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지난주 내내 한국을 비웠던 요한은 현재 모스크바에 머무르고 있었다. 공식적인 이유는 차이콥스키 콩쿠르 결선 심사를 위해서였다. 하이네만의 특별 부탁으로 콩쿠르 측의 제안을 최종 수락했다는 듯했다. 다만 그가 심사한다는 것을 철저히 비공개로 하고, 블라인드 심사 위원으로 게임의 깍두기처럼 필요한 경우에만 길잡이가 되어 준다는 모양이었다.
공식 스케줄이어서 한국의 비서 김은희가 아닌 독일 매니저 린이 직접 합류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요한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팬,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의 스승인 남자를 만나고 있을 것이다. 하이네만은 요한이 공들여 맺는 사적 인간관계의 전부라고 봐도 좋았다.
모스크바의 콩쿠르 지원자들만큼 한국에서 치러지는 서울 국제 콩쿠르 지원자들도 숨 가쁘게 바빴다. 예선이 치러진 것이 지난주로, 다음 주 본선과 이어지는 결선까지 치러지고 나면 여름이 성큼 다가와 있을 것이었다. 다행히 재욱도 예선은 무리 없이 통과해서 연습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었다.
“저 오늘은 먼저 들어가 볼게요.”
“지금 가시는 거예요? 피아노과로 전화 오는 건 저희가 돌려서 받을게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수현이 인사하자 작곡과 조교가 손 인사까지 곁들여 화답했다. 그는 천천히 학교를 빠져나갔다.
주차장까지 내려가는 동안 갖가지 악기들이 연주되는 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몇 강의실에서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연주하는 모양이었다. 피아노의 선율은 개중 가장 선명하게 꽂혀 들었다. 베토벤의 「월광」이었다. 전공생에게 어려운 악보는 아닐 텐데, 실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아무래도 수업이 끝난 뒤 타과생이 재미 삼아 치는 것 같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건반 위에서 한 치의 실수도 없는 요한을 떠올렸다.
줄곧 린과 함께 모스크바로 홀연히 떠난 그가 신경이 쓰였다. 7년 동안이나 그를 보지 않고 지낼 때도 이런 감정은 느낀 적이 없었는데 요 며칠 이상하게 계속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는 무척 아름답고, 요한을 잘 이해하고 있는 데다, 몹시 헌신적이다.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줄곧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린에게 전화가 왔을 때 속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양 안절부절못했다.
그녀는 그런 수현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 날짜로 요한이 귀국할 것이란 소식을 전해 왔다. 그러면서 그의 작업실에 몇 가지 악보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기에, 지금 그는 요한의 비행기 시간과 겹치지 않게 도착하려 한 시간 일찍 퇴근하는 길이었다.
거리는 학교와도 가까운 편이어서 금세 도착했다. 눈앞의 2층 건물은 땅값은 차치하고 방음 시설과 피아노의 가격, 안에 들인 음향 기기들 따위만으로도 이미 천문학적인 가치가 있었다. 바꿔 말하면 요한이 이미 어마어마한 부자가 됐다는 것이다. 어린 날엔 갈 곳이 없어 수현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됐던 그였다.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수현은 작업실의 문을 열었다.
“……!”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희미하게 소리가 들렸다. 그가 인천 공항에 도착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두 시간 뒤였다. 비행기 편이 바뀌어 때이르게 도착했거나, 린이 일부러 자신을 속였거나 둘 중 하나였다. 왠지 후자의 가능성이 훨씬 더 크게 느껴져, 그가 그냥 돌아서려던 차였다.
처음 듣는 음악이었다. 묘하게 애수가 짙었다. 피아노를 제대로 칠 수 없게 되면서, 수현은 예전보다 훨씬 더 듣는 일에 절박하게 매달렸다. 그중 수현의 취향에 가장 부합하는 요한의 화려한 연주를 들은 횟수는 압도적이었다. 그런 그가 쳤던 곡 중 이런 선율은 없었다. 십중팔구 그가 만든 곡일 것이다. 수현은 홀린 듯이 작업실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예전에 작곡가들이 클래식 음악을 만들 때는 특정 제목이 아닌 「교향곡」 1번, 2번…… 하는 식으로만 구분하기 쉽게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가령 브람스의 「베르테르」 같은 것들도 후대에 다른 사람들이 별칭을 붙인 것이었다. 이 곡은 사람들의 입에서 어떤 별명으로 불리게 될까. 멜로디가 무척 아름다웠다. 뒤로 갈수록 훨씬 화려해지고, 열정이 가득했다.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치열함이 느껴졌다.
피아노 치는 요한의 뒷모습은 그의 두 손이 좌우로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역동적으로 흔들렸다. 그만큼 요한의 리듬은 변칙적이었다. 왼손의 움직임이 오른손에 비해 훨씬 현란했다. 마치 이 곡을 칠 사람이 오른손에 장애가 있다는 것을 의식한 듯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수현은 화들짝 놀랐다. 오른손에 문제가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목말라요.”
