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흔히 요리사가 집에서 요리를 한다거나, 마술사가 실생활에서 마술을 보여 주는 일은 드물다고 말한다. 밖에서 서비스를 판매하는 사람은 예의 서비스를 사적인 영역에서까지 제공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꽃집을 운영하는 사람이 막상 타인에게 꽃을 선물받는 일은 의외로 없었다. 늘 꽃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보다는 다른 선물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수현만 해도 어머니의 생일같이 축하할 만한 상황이 생기면 꽃 외에 다른 실용적인 선물에 대해 우선순위를 뒀다. 그 때문에 그녀가 꽃 선물을 받은 일은 한 손으로도 다 꼽을 수 있을 만큼 드물었다.
이른 아침 집으로 현관을 꽉 채우고도 남을 만한 꽃다발이 배달됐다. 수신인은 어머니의 이름 석 자였다.
“지경미 씨 계십니까? 본인이세요? 여기 사인해 주세요.”
“어머나, 이 큰 꽃을…… 누가 보낸 거예요?”
그녀는 서명하면서도 커다란 꽃다발에서 눈을 떼지를 못했다. 수현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곧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차가운 매실차를 마시고 있는 아버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모르는 일이라는 듯이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우…… 인철 씨께서 보내셨는데요. 부군이시네요.”
배달원이 나가고도, 어머니는 한참이나 꽃다발만 내려다보았다. 어머니는 쉽게 감동받는 사람이었다. 반대로 얘기하면 그만큼 쉽게 섭섭해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여자를 대하는 일에 있어 섬세하지는 못했다. 어머니는 무뚝뚝한 남편과 살면서 내심 불만족스러운 부분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분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혹은 양보하면서 거의 30년을 동고동락했다. 이상적인 부부란 게 있다면 완벽한 형태는 아니겠지만 자신의 부모님을 한 번쯤 돌아봐도 좋을 것이었다.
수현이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웬일로 이런 걸 다 챙겨서 보내셨지?”
수현이 묻자 영 쑥스러웠는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버리는 것이었다. 암묵적 답변 거부였다. 수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꽃다발 안을 뒤적이던 그는 안에 꽂혀 있던 직사각형의 편지 봉투를 꺼내 들었다.
“엄마, 여기 카드도 있어.”
“네가 열어서 읽어 줘.”
내용에는 인쇄된 짧은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두 분의 서른 번째 결혼기념일을 축하드립니다. 기쁜 날이니 기념으로 함께 여행이라도 다녀오세요? 이건 아버지가 쓰신 게 아닌 것 같은데?”
동봉되어 있는 것은 파리행 비행기 오픈티켓과 호텔 숙박권이었다. 수현이 고개를 갸웃하자 아버지는 그제야 현관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제 요한이에게 연락이 왔었다. 사실 요 며칠 정신이 없어서 결혼기념일은 나도 잊고 있었는데 이쯤이라면서 알려 주더구나. 그리고 꽃을 보내겠다기에 네 엄마 좋아할 거 선해서 거절 안 했지.”
평소의 어머니였다면 아버지가 결혼기념일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로 며칠은 토라져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오늘의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요한이 직접 이렇게 두 분의 기념일을 챙긴 것이 꽤 감격스러운 모양이었다.
“세상에, 내가 파리 가고 싶다고 했던 거 우리 요한이가 기억하고 있었나 봐. 어떻게 나한테 꽃을 보낼 생각을 다 했을까! 꽃 선물은 거의 10년 만에 받아 봐요.”
<30주년에는 꼭 파리에 가서 에펠탑 앞에 나란히 앉아 바게트를 먹어요. 거기서 먹는 바게트가 그렇게 맛있대.>
20주년 기념으로 가까이 상해 여행을 다녀왔던 어머니가 지나가듯 했던 말이었다. 어머니는 낭만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에 파리가 가장 기준에 부합하는 도시인 것 같았다. 옆구리만 쿡 찔러도 왈칵 눈물을 쏟을 기세라, 수현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고 보면 올해로 부모님이 결혼한 지 딱 30년째였다. 자신도 미처 생각하고 있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상하게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왠지 그가 이런 선물을 보내온 것이 단순히 축하의 의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다고 분명히 말했었는데 그는 역시 듣는 시늉만 했던 모양이었다.
이제 그가 선의를 베풀면 고마운 마음이 들기보단 이런 행동을 하며 그가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부터 떠올리게 됐다. 지금 수현의 이런 냉소는 전부 요한이 자초한 것이었다.
