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휴일의 오전은 대부분 라디오와 함께 시작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수현의 방 라디오 주파수는 종일 클래식 음악만 틀어 주는 전문 클래식 채널에 고정되어 있었다. 전원만 껐다 켰다 할 뿐 다른 주파수로 옮기는 일이 없었다. 평일의 월차 날에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이 홀로 여유로워서 좋았다. 늦은 아침을 먹고 창가에서 햇볕을 쬐며 약간의 맨손 체조를 하고,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음악을 곁들이면 마음이 평온해졌다.
라디오를 켜자마자 나오고 있는 음악은 슈베르트의 「들장미」였다. 이 곡은 슈베르트가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였다.
[소년이 장미를 보았다. 들판의 장미를.]
[소년은 달려가서 가까이 보았다. 기쁨에 차서 보았다. 붉은 장미, 장미.]
문득 수현은 괴테를 읽고 싶어졌다. 가장 유명한 「파우스트」 정도가 떠올랐다. 괴테는 음악과 가깝다. 특히 클래식과 그렇다. 그의 글과 클래식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수현에게도 친숙했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했다.
그의 방 원목 책장은 책상 옆 벽 전면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 책장엔 아무런 통일성 없이 책들이 꽂혀 있었다. 방은 늘 정리되지 않는 편이었다. 그나마 자주 쓰는 물건들은 어지럽혀져 있더라도 규칙을 찾을 수 있어 금세 발견해 냈지만 책들은 워낙 권수가 많고 정말 되는대로 꽂아 놓는 통에 한 권을 찾으려면 꽤 애를 먹었다. 한번 날을 잡고 정리를 하긴 해야 하는데 엄두가 안 났다.
수현은 원론으로 돌아갔다. 책장의 원리였다.
가장 높거나 낮은 자리는 접근성이 낮으니 자주 보지 않는 책을 끼워 놓는다.
시야에서 가장 가깝고 손이 닿기 쉬운 자리에는 평소 즐겨 읽거나 가장 좋아하는 책들로 채워 둔다.
편리성에 입각한 아주 평범한 규칙이었다. 그도 잘 손이 가지 않는 오래된 책이나 마음에서 먼 책들을 책장 가장 높은 자리에 꽂아 놓곤 했다. 마치 저런 책들 말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저 책의 보금자리는 평균 키를 조금 웃도는 수현이 까치발을 들어야 겨우 닿는 위치였다. 그 덕분인지 한동안 꺼내 본 일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뭘 찾고 있었는지도 잊은 채 아주 오랜만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책에 손이 완전히 닿지 않아 꺼낼 수 없었다.
그는 순간 요한을 떠올렸다. 그보다 키가 큰 요한이 언젠가 등 뒤에서 대신 책을 꺼내 준 적이 있었다. 그때의 긴장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했다. 아마 그때가 처음 그를 성적으로 의식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수현에게 곧 요한이었다. 열네 살 무렵의 그는 요한에게 며칠에 걸쳐 이 책의 전문을 읽어 주었다. 마침내 글을 전부 읽어 주었던 날, 요한은 이렇게 물어 왔다.
<얼마나 사랑하면 베르테르처럼 자살할 수 있어요?>
사랑.
수현은 그때 끝내 사랑 때문에 권총 자살을 선택했던 베르테르의 마음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해 주지 못했다. 그때의 수현은 겨우 중학생이었다. 요한은 더 어렸다. 두 사람 다 괴테의 글 속에 나타난 사랑의 크기를 제대로 이해하기엔 어렸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그 질문은 가슴에 콱 박혀 들었다. 요한도 그랬는지 한동안 너무 읽어 표지가 다 낡은 책을 붙들고 놓을 생각을 못 했다. 그 뒤로 이상할 정도로 두 사람은 그 책에 대해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 순간을 다시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생기지 않아 대청소를 하다가 저 위에 처박아 두었던 기억이 났다. 이처럼 손가락 끝에 책등이 아슬아슬하게 걸리는 이 미묘한 거리가 우리 사이에 있는 건 아닐까.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는 꺼내 볼 수 없는 거리 말이다. 다만 수현은 할 수 없어도, 요한은 꺼낼 수 있었다.
“수현아, 린이 왔어. 나와 봐.”