어느새 질풍노도 같던 연주는 끝나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그가 중간에 관둔 듯했다.
피아노 위에 엎드려서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나른함이 가득했다. 작업실에 도착한 뒤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부터 한 듯 바닥에 겉옷이 나뒹굴고 있었다. 셔츠를 걷어 올린 손목 부근의 뼈가 눈에 띄게 도드라졌다.
수현은 차가운 물을 떠다가 그의 앞으로 갔다. 그러자 요한이 짓궂은 눈동자로 그러는 것이었다.
“먹여 주세요. 입으로.”
“…….”
“뭐, 좋아요. 인터뷰에 대한 조건 아직 얘기 안 했어요. 그걸 쓰죠.”
의자에 요한과 반대 방향으로 앉은 수현은 그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벌렸다. 자신의 입으로 머금은 물은 입 속에서 이미 미지근해져 있었다. 요한에게 그것을 넘겨주자, 조금씩 받아 마시는 모습이 바르작거리는 아기 새 같았다.
입에서 입 안으로 넘기는 물은 양이 한정돼 있어서 여러 번 반복해야만 했다. 입술을 부딪칠 때마다 요한의 혀끝이 같이 엉켰다. 요한은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쳤다. 수현이 조금 더 가까이 앉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수현의 뺨을 꽉 붙들고 깊숙하게 입을 맞춰 왔다. 수현의 양손에는 아직 내용물이 반쯤 남은 물컵이 쥐어져 있었다. 그것을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손에 힘을 주고 있었는지 모른다.
“뭘 하고 지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점심 먹고, 저녁 먹고, 잠들었어.”
“내가 보고 싶지 않았어요?”
수현은 잠시 할 말을 놓쳤다. 보고 싶었다기보다는 계속 신경이 쓰이긴 했다. 잠자코 있다간 속마음을 읽힐 것만 같았다. 그는 말을 황급히 돌렸다.
“방금 연주한 곡, 뭐야? 처음 들어.”
요한은 악보를 한 권 내밀었다. 익숙한 표지였다. 오른쪽 상단에 ‘S’라는 그의 상징이 적혀 있는 악보.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이건 내가 처음으로 만든 곡이에요.”
“그럼 이게 S.1이겠네? 이 표지 학교 연습실에서 본 적 있어. 아까 들었을 땐 오른쪽 손 연주가 꽤 엇박자로 들리던데…….”
“맞아요. 역시 귀가 좋네요. 최대한 오른손의 리듬을 변칙적으로 만들어 봤어요. 오른쪽에 신경 쓰여서 정박으로 연주하는 왼손은 좀 편할 거예요. 악보를 눈으로 먼저 봐요. 연주할 수 있겠어요?”
연습실에선 차마 악보를 열어 볼 수가 없었다. 오늘에서야 수현은 천천히 앞장을 들췄다. 음표들은 무척 깔끔하게 적혀 있었다. 중간에 수정한 흔적이 거의 없었다. 마치 머릿속에 있는 음악을 고스란히 악보 위에 올려놓은 듯 빼곡한 음표들이 조화롭게 왈츠를 추고 있었다.
아까 그가 치고 있던 부분은 수현이 연주할 두 번째 피아노 부분인 모양이었다. 악보를 보니 이해가 됐다. 첫 번째 피아노는 훨씬 더 음표가 빼곡했다. 이 악보상 윗부분이 요한의 몫일 것이다.
“지난번 여기서 연주한 뒤로, 또 피아노 뚜껑 안 연 지 얼마나 됐어요? 「짐노페디」.”
수현은 이런 질문을 하는 요한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피아노를 안 치는 거야말로 네가 바란 거 아니야? 이 악보의 의미를 이해 못 하겠어.”
타악. 수현은 악보의 앞장만 떠들어 보다 이내 덮었다. 두 사람이 함께 연주하기 위해서 만든 이 악보가 꼭 자신을 기만하기 위한 것인 듯해 불쾌했다. 악보 위의 배려가 마치 망가진 오른손을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실제로 수현의 오른손은 왼손에 비해 삐걱대고 철심 때문에 무게도 훨씬 더 나갔다.
“오해예요. 난 형의 연주를 좋아하거든. 게다가 이제 연주하면 오른손이 정상이 아니란 걸 바로 알 수 있잖아요. 난 그게 특히 좋더라.”
“또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그건 두 사람의 금기 아닌 금기가 아닌가. 그는 왜 번번이 이런 식으로 자신의 상처를 들쑤시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못된 태도를 보일 때마다 감당이 안 됐다. 안 그래도 너덜너덜해져 더 떨어질 곳이 없는 자신을 끊임없이 더 다치게 했다.
