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1/34)

20.

병문안을 온 재욱은 첫 대면을 한 지 몇 분이 채 되지도 않아 어머니의 마음을 훔쳤다. 그를 향해 대문이 활짝 열렸을 때, 그는 아픈 사람을 찾아오는데 케이크를 사는 게 조금 망설여졌다면서 작은 케이크 박스와 꽃다발을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정작 병문안 당사자인 수현이 난 아무것도 없느냐고 묻자 힐끗 쳐다보더니 쪼르르 어머니를 쫓아 들어왔다.

그는 어머니가 화병에 꽃을 옮겨 담는 동안, 그리고 간단한 다과를 준비하는 내내 그녀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애교를 부리더니 이제는 좁아서 볼 것도 마땅치 않은 집 안 구경을 시켜 달라며 졸라 댔다. 특히 그녀가 거실 테이블에 화병을 자랑하듯 올려놓고 올 한 해가 꽃 선물을 받는 해인 것 같다며 무척 기뻐하자 등 뒤에서 불쑥 껴안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10년 넘게 혼자 갔어. 왜 갑자기 유난이야?”

“유난이라뇨. 선배 지금 환자예요. 어머니, 제가 따라갈 테니까 염려 붙들어 매세요.”

달에 한 번씩 받는 검진 날짜가 이미 이틀이나 지나 있었다. 엄마 손 잡고 병원 가야 하는 초등학생도 아니니 혼자 다녀오겠다는 수현과 기절했다가 깨어났는데 혼자 보내기가 걱정이 된다는 어머니가 팽팽히 맞서고 있던 차였다.

마침 등장해 준 재욱이 어머니로서는 구세주같이 느껴진 것 같았다. 그게 아니었더라도 아들 친구가 싹싹하게 아들 노릇을 하는데 정이 가지 않는 어머니란 없을 것이다. 재욱이 수현을 병원에 제대로 모시고 가서 털끝 하나 다치는 일 없이 곱게 모시고 오겠다고 차 키를 챙겨 들자, 급기야 말까지 놓고 그의 등을 두드렸다.

“재욱이가 수고 좀 해 줘. 예쁜 애들은 예쁜 짓만 한다니까?”

“그렇죠, 어머니? 맡겨만 주세요.”

“같이 갔다가, 다시 와서 저녁 먹고 가.”

“그럴게요, 어머니.”

“누가 네 어머니야. 아들을 또 입양하는 건 난 결사반대야.”

운동화를 고쳐 신으며 수현이 그러자, 그를 제외한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고 쑥덕거리는 것이었다. 친화력 하나만큼은 재욱이 명실상부 우리나라 일등일지도 모른다. 하긴 그는 인간관계 자체에 염증을 느끼고 마음을 닫고 있던 수현의 문마저 어느 정도 열 만큼 굴하지 않는 근성을 가지고 있었다.

“너 진짜 귀찮아.”

“선배 어머니께서 저 완전 귀엽대요.”

조수석 문을 열어 주며 재욱이 그러자, 수현은 짜증을 부렸다.

“오늘 너 진짜 징그럽고 싫다.”

“거짓말. 절 안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도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요.”

“여기 있잖아. 나 투명 인간이야?”

“이러시면 곤란해요. 아팠던 사람 세워 놓고 할 얘긴 아니지만, 제 무대 봐 주실 줄 알았는데 막상 무대 올라가니까 선배 안 보여서 그날 좀 섭섭했단 말이에요.”

「음악인의 밤」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때 수현은 요한의 공연만 보고 곧바로 도망치듯 운동장을 빠져나왔다. 요한과의 전쟁 후 암전이 일어났고, 깨어나 보니 1주일이나 지난 지금이었다. 단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들에게는 평생인 세월을 벌써 일곱 번이나 잠으로 깎아 먹은 것이다.

“뭘 연주했어?”

“처음 봤던 날, 선배가 연주했던 곡요.”

그래서 무대를 보여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재욱이 연주했던 곡은 「발트슈타인」이라는 부제를 지니고 있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1번일 것이었다. 이상한 것은 분명히 그날 합판에 붙은 연주곡 목록을 눈으로 쭉 확인했었는데, 기억나는 것은 요한의 「피아노 소나타」 1번뿐이라는 사실이었다. 마치 오직 그에 관한 정보들만 머릿속에 박아 넣는 사람 같았다.

“왜 아팠던 거예요? 또 승요한이 괴롭혀요? 죄송해요. 계속 묻고 싶었는데 집엔 어머니가 계셔서 이제야 여쭤봐요.”

그가 말한 ‘아프다’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 ‘요한이 또 네 마음을 아프게 했어?’ 정도의 의미인 건 알지만 수현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그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재욱에게 치유의 힘이라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 신처럼 말 한 마디로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하고 만지면 나병을 낫게 하는 놀라운 마법이 말이다. 꼭 재욱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그는 요한만 아니면 됐다. 자신의 상처를 깨끗이 낫게 해 줄 수 있다면 이미 걸레짝이 된 몸 따위 그 누구에게라도 던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차에 탄 수현은 무심코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올려 둔 손을 내려다봤다. 살짝 들춰진 셔츠 아래로 보이는 양 손목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한여름에도 긴팔을 즐겨 입는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지레 찔린 수현은 운전 중인 재욱을 돌아봤다. 신호가 걸리자 재욱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길이 닿은 곳은 시퍼런 손목 위였다. 낯선 이의 온기가 닿자 이질감으로 몸이 움찔 떨려 왔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해석한 그대로를 묻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긴장 풀어요. 승요한 지금 한국에 없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어딜 갔어?”

다시 신호등에 파란불이 들어왔다. 그게 신호가 된 듯 재욱도 핸들을 붙잡고 다시 운전하기 시작했다.

