٩(ˊᗜˋ*)و 감상용입니다 갠소하세요♥ORH ٩(ˊᗜˋ*)و
[BL]광염 소나타 2
11.
처음 그를 담당하게 됐을 때, 그러니까 그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의 린은 그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지나치게 일변도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다른 해소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른다는 양, 억눌리거나 쌓여 있는 어떤 정염이 있다면 오직 섹스로 푸는 듯했다. 상대는 약간의 취향적 제한선만 극복한다면 불특정 다수라고 봐도 좋았다. 아무나 다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집어넣을 구멍만 있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너무 섹스로만 스트레스를 푸는 거 아니야?>
어느 날 린이 지나치듯 그렇게 묻자 그는 왜 당연한 질문을 하느냐는 양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관심 가는 게 없으니까요.>
불친절하지만 묘하게 요한다운 대답이라, 그녀는 납득했다.
그리고 며칠 뒤, 취한 린이 용기를 내 그를 유혹했을 때 요한은 단칼에 거절했다. 다른 관심 가는 게 없다는 이야기는 최소한 섹스에는 관심이 간다는 말이 아닌가. 거부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그녀는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당황한 그녀가 수치를 무릅쓰고 이유를 묻자 이번에도 대답은 심플하게 돌아왔다.
<당신은 닮은 데가 없어요.>
<누굴?>
습관처럼 되묻던 린은 자신의 안에서 자연스럽게 답을 내리고 깜짝 놀랐다.
왜 여태 불특정 다수라고 생각해 왔을까. 주변에 접근하려는 사람이 득실거려서 개중 적당히 고른다고 착각했으나, 그의 선택은 도리어 무척 까다로운 축에 속했다. 돌이켜 보면 그가 설정한 취향적 제한선이란 건 너무나 분명했던 것이다.
하얗고, 마르고, 고전적인 이목구비가 미려하지만, 웃을 때 미소만큼은 순진한…….
거기에다 피아노를 어설프게 칠 줄 알면 금상첨화였다.
동시에 머릿속을 스치는 어떤 얼굴이 있어 그녀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요한이 쇼팽 콩쿠르에서 입상했던 다음 날, 도망치듯 호텔 방에서 뛰쳐나오던 ‘그’ 말이다.
<걔구나. 수현.>
요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부드럽게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때때로 그는 저런 어울리지 않는 편안한 표정을 비치곤 했다.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는 거냐고, 함께 알면 안 되냐고 이유를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리고 린은 이제야 겨우 요한을 손톱만큼 알 것 같았다.
‘그’를 떠올리는 것이다.
그러자 요한이 굳이 친절하게 부연 설명 해 주지 않아도 그의 욕망을 지배하고 있는 수현의 존재가 차츰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요한에게 있어 수현만큼은 카테고리가 달랐다. 그에게 타인이란 우수현, 그리고 나머지였다. 오직 수현만이 요한이 관심을 가지고, 또 원하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와중에도 그를 매일 같이 뒤흔들고 있으리라고 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솔직히 꽤 충격이었다.
<너 혹시 다른 사람이랑 할 때 걜 생각하니? 아니, 바꿔 물을게. 걔랑 하고 싶을 때 다른 사람을 대용품으로 삼는 거야?>
<안 돼요?>
그 죄책감이라곤 한 톨도 없는 대답을 들은 린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아무리 다른 사람을 침대에 끌어들여도 수현 본인이 아닌 이상 그의 욕망을 완전하게 채워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관계는 모두에게 상처였다.
<너 진짜, 사람을 대할 때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없구나?>
<형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상관없어요. 그게 다야.>
<난 안 된다면서?>
<린은.>
<닮은 데가 없으니까! 걔가 대체 너한테 뭔데?>
<이 얘긴 여기까지만 해요.>
대부분의 매니저와 아티스트는 꽤 폭넓은 사적 영역을 공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녀가 겪어 온 다른 음악가들도 비슷했다. 그러나 요한은 조금 달랐다. 궁금한 걸 물으면 적당한 선에서 친절히 대답해 주지만 그게 다였다. 그리고 상대의 호기심이 임계점에 이르렀다고 느끼면 당황스러울 정도로 싸늘하게 쳐 냈다.
또한 그는 결코 되묻지 않았다. 상대에 대해 궁금한 게 전혀 없는 것이다. 특별히 바라는 것도 없었다. 끓는점이 지나치게 높은 건지, 그 끓는점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건지 크게 흥분하는 일도 쉽게 짜증을 내는 일도 적었다. 그녀가 봐 온 소위 ‘예술가’들과 결이 달랐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류가 아니라 어딘지 좀 신비로운 존재인 것 같이 느껴질 때가 많았다. 아마 그의 어마어마한 연주가 시너지 효과를 주기도 했을 것이다.
때론 어릴 때 그녀가 봤던 일본 만화 속 동명의 주인공같이 보이기도 했다. 그건 워낙 인상적이었던지라 요한에게도 직접 얘기했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널 보면 가끔 일본 만화 「몬스터」 주인공이 떠올라. 느낌이 비슷해. 이름도 같아. 요한.>
그러면 그는 그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뜻 모를 얼굴로 미소 지을 뿐이었다.
<너 나한테 지금 화내야 돼. 「몬스터」의 요한은 소시오패스거든.>
<그래요? 뭐, 난 그 정돈 아닌데요. 적어도 난 사랑이 뭔지 알아요.>
처음에는 어떤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그를 재미있다고 생각했고, 나중에는 궁금해졌고, 끝내는 그라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공략하고, 무너뜨리고 싶은 욕망까지 일었다. 그러다 그녀는 수현마저 무척 궁금해지기에 이르렀다.
이런 요한을 미치게 하는 그는 대관절 어떤 사람인지.