홧김에 일어나려는 수현을 요한이 붙잡았다. 꽉 쥐인 손목이 아팠다.
“자꾸 상처 주고 싶어. 나 좀 잡아 줘요.”
대체 언제까지.
“직접 연주 안 해 볼래요?”
“…….”
“그래요. 다음에.”
붙들린 오른 손목을 비틀어 봤지만, 당연히 힘이 크게 안 들어갔다. 수현이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자, 보면대 위에 악보를 올려 둔 요한이 따라 일어섰다. 막상 그가 피아노 앞에서 일어서자, 한편으론 조금 아쉬웠다.
요한이 연주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는 자신이 이곳까지 홀린 듯이 걸어 들어왔을 만큼 무척 아름다웠다. 마치 매혹적인 노래로 배들을 좌초시키는 지중해의 세이렌 같았다. 혼자서 연주하고 있는데도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으니 함께 연주한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물론 자신이 아닌 손이 멀쩡한 연주자와 친다는 전제하였다.
“드레스 룸에 옷이 한 벌 있어요. 하이네만이 주는 선물. 마음에 들 거예요.”
“하이네만이 날 안단 말이야?”
“아, 내가 이 얘길 안 했구나. 10년 전 모스크바에서 우리가 같이 「꽃의 왈츠」를 치는 모습을 봤대요.”
드레스 룸 진열장 위에 걸린 옷은 한눈에 봐도 가격대가 어마어마할 것 같은 맞춤 정장이었다.
요한이 직접 옷을 입혀 주는 동안 수현은 종이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옷은 자로 잰 듯 수현의 몸에 딱 맞았다. 하이네만이 자신의 치수를 이렇게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닐 터였다.
그의 의문을 알기라도 한 듯 요한이 손으로 한 뼘, 한 뼘 움직여 가며 수현의 몸을 어루만졌다. 생물을 해부하는 과학자라도 된 양 신중한 손길이었다. 아마 언젠가 수현이 잠들어 있는 동안 이렇게 손대중으로 사이즈를 쟀던 것 같았다.
“오늘 자고 가요.”
“그럼 넌 나한테 뭘 줄 건데?”
“필요한 걸 줄게요.”
그럼 내 손을 원상태로 되돌려 줘.
수현은 입을 달싹였다. 그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그 침묵의 시간이 지루했던지 요한은 수현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수현은 전신 거울을 통해 그런 그를 지켜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수현은 그를 밀어냈다.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다시 쳐 줘. 이번엔 네 부분을 너 혼자.”
요한은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도 예의 약속은 성립된 것이다.
* * *
사람 사이의 관계에는 어떤 관습 같은 게 있다. 예컨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주변을 서성이는 행동은 내가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의미가 대부분이었다. 지금 상황이 딱 그랬다.
오늘따라 수현의 주변이 부산스러웠다. 각 학과 사무실의 조교들이 출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자기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피아노과 사무실에 죽치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씀들 있으면 하세요.”
오디오에서 CD를 빼내던 수현이 말을 던졌다. 오늘 오전의 음악은 모차르트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였다. 그냥 문득 생각이 나서 틀어 놓았다. 모차르트의 것은 격정적이던 요한의 곡과 달리 D장조의 경쾌한 음악이라 느낌이 전혀 달랐다.
성악과의 조교는 후덕한 인상의 테너 전공 김탁환이었다. 성격에 모난 곳이 없어 학생들이나 교수들은 물론이고 다른 과 조교들과도 두루두루 잘 지냈다. 수현과도 부딪칠 일이 많지는 않지만 학번이 같다는 핑계로 친숙하게 대해 오는 편이었다. 그가 총대를 멘 모양인지 대표로 물었다.
“그거 진짜예요?”
“뭐가요?”
“아니, 「클래시즘」이라고. 우리 학교 졸업생 중에서 만든 신생 잡지가 하나 있다던데…….”
그의 말을 듣자마자 등줄기가 찌릿하고 아파 왔다. 뭔가 예측하지 않은 곤란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실제로 오전부터 이렇게 사무실에 다른 조교들이 모여 있는 것부터가 불길한 징후이긴 했다.
“피아노과 계현주라고 우리랑 같은 학번이에요.”
“네, 우 조교 동기더라고요. 그 친구가 만든 잡지가 혼자 하는 건데도 아주 영세한 건 아닌가 봐요? 아직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시중 서점에도 유통이 되긴 되는 모양이더라고. 제 후배 중에 하나도 가끔 연락을 한다는데 걔가 그러기를…….”
서두가 길다. 대화 중 이렇게 서론이 길어지는 상황도 관습적 징후 중 하나였다. 묻기 곤란한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이다. 수현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첫머리를 단호하게 잘라 내고 되물었다.
“그냥 편하게 물어보세요.”
