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너는 좌절해. 나는 그런 너를 딛고 일어설 거야.>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수현의 등 위를 낯선 이가 짓눌렀다.
<나는 너를 짓밟고, 무너뜨리고, 영원히 가질 거야. 그렇게 너를 통치할 거야.>
엎드린 수현의 뒤통수 위로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비수처럼 꽂혔다. 그는 덜덜 떨었다. 뼈마디가 모두 부서져 덜렁거리는 오른손을 소중히 품 안으로 감추고 고개를 들었다.
정면에는 온몸이 불에 타들어 가고 있는 웬 사제 한 사람이 그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수현은 그 형체가 너무 징그럽고 무서워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입을 틀어막았다. 청결한 손에서 느껴지는 시원함과 향긋한 크림 향이 이 급박한 상황과 썩 조화롭지 않게 느껴졌다.
그는 숨이 막혀 헐떡거렸다. 벗어나고 싶었으나 고개를 더 치켜들 수가 없었다. 얼굴을 확인하기가 너무 두렵고 무서웠다. 익숙하고도 낯선 힘에 정복당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흐느꼈다.
제발 살려 주세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허억…… 허억……!”
시야가 번쩍 트였다. 깨어나 보니 눈앞은 익숙한 수현의 집 거실 천장이었다. 잠시 잠든 동안 꿈을 꾼 모양인데 기묘하게 생생해서 기분 나빴다. 수현은 이마에 흥건한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공항에서 어찌어찌 집으로 돌아와 비좁은 소파 위에 몸을 구겨 넣고 누웠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커다란 캐리어가 테이블 옆에 아가리를 벌리고 누워 있었다.
바깥은 이미 새벽이었다. 짐을 꺼내 정리하다 피곤해서 선잠에 빠졌던 모양이었다. 아직 부모님이 깨어나기엔 이른 시간이라 주변은 시계 초침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베란다 창문을 열자 새벽부터 매미가 울었다. 여름이 왔다는 표시였다.
하지만 풀벌레 소리 정도로는 마음이 안정이 안 됐다. 그는 텔레비전을 틀었다. 마땅히 방송하는 채널이 없어 아쉬운 대로 뉴스를 켜 놓았다. 안정적인 주파수의 앵커 목소리 덕분에 기분이 훨씬 나았다.
굵직한 국내외 사건 사고 뉴스 이후 문화 소식을 알려 주는 곁들이 뉴스에서 피아니스트 이동준의 독주회 공연 안내가 이어졌다. 날짜로 이달 말이었다. 정식 공연이고 단독 콘서트이기도 하니까 요한도 이참에 보러 갈지도 모른다. 뉴스에서 기자도 그렇게 점치고 있었다.
[……스승의 공연에 승요한이 등장할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문자가 몇 통 도착해 있었다. 재욱으로부터 온 연락도 있었다. 연락처를 용케 알아낸 모양이었다. 지금 쓰는 휴대폰은 요한과 드물게 연락을 하거나, 클라시스 측에서 걸려 오는 린 혹은 김 비서의 전화를 받는 용도가 주였다. 그 외엔 부모님과 이동준, 그리고 현주 정도만이 번호를 알고 있었다. 그 정도가 요한이 허락한 인간관계의 최대 한도였다. 아마 이번 일도 지난번처럼 십중팔구 현주의 짓이리라.
[재욱이예요. 선배, 귀국했어요? 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러고 보니 타인에게 무관심한 요한을 탓할 계제가 못 됐다. 미로에 갇힌 재욱을 자의든 타의든 방관하고 있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골치가 아파진 그는 휴대폰을 소파 구석에 던져 놓고 푹신한 시트 위에 몸을 기댔다.
* * *
피아니스트 이동준의 독주회는 꼬박 2년 만이었다.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는 이 공연을 취재하기 위한 인파가 몰려 있었다. 다만 주인공인 이동준이 아니라 오늘 공연을 관람하러 온 승요한에게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가 쏠렸다. 더 많이 팔릴 콘텐츠를 취재하는 것. 어쩔 수 없는 자본주의의 논리였다.