“소원대로 결혼 30주년에 파리 가시겠네. 이건 비행기 표고, 이 숙박권 안에 있는 명함 보니까 이쪽에서 여행 패키지로 도와준다는 것 같아요. 내가 연락해 볼까?”
“둬라. 이런 일은 손 안 대고 코 푼 네 아버지 시켜야지. 그런데 수현아, 요한이한테 이렇게 받아도 되는 걸까?”
“당연히 돼. 엄만 그럴 자격 있어.”
어머니의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돌아선 아버지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산통을 깨고 싶지는 않아서 수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그쪽에서 먼저 대화를 청해 오는 것이었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겠니?”
어머니와의 사이처럼 스킨십이 익숙할 만큼의 썩 살가운 관계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자녀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자라면서 아버지와 데면데면해지곤 하니까. 그래도 수현은 다른 집 아들들에 비해 곰살궂게 구는 편이었다. 두 사람이 오전 산책을 하러 단둘이서만 나간대도 어머니가 이상하게 바라보지는 않을 정도는 됐다. 그는 아버지를 묵묵히 따라나섰다.
* * *
간밤에 이슬비가 내려 오전 공기는 어제보다는 덜 후덥지근했다. 젖어 있는 아스팔트는 햇빛이 비치기 시작하면 바짝 마를 것이었다.
수현은 아버지를 따라 잠자코 걸었다. 집 근방의 좁은 산책로를 두 바퀴쯤 걸었을까. 내내 침묵하고 있던 아버지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제 요한이를 만났다.”
단둘이 만나 나눴을 대화라는 게 전혀 상상도 가지 않았다. 10년 가까이 한집에서 부대꼈지만 아버지와 요한이 나눈 대화의 시간을 통틀어도 두어 시간이 될까 말까 할 것이다. 아버지는 요한을 어려워했다.
“널 독일로 데려가고 싶다더구나.”
린의 제안에 대해서는 요한에게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가능하면 요한이 모르길 바랐기에 신의를 지켰다. 그는 린이 자신을 찾아와 영입 제안에 대한 얘기를 꺼냈단 걸 알게 된 걸까. 아니면 그저 여태 생각해 왔던 대로 아버지에게 말을 꺼냈을 뿐인 것일까. 궁금한 일은 정면 돌파가 제일 빠른 해결책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직구로 물었다.
“스카우트 얘길 하던가요?”
“그래. 네가 먼저 같이 가겠단 말을 꺼내 주길……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기다리려고 했는데 린이 너한테 이미 얘길 꺼낸 것 같다더구나.”
“전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어요.”
“고민하고 있는 걸 보니 아주 가망이 없는 일은 아닌 거야?”
“엄청난 제안이긴 해요. 클라시스잖아요.”
“그 엄청난 제안이란 건, 요한이 아니었다면 너한테 없었을 기회인 거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자리이긴 해요. 9급 공무원이 청와대 민정 수석으로 직행하는 셈이라고 하면 되려나.”
“하지만 요한인…… 그 애랑 같이 있어도 너 정말 괜찮겠어? 게다가 말도 안 통하는 외국 땅이다. 만에 하나 그때처럼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상처를 끄집어내는 것은 어떤 피해자에게나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하던 말을 멈췄으나 수현은 미처 부치지 못한 편지의 뒷부분이 어떤 내용인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는 수현이 손을 다친 데에 요한이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사실을 이미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굳이 서로 말하지 않아도 수현은 여태까지의 그의 태도로 미루어 알 수 있었다. 다만 모르는 척해 왔을 뿐이었다. 당시 수술 집도의였던 이윤도가 지나치게 감정적인 어머니에겐 함구하고 아버지에게만 넌지시 그럴 가능성에 대해서 일러 주기도 했다는 것 같았다.
“요한이가 널 아직도 좋아하니?”
“모르겠어요. 절 좋아하는 건지, 좋아한 적이 있긴 했던 건지, 누굴 좋아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그 애한테 있긴 한 건지. 너무 걱정 마세요. 따라가고 싶지 않아요. 아까운 마음에 손에서 버리지를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아버지의 안도 반, 착잡한 마음 반인 한숨이 무척 길었다.
“일이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았어야 했다. 아니, 알았는지도 모르지. 나는 알면서도 그 애를 내칠 수가 없더구나. 내 욕심이 너를 망쳤다.”
수현은 할 말을 잃었다. 아버지가 그 사고에 대해 본인을 탓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워낙 말주변이 없는 아버진 그런 내색이 한 번도 없었다. 당혹스러우면 어안이 벙벙해져 아무런 반응도 보일 수도 없다는 말은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았다. 아버지는 한참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수현을 기다렸다.
