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5/34)

14.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그것을 알 수 있는 크고 작은 징후들이 있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빈번해진 날벌레들의 왈츠와 높은 습도 따위, 그리고 장마였다. 땀이 비 오듯이 흐르고, 살결이 타들어 가며, 금세 목이 마르는 계절이기도 했다.

피아노는 좀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다른 예민한 악기들은 관리도 유의해야 했다. 하늘이 맑다는 것을 제외하면 여름이란 계절은 불편한 것이 많았다. 그래도 수현은 겨울보단 여름이 좋았다. 스무 살이 되던 해의 겨울이 그에게 너무나 혹독했던 탓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방학이었다. 여름휴가가 있고, 근무도 학기 중보다 훨씬 단축하기 때문에 시간을 알차게 유용하기가 좋았다. 이맘때가 되면 종강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는 점은 조교가 된 지금도 학생 때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6월이 되자 학생들은 기말고사 준비로 바빴다. 한 학기를 거의 마무리해 가고 있었으나 여름이 가까워질수록 학교에서 요한을 보기란 요원했다. 그는 습도를 불편해하고, 더위를 탔다. 태양광이 대지에 쏟아지는 낮도, 대지 열을 식히느라 푹푹 찌는 밤도 싫어했다. 특히 열대야를 기피했는데, 밤이 되면 으레 기대하게 되는 선선한 바람이 전혀 없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여름이 되면 거의 시원한 곳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있었다. 그 습관은 여전한 모양인지 그의 비서인 은희 씨가 연락을 취해 왔다.

<작업실에 틀어박혀서 나올 기미가 안 보여요. 아마 며칠째 아무것도 안 드셨을 거예요.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데 전 작업실 출입이 불가능해서요. 린에게 말했더니 수현 씨한테 부탁하라고 하시네요. 한번 가 봐 주실 수 있나요?>

마음이 내키지 않아 수현은 거절했다. 그러나 하필 전화 통화를 하던 그의 곁에 어머니가 서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통화 내용을 엿듣던 그녀는 도끼눈을 뜨고 수현을 나무랐다. 어머니의 일장 연설이 시작될 기미가 보였다.

<과일이랑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들 좀 싸 줄 테니까 얼른 다녀와.>

<그냥 둬요. 배고프면 챙겨 먹겠지.>

<넌 최소한의 인정머리도 없어? 엄마가 자식 교육을 잘못한 거지? 그렇지?>

<그렇게 걱정되면 엄마가 다녀오든지.>

<거긴 너만 들어갈 수 있다면서! 요한이 누가 안 챙겨 주면 입에 물도 안 대는 거 몰라? 너 빨리 못 일어나?>

물론 그가 잠금을 풀어 줘야 가능한 일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린도 출입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여름에 입 아프게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수현은 마지못해 일어섰다. 오늘 얼굴을 보게 된다면 집 앞에서 재욱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였던 날 이후로 꼬박 열흘 만인 셈이었다. 그날 수현은 요한이 고스란히 집까지 도로 모셔다 준 덕분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런데도 차에서 내린 그는 식은땀으로 목덜미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 뒤로 서로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렀다. 수현이 그와 잠시 거리를 둔 것은 응당 일어날 만한 일이었다. 그날의 요한은 그야말로 폭주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는 두려웠다. 또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이번엔 정말이지 두 발로 일어서지 못할지도 모른다.

의아한 것은 요한도 수현에게 그랬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필요하단 연락 한 번이 없었다. 수현을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제어하려는 배려였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양치기 소년에게 줄 수 있는 기회는 모두 소진됐다. 수현은 이제 요한이 어떤 선의를 베풀어도 선뜻 믿지 못할 것이었다.

벌써부터 낮이 길었다. 가는 길에 수현은 패밀리 사이즈 아이스크림 한 통을 샀다. 여름이 되면 가뜩이나 식사하길 귀찮아하는 요한은 입이 더 짧아졌다. 심한 날엔 차가운 얼음물 정도나 겨우 마셨다. 그가 아직도 7년 전과 같다면, 오늘같이 후덥지근한 날엔 따뜻한 밥보다 차가운 음식을 더 원하리란 데 생각이 미쳤다.

초인종을 누를까 마스터키로 직접 열고 들어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수현은 결국 직접 열고 들어가기를 선택했다. 요한이 차가운 에어컨 바람을 맞으면서 피아노 주변에 축 늘어져 있는 그림이 저절로 그려졌다.