노크와 동시에 어머니가 문을 열었다. 그제야 수현의 시야 정면에 괴테의 「파우스트」가 띄었다. 그러나 오늘은 책을 읽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들어 도로 집어넣었다. 린이 통화가 아니라 직접 와 대화를 하고자 한다면 소박한 사건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은 아닐 테니까. 사실 요한의 곁에 있는 그녀의 존재가 불편해지기 시작한 이후로 얼굴을 대하기가 조금 껄끄러웠다.
“역시 집에 있었네. 너 왜 전화를 안 받아?”
그녀는 반쯤 열린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과감히 방 안으로 들어오던 린은 난장판인 수현의 방 안을 눈으로 쓱 훑더니 꺄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이게 다 뭐야? 너 아주,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겨 가지고 방 꼬락서니 좀 봐. 쓰레기 매립지니? 나 아주 긴밀한 이야기 해야 되는데 이 난잡한 데서 대화가 되겠어?”
“그러게 남자 방에 함부로 들어오면 어떡해요?”
“남자 방 좋아하시네. 어차피 이 끔찍한 방에선 그 어떤 야한 짓도 못 할 거야.”
그녀는 정말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깨끗한 상태의 요한의 공간만 보다 이곳에 들어오면 식겁할 만도 했다. 게다가 물건들로 가득 차서 가뜩이나 협소한 공간이 훨씬 비좁아 보였다. 수현이 차라리 자신이 나가겠다는 듯 문고리를 잡자 그녀는 도로 그를 밀어 넣었다. 거실에는 듣는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딸칵. 문이 닫히자 단둘뿐이라 불편한 데다 마땅히 앉을 곳이 없어 난감해졌다.
“지금 책상, 의자 위에 악보집이 잔뜩이라 의자가 없는데. 침대에라도 앉으실래요?”
“너 지금 나 꼬시는 거야?”
“전 서 있을게요.”
“아니, 됐어. 난 앉고 넌 세워 놓고, 뭐 벌주는 것도 아닌데 공평하게 서서 얘기해.”
그러고는 수현의 어깨를 밀어 발 디딜 수 있는 공간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내가 요한 하는 짓을 보다 보다 못해서 솔직하게 얘길 하려고 왔어.”
“무슨 얘긴데 굳이 밀폐된 공간에서 해요?”
“요한 귀에 안 들어갔으면 좋겠는 얘기. 난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거든.”
“듣고 있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우리 회사로 와. 널 스카우트하고 싶어.”
요한이 소속되어 있는 클라시스는 독일에서도 가장 유서 깊고, 또 전도유망한 최고의 소속사였다. 클래식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입사를 꿈꿔 보는 곳이기도 했다. 애호가들에게 한정되어 있던 소극적인 마케팅 법칙을 깨부수고 공격적으로 대중을 공략하면서 클래식의 저변을 한층 넓혀 간 시발점도 바로 그 클라시스였다.
한국의 컴퓨터 공학과 출신 졸업생이 아무런 경력도 없이 구글에 채용 제안을 받은 정도라고 하면 좋을까. 요한이 결부되어 있지 않았다면 밤잠을 설칠 만큼 꿈같은 얘기였다.
“너 피아노 계속 치고 싶은데 못 치는 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노를 떠나선 뭘 해야 할지 암담해하는 거, 잘 알고 있어.”
지나치게 파격적인 제안이라 놀라긴 했지만 머릿속은 차갑게 식어 갔다.
“요한 때문이에요?”
“당연하지. 우린 너 같은 애들 필요 없어. 다만 요한이 널 원한다는데 별수 있나.”
“일보단 듣기 좋게 돌려 말해 주는 방법을 먼저 배우는 게 좋겠네요.”
“솔직히 지금의 네가 반반한 얼굴 빼면 시체인 건 맞잖아. 지금의 넌 아무런 매력도 없어. 그뿐이니? 열정도, 미래도 없어. 남자로선 진짜 꽝이지. 그러니까 천금 같은 기회가 왔으면 잡아. 바보처럼 자존심 좀 세우자고 이 기회 놓친들 아무도 안 알아줘.”
“…….”