“어차피 거절할 거니까, 엄마한텐 말씀하지 마세요.”
“그건 걱정 말거라. 먼저 들어가렴. 난 조금 더 걸어야겠다.”
묵례하고 돌아가는 수현의 뒷모습을, 그는 시야에서 없어질 때까지 지켜봤다. 눈앞에서 완전히 수현이 사라지자 도로 비에 젖은 산책로를 천천히 걸었다. 길의 끝에는 24시간 편의점이 한 곳 있었다. 그는 담배와 라이터를 하나씩 사서, 파라솔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담배를 끊은 것은 근 30년이 다 되어 갔다. 처음 시도했던 것은 임신한 아내를 위해서였다. 젖 먹던 시절의 자제력까지 전부 끌어모아 간신히 성공했고, 여태껏 잘 버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아내 몰래 다시 담배를 손에 대게 됐다. 이미 15년 전 요한을 데려오기 전에 한 번, 그리고 9년 전에 수현이 다쳤을 때 몰래 피운 적이 있었으니 한 번. 이번이 정확히 세 번째 외도였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때 그런 선택을 했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하고 후회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의 경우에는 자신의 인생이 아니라 귀한 아들의 인생을 망치고 말았다는 깊은 회한이 있었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됐는지를 곰곰이 따지며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몇몇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그때 자신이 브레이크를 걸었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필터를 깊게 빨아들였다.
“후…….”
처음 요한을 만난 것은 아내가 다니던 성당에서였다. 수현 하나를 잘 키우는 것도 벅찼기 때문에 혼자가 된 요한을 거두는 일을 극구 반대했으나, 아이가 수현과 같은 희귀 혈액형의 보유자라는 말에 귀가 혹해 한번 얼굴이나 보자고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나타난 요한은, 성을 그대로 쓰겠다고 담담히 말했다. 키워 주신 신부님은 돌아가셨지만, 실제로 호적은 그의 사촌 동생에게 속해 있으니 굳이 자신을 법적 양자로 받아들여 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자신들을 향해 벽을 치고 있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거둬 함께 키워 보자고 아내에게 말했다.
막상 함께 살게 된 뒤로도 요한은 입적되는 일을 거부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아이의 마음을 억지로 열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뒤 나라에서 호주제를 폐지하는 바람에 전부 흐지부지됐다. 차라리 그때 억지를 써서 요한을 진짜 아들로 입적시켰었다면 두 아이들은 비정상적인 연애 놀음 같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아이를 정말 친자식처럼 대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정말이지 몇 번이나 후회했다.
요한은 늘 어려운 아이였다. 특히 그에게는 더했다. 아이가 연주하는 피아노 연주 때문이었다. 처음 아이가 제대로 연주한 모습을 봤던 날이 불현듯 떠올랐다.
승국환 신부가 사망하기 전, 성당에서도 요한은 피아노를 아주 잘 치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언젠가 한번 성가대의 반주자가 탈이 났던 적이 있었다. 무반주로 노래를 불러야 하는 상황이 되자 승 신부는 마침 예배당 근처에 있던 요한에게 몇 곡의 반주를 부탁했다.
아이는 처음 듣는 음악들을 CD 연주로 한 번씩 듣더니 그대로 연주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아내는 한눈에 아이에게 무척 반했던 모양이었다. 집에서 함께 살자며 요한을 정식으로 데려오고 나서 그녀가 제일 먼저 보여 주었던 것도 바로 수현이 치던 낡은 피아노였다.
<이제 치고 싶은 만큼 마음껏 쳐도 돼.>
그녀가 허락하자 요한은 그 순간 바로 피아노 뚜껑을 열고 저녁도 거른 채 오후 내내 연주했다. 그때 그들이 살고 있던 곳은 지금의 집이 아니라 더 낡고 외진 곳에 있었다. 승강기조차 없는 연립 주택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늦은 시간 퇴근하고 계단을 올라오던 그는 문을 열면서 이렇게 말했다.
<누가 이 시간에 이렇게 음악을 크게 트나 몰라?>
그리고 양손에 들고 있던 피자 박스를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는 바로 알아챘다. 이것이 아주 완벽한 연주라는 것을 말이다. 여태껏 클래식에 문외한인 아내가 하는 얘기라 얼마나 대단할까 내심 가볍게 여긴 것도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진작 귀담아듣지 않은 것을 깊이 후회했다.
