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개강을 2, 3주가량 앞둔 때가 되면, 실기실은 「음악인의 밤」에 출사표를 던진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방학 기간에 적막한 다른 단대 건물에 비해 드문 현상이었다.
모두 성인들이지만 사람이 많아질수록 필연적으로 일정 부분 통제가 필요해졌다. 그런 때 학생들 사이의 문제를 중재하는 것이 조교들의 역할이었다. 매해 주사위를 돌려 선정된 교수들도 모여 학생들의 요청 곡을 한 곡 합주하게 되는데, 이때 필요한 악보, 연습실, 교수들끼리의 스케줄 취합 등 제반 일체 역시 조교들이 준비해야만 했다. 그 탓에 바쁜 것은 비단 학생들뿐만이 아니었다. 음대의 조교들 사이에서는 여름 방학 막바지가 되면 학기 중보다 더 바쁘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올 정도였다.
올해 교수들이 연주하게 될 곡은 말러의 「교향곡」 제5번이었다. 실내악으로 편곡한 버전을 연주할 예정이었다. 영화 「베니스에서 죽다」의 배경 음악으로 쓰였던 유명한 곡이기도 했다.
지금은 널리 듣고 있는 세련된 명곡 취급을 받지만 당시 초연을 했을 때는 귀에 익지 않은 기법이라며 혹평 세례가 쏟아졌다고 한다. 특히 아다지에토, 그러니까 ‘매우 느리게’를 표방하는 4악장은 「베니스에서 죽다」의 우울하고, 안개가 자욱한 바닷가의 습기와 잘 어울려서 수현도 가끔 듣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듣고 있으면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그는 음악 도서관에서 악보를 복사해 나온 뒤 음악관 건물을 쭉 올려다봤다. 8층, 요한의 전용 공간은 가장 끝 층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근 두 달 가까이 요한은 학교에 걸음하지 않았다. 그는 시원한 자신의 작업실에 틀어박혀 작곡하기에 바쁜 것 같았다.
이번 음악제는 신설된 승요한 홀에서 공연될 예정이라 공연장과 악기들을 미리 점검하는 일도 수현이 해야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은 각 학과에서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하고 있었는데, 요한이 한국대에 오면서부터 그의 이름과 아주 조금이라도 결부된 일은 전부 수현이 떠맡게 됐다.
승요한 홀에 들어온 그는 고요한 무대 위에 주인공처럼 우뚝 세워져 있는 피아노로 다가갔다. 그리고 깔끔하게 닦여 있는 건반 위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피아노.
요한은 피아노를 평생 친해지지 못할 평행선상의 친구 같다고 표현했다. 자신에게 피아노는 이미 결별한 애인이었다. 사랑했지만 주변의 극심한 훼방으로 헤어져야만 했던 비극적인 첫사랑 정도로 표현하면 너무 자기의 불행에 취한 신파 취급을 받을까.
건반을 누른 손끝에 힘을 주자 홀 안에 울려 퍼지는 소리는 빛깔부터 달랐다. 지금 이 순간, 여긴 자신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는 곳이었다. 망설이던 수현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더듬더듬 연주했다.
요한이 만들었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군데군데 음표가 틀린 부분도 있을 테지만 대충 이런 멜로디였다. 수현은 조금 치다 손을 여러 번 절었다. 손이 건반을 누르는 것은 인간이 걷는 걸음과 똑같았다. 이를테면 수현의 연주는 절름발이의 걸음 같은 것이다.
“그건 처음 듣는 곡인데요. 와, 정말 좋아요. 누구 거예요?”
화들짝 놀란 수현이 돌아봤다. 등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대 아래에 재욱이 서 있었다.
“학교엔 어쩐 일이야?”
“어, 못 들으셨어요? 이번 「음악인의 밤」에 저도 연주해요. 그거 때문에 잠깐 들렀어요.”
낮은 단상을 훌쩍 뛰어넘어 무대 위로 올라온 그가, 피아노 쪽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피아노 치는 선배 모습을 다 보네요. 올해 운은 이걸로 다 썼나 봐요.”
지난번 공연장에서 마주쳤을 때 이후로 수현은 그가 다소 불편했다. 요한이 그의 수상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이제 자신은 알고 있는데, 그걸 재욱에게 막상 말을 하려니 망설여졌던 것이다. 이번 기회가 아니라면 언제 또 우승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라, 자신이 다 아까웠다. 게다가 정말 상을 고사한다면 그는 더 큰 논란에 휘말리게 될지도 몰랐다. 이럴 땐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수현이 몸을 반쯤 일으키려 하자,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재욱이 수현의 옆에 앉았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수현은 도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손을 차분하게 허벅지 위에 내렸다.
“그날요,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는 잘 해결됐나요?”
“뭐, 아직.”
