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이른 아침, 잠에서 깬 수현은 전화를 받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발신인은 린이었다.
[너희 아직 부다페스트야? 아니면 이미 프라하?]
헝가리, 체코 둘 다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 독일의 한 소도시에 머무르고 있었다. 수현은 대답 대신 한 박자 늦은 아침 인사를 건넸다.
“네. 좋은 아침이네요.”
[좋은 아침 같은 소리 한다. 간밤에 통화권 이탈이라 걱정했어. 요한이 연락을 안 받는데 지금 너랑 같이 있어?]
“아니요, 요한은…….”
수현은 침대 옆자리를 손으로 짚었다. 온기가 전혀 없었다. 깨자마자 서늘하게 식은 침대 위에는 자신 혼자였다. 협탁에 휴대폰이 고스란히 놓여 있는 것을 보면 멀리 나가지는 않은 것 같았다.
“지금 옆에 없고요. 휴대폰 안 들고 나갔나 봐요.”
[오늘 프라하 심포니 공연 보러 가는 일정이지? 클래식 좋아하는 사람들은 요한 다 알아보니까 거기 가면 너무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 줘. 특히 사람들 보는 앞에서 키스나 애무를 한다거나. 풍기 문란 금지. 애정 행각 절대 금지.]
“누굴 멍청이로 알아요? 그런 짓 안 해요.”
[너 말고 요한을 좀 단속해 달라고.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어? 그럼 나한테 확답을 줘 봐. 널 믿을게.]
당연히 그런 확신은 할 수 없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가는 이미 수현의 손을 떠난 일이니까. 요한은 부드러운 막무가내라는 모순적인 말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단속이고 뭐고 안 그래도 공연 못 보러 갈지도 모르겠어요. 컨디션이 별로예요.”
물론 이건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그들이 오늘 소화할 일과가 프라하 심포니의 공연을 보러 가는 것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요한도 프라하는 「프라하의 봄」 음악제에 단 한 번 온 것이 전부였다고 해서 린이 관광을 겸할 수 있는 루트를 짜 주었다.
그러나 지난밤 그들은 국경을 넘어 헝가리에서 독일로 건너왔던 차였다. 애당초 린에게 고지했던 체코로 향하는 일정을 과감히 누락하고 즉흥적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차마 ‘지금 당신이 있는 독일에 요한이 있어요’라고 말할 수는 없어서 수현은 자신들이 어디 있는지에 대해서는 끝끝내 함구했다.
“그런데 아침부터 또 웬 전화예요?”
[아, 그렇지. 왜 아직 답변이 없어. 브뢰겔이 답변 기다리고 있다니까?]
“아, 그거…….”
독일에는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아, 거기?’ 하는 유명 필하모니들이 즐비해 있었다. 북부의 베를린이 가장 대표적이지만 그 라이벌 격이자 첼리비다케가 오래 이끌어 왔던 남부의 뮌헨 필하모니 또한 명성으로는 만만치 않았다. 그 뮌헨 필하모니에 최근 새 상임 지휘자가 취임했다. 벨기에 출신의 유명 지휘자 브뢰겔이었다. 요 근래 독일의 오케스트라들은 세대교체가 추세인 모양이었다.
독일은 요한을 거의 자국의 음악가처럼 여겼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고국에서 수많은 명곡을 만들어 냈던 라흐마니노프는 사회주의 혁명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낯설기 짝이 없는 미국의 클래식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결국 사후에 쓰인 음악사에 미국의 음악가로도 널리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독일이 요한을 극진히 대우하는 데는 라흐마니노프의 경우처럼, 후일 자국에서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은 영악한 의도도 숨어 있었을지 모른다.
브뢰겔이 정식으로 취임하자 클래식에 정통한 독일의 팬들은 뮌헨 필이 요한과 협연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연주 활동을 쉬고 있긴 하지만 최근에 모스크바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 여론에 영향을 미친 듯했다. 그런 와중 하필이면 오스트리아의 슈베르티아데에서 연주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브뢰겔로부터 린의 개인 연락처로 직접 요청이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요한이 이미 거절하지 않았어요?”