그는 수현과 나란히 현관에 우두커니 선 채로 요한의 연주를 들었다. 그때 자신이 짓고 있던 표정은 수현의 것과 똑같았다. 연주가 끝나자마자 피아노 위에 탈진한 듯 쓰러진 요한에게 그는 물었다.
<지금 뭘 친 건 줄은 알고 있어? 연주를 따로 배운 적이 있는 거니?>
<봤어요.>
<네가 보면 바로 외워서 칠 수 있다고, 경미 씨도 그런 얘길 했었지. 그럼 공연장에 간 적이 있는 거야?>
<텔레비전에서만 봤어요.>
<그래? 그런데 연주할 때 버릇들이 이상하게 낯이 익구나.>
너무 말라서 품이 한참 남는 셔츠. 그 아래 앙상한 팔. 뼈가 불쑥 튀어나온 손목. 그리고 그 위로 쭉 뻗은 크고 곧은 손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더 말할 기운도 없다는 듯이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외면당한 그는 아이가 연주한 음악 목록들을 쭉 되짚어 보다가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낯설지 않은, 누군가의 연주 기법들이 그제야 새록새록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다루는 데 서툰 인터넷으로 평소 자주 틀어 놓는 클래식 케이블 채널에서 어제저녁 방영해 준 리사이틀 실황 다시 보기를 찾아냈다. 어젯밤 소파에 누워 맥주 한 캔을 마시며 보는 둥 마는 둥 했던 영상들이 머릿속에 저절로 재생됐다.
「예술의 전당과 함께하는 스크린 콘서트 ― 피아니스트 이동준 리사이틀」.
어제저녁 처음이자, 딱 한 번 송출된 프로그램이었다. 아이는 이걸 단 한 번 보고, 듣고 악보도 없이 베토벤의 소나타 네 곡을 연달아 완곡으로 연주한 것이었다. 이동준이 연주한 소나타의 순서마저 정확히 일치했다. 이상할 정도로 눈에 익어 보였던 것은 어젯밤 스치듯이 보았던 이동준의 연주와 판박이처럼 흡사한 버릇으로 연주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너무나 놀라서 밤새 잠도 오질 않아 뜬눈으로 새벽을 하얗게 지새웠다. 아침이 되자마자 학교에 전화를 해 병가를 내고, 급한 대로 근처 전자 상가로 가 중고 캠코더를 한 대 샀다. 그러고는 잠들어 있던 요한을 붙들어 앉혀 어제의 레퍼토리를 그대로 연주하게 했다.
밤새도록 연이 닿아 있는 사람들을 전부 떠올려 봤지만 아마추어에 일개 학교 선생인 자신의 주변에 아이를 상담할 만한 음악가는 없었다. 그렇다면 영상이라도 만들어 이동준에게 보내야 했다.
피아노 앞에 앉은 요한은 무척 부드럽게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런 뒤 천천히 내렸다. 수현이 연주할 때의 습관이었다. 연주 전 마음을 가다듬듯 건반 위에 양손을 올리는 귀여운 버릇. 아마 수현이 하는 연주를 본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이는 물을 흡수하는 솜처럼 주어지는 모든 것을 전부 흡수해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잠자코 지켜보던 그는 요한의 연주가 길어질수록 머리가 울리고,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영상을 편집할 잔재주 따위가 그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촬영을 모두 끝낸 그는 캠코더 채로 그것을 들고 한국 대학교로 무작정 찾아가 이동준의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렸다. 늘 신사다운 태도의 그에게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정성이 빛을 발했는지 피아노과의 조교를 통해 이동준을 만났다.
화면을 보자마자 자신의 연주를 보고 그대로 따라 친 것이라는 것을 알아챈 이동준은 당장 아이를 만나 보겠다고 청원해 왔다. 함께 집으로 가는 길에 그는 아이의 개인적인 사정에 대해 설명했다. 이동준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리고 직접 아이의 연주를 한 번 듣자마자, 그와 아내에게 요청했다.