“계현주가 요즘 승요한 독점 취재하고 있다고 신났대요. 따로 인터뷰도 해 준 모양이라면서. 그런데 그걸 주선해 준 게 수현 씨, 자기라던데?”
마우스를 딸각거리던 수현의 손이 뚝 멈췄다. 사무실 안에 있는 다섯 명의 시선이 오직 수현의 입으로만 쏠려 있었다. 특별히 현주의 입이 무거우리라고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가벼우리라고도 생각 안 했다. 조교들의 귀에까지 들어왔을 정도면 그 소문은 학생들에게도 이미 퍼져 있을 것이었다.
“조만간 승요한 특집 호 나올 거라고 자랑을 그렇게 했대요. 거기에 승요한이랑 우 조교 관계에 대해서도 자세히 실어 볼 생각이라고 하던데. 뭐 둘이 얼마나 친하길래 그래요?”
대충 해명하고 이 대화를 마무리하려던 그는 얼어붙었다.
“나?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 얘기가 거기서 왜 나와요?”
“승요한 독점 인터뷰랑 자기가 취재한 내용들 총망라해서 여름 특집 호에 실을 거라고요. 저도 들은 건 거기까지예요. 우 조교 얘기 나오길래 같이 인터뷰한 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안 했어요. 한 건 요한이죠.”
“그럼 자리 주선해 줬단 소문은 맞는 거네요?”
“그런 거 아니에요. 죄송한데 다들 본인 자리로 돌아가 주세요. 전 더 할 말 없어요.”
당황한 수현은 손을 내저었다. 그가 단호한 반응을 보이자 서로 눈치를 살피던 다른 과 조교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혼자 남겨진 수현은 의자에 등을 편히 기대앉았다.
“얘기가 다르잖아.”
이쪽에서는 상대를 믿고 약속을 지켰다. 애초에 요한과의 자리를 마련했던 게 자신을 포함한 가족을 더 괴롭히는 일 없이 철저히 함구해 달라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이런 어마어마한 뒤통수였다. 김탁환의 말이 사실이라면 계현주가 제대로 미친 모양이다. 수현은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일어섰다.
피아노과에 이른 오전부터 전화가 몇 통 걸려 왔지만 그것마저 무시하고 건물 비상구로 빠져나왔다. 명함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를 걸자 목이 푹 잠긴 목소리가 금세 들려왔다.
“너 돌았어?”
[아침잠 깨우는 전화치고 초반부터 너무 화끈한 거 아니야? 왜 그래?]
“요한이랑 내 얘기 잡지에 실린다는 얘긴 다 뭐야? 가족은 건드리지 않기로 했잖아.”
그녀는 잠시 답변이 없었다. 그러고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는 양 낮은 숨을 토해 냈다.
[아아, 그거.]
당장이라도 왈칵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으나 수현은 인내심 있게 참아 냈다. 아직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니 해명을 듣는 것이 우선순위였다. 차라리 오해이길 바라는 마음도 일정 부분 있었다.
[그 소문이 벌써 거기까지 났구나. 일부러 네 귀에 들리라고 내가 퍼트린 거긴 했는데, 요새 학교에서 승요한이 핫 하긴 한가 봐. 생각보다 훨씬 빠르네.]
“쓸데없는 소린 집어치우고, 해명해.”
[수현아, 난 요한이 말한 대로 했을 뿐이야.]
“걔가 우리 얘기를 기사로 실어 달라 그랬단 거야?”
[아니, 아니. 그게 아냐.]
그녀도 영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었던지 음성이 퍽 조심스러웠다.
[난 요한과 또 대화하고 싶어. 기자로서도 간절하지만 팬으로서의 호기심이기도 해. 그런데 지난번 만났을 때 요한이 자길 또 인터뷰하고 싶으면 너를 설득하란 뉘앙스를 풍겼어. 너한텐 미안하지만 널 자극해야 승요한이 움직일 것 같아서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어쩔 수가 없었다.
그건 정말이지 너무나 편리한 핑계다. 무슨 나쁜 짓을 저질러도 난 어쩔 수 없었다면서 도망가면 그뿐이니까. 수현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저번이랑 똑같아. 승요한이랑 자리를 좀 만들어 줘. 안 그러면 난 너희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지면에 쓰겠어. 그에게 법적인 건 아니지만 같이 자란 형이 있고, 그게 피아노를 전공한 학생이란 거 말이야. 지난번 너희 집에 갔을 때 어머니께서 해 주셨던 말씀인데…… 요한에게 계이름이랑 악보 보는 방법을 알려 준 게 너였다면서?]
“너 번번이 이렇게 나 걸고넘어질 생각이야?”
[그건 요한에게 달렸지. 나도 웬만해선 너한테 폐 끼치고 싶지 않아. 처음엔 분명 약속을 지키려고 했다고. 수현아, 나한테도 일말의 양심은 있어. 만약 기사를 쓰게 되더라도 너희 부모님 얘기는 일절 적지 않을게.]