“아무튼 요한은 시간을 두고 스스로 결정하도록 기다려 주고 싶은 것 같지만 난 급해. 아마추어들 콩쿠르 같은 걸 보러 다니면서 낭비할 시간이 없다고. 세 달이면 많이 참았어. 그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해야 돼. 이건 요한 개인과 인류 모두를 위해서야.”
콩쿠르에서 우승하게 되면 가장 최근의 수상자들과 자연스럽게 비교되는 것이 순리였다. 그러나 이제 그 누구도 요한의 연주를 다른 연주자와 비교하지 않았다. 그가 독보적이기 때문이었다. 더는 연주를 쉬어선 안 된다는 그녀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줄곧 요한의 행보를 묵묵히 지켜봤지만 그녀도 더는 초조해 견딜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요한이 나쁘다고 생각하니? 맞아. 그는 쓰레기야. 그래도 최소한 비겁하진 않아. 그런데 넌 아주 비겁해. 솔직히 말해 봐. 요한이랑 했던 약속을 지킬 생각도 없지만, 그를 독일로 돌려보낼 의지도 없지?”
수현은 할 말을 잃었다.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갔으나 린은 작정하고 찾아온 모양인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도 그랬고 아마 이동준 선생도 그랬을 거고, 요한이 돌아갈 수 있도록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넌 그에게 입도 뻥끗 안 했어. 왜? 여기 있으면 요한이 너만을 위해 연주하니까. 요한이 무섭지만 걔가 하는 연주를 포기하지도 못하는 거잖아. 그래서 싫다, 싫다 하면서도 그가 부르면 달려오는 거고. 내 말에 틀린 부분 있으면 지적해도 돼.”
“…….”
“나도 요한의 연주가 좋아. 전혀 이해 못 하는 건 아냐. 하지만 걘 세상에 너밖에 없는 줄 알고 네 말만 전부 맞는 줄 알아. 그런 네가 애매한 태도를 취하면 당연히 헷갈린다고. 그에겐 뭐든 명확하고 확실하게 알려 줘야 겨우 의사소통이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지 않니?”
난데없이 정곡을 찔려서 심장이 아팠다. 요는 결국 자신이 지금의 요한을 만들었다는 얘기였다. 그녀는 틀린 부분이 있으면 짚고 넘어가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구구절절 잘못된 부분은 없었다. 오히려 수현이 애써 눈 가리고 아웅 하고 있던 사실들을 깨우쳐 주었다.
그를 따라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면 돌려보내야 했는데, 그러지 않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이동준이나 린의 부탁마저 흘려들었던 것은 자신이었다. 그가 한국에 있으면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그의 연주를 보고 들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면서 끊임없이 그가 싫다고 말했으니 요한이 헷갈리는 것이 당연했다. 자신도 적당히 타협하고 있는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누구의 이해를 바랄 것인가.
“그래서 제안하는 거야. 네가 결정하는 게 어렵다면 우리가 도와줄게. 클라시스로 와. 요한은 널 데려갈 수 있어서 좋고, 넌 요한의 연주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아. 게다가 넌 명분도 경력도 챙기는 일석 삼조잖아? 이게 최선이야. 거절할 거라면 이제 그만 요한을 돌려줘.”
“…….”
“깨끗하게 차 달라고. 영원히.”
린의 손가락이 수현의 어깨를 도미노 쓰러뜨리듯 가볍게 툭 밀었다.
“함부로 손대지 마세요.”
“왜? 네 몸엔 금이라도 발렸니?”
“난 린이 진짜 싫어요.”
“마찬가지야. 솔직히 우리한테 공통점은 영영 없을 줄 알았는데, 겨우 한 가지는 통하는구나. 영어는 좀 하지?”
“유창하진 않아요.”
“그럼 독어만 배우면 되겠네. 사람 여럿 붙여서 종일 특정 언어만 쓰게 하면 회화는 금방 늘어. 나머진 A부터 Z까지 전부 네가 원하는 대로 맞춰 줄게. 일하고 싶은 분야, 편한 시간, 연봉에 성과급까지 전부.”
“클라시스가 그렇게 하겠대요?”
“이런 멍청한 질문을 듣게 될 줄은 몰랐어. 설마 아직도 요한의 가치를 잘 모르는 건 아니겠지? 수학은 좀 하니? 그는 매년 몸값이 몇 배수로 뛰고 있어.”