<당장 외국으로 보내야 해요. 재정적으로 부담되실 테니 후원 재단은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아니면 제가 대부가 되어 아이를 법적으로 입양하면 어떨까요? 아직 적이 이 댁이 아니라 돌아가신 신부님 동생분 아래 있는 것으로 압니다.>
<댁의 부인분께서도 동의를 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제 아내는 허락할 겁니다. 저보다 더한 클래식 애호가예요. 요한의 재능을 못 알아볼 리가 없어요. 우 선생님과 부인분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진행해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가 허락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우선 요한이 의견을 들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 저녁 그는 요한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동준이라는 유명 피아니스트가 너를 맡아 보고 싶어 하는데, 이건 너에게도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식이었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동준에게 가는 일이 좋았다. 또 더 많은 사람들이 아이의 연주를 들을 필요가 있다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라 명확한 사실이었다. 자신은 틀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데, 왠지 막상 아이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섭섭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요한은 처음으로 불편한 표정을 내비쳤다. 이 집에 와서 한 번도 그런 기색을 보였던 적이 없었다. 그는 놀랐다. 아이가 꺼낸 말 때문에 그의 마음이 굳건한 댐 무너지듯 허물어졌다. 요한은 검은 눈동자로 그를 똑바로 직시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또 버려지나요?>
<…….>
<아저씨랑 아주머니만 괜찮으시면 전 여기 있고 싶어요. 절대 부담드리지 않을게요.>
그러자 더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요한이 그렇게 나와 주어서 반가웠던 것은 자신이었다. 요한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 깊숙한 곳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 일 또한 후일의 그는 두고두고 후회했다. 수현이 다치기 전에, 희망과 미소, 사랑스러웠던 기운과 에너지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전에 자신이 아이를 어떻게든 이동준에게 보내기로 용단을 내렸다면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좋지 않았을까. 그가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이 가족은 자신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악의 결말로 치닫고 말았다.
우인철은 어느새 뭉툭해진 담배를 비벼 끄곤, 담배 한 대에 또 불을 붙였다. 싸구려 라이터는 불이 잘 붙지 않아 몇 번이나 엄지로 휠을 긁어야 했다. 아침부터 궂은 날씨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는 칙칙한 색깔의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 온 뒤 땅이 굳어지고, 하늘은 맑아져야 정상인데 아직도 어둑어둑했다. 아직 비가 덜 내린 것 같았다. 하긴 여름이니 곧 장마가 올 것이다.
“올해 여름도 가물려나…….”
몇 번 라이터를 더 켜 보던 그는 이내 담배와 라이터 모두를 던지듯이 버리고는 일어섰다.
* * *
출근해 보니 스승으로부터의 전언이 있었다. 독주회 초대장을 두 사람 모두에게 보냈건만 요한도 모습만 드러냈다 사라지고, 수현은 애당초 모습도 드러내지 않았다며 제자 농사를 잘못 지은 것 같다는 투정 아닌 투정이었다.
메모지에 적힌 전언을 읽고 있던 수현은 죄송한 마음에 밥을 사겠다고 덜컥 약속을 잡았다. 그러자 이동준이 그럼 요한도 부르는 게 좋겠다며 판을 키우는 것이었다. 수현이 오는 자리를 요한이 마다할 리 없었다. 아마 그런 계산도 깔려 있었을 것이다.
한식은 이동준이 좋아했다. 그래서 일부러 그의 단골집인 이 식당으로 장소를 골랐다. 요한은 먹고 나면 속이 부대낀다며 좋아하지 않았고, 수현도 특별히 선호하지는 않았다. 커다란 한 상에 갖가지 한정식들이 준비되자 기부터 질렸다.
“많이들 드세요. 오늘은 제가 사는 거니까.”
“무슨 소리야. 너희가 대접하고 계산은 내가 해야지. 나이 들수록 지갑을 잘 열어야 젊은 친구들하고 어울릴 수가 있어요. 먹자꾸나.”
한참 동안 젓가락과 숟가락이 왔다 갔다 하는 소리만 들렸다. 요한은 역시나 예상대로 깔끔하고 냉한 반찬에만 몇 번 손이 가는 듯하더니 금세 수저를 내려놓았다. 이동준은 요한이 여전하다며 웃었다.
“그건 그렇고, 요한이 넌 언제쯤 베를린으로 돌아갈 생각이지?”
“결정하면요.”
“지금 내리면 되잖아.”
“음, 공이 제 손을 떠나서요.”
요한은 미지근한 물을 반쯤 마셨다. 그가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수현은 괜히 마음 한구석이 찔려 불편해졌다. 이동준은 린이나 그의 소속사, 그리고 수많은 그의 팬들처럼 하루라도 빨리 독일로 요한을 돌려보내고 싶어 했다. 일전에는 수현을 따로 만나 부탁하기도 했는데 여전히 일이 답보 상태니 답답하기도 했을 것이다.
“기억하니? 요한인 콩쿠르에 나가고 싶지 않아 했었지. 엄청난 인재가 한국 땅에서 소모되고 닳을까 봐 난 걱정이 컸었어. 그래도 어찌어찌 마음먹어 줘서 여기까지 왔구나.”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콩쿠르에 출전하겠다고 결심해서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었다. 콩쿠르는 규모가 클수록 길게는 몇 년도 바라보고 준비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번갯불에 콩을 구워 먹듯이 몇 달간 급히 준비해서 출전했고, 그럼에도 그 누구보다 훌륭한 연주를 해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게 그의 첫 콩쿠르인 차이콥스키 콩쿠르였다.