그리고 작업실 안으로 천천히 발을 들여 가던 수현은 조금 놀랐다. 의외로 그는 드러누워 있지 않았다. 연주하고 있었다.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C단조」였다.

이 곡은 슈베르트가 죽기 전 작곡했던 세 곡의 피아노 소나타 중 한 곡으로 그의 마지막 금자탑이자 역작으로도 평가되는 곡이었다. 사후에 발표되어 유작이기도 했다.

평론가들은 입을 모아 요한이 연주하는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의 정수로, 뛰어난 기교적 솜씨가 요구되는 D장조 D850을 꼽는다. 그러나 수현의 생각에 베토벤적인 C단조야말로 요한과 한 몸인 듯 잘 어울렸다.

실내 공기는 무척 차가웠다. 다만 연주하는 요한의 이마에는 땀이 흘렀다. 턱 끝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마저 아름다울 정도로 그는 집중하고 있었다. 그가 열정을 쏟으면 그만큼 걸출한 선율의 향연이 펼쳐졌다. 그는 뭐든 손만 대면 뚝딱 해치워 버린다. 천재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수현은 늘 궁금했다.

커다란 손이 호수 위를 비추는 빛처럼 건반 위에서 반짝거렸다.

연주가 끝나고 그는 건반 위에 달이 스러지듯 무너져 내렸다. 두 사람의 주변이 한참이나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요한.”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지 않는 걸 보면 이미 수현이 와 있다는 걸 알고 있던 모양이다. 요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깊어진 눈동자가 평소보다 훨씬 어두웠다. 땀 흘린 만큼 그의 기분은 축축하게 젖어 있는 듯했다. 연주는 완벽했으나 역시나 여름을 타는 그의 컨디션은 난조였다. 그게 눈에 보여서 괜스레 수현은 말을 돌렸다.

“슈베르트를 좋아하는지 몰랐어.”

“안 좋아해요. 여긴 어쩐 일이에요?”

“뭘 좀 먹긴 하는 거야?”

“아, 린 부탁으로 왔군요. 그런 거라면 괜찮으니까 돌아가요.”

“그 여자가 부탁한 거였으면 안 왔어. 엄마가 닦달해서 온 거지. 네가 쫓아내지 않아도 뭘 입에 넣는 걸 보면 바로 갈 거야.”

표정을 굳히고 있던 요한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수현이 여태까지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아이스크림 통을 흔들어 보이자, 그는 천천히 자기 옆자리를 툭툭 쳤다. 수현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다행히 열흘 전의 광기마저 느껴지던 요한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만일 남아 있대도 감출 수 있을 만큼 많이 진정된 모양이었다.

피아노 위에 아이스크림을 올려놓고 먹으면 분명 흘리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수현이 비싼 피아노의 건강을 염려하며 망설이고 있자, 요한이 뚜껑을 열었다. 그러고는 미동이 없었다.

‘먹여 달라는 의미인가?’

수현이 어떤 도구를 써서 그의 입에 이 아이스크림을 넣어야 할지 갈등하던 차였다. 요한이 수현의 손가락을 들어 아이스크림에 쿡 찔러 넣었다. 그러고는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흥건한 손가락을 빨았다.

요한의 입 속에 자신의 검지를 맡기고 서 있던 수현은, 손이 자유로워지자마자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날과 비슷한 강압적인 태도를 보일까 봐 엄청 긴장하고 왔는데, 예전과 똑같았다. 기운이 쭉 빠졌다.

“넌 단순해서 좋겠다.”

“화해하고 싶어요.”

“섹스가 하고 싶은 거겠지. 그리고 화해가 아니야. 내가 일방적으로 화를 내고 또 혼자 풀어야 하는 더러운 상황이라고.”

“그럼 그렇게 해 줘요. 공짜로 해 달라는 거 아니에요. 형이 구미가 당길 만한 제안을 할게요. 알프레트 브렌델이라고, 들어 본 적 있어요?”

“물론 들어 봤어. 음악계 거장이잖아.”

들어 본 정도가 아니라 그의 실황 앨범을 몇 장 소장하고 있기도 했다. 요한의 것만큼은 아니지만 그의 과감한 피아노 연주도 꽤 좋아하고 있었다.

“하이네만하고도 꽤 교류가 있나 봐요. 이번에 러시아에 갔을 때 잠깐 같이 봤거든요. 그 사람이 이번 슈베르티아데에 날 초대했어요.”