하긴 요한이 클라시스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은 비단 돈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그는 21세기 클래식계의 역사를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주류였다. 그가 원한다면 그 큰 회사에서 자신 한 사람을 고용하는 정도야 큰일도 아닐 것이다.
“물론 네가 맡을 아티스트는 무조건 요한이야. 아마 내 바로 밑으로 들어와 일을 배우게 될 거야. 시간이 지나면 네가 그를 전담하는 날도 오게 되겠지.”
“아직 하겠다고 안 했어요.”
“왜 고민해? 정말 엄청난 제안인 거 알지? 이런 건 오래 고민하면 안 돼. 물 들어왔을 때 노를 저어.”
수현은 망설였다. 말로는 채근하는 그녀도 실제로 당장 대답하길 기대하진 않았던 것인지 더 닦달하지는 않았다. 부드럽게 그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물가를 뛰어넘듯 어지러운 바닥을 콩콩 뛰어 밖으로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함부로 만지지 말라니까. 막무가내인 점은 요한과 비슷했다.
바깥에서 문을 닫기 전 린은 수현을 돌아봤다. 미처 하지 못한 말을 끝맺으려는 것 같았다.
“혹시 널 더 다치게 할까 봐 걱정되는 거라면 그건 염려 마. 네 손 그렇게 만들고 나서…… 자길 이렇게 오래 거부하리라곤 생각 못 한 것 같았어. 태도를 고치기로 결심했다고. 그냥 데려가면 될 걸 한국에 와서 이 촌극을 찍고 있는 거 보면 모르겠어?”
“린은 요한에 대해서 정말 많이 알고 있네요.”
“그거야 우린 대화를 많이 하니까. 그리고 바로 네 이런 점이 문제라고. 질투하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글쎄. 요한도 그렇게 생각할까? 아무튼 걔가 히틀러가 돼서 세계 3차 대전을 일으켜도 너만큼은 안 죽일 거야. 차라리 박제를 하면 몰라도.”
농담인 걸 알지만 농담으로 안 들렸다. 수현이 대답하지 않자, 린도 짧게 인사하더니 그대로 문을 닫아 버렸다. 혼자 남겨진 그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지러운 방 안을 둘러보다가, 그대로 드러누웠다.
이곳. 가족이 있는 한국은 수현에게 세상의 끝이었다. 여기로부터 더 도망칠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는데 그곳에서 자신을 향해 친절히 손 내밀고 있는 적을 만난 것이다.
잡느냐, 마느냐.
“무슨 햄릿도 아니고…….”
요한.
신은 내가 도대체 얼마나 미웠기에 그를 만나게 했던 걸까.
* * *
교문과 음악관 앞에 커다란 현수막이 하나씩 붙었다. 피아노과가 배출한 서울 국제 콩쿠르의 우승자를 축하해 주기 위해서였다. 피아노과 교수들은 난데없는 행운에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제자에게서 나온 쾌거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한편 요즘 재욱은 만신창이였다. 당일에는 승요한까지 참석한 심사 위원들의 권위에 억눌려 그럭저럭 반응이 호의적이었으나 전문가들은 점점 그의 수상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특히 며칠 전 갈라 콘서트가 있은 뒤로 그의 연주 능력에 대해 물음표를 붙이는 애호가들이 많아졌다. 함께 결선에서 겨룬 다른 출전자들도 하나둘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의 연주는 우승할 만한 실력이 전혀 못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따로 연습이라도 하고 있는 건지 그는 요즘 수업에 거의 참여를 못 하고 있었다. 결선 이전에도 한동안 나오지 못했고, 이후에도 쭉 결석이 이어지고 있어서 그 시간이 벌써 근 한 달은 됐을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수현이 그를 못 본 것도 그쯤 됐다는 얘기였다.
“우리 정확히 28일 만에 본 거예요.”
정확한 날짜로는 28일이 맞는 모양이다.
“28일이고 29일이고 여기까지 찾아오면 어떡해.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어?”
“현주 선배한테 물어봤어요.”
“현주? 계현주?”
“네, 콩쿠르 우승한 다음 날 연락이 왔더라고요. 선배랑 친하다면서요.”