“몰랐어요? 그젠가 독일 갔어요. 「음악인의 밤」에서 연주했던 S 2번 곡 있잖아요. 「피아노 소나타」 1번. 그걸 아예 사장하고 싶다고 했다는데 그 문제로 소속사랑 마찰이 있었나 봐요. 저도 어제 뉴스 보고 안 거예요.”

경악한 수현은 할 말을 잃었다.

“그게 가능해?”

“불가능하죠.”

시대가 달라졌으니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도 양상도 전부 달라졌다. 과거의 음악가들이 작곡한 후 헌정하는 대상에게 악보를 공개하고, 공연장의 초연에서 대중에게 공개하는 식으로 외연을 확장해 갔다면, 요새는 인터넷상에 영상 하나를 업로드하는 것만으로 금세 전 세계의 모든 소비자가 그것을 향유할 수 있었다.

이미 그가 초연하는 영상을 유튜브에 실시간으로 생중계한 사람들이 있었다. 한번 공개된 곡을 사장하고 누구도 연주할 수 없게 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요한은 자신이 그 곡을 듣고 나서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음악은 문제가 없었다. 근원적인 문제는 따로 있는데…….

때때로 그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달은 미처 보지 못했다.

“안 그래도 하이네만이 인터뷰 중에 승요한이 만든 곡이 벌써 10번 대가 넘어간다고 차차 공개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했나 보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기자가 클라시스에 악보는 언제 공개되는 거냐고 문의를 했다가 상황이 이 지경인 걸 알게 됐고, 그걸 터트렸나 봐요. 승요한 본인이 S.2는 이미 악보 원본을 없앴다고 했다나…….”

“요한이 악보를 이미 없앴다고 말했어?”

“네. 소속사에 따르면? 자기도 다신 연주하지 않을 거라고요. 골 때리죠. 그래서 지금 현역 피아니스트들이 공개적으로 승요한 소환하고, 독일은 난리 났어요. 선배 깨어난 뒤로 뉴스 전혀 안 봤나 보네요.”

“요한 소식은 내가 알기 전에 어머니가 먼저 말씀해 주시는 편이라…….”

여태까지 요한의 소식을 알게 되면 수현에게 제일 먼저 전해 주던 사람이 어머니였다. 뉴스에서 보도할 정도라면 이미 그녀도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왜 그녀는 함구하고 있었을까. 수현의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런데 진짜 악보를 없앴대? 확실한 거야?”

“저도 뉴스로 본 게 다예요. 진위 여부야 모르는 일이죠. 공들여 빚어 놓은 이상 자기 새끼인 건데 혼자만 간직하려는 생각일 수도 있고요.”

절대 그렇진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본인이 만든 음악에 애정과 애틋함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혹여 아직 버리지 않고 두었다면 자신이 구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음악이 누군가에겐 생명보다 귀한 가치일 수 있었다. 애써 태어난 곡을 죽여 없애겠다는 건 너무나 부당하게 느껴졌다.

수현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 재욱의 팔뚝을 꽉 붙들었다. 힘주어 방향을 틀려고 하자 화들짝 놀란 재욱이 돌아봤다.

“어디 불편하세요?”

“차 돌려. 나 가 볼 곳이 있어.”

“병원은요? 어머니께서 신신당부하셨잖아요.”

“날 원하는 곳에 데려다주든지, 아니면 저기 갓길에서 내려 줘. 어떡할래.”

“내려 달라니……. 이거 선배 차잖아요.”

“그러니까 선택해. 어떡할 거냐고.”

“선배 가끔 진짜 대책 없어. 그 가 볼 곳이란 데가 어딘데요.”

“요한 작업실. 여기서 금방이야.”

잠시 고민하던 재욱은 마지못해 수락했다.

* * *

건물 앞에 도착한 수현은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재욱은 따라 들어가도 되는지에 대해 고민하며 아주 잠깐 주저했으나 이내 그를 따랐다. 내부는 다소 황량했다. 하얀색으로 전면이 도배된 곳은 생활감이 거의 없었다. 공간의 정중앙에 커다란 피아노 두 대와 기다란 책상이 놓여 있었다. 특히 그 위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현관과 가장 먼 곳에 분리된 공간이 있는 것을 보니 침실인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평범하네요. 집기들도 거의 없고.”

그건 작업실 주인의 깔끔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언제고 다시 홀연히 떠나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수현은 재욱의 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책상 위에 가지런하게 놓인 두툼한 악보집부터 꺼내 들었다. 요한의 작업 방식은 아날로그에 가까워서 그가 만들고 있는 음악들은 전부 오선지 위에 수기로 작성되어 있었다. 가장 클래식과 잘 어울리는 기법이라는 장점 대신, 한번 훼손되면 다시 그대로 기억해 내지 못하는 한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수현은 계속 뒤적였다. 혹시나 세다가 누락하는 것이 있을까 걱정하며 꼼꼼하게 한 장 한 장 뒤로 넘겼다. S로 시작하는 그의 음악들은 하이네만이 언급한 대로 벌써 완성한 곡들만 10번 대가 넘어갔다. 수현도 몰랐던 일이었다.

“없어.”

“뭘 찾는데요?”

“없어. 그것만 악보가 없어.”

“S.2?”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그는 다시 한번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 장 한 장 셌다. 두꺼운 재질의 종이들이 주변에 마구 널렸다. 꼼꼼하게 뒤져도 결과는 여지없었다. 재욱은 수현이 책상 위에 번잡하게 늘어놓는 악보들을 한 번에 원상태로 겹쳐 놓았다.

“오, 이거 편리해 보여요. 이 악보들 취합해서 묶어 놓는 핀요. 여기 뭐라고 이니셜도 새겨져 있어요. 이건 J인가? 엄청 고급스러워 보이는데 이런 건 어디서 사야 하나.”