“제 느낌에 선배랑 승요한, 머리는 아니라고 하는데 괜히요, 몇 번 둘이 같이 있는 걸 보다 보니까…… 두 사람…….”
수현은 빙빙 둘러말하고 있는 그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며칠 전 현주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지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는 재욱의 말을 단김에 끊어 냈다.
“말하자면 너도 걔랑 내가 얼마나 자주 붙어먹는지 궁금한 거 아냐.”
재욱은 수현의 냉소적인 말투를 듣고 깜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그러다가 방금 수현이 한 말이 자신의 의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현은 그런 재욱을 물끄러미 살폈다. 재욱이 어떤 감정으로 자신을 보는지 몰랐다면 말이 안 됐다. 다만 모른 척해 왔다. 그편이 편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가 좋고, 싫고의 범주까지 생각이 닿을 여력이 없었다. 수현이 감당할 수 있는 감정 소비의 용량은 요한이 비집고 들어왔던 그 순간부터 이미 초과 상태였다.
“하지만 좋아해서 사귀는 사인 아니죠?”
“왜 그렇게 생각해?”
“그 정도는 알 수 있어요. 전 평소에도 선배만 보고 있거든요.”
“그래, 아냐. 그렇다고 너한테 줄 여지가 있는 거냐면, 없어. 안 그래도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하나 싶었는데 잘됐네. 계속 나랑 친구가 하고 싶다면 접는 게 좋을 거야.”
“아주 약간의 빈틈도 없어요?”
“지금 내 마음은 누굴 증오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어. 그것만으로도 버거워.”
이미 수현의 마음은 그 내면을 독점하고 있는 요한이 관장하고 있었다. 수현은 누군가를 좋아하고, 따뜻한 관심과 애정을 받고, 또 나눠 줄 만한 자유를 허락받지 못했다. 이미 심리적으로 그에게 귀속이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매일같이 그를 증오하고, 또 한편으론 그가 가진 재능이라는 이름의 일부를 욕망하며 혼란스러워했다. 그건 몸의 결박보다 더욱 수현을 극심하게 갉아먹었다. 그를 미워하기만도 이렇게 바쁜데, 당연히 그가 아닌 다른 누구와 사랑에 빠질 마음의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그때였다.
뺨에 부드러운 온기가 닿았다. 깜짝 놀라 뺨을 쥐고 그를 돌아보자, 머쓱하게 웃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재욱이 아주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어 놀랐다. 그 때문에 뺨을 힘껏 갈길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네가 미쳤구나.”
“미쳤으면 벌써 자빠뜨렸죠. 아직 온전합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재욱은 하하 웃었다. 수현은 기가 막혔다.
“저도 말 나왔으니 말씀드릴게요. 전 부족한 게 가진 것보다 훨씬 많지만 적어도 선배를 안정시켜 드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 마음 짐작하면서도 계속 옆에 두신 거 아니에요? 선밴 그게 필요하니까요.”
그의 말이 맞았다. 그는 요한과 정반대였다. 태생적으로 지녔고, 또 부족한 모든 것들이 정반대의 대척점에 있었다. 요한과 달리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훤히 보였다. 그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함께 있으면 따뜻하고 편안했다. 요한과 있을 때처럼 감정적으로 추궁당하지도, 심리적으로 압박당하지도 않았다. 마음이 쉽게 안정됐기 때문에 시간도 계절도 잊고 스스로를 들여다볼 여유도 생겼다. 그의 곁에 있으면 슬픔은 절반으로, 기쁨은 두 배로 변했다. 하지만 도피에 가까운 그런 방식의 애정은 결코 사랑이 될 수는 없었다.
“맞아. 그래서 내가 너 이용하는 거야. 넌 등신같이 이용당하는 거고.”
“전 상관없어요. 마음껏 이용하세요. 24시간 사용권 끊어 드려요?”
수현은 픽 웃었다.
“승요한의 존재가 선배를 불행하게 만들어요. 맞죠?”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안에 담긴, 언제 들어도 낯선 요한의 이름이 수현의 가슴을 파고들어 와 꽂혔다. 재욱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핵심을 꿰뚫고 있는지라 차마 인정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었다.
“선배 병원에 데려갔던 날요. 그때 했던 말들이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승요한을 본 선배 얼굴이 너무 슬펐거든요. 그런데 걔 눈엔 그게 안 보이는 것 같았고요.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
“이런 걸 물어봐서 죄송해요. 혹시 선배 손 망가진 게 그 자식 때문인가요?”
움찔한 수현의 어깨를, 재욱이 부드럽게 감쌌다. 그러고는 상처를 함부로 들쑤셔서 미안하다는 듯 천천히 토닥거렸다. 역시나 재욱은 자신에게 위로가 필요할 때를 능숙하게 알아봤다. 대답하지 못하는 수현을 이해한다는 양, 답을 깊게 추궁해 오지 않는 점도 그다웠다. 수현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머리를 기댔다.