아주 발을 안 뻗치는 곳이 없군. 기가 막힌 수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선배 진짜, 이러기예요? 바뀐 휴대폰 번호를 모르니까 연락할 수가 없어서 현주 선배 도움 좀 받은 거예요. 너무 박대하시는 거 아닌가요. 축하한단 문자 한 통도 없고!”
그건 차마 축하해 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우승은 물론 기쁜 일이지만 그 과정이 석연치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재욱이 여기저기에서 두드려 맞게 된 데에 자신이 일조한 게 아닐까 영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다.
“축하해. 당일에 뉴스 검색해서 봤었어.”
“와, 진짜요? 엎드려 받는 절도, 의외로 기분이 괜찮군요.”
재욱은 씨익 웃었다.
“그럼 난 들어가 볼게. 너도 이만 돌아가.”
아무리 유일한 친구라 한들 아무런 약속도 없이 기습 방문한 재욱을 환대할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은 지금 요한에 관한 생각으로 머리가 터져 나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수현이 그를 두고 집으로 들어가려던 차였다.
“진짜 그냥 가실 거예요? 그냥 얘기나 좀 하고 싶어서 왔어요. 대화할 사람이 없거든요.”
“번지수 잘못 찾았어. 너 친구 많잖아. 걔들 불러서 얘기해.”
“마음을 털어놓는 친구는 얼마 안 돼요. 번호 알려 달라고 안 조를 테니까 그냥 돌려보내지만 말아 주세요, 네?”
목소리가 너무 애틋해서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얼굴을 살펴보니 평소보다 핼쑥한 게 마음고생을 한 것 같았다. 수현은 마음이 착잡해 한숨이 절로 샜다. 이 바닥은 워낙 좁고 밀도가 높았다. 규모가 작기 때문에 한두 다리만 건너면 서로서로 알았다.
그런 판에서 여기저기 두들겨 맞고 있으니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뒤통수 맞고 혼자 망망대해에서 나룻배에 탄 채로 상어 떼를 기다리고 있는 심정일 것이다. 가뜩이나 부모님과 거의 의절하다시피 나와 살고 있어서 의지할 곳도 없을 텐데.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결국 두 사람은 집 앞 화단에 있는 낮은 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좀 괜찮은 거야?”
“선배, 그날요, 아주 완벽하게 연주했던 출전자가 있었어요. 모두 그 사람이 우승할 거라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은메달을 주는 거예요. 그래서 다들, 아, 그럼 금메달은 공석인가 보다. 심사 위원들은 그런 있어 보이는 짓을 좋아하니까요. 그런데 저였어요. 모두가 잘못 호명된 줄 알았죠. 저조차도 못 믿었거든요.”
“…….”
“아주 찰나간 행복했어요. 그다음 날부터 지옥이네요. 역시 제 자리가 아니어서일까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수현은 무슨 위로를 해 주어야 할지 몰랐다. 그가 지금 겪고 있는 크리스마스의 악몽 같은 일들이 사실은 자신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선뜻 그런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 요한과의 관계를 설명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고, 솔직하게 밝힌 뒤 재욱과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겁이 났다. 린이 자신에게 비겁하다며 퍼붓던 비난은 전부 맞는 말이었다.
“참! 저 경연장에서 승요한을 봤어요. 이벤트성 심사 위원이었대요. 그러고 보니 그때 병원에선 경황이 없어서 자세히 못 물어봤네요. 그동안 왜 얘기 안 했어요?”
“뭘?”
“승요한요. 단축 번호 1번일 정도로 친하시면서, 왜 한 번도 말씀 안 하셨냐고요.”
“내가 왜 사생활을 너한테 보고해야 하는데?”
방어 기제로 반응이 뾰족하게 튀어 나갔다. 다행인 것은 재욱이 특별히 의아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그도 왜 수현이 자신에게 사생활을 보고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해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냥 우린 친한 친구니까, 하고 대답하면 될 텐데 그건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선밴 참. 끼어들 만하면 가로막고, 가까워졌다 생각하면 멀어져 있고. 좀처럼 틈을 안 줘요. 저 무슨 바이러스 같은 거 아니거든요.”
재욱은 투덜거렸다. 수현은 픽 웃었다.
“한가하게 나 찾아올 시간 있으면 가서 연습이나 해.”