하지만, 요한에게 사랑이라……. 정말 그게 어떤 감정인지 그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 그는 알아 갈수록 더 알기 어려운 존재였다.
“미안, 이런 거 싫어하는 건 아는데 너무 찝찝해서. 네가 안 쓰는 방 욕실을 좀 썼어.”
린이 젖은 머리를 말리며 거실로 나오자, 요한은 피아노 앞에 앉아 손님을 맞이했다.
“네, 좋은 아침.”
“안 놀라네. 나 온 거 알고 있었어?”
“올 거라고 어제 연락했잖아요. 그리고 새벽녘에 누가 왔다 갔다 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런데 왜 안 내다봤어? 간도 크다. 도둑이면 어쩌려고.”
“이 삼엄한 보안 장치를 해제할 재주가 있는 도둑이라면 뭐라도 좀 훔쳐 가게 두는 것도 괜찮겠죠.”
그녀는 수긍하며 요한에게로 빠르게 다가섰다.
“요한, 나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거 시간 낭비인 건 알지? 나도 이런데 네가 하는 시간 낭비는 대체 가격이 얼마야?”
“나도 궁금해요. 얼마쯤 돼요?”
“아주 비싸.”
“그럼 그걸로 형을 살 수 있을까?”
린은 잠시 침묵했다. 몇 번 본 게 다였지만 수현은 몇 푼의 재화로 넘어올 성격이 아니란 걸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오히려 다소 추상적인 가치들이 그를 움직일 수 있다면 모를까. 가령 꿈, 미래, 이상, 혹은 사랑 같은 것들 말이다. 지금은 눈빛이 많이 닳고 바래 있지만 과거 사진 속의 수현은 일평생 소년의 마음을 지니고 있을 것만 같은 해맑은 데가 있었다. 자고로 천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었다.
“네가 한국에서 열리는 조그만 콩쿠르 심사나 볼 군번이야?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초청이 왔어. 널 심사 위원으로 위촉하고 싶대. 이쪽 콩쿠르 심사 위원 수락한 걸 용케 알았나 봐. 점수 주는 일이 하고 싶으면 차라리 그걸 해.”
“소문 빠르네요. 함구해 달라고 했다고 하지 않았나?”
“뭐, 말은 발이 달렸거든. 그나저나 너 대체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니?”
“글쎄요. 쉬고 싶을 때까지?”
“안식년을 허락한 건 네 머릿속에 뇌가 제 용량대로 탑재돼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야. 널 신뢰하니까 결정을 맡긴 거라고. 그런데 벌써 허송세월만 두 달째야. 이렇게 공연 없이 쉬기만 하면 안 돼. 편곡도 좋고 작곡도 좋지만 네 본분이 피아니스트라는 걸 잊지 마.”
“잔소리하러 왔군요. 내가 보고 싶어서 온 줄 알았거든요.”
그는 흥이 다 깨졌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그녀가 요한의 앞을 막아섰다. 평소에 그녀는 아티스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는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완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요한, 이렇게 몇 달 몇 년 그의 옆에 있는 건 별로 의미가 없어. 걔가 너한테 가진 반감을 너도 알잖아? 차라리 빨리 유럽으로 데리고 가자. 그 얘기 하려고 새벽부터 온 거야.”
“강제로 어떻게 하고 싶지 않아요.”
“너희들 사이에 이미 그렇게 약속도 되어 있다며. 왜 마냥 기다리는 건데?”
“예전처럼…….”
“…….”
“내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날 쳐다봤으면 좋겠어.”
린은 귀를 씻듯이 자신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지금 이게 요한이 한 말이 맞나 싶어졌던 것이다. 그녀는 그가 이런 감상적인 말을 했다는 걸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린이 해 줄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요한, 그건 불가능해.”
“형은 날 좋아해요. 다만 아직 화가 많이 났을 뿐이죠. 난 그걸 풀어 주려는 거예요.”
“하, 부디 걔 앞에선 그런 소릴 안 했길 바랄게. 내가 수현이라면 그딴 미친 소릴 듣는 순간 너한테 대고 구역질을 할 거야.”
“…….”
“뺨도 갈겨 버릴 거야.”
결연한 린의 말에 그는 픽 웃었다.
“독일로 걜 데려가자. 우수현이 7년 전 걸었던 조건을 넌 다 이행했잖아. 이제 걔가 약속을 지킬 차례야.”
“왜 그렇게 초조해해요? 난 혼자 있을 때도, 형과 있을 때도 늘 연주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걸 너랑 걔만 듣는 게 완전히 천문학적인 낭비라니까! 회사에서 저번에 했던 제안은 아직 유효해. 그에게 우리 회사에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고 했던 제안 말이야.”
만물을 관장하는 창조주가 보석을 세공하는 전문가처럼 공들여 빚은 존재가 있다면 바로 그일 것이다. 비약이 아니었다. 신이 만든 가장 빛나는 존재들 중 하나가 요한이라는 그녀의 판단은 한순간도 변하거나 의심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클래식계가 공들이고 있는 상품이었다. 다신 만들 수 없을지도 모르는 최고의 수제품이라 회사에서도, 악계의 선배들도, 권위 있는 마에스트로들도 전부 애지중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여기 이렇게 좁은 땅덩어리에 전시돼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 또한 간절했다. 진창에서 시간 낭비하지 말았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요한은 이상하게 더디게 굴었다.
그가 한국에 돌아온 것은 오로지 수현 때문이었다. 요한은 그를 유럽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다. 그리고 수현이 심리적인 반발과 저항을 감수하면서도 그의 곁에 몇 번이고 돌아오게 되는 것은 바로 그의 연주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너무나 완벽한 절충안을 만들 수 있지 않은가. 그를 유럽으로 데려가 클라시스의 일을 돕게 하면 될 일이었다. 요한은 넓은 곳에서 계속 연주할 수 있고, 수현은 그의 연주를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게 된다. 그가 왜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가려는 것인지, 린은 아리송했다.