브뢰겔로부터 협연 요청이 들어오자마자 린은 물 만난 고기처럼 흥분했다. 그는 하이네만 못지않은 거장이었다. 그런 그가 취임하면서 첫 협연 무대를 기념할 독주자로 그를 꼽아 직접 부탁해 온 것이고, 또 마침 요한은 운때에 맞게도 유럽에 머무르고 있었다.
간절한 목소리에 이대로 그가 독일로 되돌아왔으면 하는 린의 바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의 희망 사항과 달리 이틀 전 요한은 단칼에 거절했다. 자꾸 이런 일로 연락하면 더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라 덧붙이기까지 했다. 린은 물러설 땐 물러설 줄 아는 ‘요한 전문가’였다. 그녀는 현명하게도 요한이 아닌 수현을 공략하기를 택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너한테 좀 더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잖아. 베갯머리송사란 말이 왜 있는 줄은 아니? 그런 병법을 좀 써먹을 줄도 알아야지.]
“내가 왜 그래야 해요? 수린 씨는 남이 부탁을 들어주면 고마운 거고 아니면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좀 견지할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겨우 어제 말했잖아요. 우리가 매일 섹스를 하진 않아요.”
[그래? 그건 듣던 중 희소식이군.]
수현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가끔 그녀가 요한을 아티스트로서 좋아하는 건지 남자로 좋아하는 건지 그 경계가 헷갈렸다. 묻는다면 ‘둘 다’라고 대답하리라는 생각은 들지만 말이다.
그는 정확한 시간을 확인하고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댔다. 늦잠을 잔 덕분에 시간은 느지막한 오전이었다. 해가 이미 중천에 떠 이미 점심을 향해 가고 있었다. 커다랗게 난 창문으로 따사로운 햇볕이 쏟아져 내렸다. 저 블라인드를 걷어 내면 눈이 멀어 버리지는 않을까 싶을 만큼 강렬한 한낮의 빛이었다. 수현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언젠가부터 그는 빛보단 어둠이 편했다. 그늘 밑에 숨게 되면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그건 그렇고, 내 제안은 생각해 봤어?]
“시간을 좀 더 주세요.”
클라시스로의 영입 제안을 말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수현은 요한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와 오래 함께 있을수록 자신은 지금보다 더 망가지고 피폐해질 게 뻔했다. 여기서 더 바닥이 있을까 싶지만 늘 보이지 않는 밑바닥은 더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 제안이 그냥 버리기에는 무척 아쉬운 카드인 것도 사실이었다.
어차피 요한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면 가장 편한 길을 찾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않은가. 그렇게 자신과 자꾸만 타협하고 싶어졌다.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끝이 거절이라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는데, 선뜻 그 말을 꺼내기가 아쉬워 계속 미루고 있었다.
[그럼 뮌헨 필은, 진짜 거절해? 한 번만 더 설득해 줘. 아니지. 너희 사이의 규칙을 기반으로 그와 거래해 줘.]
“그러니까 내가 왜…….”
[이건 그냥 제안이 아냐. 브뢰겔이 첫 협주자가 돼 달라고 손 내밀었다는 상징성이 있어. 앞으로 그는 몇 년 동안 뮌헨 필을 주무르게 될 거라고. 베를린이랑 뮌헨은 독일 오케스트라의 쌍두마차야. 둘 다 요한의 손아귀에 쥘 수 있는 기회란 얘기지.]
“…….”
[마음이 정 안 내키면 이참에 뮌헨에 한번 가 봐. 독일 박물관에도 가 보고, 거기서 이자르 강만 건너면 뮌헨 필이랑도 가까워. 너도 분명 좋아할 거야.]
“알겠으니까 잔소리 그만해요.”
[얘기해 봐 주는 거지?]
“글쎄 알겠다니까요. 끊어요.”
린이 너무 간절해서, 약간의 기사도 정신이 발동된 그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수현은 마지못해 그러마고 대답했다. 린의 들뜬 웃음소리가 금세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통화가 끝나자 다시 사위가 공허해졌다. 시계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 정도를 제외하면 주변은 아무런 소음도 없었다.
자신의 삶에는 늘 소리가 있었다. 대부분은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었다. 언제부턴가 약간의 소음이 없으면 잠들지 못하기도 했다. 최소한 거실에 텔레비전이라도 틀어 놓아야 했다. 이렇게 정적인 것은 어젯밤 처음 몸을 뉜 이 집의 침대만큼 낯설었다.
