨간 피가 이렇게 흥건한데. 이렇게 아픈데. 이렇게 있는 대로 다 부러져서 손이 엉망이 돼 있잖아. 수현은 다시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무슨…….”
놀랍게도 방금 전까지 잔뜩 뒤틀려 피 칠갑을 하고 있던 손은 그냥 하얀 붕대가 모양만 잡아 주고 있는, 그런대로 멀쩡한 상태였다. 약간의 통증은 있었지만 그 옛날 일어났던 사고에 비교하자면 경미한 수준이었다. 그러자 몹시 아연해졌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자, 의료진들과 환자들이 맨바닥에서 대화하고 있는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숨죽이고 이쪽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 눈빛에서 전부 느껴졌다.
“우리 일단 저쪽으로 가서 얘길 할까요? 이렇게 바닥에 있으니까 시선 집중이 장난이 아닌데요. 저야 괜찮지만 선밴 좀 낯가림을 타니까.”
“네 말엔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내가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어.”
“놀라서 힘이 빠졌나 봐요. 뼈에 이상은 없댔어요. 괜찮으시면 제가 옮겨 드려도 돼요?”
간절한 시선을 수락이라고 여겼던지 재욱이 그의 온몸을 조심스레 들어 간이침대 위에 도로 옮겨 놓았다. 그러고는 커튼을 쳤다. 무대는 차락, 하는 효과음과 동시에 호기심 섞인 군중들에게서 불완전하게나마 차단됐다.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칸막이 안으로 들어와 수현의 팔을 소독해 링거만 도로 꽂아 주곤 빠르게 나갔다.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의 벽을 먼저 깬 것은 재욱이었다.
“좀 괜찮아요?”
“아니, 안 괜찮아.”
“당연히 그렇겠죠. 안 그래도 의사가 뼈 사진 찍어 보고 손에 뼈랑 인대들 왜 다 건드려 놓은 거냐고 깜짝 놀랐어요. 그러다가 선배 예전 차트 확인하길래 궁금해서 저도 살짝 좀 봤고요. 보호자라서 보여 주더라고요. 찔려서 제가 먼저 이실직고해요. 원래 자수하면 감형해 주죠?”
“됐어. 네가 몰랐던 것도 아니고.”
“오른손에 문제 있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 심각한 수준인 줄 몰랐어요. 철심이 네 개나 박혀 있던데요. 게다가 트라우마까지 이렇게 깊은 줄은…….”
거기까지 얘기한 재욱은 잠시 침묵했다.
“하, 나도 이렇게 핀이 나가서 돌아 버릴 거라곤 생각 못 했어. 지금 너무…… 당황스럽다.”
“이런 적 없었어요?”
“처음이야. 깼는데 익숙한 병원 응급실이지, 나는 또 누워서 손에 뭘 감고 있지. 그래서…… 네 말대로 좀 놀란 것 같아.”
“왜 놀랐는지,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돼요? 아까 걔가 내 손을 망가뜨렸다고 했잖아요.”
성실하게 대답해 주고 있던 수현은 물끄러미 재욱을 올려다봤다. 그날 일어난 사건의 전말은 부모님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짐작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자신의 입 밖으로 직접 꺼낸 적은 없었다. 수현과 요한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금세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 재욱도 더는 묻지 않았다.
“나 어떻게 된 거야? 네가 병원 데려왔어?”
“네. 과사에 갔는데 선배 음악관 갔다더라고요. 그래서 잠깐 뵐까 하고 올라갔죠. 드릴 말씀도 있고 해서요. 승강기에서 내리는데 선배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디고 있었어요.”
조금 전까지 자신이 정말 완전히 미치기라도 한 게 아닌가 진지하게 번민하던 수현은 그나마 위안을 얻었다.
“내가 널 본 게 착시나 환각 같은 건 아니었나 보네. 불행 중 다행이다. 아직 반만 미쳐서.”
그러자 재욱이 웃음을 터트렸다. 방금 전까지의 혼돈은 언제 있기라도 했냐는 것처럼 공기가 빠르게 안정되어 갔다. 주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재욱의 큰 장점이다. 그리고 그런 그가 자신을 발견해서 천만다행이다. 수현은 안도의 숨을 삼켰다.
“여기 한국대 병원이에요. 학교에서 제일 가까워서 선배 차 제가 대신 끌고 여기 왔어요. 이거 차 키랑 휴대폰요.”