* * *
죽음에 대하여.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보는 화두지만, 실제로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위대한 악성들 중에서도 죽음이라는 명제에 대해 깊이 고뇌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 낸 곡들이 바로 진혼곡인 셈이다. 오늘 현주가 준비한 요한의 두 번째 인터뷰 주제는 바로 그 ‘죽음’이었다.
“이렇게 흔쾌히 나와 주실 줄은 몰랐어요.”
얼마 전 수현을 직접 찾아가 의사를 타진했지만 그는 인터뷰에 응해 줄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현주는 요한 쪽으로 노선을 선회했다. 그러자 린이 마침 연락하려고 했었다며 그녀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바로 인터뷰 일정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요한이 어떤 의도를 갖고 수락했든 그녀로서는 무척 반가운 일이었다. 다만 다짜고짜 수현과의 관계를 캐묻는 건 역효과일 것 같아 일부러 다른 주제를 골랐다.
요한은 현주가 준비해 온 질문지를 들어 눈으로 한 번 슥 훑었다.
“우리 통했나 봐요. 안 그래도 신부님에 관한 궁금증을 풀어 주고 싶어서 뵙자고 했어요.”
“정말요? 그런데 왜 하필 저를…….”
“형이 당신을 싫어하니까?”
요한은 웃었다. 어떤 험악한 소리를 듣고도 수더분하게 웃어넘기는 편인 현주는 왠지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그는 미소 짓고 있는데 자신은 이상하게 등골이 서늘했다.
“형은 싫어하는 게 있으면 유독 시선을 못 떼는 나쁜 버릇이 있거든요.”
“되게 영광이네요. 수현인 누구 쉽게 싫어하지 않잖아요. 어, 그런데 누가 품고 있는 무슨 궁금증을 풀어 주고 싶으시단 거죠? 혹시 그…… 베르테르?”
요한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나름대로 취재를 좀 해 봤어요. 돌아가신 승국환 신부님이나 요한 씨 친어머니……. 본인이 말씀을 아껴서 그런가, 워낙 정보도 없고 취재할 루트가 제한적이긴 하더라고요. 시작하기 전에 한번 제대로 짚고 넘어갈게요. 그러니까 친모가 돌아가신 뒤에 입양이 됐고, 그게 승국환 신부님 사촌 동생분 아래였고요. 실제 키워 주셨던 건 신부님이고……. 그분이 돌아가신 뒤에 수현이네 집에 들어가서 살게 됐는데 이때는 법적으로 절차를 밟지 않았다…… 맞나요?”
“이렇게 정리해서 듣고 보니 되게 구구절절 복잡하네요. 맞아요. 하지만 그분들을 진짜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신부님에 관한 궁금증을 해소해 주고 싶다는 말씀은 오늘 여태까지 함구해 왔던 일들을 일정 부분 공개해 주시겠단 말씀이고요?”
“정확해요.”
이 대답을 들은 현주는 눈을 반짝 빛냈다. 사랑에 관한 담론도 무척 흥미롭지만 오랜 팬인 그녀의 입장에선 줄곧 감춰져 있던 요한의 과거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녹음기를 켜고, 요한을 향해 바르게 앉자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본인이 말씀해 줄 준비가 돼 있다면 제가 준비해 온 질문지는 큰 의미가 없겠군요?”
“제일 첫 질문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녀는 자신이 준비해 온 질문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다시 눈으로 읽었다. 그가 언급한 제일 첫 줄에는 이런 질문이 적혀 있었다.
유전자에 천재성을 아로새기고 태어났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유년기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그러다 성인이 돼서는 평범한 사람은 엄두도 내지 못할 엄청난 성공을 거뒀으니 이만한 반전은 영화 주인공의 서사로도 손색이 없었다. 무엇보다 자극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대중의 천박한 입맛에 안성맞춤이었다.
“스테레오 타입?”
요한은 현주의 말을 곱씹듯 가볍게 되풀이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수많은 역경이 있었고, 이후엔 크게 성공했다. 이건가요? 제 인생이 드라마틱하긴 하죠.”
“맞아요. 그 얘기였어요. 그리고 사실 이건 수현이가 했던 얘기예요.”
“알아요.”
요한은 미소 지었다. 현주는 머쓱하게 말을 이었다.
“워낙 요한 씨 삶이 일반적이지가 않은 것 같더라고요. 이런 비유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왜, 야구에서 팀을 이쪽저쪽 옮기는 사람을 ‘저니맨’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다 어느 날 FA로 완전히 몸값이 대박 난 거죠. 아, 혹시 구기 종목 좋아해요? 전 FC서울 팬인데……. 재미를 붙이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돼요.”
“개인적으로 분야를 막론하고 스포츠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럼 섹스는요? 넓게 보면 스포츠의 일종 아닌가?”