하긴 그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긴 할까. 프로이트가 무덤에서 일어나 과거에 말러에게 했던 것처럼 정신 상담을 해 준다면 모를까.
“보채지 마요.”
“네가 보채지 않게 해 주면 될 거 아냐.”
“이번엔 부디 너 확실히 설득하라고 상부에서 지령도 받았어. 나한테 확답을 줘.”
“린. 난 이런 강압적인 태도를 아주 싫어해요. 당신이 그걸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한…….”
“그건 그 사람만 할 수 있어. 몰랐다면 이번 기회에 머리에 집어넣는 게 좋겠군요. 난 린이랑 오래 같이 일하고 싶어요.”
쇼팽 콩쿠르 이후 그가 줄곧 외국에서만 연주 활동을 했던 것은 계획된 행보였다. 회사나 자신은 계속 돌아오라 닦달하고 있지만, 사실 지금까지는 전부 요한이 그린 그림의 일부였다. 그는 처음 계약서에 서명할 때부터 정확히 7년 뒤 얼마간 쉴 것이라고 천명했었다. 린은 나중에야 7년이란 시간 동안 만나지 않는 일이 수현과의 약속 조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린이 보기에 수현은 자존심이란 게 아예 없거나, 정말 요한의 연주를 사랑하거나의 둘 중 하나였다. 그 둘 중 하나가 아니고선 요한을 아직까지 인간 취급 해 주고 몸까지 섞는 그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리고 아마 높은 확률로 후자일 것이었다.
지난 7년간 요한은 점점 진화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받고 향유되기 시작하면서는 전 세계의 클래식 애호가들, 심지어 그의 외모에 혹한 일반인들까지 그를 공유하게 됐다. 그건 수현의 가슴속에 내재되어 있던 소유욕과 독점욕을 반드시 건드렸으리라. 만약 정말로 그가 요한의 연주를 사랑하고 있다면 말이다.
그녀는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잠시 말을 골랐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여기서 더 정제할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먹이 주면서 네 쪽으로 오라고 길들이고 있는 게 화를 풀어 주는 거야? 그거 그냥 위악이야. 차라리 대놓고 나쁜 놈 해. 속도전으로. 그럼 모두가 행복해져. 우수현 빼고.”
요한에게 잔소리를 퍼붓던 린은 불현듯 의문이 들었다. 그가 더디게 구는 것이, 그가 느리게 가고 있는 것이, 그가 끊임없이 기다려 주고 인내하면서 수현을 조련하는 근원적인 이유가 수현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얻고 싶기 때문이라면…….
머릿속에 아까 전 요한이 했던 말이 번뜩 스쳐 갔다.
<내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날 쳐다봤으면 좋겠어.>
“설마 이제 와서 걔랑 사랑 타령을 하려는 건 아니지?”
그건 어불성설이다. 린은 처음부터 이미 답을 내리고 물었다. 원하는 대로 수현이 다시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눈길로 그를 봐 주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당사자인 요한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요한은 늘 그렇듯 어느 지점을 넘어간 순간부터 대답을 아꼈다.
이 바닥에 있으면서 그녀는 필연적으로 피아노가 세상 전부인 줄 알고 평생을 살아온, 수현과 같은 선한 고집쟁이들을 여럿 봐 왔다. 그들은 심한 경우 피아노를 지키기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한다.
그런 그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영영 빼앗은 게 요한이다. 두 사람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관계 공식이 사랑이란 건 그가 수현의 손을 망가뜨린 그 순간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린은 차라리 수현이 요한을 향한 노선을 분명하게 해 줬으면 하고 바랐다.
전부 포기하고 그의 품에 안기거나, 완전히 그를 버려 주거나.
그렇게 해 달라고 수현을 차마 닦달하지 못하는 것은 지금 갈팡질팡하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당사자가 가장 간절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너무 걱정 말아요. 곧 돌아갈 거예요.”
“진심이야? 진짜지?”
“그렇게 되게 해야죠.”
요한은 아주 차가운 물을 한 잔 마셨다. 그러는 사이 현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 한국에서의 일정 전반을 관리하는 김 비서도 이 집 안까지는 못 들어왔다. 린조차도 그에게 미리 연락하고 들어와야만 했다. 마스터키를 가지고 있는 것은 수현 한 사람뿐이었다.
띠리릭. 잠금이 해제되고 누군가 저벅저벅 안으로 입성했다. 주변을 전부 터서 뻥 뚫린 거실은 숨을 곳도, 숨길 곳도 없었다. 기껏해야 커다란 피아노 밑 정도일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미안. 꼭 해야 할 말이 있는데 오늘 내가 출근하기 전밖에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왔는데…….”
커다란 크기에 비해 들여놓은 가구가 없어 휑한 작업실 정중앙에서, 기묘한 조합의 세 사람이 마주쳤다.
“아…… 수린 씨 있는지 몰랐어. 차에서 기다릴게.”
린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냐, 수현 씨. 안 그래도 내가 나가려고 그랬어. 용건 끝났거든.”
그녀가 차 키를 챙겨 들자, 관두라는 듯 손짓한 요한이 불쑥 내뱉었다.
“그래요. 그게 편하면 밖에서 기다려요.”
이 대답에는 린은 물론이고 수현도 놀랐다. 여기서 같이 기다리라고 한다든지, 아니면 린을 내보낸다든지 양단간에 한쪽이리라 막연히 생각했던 것이다.