“연습하면 나아질까요? 평생 죽어라 쳐도 전 승요한처럼 칠 순 없겠죠?”
“피아노 치기 시작한 거 후회돼?”
“아뇨. 전 승요한이 아니라 그날의 반짝반짝하던 선배처럼 되고 싶어요. 그 마음은 여전해요. 다만 지금은 좀 벅차네요. 태어나서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욕은 처음 먹어 봐서요. ‘걔처럼 잘 쳤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그런 생각 잠깐 했어요.”
한꺼번에 많은 욕은커녕 그는 살면서 비난 자체를 많이 들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재욱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싫어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분명히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숙제였다. 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뒤통수를 어루만지려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또각또각. 얇은 구두 굽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 골목 끝에는 수현의 집 한 채뿐이었다. 아무래도 어머니가 귀가하시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일어나. 우리 엄마 오시나 보다.”
“어디요? 아무도 안 보이는데.”
“여자 구두 굽 소리가 들려.”
“어, 저 그럼 인사드리고 바로 갈게요.”
“아니, 잠깐만.”
귀가 좋은 수현은 단박에 알아챘다. 그녀 혼자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정갈한 발소리가 함께였다. 아버지일 것이라고 속 편히 생각하다가 그게 아니라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고2 담임을 맡고 있는 아버진 어제 아침 아이들과 수학여행을 떠났다. 수현은 두려움 섞인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와 함께 걸어오는 훤칠한 남자는…….
편안한 차림의 요한이었다.
“어떻게 둘이 같이 와?”
“요한이가 엄마 장 보는 거 도와줬지. 꽃집에서 픽업하고 집까지 데려다주고 그랬다? 요 앞에 차 세우고 같이 산책도 했어.”
그녀는 무척 신이 나 있었다.
“요한아, 저녁 먹고 갈 거지? 엄마 소고기 사 왔으니까 전골 해 먹자. 너무 말랐어. 그런데 수현이 옆엔 누구……?”
“아, 아무도 아니야.”
황급히 변명하듯 대답하고는 곁에 재욱이 있다는 걸 깨달아 아차 했다. 같은 과 후배 정도로 대답했어도 될 일이었다. 가뜩이나 요즘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않을 텐데 못 할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빨리 알아서 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가 동경해서 진로까지 바꾸게 만들었던 자신이 사실은 이렇게 형편없는 인간이라는 걸, 이쯤이면 그도 속속들이 깨달았을 것이다.
“어머님, 안녕하세요. 수현 선배 같은 과 후배예요. 심재욱입니다.”
재욱이 예의 바르게 인사하자 어머니가 수줍게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수현은 곤란한 듯 두 사람의 첫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 모든 순간을 요한이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어머니와 인사를 나눈 재욱이 요한에게도 인사를 건네자 그가 가볍게 눈인사로 화답했다.
“얘는 후배한테 아무도 아닌 게 뭐야? 학생, 같이 저녁 먹고 가요.”
“아뇨, 전 이제 가 봐야 해서요. 세 분 오붓하게 드세요.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급하게 떠나가면서 재욱이 ‘전화할게요’ 하는 듯이 귓가에 손으로 통화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 새로운 연락처를 모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수현을 쫓아가려 했다. 그때 이미 수현은 돌아선 뒤였다.
수현과 어머니를 뒤따라 계단을 오르던 요한이 문득 재욱을 뒤돌아봤다.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재욱은 요한의 눈빛에서 묘한 기색을 느꼈다. 예의 그 미소 띤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데, 왠지 조롱하는 듯 느껴졌다.
요한이 먼저 고개를 까딱하고 돌아섰다. 퍽 다정해 보이는 세 사람은 현관 안으로 금세 사라져 버렸다. 골목에 남겨진 재욱은 아담한 집을 올려다봤다. 마지막에 마주친 요한의 눈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상하게 간담이 서늘했다.
* * *
요한은 운전 매너가 좋았다. 누구나 주행 중 인상을 썼을 만한 거친 상황에서도 그는 늘 초연했다. 옆 차가 깜빡이도 켜지 않은 채 급히 앞으로 끼어들어도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핸들 위에 올려 둔 손을 까딱까딱하면서 기다렸다. 그의 신사적인 운전 매너는 까다롭기로 소문 난 독일에서 먼저 면허를 취득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탑승한 요한의 세단은 승차감도 훌륭했다. 특별히 불편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수현의 마음은 아까부터 지옥이었다.