요한의 앞에 수십 개의 마이크가 몰렸다. 플래시 세례도 함께 물밀듯 쏟아졌다. 한 사람이 물꼬를 트자 오늘 공연과 관계없는 요한 개인에 관한 질문들이 연달아 이어졌다. 현재 작곡하고 있는 곡에 관한 질문이나 다음 학기에도 학교에 출석할 것인지 하는 작은 문제부터 독일로 언제 돌아갈 것인지 등의 큰 문제까지 다양했다. 모두 이 자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질문들이었다. 그러다 그는 귓전을 때리는 한 질문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재욱에 관한 의문이었다.
“최근 서울 국제 콩쿠르에 심사 위원으로 깜짝 등장하셨던 걸로 화제가 됐는데요. 해당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심재욱 씨가 자질 논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심사 위원으로서의 승요한 씨 의견을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전 안식년입니다. 오늘은 선생님 연주회를 보러 온 거고요. 공연에 관한 질문만 해 주세요.”
그는 스승에게 누가 될까 쇄도하는 질문들을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를 불편해하고 있다는 기색은 조금 내비쳤다. 모든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 완곡하게 거절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하자 다시 이동준과 결부된 질문들이 이어졌다. 그는 스승의 권위를 높여 주면서 적당히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공연 시간이 다 되어 가자 김 비서와 그녀가 대동한 경호원들이 기자들 사이에 길을 냈다. 요한은 인사하고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런 요한의 모습을 수현이 먼 곳에서 몸을 숨기고 지켜보고 있었다.
이동준이 보내온 표는 수현에게도 한 장 있었다. 지난번의 일로 곤란해졌던 수현을 배려한 듯 두 사람에게 따로따로 보내온 것 같았다. 다만 전국 순회공연 중 서울에서의 콘서트는 오늘 단 하루만 열렸다.
홀 바깥의 기자들은 승요한이 사라지자 안면이 있는 기자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기다렸다가 나오는 것을 보고 갈지 그냥 돌아갈지를 논의하고 있었다. 수현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들어가서 볼 것인가, 말 것인가. 여기까지 와서 고민하는 것이 우습긴 했다. 요한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자신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독일에서 예정보다 하루 빨리 귀국했던 두 사람은 그 뒤로 며칠 동안 만나지 않고 있었다. 아마 들어가면 자리는 나란히 있거나 최소한 가까운 위치일 텐데…….
‘그냥 돌아가자.’
무척 아쉽긴 했지만 당장 요한과 마주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수현이 돌아서던 때였다. 누군가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화들짝 놀라 밀어내자 상대는 안심하라는 듯 푹 눌러쓰고 있던 모자챙을 조금 들어 올렸다.
“……너!”
쉿. 검지로 입가를 막은 재욱이 수현을 이끌고 인적이 드문 방향으로 이끌었다.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한 수현은 담담히 그를 따라나섰다. 대기실 방향이었다. 공연이 곧 시작할 테니 이쪽에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다행히 재욱의 얼굴을 알아본 콘서트홀 관계자가 금지 구역의 출입을 허락했다. 안 그래도 연락을 하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왠지 그럴 엄두가 안 나서 미뤄 두고 있었다.
“여기 나타나실 것 같더라고요.”
“너 내 스토커야?”
“저도 공연 보러 온 거예요. 마침 선배도 오겠다 싶었던 것뿐이죠.”
“이렇게 꽁꽁 싸매고 무슨 범죄자인 줄 알겠다.”
“여긴 클래식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올 테고, 요즘 제가 본의 아니게 뜨거운 감자라…….”
머쓱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나니 암담했다. 만일 저 홀에서 모여 있던 인파를 보았다면 요한에게 어떤 기자가 했던 자신에 관한 질문도 들었을지 모른다. 수현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도 재욱은 씩씩했다.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었어.”