슈베르티아데는 가곡의 왕인 슈베르트의 생전, 그의 친구들이 함께 모여 그의 곡을 연주하던 동아리 모임의 이름이다. 해마다 여름이면 오스트리아의 보덴 호수 주변 알프스 산자락에서 슈베르트를 기리는 작은 음악제가 열리는데, 바로 그 음악제의 이름도 슈베르티아데였다.

수현도 어떤 분위기의 음악회인지 귀동냥으로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알음알음 초대된 소규모의 인원이 2박 3일 동안 산속 소담한 건물 안에서 밤과 낮마다 연주하고, 또 그것을 감상한다는 것이다. 규모가 작기 때문에 웅장함과 화려함은 부족하지만 보덴 호수의 은은한 물결이 시야를 즐겁게 하고, 귓가로 울려 퍼지는 슈베르트의 피아노곡들이 귀를 황홀하게 만들어 준다며 많은 이들이 초대받고 싶어 했다.

“오스트리아에 가는 거야?”

그래서 슈베르트를 연주하고 있었구나. 어쩐지 즐겨 치지 않는 슈베르트에 심취해 있다 싶었다. 브렌델이 직접 요청했다면 그는 그저 청중으로만 초청받은 게 아니었다. 연주를 해야 했다. 2박 3일 동안 그곳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이 아름답고 아결한 연주를 듣게 되겠지. 요한이 연주하는 동안엔 보덴 호수의 고즈넉한 풍경까지 의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는 눈과 귀를 모두 만족시키는 드문 연주자였으니까.

“같이 갈래요? 학교엔 내가 말해 줄게요. 간 김에 여기저기 동유럽 국가들을 둘러보고 와도 좋겠죠. 체코나 폴란드, 시간이 허락하면 독일까지……. 아, 폴란드는 우리 같이 갔었죠.”

폴란드는 쇼팽 콩쿠르가 열렸던 곳이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개최되는 벨기에도,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러시아도 이동준의 주도로 요한과 함께 갔었다. 요한이 아니고서야 수현은 한국 땅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모차르트를 가장 좋아하지만 그의 나라인 오스트리아에도 가 본 적이 없었으니, 악성들 그 자체인 유럽 각 지역들이 아직 수현에게 미개척지였다.

이번에 동행한다면 헝가리에서는 리스트를, 오스트리아에서는 모차르트를, 체코에서는 드보르자크를 만나 요한의 연주로 들어 볼 기회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슈베르티아데까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만약 이 제안을 수락한다면, 이건 단둘이 하는 첫 여행이 된다. 그 시간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숙소를 따로 쓴다면 갈게.”

요한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곤란해요. 내 연주는 물론이고 브렌델의 슈베르트도 아주 가까이에서 직접 들어 볼 수 있어요. 브렌델은 노장이죠. 앞으로 이런 기회 없을지도 모른다고요. 진짜 같이 안 갈 거예요?”

“…….”

“그럼 좀 더 고민해 보고 대답해요.”

원형 컵 주변에 드라이아이스를 잔뜩 깔아 뒀는데도 이미 아이스크림의 윗부분은 흥건하게 녹고 있었다. 요한은 불평 한 마디 없이 그 질척해진 크림을 스푼으로 떴다. 그리고 수현의 입에 물렸다. 조그만 숟가락을 입에 문 채로 수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가 먹으라고 사 온 것을 자신에게 먹이는지 의아해서였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조금 웃는 것이었다.

“입에 뭐 물고 있을 때 제일 섹시하더라.”

수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는 요한이 뭘 말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아서 미간을 찌푸렸다. 요한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수현의 입에서 스푼을 빼내고는 붉게 달아오른 양 뺨을 꽉 붙들었다.

“어머니껜…….”

“…….”

“아이스크림 잘 먹었다고 전해요.”

그는 수현의 입 속에 자신의 혀를 밀어 넣었다.

* * *

딸이 없는 어머니에게 수현은 아들이자 딸이었다. 아들에게 으레 기대하는 일들과 딸에게 기대하는 일들 일체를 그가 하는 편이었다. 불만은 없었다. 지금까지 수현을 키우면서 부모님이 감내해야 했던 희생이 얼마나 컸는지 모를 정도로 철이 없지는 않았다.

그는 달에 한두 번 정도 어머니를 따라 꽃 시장에 갔다. 워낙 시장이 이른 오전에 열리는 터라 예의 그날이 되면 새벽부터 온 집 안이 분주했다. 수현도 그렇지만 어머니도 워낙 주변이 차분한 편은 아니었다. 집 안 구석구석까지 불을 전부 켜 놓고 굳이 깨어나지 않아도 되는 아버지의 단잠까지 훌쩍 깨워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수현과 어머니가 이른 새벽부터 번잡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면 아버지는 ‘아, 오늘이 그날이군’ 하고 일어나 본인이 아침 식사를 차리곤 했다.