그때였다.
“깼어요?”
“어딜 다녀와?”
“이 근처 노천카페요. 부탁할 게 있어서 잠깐 다녀왔어요. 아침 먹어야죠.”
“아침 먹긴 이미 늦은 시간 같은데? 허기도 없고.”
“입맛 없어도 좀 먹어요.”
“너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까 기분 이상하다. 너나 좀 잘 챙겨 드시지 그래. 엄마가 속 터져 하면서도 잔소리를 못 하니 가슴이 타들어 간대. 자꾸 우리 엄마 속상하게 하지 말라고.”
요한은 웃었다.
“샤를로테 생가에 가 보고 싶다고 했었죠. 오늘 점심 먹고 같이 다녀와요.”
그가 왜 하필이면 독일을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선택했던 걸까에 대해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독일은 문화적으로 대성한 국가지만 클래식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유럽의 대부분이 그랬다. 한국과 그나마 가까운 러시아도 기반을 잡고 연주하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굳이 왜 여기여야만 했을까. 그 의문을 그동안 잊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밤 이곳으로 오면서 수현은 그 해답을 얻었다.
그들은 현재 독일 중부에 있는 작은 도시 베츨라어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도시는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그의 역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낳은 곳이었다. 작중에서 베르테르가 아름다운 샤를로테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 낭만 어린 땅이기도 했다.
이 깔끔하고 단아한 건물은 요한이 베츨라어에서 구매한 시가지 근방의 집이었다. 북부 베를린이나 남부 뮌헨이 아닌 중부의 소도시에 집을 한 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그의 개인적 일들을 속속들이 아는 린마저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 집은 수현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물론 당사자도 몰랐던 일이었다.
“혼자 가도 돼.”
“내가 안내해 주고 싶어요. 그렇게 해도 되죠?”
“하지만 난…….”
요한은 계속 이야기하라는 듯이 눈썹을 스윽 들어 올렸다. 순간 수현의 눈에 어린 날의 요한이 스쳤다.
“그래. 너 좋을 대로 해.”
남들보다 체온마저 1도는 낮을 것만 같은 서늘한 요한이 활력 있어 보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수현은 그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 * *
베츨라어.
괴테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준 애절한 사랑의 도시였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 보니 수현이 그간 막연히 상상한 것만큼 화려하지는 않았다. 다만 골목골목이 소담한 맛이 있었다. 정적이고, 조용한 편이었다. 소란한 서울 한복판에서 살다가 이런 곳에 오니 보덴 호수에 갔을 때처럼 이질적인 기분이 느껴졌다. 보덴 호수가 마치 세상과 격리된 곳 같았다면, 이곳은 시간이 아주 잠시 멈춘 곳 같았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 히로인은 샤를로테로, 실제 괴테는 샤를로테 부프라는 이름의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베츨라어에 바로 그 샤를로테 부프가 태어나 살았던 ‘로테 하우스’란 이름의 생가가 있었다. 이곳에 오게 된 건 요한의 제안이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수현이 로테 하우스에 가겠다고 나서자 요한은 흔쾌히 그를 따랐다.
그곳까지 가는 길은 꽤 험난했다. 무엇보다 길목에 이정표가 없었다. 괴테는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이었다. 당연히 문화 유적지들로 삼아 시가지 중심부에 팻말로 자랑해 뒀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생가는 골목을 한참 걸은 끝에야 겨우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심지어 건물의 외관은 다소 허름하고 낡았다. 너무 아무것도 없어 고생해서 온 일이 허무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주변부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이상하게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 도시는 꼭 시간이 멈춘 곳 같아.”
수현은 대답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듯 가볍게 말했다.
“아, 혹시 로테 하우스에 먼저 와 봤던 적 있어?”
“아뇨. 혼자 오고 싶지 않았거든요. 생각보다 별게 없네요.”
서로 느끼고 있는 감상의 갈래는 이제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수현에게 그 소설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베르테르라는 이름만 들어도 처음 요한을 만났던 순간, 두 번째 마주쳤던 순간, 몇 번이나 찾아가서 함께 이 책을 읽었던 일들이나 그의 연주를 처음 봤던 순간 따위가 모두 함께 떠올랐다.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기제 같은 것이었다. 심지어 요한이 자신의 손을 망가뜨렸던 그날까지 말이다. 수현은 혼자 오고 싶지 않았다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하나마 이해할 것 같았다.