“답장 없길래 연락처 잘못된 건 줄 알았어요. 아, 번호는 현주 선배가 알려 줬어요.”
“뭐, 대충 예상하고는 있었다.”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납득했다. 계현주라는 인간에 대해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럴 거면 진작 그냥 알려 줄 걸 그랬다. 섭섭하단 소리 안 해?”
“안 해요. 선밴 가끔 이상하게 선 그을 때가 있어서 이 정돈 익숙해요. 물론 섭섭하지 않은 건 절대 아니에요.”
수현은 픽 웃었다.
“요즘 바쁘겠다.”
“네, 전화위복이 된 건지 논란의 중심에 있다 보니까 제가 공연에 참여하면 갈라 콘서트 표가 평소보다 잘 팔린대요. 와서 직접 본 다음에 씹고 싶어 한다나 뭐라나. 덕분에 학교 다닐 때보다 훨씬 연습 열심히 하고 있어요.”
지금 편안한 그의 얼굴이 힘겨움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짓는 미소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역경을 가능한 한 쉽게 털어 내는 것. 이건 그의 어마어마한 장점이다.
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재욱의 머리를 부드럽게 토닥거렸다. 그러다 일전에 재욱이 자신에게 스킨십이 박하다 말했던 일이 떠올랐다. 본래부터 스킨십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좋아했다. 특히 요한의 차갑게 식은 커다란 손을 붙들어 체온을 건네줄 때면 뿌듯함과 충만함이 차올랐다. 그러나 이제 그는 웬만해선 먼저 누군가에게 손을 뻗지 않았다. 마음을 닫게 되자 행동도 소극적이 되어 갔다.
정말 요한은 나의 많은 걸 바꿔 놨구나.
문득 슬펐다.
“긴히 할 얘기라는 건 뭐야?”
“여쭤볼 게 있어서요. 콩쿠르 심사 위원들이 누구한테 몇 점 줬는지는 원래 비밀에 부치거든요. 그런데 소문에 그날 저한테 전 부문 만점을 준 위원이 있었단 거예요. 그날 전체적으로 심사 위원들 점수가 다 짜서 제가 반대급부로 올라간 거였나 봐요.”
순간 수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전 그게 왠지 승요한인 것 같아서요. 지나친 억측일까요?”
“…….”
“사실 처음엔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거든요. 그럴 리가 없다고요. 그런데 현주 누나가 심사 위원들 알음알음 다 조사를 해 봤더니 다들 좀, 아시죠? 나쁘게 말하면 꼰대 같고, 좋게 말하면 정석이어서. 저처럼 자유분방한 연주에…….”
“자유분방?”
“그러면 열정과 패기만이 가득한…….”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어.”
재욱은 씨익 웃었다.
“아무튼 모든 부분에서 만점을 줬을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대요. 제가 혹시나 요한 씨한테 미움받을 짓을 한 건가, 아니면 반대로 예쁨받을 만한 짓을 한 건가 싶어서요. 선배라면 아실 것 같아 가지고요. 제가 아주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고 해서요.”
“마음에 걸리는 거라니?”
“왜 우리 대문 앞에서 마주쳤던 날요. 이상하게 눈빛이 차가웠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자기가 만점 줘서 그랬던 건 아닐까. 신경 써 줬는데 거기서 노닥거리고 있으니까요. 이건 그냥 제 느낌이니까 너무 새겨듣진 마시고요.”
대충 그가 하는 말의 맥락이 이해됐다. 솔직해지자면 수현은 이 상황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부터 들었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요한의 입김이 들어간 수상이었다 한들 그의 입장에서 변하는 것은 없을 터였다. 무엇보다 원망이 대상이 되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재욱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요한이면? 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잖아.”
“왜 없어요? 있어요. 전 그게 의도적으로 누가 절 띄우기 위해서, 혹은 엿 먹이기 위해서…… 표현이 거칠어 죄송해요. 아무튼 그런 거라면 수상을 거부할 생각이에요.”