막상 나가서 기다리라는 응답을 들으니 기분이 묘해진 수현은 무겁게 침묵했다. 며칠 전 자신이 그렇게 화낸 뒤 처음 만나게 된 상황이어서, 당연히 그가 저자세로 나올 것이라고 내심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자신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언제나 요한은 예상을 빗나간다는 것이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요한은 먼저 일어나 침실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린과 수현은 잠시 시선만 마주쳤다. 만감이 교차한 그녀는 수현의 눈치를 살폈다.
“저, 그래도 그냥 여기서 기다릴래? 요한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 거야.”
그러자 수현은 가타부타 대답도 없이 요한을 불렀다.
“요한, 내 동기랑 인터뷰 좀 해 줘. 네가 꼭 해 줘야 돼.”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려던 요한이 뒤돌아봤다.
“내가 왜?”
“나한테 필요해.”
“하지만 나한텐 불편한 일이죠. 아, 그럼 혹시 이건 ‘규칙’인가요?”
입술을 감쳐문 수현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허락한 걸로 알고, 다시 연락할게.”
그러고는 린에게 꾸벅 인사하더니 황급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중간에서 난감해진 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요한을 빤히 응시했다.
그녀는 눈으로 ‘이러고도?’ 하고 물었지만 이런 경우 으레 그렇듯 요한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 *
단독 인터뷰는 서초동의 한 꽃집 겸 카페에서 진행됐다. 어머니의 가게였다. 이곳은 커다란 공간을 절반으로 나눠 남쪽은 꽃집, 북쪽은 카페로 개조해 쓰고 있었다. 인터뷰를 흔쾌히 수락한 요한 덕분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수현이 말을 꺼낸 당일 오후 당장 현주와의 만남이 성사됐다.
어머니는 맨 처음 커피 정도만 내다 준 뒤 테이블 한 걸음 뒤편에서 린과 함께 기다렸다. 갑자기 현주와 단독 인터뷰를 한다는 게 자신이 한 실수 때문인 건 아닌지 다소 자책하는 모습도 보였다.
수현은 오는 길에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현주가 집으로 찾아왔던 날에 대해 설명도 자세히 다 했건만 굳이 이곳으로 인터뷰 장소를 바꾼 요한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물론이고 수현이나 현주, 모두가 불편한 자리였다.
“낯이 익군요. 학교에서 봤던 것 같은데 맞나요? 신부님을 알고 있다고 말했죠.”
“맞아요. 역시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제가 신부님을 아주 사알짝 알거든요. 아버지가 친구셨대요. 이리저리 퍼즐 짜 맞춰 보니 얻어걸린 거죠.”
요한은 상황을 대충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현주는 덧붙여 설명했다.
“사실 그땐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니었고, 주의를 끌고 싶어서 떡밥을 던졌던 건데 여기저기 뒤지다 보니 수현이의 존재까지 발견하게 됐어요. 아무튼, 이렇게 따로 만나 뵙게 돼 영광입니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해요.”
“천만에요. 협박은 당해 주라고 있는 거죠.”
탓하는 뉘앙스는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약점을 잡고 그를 소환해 낸 상황이니 현주의 입장이 썩 떳떳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머쓱하게 웃었다.
“그…… 수현이가 그러던가요?”
“감사 인사 한 거예요. 우리 좀 안 좋았는데, 덕분에 형이 먼저 절 찾았거든요.”
테이블 앞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이 동시에 수현을 돌아봤다. 갑작스레 시선을 받게 된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곁의 어머니를 힐끗 살폈다. 양손을 모으고 여전히 걱정스레 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모시고 꽃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꽃집 안에서 건너편의 카페가 통유리 너머로 훤히 들여다보였다.
“요한이가 왜 여기에서 인터뷰를 하는 거래?”
“편해서 그런 거 아닐까. 마침 엄마도 보고 일석이조다 싶었나 보지 뭐.”
수현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대언론에 소극적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요한은 달랐다. 그는 필요한 경우 주체적으로 언론을 움직이는 편이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음악계에서 그가 점하고 있는 독보적인 위치의 영향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기자들을 향한 그의 호의적이고 유연한 태도 덕분이었다. 그들은 까다로운 질문에도 성실하게 답변해 주는 요한에게 금세 호감을 느꼈다.
처음엔 긴장하는 듯하던 현주도 금세 편안한 얼굴로 요한을 대하고 있었다. 그가 짓고 있는 부드러운 미소가 그녀를 안정시키는 듯했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수현도 그 차분해진 공기를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정말 저들은 요한에게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걸까. 수현의 눈에 그는 전횡이라든지 횡포, 독재 따위의 강압적인 말들과 가장 잘 어울렸다. 하지만 여태 그를 인터뷰한 어떤 기자들도 그를 그런 식으로 수식한 예는 없었다.
계속 그를 주시하고 있던 수현은 요한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나 병원 가야 돼.”
“아, 맞다. 오늘 병원 가야 한댔지. 그럼 요한이 인터뷰 끝날 때까지 돌아올 수 있어? 아빠 오시라 그래서 넷이 같이 저녁 먹자.”
“아냐. 셋이 드세요. 난 따로 먹고 들어갈게. 이따 봐.”
“어머? 얘! 수현아!”
그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그대로 가게를 나가 버렸다.
한편, 꽃집 맞은편 카페에서는 인터뷰 준비가 한창이었다. 수현과 어머니가 꽃집으로 건너간 덕분에 인터뷰를 지켜보는 것은 린과 현주를 따라온 객원 사진 기자 정도만이 남아 있었다.
“너무 사적인 영역은 웬만하면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수현이한테 부탁을 받았어요. 적당히 수위 조절할게요.”
“네, 편하신 대로. 시작하시죠.”