요한은 흥미롭다는 듯 현주를 응시했다. 그러다 그녀의 앞에 놓인 녹음기를 툭, 쳤다. 현주는 괜스레 테이블 위에 널려 있는 질문지들을 정리했다.
“친어머니 말씀이, 난 불행을 부르는 아이였대요.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 인생이 엉망진창이 됐다는 거예요. 사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는데. 자기 객관화가 안 되는 사람이었죠.”
그의 과거에 관해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건드려야 좋을까 고심하고 있던 현주는 내심 안도했다. 저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 주니 한결 부담을 덜었던 것이다. 다만 그의 음성은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은 평이한 주파수였는데도 그 내용이 꽤 충격적으로 들렸다.
“그래도 아주 예뻤어요.”
“요한 씬 어머닐 닮았나 봐요. 혹시 클래식을 자주 틀어 주셨다던 그분이신가요? 아, 이건 그럼 수현이 어머니 얘기인가……?”
“아뇨, 그분이 맞아요.”
요한은 부드럽게 웃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한 신부님께서 절 거둬 주셨어요.”
“어머니께선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화재였어요. 그때 살던 집은 무척 낡았었고, 집 안엔 늘 반쯤 남은 술병이 나뒹굴었던 데다가, 어머닌 조심성이 그다지 없었거든요.”
“그 뒤로 데리고 가 준 사람이 승국환 신부님……. 호적 얘기는 중요하지 않으니 빼고 여쭤볼게요. 왜 신부님에 관해선 여태 언급하지 않으셨던 거예요? 엄밀히 말하면 성도 그분을 따르고 있는 셈이잖아요.”
“제가 그분의 죽음에서 떳떳하지 않아서요.”
현주는 깜짝 놀랐다. 지켜보고 있던 린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져 그녀가 시선을 돌렸을 때, 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고 있었다. 현주는 다시 요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통째로 대관한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요한이 대동한 관계자들과 현주가 함께 온 촬영 기자까지 그리 적은 인원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순간만큼은 그녀의 눈엔 외딴섬에 요한 혼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신부님의 죽음에서 말이죠.”
“처음 사고 현장을 발견한 게 저였거든요. 게다가 절 위해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시다 돌아가시게 된 거였는데 전 그분을 구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땐 너무 어렸으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녀가 요청하자, 요한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다 산만해진 주의를 집중시키듯 현주를 또렷하게 직시했다.
그는 차분히 시간을 거슬러 올랐다.
“신부님이 계시던 성당의 성전 중에 대예배실 말고, 별채처럼 쓰는 소예배실이 있었어요. 맨 처음 성당이 지어졌을 땐 거길 예배당으로 쓰다가, 지금의 대예배실을 나중에 신축했다고 하더군요. 그곳 소예배실 천장에는 거대한 샹들리에가 하나 있었는데…… 오래돼서 그랬는지 늘 위태위태했어요. 전 종종 그 밑에 있는 피아노를 쳤었죠. 소예배실은 본 성전이랑 거리가 좀 있어서 사람들 발걸음이 뜸했거든요.”
뒤이어진 요한의 이야기는 이랬다.
한번은 피아노를 치던 요한의 머리 위로 바스러진 조명 가루가 떨어졌다. 기다란 속눈썹 위를 날카로운 알갱이들이 파고들었다. 요한이 자신도 모르게 눈을 비비자, 그것들이 상처를 내서 눈가의 하얀 피부가 울긋불긋해졌다. 단풍처럼 물든 요한의 얼굴을 본 승 신부는 화들짝 놀랐다.
<요한, 피! 절대 피 나지 않게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러고는 샹들리에를 한참이나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 위험천만한 샹들리에를 요한이 다치기 전에 제거해야겠다 느낀 모양이었다.
거대한 샹들리에를 제거하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다만 인부를 부르면 비용이 발생될 터라 승 신부는 혼자서 직접 그것을 치우려고 했던 것 같았다. 그는 1주일간 요한의 소예배실 출입을 금지했다. 피아노가 아니고선 요한이 성당에 갈 일이 없었다. 그래서 요한은 그 1주일 내내 승 신부의 집에서 아주 어릴 때의 버릇대로 텔레비전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소예배실 출입이 금지된 지 딱 1주일째 되던 날이었다.
요한은 금단 증세에 시달렸다. 승 신부의 집에는 피아노가 없었다. 바꿔 말하면 1주일 내내 건반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뚱땅거리면서 머리로 음악을 떠올리는 것도 지겨워지던 참이었다. 요한은 대충 옷을 챙겨 입고 성당으로 향했다. 출입 금지 1주일째 되는 날이었으니 오늘쯤이면 출입도 다시 가능하리라 여겼다. 그가 성당 소예배실 건물에 도착했을 때였다.
성당의 주변은 매캐한 연기로 가득했다. 그때보다 더 어린 시절엔 담벼락 바깥에서 까치발을 들고 안을 들여다봐야 소예배실 창문이 보였다. 그리고 그때의 요한은 힘겹게 발을 세우지 않아도 담벼락 너머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자라 있었다.