“갖고 싶어?”

“어디서 파는지 아세요?”

재욱은 넥타이핀 모양으로 생긴 악보용 고정 핀을 앞뒤로 살피느라 바빴다. 수현은 물끄러미 재욱이 쥐고 있는 그 핀을 응시했다. 저걸 요한이 아직까지 지니고 있는 줄은 몰랐다. 자신이 언젠가 콩쿠르의 상금 중 일부를 용돈으로 받았을 때, 큰마음 먹고 선물했던 것이었다.

“그거 제가 확인해 볼까요? 찾고 싶은 마음이 급해서 선배 눈엔 안 보이는 걸 수도 있어요. 아니면 승요한이 가져갔을 수도 있고요.”

“벌써 버렸나 봐.”

“이리 줘 보세요. 제가 한번 찾아볼게요.”

그는 수현을 대신해 악보를 일일이 들춰 살펴보기 시작했다. 저쪽에서 다시 확인해 주는 동안 혹시나 싶어 수납함과 휴지통 일체를 뒤져 가며 찾았지만 아무 데도 없었다. 이미 버려진 것이다.

이렇게 단박에 허공에서 사라져 버릴 줄 알았더라면 한 번쯤 악보를 보여 달라 부탁하고 직접 연주해 볼 걸 그랬다. 악보를 적확하게 구사하는 그가 직접 친 영상이 세상엔 남아 있지만, 그래도 아까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함께 만든 음악이라 말해 놓고 이렇게 혼자만의 결정으로 쉽게 버리는 요한의 태도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됐으니까 그만해. 없는 것 같다.”

재욱의 손에 들린 악보 중 몇 장을 빼앗듯이 가져간 수현은, 그것을 신줏단지 모시듯 꼭 쥔 채로 쪼그려 앉았다. 목소리에 허탈함이 가득 묻어 나왔다. 그런 수현을 지켜보던 재욱은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의 생각에도 악보는 이미 이곳에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까워요?”

“요한이 연주하는 피아노는 내 인생의 절반이자 청소년기 그 자체야. 그래서 늘 포기가 쉽지 않아. 이렇게 연연하는 내가 멍청하게 보이겠지만…….”

“아뇨.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제 청소년기의 전부는 선배의 피아노 연주였어요.”

몸을 웅크리고 있던 수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재욱을 올려다봤다. 재욱은 자신의 손에 남아 있는 악보들을 잠시 응시했다.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이건 S.1이라고 되어 있네요? 안 그래도 「음악인의 밤」에 작품 번호 2번부터 공개했길래 저뿐만 아니라 다들 1번이 뭔지 궁금해하고 있어요.”

“아마 그건 영원히 공개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선배와 치려고 만든 건가 보죠?”

“그런 것 같더군.”

“승요한은 모든 이유가 선배예요. 꽤 순정파인가 봐요?”

“순정파 좋아하시네.”

그는 순정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욕망이나 욕구라면 알지 몰라도 말이다.

픽 웃음을 터트린 수현은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나란히 책상에 걸터앉았다. 재욱이 악보를 들어 천장에 달린 전등의 불빛에 비춰 보았다.

“혹시 「말할 수 없는 비밀」 봤어요? 주걸륜은 별로지만 여잔 예쁘잖아요. 전 피아노 두 대 놓고 치는 음악은 그 영화에서의 장면이 제일 먼저 떠올라요.”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 영화의 백미라고 꼽히는 피아노 배틀 장면이었다. 물을 건너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하자마자 요한을 끌고 영화관에 가서 함께 관람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는 길에 예의 배틀 장면 이야기를 꺼내자, 요한은 무감동한 얼굴로 툭 내뱉었다.

<두 대를 놓고 치는 건 꼭 피아노를 각자 앞에 두고 자위하는 것 같아요. 그냥 둘이 자면 될 걸.>

원래부터 요한은 하나의 무대에서 여러 대의 피아노로 연주하는 일에 부정적이었다. 오케스트라와의 협주는 각기 다른 악기들의 조화 위에 피아노가 군림하는 것이라 싫어하지 않았지만, 똑같은 악기만으로 각자의 소리를 주장하는 것은 서로의 것을 해치는 듯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었다. 수현은 왠지 그런 그의 이기적인 생각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이해가 안 됐다. 자신의 마음인데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작년에 나랑 같이 「꽃의 왈츠」를 연주했을 땐 싫어하지 않았잖아.>

<그때도 그런 기분을 느꼈어요. 다만…….>

뒷말을 삼킨 그는 아주 빤한 시선으로 수현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 뒤로도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수현도 왠지 계속 묻는 것은 그를 추궁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아 관뒀다. 그러자 요한이 뒤늦게 이렇게 말했다.

<그때 했던 약속 잊지 않았죠? 절대로 다른 사람이랑 치면 안 돼요.>

그때 자신은 뭐라고 대답했더라.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았다.

“듀오 피아노 중에 뭐 제일 좋아하세요? 선밴 모차르트를 좋아하니까 역시 모차르트?”

“넌?”

“전 생상스가 좋아요. 「베토벤 주제에 의한 변주곡」요.”

“여러 대로 연주하는 거 싫지 않아?”

“싫긴요. 되게 좋아요. 무대 위에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함께 힘내는 듯한 느낌이 든달까? 오케스트라랑 협연하면요. 자기들은 제1 바이올린, 제2 바이올린, 첼로, 더블 베이스……. 똑같은 악기 몇 대씩 놓고 서로 교감하면서, 피아노만 늘 혼자라 좀 외롭잖아요.”

그는 정말이지 요한과 모든 것이 정반대였다.

“승요한 곡은 또 어떤 느낌일까요. 지난번에 보니까 그 자식이 만든 음악 진짜 너무 좋더라고요. 걘 이쪽으론 타고났어요. 와, 아무렇지도 않게 모차르트랑 생상스랑 승요한 순서로 얘기하는데 위화감도 없고요. 복 터진 새끼.”