주머니에서 차 키와 휴대폰을 꺼내 내미는 재욱을 보고, 수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새로 산 휴대폰에는 단축 번호는 물론이고 단 하나의 연락처밖에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통화가 필요한 경우 메모해 뒀던 것을 보고 걸었다. 애당초 호수에 던져 버린 기존의 휴대폰에도 최소한의 연락처만 있었으나, 이제 그마저도 전부 단절된 것이다. 번호를 다시 저장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지만 그럴 필요를 못 느꼈다. 어차피 또 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니까. 손을 다친 뒤로 수현은 체념이란 것을 조금씩 배웠다.
“너…… 혹시 전화 걸었어?”
“네. 제가 방금 수속 밟고 선배 핸드폰으로 전화 거느라 잠깐 자리 비웠던 거거든요. 아무리 큰 부상 아니라도 응급실까지 왔는데 가족이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죄송해요. 함부로 만져 가지고.”
아니나 다를까. 수현은 미간을 구겼다.
“그런데 전 단축 번호 1번이 당연히 부모님인 줄 알았거든요? 웬 목소리 죽이는 남자가 받던데. 동생이라면서요. 선배 동생 없는 줄 알았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던 거예요? 아무튼 동생분이 곧 올 거예요.”
“그런 얘길 빨리 했어야지!”
“아, 선배 모습 보고 당황하는 바람에. 제가 실수했나 봐요. 사이가 안 좋아요?”
“그런 거 아냐.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이만 가는 게 좋겠다. 빨리.”
“선배 환잔데 인수인계는 하고 갈게요. 그런데 선배, 제가 그 목소리를 분명히 어디서 듣긴 들어 봤는데 대체 어디서 들었나 고민을 해 봐도…… 선배?”
갑작스레 바깥이 시끄러워졌다. 수현이 일을 벌인 뒤로 줄곧 고요하던 응급실의 때아닌 소란이었다. 그 안팎의 온도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수현은 재욱을 떠밀어 내기에 바빴다.
“글쎄 빨리 가라니까!”
그때였다.
차락, 하고 차단된 무대의 장막이 다시 올랐다. 이다음 막부터 새롭게 등장한 인물이 있었다. 이미 늦었다는 것을 깨달은 수현은 아연실색하고, 재욱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의 등장으로 뜨악했다.
“그쪽이 제 목소리를 어디서 들어 봤을까요?”
요한이었다.
* * *
응급실을 나가서 우회전, 그리고 직진 하면 주차장. 길은 수현의 기억 속 그대로였다. 요한에게 안겨 바깥으로 나가는 동안 그의 마음만은 엄숙해서 마치 순례자의 길을 걷는 것 같았으나, 요한을 알아본 사람들 때문에 주변이 시끌시끌해서 외견은 이율배반적으로 레드 카펫이 되고 말았다.
10여 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들의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는지 모른다. 재욱은 수현의 부탁을 성실히 들어주는 편이었다. 그래서 뒤늦게라도 그를 돌려보내려고 애썼으나 오늘따라 말을 듣지 않았다. 요한과 가까이에서 대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기는 듯해 수현도 먼저 돌아가 달라 끝까지 강권하지는 못했다.
호불호는 있을지언정 한국의 피아노 전공자들에게 요한은 그야말로 숭배하는 우상이다. 예외는 없었다.
두 사람은 몇 분간 대화를 나눴다. 수현의 상태나 어떻게 병원까지 오게 됐는지 자초지종에 대해서는 통화를 통해 대충 들은 모양인지 두 사람을 아우르는 것은 조금 더 서로에 관한 개인적인 화제였다. 재욱은 자신이 한국 대학교 피아노과의 학생이며, 며칠 전 모차르트의 협주곡 연주를 할 때도 강의실에 있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꺼냈다. 요한은 친절한 얼굴로 경청하고, 필요한 경우 답변했다.
중간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수현만 좌불안석이었다. 온 응급실을 쓸고 다닐 기세로 난동을 부렸던 일에 대해서만 부디 함구해 주길 간절히 바라면서 쌀알 헤아리듯 지루하게 초를 셌다. 거짓말을 한 것도, 약속을 어긴 것도, 못 할 짓을 하다가 들킨 것도 아닌데 번번이 자신만 숙명적으로 죄인이 되는 형국이었다.
분명 나쁜 건 오로지 요한이건만.
“아까 말씀을 동생이라고 하셔서 처음엔 친동생인 줄 알았거든요. 단축 번호도 1번이고 그래서요. 두 분 정말 많이 친하신가 봐요.”
“글쎄요. 우린 그렇게 친하지 않은데……. 다만 저한테 형이 매우 필요하죠. 아, 다 왔네요.”
“차 문은 제가 열어 드릴게요. 요한 씨 차로 가시면 선배 차는 어떡하죠?”