힐끗 본 소예배실에서 회색 빛깔의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섬광 같은 불꽃도 계속해서 창의 주변에서 튀었다. 조명 기구들은 늘 화재의 위험이 있었다. 그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부님?>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게다가 화염이 거세서 건물 안에 도저히 접근할 수가 없었다. 부디 저 안에 신부님이 계시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는 일단 대예배실 안에 있는 사무실로 뛰어가 도움을 요청했다. 거리가 꽤 있어서 열심히 뛰었는데도 3분이 넘게 소요된 것 같았다.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직원들이 요한의 설명을 듣고 119에 연락을 취한 뒤 아이를 따라나섰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너무 늦어 소예배실 일부가 거대한 불꽃에 타들어 가고 있었다.
빠르게 도착한 소방대원들이 진화에 나섰다. 불행 중 다행으로 소예배실이 있던 건물은 주변에 다른 인접한 건물도 없었고, 건물 자체가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 곳이었다. 소방대원들은 바로 그곳에서 새카맣게 그을린 한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것이 인명 피해의 전부였다.
<당장 이 상태로는 사망한 분이 누구신지 식별 불가능합니다. 일단 운구해서 치아 기록을 대조해 봐야 신원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고요. 다만…… 건물 창밖에 이런 게 떨어져 있더군요.>
한 소방대원이 아연해진 직원들과 요한을 향해 묵주를 내보였다.
<그거…… 신부님 거예요.>
요한의 확인 사살에, 직원들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지금의 어머니께서 또다시 혼자가 된 절 도와주시겠다고 나섰죠.”
“일련의 관계가 그렇게 된 거구나. 요한 씨를 위해서 거길 정리하시다가 사고를……. 트라우마가 될 만하네요. 저도 신부님 딱 한 번 뵌 게 다였지만 정말 좋은 분이란 게 느껴졌어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아, 나중에 이 기사가 실린 잡지를 형에게도 한 권 보내 줄래요?”
홀린 듯이 요한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현주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신부님의 갑작스러웠던 마지막이 영 마음에 불편한 모양인지 연신 볼펜을 까딱거렸다. 그러다 오늘의 인터뷰가 파장됐다는 것을 깨닫고 녹음기를 껐다. 그러고도 한참을 말이 없었다.
요한이 일어서자, 린이 다가왔다. 잡지의 발간 일정을 확인하고, 인쇄 전 원고 일체를 정리한 파일을 보내 달라며 요청해 오기에, 그녀는 버릇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기, 요한 씨.”
나가려던 요한이 뒤돌아봤다.
“아니에요. 오늘 감사했고, 조만간 또 뵙자고요.”
요한의 눈치를 잠시 살핀 현주는 말을 돌렸다. 자신의 마음이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뜩이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도 마음에 남아 있었을 텐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신부님까지 잃게 된 아이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무엇보다 자신만 아니었더라면, 혹은 자신이 조금만 더 빨리 발견했더라면 따위의 죄책감도 충분히 이해됐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는 내내 요한은…… 요한에게서는 어떤 서글픔도 느낄 수가 없었다. 억측일까.
현주는 요한이 완전히 카페 안을 빠져나가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동석한 촬영 기자가 의아해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불행을 부르는 아이.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의 친모가 했다던 끔찍한 폭언이 떠올랐던 것은 왜였을까.
* * *
사건의 시작은 요한의 소속사인 클라시스의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로부터였다. 클라시스의 공식 채널은 요한이 작곡한 정식 악보가 완성됐다는 따끈따끈한 소식을 알려 왔다. 그가 손대고 있는 곡들에 대해서는 하이네만이 했던 언급 외에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이번엔 클라시스가 공식적으로 작곡가로서의 그를 천명한 것이어서 화제가 됐다.
게다가 이번 한국 대학교 「음악인의 밤」 행사에서 그 곡을 처음 공개하겠다는 폭탄 발언 때문에 그의 팬들 사이에서는 약간의 논란마저 일었다. 대망의 첫 작곡 초연을 정식 공연이 아닌 한국의 일개 대학 음악제에서 한다는 것이 그들 딴엔 충격이었던 것이다.
한국 대학교 학생들이나 교수들 사이에서도 의견은 분분했다. 학기 초에 음악제 행사에 참여해 줄 수 있겠냐는 제안을 하긴 했었지만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수현 씨! 조율사 아저씨가 지금 전화 달래!”
피아노과 사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군가 손만 불쑥 안으로 집어넣고 수현에게 소리쳤다. 얼굴이 안 보여서 누군지 정확하게 구분이 안 됐다. 다른 과의 조교 중 한 명이리라. 그래서 그는 그냥 알겠다고 대답했다.