“저기가 예루살렘이 살던 집 맞아?”
수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요한의 시선도 건너갔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루살렘 또한 괴테의 소설에 영향을 준 실제 인물이었다. 그는 베츨라어의 청년 법률가로, 그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괴테에게 영감을 줘 집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 때문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 주인공 베르테르는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의 집은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예루살렘의 집을 올려다보던 수현은 문득 물었다.
“왜 베츨라어에 집을 샀어?”
자신의 명의로 되어 있었으나, 아마 수현의 짐작으로 이곳에 다시 올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선물하고 싶었어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형이 제일 좋아하는 소설이니까.”
그의 말마따나 자신은 원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좋아했다. 그러나 나중엔 수현보다 요한이 훨씬 더 좋아하게 됐다. 처음 책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그는 흥미를 보였다. 자신이 알려 주기 전까지만 해도 책이란 걸 읽어 본 일이 없었던 요한은 그것을 읽어 줄 때마다 어느 순간보다 집중하며 귀를 기울였다. 특별히 뭔가 필요하다거나 갖고 싶다고 말하는 일이 없던 아이였는데, 책을 완독해 주던 날엔 예의 그 낡은 책을 갖고 싶다고 말하기까지 했었다.
사랑에 도취된 이에게 숙명적으로 뒤따라오는 좌절 끝에 자살했던 베르테르. 그 베르테르가 추구했던 단 하나의 가치는 그가 속속들이 알지 못할 감정, 오직 사랑이었는데. 그의 파국은 어떻게 그리도 요한의 마음을 끌었을까.
이제는 요한이 가장 좋아하게 된 것이라, 수현은 그게 싫었다.
“난 이제 그 책 싫어.”
“내가 싫은 거겠죠. 괴테는 죄가 없어요.”
아니, 그는 자신에게만큼은 죄가 있다. 그 때문에 요한과의 끈끈한 연결 고리가 생겨났다. 수현은 말을 돌렸다.
“난 집 같은 거 필요 없어. 독일 부동산 법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난 모르니까, 네가 명의를 반환해 줬으면 좋겠어.”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억지로 뭘 쥐여 주는 것도 어떤 측면에선 폭력이었다. 재욱에게 콩쿠르 우승자의 자리를 선물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좋지 않을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한참이나 침묵이 이어졌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요한이었다.
“그냥 그 집은 여기 혼자 있게 내버려 둬요. 형의 피아노 위처럼 먼지 앉기밖에 더할까요.”
“하지만 그건 쓸데없는 낭비야.”
“글쎄요. 난 이제 대단한 부자가 됐거든요. 가질 게 아니라면 참견하지 않는 게 좋겠군요.”
그는 종종 이런 이분법으로 세상을 봤다. 가지고 싶은가, 가지고 싶지 않은가. 개중 수현은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전자였다. 소유하고 싶다는 것은 함락하고, 정복하고 싶어 하는 마음과 무엇이 다른가. 그래서 수현은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차라리 그가 자신을 사랑했다면.
네가 날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는 평범한 온기를 가진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어쨌든 그가 참견하지 말라는 식으로 나온다면 이쪽에선 더 할 말이 없었다.
걸어서 도착한 예루살렘의 집은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로테 하우스만큼 볼거리가 없었다. 심심한 주변을 한 바퀴 빙 둘러 구경하고 나자 이미 해는 어둑어둑하게 진 뒤였다. 시가지의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예루살렘의 높은 집에서 언덕 아래의 성당이 내려다보였다. 수현은 요한을 돌아봤다.
“나 들렀다 갈 곳이 있거든. 먼저 돌아가.”
“저 성당? 같이 내려가요.”