갑자기 악보가 얄미워 보였던지 그는 종이의 첫 장을 손끝으로 툭 쳤다. 자신의 악보가 다른 사람, 그것도 하필이면 재욱의 손을 탔다는 것을 알면 요한이 기함할 일이었다.

수현은 그 핏기 없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지는 모습을 상상하자 이상하게 배 속이 꿈틀거렸다. 마음속이 치졸해질수록 느껴지는 이 뻐근한 희열감과 죄책감의 공존이 낯설었다. 다른 음악이라면 몰라도 S 2번만큼은 수현에게도 주장할 소유권이 있었다. 그 악보를 하루아침에 공중에 날려 버린 요한에게 더 못되게 굴고 싶었다.

“이 곡, 두 번째 피아노는 나처럼 오른손 저는 사람한테 특화된 악보거든.”

수현은 재욱의 손에서 악보를 빼앗아 들었다.

“같이 쳐 볼래?”

“헉, 그래도 돼요?”

“돼.”

난 너한테 이 정도는 해도 돼.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생각은 그것 하나였다. 그의 음악을 몰래 훔치는 것은 자신에게 정당방위라는 것이다. 그리고 두 대의 피아노를 요한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 자신에게 있어 가장 대단한 복수였다.

수현이 피아노 앞으로 다가서서 보면대에 악보를 올려 두었다. 재욱이 잠시 머뭇댔다. 수현은 그를 돌아봤다. 표정이 약간 불편해 보였다.

“선배가 한 번 보면 바로 칠 수 있는 승요한에게 익숙한 건 아는데……. 전 오늘 이 악보를 처음 봤어요.”

수현은 아차 했다. 방금 처음 본 악보를 보고 즉흥적으로 치는 것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악보 속 요한의 부분은 속도가 더딘 수현을 배려해 라흐마니노프의 초절 기교 뺨치는 화려한 음표들로 연결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이 볼 수 있는 악보는 현재 하나뿐이었다. 수현은 허탈한 한숨을 내뱉었다.

“기분 상했으면 미안. 그래도 널 요한 대용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어.”

“알아요. 전 저만의 매력이 있죠. 다음 기회에 꼭 같이 쳐요.”

왠지 오늘이 아닌 이상 그런 기회는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수현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악보가 놓여 있는 요한의 피아노를 직시했다.

언제나 그는 건반 위를 유영하듯 자신의 온몸 구석구석을 탐험했다. 넓은 의미로 피아노와 수현의 몸은 그가 욕망을 분출하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동일선상에 놓여 있었다.

그가 불안한 눈으로 피아노만 쳐다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재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는 선배는 그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직접 쳐 보신 적 있어요?”

“없어. 요한이 치는 일부분을 들어 본 게 다야. 그걸 듣고 어떤 제목을 붙이면 좋을까만 속으로 생각했었지.”

“선배가 붙인 제목은 뭔데요?”

수현은 재욱을 돌아봤다. 그는 단번에 대답했다.

“광염.”

광염 소나타.

* * *

개강 첫 주가 되자 학과 사무실이 또다시 분주해졌다.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눈을 감는 일상이 하루하루 반복되는 것처럼 큰 범주에서의 일상도 매년 이렇게 반복이었다. 정신없이 한 학기를 보내고 나면 또 금세 겨울이 오고, 또다시 봄, 여름, 가을, 겨울.

이 반복되는 계절 속에서 그는 언제까지 요한이 자신을 이토록 처절하리만치 지배할지 두려웠다. 지금 수현이 서 있는 곳은 그가 지배하는 승요한령이었다. 사실 그를 알게 된 이후로 수현이 선 땅은 요한의 영역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완벽히 벗어나는 방법을 몰랐다.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가 지나고 오후가 되자, 저녁의 노을이 드리웠다. 창밖으로 두런두런 대화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과 사무실 창문 방향을 올려다보는 어떤 익숙한 얼굴이 함께 드러났다. 환기하던 수현과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안녕하냐는 듯이 손을 힘차게 흔들었다. 조금도 안녕하지 않아서 그는 창문을 닫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과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 왔다. 원래 정규 수업 시간이 끝나고 나면 과 사무실도 근무는 할지언정 전화를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누구의 전화인지 뻔해서 수현은 수화기를 들었다.

[힘 뺄 거 없잖아. 내려와라. 오늘은 내가 커피 산다.]

“정중히 사양할게.”

[아까 인사 씹고 창문 닫던 그 순간부터 넌 정중하지 않았어. 요한 관련해서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전화로 할 얘기가 아니라 퇴근 시간 맞춰서 내가 직접 왔다고.]

“그렇다면 더더욱 할 얘기 없어.”

[수현아, 나 너 뜯어먹으러 찾아온 거 아냐. 기자로 온 거 아니라고. 믿어 줘.]

만에 하나 친구로 찾아왔다는 말을 하려는 거라면 그쪽이 더 못 믿을 말이었다. 수현이 수화기를 그대로 내려놓으려던 때였다.

[내가 요한 뒤를 좀 캐다가 이상한 점을 너무 많이 발견했어. 더 파고들어서 건드려도 되는 건지 솔직히 겁이 나. 네 조언이 꼭 필요해.]

목소리가 전에 없이 진지했다. 약간의 두려움도 느껴졌다. 곰곰이 생각하던 수현은 벽시계를 힐끗 살폈다. 6시. 개강 첫 주는 보통 오리엔테이션을 하느라 수업도 일찍 끝났다. 더 남아 있어도 이곳에 찾아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올라오지 말고 주차장에서 기다려. 문단속하고 내려갈 테니까.”