수현이 머릿속에 그때 두 사람이 함께 연주했던 「꽃의 왈츠」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요한도 그런 것 같았다. 나란히 앉아 있는 그가 수현의 손등 위에 두드러진 뼈를 만지작거렸다.
“수현아, 그때 내가 요한일 뭐라고 설득했는 줄 알고 있어?”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보렴. 요한이를 움직일 수 있는 마법의 단어를 우리는 알고 있잖아.”
당장 떠오르는 것은 있었으나 자신의 입으로 담기가 어려웠다.
“수현아, 요한일 연주하게 해야 해.”
“연주는 꾸준히 하고 있어요.”
그는 수현에게 물었으나 대답은 요한이 했다.
“무대에 있어야지. 들어 주는 사람이 있어야 돼.”
“형이 듣고 있고요.”
이 대답 또한 수현에게 물었으나 요한이 했다.
“수현이 ‘너만’ 듣고 있지.”
이동준이 수현에게 묻고, 수현은 침묵하고, 요한이 대답하는 구도가 한참이나 지속됐다. 이 긴장이 그의 스트레스를 쌓이게 했던 모양이다. 요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더는 못 들어 주겠다는 듯 눈을 차분히 감았다 뜨더니, 싸늘하게 일갈했다.
“그만. 주제넘은 거 모르시겠어요?”
“요한아.”
“더는 형 흔들지 마세요. 그건 저만 할 수 있어요.”
그를 더 자극해선 안 되겠다고 느꼈던지 이동준은 뒤늦게 말문을 닫았다. 수현은 이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가 향한 곳이 어느 방향인지 알 수 없어 좌불안석이었다. 그들의 스승은 저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요한밖에 몰랐다. 요한은 더는 못 견디겠다는 양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수현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대로 일으켜 밖으로 나가려 하자, 잠시 침묵하고 있던 이동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수현아, 이건 학대야.”
강제로 요한에게 일으켜지던 수현은 깜짝 놀라 이동준을 돌아봤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이동준의 얼굴은 자신은 실언하지 않았다는 듯 담담했다. 수현은 그를 존경해 왔던 오랜 시간들이 왠지 허무해졌다.
자신만 요한에게 당하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도 그에게 그 못된 짓을 하고 있다고, 그들의 스승은 수현에게 말하고 있었다. 방법이 다를 뿐 서로가 서로 때문에 괴로운 것은 맞다. 어떤 의미로는 수현도 요한을 구속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그를 학대하고 있다 말을 하는 건 온당하지 않았다. 요한에게 함몰되지 않기 위해, 그라는 바다에 수몰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가까스로 비참한 삶을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었다. 자신은 피해자였다.
그런 내게, 감히 가해자라고 말하다니.
자신을 붙든 요한의 손을 뿌리친 수현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이동준의 앞에서 그런 예의 없는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 * *
일전에 현주와 독대한 적이 있는 집 근처의 카페는 내부 인테리어가 여전했다. 변한 것은 여름 시즌 메뉴로 빙수를 판매하게 됐다는 정도일까. 창밖의 하늘은 청명했지만 반대로 땅에서는 희뿌연 김이 올라오는 듯했다. 뜨겁게 데워진 아스팔트 때문에 공기도 달아오르고 있었다. 새로운 계절이 도래한 것이다.
“지난번 통화한 뒤로 처음 보나? 왠지 좀 어려워서 연락을 할 수가 있어야지. 할 말이 저어엉말 많았거든.”
“그럼 계속 어려워하지 그랬어.”
“에이, 너무 날 세우지 마. 고슴도치 같다.”
“요한이 별말 안 해?”
“하지 왜 안 해. 적당히 해 달라는 거였는데 내가 오버해서 너무 널 긁었나 보더라. 린이란 여자가 먼저 전화 왔었어. 너희 가족 건드리면 소송도 불사하겠다더군. 고마워. 네 덕분이야.”
“덕분이라…….”
그녀의 말을 곱씹던 수현은 픽 웃었다. 빨대로 차가운 커피를 쪽 빨아들여 마시는 붉은 입술이 왠지 얄미운 건 자신이 못된 탓일까.