“일말의 양심 좋아하시네.”
그의 판단으로 그건 면피용 궤변이었다. 부모님 이야기를 싣지 않는다 해도 수현의 얘기가 공개되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수현은 부모님의 아들이고, 그런 수현과 요한이 한집에서 오래 생활했다는 이야기를 하려면 부모님이 연관되는 일은 불가피했다. 그들은 한평생을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밭을 일구듯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주목받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잔잔한 인생에 유명인 한 사람이 결부되는 순간 삶은 뒤집어지기 마련이다. 주변 사람들의 갖가지 요청과 공세들에 끊임없이 시달릴 것이었다. 진중한 아버지라면 몰라도 어머니는 구설수에 오를지도 모른다. 사랑스러운 분이긴 하지만 누군가의 눈엔 감정이 헤프고, 주책으로 보일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되면 요한에게 폐를 끼쳤다며 얼마나 자책감으로 힘겨워하실지 수현의 눈앞엔 이 막장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이미 오르고 있었다. 여태까지 요한에게 누를 끼치지 않겠다면서 얼마나 몸을 낮추고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괴롭게 만들 수는 없었다.
[나도 왜 요한이 널 걸고넘어졌는지 모르겠다. 혹시 둘이 크게 다투기라도 한 거야?]
자신의 호기심 해소와 개인적 영달을 위해서 남에게 함부로 해악을 끼치겠다고 당당히 말하는 그녀가 혐오스러웠다.
“현주, 너 아주 오래 살겠다. 내가 욕 많이 할 거거든.”
확 짜증이 치밀어 오른 수현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 * *
줄곧 환기를 해 둔 모양이다. 작업실 안으로 바람이 흘러들어 왔다. 수현은 요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잠시 짬을 내 그에게 들른 것이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그에게로 불어와 머리카락이 살랑, 흩날렸다.
요즘 날씨는 일교차가 컸다. 벌써부터 한낮에는 날이 꽤 더웠다. 불어오는 바람의 온도가 미지근했다. 곧 여름이 오려는 신호였다.
“차는 됐어. 얘기 좀 해.”
직접 커피를 내리고 있던 요한은 수현을 향해 고개만 비죽 내밀었다.
“잠깐이면 돼요.”
그가 흥얼거리는 음정은 에릭 사티의 「르 피카딜리」였다. 경쾌하고 통통 튀는 리듬이 봄과 여름 사이의 맑은 날씨와 무척 조화로웠다. 요정들이 파티를 열고 배경 음악 삼아 춤을 출 것 같은 싱그러운 곡이었다. 다만 요한의 서늘한 이미지와는 불협화음이었다. 수현은 그 부조화가 낯설어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어요?”
“너랑 안 어울린다 싶어서.”
“나라고 매번 우중충한 음악만 치란 법 있나요. 그런데 할 얘기란 게 뭐죠?”
커피는 원두의 질이 워낙 좋은 모양인지 향도 맛도 훌륭했다. 두 사람을 에워싼 공기는 따뜻했고, 흘러드는 바람은 결이 부드러웠다. 한가롭고 평화롭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두 사람이 순수하게 다정했던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할 얘기가 무엇인지에 대해 떠올리자마자 모든 안온한 대기는 무색무취에서 점점 짙은 회색이 되어 가고 말았다.
결국 그는 수현의 인생을 망쳐 버린 가해자였고, 자신은 희망을 잃고 인생이 전부 구겨져 버린 피해자였다. 삽시간에 정신이 들자마자 웃음기는 고스란히 가셨다.
“네가 현주를 들쑤셨지. 날 곤란하게 만들라고 부추겼어.”
“네, 그랬어요.”
그가 이렇듯 잘못을 순순하게 시인할 때마다 할 말이 모두 사라지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저 상황을 인정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반성을 하는 법이었다.
“뭐가 문제죠? 난 늘 형을 곤란하게 만들잖아요.”
“날 기사 상에 노출할 생각인 것 같았어. 나는 좀 불편해도 참을 수 있어. 하지만 부모님까지 공개되는 건 시간문제야. 그렇게 되도록 그냥 둘 순 없어.”
“그냥 두지 않으면 일개 대학교 조교인 우수현 씨가 뭘 할 수 있죠?”
“요한.”
“형은 아무런 힘도 없어요.”
“…….”
“난 이제 아주 센데, 왜 형한테만 약할까.”
순간 짜증이 확 치민 수현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앉아요.”
“오늘은 이만 가 볼게. 시간 됐어.”
“앉아.”