어머니는 수현을 정말 기특하게 여겼다.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게 해 주고 싶어 피아노를 배우게는 했지만 결국 유학까지는 보내 주지 못해 늘 미안해했다. 게다가 엄청난 좌절의 문턱 앞에까지 갔던 그였다. 그런 수현이 어긋나지 않고 반듯하게 자라 준 것을 특히 자랑스러워했다.

그녀는 수현이 보여 주는 그대로를 믿었다. 그런 태도는 요한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요한이 말하면 근거를 따져 묻지 않고 그저 믿고 납득했다. 그녀는 자신이 솔직한 만큼 다른 사람도 그러리라고 여겼다. 직접적인 수사를 하자면 순진하다는 단어를 써야 할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이상주의자였다. 몇 년 전의 수현에게 그 일이 일어나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그는 꼭 그녀의 판박이로 자랐을지도 모른다.

“슬슬 여름 꽃 나오네. 봄이 막 떠나간다. 아까워 죽겠어. 봄꽃들이 제일 예쁜데.”

“그 봄 또 올 텐데 뭐.”

“너 왜 이렇게 낭만이 없어졌니?”

“엄마가 꽃집 하면서부터지 뭐. 모든 게 돈과 결부되는 순간…… 아! 아파.”

등을 얻어맞은 수현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그런 수현을 얄궂게 째려보다가 이내 웃었다. 그리고 수현의 팔에 팔짱을 꼈다.

두 사람은 좁은 꽃집 샛길을 구경하다가, 늘 거래하는 단골 도매 집 앞으로 향했다. 그러면 수현은 그녀가 흥정을 끝낼 때까지 기다리면 됐다. 그녀는 꽤 이 일과 잘 맞아 보였다. 예쁜 것을 보고, 좋아하는 사람 상대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방문 판매처럼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것보다 몸이 편하기도 할 것이다.

처음 개업한 것은 요한을 양육하게 되면서였다. 그런데 왜 하필 꽃이었을까. 꽃집을 연 뒤로 그녀는 원예 치료를 배워 종종 교육을 나가기도 했다. 다만 실생활에서 써먹을 일이 있었는지는 수현도 알 수 없었다. 오직 두 아이를 길러 내기 위해 금전적인 이득을 취하는 게 목적이라면 꽃 장사든 원예 치료든 유망한 직종은 아니었다. 썩 돈이 되는 벌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종종 수현은 생각하곤 했었다.

실은 어머니가 혹시 요한의 결핍을 짐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두 사람의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관계도.

“우리 아들 오래 기다렸지. 점심 먹고 들어가면 어때? 아빠랑 요한이 빼고 우리 둘만 데이트하자. 콩국수 먹을까?”

“엄마, 나 오스트리아에 며칠 갔다 오면 어떨 거 같아?”

“오스트리아?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요한이 어떤 연주회에 초대받았는데 같이 가자고 해서.”

“너…… 되게 가고 싶구나?”

“…….”

“표정만 봐도 알지. 다녀와! 좋은 기회네. 하긴, 오스트리아는 모차르트 때문에 방학마다 가고 싶어 했었지? 요한이랑 같이 가면 엄마도 안심이다.”

가끔 이런 식으로 요한과 자신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지지할 때면 수현은 그녀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아리송해졌다. 한편으론 두 사람의 은밀한 관계까지는 모르고 있는 듯해 안도감도 들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두 사람의 일을 알게 되더라도 그녀와 아버지만은 아니길 바랐다. 생각만으로 끔찍한 일이었다. 그는 애써 웃으며 어머니의 어깨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 * *

슈베르티아데가 열리는 오스트리아 서쪽 브레겐츠의 깊은 숲속에는 손님들을 위한 숙소와 세 개의 연주 홀이 마련되어 있었다. 숙소에서 보덴 호수의 밤 풍경이 멀리 보였다. 맑고 정적인 호수는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의 3국이 만나는 국경에 인접해 있어서 그런지 유독 이국적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요한을 환영한 것은 희끗한 머리의 노신사였다. 수현은 사진이나 영상으로 본 적이 있던지라 그를 바로 알아봤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알프레트 브렌델이었다. 무척 긴장하고 있던 수현은 그와 평범하게 인사하는 요한을 보고는 안도했다. 생각해 보면 매일같이 요한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만 배쯤은 더 놀라운 일이었다.