분위기는 생각보다 훈훈했다. 일전에 현주가 그에게 했던 팬이라는 말이 그냥 한 말은 아니었던지 그녀의 태도는 내내 무척 우호적이었다. 요한도 이런저런 근황에 대해 숨기는 것 없이 친절하게 답변했다. 막 귀국했을 때의 상황이나, 한국 팬들의 성원에 대한 소감, 얼마 전 학교 강의실에서 했다던 연주 따위와 같은 것들이었다.
“그럼 워밍업은 어느 정도 한 것 같으니 이제 본 게임 들어가 볼까요? 한국으로 돌아오시기 전, 베를린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제가 요한 씨 인터뷰 중 웬만한 건 다 읽어 봤는데, 이 얘길 하신 게 처음이었거든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요. 기억하시나요?”
“물론이죠.”
“가장 좋아하는 글이라고요?”
“태어나서 제일 처음 읽었던 책이거든요.”
“제일 처음 읽었던 글이라…… 몇 살 때요?”
“열두 살 때. 한국 나이로.”
“그럼 초등학교 5학년 때인 셈인데, 그 나이에 읽기엔 어려운 소설이군요. 처음 읽었던 글이란 이유 말고 뭐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시고요?”
“혹시 그건 아세요? 제가 그때까지 한글을 좀 낯설어했어요.”
현주가 화들짝 놀라자 요한은 미소 지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자막으로 본 글자들이 뭘 의미하는지는 알았는데, 제가 본 것들은 교육 방송이나 뉴스, 클래식 채널 같은 게 전부였거든요. 왜, 그런 프로그램들 자막은 대부분 이해를 돕기 위해 짧게만 써 주잖아요. 책처럼 긴 호흡으로 된 것들은 낯설더군요. 그래서 그 긴 글을 누가 매일같이 와서 옆에서 읽어 줬죠.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한 권을 다 읽게 됐어요.”
“…….”
“아, 오해하지 마세요. 지금은 한글 굉장히 잘 읽고 씁니다.”
요한이 농담하자 현주도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누군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게 누군진 저 혼자 간직하고 싶어요. 이쯤에서 넘어갔으면 좋겠네요.”
줄곧 성실하게 대답해 오던 그가 처음으로 선언한 거절이었다. 여러 번 물어도 시간 낭비이리라는 것을 현주는 직감했다. 질문 리스트가 적힌 종이를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재빨리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그럼 이건 어때요? 그 인터뷰에서 「꽃의 왈츠」를 흥얼거리셨어요. 왜 그러셨던 거예요? 그때 말씀하셨던 대로 역시 꽃집을 하시는 어머니 때문이었나요? 음, 이 꽃집이겠군요.”
현주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건너편의 꽃집을 쳐다봤다. 유리창 너머로 지켜보고 있던 어머니와 눈이 마주쳐서 고개만 살짝 숙여 인사했다. 아까 전 수현이 함께 건너간 것을 분명히 봤는데, 이미 그는 그곳에 없었다. 그녀가 다시 시선을 요한에게로 돌렸을 때, 그는 뜻 모를 얼굴로 웃고 있었다.
“이곳은 공개되지 않았으면 해요. 「꽃의 왈츠」는 사실 어머니 얘기가 아니었거든요.”
“네, 어…… 그건 수현이와도 약속된 부분이니까요. 하지만 그럼 「꽃의 왈츠」에 대해선 얘기해 주실 수 있는 거죠?”
“전 때로 음악을 어떤 상황이랑 결부해 기억하곤 해요. 음악을 이미지화하는 거죠. 「학교 종이 땡땡땡」을 들으면 초등학생 시절 운동장에 울리던 종소리를 떠올리는 사람들처럼.”
그의 목소리의 주파수가 한층 더 낮아졌다.
“아시겠지만 10년 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출전한 게 제 데뷔였어요. 그때 이동준 선생님께서 많이 도와주셨죠.”
“알아요. 그해에 금메달 수상자가 없었죠? 무조건 당신을 줘야 했는데, 줄 수 없었으니까.”
“그때 대회장 빈 공연장에서 처음 투 피아노를 쳤어요. 아직까지도 그게 마지막이에요.”
“투 피아노? 그러고 보니 제가 아는 바론 요한 씬 피아노가 두 대 이상이 있는 무대엔 선 적이 한 번도 없네요. 7년이면 꽤 오래 활동했는데도요.”
피아노는 그 자체만으로도 풍부한 선율을 자랑하는 악기였다. 다른 악기 없이 여러 대의 피아노만으로 연주할 수 있는 곡들도 꽤 됐다.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음악들,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음악들……. 하지만 요한은 단 한 번도, 자신의 피아노 이외의 것과 한 무대에 선 적이 없었다. 오케스트라와는 공연했어도, 또 다른 피아노와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면 「꽃의 왈츠」는 이동준 선생이랑 쳤단 얘기인가요?”
“아뇨, 다른 사람. 슈베르트가 「미완성 교향곡」을 작곡하고는 이런 생각을 했대요. ‘아,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곡은 이제 쓸 수 없다. 여기서 관두자’. 그래서 뒷부분을 채 쓰지 못하고 미완성이 됐다는 얘기가 있어요. 들은 적 있나요?”
얼핏 그런 설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현주는 끄덕였다.
“그때 전 그런 걸 느꼈어요. 그날 우리가 했던 교감을 잊을 수가 없어요. 꼭 하나가 된 것 같았죠. 그래서 지금껏 그 사람 아닌 누군가와 함께 치는 건 시도조차 할 수 없었어요. 내키질 않더군요.”
“그 다른 사람이 누구…… 아니, 혹시 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어 줬던…… 잠깐, 잠깐만요. 요한 씨, 그럼 한국에 돌아온 게 그 사람 때문인가요?”