의아한 눈이 요한을 향했다. 요한은 조금도 동요가 없었다. 그가 선뜻 함께 가자고 말해 오는 바람에 오히려 수현이 당황했다. 성당이란 공간에 들어가 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어머니와 함께 갈 때도 늘 문턱까지 갔다가 그대로 되돌아오곤 했다. 그런 자신보다 요한은 더 차갑게 굴었다. 집 근처에 성당이 있다는 사실을 아예 잊고 사는 듯 그쪽으론 발걸음 한 번 없었다. 특히나 승국환 신부에 관해선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그나마 얼마 전 신부님의 납골당에 왔던 일이 그가 보인 유일한 관심이었다.
자신에게 예의 성당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나게 된 곳이었다. 수현의 짐작이지만 요한에게는 그것 외에도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승국환 신부 때문이리라. 장례 미사 때 서럽게 울던 얼굴은 가짜 같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왜 그렇게 애틋한 신부님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일까.
요한이란 인간에 관해서 수현이 모르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를 만나기 이전의 과거만큼은 예외였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어머니보다도 아는 게 없었다. 종종 물어봐도 그는 웃기만 할 뿐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수현은 이런 생각까지도 한 적이 있었다.
혹시, 그가 신부님을…….
그러나 늘 이건 너무 갔다는 생각에 고개를 가로젓곤 했다. 그때의 요한은 겨우 열세 살이었다.
성당의 내부 구조는 한국의 건물과 유사했다. 안에 사람은 없었다. 수현은 아담한 예배당 의자에 잠시 앉아 성모 마리아상을 올려다봤다. 요한은 단상 옆에 놓인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서서히 마리아상에서 시선을 내리자 그의 늘씬한 뒷모습이 바로 보였다. 그 기다란 형상을 보고 있자니 숨이 턱 막혔다. 꼭 기온이 40도까지 치솟은 습도 높은 한여름, 팔팔 끓어오를 만큼 달아오른 아스팔트 위에 맨발로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바닥을 펼치고 내려다봤다. 만약 이 손에 무언가가 쥐어져 있었다면, 나는 그를 향해 그것을 쓸 수 있었을까. 예컨대 칼이라든가, 권총 따위 말이다.
그럴 용기, 아니 그럴 마음이 있긴 한 걸까. 지금 자신의 모습은 누가 봐도 신이 나서 요한을 따라 여행에 나선, 자존심도 속도 없는 멍청이일 뿐이었다. 그러나 요한의 연주는 마약 같았다.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이런 자신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그 누가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인가. 가뜩이나 어수선한 내면은 외롭기까지 했다. 괴로웠다.
“왜 성당을 싫어해?”
“싫어하지 않아요. 특별히 좋아하지 않을 뿐이죠.”
슈베르티아데 같은 작은 음악회에 관한 감상을 물었을 때도, 그는 똑같은 대답을 했었다. 요한은 늘 저랬다. 웬만해선 어떤 대상에 대한 특별한 기호가 없었다. 그에겐 모차르트도, 프랭크 시나트라도 똑같이 음악을 하는 사람일 뿐일 것이다. 그가 그 누구보다 명확해지는 것은 자신에 관해서뿐이었다. 수현을 좋아했고, 수현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딱 그런 정도였다.
“그럼 승국환 신부님은?”
건반을 두드리던 그는 잠시 대답을 고민하는 듯 고개를 들고 움직임을 멈췄다. 여전히 수현에게서 등을 보이고 있는 채였다.
“신부님은, 왜 싫어해?”
“싫어하지 않아요.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죠.”
“그런데 왜 이 세상에 그분이 없는 양 구는 거지?”
그가 천천히 뒤돌아봤다. 수현은 목소리를 쥐어짜 내 다시 물었다. 왜 갑자기 이런 말이 튀어나오고 있는지 자신도 몰랐다. 아마 이곳이 자신들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거의 없는 외국이고, 또 마침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괴상한 기분이 드는 공간인 데다, 장소가 하필이면 몇 년 만에 들어온 성당의 안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추측할 따름이었다.
“궁금했던 게 있었어.”
“물어봐요.”
“혹시 네가 신부님을 죽였어?”
그는 빤히 수현을 응시했다. 수현은 그의 눈 속에 든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흐릿해서 읽어 내기 쉽지 않았다.
두 사람은 좁은 예배당의 전면과 후면에 떨어져서 한참이나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런 그들을 십자가에 못 박힌, 인간들을 관장하는 신이 똑똑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늘 요한에겐 친절하고 자신에겐 불친절했던 그에게 전부 읽히는 기분이었다.