음악회의 프로그램은 전통대로 피아노곡과 실내악곡 위주였다. 소박한 음악제이다 보니 교향곡과 같은 큰 음악은 취급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요한의 연주는 좋게 표현하면 독보적이고 나쁘게 표현하면 독선적이다. 협연도 훌륭하지만 홀로 무대 위에서 춤출 때 가장 빛났다.

그는 이번 연주회에서 마지막 차례를 맡아 연주할 예정이라는 것 같았다. 슈베르트의 유작인 피아노 소나타 세 곡이었다. 2박 3일 합숙하는 동안 첫날 시작점을 브렌델이 끊고, 마지막 날 문은 그가 닫는 것이다. 보통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는 것이 가장 비중이 큰 연주자인 법이었다. 연배가 한참이나 위인 대선배가 이제 8년차에 접어든 연주자를 향해 마지막을 양보한다는 일이 퍽 놀라웠다.

“여기 봐요.”

숙소에 단둘이 남겨지자, 요한은 수현을 침대 위에 앉혔다. 낮아진 시야 앞에 자신의 손바닥을 내밀었다. 커다란 손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걸 동유럽 지도라고 생각해요. 가운데가 우리가 있는 오스트리아.”

그는 손바닥 정중앙을 검지로 가리켰다. 그러고는 오른편으로 조금 이동해 반시계 방향으로 동그랗게 검지 끝을 굴려 움직였다.

“슈베르티아데가 끝나면 오스트리아 동쪽에 있는 헝가리나 체코, 폴란드…… 이렇게 왼편으로 독일. 독일은 갈 거고, 다른 곳 중에 특별히 가고 싶은 곳 있어요?”

“글쎄. 가능하면 내가 안 가 본 곳이면 좋겠어.”

“천천히 생각해 봐요. 비행시간 제외하고 1주일이니 빠듯하긴 해도 한두 국가 정도는 소화 가능할 거예요.”

그가 말하는 1주일이란 것은 수현에게 허락된 시간이었다. 사실 요한은 조금 더 오래 머무르고 싶어 했으나 수현의 일정이 여의치가 않았다. 기말고사가 끝나면 학과 조교는 성적 입력과 한 학기 마무리로 무척 바빴다. 그런 와중에 수현은 자신이 할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씩 분배해 떠넘기고 이곳에 있는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어려운 일이었지만 요한의 입김이 작용한 모양인지 학장이 직접 나서서 허락해 주었다. 자신의 할 일을 모두 내팽개치고 그를 따라 낯선 땅으로 와 평화로운 호숫가를 바라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그런데 독일은 왜?”

“꼭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브렌델 연주를 직접 듣게 될 줄은 몰랐어.”

“너무 좋아하진 말고요.”

그때, 희미하게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숭어」를 관현악 버전으로 편곡한 것이었다. 손님들 중 현악기를 다룰 줄 아는 한 일행이 즉흥적으로 연주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건 수현의 귀에 마치 흐르는 물소리처럼 들렸다.

사방이 호수로 둘러싸여 있는 이곳은 마치, 이 세계에서 따로 격리된 곳 같았다. 매캐한 연기가 자욱한 도심 속에 살다가 공연이 있을 때나 한 번씩 클래식을 접하는 한국에서의 생활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공기 중에 소리들이 삶의 일부처럼 녹아 있었던 것이다. 수현의 시선이 계속 요한의 기다란 손끝만 멍하니 향해 있자 그가 핑거 스냅을 딱 하고 쳤다.

“좀 여유를 가져요. 너무 정신 놓고 있으면 괜히 괴롭히고 싶어져.”

“내가 제정신 붙잡고 있을 때도 넌 줄곧 괴롭혀 왔어.”

요한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넌 이런 곳에 자주 왔었겠지? 이렇게 세상이랑 격리된 환경 말이야.”

“가끔? 이런 소규모 음악제는 유럽 전역에 생각보다 많이 있어요. 독일에 와서야 나도 그걸 알았죠.”

“그렇구나. 네가 부러워.”

“이런 게 좋아요?”

“넌 싫어?”

“싫진 않아요.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을 뿐. 가끔 초대장이 오니까 앞으론 같이 와요.”

그래, 하고 무심코 대답하려던 수현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요한과의 대화 중에 함부로 어떤 약속이나 기약을 하는 건 자신에게 좋지 않았다.