한국행을 선언하는 인터뷰에서 언급했던 두 가지가 모두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면, 그건 한국행의 목적이 그 사람이라는 의미도 된다. 호기심이 발동한 현주는 심호흡했다. 요한의 인터뷰라면 온 인터넷을 이 잡듯이 뒤져 모두 읽었던 그녀로서도 낯선 얘기였다. 특종을 얻어 냈다는 기쁨으로 두 눈이 반짝반짝하게 빛났다. 불현듯 갈증이 일어서 그녀는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세상에. 그 여성분을 만나러 연주 활동을 전부 접고 한국에 왔다는 거예요?”
요한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흥미로움이 담긴 시선으로 흥분한 현주를 물끄러미 지켜봤다.
“이건 당신의 첫 스캔들이 될 수도 있어요.”
“스캔들?”
“아, 미안해요. 그것 말곤 떠오르는 단어가 적당히 없어서 그랬어요. 놀라서 무슨 질문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혹시 그 사람도 피아니스트인가요?”
“그게 누군지까지는 밝힐 수 없다고 조금 전에도 얘기했고요.”
“그렇다면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인 건 맞다는 거네요?”
“요한, 그만. 시간 다 됐어.”
보다 못한 린이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테이블맡에 선 그녀는 여태까지의 대화만으로도 충분히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현주를 응시하고 있던 요한은 이번엔 린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현주도 그의 시선을 따라 린을 바라봤다. 그러자 린이 손목시계를 툭툭 치며 이제 일어날 시간이 됐다는 듯 눈짓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이 인터뷰 자리를 파하고 싶은 것 같았다. 질문거리를 잔뜩 정리해 온 종이는 아직 채 세 장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현주는 아쉬운 마음에 부탁했다.
“시간이 다 된 건 아는데 조금만 더 여유를 주시면 안 될까요? 한 30분 정도만이라도.”
“안 돼요.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러게 시간 안배를 잘하지 그랬어요. 피차 비즈니스 하면서 지킬 건 지켜야 서로 피해가 없겠죠?”
“아직 친어머니나 신부님 이야기도 묻지 못했는데…….”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요.”
요한은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
“맙소사. 저한테 또 기회가 있을까요?”
“원하는 사람이 노력해야죠. 들려줄 얘기가 많아요. 전 아주 비밀이 많은 사람이거든요.”
“노력? 제가 무슨 노력을…….”
그가 꺼낸 말을 되새기던 그녀는 수현이 이미 사라지고 없는 빈자리로 시선을 던졌다. 통유리 너머로 그의 어머니만이 얼핏 보였다.
“제가 수현일 또 괴롭히면 요한 씨가 날 미워할 것 같은데요.”
“오히려 지금은 형이 미워요. 잘 괴롭혀 주세요. 그럼 우리도 또 만날 일이 있겠죠.”
“수현이랑 친형제처럼 자랐다더니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요. 두 사람 다 투덕거리는 다툼이랑은 멀어 보이는데, 종종 싸우기도 하나 봐요?”
“그럴 리가요. 어차피 전 형을 못 이겨요. 그래서 우린 안 싸우죠.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법이니까.”
“와, 형제가 우애가 좋네요.”
요한은 또 예의 흥미로운 시선으로 현주를 잠시 살폈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먼저 일어나죠. 오늘 즐거웠어요.”
“잠깐만요. 30초만 더. 이건 매니저님께 함께 물을게요. 정말 오늘 인터뷰 내용을 전부 우리 잡지에 실어도 될까요?”
그녀는 먼저 일어난 요한에게 확인받듯 물었다. 취재원을 보호하는 것은 현주 사전에 전혀 없던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 들은 이야기는 생각보다 더 파급력이 어마어마할 것 같아 깡 하나로 버텨 온 그녀마저 좀 겁이 났다.
상대는 그야말로 클래식계의 신흥 귀족이자 거물이었다. 심지어 그의 뒤에는 유럽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거대 소속사가 버티고 있었다. 한국의 작은 잡지사가 그들에게 약간의 빌미라도 주어서 소송이라도 당한다면 다시 일어서기가 쉽지 않을 것이었다.
“제 밥줄 문제 걱정 안 해도 되는 거냐고요.”
“나 오늘 별 얘기 안 한 것 같은데…… 아니면 왜곡 보도를 하시겠다는 건가요?”
“아니에요. 그냥 좀 덜컥 걱정이 돼서. 당연히 있는 그대로만 실을 거예요.”
“있는 그대로 실을 건데 왜 걱정을 하죠?”
현주는 그의 이 말이 허락이라는 것을 알았다.
* * *
며칠 만에 다시 들른 한국 대학교 병원은 위용이 대단한 입구부터 거부감이 물씬 들었다. 오른손의 붕대 정도는 혼자 풀 수 있어 매일 아침 직접 갈았다. 오늘 아침에 확인했을 때는 상처도 거의 나아 있었다. 심지어 운전도 멀쩡히 가능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부득불 병원에 가야 한다고 성화였다.
지금이라도 늘 가던 집 근처의 성모 병원으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진 그는 입구 앞에서 아주 잠깐 고민했다. 만에 하나 그날 응급실에서 그의 추태를 목격했던 사람이 지나간다거나, 자신을 안고 나가는 요한을 보고 수군거렸던 사람과 마주칠 위험도 있었다. 그 어느 쪽도 아찔했다. 병원에 와서 예후를 점검해야 한다는 게 어머니의 뜻이라면 차라리 다른 곳으로 가자는 데 생각이 미쳤다. 반드시 이곳이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로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와 부딪칠 뻔했다. 수현은 반사적으로 사과부터 건넸다.
“아, 죄송합니다.”
“저야말로……… 어라, 너 수현이 아니니?”
눈앞이 아찔했다. 피죽 한 그릇 못 얻어먹고 몇 날 며칠 굶은 사람이 갑자기 햇빛을 받으면 어지러운 것과 꼭 같았다. 그는 휘청했다. 또다시 환청이 들렸다.