굳이 돌아가는 요한을 따라 나온 것은 아까 전 재욱과 집 앞에서 마주쳤던 일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며칠 전 린이 했던 제안이나, 지금 재욱이 겪고 있는 나쁜 상황에 대해서도 가능하다면 대화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운전대를 잡고 있는 요한은 오늘따라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괴로운 이유 중 하나는, 늘 그가 자신을 죄인처럼 만들기 때문이었다. 잘못한 것은 요한인데도 늘 수현은 그의 비위를 제대로 맞춰 주지 못한 데에 죄책감을 느꼈다. 이렇게 안절부절못하고 그를 따라나선 자신만 봐도 답은 나와 있었다.
수현은 가까스로 입을 뗐다. 지금 가고 있는 길은 익숙한 길이 아니었다.
“어딜 가는 거야? 여긴 네 작업실 가는 길이 아니잖아.”
그는 그제야 도로 위의 표지판을 힐끗 보는 것이었다. 여태 목적지도 없이 주행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는 동문서답을 했다.
“얼마나 자주 통화해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얘길 해.”
“아까 그 사람이 이렇게.”
요한은 핸들을 붙잡고 있던 왼손으로 수화기를 만들어 통화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화들짝 놀란 수현이 그의 손을 빼앗듯이 붙잡아 운전대 위로 다시 올렸다.
“제정신이야? 운전대를 놓으면 어떡해!”
수현은 뒤늦게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녁 식사를 할 때도 어머니의 말에 착실하게 대답하며 평소와 같은 태도를 취하기에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한 상태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틀렸다.
“우선 차 돌려. 저기서 유턴하면 되겠네. 작업실로 가자. 가서 다시 얘기해.”
별 대답이 없는 요한은 잠자코 수현의 요구에 따랐다. 시키는 대로 정확히 자신이 가리킨 자리에서 차를 돌리기에, 한시름 놓은 수현은 천천히 창밖을 내다봤다. 밤의 도로는 어두웠다. 수십 개의 가로등이 그 위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저것들이 아니었다면 지금 수현은 요한과 함께 어두컴컴한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빛.
요한은 빛보단 어둠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와 함께 있을 땐 저 밝음이 꼭 필요했다.
창밖만 응시하고 있는 수현은 머리가 무척 복잡했다. 좀처럼 요한에게 자신이 필요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요한의 빈틈을 메워 줄 수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수현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은 요한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 못 됐다. 과거의 자신은 누군가의 말에 의하면 반짝반짝하던 사람이었으니 그의 어둠에서 파생된 그림자까지 감싸 안아 줄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한껏 우중충해져 그 어두운 그림자에 편입되기 직전이었다.
오히려 과거의 자신이 정말 그토록 빛나긴 했었나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그때가 이제는 너무나 희미하고 아득할 지경이었다.
마이너스와 마이너스를 곱해 우리가 플러스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라면 요한의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마이너스와 마이너스를 더하면 더 큰 마이너스가 될 뿐이었다. 며칠 전의 린이 증명해 주었지 않은가.
<지금의 넌 아무런 매력도 없어.>
솔직히 그녀의 말에 수현은 동의했다. 주제 파악을 아주 잘하고 있다는 것만이 지금 그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요한! 젠장, 앞에 사람이 있잖아! 브레이크! 브레이크 밟아! 빨리!”
끼익!
귀가 따가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소리였다. 이 정도 소음이라면 아스팔트 위에 스키드 마크가 아주 깊게 패었을 것이었다. 수현은 다급히 다친 사람이 없는지부터 살폈다. 도로의 갓길에 웬 젊은 남자가 넘어져 있었다. 차의 보닛과 남자가 쓰러진 거리가 1미터가 채 되지 않을 만큼 가까웠다. 까딱하면 인명 피해가 일어났을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남자는 어디 부딪치거나 한 게 아니라 속도를 내 다가오는 요한의 차 때문에 놀라 나자빠진 듯 보였다. 조수석의 수현은 사고가 난 게 아니란 걸 확인하곤 가슴을 쓸어내렸다. 순간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처럼 철렁했다. 방금 전 자신이 무심코 앞을 보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눈앞이 다 아찔했다.