조율사와 간단한 통화를 마친 그는 캠퍼스 내의 운동장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이미 해가 다 진 뒤라 어둑어둑해져 가고 있었다.
여름밤의 풀벌레가 곳곳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음악제는 당초 예정된 승요한 홀이 아니라 캠퍼스 운동장의 야외무대로 옮겨야만 했다. 오늘 공연에서 요한이 직접 연주할 것이라는 소문이 눈덩이처럼 커져 캠퍼스 내에 인파가 몰렸기 때문이었다.
연예인들이 와서 축하 공연을 해 주거나 주점을 열어 술을 마시는 정식 축제라면 모를까, 「음악인의 밤」은 여름밤 음대 학생들과 선생들을 모아 놓고 클래식을 연주하는 게 고작이어서 축제라는 이름만 붙어 있을 뿐 음대생들만의 리그에 가까웠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축제를 뛰어넘는 주목도를 보여 대동제를 방불케 했다.
언론사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이동준마저 이른 시각부터 도착해 있었다. 급조한 야외무대의 주변이 사람으로 빼곡했다.
“수현아!”
야외무대 근처에 있던 이동준이 수현을 발견하고 불렀다. 얼마 전 불편한 채로 헤어졌던 일이 떠올랐지만, 수현은 애써 잊고 그를 향해 묵례했다. 그러자 교수들과 함께 와인을 마시고 있던 그가 수현을 가까이 불러 샴페인을 권했다. 한사코 거절하던 수현은 교수들이 자신만을 주시하고 있어 결국 억지로 세 잔이나 받아 마셨다. 그런 뒤에야 겨우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인파 때문에 공연 시작 시간이 다소 늦춰졌다. 밤이 깊어 갈수록 학생들은 기대로 눈을 빛냈다. 타과 조교들도 수현에게 승요한이 만든 음악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고 넌지시 물어 왔지만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정말로 대답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자신이 들어 본 요한의 자작곡이라곤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정도였다. 그건 제목 그대로 피아노 두 대가 필요하기에 오늘 공개할 생각은 아닐 듯했다.
보통 요한이 어떤 제안을 수락할 때는 그쪽에서도 요구하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아무런 말도 설명도 없었다. 어떤 곡이 완성되었다는 얘기를 듣지도 못했다. 심지어 자신은 학기 초에 「음악인의 밤」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일마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왠지 섭섭한 마음이 든다면 그건 너무 우스워질 것 같아서 그는 애써 억눌렀다. 미쳐 있는 요한에게서 그 병이 옮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대 위 사회자가 큐 사인을 받고 진행을 시작하자 무대 뒤의 빈 공간으로 요한이 나타났다. 첫 공연의 시작점을 끊는 것은 요한이었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수현이 가까이 다가갔다.
수현은 기대가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우려가 컸다. 만루 홈런을 치고 난 다음 타자는 똑같이 만루 홈런을 치지 않는 이상 누구의 기대도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가 연주하고 난 다음에 후발 주자들의 연주가 사람들의 눈과 귀에 제대로 보이고 들리기나 할 것인가.
그의 다음으로 연주하게 될 것은 재욱이었다. 굳이 다음 타자가 재욱이라서가 아니라, 한 학기 내내 이 공연을 준비해 온 아이들의 간절한 마음을 수현은 십분 이해했다. 운이 좋으면 교수나 관계자의 눈에 들어 취업 문이 열릴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첫 무대를 독점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횡포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순번을 마지막으로 하지 그랬어. 초장에 네가 하는 연주를 듣고 누가 계속 앉아서 아마추어들 연주를 듣고 싶겠어?”
“또.”
“…….”
“또 그런다. 그 사람이 그렇게 걱정돼요?”
그는 자신의 바로 다음 무대를 꾸미는 것이 재욱이라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또한 수현이 그런 재욱을 염려하는 게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라고 말해 봤자 믿지도 않을 것 같아서 수현은 해명을 관뒀다.
“요한, 왜 우리가 자꾸 재욱이 문제로 이런 논쟁을 하게 되는지 난 모르겠어. 걔랑은 그런 사이가 아니고, 만약 그렇다 한들 네가 신경 쓸 일도 아니야.”
“아, 난 그 이름이 이 입에서 나오는 게 좆같이 싫어.”
요한의 기다란 손가락이 수현의 입술 위를 부드럽게 스쳤다. 수현이 그 손을 탁, 쳐 내자 자신의 입술 위로 가져가 손가락 위를 살짝 핥는 것이었다.
“술 마셨어요?”
마침 수현의 시야에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는 커다란 합판 위에 붙은 종이가 보였다. 오늘 연주회의 공연 순서와 곡목들이 인쇄된 것이었다. 수현은 그것을 물끄러미 살폈다. 요한의 옆엔 「Piano Sonata No.1 S.2」라고만 적혀 있었다.