<이걸로 결별이야.>
너무 지겨웠다. 머릿속에 있는 기억들을 온몸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으로 다 토해 내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런 그를 붙잡아 준 것은 하얀 가운을 입은 눈앞의 남자였다. 가운 위에 실로 수놓인 명찰에는 ‘이윤도’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 기억해?”
잊을 수 있을 리가. 그날, 그 순간, 주변의 공기와 배경, 소리, 냄새, 느낌. 그 모든 것들은 정물처럼 그의 뇌리 안에 각인돼 있었다.
“선생님…….”
“야, 이게 웬일이야. 8년 만인가? 9년?”
“그쯤 됐겠어요.”
그는 9년 전 수현의 손을 수술했던 담당 집도의였다. 신경이 손상되고, 인대가 여러 곳 끊어져 있는 그의 오른손을 몇 시간에 걸친 대수술 끝에 봉합해 주었던 뛰어난 의사였다.
이 사람이 싫은 건 아니다. 오히려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보면 자연적으로 떠오르는 그 상황은 수현에게 막대한 스트레스 기제였다. 왜냐하면 최종적으로 수현의 손에 사형 선고를 내렸던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아드님이 피아노 전공하는 학생이라고요? 하지만 이 정도 부상이면…… 앞으론 전혀 칠 수가 없겠는데요.>
난감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저, 선생님.”
“내가 먼저 말할게.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지 않을래? 미안. 내가 눈치가 백 단이지?”
수현은 마지못해 끄덕였다.
병원 주변에는 환자들을 위한 산책로가 넓게 조성되어 있었다. 한가로운 봄날이라 그런지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꽤 많았다. 산책로의 막다른 골목 벤치에 두 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붕대를 감고 있는 손을 의식했는지 캔 커피의 뚜껑을 따서 건네주는 통에 민망해졌다. 정말 멀쩡했다.
“손에 또 문제가 생긴 거니?”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넘어져서 살짝 다친 거고요.”
“요한인 잘 지내? 뉴스에서 가끔 본다. 아주 멋있어졌던데? 내가 예전에 직접 본 적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야.”
그도 요한을 본 적이 있었다. 듣기로 꽤 많은 대화도 나눴다는 것 같았다. 엉망이 된 수현의 손 상태를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수현은 기억에 없는 일이었으나 손을 다쳤던 9년 전 그날, 자신을 병원에 데리고 왔던 것은 요한인 모양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이 의사로부터 들었다. 병실에 도착했던 새벽녘 정신을 차린 수현은 요한을 보자마자 또다시 그대로 기절했다. 그래서 이윤도 선생이 요한을 수현의 불안 기제라고 인식하고 따로 격리해 주기도 했었다.
수현은 아주 가끔 이 남자에 대해서 떠올렸다. 그때 자신이 그에게 도와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절 기억하고 계실 줄 몰랐어요. 매일 보는 환자만 수십 명일 거고, 또 오래전 일이고요.”
“종종 너희 생각이 났었어. 병원에 왔던 날, 나도 손뼈가 그렇게 산산조각 나고 인대가 모조리 끊어진 상태는 처음 봤던 거였거든. 게다가…….”
그는 잠시 침묵했다.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교통사고나 추락 사고 같은 사고가 아닌데도 손을 그렇게까지 다쳤다면…… 누가 억지로 그렇게 만든 게 아닌 이상 설명이 불가능했으니까. 생각보다 인간의 뼈는 훨씬 두껍고 튼튼하잖니. 어마어마한 악력으로 ‘내가 이걸 부러뜨려 버리겠다!’ 그런 작정으로 한 짓처럼 보였지.”
그때 요한은 수현의 상태에 대해 굴러떨어져서 다쳤다고 말했다. 그러나 의사의 소견으로 봐서 그 해명은 앞뒤가 안 맞았다. 굴러떨어지면서 신체의 다른 곳은 멀쩡한 채 손만 그렇게 험악하게 다치는 건 인과가 설명이 되지 않았다.
이윤도의 생각에 요한은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수현의 동생이라면서, 이상할 정도로 침착한 모습도 마음에 걸렸다. 아이는 침착함을 넘어서 태도가 어딘지 냉랭했다. 마치 이런 비극적인 일이 예견되어 있었다는 듯이 굴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방에 잠시 내려가 있다던 부모님이 서울로 올라올 동안 그는 요한을 병실에서 격리하기도 했었다. 그때 그는 혼자 남겨진 수현에게 몇 번이고 물었다.
<네 손, 혹시 저 애가 한 짓이니? 널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 대답하기가 어려우면 고개만 끄덕거려도 좋다.>
그러나 두려움 섞인 눈빛 반, 공허한 눈빛 반의 수현은 천천히 이렇게만 대답했다.
<저…… 오른손을 다신 못 쓰나요?>
“요한이 말이다. 그때 내가 직접 정신과로 널 트랜스퍼 하면서 요한도 한번 넌지시 봐 달라 의뢰를 했었는데, 박 선생님은 네가 결국 안 왔다고 그러더구나. 극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생길 일인데 왜 안 왔었니?”
“저한테 트라우마가 있으리라는 건 예상했어요. 치료 필요 없고요.”
“많은 환자들이 가장 흔히 범하는 실수 중에 하나가 자신의 병을 스스로 진단하는 것이지.”
픽 웃음을 터트린 수현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병은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요한을 극복하지 않는 한 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역시 극복하지 못하리라. 원인을 알고 있어도 그 원인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구할 자신이 없으니 아무리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 한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이 부분에서 수현은 다소 유아기적 상태였다.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늘 식욕에 무너지는 사람들처럼, 시험 기간이 임박해서 책상 앞에 앉았으면서도 수면욕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수현 또한 그의 연주를 듣고 싶은 본능적인 욕망을 차마 떨쳐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토록 휘둘리고 있는 게 아닌가.