수현은 고개를 먼저 돌렸다. 그러자 요한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만 일어나요. 같이 갈 곳이 있어요.”
그리고 그는 끝내 마지막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 * *
시가지 근방에는 노천카페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 한 곳은 요한이 이 지역에 들르면 꼭 방문하는 곳이라 주인과도 낯이 익은 모양이었다. 오전에 혼자 다녀온 곳도 바로 여기였던 것 같았다.
저녁은 이곳에서 간단하게 먹었다. 식사는 메뉴판에는 없는 특제 소스 파스타와 연어 샐러드, 그리고 커피였다. 맛은 훌륭했으나 수현은 거의 입에 대는 둥 마는 둥 했다. 성당에 들른 뒤로 기분이 축 가라앉아 입맛이 없었다. 요한도 워낙 입이 짧아 저녁 식사는 금세 끝이 났다.
은은한 조도의 빛이 감도는 카페 안쪽에는 단이 낮은 무대가 있었다. 이따금 라이브로 클래식 연주를 하는 카페인 모양인데, 아마 때로는 즉흥적으로 저곳에서 연주를 하는 손님도 있는 것 같았다. 그 낮은 무대 위를 종업원들이 분주하게 정돈하기 시작했다. 요한이 왔다는 소식이 알음알음 퍼졌던 모양인지 근처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규모가 작은 도시라 인구는 도시를 통틀어도 5만 정도였다. 여행객도 적은 도시라 동양인은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옆 테이블의 중년 여성이 어설픈 영어로 설명해 주기를 이렇게 한 가게만 인파로 빼곡한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는 것 같았다.
금세 연주할 무대가 마련되고, 요한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 올라섰다. 늘 거대한 무대 위에서 수천 명의 집중된 시선을 느끼며 연주해 왔을 그는, 며칠간의 여행을 떠나온 뒤 줄곧 작은 무대에서만 연주했다. 그런데도 그는 마치 거대한 태산 같았다.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그는 가장 빛났다. 무대가 크든 작든 상관없었다.
“Johann!”
휘익.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이 만약 클래식 공연장이었다면 휘파람을 분 저 남자는 주변 관객들의 눈총을 한 몸에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선 누구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 힘입어 요한에게 더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한국이었다면 너 나 할 것 없이 휴대폰을 들고 그를 촬영하고 있었을 텐데 이 소도시의 주민들은 그저 요한의 음악을 있는 그대로 즐겼다. 베를린이나 뮌헨처럼 음악적으로 깊은 역사를 쌓아 온 도시도 아닐진대 이 선진화된 의식이 부러웠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독일에 와서 노천 연주를 했다는 것이 린이나 클라시스의 귀에 들어가서 좋을 일이 없었다. 긴장한 채 굳어 있던 수현은 천천히 미소 지었다.
그는 부드럽게 건반 위에 양손을 내린 뒤, 연주를 시작했다. 저 무대 위에 요한이 올라섰을 때부터, 아니, 베츨라어에 당도했을 때부터 수현은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브람스의 피아노 4중주, 그 「베르테르」를 연주하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리고 예상은 적중했다. 다만 피아노 4중주의 원곡처럼 첼로나 바이올린과 협연하지는 않았다. 요한은 홀로 연주했다.
네 대의 악기를 하나로 취합해 편곡한 것이라 음이 무척 빼곡하게 차 있었다. 최근 작곡을 하고 있는 그는 편곡에도 흥미를 보였다. 지금 그가 연주하고 있는 음악은 「베르테르」를 피아노 독주 버전으로 편곡한 것이었다. 그는 취미의 개념으로 교향곡이나 규모가 큰 웅장한 음악을 피아노만으로, 본인 판단에 필요한 음표만 살려 즉흥 연주 하는 것을 즐겼는데, 이 곡은 제대로 된 대위법으로 편곡이 되어 있었다. 바이올린과 첼로의 음까지 섞여 더 본격적이었다.
소리는 화려하고, 웅장하고, 지극히 절망적이었다. 베르테르가 느꼈을 그 까마득한 슬픔과 좌절,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를로테를 포기할 수 없었던 그 아득한 사랑의 열병이 가슴에 내리꽂혔다. 베르테르는 빌헬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녀에게 매료된 스스로를 질타한다.