“뭐라고?”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입상자의 수상 거부는 서울 국제 콩쿠르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기도 했고, 수현 개인적으로 믿기지 않기도 했다.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그래?”
“지금 당장 욕먹고 있는 게 힘든 건 맞아요. 하지만 단지 상황을 면피하려는 건 아니에요.”
“조금만 견디면 돼. 앞으로 탄탄대로만 남았어.”
“네, 맞아요. 지금 힘든 건 까먹을 만큼 우승한 게 엄청 기쁘고, 지금 고난은 조금 견디면 사람들은 금방 잊으니까. 곧 돈도 많이 벌 수 있을 거고요. 그래도 정정당당하게 수상한 게 아니라는 건 싫거든요. 쓸데없는 자존심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요. 이대로 모르는 척 단 열매만 따 먹는 건 절 피아노로 이끌어 준 선배한테도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요한의 영향으로 그가 우승한 일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일하게 생각한 것도 있었다. 왜냐하면 당장은 무척 힘들고 고통스러울 테지만 멀리 보면 이로운 부분이 훨씬 많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괴로워도 견디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그가 우승했다는 한 줄의 수상 경력과 트로피였다. 서울 국제 콩쿠르 역사에서 당당한 우승자로 이름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사실 재욱이 정말 피아노를 계속해서 치고 싶다면, 스스로 금자탑을 쌓는 것보다 이쪽의 편법이 훨씬 빨랐다. 그러니 한없이 긍정적인 측면만 보자면 재욱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할 일을 요한이 만들어 준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박차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마지막 자존심을 사수하는 그의 궐기.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객기. 누군가의 눈에는 무모하고, 누군가의 눈에는 세상에 다신 없을 등신처럼 보일 그런 멍청하고 용감한 행동으로 말이다. 이런 그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 말인데 한번 여쭤봐 주실 수 있어요? 정말 제 수상에 요한 씨가 손쓰신 건지요.”
“만약 네 생각이 맞는다면 수상을 고사하겠다고?”
“그래야죠. 이미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어요.”
이미 벌어진 일이고 요한이 그린 그림이었으니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라 단정했다. 거기까지가 수현의 한계였다. 그러나 재욱은 지금 그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더라도 이 상황을 돌이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충분히 있다는 듯, 그 편견을 단박에 깨부쉈다. 세상은 객기라고 비난하겠지만 수현은 큰 용기임을 알았다. 자신에겐 없는 것이었다. 그는 생각보다 내면이 단단했다.
사람을 위로하는 건 어떤 식으로 하는 거였더라. 곰곰이 생각했지만 왜 이렇게 아득히 먼 일처럼 느껴지는지 몰랐다. 그래서 그는 당장 생각나는 것 중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했다. 모두 아주 예전에 요한에게 해 주었던 것들이었다.
수현은 대답 대신 재욱을 끌어안았다. 상체를 꽉 끌어안고 부드럽게 등을 토닥였다. 어쩔 줄 모르는 재욱의 손이 허공에서 방황했다. 그 바람에 쓰고 있던 모자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다 한참 동안 자신을 안고 있는 수현을 천천히 마주 안았다.
“선배…… 이거 그린 라이트?”
“넌 꼭 틈만 보이면 바로…….”
어이가 없어진 수현이 허탈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양손으로 밀어내려던 차였다.
“뭘까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수현은 정물화처럼 정지했다. 귀가 무척 좋은 자신인데도 워낙 주변에 공연장 진행 요원들의 발소리가 여러 개라 이쪽으로 사람이 가까이 오는 소리를 전혀 못 들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수현이 힘주어 손을 뿌리치자, 안겨 있던 재욱은 몇 발자국 뒤로 떠밀렸다. 좁은 통로 사이를 막아선 요한의 옆으로 기다란 그림자가 졌다. 낭패였다. 수현은 이마를 찌푸렸다.