“사람들이 기자를 낚시꾼에 비유하는 건 그냥 하는 게 아냐. 그래도 뭐든 낚으려면 찌가 있어야 하지 않겠니? 난 이 일로 네가 정말 요한을 낚기 좋은 찌라는 걸 다시 깨닫게 됐어.”
“하…… 그래. 그 얘긴 관두자. 꼭 해야 한단 얘기는 뭐야? 아까 전화로 네가 그랬잖아.”
오후에 이동준과 만난 뒤 수현은 내내 컨디션 난조였다. 요한도 그런 그를 알고 웬일로 집까지 고이 모셔다 주고는 돌아갔다. 그래서 전부 잊고 푹 쉬려고 했으나, 그녀가 워낙 간곡하게 만나자고 부탁해 오는 통에 이곳까지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한 것이었다.
현주는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하는지 단어를 고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결심한 듯 꺼낸 말은 한참 고심한 것치곤 지나치게 직설적이었다.
“나 너희들 키스하는 거 봤어.”
맙소사. 수현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황망해진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섣불리 해명했다가는 그녀가 파 놓은 구덩이에 더 깊이 빠질 것 같아 그저 침묵했다. 현주는 개의치 않았다.
“일부러 보려던 건 아니었는데 요즘 나한테 행운의 여신이 강림하셨나 봐. 이동준 콘서트 하던 날 VIP 주차장에서 너희 다투는 거 봤거든. 와, 대담하더라. 너무 살벌해서 카 섹스라도 하는 건 아닐까 했는데 아쉽게도 타고 금세 가 버리더군.”
그럼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도와주지 그랬니.
수현은 턱 끝까지 욕지거리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몇 번이고 되새기면서 겨우겨우 참아 냈다.
“너무 경황이 없어서 사진을 못 찍었어. 거기까진 운이 못 미쳤나? 그래도 난 확신해. 너희 그때 어디든 가서 잤을걸? 특히 요한은 안 그러고는 절대 못 견딜 분위기였다고.”
“…….”
“있잖아, 수현아. 둘이 사귀니?”
안 그래도 그 주차장은 CCTV 천지에 주차 공간도 넓어서 보는 사람 하나 없었을까 불안하긴 했었다. 정말로 누군가 봤을 줄이야. 그리고 하필이면 그게 바로 이 개처럼 물고 늘어지는 여자였을 줄은 몰랐다. 그녀에게 운이 깃든 만큼 자신에겐 불운이 떠밀려 온 듯했다.
“안 사귀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도 의외로 수현의 이 말을 쉽게 믿는 것 같았다.
“그래, 그런 것치곤 동등하지 않아 보이긴 하더라. 그럼 그냥 자는 관계? 요한은 잘해? 잘하겠지? 나도 그랑 자 보고 싶어.”
“네가 직접 부탁해.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건 성희롱 아냐?”
“음, 성희롱처럼 들렸다면 미안해. 그러면 다른 얘길 해 보자. 네가 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자 「꽃의 왈츠」 맞아?”
그녀는 종종 날카롭게 정곡을 찔렀다.
“요한 같은 인간이 계속 너한테 질척거리는데 왜 연관을 못 지었을까. 나 몰랐는데 편견이 좀 있나 봐. 남자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 했어. 어머님께 너희가 형제처럼 자랐단 얘길 들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그날 요한 눈빛이 좀 이상하더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아, 너 그때 자리 비우고 없었구나. 일전에 인터뷰했던 날, 그 ‘여자’를 만나러 한국에 온 거냐고 물었더니 날 한심하게 쳐다봤거든. 그럴 만도 하지. 남자였는데!”
머리를 열심히 굴려 봤지만 그녀가 이런 말을 꺼내는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만약 알게 된다 한들 현주 같은 유형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선뜻 결정하지 못할 것이다. 당일에 당장 연락해 오지 않고 며칠 뒤 수현만 따로 만나자고 한 것을 보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 모양인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수현은 뇌가 다 쪼개지는 듯한 두통을 느꼈다. 자신에게 이동준이나, 그에게 린 같은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니고서야 두 사람의 이 비상식적인 관계를 들켰던 적이 없어서 면역이 안 돼 있었다.
“너희가 키스하는 걸 봤다고 뭘 어떻게 해 보겠단 건 아냐. 다만 내가 그날 이후 깨달은 바가 있어서 널 좀 조사해 봤어. 네가 출전한 콩쿠르 영상들을 쭉 봤거든.”
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휴대폰 파일을 뒤적여 어떤 영상을 찾아냈다. 화면의 화질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누군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수현은 당장 알아봤다. 열일곱 살, 주니어 콩쿠르에 출전했던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이 긴장 가득한 옆모습, 입고 있는 연미복, 머리 스타일.