요한의 손끝에서부터 베르테르가 느꼈을 그 혼란과 격정이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갔다. 어째서 그는 사랑, 슬픔, 좌절 따위의 감정을 제대로 대면하지도 못하면서 저렇게 선율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인지. 하늘 아래 이토록 불공평한 일이 또 있을까.
피아노 위의 정복자가 만들어 내는 선율은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몇 번을 봐도 똑같았다. 볼 때마다 새롭게 그의 연주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이렇게 전율이 이는 매 순간마다 멍청한 자신에게 참을 수 없이 구역질이 났다. 자신이 손톱만큼의, 일말의 존엄성마저 상실된 짐승 같았다. 그가 뛰어난 선율의 창조를 거듭할수록, 그의 연주는 족쇄처럼 수현의 발목에 걸려들었다. 벗어날 수 없는 권위에 짓눌리는 듯했다. 온몸이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수현은 벌떡 일어섰다. 요한의 연주도 동시에 뚝 끊겼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서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수현 한 사람이 일어난다고 해서 거슬릴 일은 없었다. 그러나 요한은 오직 수현만을 위해, 그만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듯이 모든 연주를 멈췄다.
곡은 아직 절반도 채 진행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더는 그곳에 앉아 있을 자신이 없어서 수현은 도망쳤다. 요한으로부터 마음속으로 수십, 수백 번 달아났지만 그의 연주로부터 도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수현!”
무대에서 내려온 요한은 사람들의 의아해하는 시선을 전부 뒤로하고 수현을 쫓아 나왔다. 이곳은 낯선 도시였다. 게다가 하루 종일 이쪽 지리를 잘 아는 요한에게 의지해 다녔기 때문에 돌아가는 길 따위는 알지 못했다. 수현은 정처 없이 어두워진 밤거리를 헤맸다.
뒤따라오던 요한에게 손목이 붙들린 것은 골목을 몇 분이나 헤맨 뒤였다. 금방이라도 붙잡을 수 있었을 테지만 인적이 드문 곳에 다다를 때까지 잠자코 쫓아와 준 듯했다.
수현은 요한을 힘주어 뿌리쳤다. 그 바람에 요한의 손바닥에 작은 상처가 생겼다. 평소였다면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손을 붙잡고 치료하겠다고 부산을 피웠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이 전혀 아니었다. 사위는 어두웠고, 그의 마음은 그보다 더한 암흑이었다.
“난 신실한 편이었어. 그런 내가 왜 성당에 안 가게 됐는지 알아?”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화두였다. 요한에게뿐만 아니라 부모님에게도, 심지어는 스스로에게까지도 묻어 두고 꺼내지 않던 얘기였다.
자신들이 나누는 타국의 언어를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는 사실 때문인지,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았다. 평소보다 감정적으로 격해져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음표를 단 의문문으로 끝났지만 요한은 수현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대답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는 아마 손을 다치게 된 이후 가지 않는 자신을 보며 신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원망스러운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 내고 있던 요한은 깊은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손을 다친 뒤로 안 가게 됐다는 거 알아요.”
“아니, 손 때문이 아니야. 너 때문이야. 네가 신부님을 죽인 걸까 봐! 나한테 한 짓을 보니까 네가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인간 같아서 차마 아직까지 신부님이 만진 물건들이 가득한 그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 그래서 못 가게 됐어.”
“…….”
“네 어머닌 화재로 돌아가셨지?”
“과거 얘길 하자는 건가요? 난 이 화제를 입에 올리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신부님은? 요한, 신부님도 화재로 돌아가셨잖아. 그리고 넌 나와 함께 살게 됐어. 이게 다 전부 우연의 일치란 말이야?”
우연이 여러 번 반복되면 필연이라고 확정적으로 말했던 것은 그였다.
“우연은 우연일 뿐이라면서요. 맞아요. 난 초년 운이 없는 편이죠. 그게 뭐가 어쨌단 거지?”
“네 주변 사람들이 둘이나 비슷한 사고로 죽었다고. 신부님도, 네 친모도. 정말 아무 연관……!”
“그래서?”
요한은 짜증이 이는지 불쑥 수현의 말을 끊곤 미간을 찌푸렸다.