<다신 내 눈에 그 새끼랑 단둘이 있는 꼴 보이지 마.>
분명 그가 그렇게 경고했던 게 오래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였다간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그의 입으로 채 듣지는 못했지만 굳이 듣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는 일들이란 게 있었다. 빛을 등지고 선 그는 새카만 정장 차림이라 유독 저승사자같이 보였다. 수현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우선 그 손부터 놓죠. 난 내 거에 손 타는 걸 정말 싫어해요.”
수현의 팔을 붙잡고 어정쩡하게 서 있던 재욱이 발끈했다.
“내 거라니, 선배가 무슨 물건인 줄 아나 봐요.”
창백한 얼굴이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미소 짓지 않는 요한은 차갑다 못해 싸했다. 낮은 경고에도 재욱은 개의치 않았다. 수현에게 험한 취급을 했다는 사실이 그를 화나게 한 것 같았다. 그가 골리앗의 앞에선 다윗이 된 심정으로 요한에게 당당히 돌덩이를 던지려고 하자, 수현이 나서서 중재했다.
“요한, 너 아라비안 숫자 알아? 1, 2, 3.”
그때까지 재욱이 붙잡은 수현의 팔 위에 꽂혀 있던 요한의 시선이 그의 얼굴로 향했다. 흥미로운 눈길이 굳어 있는 수현의 만면에 따갑게 꽂혀 들었다.
“이쪽 용건이 1이야. 네가 2고. 그러니까 할 말이 있다면 기다려. 그 정도도 못 하겠으면.”
“…….”
“꺼져.”
잠자코 지켜보던 요한은 웃음을 터트렸다.
다만 그가 참아 줄 수 있는 한계선은 짧고 명확했다. 딱 거기까지였던 것이다. 요한은 수현이 시키는 대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현의 팔을 붙잡았다.
졸지에 두 사람에게 양팔이 붙들린 모양이 된 수현은 그냥 땅 밑으로 꺼져 버리고 싶어졌다. 현자인 솔로몬도 요한의 막무가내는 이기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 재욱이 먼저 손을 놓고 황급히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역시 저쪽이 더 날 사랑하는군.
재욱에게 단번에 놓인 손을 보고 있자니 허탈했다.
“진짜 뭐 하자는 겁니까!”
“이쪽은 아주 중요한 용건이 있어요.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죠. 그러니까 비키는 게 어떨까요.”
요한이 그러자 재욱이 움찔했다. 지켜보고 있던 수현은 지금 이 상황이, 중재해 줄 솔로몬에까지 이를 필요 없이 요한이 이미 이긴 싸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재욱에 대해 파악하고 적당히 구슬리고 있었다. 재욱은 태생적으로 정의로웠다. 누군가가 위험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느니 본인이 대신 그 수렁에 빠져들 사람이었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라는데 더는 고집 피우지 않을 것이다.
재욱이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자 요한은 수현을 이끌고 그대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아파!”
타악! 주차해 둔 차량 차체에 내던지듯이 팽개쳐진 수현은 일단 저항했다. 그러나 요한은 마른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아무리 밀어내도 요지부동이었다. 게다가 완력에선 승부가 전혀 안 됐다.
그 이후로는 속수무책이었다. 조수석 차 문에 등이 배겨 아팠다. 수현은 바르작거렸다. 그런 그의 양 손목을 결박하고, 요한은 그대로 입을 맞췄다.
“읍……!”
이곳은 거대한 콘서트홀의 VIP용 내부 주차장이었다. 공연을 관람하러 온 VIP 중 누가 갑자기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고, 지천에는 경비용 CCTV가 산재해 있는 곳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 이동준의 공연이 한창이라 인적이 없다는 사실 정도였다.
수현은 입 안으로 과감히 밀려든 요한의 혀를 있는 힘껏 깨물었다. 빨간 혈흔이 입술을 타고 흘러내렸다. 요한의 피는 너무 희소해서 귀한 피였다. 수현은 아차 싶었으나 이제 와서 그에게 말려들 순 없었다. 그를 밀어내고 가려고 하자 손목이 붙들렸다.