“너도 너지만…… 요한인 치료가 필요한 게 아닌가 싶었거든. 어머니한테 얼핏 말씀 들어 보니 워낙 유년기에 상처가 많은 것 같길래 말이다.”
9년 전 이윤도는 요한이 극심한 애착 장애를 앓고 있는 게 아닐까 염려했었다. 같은 병을 앓고 있는 다른 환자들에 비해 정도가 훨씬 극심한 것 같다는 말도 함께 덧붙였다. 그리고 반사회적 인격 장애 여부를 진단해 볼 필요성 또한 있을 것 같다고 아주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그가 앓고 있는 병이 애착 장애인지 또 다른 정신병인지 수현은 모른다. 다만 이윤도의 말대로 그는 분명 문제가 있긴 있었다.
표정 없는 아이.
수현이 요한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감상이었다. 실제로 어릴 때 요한을 봤던 사람들 셋 중 둘은 그런 비슷한 얘길 했다. 나머지 한 사람은 수현처럼 속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아이는 얼굴에 희로애락이 없었다. 때문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사람 상대에 이골이 난 어머니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아버지도, 수더분하고 성격 좋은 이동준도 자신보다 한참 어린 요한을 다루기 무척 어려워했다. 이윤도가 말한 예의 유년기 상처가 이유였을 것이다.
“그때의 제가 뭐라고 하면서 검사를 받게 할 수 있었을까요. 네가 정신병자가 될 기미가 보이니까 검진 좀 받자고 했어야 했나요? 선생님, 여태까지 걘 저한테 말고는 특별히 살면서 해 끼친 일도 없어요. 걔가 나쁘다는 걸 아는 게 저뿐이었다고요.”
“내 말이 그 얘기야. 네가 계속 피해를 입잖아. 그 애가 반응하는 한정된 대상이 너니까. 너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 애를 설득했어야 하지 않았겠니?”
“그럼 전 또 뭔가를 내놓아야 해요.”
그게 두 사람 사이의 규칙이었다.
“전 이제 가진 게 없고요.”
“…….”
“걘 성격이 나쁘죠. 착하고 못되고의 범주가 아니라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질이 나빠요. 그래서 종종 비정상적으로 보이지만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인지하고는 있어요. 알면서 하는 거예요. 왜냐면…….”
자신을 원하니까.
그는 그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고치지 못할…… 아니, 않을 거예요.”
어떤 방식으로든 그가 피해를 끼치는 건 아직까지는 오직 수현에게만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가 타인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면 그 원인 또한 자신일 것이었다.
곁에서 이윤도가 무척 의아해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호기심인지, 순수한 걱정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수현은 차마 그의 눈동자를 마주 볼 수가 없어 정면만 응시했다.
“너한테서 피아노를 영영 빼앗아 갔는데도 넌 여전히 그 애를 옹호하는구나.”
“옹호하는 게 아니에요. 요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거지.”
“그렇게 그냥 두다가 또 네가 위험에 처하게 되면 어쩌려고.”
수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체 그도, 자신도 뭘 어쩌려는 건지.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가서 해답을 구하고 싶었다.
“아, 저 가 봐야겠어요. 병원에 들러야 하거든요. 붕대 풀러요.”
“그 정도라면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구나.”
“아뇨, 이만 돌아가 볼게요. 오늘 얘긴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수현아.”
이윤도는 그를 붙잡기 위해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수현은 그에게로 와 꽃이 되어 주지 않았다. 그대로 자리를 물리려 일어설 따름이었다. 남자는 그를 꺾을 수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빈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래. 만일 내가 도울 일이 생기면 언제든 연락해. 꼭 그렇게 해 다오.”
꾸벅 인사한 수현은 달아나듯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요한이 자신에게 했던 나쁜 짓을 여태 그 누구에게도 솔직히 말하고 도움을 구하지 않은 건 일정 부분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었다.
함께 지내면서 수현이 느낀 요한은 감정이 아주 희미해 백지에 가까웠다. 다만 아주 무(無)인 공허한 상태는 아니어서 끈질기게 구체화하여 알려 주면 머리 좋은 그는 점차 습득하고 이해했다.
요한의 얼굴에서 갖가지 표정을 찾아 주는 일. 청소년기의 수현에게는 그게 큰 보람이었다. 그리고 그게 가능해지자 점점 다른 것들도 가르쳐 주고 싶어졌다. 특히 불행하기만 했던 그의 삶 속 궤도를 보통 사람들처럼 제대로 짜 맞춰 주고 싶은 마음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렇게 요한은 해도 되는 일이나 하면 안 되는 일, 원하는 게 생겼을 때 그것을 얻어 내는 일, 그런 세상의 규칙 전부를 수현에게 배웠다.
수현은 주차해 둔 차체를 손으로 짚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자신의 붕대 감긴 손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차체에 등을 기대섰다.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요한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자만 탓이다. 자신에게 내려진 이 불행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오만 때문이었다.
차라리 그때, 이윤도가 손을 내밀었을 때 그 손을 잡았더라면 어땠을까. 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학적으로 증명하고 그때라도 자신에게서 격리했더라면 지금처럼 모든 게 엉망이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의 수현은 자신의 손을 그렇게 만든 것이 요한이라는 것을 어디에도 알리고 싶지 않아 끝끝내 함구했었다. 부모님께도 알리지 않았다. 그들이 짐작하고 있든 아니든 자신이 침묵하면 공론화되지 않을 일이었다. 그래서 진창이 된 손을 붙들고 울면서 혼자만 간직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도 자신은 그를.
그러니까, 수현은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젠장…….”
요한은.
그의 첫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