“두세요. 제가 이쪽으로 사람을 보내면 되니까.”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게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요한일 것이다. 만면에 띤 미소는 가끔 볼 수 있는 그것이었다. 그는 무슨 일이 생겨도 비슷한 기조를 고수했다. 맹렬히 분노하지도, 따갑게 흥분하지도 않았다. 늘 같은 온도의 남자. 인간의 체온이 36.5도로 공통적이라면 그의 온도는 아마 그보다 1도 정도 낮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수현은 그가 늘 무서웠다. 화내야 할 때 화를 내야 내면에 쌓여 있는 분노가 일정 부분 해소되는 법이다. 모서리에 찧었을 때 단말마의 험한 욕설을 내뱉으면 통증이 다소나마 완화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는 들끓지 않기에 쌓여 있던 것들을 어느 날 갑자기 그릇된 방법으로 해갈했다. 희생양이 된 이 오른손처럼.
“조심히 가세요, 선배. 그럼 잘 추스르고 내일 봐요.”
수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싸늘하게 외면하자, 재욱은 다소 의아해하는 듯했지만 오늘 수현의 컨디션이 바닥이라는 것을 떠올렸는지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요한이 수현을 먼저 조수석에 태우고, 자신도 차에 탔다.
“직접 운전하게 해서 미안해. 엄마 집에 계실 거야.”
“네, 집에 데려다줄게요. 한숨 자요. 금방 도착할 거예요.”
“요한,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해 두는데 오늘 일은 정말 우연이야.”
우연. 요한은 그 두 음절의 단어를 한 번 머리로 곱씹었다. 그러고는 물었다.
“저번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요?”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라던 말, 물론 기억하고 있다. 창백해진 얼굴만큼 수현의 손끝도, 마음도 차갑게 식었다. 입도 얼어붙어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의미 부여하지 마. 우연은 그냥 우연일 뿐이야.”
요한은 특별히 다투려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벨트를 매 주고, 수현의 환부들까지 꼼꼼히 확인한 후 뒤늦게 시동을 걸었다. 특히 붕대를 감은 손을 한참이나 내려다봤다.
그가 그러는 동안 수현은 요한의 잘 빚어진 이목구비를 관찰했다. 아주 조금의 죄책감이라도 눈동자에 떠올려 주길 바라서였다. 그러나 9년 전처럼 붕대 감긴 자신의 오른손을 보고도 그는 약간의 동요조차 없었다.
부드럽게 차가 출발했다. 한참 창밖의 풍경만 관찰하고 있던 수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운전석의 요한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요한, 이쪽은 우리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냐.”
“내 작업실로 갈 거예요. 나 오늘 형 걸레로 만들고 싶은데, 밤새 헐떡거리는 소리 들려줄 거죠.”
“차 세워.”
끼익. 서행하던 차가 멈췄다. 놀랍게도 요한은 곧바로 갓길에 차를 세웠다.
“집으로 데려다줄 거 아니라면 난 여기서 내릴래.”
한 손으로 안전벨트를 풀어내려던 수현은 움직임이 불편해 계속 고전했다. 잠자코 기다리던 요한의 몸이 그에게로 불쑥 반쯤 넘어왔다. 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식겁해 창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요한이 그 모습을 빼놓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침묵하는 요한의 눈이 그를 향해 어째서, 하고 물어 왔다.
“요한, 난 오늘 손을 다쳤어. 옛날 일이 떠올랐고…… 내 마음속은 지금 만신창이야.”
“그래서요?”
“그런데 넌 날 걸레로 만들고 싶다고 말을 하는군. 내가 손을 다쳤는데.”
“…….”
“그리고 감히 내 말에 ‘그래서요?’라고 대답을 해. 내가 손을 다쳤다는데.”
“…….”
“어떻게 넌 항상 너밖에 몰라? 미안해하는 것까진 이제 기대하지도 않아. 제발 좀 불쌍해하는 척이라도 해! 언제까지 그런 거 하나하나를 앉혀 놓고 가르쳐야 돼. 대체 언제까지!”
여전히 요한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색채도 없었다.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열을 올리고 있는지를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수현은 차갑게 분노했다.
“꺼져. 이 쓰레기 새끼야.”
마침내 스스로 안전벨트를 푸는 데 성공한 수현은 요한에게 퉤, 침을 뱉었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다행인 것은 요한이 쫓아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다만 떠나가지도 않은 채 그대로 차가 멈춰 있기에, 수현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계속해서 내디뎌야만 했다. 갓길을 한참 걸어 그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울음을 터트렸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