대화가 끊기자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수현은 캐리어를 열어 짐들을 꺼냈다. 필요한 것들은 여기 전부 구비되어 있어서 몸만 오면 됐기 때문에 요한은 여권과 여벌의 옷을 제외하곤 빈손이었다. 그러나 수현은 워낙 바리바리 짐을 챙겨 28인치 캐리어가 제대로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지퍼를 열자마자 이곳에서 과연 쓰기나 할까 싶은 갖가지 생활용품들이 튀어나왔다. 요한은 가만히 그것들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풀러라는 시인이 이런 말을 했대요. ‘늑대는 이빨을 잃어도, 천성은 잃지 않는다’.”

“무슨 뜻이야?”

“그냥, 여전하다고요.”

항상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성격의 그는 겨우 1주일간의 여행에도 쓸데없는 물건들까지 한 짐 가득 챙겨 오는 자신을 영영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수현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매일반이었다.

“그럼 이런 말은 들어 본 적 없어? ‘난 이 세계에 속한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슈베르트가 한 말이거든.”

“그건 무슨 뜻이에요?”

“이상한 건 내가 아니라 너란 뜻이야.”

“형이 이상하다고 말한 적 없어요.”

“그런 눈으로 내 캐리어 쳐다봤잖아.”

요한은 자신이 졌다는 듯이 픽 웃었다. 그러나 수현은 이 기 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그냥 꺼낸 말 따위가 아니었다. 언제나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는 이 세계에 속한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요한은 자신에게 신인류 같았다. 늘 신기원이었다. 그래서 세상과 격리된 듯한 지금 이 보덴 호수 안이 그에게 꽤 안정적인 환경인 것처럼 보였다.

“입술이 예뻐요.”

“…….”

“이렇게 내밀면 얼마나 키스하고 싶은지 모르죠.”

그런 말을 들으면 갑작스레 의식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수현은 불퉁해져서 앞으로 내밀고 있던 입술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표정을 굳히고 요한을 올려다보자, 그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조금 전 손바닥 위에서 동유럽의 각 나라들을 유랑하던 검지로 자신의 입술을 부드럽게 건드렸다.

“뭘 자꾸 물리고 싶어요.”

그는 중지로 수현의 도톰한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앞니와 손가락 끝이 부딪쳤다. 수현의 허벅지가 움찔했다. 요한은 기본적으로 정적인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단번에 분위기를 야릇하게 반전하는 데 소질이 있었다.

정갈한 앞니를 두드리던 손끝이 좀 더 안으로 침범해 뜨거워진 혀를 건드렸다. 그의 손가락을 피해 도망치려던 혀는 좁은 입에서 갈 곳을 잃었다. 본의 아니게 그의 손가락을 스윽, 핥아 내자 탄력받은 그가 긴 중지를 목구멍 쪽으로 조금 더 밀어 넣었다.

“으, 읏…….”

수현은 신음했다. 그의 손톱은 늘 매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날카로운 무언가가 목젖을 찌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구토감이 올라왔다. 날렵한 중지 끝이 입 안 구석구석을 쓸었다. 그는 지루할 정도로 긴 시간 동안 공들여 애무했다. 입 속의 여린 살은 수현의 성감대 중 하나였다. 본능은 너무나 정직해서, 수현의 하반신이 빠듯하게 압박되기 시작했다.

“여기 느껴져요?”

목구멍에 손가락 끄트머리가 들락날락했다. 수현의 밀부를 길고 아름다운 손으로 희롱하는 것은 관계를 맺을 때 요한의 버릇이었다. 그는 마치 하반신의 구멍을 꿰뚫듯 입 안을 짓궂게 괴롭혔다.

수현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동시에 입 안을 채우고 있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멈췄다. 뜨겁게 달아오른 입 속에서 빠져나가는 유려한 손가락에는 침이 범벅이었다.

유린당한 쪽은 이미 쿠퍼액으로 속옷이 축축해져 가고 있었다. 요한의 큰 손이 수현의 바지 위를 매만졌다. 그가 부드러운 천 위로 여러 번 끈질기게 쓸어내리자 이미 단단해진 성기가 청바지 지퍼 아래에 꽉 맞물려 갔다. 마침내 요한은 수현의 것을 밖으로 꺼내 맨손바닥으로 쥐고 흔들었다. 금세 정액을 분출한 속옷 위가 흠뻑 젖어 들었다.