“이동준 선생님 때문에 샴페인 몇 잔 마셨어. 준비했다는 건 무슨 곡이야?”
“혹시 기억해요? 우리…… 예전에 같이 재미 삼아 만들던 곡. 속초 콘도에서요.”
수현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기억을 뒤지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손을 다치기도 훨씬 전인 아주 예전의 일이었다.
휴가 때 가족끼리 계곡에 놀러 갔다가 때아닌 폭우 때문에 근처의 콘도에서 이틀 내내 묵었던 일이 있었다. 그때 같은 방을 썼던 두 사람은 너무 심심했던 나머지 ‘아무 음정이나 이어 보기’라는 게임을 즉흥적으로 만들었다. 함께 그 놀이를 하면서 요한은 계속 수현에게 작곡하는 재능이 있는 게 아니냐며 놀라워하기도 했었다. 자신의 생각해도 아무렇게나 이어진 선율은 꽤 듣기 좋았다.
어쨌든 그때 두 사람이 만들었던 음악은 악보에 기록하지도 않았고, 일회성으로 그쳤기에 여행이 끝난 뒤로 수현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 하지만 요한은 달랐다. 그는 한 번 들은 것을 고스란히 재현해 낼 수 있는 좋은 음악적 눈과 귀를 가졌던 것이다.
“그 음악을 발전시켜 봤어요. 우수현 씨에게 헌정할게요.”
이상하게 심장이 울렁거렸다. 수현이 뭔가 대답하려던 때였다. 이제 슬슬 요한의 무대를 준비해 달라는 듯 진행 요원들이 두 사람을 향해 손짓했다.
“오늘 같이 연주할 소나타엔 아직 별칭이 없어요. 듣고 나서 제목을 붙여 줄래요?”
“내가 왜. 싫어.”
“우리가 같이 만든 거니까.”
입술을 감쳐문 그는, 더 대꾸하지 않고 무대 뒤에서 빠져나왔다.
* * *
청중들은 숨을 죽였다. 실시간으로 그의 연주를 유튜브로 방송하기 위해 서 있는 사람들, 그를 취재하기 위해 연신 셔터를 눌러 대던 기자들, 그의 연주를 직접 듣게 돼 감격한 청중 모두가 그가 피아노 앞에 앉자마자 침묵했다. 예의 버릇이 이어지고, 그는 여름밤을 화려하게 수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현은 무대 아래에 몸을 숨긴 채 그런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열기 가득한 밤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요한의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과, 그 때문에 젖어 들어 가기 시작하는 아름다운 얼굴은 묘하게 외설적이었다. 피아노를 칠 때의 그는 꼭 누군가와 관계를 나누는 것 같았다. 집중하고 있는 그를 멍하니 보던 수현은 문득 얼굴이 붉어졌다.
빛나는 환희. 뜨거운 희열. 그 어떤 화려한 수식으로 이 순간을 설명해야 할지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연주는 빛이 났다. 그의 내면을 닮은 파괴적인 선율이 건반 위에 끊임없이 내리꽂혔다. 사람들은 차가운 아름다움이 연주하는 비극적인 선율에 열광했다.
어릴 때의 두 사람이 대충 만들었던 선율은 그저 영감을 준 것에 불과한 것 같았다. 들려오는 음악은 그것을 기반으로 하고는 있지만 그의 손을 따라 새롭게 창조된 또 하나의 곡이었다. 굳이 계파를 골라야 한다면 그가 만든 이 음악은 C 마이너, 음악가로 따지자면 베토벤에 가까웠다. 수많은 악성들의 음악들은 초연에 혹평받는 일이 잦지만, 분명히 이 음악은 찬사에 찬사를 거듭 받고 후대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에 의해 끊임없이 반복 연주되는 레퍼토리로 굳게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5분이 넘는 시간 동안 한꺼번에 한여름 밤의 꿈에 빠져든 듯한 관객들은 ‘쾅!’ 하고 연주가 끝나자마자 모두 기립 박수를 쳤다. 무대는 그야말로 성공적이었다.
언제나 그의 연주를 아무 생각 없이 듣고 있을 때만큼은 수현도 선율 그 자체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면 도로 현실의 늪에 빠져 있었다.
요한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찬사를 보내는 저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수현은 속이 뒤틀렸다. 그가 일평생 지겨울 정도로 누리지만, 자신에게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것은 부럽다 못해 아팠다. 순간 수현은 아주 못된 생각을 했다.
‘너도 딱 나만큼 손이 망가졌으면 좋겠다.’
그가 불행해지길 원했다.
그러자 스스로가 요한과 다를 바가 없이 느껴졌다. 너무 추해서 구역질이 났다. 피아니스트가 손을 쓰지 못하게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차라리 그를 죽이고 싶어서 끊임없이 번민하는 쪽이 훨씬 인간다웠다. 죽으면 고통도 모두 끝이 나니까.