그가 힐끗, 수현이 앉아 있던 의자를 향해 턱짓했다. 잠시 갈등하던 수현이 도로 자리에 앉자, 턱을 괴곤 빤히 이쪽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왜 언제나, 날 이용할 생각은 안 할까요? 난 그쪽에서 손가락만 까딱해도 바로 쓰러질 거예요. 예전이랑 달라요. 이제 난 뭐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손가락을 까딱하는 일은 너무나 위험하다. 자신이 그가 좋아할 만한 어떤 행동을 취했을 때, 그것이 요한에게서 어떤 여파가 되어 돌아올지 미리 알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상황을 가늠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에게 휘말리고, 더 깊이 빨려 들어가게 될 수 있었다.
요한은 블랙홀 같았다. 그의 곁에 있으면 수현은 전신이 모두 끝없는 늪으로 침잠하는 듯한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차가운 진흙에 온몸이 파묻히면 아무리 빠져나가기 위해 아등바등해도 흙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거동이 쉽지 않아진다. 그렇게 몸과 마음 모두가 통제당하고 둔중해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 수현은 늘 그가 무서웠다.
“우수현 씨가 가장 실수한 게 뭔 줄 알아요? 난 무조건 설득당해 줄 만반의 준비가 돼 있었는데, 오히려 조건을 걸어도 된다고 날 가르쳤죠.”
“…….”
“형은 우리 사이에 규칙 같은 걸 만들면 안 됐어요.”
갑작스레 근원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는 바람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명백한 피해자인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너무나 뻔한 가해자의 논리였다.
“그럼 이번에야말로 무조건 부탁을 들어주면 되겠네. 날 지켜 달란 얘기는 안 해. 하지만 우리 부모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 줬으면 좋겠어. 현주를 설득해 줘.”
“좋아요. 내가 건드린 부분도 있으니까 그건 나한테 맡겨요. 착한 일 할 건데, 먼저 키스 안 해 주나요?”
“이건 규칙이 아니지? 네 입으로 무조건이라고 말했잖아.”
“네, 아니에요.”
“그럼 지랄하지 마.”
요한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든 그는 부탁을 쉽게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조금 생각하는 듯한 얼굴을 했다. 현주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정확히는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상황에 대해 요한에게 전달은 했으니 그다음은 그에게 맡기고, 수현도 나름대로 가장 최선의 대응 방법을 찾는 일만이 남았다.
수현이 언제쯤 자리에서 일어나면 될까 상황을 가늠하고 있던 차였다.
“참, 그 소식 알까 모르겠네요. 그 남자, 결선에 올랐어요. 콩쿠르 측에서 본선 영상을 보내 줘서 봤거든요.”
“그 남자라니?”
“선배…… 라고 형을 부르는 남자.”
까맣게 잊고 있었다. 분명히 린으로부터 전해 들은 적이 있는 얘기였는데, 누가 기억을 몰래 지우기라도 한 듯 완전히 머릿속에 없어진 것이다. 아무래도 학교에서 다치기 직전 정신이 희미해져 갈 때 들었던 얘기라 모르는 사이 한 귀로 듣고 흘렸던 모양이었다. 서울 국제 콩쿠르. 재욱이 출전한 대회에 요한이 심사 위원으로 위촉됐다는 얘기였다.
그러고 보니 콩쿠르 결선 경연이 바로 내일이었다. 요사이 재욱과는 거의 연락하지 않았다. 본선까지 무사히 통과한 그는 콩쿠르 결선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수현은 안 그래도 그의 존재가 요한의 기분을 거스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차라리 이렇게 연락하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짜고짜 서로를 위해 더는 자신의 옆에 접근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는 수현의 유일한 친구였다.
“우리 과 애들 중에 세 명이 결선까지 올랐다는 건 학과장님한테 전해 들었어. 그중 하나가 재욱이었나 보네. 잘됐다.”
수현은 최대한 모르고 있던 일인 척, 무감각하게 대답하려 애썼다. 잘됐는지는 모르겠다. 의식할수록 부자연스러워지는 건 인력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요한이 직접 재욱의 이야기를 꺼낸 것에 내심 불안해졌다. 만에 하나 요한이 공정하게 심사하지 않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은 염려가 생겨났다.
수현은 정말로 재욱이 잘됐으면 하고 바랐다. 재욱을 보면 자신이 보였다. 그의 어딘지 절박하고 간절한 연주는 자신의 것과 비슷했다. 특출한 재능 없이 애정 하나로만 일관하는 그 태도마저도 말이다. 그가 좌절하고 꺾이면 마음이 꽤 아플 것 같았다.
“내일이 결선인데 같이 갈래요? 얘기하면 한 자리 정도 마련할 수 있을 거예요.”
“난 됐어.”
“그래요, 그럼.”