“보고 싶었어요.”
뒤늦은 인사는 너무나 뜬금없었다. 게다가 이런 대치 상태에서 나올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수현이 어이가 없다는 양 헛웃음을 터트리자 요한이 그의 입가에 가볍게 키스하며 지분거렸다. 이번에 수현은 요한의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양손을 포박하듯 쥔 요한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이러다 손목을 부러뜨릴 것만 같았다.
“와, 오늘.”
“비켜, 이 새끼야.”
“재밌는데.”
굳이 카테고리를 분류하자면 그는 규칙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만큼 그는 악보에 적힌 대로 강박적일 만큼 정확히 쳤다. 해석은 본인의 것이지만 적어도 악보 상의 음표를 거스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상상하지 못했던 지금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는 게 주의를 끈 것 같았다. 수현은 그의 눈에 비친 흥분이 너무 역겨웠다.
“재밌다니 잘됐다. 그럼 혼자 잘 즐겨. 이젠 아주 손목을 부러뜨리고 싶어서 그래? 이 손 놓으라고!”
“박자마자 쌀 수 있을 것 같아요. 차에서 해 볼래요?”
“넌 머릿속에 든 게 섹스밖에 없지? 넌 본능대로 박고 싸면 끝이지만 난 몇 날 며칠을 고생해야 하는지 알기나 해?”
“그럼 알려 줘요. 섹스가 끝나면 어떻게 뒤처리를 하는지. 우린 콘돔도 안 하니까, 안에서 내 정액을 빼낼 때 어떤 정신 나갈 것 같은 표정을 짓는지!”
“미친 새끼. 넌 돌았어.”
“왜? 여태 날 가르쳐 온 건 너잖아. 이번에도 알려 주면 될 거 아냐.”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저항하던 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뻣뻣하게 굳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요한이 순식간에 조수석 문을 열고 그를 그 안에 처박듯 집어넣었다. 기어에 뒷머리를 부딪친 수현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다 몸을 일으키기 위해 시트를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고는 깜짝 놀랐다. 오른손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 요한이 계속 힘껏 쥐고 있어 그런 것 같았다.
그사이 요한은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향하고 있었다. 팔뚝으로 무게를 지탱해 힘겹게 몸을 일으켰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 조수석 문을 열려고 했으나 손을 뻗어 온 요한에게 움직임이 가로막혔다.
수현은 제발 바깥에서 누구라도 보고 열어 달라는 듯 창문을 연신 두드렸다. 그러다 목덜미가 확, 붙들렸다. 커다란 한 손에 곧은 목 전체가 꽉 감싸였다. 수현은 겁에 질린 눈으로 요한을 돌아봤다. 그는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
“이번 답안지에 ‘꺼져’는 없어.”
“…….”
“더 날 화나게 하지 마.”
왠지 온몸에 힘이 탁 풀렸다. 애써 도망쳐 봤자 금세 붙잡히리란 생각이 드니 맥이 빠졌다.
왜 자신은 재욱처럼 단호하게 그가 내민 손을 거부할 수 없을까.
수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창밖을 응시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리란 듯 어설프게 앉아 있던 그는 시트에 몸을 기댔다.
* * *
커다란 침대 위에 마른 나신이 엎드려 있었다. 상반신의 피부 구석구석 잘 눈에 띄지 않는 곳까지 치아 자국으로 난잡했다. 시트에 반쯤 가려진 하반신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두드러기라도 일어난 것처럼 여기저기가 부어오르고, 상처가 가득했다. 허벅지 사이에 가려진 밀부는 이미 헐어 있었다.
평소 그의 섹스는 썩 정중하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이토록 과격하지는 않았다. 수현이 워낙 어릴 때부터 몸에 상처 내지 않기 위해 만전을 기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그는 그런 최소한의 배려도 없을 정도로 움직임이 사나웠다. 그만큼 요한은 폭주하고 있었다.