제기랄. 이게 다 뭐야.
그때였다. 무대에 올라가려 준비하고 있던 재욱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표정이 왜 그래요?”
“술!”
“뭐라고요?”
“술 마셔서 그래!”
수현은 대충 대답하곤 빠르게 도망쳤다. 기분은 차갑게 가라앉아 가는데 숨은 가빠서 목구멍이 뜨거웠다. 학교 구석구석을 잘 아는 그는 인적이 없는 약학관 안으로 몸을 숨겼다. 포르말린의 냄새가 복도에서도 희미하게 풍겼다. 주변을 방황하던 그는 금세 누군가에게 붙잡혔다. 아직까지 감상에 젖어 있던 수현은 왈칵 울 뻔했다. 무표정한 얼굴, 이마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그는…….
요한이었다.
“이리 와.”
그는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수현을 끌어안고 키스했다. 수현은 발버둥 쳤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수현은 요한의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떨어져 나간 요한의 미간이 좁혀졌다. 엉망이 된 수현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그는 때아닌 웃음을 터트렸다.
“너한테 계속 휘둘리는 내가 웃기지.”
“사랑스럽다고 생각해.”
그 말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수현은 그를 미친 듯이 상처 주고 싶었다.
“지랄하지 마. 네가 그런 기분이 뭔지나 알아? 네가 날 볼 때 하는 생각이야 뻔해. 오늘은 내 걸 빨아 줄 수 있나, 그럴 수 없나!”
요한은 지친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또 도돌이표군.”
“나도 지겨워. 그러니까 우리 이제 그만하면 안 돼?”
“그럼 날 제대로 거절해. 우리가 했던 약속 같은 건 없던 일이라고 규칙을 파기하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정말 내가 거절하면 넌 날 죽이려고 들걸. 약속을 어겼을 때 네가 나한테 한 짓을 봐!”
수현은 그의 눈앞에 자신의 오른손을 흔들어 보였다.
“난 너 때문에 손 병신이 됐어. 가끔은 차라리 네 손도 불구가 돼 버렸으면 좋겠단 마음까지 들어. 너 같은 미친 새끼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지. 이런 내가 얼마나 끔찍한지 넌 짐작도 못 할 거야.”
“짐작할 수 있어. 나도 가끔 내가 그래.”
“안 믿어.”
“또…….”
“그래.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우린 도돌이표야. 이 악보는 너나 나나 둘 중 한 사람이 죽지 않는 이상 안 끝나.”
“아니면, 내 손이 잘려서 불구가 되거나.”
“…….”
“원한다면 망가뜨려도 돼. 기꺼이 받아들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제 요한의 손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저 두 손에 딸려 있는 것은 그를 돕는 클라시스 직원들, 천문학적인 계약금, 음악사적 혹은 예술적 가치, 애호가들부터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그를 즐기는 사람들로 방대해졌다. 양손으로 꼽기에도 부족할 정도였다.
수현은 요한의 어깨를 짜증스레 밀어냈다. 분노나 슬픔도, 좌절이나 절망도 전부 누적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그는 폭주하고 있었다. 심지어 손을 다쳤을 때도 이토록 미친 듯이 화내기보다는 두려워하는 것이 먼저였던 수현이었다.
왠지 오늘의 요한이 그 어느 때보다 메스껍게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치 자신으로 하여금 모든 존엄성을 상실시키고 급기야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존재인 것만 같았다. 그런 그를 닮아 가는 게 너무 끔찍했다.
그는 언제쯤 알아줄까. 자신이 그의 구원이 아니라는 걸. 그라는 개체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포용력 있는 인간이 못 된다는 걸. 자신이 너무 어리석었다. 그때 요한을 줍는 게 아니었다. 감당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를 벼랑 끝에서 구해 낼 수 있으리라고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모두 실패였다. 결국 그의 그림자에 파묻혀 자신까지 벼랑 끝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역시 너를 처음 만났던 그날이었을까.
약학관 입구에 흐릿하나마 빛이 스며들어 왔다. 더 끝도 보이지 않는 늪으로 빨려 들어가 그를 꼭 닮은 괴물이 되기 전에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선 요한 때문에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비켜. 안 비키면 진짜 네 손목을 비틀어 버릴 거야. 못 할 것 같아?”
“일단 진정해. 지금 너무 흥분했어.”
“요한, 내가 너 같은 괴물이 돼도 괜찮겠냐고.”
순간, 요한의 표정이 서늘하게 식었다. 그러나 수현은 자기 연민에 빠져 그런 그를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우리, 이 지겨운 짓 이제 끝내자. 나랑 좀 헤어져 주라. 날 좀 버려 줘. 놓아줘.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 그럴까?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제발 내 인생에서 꺼져 줘…….”
물론 요한은 수현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웃기지 마. 넌 내 거야.”
그는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인 수현의 손목을 붙들고 그곳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