“너 진짜 미쳤어?”
수현은 버럭 소리치며 천천히 옆자리의 요한을 쳐다보았다. 그가 너무나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쓰러진 남자를 보고 있어서 심장이 따끔거렸다.
“내가 왜 웬만해선 운전을 안 하는 줄 알아요?”
“왜 또 뜬금없는 소리 해? 사람 칠 뻔했어. 나가서 사과부터 해.”
“왜 운전할 때 입 닥치고 착하게 구는 줄 아냐고.”
“요한! 내 말 안 들려?”
“열받으면 치고 싶어져. 형, 난 화가 나면 그대로 박아 버리고 싶어요. 그런데, 그러면 안 되는 거라면서요.”
하, 수현은 한숨을 토해 냈다. 사고로 사람이 다치면 안 된다는 것 정도의 도덕은 아직 머릿속에 잡혀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그런 도덕 책 서두에 나오는 기본적인 것들도 어릴 때 자신이 가르쳤다. 그는 잊지 않고 있던 모양이다.
“난 이렇게 말을 잘 듣는데.”
“…….”
“형 말만 듣잖아요.”
그는 수현의 손목을 붙잡았다. 서늘한 기운이 피부 위에 닿자 살결 위가 파르르 떨렸다.
“너 지금 제정신이 아니구나. 나가서 사과부터 하라니까?”
신사적인 운전 매너를 지녔단 생각은 모두 취소다. 수현은 모든 걸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그에게 기가 질렸다. 조금도 고맙거나 감동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끔찍했다. 그러다 만에 하나 사람을 다치게 했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너 때문이었다고 자신을 탓했을 테니까.
넘어진 남자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나려고 시도했다. 다리가 풀린 모양인지 성공하지 못하고 도로 주저앉았다. 짐작건대 아마 그는 차 안 운전자에게 화를 낸다는 기본적인 대응도 떠올리지 못할 만큼 놀란 것 같았다.
주변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차도 없는 조용한 도로라는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 그의 피아노에 누라도 될까 이런 생각부터 하고 있는 자신이 끔찍해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네가 안 하면, 나라도 나가서 사과할게. 이거 놔!”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휙, 손목이 요한에게로 딸려 갔다. 반쯤 상체가 운전석으로 건너간 수현은 무척 차가운 요한의 시선 때문에 등골이 서늘했다.
“난 다 참고 견디는데, 왜 넌 한 가지도 양보를 안 하지?”
“뭐?”
참고 견딘다는 말과 요한은 한여름과 함박눈처럼 안 어울렸다. 수현은 기가 막혔다.
“불쌍해하는 척이라도 하라고? 불쌍해! 가슴 아파하고 있어. 그러니까 네가 잠든 날 보면서 구역질하는 것도, 목 졸라 죽이고 싶어 하는 것도 다 견디잖아. 그런데도 정작 넌 날 전혀 믿질 않아.”
“…….”
“난 이번에도 참을 거야. 널 위해서.”
“…….”
“다신 내 눈에 그 새끼랑 단둘이 있는 꼴 보이지 마. 그땐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으니까.”
낮게 경고하던 요한은 덜덜 떨고 있는 수현을 보곤 미간을 구겼다. 그는 핸들 위로 손가락을 툭, 내려치더니 편안하게 카 시트에 기대앉았다.
“그냥 있어요. 내가 나갔다 올게요.”
그러고는 질겁해서 덜덜 떨고 있는 수현을 내버려 두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넘어져 있는 피해자에게 정중히 사과한 뒤 남자를 일으켜 세우고, 약간의 대화를 했다. 아마 상황을 수습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상대는 요한을 알아보고 호의적인 눈빛으로 변했다. 수현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아연해졌다. 지금 시트 위에 앉아 있지 않았다면 수현 또한 다리가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그의 경고는 힘이 셌다. 늘 그랬다. 딱 한 번 저렇게 화를 냈던 적이 있었는데 그건 수현이 맨 처음 약속을 어겼을 때였다. 그러고 나선 이 모양 이 꼴이었다. 수현은 차갑게 식은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쥐었다.
한 번만 더 그런 꼴을 보게 하면.
이번에 넌, 어떻게 할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