요한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늘어져 있던 수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무심코 요한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렸는데, 잔뜩 팽창해서 굳어 있었다. 만져 보지 않아도 그의 것이 딱딱하게 발기해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수현을 침대 위로 눕히려는지 한 손으로 허리를 받쳐 들었다. 수현은 그의 양팔을 붙들었다. 본격적으로 판을 벌이는 것보단 이쪽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런 계산으로 수현은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요한의 바지 버클을 풀어내고 반쯤 곤두서 있는 그의 것을 꺼내 입에 물자 입 안이 가득 찼다. 조금 전부터 목구멍이 감기에 걸린 것처럼 간지러워서 차라리 찢어 놓고 싶은 충동이 끊임없이 일고 있었다. 수현은 충실하게 내부의 욕망을 따라 한계까지 밀어 넣었다.

입 속에서 버거울 정도로 요한의 것이 크기를 키웠다. 앞뒤로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좁은 목구멍이 짓눌렸다. 성기가 빈틈없이 꽂힌 입 안이 무척 뻑뻑했다. 요한이 목구멍의 입구를 짓누르자, 수현의 눈가에 선 핏발이 점점 더 붉어졌다. 요한은 그걸 보고 더 흥분한 것 같았다. 그는 수현의 뒷머리를 확 휘어잡았다. 그런 뒤 있는 힘껏 박아 넣었다.

섹스는 그의 몇 안 되는 유희였다. 그리고 그런 요한과의 섹스는 우아한 외양이나 평소 태도와 달리 결코 정중하고 예의 바르지 않았다. 오히려 난폭했다. 평소 운전대를 잡았을 때의 초연한 그보다는 이쪽의 폭력적인 그가 아마 본질에 훨씬 가까울 것이다.

요한의 허리춤을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수현은 양손에 꽉 힘을 주었다. 손등 위에 핏줄이 다닥다닥 섰다. 위액이 모두 역류할 것 같은 압박감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옷자락을 붙잡은 손을 놓고 그를 밀어낼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둥그렇게 원을 그리듯 목구멍을 눌러 대던 요한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읏……!”

“하아, 하아…….”

그는 허겁지겁 숨을 토해 내는 수현의 뺨과 입술 위에 토정했다. 수현은 눈동자로 정액이 튈까 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떴다. 입술 위로 요한이 사출한 정액이 흘러내렸다. 요한은 그런 그의 목울대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핥아. 내 걸 삼키면서 울대뼈 움직이는 게 보고 싶어.”

수현은 그를 밀어냈다. 몸의 언어만으로는 혹여나 이해하지 못할까 음성을 곁들였다.

“싫어.”

완강한 거부 의사였다. 그러나 요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수현을 일으킨 요한은 그대로 침대 위에 마른 몸을 쓰러뜨렸다. 그러고는 턱을 붙잡고 깊게 입을 맞춰 왔다. 입술이 맞닿으면서 수현의 입 속으로 요한의 정액이 딸려 들어왔다.

갑작스럽게 혀를 깨물려서 수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거칠게 움직이던 살덩이는 수현이 신음하자, 입 안에서 부드럽게 유영하기 시작했다. 창밖에선 고요한 풀벌레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가 함께 들리는 듯했다.

숙소 안의 빛은 어스름했다. 당연히, 이 먼 이국땅에서 자신이 도망칠 곳은 없었다. 수현은 온몸을 축 늘어뜨린 채 눈을 감았다. 이런 일은 당연히 예상하고 따라왔다. 빠른 포기는 일종의 생존 본능이기도 했다.

「숭어」의 현악 연주가 여전히 희미하게 들려왔다.

* * *

클래식의 오랜 역사를 기준으로 한다면 요한은 데뷔한 지 그리 오래지 않은 새내기 연주자였다. 수십 년의 연차가 쌓인 다른 피아니스트들에 비해 공연 경험이 적었고, 프로그램의 레퍼토리도 적었다.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그의 연주를 실제로 들은 청중이 그만큼 많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슈베르티아데의 초대 손님 중 절반가량은 요한의 연주를 실제 공연장에서 들은 경험이 있다고들 말했다.

이곳까지 음악제를 즐기기 위해 찾아왔다는 것은 워낙 클래식을 사랑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시대를 풍미할 피아니스트의 공연을 직접 듣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들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도, 없는 사람들도 모두 피아노 앞에 앉은 요한을 보며 기대감으로 눈을 빛냈다. 언제 다시 그의 연주를 이렇게 조그만 홀에서 들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듯했다. 심지어 그는 현재 연주 활동을 멈추고 고국에 돌아가 있는 상황이었다. 멀리서나마 들을 기회가 많지 않을 것이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세 곡은 연이은 작품 번호였지만 제각각 색채가 판이했다. 막간 없이 한 번에 연주하면 아마 그 이채로움이 훨씬 더 눈에 잘 보일 터였다. 간절한 양손을 마주 잡은 청중들은 심호흡을 하거나 침을 삼켰다. 기대를 한 몸에 입은 요한은 예의 그 버릇대로 건반 위에 부드럽게 양손을 내렸다.