그때 연주했던 곡이 무엇이었는지도 기억에 선연했다. 현란한 음표를 자랑하는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였다. 아무리 자신이 며칠 밤낮 코피 터져 가며 연습해도 우승자는 정해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 일부러 선곡할 때 자신에게 썩 어울리지 않는 곡으로 욕심을 부려 자기만족이라도 지키곤 했던 것이다.
“네가 출전한 대회 영상 구할 수 있는 건 다 구해 봤어. 너 예중, 예고 나왔길래 네 동창 중에 같이 콩쿠르 출전했던 친구들 전부 수배해서 촬영한 영상 같은 게 있는지 물었지. 간신히 서너 개 건졌는데……. 이거 네 습관이더라?”
그러고는 어떤 한 장면을 편집한 영상을 반복해서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 네모난 상자 속에 든 수현은 지금의 요한의 버릇으로 유명한 행위를 똑같이 하고 있었다. 건반 위에 양손을 솜털처럼 내렸다가 떼어 내는 그 움직임은 마치 피아노에게 잘 부탁한다고 속삭이는 듯 보였다. 실제로 어릴 때의 수현은 이 과정을 통해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손끝으로 전하곤 했다.
―부디 잘 부탁해.
“참, 스무 살 되자마자 연락 뚝 끊겼다고 다들 섭섭해했어. 꼭 연락 부탁한다고 전해 달래. 성종완 씨랑, 김혜은 씨. 또 누구였지.”
“이게 사생활 침해라는 건 알고 있어?”
“미안. 내가 그 사생활 침해로 밥을 벌어먹고 살아. 다행히 기자들은 법적으로 빠져나갈 구멍이 있기도 하고. 그런데 수현아, 너희 부모님은 너희 관계 알고 계시니?”
수현은 숨을 힘겹게 삼켰다. 손을 다친 일이야 부모님도 누구 짓인지 짐작하는 듯했지만, 더 깊은 사연까지 알고 있는지는 수현 자신도 몰랐다.
“그래서 말인데 수현아, 네가 요한에게 잘 좀 얘기해 봐 주지 않을래? 나도 요한이랑 자 보고 싶어. 어떻게 안 될까?”
하, 그는 어이가 없어 긴 한숨을 터트렸다.
“미친 소리 하지 마. 요한은 창녀가 아냐.”
“그렇게 정색할 거 뭐 있니? 농담이었어.”
“넌 이딴 개 같은 소릴 농담이랍시고 하나 봐?”
“네가 너무 티 나게 긴장한 것 같아서 그런 거야. 어차피 예술가들 거의 괴짜인데 여자 남자 양쪽 다 되는 게 드문 일도 아니고, 차이콥스키도 게이였는데 뭐.”
“차이콥스키가 게이고 요한이 양쪽 다 되는데 뭐? 뭘 어쩌라고. 걘 인생이 영화 주인공 같은 애야.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남자랑 몇 번 잔다는 게 특별할 일도 아냐.”
“에이, 겨우 몇 번 잔 게 아닐 거 같은데?”
“현주야, 나 너무 피곤해. 그냥 본론만 얘기해.”
“아, 그렇지. 내 진짜 용건은…… 그런데 너 날 너무 쌍년 보듯 보는 거 아니니?”
“그건 네가 진짜 쌍년이니까 그래.”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수현이 거칠게 대꾸하자, 그녀는 동의한다는 양 가볍게 웃어넘겼다.
“아무튼 내 용건은 이거야. 네 입장에서 두 사람 얘기가 듣고 싶어. 너희 관계가 난 아주 흥미롭거든. 서로 버릇까지 겹칠 만큼 애틋한 사이인데 요한만 널 원하고, 넌 좀 아리송해. 근본적으로는 두려워하는 것 같달까.”
너무 여러 번 정곡을 찔려 아팠다. 추잡하게 약점을 잡아서 물고 늘어지는 그녀가 언제나처럼 혐오스러웠다. 거기에다 오늘은 분노까지 더해졌다. 뒷일은 모르겠다. 가뜩이나 자신은 오늘 화가 여러 겹으로 쌓여 있는 상태였다. 이쯤 되면 이판사판 공사판이다. 먼저 이 무대를 개판으로 만든 것은 그녀였으니까.
수현은 그녀를 또렷하게 직시했다. 그는 쐐기를 박듯 가장 분명하고 또박또박 말했다.
“지옥에나 가, 이 쌍년아.”
그는 그녀를 두고 그대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