그러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 * *

일부러 그러려던 건 아니었으나 뒷정리를 하다 말고 교수님이 잠깐 들르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됐다. 가을의 계절인 9월이 됐다지만 아직 체감 날씨는 늦여름에 가까웠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여자를 기다리게 했는데도 현주는 불평하지 않았다. 저쪽에서 저자세면 마음이 약한 수현은 어쩔 수 없이 너그러워지게 됐다. 마음의 문을 닫고 벽을 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늑대가 이빨을 잃어도 본성은 그대로라고 요한이 말했던 것처럼 타고난 기질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 법이었다.

오늘도 커피는 수현이 샀다. 애초에 얻어먹을 생각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빚지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라 일부러 인적이 거의 없는 밀폐형 카페를 골라 들어왔다. 아마 이 카페의 종업원은 두 사람이 커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번엔 또 무슨 협박 하려고?”

“그게 아니라…… 지은 죄가 있으니 내가 화는 안 낸다.”

그녀는 양쪽에 칸막이가 쳐져 아무도 그들을 보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주변의 눈치를 계속 살폈다. 몇 번 지켜보니 원체 목소리도 행동도 전부 큰 스타일인 것 같았다. 한참을 그러더니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켜는 것이었다.

“내가 이런저런 협박…… 뭐, 한 거는 맞지만 그거는 그래도 내 기준에 있어서 미풍양속과 도의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였지. 요한 인터뷰 정도는 너도 허락하는 범위라고 믿었으니까.”

“아주 놀고…… 그래서 약점 잡고 물고 늘어진 거였구나. 네가 생각하는 미풍양속의 기준 잘 알았다.”

수현은 기가 찼다. 빈정거리는데도 현주는 개의치 않았다. 금세 화면이 켜지자 그녀는 숙련된 정비공처럼 뚝딱뚝딱 숨어 있던 폴더를 열더니 수현을 향해 화면을 내밀었다. 그리고 음성이 녹음된 파일 몇 개를 순차 재생했다. 목소리는 죄다 지긋한 세월이 느껴지는 노인들의 것이었다. 가뜩이나 발음도 불분명한데 노이즈까지 다소 있어서 귀를 기울여야 했다. 그녀는 잠시 재생을 멈췄다.

“얼마 전에 요한과 인터뷰를 했어. 신부님이 돌아가시던 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지. 그런데 신부님도, 친어머니도 화재로 돌아가셨다니까 기분이 괜히 싸하잖아. 그래서 친모 사망 당일에 대한 이야기들을 좀 모아 봤거든. 그때 동네 주민들 중에 돌아가신 분도 꽤 있어서 아직 생존해 계신 분들 어렵게 찾아 인터뷰했어.”

한동네에서 오래 산 터줏대감 같은 노인들은 어느 집에 숟가락이 몇 개가 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매사에 관심이 많아서 근방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무척 빠삭했다. 그녀는 그들의 기억을 수집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다시 음성을 재생하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솔직히 내용이 궁금했던 수현은 집중해서 들었다. 그들은 사고가 있던 날의 희미한 기억을 되짚어가며 중구난방으로 설명했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라 사건 설명이 일목요연하지 않아 꽤 집중해야만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쭉 듣고 있자니 표정 관리가 조금 어려웠다. 딸칵. 재생이 모두 끝나고, 현주는 수현의 의견이 궁금하다는 듯 양손을 뻗어 왔다. 졸지에 손이 붙들린 수현은 현주를 뿌리쳤다.

“그 동네 사람들 요한 전혀 모르더라? 집에만 틀어박혀 지냈던 것 같았어. 어쨌든, 상황 이해하겠니? 이분들이 공통적으로 똑같은 얘길 하고 있잖아. 열악한 달동네에서 무슨 사고든 늘 일어날 수 있지. 다만 승국환 신부님이 집이 불타는 모습을 웬 남자애 손을 붙잡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계셨다는 게 난 너무 마음에 걸려. 조금만 빨리 소방서에 신고를 했어도 목숨은 건질 수 있었을지 모르잖아. 안 그래?”

아무래도 그녀는 신부님과 요한이, 그의 친모가 사망할 때까지 방치했다는 말이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수현은 이상한 방어 기제가 발동했다.

“혹은 발견되기도 전에 이미 돌아가셨던 상태였는지도 모르지. 게다가 노인들 오락가락하는 거 흔한 일 아닌가?”

“문제는 이 노인들끼리의 증언은 일치한다는 거야.”

“자기들끼리 가끔 그날 일에 대해 얘기하고 그랬을 수 있잖아.”

“뭐, 그럴 수도 있지만 요한도 인터뷰에서 비슷한 얘길 했어. 자기가 신부님에게 사고가 일어났을 때 조금만 더 빨리 발견했더라면……. 후회된다고.”

“너 사고가 무슨 말인지 몰라? 자동차 급발진 일어나면 넌 막을 수 있어?”

일 사, 연고 고. 예상 밖에 일어난 불운한 일에 대해 말하고 싶을 때, 사람들은 사고란 단어를 썼다.

수현이 책망하듯 그러자 도둑질한 물건 숨기듯 노트북을 도로 가방에 욱여넣은 그녀는 수현을 빤히 응시했다.

“물론 두 분 다 화재 사고 자체는 운이 나빠서 일어났을 수 있어. 인정해. 나도 신부님이나 요한이 직접 불을 냈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아. 조사해 보니까 정황상 불가능하기도 하고. 하지만 신부님과 요한은 친모에게 일어난 불의의 사고를 방치했고, 또 요한은 그때 배운 걸 신부님에게 사고가 일어났을 때 써먹은 게 아닐까……. 필요한 걸 얻기 위해서, 죽음을 방조한 거지.”

“상상력이 지나치다. 말 함부로 하지 마.”