수현은 천천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이미 동이 트기 일보 직전인 듯 창밖이 청명한 푸른 기운으로 가득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요한의 작업실에는 시계가 없었다. 그래서 때론 시간이 정지한 공간 같았다. 마치 베츨라어처럼 말이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아침 6시를 조금 넘겼다. 어제 저녁이 채 되기도 전에 작업실로 와서 몇 시간 동안 한 침대에서 전쟁을 치르고, 요한은 새벽녘에 연주를 하고, 자신은 어렴풋이 꺼져 가는 정신으로 그것을 듣고, 그러고 나서도 겨우 다음 날 오전이라니……. 체감으로는 며칠은 지난 것 같았는데 착각이었다.
지난 새벽 요한의 손이 여든여덟 개의 건반 위를 희롱하며 연주했던 곡은 베토벤의 「템페스트」였다. 셰익스피어의 동명 희곡에서 제목을 따온 것이었다. 이 소나타는 제목처럼 대담하고, 긴박했으며, 어두운 열정이 가득했다. 「템페스트」 외에 다른 음악은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니 자신은 요한이 해석한 호화스러운 베토벤을 들으면서 잠들었던 것 같았다.
침대 위는 혈흔과 정액으로 낭자해 마치 전쟁터의 폐허 같았다. 수현은 침대 밖으로 벗어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발을 땅에 내딛자 다리가 풀려 쓰러졌다. 찌걱찌걱하게 굳어 있는 정액이 다리에 우유 자국처럼 남아 있었다.
그는 침대를 짚어 무게를 지탱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일어나 피아노로 향했다. 그 위에서 요한은 청바지 하나만 걸쳐 입은 채로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세상모르고 잠들었을 땐 이렇게나 아이 같은데…….
그가 지난밤 가학적인 섹스를 가했던 폭군과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 이 순간만큼은 믿기지가 않았다. 잠든 그를 자세히 살펴보니 등과 어깨 주변이 생채기로 가득했다. 정신없는 와중에 자신이 낸 것들인 모양이었다. 수현은 손을 뻗어 요한의 기다란 목에 난 난잡한 상처들을 쓸었다.
그 순간.
“깼어요?”
요한과 눈이 마주쳤다. 수현은 자신의 맨발바닥에 걸리적거리는 것이 있어 바닥을 내려다봤다. 종이였다. 수현은 그것을 주워 들었다.
표지 상단에 적힌 것은 역시나 S였다. 악보를 한 장 뒤로 넘기자 ‘S.2’라고 명기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두 번째로 만든 음악이었다. 천천히 음표들을 내려다보면서 머릿속에 소리를 떠올리고 있는데, 손이 붙들렸다. 그 바람에 종이가 단풍이 든 나뭇잎 흩날리듯 서서히 추락했다. 밟으면 바삭, 하고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우리 어디로 도망가서 살까요.”
수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커다란 손을 밀어내고 다시 허리를 숙여 떨어진 악보를 주웠다. 그러자 다시 손이 붙들렸다. 파락, 하고 여러 장의 종이가 한 번에 꽃잎처럼 바닥으로 또다시 떨어져 내렸다.
“형은 난 싫어해도 내 피아노는 아주 좋아하니까, 내가 계속 노력하면 언젠간 나랑 함께 가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한. 아파. 놔줘.”
“7년 전에 했던 약속을 지켜 달라고 말하면, 싫어요?”
“그 얘긴 관두고 나한테 선택을 맡기겠다고 돌아온 거 아니었어?”
“맞아요. 잘 보이고 싶었어요. 이만큼 어른스러워졌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죠.”
“잘 보이긴커녕, 넌 그대로야.”