슈베르트의 긴 프레이즈를 깨부술 준비는 끝났다. 예열된 건반 위에서 승요한이 이끄는 긴 여행이 시작됐다.

피아노는 다소 낡았지만 조율이 잘되어 있어서인지 소리만큼은 미끈했다. 사실 그에게 연주 도구가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는 크게 상관없었다. 압도적인 선제공격으로 그는 사람들의 눈과 귀, 그리고 마음까지 빼앗아 가고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소담한 연주 홀에서 소규모의 청중들은 요한의 피날레 연주를 함께 들었다. 요한이 해낸 슈베르트의 해석은 과감했다. 건반을 희롱하는 두 손은 마치 뱀 같았다. 그의 낭만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정교하고 다소 오만한 연주와 조화롭게 접목해 가곡의 왕을 자신의 손으로 함락했다. 다소 내성적인 구석이 있던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보다 과감한 음정으로 탈바꿈됐다.

저렇게 정교하게 연주하려면 열 손가락 전부 빠듯하게 긴장하는 것이 상식적으로는 맞았다. 하지만 그는 이토록 정확하게 꼼꼼한 연주하는데도 불구하고 늘 여유가 넘쳤다.

강렬한 C단조로 시작했던 음악은 곧 A장조, 그리고 B플랫의 소나타로 이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곡 마지막 악장의 건반을 두드리던 그가 모든 연주를 끝내고 건반에게 여행의 끝, 결별을 선언했을 때, 그가 숨을 고르고 있는 몇 초간 청중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숨죽였다.

『브라보!』

누군가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슈베르티아데의 첫 문을 열었던 브렌델이었다. 그러자 앉아 있던 사람들 일체가 전부 일어나 기립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요한은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쉼 없이 한 시간이 넘게 연주만 했으니 진이 다 빠질 만도 했다. 그가 만든 열렬하고 뜨거웠던 환상의 세계에 갇혀 있던 청중들은 뒤늦게 현실로 되돌아와 환호했다.

소규모 인원이었지만 이 공간에서 빈틈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열광과 격려가 계속됐다. 그제야 천천히 일어난 그가 차마 앙코르를 요청하지도 못하고 감탄만 하기 바쁜 청중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표정은 그의 연주처럼 여유롭고 느긋했다. 그에게 무대는 크든 작든 엄청난 차이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규모가 클수록 느껴지는 열광의 크기는 확장될 테지만, 애당초 그는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청중들을 보고 크게 감동적이라고 느끼지 않을지도 모른다.

연주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집중하고, 파고들지만 그 음악이나 자신의 연주에 수몰되지 않는다. 객관성을 유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유롭고, 정확할 수 있는 것이다.

연주 후에 진심으로 희열에 찼던 그 환희를 단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수현이 기억하는 한 딱 한 차례뿐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두 대의 피아노로 「꽃의 왈츠」를 연주했던 그때였다.

악보상으로 「꽃의 왈츠」는 요한이 치기에 난이도가 높다고 할 수는 없었다. 다른 음표가 풍부한 악보에 비하면 그가 치기에는 초급자의 수준이라고 봐도 좋을 터였다. 하지만 그때 그는 네 개의 손으로 함께 친 그 연주 끝에 본 적 없는 얼굴을 했었다.

갈채는 계속됐다. 멈추고 사그라지기는 할까. 요한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감동의 발현들을 가만히 직시했다.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었지만 저건 그가 늘 연주가 끝난 후 짓는 표정일 뿐이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수현은 잠시간 그를 직시했다. 그를 읽어 내고 싶었다.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제일 뒤편에 서서 그의 연주에 집중하고 있던 수현은 먼저 돌아섰다. 가슴이 뜨거웠다. 행복하고, 또 불행했다. 기뻤고, 또 슬펐다. 그러다 차츰 너무나 큰 절망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문득 서러움이 차올랐다. 그래서 그곳에서 요한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누구에게라도 묻고 대답을 듣고 싶었다.

대체 왜 너와 나를 빚은 신은…….

너만 사랑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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