“얘기 나온 김에 묻자. 왜 그 제안 수락한 거야? 서울 콩쿠르의 권위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너 정도 위치의 연주자가 하기엔 너무 소박한 일이라고 생각해.”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요한은 빙긋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수현은 더 불안해졌다. 애당초 재욱이 결선까지 오르리라는 것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절륜한 수많은 연주자들이 한국에도 많이 있었다. 재욱은 그중에서 눈에 번쩍 띌 정도로 대단한 연주를 하지는 못했다. 그러니 어쩌면 그를 의식해서 요한이 심사 위원 자리를 허락했다고 생각하는 건 단순히 과잉 해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현의 감이 그 길로 몰아가고 있었다. 만에 하나 결선에 올라간다면 그를 떨어뜨리려는 건 아닐까 하고.
“궁금했어요. 어떤 연주를 하는 사람인지. 혹시 나를 버리면서까지 선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연주를 할까 하고요. 이를테면 탐색전 같은 거죠.”
요컨대 재욱의 연주가 훌륭해 자신의 대체품이 된다면 수현이 미련 없이 떠날 테니까, 어느 정도 되는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꽤나 두렵다는 양 말하고는 있지만 수현의 귀에 이 말은 지나친 겸양으로 들렸다. 과거는 본 적 없고 미래는 볼 수 없어 모르지만 적어도 이번 세기에 요한을 넘어서는 피아니스트는 세계를 통틀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거라면 그냥 학교에서 기회를 엿볼 수도 있었어.”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콩쿠르가 자기 역량을 집대성해서 보여 주는 자리니까요. 그런데 어제 영상 보고 나서 후회했어요.”
이미 지난 일이니 후련해한다면 모를까 그는 결코 과거의 일에 대해 후회나 반성을 하는 유형이 아니다. 그의 정신은 자신의 결정에 대한 믿음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의 선택이 정답이 됐다. 정답이란 존재는 옳고 그름이 아닌 권위로부터 정당성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요한이 보이는 오만한 태도의 근원을 설명해 주었다. 차갑지만 한편으로는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인상이라 사람들은 그의 독선과 아집을 쉽게 상상하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나치게…….”
그는 영상으로 봤던 재욱의 연주를 떠올리는 모양인지 잠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형편없더군요. 귀가 썩는 것 같았어요. 정말 그런 게 좋아요?”
“…….”
“선생님 공연을 같이 보러 갔던 사람이 그 남자라는 거 알아요.”
그가 쉽게 알아내리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수현은 왠지 손이 간지러웠다. 피부 아래의 뼈 위로 작은 벌레들이 달라붙어 있는 듯했다. 살결 위를 만지면 내부를 기어가는 조그만 형체가 우둘투둘하게 만져질 것 같았다.
그는 좀처럼 다른 사람의 연주를 평가하지 않는다. 예의 발라서가 아니다. 관심이 없어서였다. 그래서 그의 입을 통해 타인의 연주에 대한 어떤 감상을 듣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에게 재욱의 연주가 그렇게 형편없어 보였겠구나 생각하니, 수현은 왠지 재욱의 모습 위에 자신의 모습이 겹쳐졌다. 자신이 연주할 때도 요한의 눈과 귀는 썩어 들어 가는 것 같았을까.
“괜히 긴장했어요. 형이 바람피우는 상대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일까 했는데.”
“걔랑은 전혀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래요?”
“입 아프게 하지 마. 그냥 친한 친구야.”
“그렇군. 그럼 잘 보여야겠네요.”
그런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양, 요한은 부드럽게 웃었다.
“약지에 너무 힘을 줘서 치는 버릇이 있던데. 그걸 고치지 않으면 오래 연주할 수 없다고 전해 주세요. 왜, 악력이 세면 오래 글씨를 쓸 수 없잖아요? 연주도 마찬가지예요. 손은 밸런스가 제일 중요하니까요. 심사 위원이지만 이 정도 조언은 괜찮겠죠?”
지난번 연주를 들었을 땐 요한의 버릇을 따라 하는 듯싶었는데 당사자가 별다른 말이 없는 걸 보면 그건 고친 모양이다. 요한의 조언은 재욱이 들으면 무척 반가워할 얘기였다. 본인도 알고는 있을 테지만 이미 든 버릇을 수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럴 때 권위자가 조언을 해 준다면 어떻게든 고치고자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정말 같이 안 갈 거예요?”
요한은 수현이 그 어느 것도, 그 어떤 존재도 변호하거나 대변해 주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관심을 갖는 것도 당연히 싫어했다. 그게 수현이 가장 애틋해하는 부모님이어도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 집념이라면 중증이라고 줄곧 생각했지만, 어쨌든 지금 그를 자극해서 좋을 게 없었다. 그는 최대한 대수롭지 않게 이 화제를 넘기듯 대꾸했다.
“관심 없어.”
“혼자서 심심한데. 괜히 하겠다고 했나 봐요. 아, 김 비서님이 식사를 사 두고 갔어요. 양이 많거든요. 같이 점심 먹고 가요.”