그는 여전히 제멋대로다. 원할 때 자신의 손아귀에 쥘 수 없다면 파괴해 버리는 방식마저 그대로였다. 수현은 내색하지 않고 있을 뿐 지금 온몸 구석구석이 다 아팠다. 요한이 앉은 채로 수현의 몸을 끌어안았다. 수현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딸려 올라가 그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요한에게 했던 많은 행위들은, 본능이 기억했다.
부드럽고 결 좋은 새카만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감겨 흘러내렸다. 이렇게 애원하는 그를 보면 애틋한 마음이 들다가도 순간 무서워졌다. 그의 피아노 또한 그의 일부기 때문에 끊임없이 혼란이 왔다. 이런 갈팡질팡하는 마음으로는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함께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처음부터 아무런 욕심도 가지지 않고 요한이라는 대단한 피아니스트와 동시대를 살면서 멀리서 연주를 듣는 걸로 만족했을 것이다.
“예전처럼 날 다시 좋아해 줄 순 없을까요?”
그가 불가능한 것들을 요구해 올수록 머릿속이 점점 차갑게 식었다. 수현은 천천히 요한의 뒷머리에서 손을 떼어 냈다. 정면을 향한 수현의 눈에 주방 싱크 위에 꽂혀 있는 조리용 식칼이 보였다. 린이 구색만 맞춰 놓은 것이라 요한은 저런 게 집 안에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수현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배 위로 정수리를 기대 오는 그를 내려다보자, 눈이 시원해지는 긴 목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군데군데 붉게 부어오른 손톱자국이 자신을 부르는 듯했다. 침을 꿀꺽 삼킨 수현은 입술을 달싹였다.
한참이나 수현이 대답하지 않자 어느새 요한이 몸을 일으켰다. 낮은 곳에 있던 그가 자신의 시야에서 훌쩍 높아져 있었다. 그러고는 주방으로 저벅저벅 들어가기에 수현은 머릿속으로 하고 있던 생각을 전부 들킨 양 숨 쉬는 방법도 잊고 굳었다. 그러나 그는 차가운 물만 한 잔 마시고는 도로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현은 뒤늦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일은 못 본 걸로 할게요.”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제야 수현도 왜 자신이 여기까지 끌려와서 이 모양 이 꼴이 됐던 것인지를 퍼뜩 깨달았다. 그의 앞에서 재욱의 얘길 꺼내 괜한 자극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재욱 쪽에서 일의 진위를 대강 파악하고 상을 고사하겠다고 결심했다면 한 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말이 나온 김에 난 그 얘길 해야겠어. 네가 재욱일 콩쿠르에서 입상시킨 거 맞아? 그거 때문에 애가 곤란해하고 있다고.”
“그 얘기라면 고맙단 인사부터 들어야 맞는 것 같군요.”
역시 영향을 끼친 게 맞았군. 짐작하고 있었으나 그의 입으로 확인 사살 당하니 재욱에게 어떻게 이 사실을 전달해야 할지 난감했다. 여전히 그는 사회의 보이지 않는 질서를 이해하지 못했다.
“넌 고맙단 인사를 들을 자격이 없어. 세상은 그렇게 단순한 법칙으로 흘러가지 않아. 오히려 사과를 해야 한다고. 대체 왜 그랬어?”
“친절을 베푼 거예요. 우수현 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혹시 누군가를 속이기 위한 연극은 아닐지, 그것을 확인하고자 수현은 요한의 눈을 들여다봤다. 명확하게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는 늘 감정이 희미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면 나타나는 몇 가지 불안 증세나 초조한 기색들도 거의 내비치지 않았다. 다만 수현은 지금 그가 하는 말만큼은 순수한 진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요한을 오래 지켜봐 온 자신의 직감이었다.
“이런 짓 해도 소용없어. 그런다고 내가 새삼스럽게 널 잘 보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 줘요. 어떻게 해야 돼요?”
“아무것도 하지 마.”
어제 그가 했던 말마따나, 그를 줄곧 가르쳐 왔던 것은 수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의지도 자신도 없었다. 수현이 차갑게 대답하며 요한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러자 그가 수현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픽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