수현은 차갑게 일갈했다. 하지만 입으로 내뱉은 말과 달리 속으로는 현주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베츨라어에 가서 요한에게 직접 묻기도 했던 것처럼, 자신도 그런 추측으로 줄곧 마음 한편이 불편했었던 것이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그녀의 추측은 늘 날카롭게 정곡을 찌르는 일격이었다. 기자가 아니라 차라리 형사나 검사를 하는 편이 더 적성에 맞을 것 같았다.

“경찰 놀이는 그만둬.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이래?”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정말 인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악운이 연달아 이어져서 참 힘들었겠구나…… 하고 나도 쉽게 생각했을 거야. 하지만 내가 본 요한은…….”

몸을 낮춰 한껏 음산하게 물어 오는 그녀의 얼굴에는 본능적인 염려와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목소리도 미묘하게 떨렸다. 불안해하는 그녀의 모습은 퍽 낯설었다. 늘 뻔뻔하게 저돌적으로 접근해 오기에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두려움에 강하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도 이렇게 보니 특별하지 않았다.

“혹시 요한…… 뭐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거 아니니?”

“겹치는 몇 가지 우연으로 여기까지 생각을 확장한 네 사고 회로에 문제가 있는 거겠지.”

“넌 무슨 승요한 변호인이라도 돼? 만약 걔한테 문제가 있다면 주변에서라도 제대로 인지하고 치료를 받게 해야 하는 거잖아.”

요한에게 무슨 문제가 있긴 하다는 것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렴풋하게 짐작했다. 워낙 상처가 많은 아이였으니까. 다만 자신이 하는 말을 성서라도 되는 양 믿고 있는 그이기에, 구제할 수 있으리라고 자만했다.

그녀나 이윤도 선생이 했던 말대로 처음부터 문제를 제대로 인지하고 치료를 받게 했다면 최소한 자신의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좋았을지도 모른다.

수현은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그녀는 수현의 뒷말을 기다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감정적으로 좀 결여되어 있는 건 맞아.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반사회적인 인격 장애자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해.”

“근거 있어?”

“나의 직감.”

그리고 두 사람 간의 역사.

그의 감정이란 건 색이 워낙 희미해서 아주 여러 번 덧칠을 해 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수고로움을 들이고 나면 요한은 희미하게나마 그게 무엇인지 알아듣고 이해했다. 그래서 수현은 ‘가르치면 더디지만 잘 따라오니까’라거나 ‘적어도 나 외의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치지는 않으니까’ 따위의 핑계를 이용해 정면 돌파를 회피해 왔다. 자신은 물론이고 요한을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어떤 정신병의 테두리 안에 그를 밀어 넣는 것이 싫었다.

그러니 어쩌면 자신은 진실 따위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단지 그를 변호해 주고 싶은 마음만 앞섰는지도 모른다.

“진짜야?”

“진짜가 아니면 또 어쩌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현주는 수현의 말을 순순히 믿는 눈치였다. 줄곧 불편한 자세로 몸을 움츠리고 있던 그녀는 그제야 편하게 등을 기대앉으며 한숨을 터트렸다.

“하긴. 아, 뭔가 좀 안심이다. 요한에 관해선 정신과 의사보다 네가 낫지.”

“근거 있어?”

“나의 직감.”

조금 전 수현이 했던 말을 반복하며, 현주는 씨익 웃었다. 오늘 그녀를 만난 뒤 처음으로 보는 미소였다. 웃음이란 건 전염되는 모양인지, 수현도 픽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몸 좀 사려야겠다 싶었거든. 내가 좀 남 심기를 잘 건드리는 편인데, 슬프게도 목숨이 한 개니까. 하지만 네가 이렇게까지 말하니까 난 널 믿고, 걜 좀 더 파 보겠어.”

“내가 뭘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철통 방어 했잖아. 솔직히 네가 승요한 정신 이상자 맞다고 대답할까 봐 너무 무서웠어. 하긴 걔가 소시오패스라면 아직까지 안 도망친 게 말이 안 되지.”

“…….”

“얘 표정 좀 봐. 걔도 안됐다. 그 얼굴을 가지고도 혼자 안절부절 매달리는 것도 짠한데.”

“안절부절? 헛소리하지 마. 걘 그게 뭔지도 모를걸.”

“왜? 모든 짝사랑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약자야.”

“짝사랑, 약자. 걘 그 두 가지도 뭔지 잘 모를 거야.”

허탈하게 수현이 대꾸하자, 현주가 그 말을 해석하듯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어떤 식으로 서두를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너희들 관계는 좀 이상해. 예술가들 보면 옆에 뮤즈가 꼭 있지. 자기가 예술의 한 부분이 된다는 황홀감에 도취돼서 자기만이 그 예술가를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 정신 나간 것들. 요한에게 네 기능이 그런 뮤즈인 건 분명한데……. 넌 좀 달라. 이상하게 넌 걔들처럼 우쭐해 있지 않아. 늘 마음이 복잡하고 슬퍼 보여.”

“…….”

“요한에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어 줬다던 사람, 그거 너 맞지?”

그녀의 손가락이 창밖의 허공을 향하더니, 포물선 그리듯 움직여 수현을 콕 짚어 가리켰다.

“음, 아냐? 맞는 줄 알았는데.”

“맞아.”

늘 수현은 이런 질문에 명쾌하게 답하기를 주저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속 시원하게 답변해 주고 싶은 것은 왜일까. 그건 어쩌면 그녀가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유일하게 수현의 복잡한 마음까지도 짐작하고, 또 그의 앞에서 대놓고 말하는 뻔뻔한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가 무척 손쉽게 수긍하자 정말 확인해 주리라곤 생각지 못했던지 현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수현은 거울을 볼 수가 없어서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그녀의 눈에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를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만 미간이 구겨져 있다는 것은 느껴졌다. 그러자 현주가 괜스레 테이블 위를 티슈로 훔치며 말을 돌렸다.