자리에서 일어난 요한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수현은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는 재욱을 떠올렸다. 입상하든 못 하든 콩쿠르에 출전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부러웠다.
언제부턴가 자신은 그 어떤 콩쿠르에도 의식적으로 관심을 안 가지게 됐다. 안 나가는 것과 못 나가는 것은 근원적으로 다른 영역이기 때문에 애초에 관심조차 꺼 버리려 했던 것이다. 적당한 희망은 활력소가 되어 주지만 그것도 일말의 실현 가능성이 있을 때 얘기였다. 영원히 닿지 않을 신 포도는 여우에게 독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내일이 지나면 지난한 시간을 깨고 우승자가 선발된다. 예선이나 본선도 아닌 결선 정도라면 최정예들이 맞붙어 다투기 마련이었다. 그쯤 되면 상운은 참가자들의 당일 컨디션에 따라 달려 있었다. 요한 같은 특별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지금쯤 마음이 무척 불안할 것이다. 수현은 그들의 불안마저 샘이 났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 * *
수현은 저녁 내내 휴대폰만 붙들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콩쿠르 결과에 관한 뉴스를 피드에서 검색해 봤지만 끝이 났다는 속보는 없었다. 아직도 경연은 진행 중인 것 같았다.
난데없는 요한의 등장으로 연주회장의 주변이 소란해지는 바람에 일정이 조금 늦춰졌다는 모양이었다. 철저하게 비공식이었던 일정이라 그를 본 모두가 깜짝 놀란 것 같았다. 기사상으로도 기자들과 청중들의 흥분이 물씬 느껴졌다. 그 때문에 참가자들이 주인공이 되어야 할 콩쿠르는 승요한의 독무대가 되고 말았다. 뉴스상에 경연 내용에 대해선 온데간데없고 경연장 앞 포토 존에 선 요한의 사진 일색인 것이 그 증거였다.
오늘의 그는 단정한 검은 정장 차림이었다. 재킷은 한쪽 팔에 걸치고, 셔츠의 단추는 맨 위의 것만 푼 채였다. 무대 위에서보다 훨씬 편한 꾸밈이었지만 생김새 때문인지 무척 정갈하게 보였다. 늘 그렇듯 서늘한 미형의 얼굴은 웃을 때만큼은 상냥했다. 미소 짓는 사진과 그렇지 않은 사진의 갭이 이만큼 큰 사람도 드물 것이다.
12시가 넘어가자 기사 화면이 한 번 물갈이 됐다. 수현은 다시 뉴스를 검색했다. 이쯤 되면 예정된 시간을 한 시간이나 초과한 상태였다. 우승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지만 운이 좋으면 턱걸이로 입상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그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바랐다.
새로 고침을 하고 있던 수현은 속보를 발견했다. 눈으로 보고도 너무 놀라워 믿을 수가 없었다.
“헉…….”
수현은 육성으로 의문 섞인 호흡을 내뱉었다. 어제, 아니 겨우 몇 분 전 그저께가 된 날의 오후에 요한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군. 그럼 잘 보여야겠네요.>
그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심사 위원직을 수락한 게 아닐까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현의 짐작은 완전히 틀렸다. 복잡한 요한을 너무 단조롭게만 해석한 모양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재욱의 연주는, 국내 유수의 콩쿠르에서 우승할 만한 수준이 전혀 못 됐다. 입상이라면 몰라도 우승은 그림의 떡이었다. 다른 참가자들에게 어마어마한 불운이, 그리고 재욱에게 어마어마한 행운이 깃들면 겨우겨우 턱걸이로 가능한 수준일까.
워낙 남들에 비해 악기를 늦은 나이에 접하기도 했고, 또 한국 대학교 음대에 합격한 것은 실기보다는 고등학교 3년 내내 우수했던 학업 성적의 영향이 컸다고 들었다. 이건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재욱뿐만 아니라 다른 참가자들에게도 기만이었다.
이 영광스러운 무게의 왕관은 재욱에게는 너무 무거울 텐데…….
논란의 여지가 있는 우승자는 끊임없이 수상의 권위를 의심받는다. 게다가 프로 무대는 아마추어의 것과 달랐다. 사람들은 값을 지불하고 그들의 공연을 관람하기 때문에 어설픈 연주로는 날것의 비난으로 집중포화를 받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남들보다 유별나게 뛰어나지 않으면 끝내 도태될 것이었다. 예술이란 세계의 섭리였다.
참가자가 획득한 점수 결과는 철저히 비공개였다. 요한은 재욱에게 대체 몇 점을 줬을까.
어쩌면 회장에 그가 등장할 때부터 이 모든 일은 예견되어 있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요한만이 알고 있었을 뿐이다.
“젠장, 애한테 무슨 짓을…….”
우승자는 재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