“날더러 어쩌라는 거야. 너도 내가 재앙을 부르는 애였단 말이 하고 싶어? 안 태어났어야 했던 내가 태어나서 모든 불행을 불러왔다?”
“…….”
“정말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해?”
어떤 당혹스러운 상황에 놓인다 한들 요한은 동요하지 않았다. 낯빛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무표정, 그리고 부드럽게 미소 띤 단 두 가지의 표정이야말로 수현이 가장 많이 봐 온 얼굴이었다. 그래서 번번이 기가 질렸다.
그러나 지금의 요한은 달랐다. 그는 뜬금없는 얘길 꺼내 고집을 피우는 수현 때문에 열이 치민다는 듯 확 인상을 썼다. 그러고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수현에게 짜증스레 내뱉었다.
“아하, 그래서 성당에 못 갔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구나. 내가 너 갖고 싶어서, 같이 있고 싶어서 양아버지 죽여 버렸을까 봐.”
“아니야?”
수현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제야 요한은 수현이 이 이야기를 간단하게 끝낼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인지한 듯했다. 그의 짐작이 맞았다. 수현은 이왕 꺼낸 얘기를 매듭짓고 싶었다. 줄곧 궁금하게 여겨 왔던 것이었다. 마음 한편에 꺼림칙함으로 늘 남아 있었다. 생각만으로도 너무 끔찍한 일이라 애써 억눌러 왔지만 기저에 의문은 자리 잡고 있었다.
사실은 어떤 사람이 죽어 간 사고에서 그가 결백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지나친 비약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번 피어난 의혹은 마치 전염병처럼 머릿속을 점령해 도통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요한에 대해 알게 될수록, 그의 본질에 가까워질수록 드는 생각은 한길이었다. 그는 매력적인 만큼, 아주 위험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아니라고 말하면 믿을 생각은 있나?”
“그럼 왜 신부님에 관해 입도 뻥끗 안 하지? 신부님이 너를 5년이나 키워 주셨다는 걸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되냐고. 넌 들키면 안 되는 것처럼 줄곧 숨겨 왔어. 억지로 슬퍼하라고는 안 해. 사람마다 사정이 있고 감정의 크기도 폭도 모두 다른 거니까. 하지만 너처럼 그렇게 널 거둬 줬던 어른이 아예 안중에도 없는 건 일반적이지 않아.”
“안중에도 없다고 누가 그래. 네가 그렇게 날 잘 알아?”
“잘 몰라. 하지만 네가 사랑을 모른다는 정도는 알아.”
“난 널 사랑해.”
수현은 덧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좆 까.”
소설 속 베르테르는 사랑에 아파하다 권총 자살을 택한다. 하지만 수현의 생각에 독선적인 요한은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애달픈 감정에 휩싸여 스스로 생을 마감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 요한은 베르테르에 심취해 있는 듯하지만, 결코 그처럼 될 수 없었다. 그저 수현을 사랑하고 있건만 이뤄질 수가 없다는 베르테르적 자기 연민에 빠져 있다면 모를까.
그가 정말 자신을 사랑했다면 오른손이 엉망이 된 수현이 수술 후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미안하다고 말했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한 달 뒤, 1년 뒤, 몇 년이 흐른 뒤에라도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어야 옳았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장난치듯 수현의 상처를 몇 번이나 비웃고 조롱했다.
“내가 아는 건 네가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인간이라는 것뿐이야.”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수현은 뒷걸음질 쳤다. 요한이 다가왔다. 여태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대로 전부 질러 놓고, 등 뒤가 막다른 골목이라는 것을 인식하자 이제 와 다리가 후들거렸다.
가까이 접근해 오던 요한은 수현이 무척 떠는 모습을 보고 멈춰 섰다.
“난 결백해.”
그러면서 조심스레 한 걸음 다가섰다. 그래서 수현은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이젠 한 발자국 더 움직일 자리조차 없었다. 수현이 물끄러미 요한을 올려다봤다. 그는 표정을 통해 어떤 감정을 겪고 있는지 파악하기 좀처럼 어려운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가 짓고 있는 얼굴이 어떤 생각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손쉽게 알 수 있었다.
“안 믿는군.”
그는 화가 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