“요한에게 추가 인터뷰를 요청해야겠다.”

“또 뭘 어쩌려고. 난 이제 더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어.”

“친어머니나 신부님에 관해서 좀 더 자세히 물어보려고. 걱정 마. 앞으론 널 통하지 않고 린에게 직접 얘기할게. 여름 특집 호 예정이던 게 10월쯤으로 일정이 좀 지연됐는데 원고를 너한테도 미리 보내 줄까?”

“됐어. 앞으론 린이랑 상의해. 클라시스는 언론 인터뷰를 꽤 중요하게 다루는 것 같더라.”

“하지만 요한이 너한테 한 부 보내라고…….”

수현이 무슨 말이냐는 듯 눈썹을 스윽 들어 올렸다. 그러자 현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일단 알겠어. 오늘 시간 내 줘서 고마웠다. 또 보자.”

“글쎄,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너무 그러지 마. 난 너 꽤 좋아해. 일단 예쁘게 생겼거든. 보면 기분 좋아져. 그럼 간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는 이쪽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먼저 일어섰다. 이젠 낯선 일도 아니었다.

수현은 카페 안에 혼자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바깥의 직원들이 여자가 먼저 나가고 한참 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남자를 보며 차였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싶어 잠시 일어날까 고민했지만, 무거워진 몸을 바로 세우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현주가 했던 말들을 곱씹었다.

<늘 마음이 복잡하고 슬퍼 보여.>

그는 오늘에야 자신이 늘 슬퍼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 * *

여름에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이 있다. 길거리를 한참 동안 걷는 것이었다. 산책하기를 좋아하는 수현은 이렇게 걸으면서도 이마에 땀이 흐르지 않을 때, 가을이 시작되는 것을 실감했다.

차를 집 앞에 주차해 둔 그는 주변 골목을 거닐었다. 어둠이 대지 위를 이불처럼 푹 감싸 안을 때까지 한참이었다.

정처 없이 거닐던 그는 불이 전부 꺼진 대로변의 상점들을 보고 멈춰 섰다. 사위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가늠이 안 될 정도로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휴대폰은 고장 난 뒤로 새로 구입하지 않아서 수중에 없었다. 손목시계도 오늘따라 차지 않고 나왔다. 밤을 수놓은 별들만으로는 지금이 몇 시인지 알 수 없어서, 그는 아쉬운 대로 귀갓길에 발걸음을 내디뎠다.

골목 어귀에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져 있었다. 대여섯 개 됐는데 그중 하나는 고장이 난 건지 단순한 방전인지 꺼져 있었다. 내일은 주민 센터에 연락해서 저걸 고쳐 달라고 해야겠다. 그런 평범한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앞에 나타났다. 자신이 여자였다면 치한이 나타났다고 분명히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수현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재욱의 어깨를 툭 쳤다.

“뭐 하는 거야.”

“안 놀라네요?”

“지금 몇 시야?”

“제가 왜 이 시간에 여기 있냐고요? 그거야 선배가 연락이 안 되니까.”

“아니, 진짜 몇 시냐고. 시계가 없어.”

자신의 빈 손목을 가리키자 재욱은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11시…… 55분. 어, 이제 6분 됐어요.”

벌써 오늘 하루가 다 간 셈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다면 재욱이 여기에 서 있는 것이 납득이 안 됐다. 수현은 조금 전의 질문을 되풀이했다.

“지금 몇 신데 네가 여기 있어?”

“선배 또 전화 안 받던데? 핸드폰 아직 안 고쳤어요?”

“네가 적응해.”

“상의할 게 있어서요. 우리 과 자선 음악회 있잖아요. 거기 마지막 주자로 연주해 달라고 선배님들께 요청을 받았어요. 어, 그리고 레닌그라드 필하모니가 라흐마니노프를 협연해 달래요. 내달에 러시아로 오라고요.”

그동안 국내에서 논란이 계속되는 바람에 그를 초청하는 외부의 손길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사그라지자 하나둘씩 요청해 오는 모양이었다. 수현은 좋은 기회이니 수락하면 될 걸 왜 자신과 상의하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머릿속을 스치는 요한 때문에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요한 아니야.”

“아니에요?”

“응. 아니래. 뜬소문일지도 모르는데 현주가 너무 성급히 널 헷갈리게 한 건 아닌가 싶다.”

수현은 자신이 이렇게 태연자약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을 수 있는 사람인지 미처 몰랐다.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거짓말을 해 대고 있었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재욱을 위한 것이라 면죄부를 스스로 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와, 선물받은 기분이에요. 선배, 오늘 무슨 날인 줄 알아요?”

“무슨 날? 9월 6일. 이제 7일.”

“네, 7일.”

곰곰이 생각하던 수현은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네 생일!”

재욱은 씨익 웃었다.

“그리고 지금 59분이니까…….”

눈앞에 무언가 왔다 갔다. 수현은 너무 빠르게 지나간 일이라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시선이 마주친 채로 수 초가 무심히 흘렀다. 그가 저항하지 않자 재욱이 용기를 낸 모양인지 수현의 어깨를 부드럽게 당겨 안았다. 그러고는 입술에 입술을 맞췄다. 혀끝이 입술 사이를 가르고 매끄럽게 빨려 들어왔다. 치아 사이에서 마주친 까칠한 살덩이가 아주 잠깐 얽혔다.

이게 무슨…….

뒤늦게 정신을 차린 수현이 그의 정강이를 딱 걷어찼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허리를 수그리고 있는 그의 등을 미친 듯이 두들겼다. 재욱은 잠자코 맞고 있었다.

“윽……!”

“이건 성추행이야. 사과해.”

동시에 재욱의 정강이를 한 번 더 걷어찼다. 그를 구타하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는 한쪽 발을 통통거리며 뛰면서 수현의 주위를 맴돌았다.

기가 막혔다. 그리고 곰곰이 이 상황을 다시 떠올려 보고 있자니 울컥 화가 났다. 반대로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자신이 전혀 동의하지 않은 키스였다. 기미도, 예고도 없었다. 이쪽의 의사 따윈 관심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이건 명백히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핑계로 함부로 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재욱은 여태까지의 상황으로 자신과 요한이 얼마만큼 깊은 관계인지를 얼추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손쉽게 제압할 수 있는 그런 대상으로 여긴 건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서럽게 무너져 내렸다.

수현은 아연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재욱은 정자세로 마주 섰다. 좀 당황한 것 같았다.

“선배, 화났어요? 진짜 잘못했어요. 전 선배랑 가까워졌다고, 그렇게 생각을…… 그리고 가만히 계시길래 허락이라고 착각을……. 제가 돌았었나 봐요.”

“아, 그러니까 네가 착각하게끔 여지를 준 내가 잘못이다? 그래 보였겠네. 생각해 보니 지난번에도 그냥 뒀었지.”

수현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게 아니라…… 결국 다 변명이네요. 무조건 죄송해요.”

무슨 말로 해명해도 지금 수현의 귀엔 제대로 진의가 전달되지 않을 것이었다. 상대가 이쪽의 얘기를 들어 줄 생각조차 없다면 우선 잠자코 비난을 받아야 마땅했다. 그는 연신 사과했다.

“내가 승요한한테 대 주는 것 같으니까 좀만 덤비면 너한테도 줄 것 같디?”

“선배, 진정해요. 진짜 그런 거 아니에요. 일단 무릎부터 꿇고 빌게요. 걷어차도 돼요.”

“필요 없으니까 꺼져.”

“제발 빌게 해 주세요. 정말 치사한 건 아는데 저 오늘 생일이니까 한 번만. 잘못한 거 눈감아 달라는 거 아니에요. 빌게 해 달라는 거예요.”

가려는 수현을 막아선 재욱이 무릎부터 털썩 꿇었다. 수현은 골치 아프단 듯이 마른세수를 했다. 그의 말대로 치사한 방법이고, 또한 정말로 그냥 돌아설 수가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일단 걷어찼다. 상체를 발로 힘껏 걷어차자 쓰러지더니, 오뚝이처럼 다시 꿇어앉았다. 그 자세 그대로 수현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나 때문에 진로를 바꿨다느니 나처럼 되고 싶었다느니 책임감 느끼게 해 놓고, 결국은 나랑 이딴 짓이 하고 싶었던 거야?”

“전 다시 선배가 행복하게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그게 선배랑 잘해 보는 것보다 더 우선순위예요. 제 마음까지 곡해는 말아 주세요.”

행복하게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라. 결국 그도 요한처럼, 자신을 그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고 싶은 건 아닐까 하는 피해 의식이 들었다. 수현은 삶에서 배배 꼬인 막장을 거듭하며 자신의 마음도 함께 꼬여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 이딴 짓을 해 놓고 뚫린 입이라고.”

“아닌 건 아닌 거라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현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주저앉았다. 쪼그려 앉아서 재욱과 눈을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어 오는 모습이 어이가 없었다.

억지로 어떤 일을 당하는 건 늘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요한으로부터 학습했다. 그는 선택만큼은 수현이 하도록 공을 넘겨 오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막다른 골목까지 치이도록 극한으로 몰아갔다. 그게 강제와 무엇이 다른가. 하지만 아무리 돌이켜 봐도 요한을 무릎 꿇게 한 적은 없었다. 왜 요한은 자신에게 함부로 해도 용납하고, 재욱에게만 이렇듯 화를 내는지 몰랐다. 공평하게 화를 내야 맞는 일이었다.

요한. 그만 뭐가 그렇게 특별해서…….

“됐으니까 일어나.”

몸을 일으킨 수현은 재욱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재욱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선배 표정 아직 화나 있는데요.”

현주도 그렇고, 재욱도 그렇고 다들 자신의 표정에 어떤 감정이 쓰여 있는지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정작 자신은 볼 수 없을 때조차 말이다.

수현은 머리 위로 달이 뜬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날이 맑지 않아 전경이 탁했다.

“다신 이러지 마. 그땐 너 진짜 안 봐.”

그때, 툭 하고 가로등 하나가 더 점등됐다. 뒤이어 누군가 가까이 걸어오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다만 아주 조용한 발걸음이어서, 귀가 좋은 수현만 듣고 재욱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소리의 주인공은 두 사람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올수록 모습이 선명해졌다. 둘 모두에게 낯이 익었다. 수현은 긴장한 나머지 뻣뻣하게 몸이 굳었다.

요한이었다.

“뭘 했을까요.”

두 사람을 잠시간 지켜보던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마침 재욱이 반쯤 무릎을 곧게 세우던 차라, 그 모습이 꼭 한쪽 무릎을 꿇고 청혼하는 기사처럼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수현은 조금 전까지 그런 그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요한은 무릎 꿇은 재욱과, 그 앞에 서 있는 수현의 곁으로 다가서서 확인받듯 물었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착한 우리 형이 당신을 무릎 꿇고 빌게 했을까. 억지로 키스라도 했나?”

어떻게 해야 이 순간을 모면할 수 있을까. 수현은 선뜻 답을 쉽게 내릴 수 없었다. 이 수식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애초에 너무 쉽게 정답이 계산되기 때문이었다. 모면할 방법이란 건 없었다. 그는 다급히 요한을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요한이 손을 탁, 쳐 냈다.

“……!”

“그 손은 꽤.”

“…….”

“헤프네요?”

아연해진 수현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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